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손에 의해 소리를 내는 악기가 아니었다. 언제든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누구도 시도한 적 없는 선택을 했다. 화려한 인기를 뒤로한 채 학교와 병원에서 재능기부하는 그 남자 이야기.
2004년 데뷔하자마자 그 해 신인상을 휩쓸고 골든 디스크 시상식 3년 연속 대상을 수상한 남성 3인조 그룹 SG워너비. 이 중 제일 어리지만 성숙한 목소리로 큰 사랑을 받아온 김진호는 지난 몇 년간 다른 멤버와 달리 예능 출연과 솔로 활동 없는 시간을 보냈다. 가수에겐 너무나 긴 3년이란 공백기를 음악으로만 보내온 그는 올 초 그룹 데뷔 9년 만에 첫 솔로 앨범을 발매했다. 이 역시 방송출연 없이 음반만을 낸 그가 병원과 대학교 축제에서 무료로 공연을 펼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에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돈과 인기를 내려놓은 아이돌스타 3년의 공백기를 보내고 올해 초 데뷔 9년 만에 첫 솔로앨범을 발매했어요.쉬면서 월세로 저만의 작업실을 마련했어요. (웃음) 그곳에서 작사 작곡 공부도 하고 여행도 다니며 3년이란 시간을 보냈어요. 그룹 멤버인 (김)용준이 (이)석훈이 형이 군대에 가니 자연스레 스스로의 앨범을 만들기 위한 시간을 보냈어요. 실은 긴 시간 준비한 솔로 앨범에 부담감은 많이 없었어요. 그룹 활동 때는 좋은 작곡가에게 곡을 받아 우리 이야기는 아니지만 경험하지 못한 감정을 노래에 대입해 잘 전달시키려 했던 그룹 시절이 더 부담이었죠. 이젠 저만의 이야기를 담은 앨범이어서 이야기를 하듯 노래를 만들어보니 진정성이 자라나 모든 상황이 편안해 졌어요.
큰 인기를 얻었던 SG워너비 시절과 지금을 비교하면 차이가 뭔가요 그 때는 뜨거워지려고 노력했던 시절이었죠. 마냥 가수가 하고 싶어서 눈앞의 불평과 불만도 볼 수 없었죠. 그러다 큰 인기를 얻으며 우리로 인해 파생되는 돈과 비즈니스를 옆에서 바라보니 그 좋았던 노래가 일로 느껴지더니 뜨거워지질 못했어요. 그걸 깨닫는 순간 가수가 된 저는 음악 본질의 진실성을 되찾기 위해 속으로 발버둥 쳤죠. ? ? 그래서 시작한 게 현재의 재능기부 활동인가요 예. 맞습니다. 큰 기획사에 지원을 받다가 혼자가 되는 연예인들은 너무 쉽게 무너져요. 돈과 명예를 얻는 것 같지만 가장 큰 스스로 날 수 있는 날개 근육을 잃어요. 그래서 전 이 근육을 다시 살리기 위해 저를 원하는 대중을 찾아다니며 돈을 받지 않고 노래를 들려 드리는 재능 기부를 시작한 거죠. (그가 말한 재능 기부를 펼치는 장소는 전국의 대학교와 병원. 학교와 병원 공통점이 없어 보이지만 김진호만의 용기 있는 선택이었고 이번 인터뷰에서 어디서도 밝히지 않은 가슴이 시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얼마 전 1인 기획사를 설립했는데 남다른 계기가 있나요 일 부 기획사에선 대학교 행사 요청에 섭외비로 수 천만 원이란 엄청난 금액을 요구 해요. 그 와중에 학교와 기획사를 연결해주는 브로커들 역시 중간에서 천만 원 이상을 가로채는 일이 비일비재했어요. 그 엄청난 돈으로 차라리 더 많은 학생에게 장학금을 줄 수 있잖아요.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룹 활동을 하며 이런 일들을 기획사에 소속된 가수로선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죠. 그래서 솔로로 활동하면 가장 먼저 수 많은 대학생을 위해 돈을 받지 않고 제 목소리가 필요한 곳이라면 찾아가 노래를 부르잔 결심을 했어요. 이런 결심은 누군가의 제약이 있으면 결코 실행할 수 없어서 얼마 전 1인 기획사를 만들었습니다.
어떤 식으로 재능기부를 펼치고 있나요 주 로 학과 축제와 동아리 축제를 많이 다녀요. 따로 신청서를 받는 게 아니라 제 페이스북에 쪽지로 사연을 보내주신 분 중 진실한 사연을 보내준 분들의 행사에 참석해 노래를 불러요. 이러면 보통 일과가 자정이 지나 집에 도착하면 새벽 4~5시까지 그날 온 사연을 다 읽고 모든 분께 최대한 답장을 해드리려 노력하고 있어요. (대학교 행사에 가면 오히려 자신이 젊은 에너지를 받고 오는 거라 항상 기쁜 마음으로 찾아가 선물을 받고 오는 것 마냥 기쁘단 말을 했다. 그리고 다른 재능 기부의 장소인 병원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었다.)
