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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카와 온천을 출발해 벳푸로 가면서 후쿠오카와 교토의 윤동주 시비를 생각하다!
2023년 2월 24일 아소화산 북부에 자리한 구로카와 온천 에 도착해 관광안내센터인 카제노야 風の屋
(풍노옥) 로 들어가 시내 지도를 받은 다음에 3곳 노천 온천을 체험할수 있는 1,300엔 짜리
뉴토테가타 入湯手形 티켓을 구입해 강변 좌우에 자리한 골목을 걸으면서 온천 건물들을 구경합니다.
그러고는 차를 타고 10분 가량 좀 더 산속으로 야마미즈키 山みず木 온천으로 가는데 여긴 계곡에 흐르는
급류 옆에 자리한 외진 온천으로 여자는 실내탕등 3곳 온천을 할수 있으나 남자는 노천탕만 가능
한데.... 그러고는 야마미즈키 아래쪽에 위치한 미야마산소 (심산산장) 로 가서는 한번 더 온천을 즐깁니다.
그러고는 우리 일행 3대 7명 가족은 다시 렌터카 를 타고 좁은 산길을 내려와서는
다시 큰 도로로 나가서 벳푸 를 향해 달리는데.... 차창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도중에 유후인 온천 이 있으니 들를까 고민을 합니다.
그러는 중에 우리가 이틀전에 입국했던 후쿠오카 가 떠오르니.... 동아일보에 손효림기자가 쓴 “부끄러움과
미안함을 말하는 이들에게서 빛을 보다. 日 교수, 윤동주 詩碑(시비) 건립이 무산 되자 방한해
후원금 반환하고, 사죄에 후원자도 고개 숙여… 의미있는 실패, 새 싹 틔울 것” 이라는 기사가 떠오릅니다.
일본에는 윤동주 詩碑(시비) 가 3곳 에 있으니...... 윤 시인을 기리는 일본 시민들은
매년 2월이 되면 시인이 유학했던 도쿄(東京) 릿쿄대 와 교토
도시샤대학교 그리고 숨을 거둔 후쿠오카 (福岡) 등에서 추모 행사 를 연다고 합니다.
그 중에 윤동주가 공부했던 교토 도시샤 대학 에서 윤동주 와 정지용 2명의 시비를 보았었고,
그리고 윤동주가 체포되기전 마지막으로 동기생들과 함께 갔던 교토 남부 우지강변 에
일본 여성이 7,000여명의 서명 과 헌금을 모아 건립한 시비 이렇게 2곳을 본적이 있습니다.
“호텔 로비에서 부터 허리를 90도로 굽히며 ‘면목 없고 부끄럽습니다’ 라고 하셨어요. 마음이
아팠습니다. ” 신원한 순천향대 의대 명예교수(74) 는 지난달 12일 서울 마포구의 한
호텔에서 니시오카 겐지 (西岡健治·78) 후쿠오카현립대 명예교수를 만난 때를 떠올리며 말했다.
윤동주 시인 (1917∼1945)이 숨진 일본 규슈 옛 후쿠오카 형무소 인근에 시비(詩碑) 를 세우는 일을
2015년 부터 해 온 니시오카 교수 는 구청의 불허로 건립이 최종 무산되자... 한국인 30여명이
전한 1,000만원의 후원금을 돌려주려 한국을 찾은 것. 봉투에는신교수가 건넸던 5만 원짜리
스무장이 들어 있었으며 또 사죄 편지 와 시비 건립 추진 경과를 날짜별 로쓴 A4 용지 2장도 있었다.
신 교수는 “교수님이 한시간 늦었는데 알고 보니 서울 종로구, 인천 강화도에 사는
분에게 후원금을 각각 돌려주고 오던 길이었다” 라고 말했다.
장호병 수필가(71) 도 이튿날 대구로 온 니시오카 교수로 부터 후원금을 돌려
받았으니 장 작가가 대구 문인협회장이던 2017년 문인 10여명 과 전달한 것이었다.
