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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내일을 향해 쏴라' (1969)
2008 - 미국의 영화배우 폴 뉴먼(Newman, Paul) 사망
뉴먼 [Newman, Paul, 1925.1.26~2008.9.26]
미‘은막의 전설’ 폴 뉴먼 별세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 등으로 유명한 미국의 명배우 폴 뉴먼이 26일(현지시간) 오랜 암투병 끝에 코네티컷주 웨스트포트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향년 83세.
할리우드 정상의 배우로 50년 이상 활동했던 뉴먼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두 차례나 수상했고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과 베를린영화제 연기자상, 2006년 미국배우 조합상 TV영화, 미니시리즈부문 남자연기상, 2006년 제63회 골든글로브시상식 TV부문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는 등 영화와 TV를 넘나들며 맹활약을 펼쳐온 연기파 배우다.
뉴먼은 '내일을 향해 쏴라' 외에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 '컬러 오브 머니' '스팅' 등 숱한 화제작을 남겼으며, 배우이자 아내인 조앤 우드워드와 각종 영화에 함께 출연해 남다른 부부애를 과시하기도 했다.
뉴먼은 또 1969년 영화 '위닝'을 촬영하면서 처음 접한 자동차 경주에 매력을 느껴 이후 자동차 경주광의 면모를 종종 과시했으며, 말년에는 '뉴먼즈 오운' '책임지는 부자'라는 회사와 단체를 잇따라 결성해 자선사업에도 힘을 쏟아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실천했다는 평가도 받았다.
최근 몇년 동안 암으로 투병해 온 고인은 작년 6월 "기억력과 자신감, 창의력이 점점 퇴화되고 있어 연기는 이제 그만둬야 한다"며 은퇴를 선언해 화제를 모았었다.
영국 BBC는 뉴먼의 사망소식이 전해지자 할리우드는 물론 세계 각국에서 애도의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고인의 오랜 동료이자 친구인 로버트 레드포드는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면서 "나는 진정한 친구 한 명을 잃었다"고 슬퍼했다.
영화배우 케빈 스페이시는 "자신의 성공을 다른 사람을 돕는데 이용했던 폴 뉴먼은 모든 연기자들의 귀감"이라고 말했으며, 조지 클루니도 "뉴먼은 연기자로서만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가 따라가기 힘든 기준을 세워놨다"며 애도의 뜻을 표했다. (워싱턴=연합뉴스) /한겨레 2008-09-28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12700.html
- 공중전화 카드
2002 - `개구리소년` 유골, 대구 와룡산서 발견
지난 1991년 "개구리를 잡으러 간다"며 마을 뒷산으로 놀러갔다 실종됐던 `개구리 소년` 5명의 유골과 신발 등 유류품이 실종 11년 만인 9월26일 오전11시30분쯤 발견됐다.
유골이 발견된 곳은 `개구리 소년`들이 놀러갔던 와룡산 서남쪽 계곡으로부터 2.5km 지점으로 이들이 살았던 달서구 이곡동 집과 다녔던 성서초등학교로부터는 3.5km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경찰은 당초 산 속에서 길을 잃은 소년들이 저체온(低體溫)으로 자연사했을 것으로 추정했으나, 추가 발굴 과정에서 총탄과 소매가 매듭 지어진 옷가지 등이 발견되고 유골의 두개골에서 함몰 흔적과 구멍 등이 발견됨에 따라 타살 가능성에도 비중을 두고 조사했다. 유골 복원 과정에서도 상당수의 치아와 머리카락 등이 발견되지 않아 소년들이 대구 와룡산의 발굴지점이 아닌 다른 곳에서 숨진 뒤 옮겨졌을 가능성도 제기됐다.