특별히 학교 외에 병원으로도 공연을 다니는 이유가 있다던데요 중 학교 2학년 때 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는 제가 재능기부를 하게 된데 가장 큰 기준을 남겨주고 가신 분이셨어요. 생전에 아버지는 좋게 말하면 베풀기 좋아하셨고 나쁘게 말하면 없는 것도 만들어 퍼주시는 분이셨죠. 아마 남에게 베푸는데 아낌없는 성격을 저도 물려받아 노래를 부르는 것 같아요. 그래서 아버지가 오랜 시간 투병하신 병원에 애착이 갔고 투병생활을 하는 환자와 가족들을 위해 전국의 병원에 다니며 공연을 하고 있어요.
사랑 노래도 좋지만 모두가 공감하는 곡을 쓰고 부를 거에요.
주변 사람을 위해 부르는 노래 그 는 20대에 또 다른 아픔을 맞이하게 된다. 얼마 전 화제가 된 한 공중파 노래 경연 방송에서 그가 부른 SG워너비의 원년 멤버 채동하를 위해 부른 추모곡 ‘살다가’를 방송에서 불러 큰 화제를 일으켰다. SG워너비가 최고의 인기를 달리고 있던 2008년. 동료 채동하는 더 멋진 가수로서의 역량을 대중에게 선보이기 위해 탈퇴를 결심했다. 그러나 3년 뒤인 2011년 그는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지난 몇 년간 방송출연이 없다가 얼마 전 노래경연 프로그램에 출연을 했어요. KBS의 ‘불후의 명곡’의 출연이유는 제겐 ‘의무’였어요. 아직도 동하 형이 세상을 떠난 걸 모르는 분들이 많아서 놀랐어요. 대중 앞에서 노래를 부른 한 남자가 이렇게 쉽게 사라지는 게 동생으로서 가슴 먹먹했죠.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잊힌 가수 채동하를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하려고 방송 무대에 오른거죠. (세 상을 떠나는 마지막까지 음악이 흘러나오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던 음악이 전부였던 故 채동하와 함께 불렀던 노래 ‘살다가’를 홀로 부른 그의 영상은 한동안 상위 검색어에 랭크 되며 대중의 심금을 울릴 감동을 선사했다. 그 날 이후 다시 김진호는 방송 복귀를 하는 듯 보였지만 전처럼 모든 방송 섭외를 거절했다.)
꾸며진 연출에 맞추는 걸 못해서 방송을 못 해요. 그때 방송에서 그룹 시절의 노래 ‘살다가’를 불렀는데 동하 형을 위한 출연 결정이었습니다. 제 방송이 나가고 포털 사이트 검색어 1위에 채동하 2위는 SG워너비가 올랐어요. 동하 형이 다시 각인되고 그 뒤로 SG워너비가 재조명되는 순간 하늘에 있는 동하형을 위해 무언가 해준 것 같아서 뿌듯해요. 그런 의미에서 방송 출연은 딱 한 번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가끔 과거의 영광이 그립지 않은가요 절대요. 지면을 빌어 이 말을 후배 가수들에게 전하고 싶어요. 누군가 만들어준 멋진 모래성에 들어가서 대중의 관심을 받는 시절이 영원할 거로 생각하지 마세요. 그건 말 그대로 모래성이에요. 약간의 파도에도 무너지기 마련이에요. 이 성에서 벗어나 시간이 걸려도 차근차근 자기만의 성을 만들면 그 성은 어떤 고난에도 무너지지 않아요. 저 역시 모래성에 지내봤기에 지금이 더 행복해요. 제가 건축한 김진호만의 성을 지켜 줄 지난 1년간 만나온 셀 수 없는 팬분들이 이젠 제 곁에 있으니까요. (웃음)
어떤 가수로 살고 싶나요 생명력이 있는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되고 싶어요. 사랑 노래도 좋지만 모두가 공감하는 곡을 쓰고 부를 거에요. 얼 마 뒤 경기도의 한 대학교의 학과 행사에서 노래를 부르는 김진호를 다시 만났다. “이 학교에 사회복지학과 생긴 이후로 한 번도 가수의 공연이 없었대요. 한 학생이 이런 사연을 긴 장문의 글로 제게 쪽지를 보냈는데 진심으로 저를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가야죠.”(웃음) 김진호는 내일 단독 부산 콘서트가 있음에도 별 다른 음향시설도 없는 무대와 수십 명의 관객 앞이었지만 수 천 명의 관객이 모인 공연장에 온 것처럼 부푼 모습을 보였다.
무대에 오른 그는 마이크를 들었다. “여러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들어주세요.” 마음의 이끌림으로 전국을 돌며 목소리를 전파하는 가수 김진호의 행보는 인기에 휘둘리는 기존 아이돌 세계와는 다른 느낌이 전해진다. 그가 그토록 바라는 생명력 있는 노래만 부르며 살 것 같은.
화려한 음향장치와 수많은 사람이 없어도 자신의 목소리를 원하는 곳은 언제나 김진호에겐 최고의 무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