“봉투에 9만 2000엔과 5만 원, 1만 원권으로 총 410만 원이 있었어요. 당시 100만 원을
엔화로 환전해 계좌로 보낸 분이 있었는데 이를 엔화 그대로 갖고 오신 거죠.”
도쿄 호세이대에서 일본 문학을 전공한 니시오카 교수 는 1981년 한국으로 와 연세대
국문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에서 10여 년 강의하다 1994년 일본으로 돌아갔다.
윤동주의 시 에 매료된 그는 연세대 교정에서 윤동주 시비를 보고 자신의 고향에서 시인이 운명
한 사실을 몰랐던 것을 참회했다. 이에 1994년 후쿠오카 에 ‘윤동주의 시를 읽는 모임’
을 만들었다. 참가자들은 매달 시를 낭송하고 시인의 기일인 2월 16일 매년 위령제 를 지낸다.
일본에는 윤동주가 다녔던 교토 도시샤대 와 하숙집 터(현 교토조형대), 친구들과 소풍 갔던 교토 인근 마을
우지에 시비 가 각각 있다. 니시오카 교수가 후쿠오카에 시비 를 세우려 한 건 시인이 마지막 머문
곳에 그가 존재한 사실을 기억하게 해야 식민 지배에 대한 진정한 반성 이 이뤄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후원자들은 8년간은 물론 지난달 3박 4일 한국을 방문한 데 든 비용 을 니시오카 교수가 부담한 것을 미안해
했다. 돈을 안 받으려 했지만 “저승에서 ‘한 점 부끄럼 없는 마음’ 으로 윤동주를 만나야 하지 않겠
느냐” 는 노 교수의 말에 더는 거절할 수 없었다. 니시오카 교수는 한국까지 온 데 대해 “후원금을
만나서 받았기 때문에 얼굴을 보고 돌려드려야 한다” 고 했다. 후원금을 활동비로 쓰지 않은 이유는 뭘까.
“시비가 건립됐다면 당당히 활동비를 정산 했겠지만, 이를 이루지 못했기에 돌려드리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교통비 등을 챙겨 주신 분도 있어 그동안 제가 쓴 돈은 많지
않습니다. 저는 윤동주를 알게 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산다는 게
뭔지 배웠습니다. 윤동주의 고국에는 ‘윤동주 정신’ 을 가진 분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됐고요.”
후원금을 돌려주는 이도, 받는 이도 가장 많이 한 말은 “부끄럽다, 미안하다” 였다. “한국인도
안 하는 일에 일본인이 헌신적으로 나서는 걸 보며 부끄러웠습니다.”(신 교수) “ 이 돈은
미안해서 그냥 쓸 수 없습니다. 시비 건립 추진 과정을 기록한 책을 출간하는 데 사용할 겁니다.”
시비는 세우지 못했지만, 의미있는 실패는 새로운 싹을 틔울 것이다. 부끄러움과 미안함을 아는 사람
들이 존재하는 한,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나는 윤동주 시비는 2번 보았으니 첫 번째는 교토에
지하철로 이마데가와(今出川) 역에 내리면 京都御所(경도어소) 맞은편에 도시샤대학교
(同志社大學) 에 들러서 윤동주시비(尹東柱 詩碑) 와 정지용시비(鄭芝溶 詩碑) 에 참배했습니다.
NHK 프로듀서 일본인 다고 기치로 (多胡吉郞) 씨는 30년 넘게 윤동주에 빠져 살았으니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맞아 일본에서 ‘생명의 시인· 윤동주’ 라는 책을 냈는데 그는 “군국주의
가 판치던 암흑기에 인간의 가장 순수한 영혼 을 유지하려 했던 이가 바로 윤동주” 라고 합니다.
“평이한 언어로 인생의 본질 을 파고드는 윤동주의 시가 시대, 언어, 국경을 넘어 일본인의 마음에
강하게 호소 하고 있다” 고 말하니, 다고씨는 1984년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일본어판이 출판되면서 윤동주에게 관심을 갖게 됐다는데 NHK 에서 윤동주 관련 방송
프로그램을 몇번이나 제안했지만 회사는 ‘누가 안다고 그러느냐’ 며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NHK 는 광복 50주년인 1995년 KBS와 함께 윤동주 다큐멘터리 를 제작
해서 방영했으니 다고 씨는 “그전에는 공동제작이라고 해도 민감해 하던 근현대사가
아닌 미술 등을 주제로 했으며 또 일본어판과 한국어판을 따로 만드는 것이 관행 이었다”며....
