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어느 원로 트로트 가수가 갑자기 라틴어 제목이 붙은 노래를 들고 나와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노래의 제목은 ‘아모르 파티.’
흥겨운 리듬 때문에 제목의 파티를 party로 알았던 사람도 있었다고 하는데, 그 파티는 아니고 fati, 운명이라는 뜻이다.
아모르 파티(Amor fati)는 ‘너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의 라틴어로서 이 노래의 핵심은 이 한 줄에 담겨 있다.
“인생은 지금이야”
아모르 파티는 철학자 니체가 주창한 삶의 철학의 핵심이었다.
“인간의 위대함을 측정하는 나의 공식은 아모르 파티이다. 현재의 아무 것도 달라지기를 바라지 않으며, 과거도 미래도 영원도 바라지 않는다. 현재가 요구하는 것을 감내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니체는 이상주의를 배격했다. 그에게 현재는 견뎌야 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럼으로써만이 현재를 넘어서는 ‘초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현세의 고난을 견디면 내세에서 복을 받는다는 기독교 신앙은 니체에게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신은 죽었다.’
아모르 파티는 니체의 독창적인 생각은 아니다.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미래를 염려하지 말고 현재에 충실하라는 격언은 로마 시대에 이미 있었다. 호라티우스가 말한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다. 현재를 붙잡으라는 뜻이다.
이 말이 한국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계기는 아마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였던 것 같다. 영화에서 명문 입시고교의 교사 키팅으로 분장한 로빈 윌리엄스가 학생들에게 틀에 박힌 입시 공부에서 벗어나라는 취지에서 들려준 메시지였다.
(<죽은 시인의 사회>의 원제는 Dead Poets Society인데 여기서 society는 사회가 아니라 협회, 동호회, 클럽 정도의 뜻이다. 영화에서 키팅 선생이 학생들을 모아 과거 시인들의 시를 읽는 모임을 만드는데 이 모임의 이름이 영화 제목이다. 그러므로 영화 제목은 <옛 시 읽기 모임> 또는 <고시(古詩)동호회> 정도가 되어야겠지만, 오역으로 인해 오히려 인상적인 제목이 되었다.)
호라티우스가 말한 카르페 디엠의 원래 취지는 삶이 그리 길지 않으니 현재를 의미 있게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 자체도 사실은 당대에 널리 퍼져 있던 생각을 요약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그와 비슷한 생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발견되기 때문이다.
현재를 의미있게 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에 따라 카르페 디엠은 달리 해석된다.
노세노세 젊어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류의 해석을 따르면 카르페 디엠은 쾌락주의가 된다. 크게 틀린 것은 아니다. 나이가 들면 맛난 음식도 좋은 옷도 멋진 볼거리도 시들해진다.
그와 반대로 감각적 쾌락은 찰나에 그칠 뿐이니 그보다 더 깊은 의미를 찾아 거기에 매진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스토아 학파와 같은 금욕주의가 된다.
스토아 학파의 핵심은 자기 자신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런 생각에 따르면 쾌락에 빠지는 것은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니 피해야 한다. 그리고 현실이 주는 고난이나 불쾌함을 피할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견뎌내는 것이 본받을 자세가 된다.
니체의 아모르 파티는 카르페 디엠과 일맥상통하지만 거기에서 더 밀고 나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힘껏 포옹하고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카르페 디엠과 아모르 파티는 서양의 정신을 관통하는 하나의 중요한 메시지를 전제로 하고 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로마 제국의 장군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면 제국에서는 개선행진을 마련한다. 장군이 탄 마차가 가는 길 양 옆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장군의 머리 위에는 그가 신임하는 종이 든 월계수 면류관이 놓여 있다. 장군은 얼마나 뿌듯할 것인가.
그런데 그 종이 장군의 귀에 속삭인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세요! 그것도 한 번에 그치지 않고 행진이 진행되는 동안 수시로 속삭인다. 인간으로서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자만하지 말고 겸손하라는 메시지다.