유해 감식을 맡아온 경북대 법의학팀이 3명의 두개골에서 둔기로 맞은 수십 곳의 外傷(외상) 흔적이 발견됐다고 발표함으로써 타살로 가닥이 잡혀가는 듯 했지만, 워낙 오랜 세월이 지난터라 사건의 전말이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조선
- 우리별 1호
1993 - 인공위성 '우리별 2호' 발사
1993년 9월 26일 오전 10시 45분(한국시간) 한국 국적의 2번째 인공위성인 우리별 2호가 아리안 로켓에 실려 발사되었다. 발사는 남아메리카 프랑스령 기아나에 있는 쿠루 우주 센터에서 이루어졌다. 우리별 2호는 과학실험용 소형 인공위성으로, 중량 50㎏, 크기 35.2×35.6×67.0㎤이며, 지상 800㎞ 상공에서 적도와의 경사각 98.6°를 갖는 태양동기궤도를 돌도록 설계되었다. 차세대 소형위성을 위한 32비트 컴퓨터(KASCOM), 지상에서 송신한 정보를 저장했다가 지구상의 원하는 곳에 보내주는 축적 및 전송 통신실험장치(DSFCE), 해상도 2㎞의 컬러 전하결합소자(CCD)와 해상도 200m의 흑백 CCD를 갖춘 지구표면 촬영장치(CEIS), 여러 가지 정보를 음성으로 방송할 수 있는 고속 변복조 실험장치(DSPE), 우주환경을 관측하는 저에너지 입자 검출기(LEED), 적외선 영상 시스템 실험을 위한 적외선감지기 실험장치(IREX) 등 6개의 실험장비들이 탑재되어 있다. 우리별 2호는 우리별 1호 개발을 통해 습득된 기술을 바탕으로 순수 국내 연구진에 의해 개발되었다. 가능한 한 많은 국산부품을 사용한다는 원칙하에 탑재장치도 국내 개발제품을 사용했다. 우리별 2호 개발로 국내 소형위성 개발 관련 기술이 진일보했다. /브리태니커
1993 - 캄보디아 주둔 UN군 철수
캄보디아에 주둔했던 유엔 평화유지군이 1993년 오늘 철수한다.
유엔 평화유지군은 2년 전인 1991년 10월, 13년에 걸친 캄보디아 내전이 종식되자 이 나라에 파견됐었다.
평화유지군은 과도행정기구를 구성하고 각 정파의 병력감축과 질서유지 활동을 벌였다.
평화유지군은 넉 달 전인 5월에 치러진 총선으로 두 개 정파가 연정을 실시하고 시아누크를 국왕으로 하는 입헌군주국이 성립되자 평화유지군이 캄보디아를 떠나게 됐다.
캄보디아에 머물렀던 유엔 평화유지군은 모두 2만2천여 명으로 사상 최대 규모였다. /YTN
- 1997년, 홍콩 반환 기념
1984 - 영국과 중국, 홍콩 반환협정에 가조인
1984년 오늘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
영국과 중국이 홍콩의 주권을 중국에 반환한다는 내용의 역사적인 합의문서에 가조인한다.
두 나라가 2년 간에 걸쳐 줄다리기 협상을 벌인 끝에 성과를 보게 됐다.
영국은 이날 공동성명을 통해 1997년 7월 1일 홍콩 전역의 주권을 중국에 반환하기로 약속한다.
같은 해 12월 10일 대처 영국 총리가 중국을 방문해 이 협정을 정식 조인한다.
아편전쟁에서 패한 청나라가 1842년 난징조약을 통해 영국에 양도했던 홍콩!
반환협정이 맺어진 지 13년 만인 1997년 155년 만에 중국 영토로 복귀한다. /YTN
1968 - 몽고메리(Montgomery, Bernard Law) 장군, 전쟁문서 기증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 사령관을 지낸 몽고메리가 1968년 오늘 전쟁관련 문서를 대영제국 박물관에 기증한다.
몽고메리는 20여 년 동안 전쟁문서들을 보관해오다 여러 차례 도둑을 맞고 남은 문서들을 기증하기로 했다.
몽고메리 장군은 1942년 이집트에서 롬멜이 이끄는 독일군을 몰아내 전쟁 영웅으로 떠올랐고 1944년 6월에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해 제2차 대전 승리의 발판을 마련했다. /YTN
1963 - 콩고민주공화국 총사령관 군사훈련
콩고민주공화국의 군 총사령관 모부투!
1963년 오늘 이스라엘에서의 훈련 마지막 날, 낙하산 훈련을 받는다.
모부투는 2개 대대를 이끌고 이스라엘과의 공동 군사훈련에 참가했다.