“근현대사를 정면으로 다루면서 버전도 하나로 통일해 양국에서 방영 한건 큰 성과” 라고
말했는데 3월 방영된 NHK 스페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윤동주· 일본 통치 하의
청춘과 죽음’ 은 이후 일본에서 윤동주 추모 움직임 을 이끌어내는 데 큰 역할을 했으니
그는 다큐멘터리 제작 과정에서 윤동주의 흔적 을 찾아 일본 전역을 돌아 다녔다고 합니다.
윤동주의 교토(京都) 도시샤(同志社) 대학 유학 시절을 추적해서는 그를 기억하는 동창생 3명 을
찾아냈으니 그중 기타지마 마리코 (北島萬里子) 씨의 앨범에서 윤동주의 마지막 사진 을
발견했다는데... 다고 씨는서울에 있는 윤동주의 유족들에게 사진을 보냈고, 윤동주와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일본 시인 우에모토 마사오 (上本正夫) 씨를 찾아 증언을 듣고 검증 했습니다.
2002년 영국에서 NHK 주재원으로 있을 때 사표를 내고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는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는 서시의 한 구절 이 그를 지탱해줬다는데 다고 씨는 “혼자서 영국의 옥탑방에서 살면서
공부를 계속했는데 그때 ‘육첩방은 남의 나라’ 라고 썼던 윤동주 마음을 더 잘 이해하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다고씨 는 최근까지 자료를 분석하고 증언을 모으며 윤동주 발자취 를 지속적으로 추적 했으니
이번에 낸 책에서 윤동주가 읽고 남긴 책의 밑줄과 메모를 분석 했고, 어떤 원고지를
썼는지, 연호를 서양식으로 썼는지 일본식으로 썼는지 등을 세밀하게 되짚었다고 합니다.
윤동주의 마지막 행적을 찾아 후쿠오카 형무소 의 당시 간수와 수감자 등을 인터뷰 했는데
다고씨는 “생체실험 가능성 을 염두에 두고 증언을 모았지만 결정적 단서는
얻지 못했다 ” 며 “다만 형무소는 식사가 부실하고 위생상태가 엉망이어서
‘사망 대기소’ 라 할 정도로 연이어 사람이 죽어나갔다. 병사 가능성도 있다” 고 말합니다.
그는 윤동주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를 1941년 11월 5∼ 20일의 2주 동안이라고 했는데 “시집 출간이
좌절된 윤동주가 시집 제목을 ‘병원’ 이라고 지었다가 이후 "서시" 를 쓰고 제목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로 고쳤는데..... 이 기간에 시인은 정신적 고뇌를 거친 뒤 영원한 생명을 향해 비상 했다” 라고 풀이했습니다.
두번째 시비는 기차로 교토 남부 우지(宇治) 시 에 가서 뵤도인 平等院(평등원) 절에서 강변을 따라 20분을
걸으면 윤동주와 도시샤 대학 동료 학생들이 사진을 찍었던 고풍스러운 인도교 그물 다리인 천게빈교
(天ケ瀕橋) 를 건너서 댐 쪽으로 내려가면 백홍교(白虹橋) 다리 아래에 윤동주 시비 가 세워져 있습니다.
윤동주 는 귀국 전인 1943년 친구들과 함께 우지강을 찾아 다리에서 마지막이된 사진 을
찍었는데 며칠후 일본 경찰에 체포 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죽으니 최근들어
마지막 사진의 사연이 알려지면서 우지에 윤동주 기념비를 세우자는 움직임 이 생겼습니다.