로마 제국이 이러한 장치를 둔 이유는 개선장군이 우쭐하여 황제의 자리를 넘보지 않도록 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겠지만, 그 바탕에는 죽음 앞에 선 인간의 근본적인 한계에 대한 인식이 있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을 넘어선 존재인 신을 상정했고 신과 동급이 되려 하는 인간의 교만함을 경계했다. 이카루스, 오이디푸스, 파우스트, 모두 신에게 도전하려다가 파멸한 인간의 사례다.
니체가 신이 죽었다고 선언했다고 해서 신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19세기 쯤에 이르면 죽음을 초월한 신이라는 존재가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은 매우 약해져 있었다. 인간은 과거보다 자유로워졌지만 동시에 불안해했다. 과학이 아직 새로운 종교가 되기에는 미흡했기 때문이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나온 많은 문학작품과 예술작품은 이런 자유와 불안의 아슬아슬한 공존의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니체는 이 불안을 아모르 파티로 극복하려 했다.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로서의 나는 주어진 운명을 거역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거부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 사랑함으로써 신의 부재를 대신하고 초인이 되겠다는 것이 니체의 생각이었다. 니체가 실존주의자들의 우상이 된 이유다 (물론 니체는 우상이라는 말을 싫어했겠지만).
아모르 파티의 정신은 지금도 물론 유효하다. 어떻게 적용할 지는 각자에게 달렸겠지만.
- 저녁 단상
첫댓글 모 여고에서 공부에 지친 학생들이 그가수의 아모르파티를 떼창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노래를 처음 알았는데ㅡ
그 어느자리에서든 자기자신의 인생을 끌어안고 자기의 자존을 지켜가는게 인생이 아닌가싶어요ㆍ
쓴 작곡가가 가수에게 어떤 곡을 부르고 싶냐고 묻자 '인생찬가'를 부르고 싶다고 해서 나온 곡이 이 곡이라고 합니다.^^
@호중유천 네~많이 아시네요ㆍ감사합니다
너의 운명을 사랑하라~한번더 되새겨 봅니다ㆍ덕분에
어느 방향으든 후회는 조금씩 잊지 않을까요?
이번 부부동반 모임가보니 젊은날 몸 사리지않고 돈이 되는일에 힘쓴 사람은 조금만 걸어도 고관절이 고통스러워서 못걷고,
또 다른 친구는 오르막을 내려오기도 힘들어하고,
한가지씩의 지병은 다 있어서 약을 소지하고..
부족한 삶이지만 내 운명도 사랑하고,
가보고 싶은곳은 미루지 않고
가려고 노력하고 그렇게 살고있습니다.
철학책이나 인문학 한권을 읽는듯 심오한 글 잘봤습니다!
완벽한 인생이 있겠습니까. 불완전한 인생이기에 더 사랑한다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그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고요.ㅎㅎ
기왕 주어진 인생이니 최선을 다해 살아보자는 정도만 해도 훌륭하지요.
그 노래를 즐겨하지는 않지만, 큰 행사의 마지막 곡으로 나오는걸 몇번 봤죠.
김연자가수가 윤일상작곡자에게 인생노래를 만들어 달라고 했고, 나온 노래가 아모르파티 라고 하더군요.
삶에 대한 생각과 행동하는 방식이 끊임없이 바뀌고 변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정답이 뭔지 모르겠다.....가 답인것 같아요.
많은 시간을 살아온 내가 이렇게 아노미인데 10-20여년 살아온 내 아이들이 헷갈리고 방황하는게 당연한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내 아이들의 방황과 혼돈과 돌아돌아감을 응원하며, 자리를 잘 찾기를 기도합니다.
벗꽃이 흩날리는 이 봄밤에......