훈련이 끝난 뒤 이스라엘 총리로부터 훈장을 받고 귀국한다.
모부투는 2년 뒤 쿠데타를 일으켜 카사부부 대통령을 몰아내고 스스로 대통령에 취임해 나라 이름을 '자이르'로 고친다.
이후 30여 년 동안 철권통치하지만 1997년 5월 반정부군에게 쫓겨나 모로코로 망명했다가 같은 해 9월 숨진다.
그의 사망 후 국명도 '콩고민주공화국'으로 회복된다. /YTN
1960 - 케네디-닉슨, 역사상 최초로 대통령후보 TV 토론
1960년 9월 26일 존 F. 케네디와 리처드 M. 닉슨은 대통령 선거전의 일환으로 제1회 텔레비전 토론회를 가졌다. 1960년 1월 대통령 입후보를 공식 선언한 케네디는 미네소타 주의 휴버트 H. 험프리 상원의원과 텍사스 주의 린던 B. 존슨 상원의원을 상대로 민주당 대통령후보 지명전에 나섰다. 그는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자 존슨을 러닝 메이트로 선택해 민주당의 정·부통령 후보의 진용을 강화했다. 본격적으로 대통령 선거전이 시작된 이래 케네디와 닉슨 사이에 4차례에 걸쳐 벌어진 텔레비전 토론회는 선거전에서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 이 토론회는 8,500만 내지 1억 2,000만의 미국민들이 1차례 또는 그 이상 시청했을 것으로 추정될 만큼 국민들의 열띤 관심을 모았다. 토론회가 모두 끝난 뒤 두 후보 모두 국정의 문제점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평가가 내려졌으나, 상대적으로 뛰어난 용모와 좋은 인상을 내세운 케네디 후보측이 시청자들로부터 특별한 호감을 얻었다. 케네디는 총 11만 8,550표 차이로 공화당 대통령후보인 닉슨을 가까스로 누르고, 미국 역사상 최연소이자 최초의 로마 가톨릭교도로서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브리태니커
1950 - 국군, 서울 탈환
미국 제1해병사단과 제7사단으로 이루어진 제10군단 및 5000명에 달하는 한국해병대가 9월 15일 새벽 인천 월미도(月尾島)에 기습상륙, 다음날 인천을 탈환하였다. 미국 해병대와 한국군은 서울탈환을 위하여 동진하였고, 미국 제7사단은 남진하여 북상하는 유엔군과 오산에서 합류함으로써 북한군은 남북으로 분단되어 중부 및 동부산악지대로 패주하였다. 인천에 상륙한 유엔군은 26일 서울로 진입하여, 28일에는 빼앗긴 지 3개월 만에 서울을 수복하였으며, 동해안과 서해안을 따라 계속 북상하였다. 30일 유엔군총사령관 맥아더는 북한군총사령관 김일성에게 <더 이상의 유혈과 파괴를 없애기 위해 적대행위를 중지하라>는 항복권고문을 보냈으나 김일성은 이를 거부하고, 단지 남한지역에 있는 북한군의 전면 퇴각만을 명령하였다. 따라서 같은 날 유엔군사령부는 전장병에게 38선을 돌파하여 북진할 것을 명령하였다.
1937 - 미국 흑인 블루스의 여왕 베시 스미스(Smith, Bessie) 사망
스미스 [Smith, Bessie, 1894.4.15~1937.9.26]
미국의 여류 흑인 블루스가수. 테네시주 채터누거 출생. 소녀시절 이름난 블루스가수 마 레이니(Ma Rainey)에게 사사하였다.
수년간 밤의 술집, 조그만 극장 등에서 노래를 불러오다가 뒤에 컬럼비아레코드사의 대표이며 피아니스트 ·작곡가인 C.윌리엄스에게 발견되어 1923년 2월 처음으로 레코드취입을 하게 되었다.
그 뒤 10년간 160곡을 취입하였는데, 이는 재즈사상 귀중한 블루스보컬의 자료로 평가된다.
1920년대 중기에는 ‘블루스의 여왕(The Empress of the Blues)’으로 불렸으며, 풍부한 성량과 소박한 창법은 후진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37년 지방 순회 중 교통사고로 죽었다.