‘시인 윤동주 기념비 건립위원회’ 곤타니 노부코 (紺谷延子) 사무국장인데 그녀는 2002년부터
시를 읽고 꽃을 우지강에 던지는 추모행사 를 열었고 2009년 6,358명 서명 을 받아
교토부(府) 지사 에게 제출했으나 번번히 거절당하고 비를 세울 곳을 찾아 동분서주 합니다.
곤타니 사무국장 의 바람은 마침내 2016년 교토 남부 우지시 시즈가와(志津川)구 에서 우지 강변에 용지 제공
을 결정해 이뤄지게 됐는데, 구청장은 “세계 평화의 상징 이 됐으면 좋겠다” 며 기념비 건립을 받아들이니
시인의 탄생 100주년인 2017년 10월 ‘시인 윤동주 기억과 화해의 비’ 가 여기 우지강변에 세워졌다고 합니다.
윤동주 는 1942년 3월 일본 유학 을 떠나면서 의무적으로 창씨 개명을 해야 했으니 ‘윤(尹) 씨’
는 ‘히라누마(平沼) 군(君)’ 이 됐는데.... 개명을 앞두고 ‘참회록’ 이라는 시를 썼다고 합니다.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詩)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윤동주작 ‘쉽게 씌어진 시’ 에 나오는 싯귀입니다.)
이후 유학 시절을 관통한 감정은 ‘부끄러움’ 이었으니 교토(京都) 도시샤대 학우 였던
기타지마 마리코 (北島萬里子) 씨는 우연히 둘만 수업을 듣게 됐을 때....
윤 시인이 조용한 목소리로 “둘밖에 없는데 틀리면 부끄럽겠네요”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히라누마 군’ 이 ‘국민시인’ 이 된 사실을 몰랐던 기타지마 씨는 전후 50년을 맞아 KBS
와 함께 윤동주 다큐멘터리를 만들던 NHK 제작진 에 학창 시절 앨범을 찾아
윤시인의 생전 마지막 사진 을 제공했는데 1943년 우지(宇治) 강의 다리에서
찍은 사진 이었으니 이 사진이 우지강변에 윤동주 시비기 세워진 발단이 되었습니다.
니시오카 겐지 (西岡健治), 기타지마 마리코 (北島萬里子), 곤타니 노부코 (紺谷延子) 그리고
중국 룽징(龍井 용정) 에서 윤동주 시인의 무덤을 찾아낸 와세다대 교수 오무라 마스오
(大村益夫) 등 일본인들은 모두 시인의 ‘부끄러움’ 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이들 입니다.
윤동주 시비가 있는 도시샤대학 교수 야나기 무네요시 柳宗悅 (유종열)는 경복궁에 조선총독부
를 짓기 위해 광화문 철거 가 논의되었을 때 적극적으로 반대했으며..... 1924년
조선 미술관 을 설립했고 이조 도자기전람회 와 이조 미술전람회를 열었으며
‘조선과 예술’ 을 쓰면서 조선 풍속화를 俗畵(속화) 로 부르던 것을 "民畵(민화)" 로 바꾸었습니다.
야나기에게 조선 백자와 미를 알게 해준 아사카와 다쿠미 는 조선 공예를 좋아해 형 노리타카에게 조선 도자기
파편을 보내주는 한편 자신은 조선의 소반(밥상) 을 연구하며 조선 문화의 독자성을 주장했는데 2012년
아사카와 다쿠미의 일생을 그린 일본 영화 “백자의 사람 : 조선의 흙이 되다 ( 道〜白磁の人)” 가 개봉됐습니다.
다우치 지즈코 는 1919년 7살 때 목포로 이사를 와서 목포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목포 정명여학교에서
음악교사로 근무하던중 거지 대장 윤치호 가 세운 “공생원” 이란 고아원에서 봉사활동을 했으며
1938년 윤치호와 결혼했는데, 6.25때 인민군에 점령되자 친일파로 인민재판 에 회부되었으나
목포 시민들의 변호로 목숨을 구했지만.... 그 대신 인민군은 윤치호 에게 인민위원장직을 맡겼습니다.