이 노래를 끝까지 들어본 적은 딱 한 번인데 인상에 꽤 깊이 남았습니다.^^
아이들은 각자의 답을 찾아가야겠지요. 어른은 길잡이가 되어 줄 뿐이고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오, 이런 우연의 일치가.ㅎㅎ
메멘토 모리. 얼마가 카톡 메시지였었는데.,. 여전히, 대다수의 한국인답게 즐기고 누릴 줄 모르고 열심히만 살고 있는 저를 만나게 하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노는 것도 너무 아끼면서 & 맘껏 누릴 고민을 치열하게 하니 노는 게 노는 게 아니게 되네요.ㅎ
삶이 유한하기에 그것을 어떻게 채우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해 이리 저리 궁리한 결과가 철학이라 할 수 있죠. 그것이 하나가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으니 각자 답을 찾아야 하는데, 그래서 현대인은 삶이 단순했던 시절보다 더 고단하기도 한 것 같습니다. 자유의 대가랄까요.ㅎㅎ
또 하나의 상식을 넓혀 갑니다. 감사 합니다.
주말 잘 보내십시오.
제 네이버쪽 까페 아이디가 까르페디엠 하고 메멘토모리 예요. ^^ 제 인생 모토이자 하루하루를 견디게 해주는 힘이되는 말이죠. 저는 신을 믿기에 하루 하루 신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그리고 마지막에 내가 갈 곳이 어디인지 기억하기 위해 매일 이 말들을 기억하면서 살아가요. 같은 문구라도 믿지않는 사람들은 다르게 해석되겠죠..
이 구절을 아이디나 모토로 삼고 있는 분들이 의외로 많군요. 위 문구들의 공통점은 현재에 집중하라는 메세지지요. 현대의 많은 심리학자, 상담가, 또는 법륜스님 같은 분들이 주는 메세지도 대동소이한 걸 보면 여기에 삶의 지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왜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느냐는 생각해볼 문제지만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네. 주말 잘 보내십시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글입니다.
죽음은 현실의 삶과 연결되어 있다.
죽음을 종말이 아닌 한계 상황으로 설정하고 초월의 의미를 강조한 하이데거 철학도 의미하는바가 큽니다.
오래 전 <존재와 시간>을 읽다가 너무 어려워서 중간에 포기했습니다. ㅎㅎ 그래서 대략 무슨 얘기를 하는 지는 알지만 여전히 아리송한 부분이 많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요즘 사이버 세계가 발달하면서 사이버 공간의 자아와 현실의 자아가 점차 분리되는 듯한 양상을 보며 하이데거가 말한 실존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볼 때도 있네요.
좋은글 정독했어요.. 항상 좋은 내용을 참 솜씨있게 써주셔서 부럽기도 하면서, 도움이 됩니다.
이 구절들은 아무래도 젊은 시절보다는 나이가 들어야 실감하게 되는데, 어제 문득 이 구절이 떠올라 생각을 간단히 정리해봤습니다. 주말 잘 보내십시오.
저도 가슴에 담아둔 명언들이에요.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대한 걱정을 붙들고 살아도 해결되는 건 없더라고요.
현실에 충실하고 갖은 것에 감사할 것..살다보니 깨달은 것들인데
우리 선조들도 같은 생각을 하며 살았다는게 참 신기해요.^^
교회목사님들도 이런 말씀을 좀 해주심 얼마나 좋을까요.
울엄마가 알고 갔음 좋았을 말들.
천국에 대한 소망만 갖고 살다 가셨네요.
그런 점에서 우리 어머니도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크게 보면 기복신앙을 완전히 떨치지 못한 한국식 기독교의 피해자들이죠. 서양 기독교에도 그런 경향이 짙은 곳이 있고 이슬람 극단주의도 그런 점이 강하지만요.
현재는 견뎌야할 대상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라~!! 항상되세기면서 살아야되겟습니다 좋은글 감사요~^^
네 좋은 하루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