전체 미국 흑인세대의 희망과 좌절을 노래로 표현한 그녀는 대담하고 자신만만하여 마이크 사용을 경멸하였으며, 뛰어난 미모의 소유자이기도 하였다.
그녀의 당당한 체격과 미모는 《세인트루이스 블루스:St. Louis Blues》(1927)라는 영화에 담겨 있으나, 한때 그 리얼리즘 때문에 상영 금지되기도 하였으며, 현재 그 필름은 뉴욕근대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녀의 비참한 사고사는 E.앨비의 희곡 《베시 스미스의 죽음:The Death of Bessie Smith》(1960)의 주제이기도 하다. 1970년 이후 그녀의 레코드는 다시 각광을 받았다. /naver
1907 - 뉴질랜드와 뉴펀들랜드가 영국의 자치령이 되다.
뉴질랜드를 처음으로 찾은 유럽인은 1642년 남섬 서해안에 도착한 네덜란드의 A.타스만이었다. 그러나 타스만은 상륙하지 않고 떠났으며, 그후 1769∼1777년 J.쿡이 여러 차례 두 섬을 답사하였다. 이어 1814년 런던에서 선교사가 와서 그리스도교 교화를 시작하였다. 그 무렵 이곳은 뉴사우스웨일스(오스트레일리아)의 식민지였으며, 고래와 바다표범 잡이의 기지로 이용되고 있었다. 1840년 W.홉슨경(卿)과 마오리족 사이에 와이탕기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마오리족은 보호를 받는 대가로 영국 국왕의 주권을 인정하였다. 이해부터 뉴질랜드회사, 오타고협회, 캔터베리협회 등을 통하여 각지에 이민이 시작되었으며, 1882년의 냉장선 취항으로 오지에서도 농목업이 발전하였다.
그러나 영국의 식민이 진행됨에 따라서 마오리족과 파케하(백인을 의미하는 마오리어)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으며(그 원인은 주로 토지 매매에 있었다), 1843~1870년까지 2회에 걸쳐 마오리전쟁이 일어났다. 이에 대하여 그레이 지사(知事)는 마오리의 반영(反英)감정 완화에 크게 힘썼고, 식민지 회의에 마오리족 대표를 참가시켜 영국인과 동등하게 대우하기로 했기 때문에, 1870년부터는 인종분쟁이 끝나고 마오리족의 영국화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마오리와의 공존관계는 다른 식민지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현명한 해결방법이어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후 뉴질랜드는 개척이 진전됨에 따라 1907년 영국의 자치국이 되었다가 1947년 독립하였다. /naver
1898 - 미국의 대중적인 작곡가 거슈윈(Gershwin, George) 출생
거슈윈 [Gershwin, George, 1898.9.26~1937.7.11]
뉴욕에서 태어났다. 대중적인 경음악을 작곡하면서 재즈기교에 의한 수준 높은 관현악곡과 오페라를 창작하여 새로운 측면을 개척하였다. 소년시절 개인교사에게 피아노와 화성학을 배우고 16세 때 고등학교를 중퇴, 음악출판사의 피아니스트로서 작곡을 시작하였다. 19세 때부터는 극장 전속 피아니스트로 근무하였으며, 21세 때에는 《스와니》를 발표하여 히트하였다.
이후 계속해서 인기를 모아 리뷰나 쇼의 일류 작곡가가 되었으며, 1924년(26세) 폴 화이트먼이 위촉한 재즈의 기법을 따른 피아노협주곡 《랩소디 인 블루》를 내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고전음악과 경음악을 조화시켜 관현악곡 《파리의 미국인》(1928) 《피아노협주곡 F장조》(1925) 및 오페라 《포기와 베스》(1935) 등의 본격적인 작품 외에도 많은 통속 희가극과 대중음악, 영화음악을 작곡하였는데 뇌종양이 발병해 3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naver
1897 - 로마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 출생
바오로 6세 [Paulus VI, 1897.9.26~1978.8.6]
본명 Giovanni Battista Montini. 이탈리아의 브레시아 출생. 1920년 주교(主敎)가 된 후 교황청에서 근무하다가, 피우스(비오) 12세 때 교황청의 국무장관이 되고, 이어 밀라노의 대주교(大主敎)가 되었다. 1963년 요한 23세의 뒤를 이어 교황이 되어, 전임자가 소집했던 제2차 바티칸공의회(公議會)를 성공적으로 종결지음으로써, 과감한 가톨릭의 쇄신을 단행하였다.