목포가 수복된 뒤 윤치호는 국군에 체포되었지만 목포 시민들의 구명운동 덕에 석방될수 있었다는데,
얼마후 윤치호는 고아들에게 먹일 식량을 구하기 위해 광주에 갔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이제 지즈코(윤학자)는 고아들을 먹여 살리려고 혼자 동분서주하다가 1968년 폐암으로 죽자,
장례식은 목포시민장 으로 치러졌고 3만명 시민이 운집해 죽음을 애도했으니, 죽기전 장남 윤기에게
“우메보시가 다베타이 (매실장아찌가 먹고 싶어)” 라는 말을 한후 부터는 다시 일본말 을 썼다고 합니다.
목포 영사 와카마쓰 우사부로 는 고려말에 문익점이 중국 원나라에서 씨앗을 붓통에 숨겨 들여온
면화인 재래면 이 섬유가 짧아 방직 원료로 부적합한걸 보고 미국에서 육지면 씨앗을 들여와
목포 근처 여러곳의 기후를 조사했으니 그 중에 이순신 장군이 주둔했던 섬인 고하도 의 1903년
1년간 기후조건 을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맑음 264일, 구름 60일, 비 36일, 눈 6일로 기록했습니다.
육지면의 파종 부터 수확까지 기간인 5월 ∼10월 까지 목포 지방의 정오에 평균 기온이 21.7℃
이며 면화 성장기 인 7월은 27.8℃, 8월은 30.6℃, 9월은 29.4℃ 로 높아 최적의 조건을
갖춘지라 고하도 에서 면화를 재배했으며, 또 솥에다 바닷물을 넣고 장작으로 불을 때서
끓여 만드는 소금인 자염(煮鹽) 이 비싼걸 보고는 값싼 천일염(天日鹽) 을 대량으로 보급했습니다.
1905년 조선주둔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 가 포차 왕래에 지장을 주는등 교통에 방해되는 “남대문을 대포”
로 부수려고 하자 한성신보 사장이자 재경 일본 거류민단장 나카이 기타로 (中井喜太郞)가 반대하면서 철거
를 면하게 되었는데... 그는 남대문은 임진왜란때 가토 기요마사가 서울에 입성한 역사유적 이라고 했다던가요?
“구로다 후쿠미” 씨는 한국을 300번 이상 방문했으니 “한국은 내 숙명” 이라면서 “한복” 을 입기도
하는데, 1991년 꿈속에서 조선 청년을 만났으니..... “조선인인데 일본인 이름으로 죽은 것이
유감” 이라 말하더라나요? 수소문 끝에 1945년 5월 출격후 숨진 탁씨라고 확신해 2008년에
가미카제(神風) 자살특공대원 “탁경현씨 위령비” 건립을 추진하다가 주민들의 반대로 좌절했습니다.
구로다 씨는 탁씨의 고향인 경남 사천에 위령비 를 세우려고 시장의 동의를 받았지만 막판에 시민단체
가 “친일파 위령비는 안 된다” 라고 반발해 취소됐는데.... 그의 “영혼이 고향으로 돌아갈 장소
를 만들어주고 싶었을 뿐” 이라고 해명했으며.... 이듬해 경기도 용인의 법륜사로 옮겨 비석을
세웠으나 3년후 지상파 방송을 통해 알려지면서 논란이 됐으니 결국 “비석을 뽑아 눕혀야” 했습니다.
그 외에도 우에무라 다카시 (植村隆) 아사히(朝日) 신문 기자는 1991년 8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라고 공개적으로 증언한 김학순 (金學順·1924∼1997) 할머니와 함께 녹음
테이프를 첨부해 기자회견을 함으로써 세상에 처음으로 위안부 문제를 공론화 시켰으니....
해방후 46년이 되도록 한국의 정치인이나 언론인 누구도 관심조차 가지지 않아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종군 위안부 문제를 이 세상에 처음으로 알린 우에무라 다카시 (植村隆) 아사히
(朝日) 신문 기자는 그후 일본에서 매국노 라고 생명의 위협 까지 받았던 일을 생각하는
새에..... 우리 차는 유후인을 지나 벳푸 에 도착합니다. 나의홈페이지 : cafe.daum.net/baik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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