특히 다른 그리스도교회(프로테스탄트 등), 다른 종교, 무신앙자와의 화해·접촉에 주력하였으며, 종래의 관습을 무시하고 성지순례(聖地巡禮)와 봄베이 방문 등 해외여행도 하였다. 평화와 국제간의 문제에 큰 관심을 가졌으며, 1965년에는 뉴욕의 유엔 본부에서 강연한 일도 있다. /naver
엘리엇 [Eliot, T(homas) S(tearns), 1888.9.26~1965.1.4]
미국의 미주리주(州) 세인트루이스 출생. 스미스 아카데미를 거쳐 1906년 하버드대학교에 들어가 철학을 전공하는 한편 프랑스문학을 공부하고 그 상징시(象徵詩)에 깊은 관심을 가졌는데, 그 영향은 후에 그의 시작품에 나타나게 된다. 그 밖에도 17세기 영국의 형이상학시(形而上學詩)와 엘리자베스조(朝) 연극을 연구하였다. 하버드대학교 졸업 후 한때 프랑스의 소르본대학에 유학, 이어 1914년에 독일에 유학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영국에 피란,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연구하였으며, 1915년에 처음으로 지상(誌上)에 시를 발표하였다.
그후에도 계속 영국에 머물며 은행원으로 근무하는 한편 시작(詩作)에 몰두, 1917년에 처녀시집 《프루프록 및 그 밖의 관찰 Prufrock and Other Observation》을 냈고, 이어 1920년에는 처녀평론집 《성스러운 숲 The Sacred Wood》을 내놓아 새로운 문예평론의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그의 명성을 높여 준 것은 1922년에 그가 편집·창간한 문화평론지 《크라이티어리언 Criterion》에 발표한 《황무지(荒蕪地) The Waste Land》(Dial상 수상)이다. 이 작품으로 종래의 미온적인 낭만주의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일부 보수적인 시인들의 공격을 받기도 했으나, 20세기 시단(詩壇)의 가장 중요한 작품의 하나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1927년 영국에 귀화하는 동시에 영국 국교(國敎)로 개종(改宗), 1928년에 강행된 평론집 《랜슬롯 앤드루스를 위하여 For Lancelot Andrewes》의 서문에서, '문학적으로는 고전주의자, 정치적으로는 왕정 지지자, 종교적으로는 영국 국교도'임을 선언하였다. 1932년 미국에 돌아가 하버드대학교 시학 교수 칭호를 받았으며, 그후에는 주로 런던에 거주하면서, 참신한 문예서적을 많이 간행하는 출판사 'Favour & Favour'의 중역이 되어 영국문단의 중진(重鎭)으로 활동하였고, 1948년에는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의 초기의 시(詩)는 영국의 형이상학시와 프랑스 상징시에서 받은 영향이 짙으며, 현대문명의 퇴폐상을 그리면서 그 배경으로 신화의 세계를 엿보게 한다.
《황무지》 이후 1930년에 간행된 시집 《재의 수요일 Ash Wednesday》에서는 종교적 색채가 한층 더 짙어졌으며, 그의 시인으로서의 정점(頂點)은 제2차 세계대전 전부터 쓰기 시작하여 전후(戰後)에 완성한 《4개의 4중주(四重奏) Four Quartets》(1944)에서 볼 수 있다. 그는 또한 시극(詩劇)에 관심을 가져, 《바위 The Rock》(1934), 《성당의 살인 Murder in the Catheadral》(1935) 《가족의 재회 The Family Reunion》(1939), 《칵테일파티 The Cocktail Party》(1949) 등을 발표하였다. 또한 그 동안 간행된 여러 권의 평론집이 1932년과 1951년에 각각 《평론선집》으로서 정리·간행되었다. 한편, 그는 문예비평에서 점차 문명비평(文明批評)으로 옮겨가서 《시의 효용(效用)과 비평의 효용 The Use of Poetry and the Use of Criticism》(1933), 《이신(異神)을 찾아서 After Strange Gods》(1934), 《고금 평론집 Essays Ancient and Modern》(1936), 《문화의 정의에 대한 노트 Notes towards the Definition of Culture》(1948) 등을 발표하였다. /naver
1874 - 미국의 사진작가 하인(Hine, Lewis Wickes) 출생
하인 [Hine, Lewis Wickes, 1874.9.26~1940.11.3]
사회학자로 교육받은 그는 1905년 뉴욕의 엘리스 섬에 북적거리던 이민자들을 찍기 시작했다. 또한 그들이 강제적으로 거주하고 일해야 했던 열악한 환경의 공동주택과 공장을 찍었고 이 사진들은 1908년 〈자선과 서민 Charities and the Commons〉(후에 〈관찰 Survey〉로 제목이 바뀜)으로 발간되었다. 1909년 어린이들의 노동을 기록한 많은 사진이야기 중 첫번째로 〈캐롤라이나의 어린 노동자 Child Labor in the Carolinas〉·〈때가 되지 않은 노동자 Day Laborers Before Their Time〉 등을 발표했다. ... /브리태니커
1849 - 러시아의 생화학자 파블로프(Pavlov, Ivan Petrovich) 출생
파블로프 [Pavlov, Ivan Petrovich, 1849.9.26~1936.2.27]
1849년 9월 26일 랴잔에서 출생하였다. 1879년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교 의학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육군 군의학교의 내과연구실에서 심장의 신경지배를 주로 연구하였다. 1884년부터 2년간 라이프치히대학교와 브레슬라우대학교에 유학하고 귀국한 후, 육군 군의학교에서 소화의 생리학에 관하여 연구하였다. 1890년 약리학 교수가 되었으며, 1891년 실험의학 연구소의 생리학 주임이 되었다. 여기서는 소화샘의 실험생리학적 연구를 15년간 계속하였다. 그는 외과수술을 장기로 하고 있었으므로, 가능한 정상상태로 동물실험을 할 수 있도록 다양한 새로운 실험법을 창안해 냈다. 특히 소화에 관한 연구에서는 소위법(小胃法)·췌영구루법(膵永久瘻法)·위사양법(僞飼養法)을 고안하고, 소화액의 분비메커니즘을 실험적으로 밝혀 냈다. 특히 신경지배의 연구는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 일련의 연구의 업적을 인정받아 1904년 노벨생리 ·의학상을 수상하였다. 이 소화샘을 연구하는 사이에, 침은 단지 음식을 먹거나 시큼한 것을 입에 넣었을 때에만 분비되는 것이 아니라, 실험용의 개가 주인의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침을 분비하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은 대뇌의 작용에 의한 것임을 통찰하였다. 그 후 실험적으로 연구를 진행하여 대뇌의 고차적인 작용이 침을 분비시키는 것으로 보아 동물에 대해서도 연구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이것이 바로 ‘조건반사(條件反射)’로서 뇌의 작용에 대해서도 자연과학의 방법으로 연구할 수 있음을 제시해 준 것이다. 조건반사의 연구는 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교외의 코르투시에 있는 파블로프생리학 연구소에서 30년간 계속되었으며,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주요저서에 《대뇌 양 반구의 작용에 관한 강의》(1927), 《조건반사학 강의》(1928), 《조건반사 연구의 20년》(1932) 등이 있다. /naver
1843 - 오스트레일리아의 작가 퍼피(Furphy, Joseph) 출생
1815 - 신성동맹 체결(러시아ㆍ오스트리아ㆍ프로이센)
1791 - 프랑스의 낭만주의 화가 제리코(Géricault, Théodore) 출생
1784 - 노르웨이의 천문학자, 물리학자 한스텐(Hansteen, Christopher) 출생
1729 - 독일의 계몽철학자 멘델스존(Mendelssohn, Moses)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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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표로 지나간 역사를 보니 새삼 예전 생각이 나네요. '내일을 향해 쏴라'가 우표로 나왔군요. 그영화 재미있고 특이한 소재의 영화였는데, 폴뉴먼의 활약이 생각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