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로스 체면이 말이 아니다.그 이름도 고고한 ‘캘리포니아의 장미’를 거들떠보아 주는 사람이 없다.
농수산물유통공사가 미국 쌀 칼로스 공매를 개시한 것은 지난 4월5일. 그로부터 5월23일 현재까지 총 열 차례 공매가 있었는데, 그 중 여섯 차례 낙찰률이 0%다.가히 진기록이라 할 만하다.
칼로스가 수입되기 직전까지만 해도 농업 관련 연구기관·단체와 언론은 경계경보를 발령하느라 바빴다.“미 저가쌀, 식탁 점령 우려” “쌀 전쟁 시작됐다”는 식이었다.그런데 칼로스가 판매 부진에 빠지면서 경계경보는 속속 해제되기 시작했다.급기야는 “칼로스, 한국 상륙 실패” “칼로스, 천덕꾸러기 전락?”처럼 내놓고 칼로스를 조롱하는 기사가 쏟아지는 상황이다.
불과 두어 달 사이 칼로스를 두고 극과 극의 평가가 오갔다면 이유는 두 가지일 것이다.과거 너무 고평가되어 있었거나, 현재 너무 저평가되어 있거나.
정식 수입 이전에 칼로스가 지나치게 고평가되어 있었음은 전문가들도 지적하는 부분이다.칼로스는 고가 쌀이 아닌 중·저가 쌀이다.미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중·저가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그런데도 한국에서는 칼로스가 ‘명품 쌀’인 양 받아들여졌다.강남 부유층이 주로 소비한다는 속설이 이런 인식을 굳히는 데 한몫을 했다.
그러나 한국식품연구원 김상숙 박사는 “칼로스는 맛이나 모양에서 국산 고급 쌀에 뒤질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전문가들은 밥에 대한 기호를 일차로 결정짓는 세 가지 요소로 시각·후각·촉각을 꼽는다.손가락으로 밥을 집어 먹는 나라들과 달리 한국에서 촉각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후각도 크게 따지지 않는다.
문제는 시각이다. 한국인은 외관상 윤기가 나고 맑고 깨끗하면서 알이 단단하고 자그마한 쌀을 선호한다는 것이 그간의 연구 결과이다.그런데 단립종이 대부분인 국산 쌀과 달리 중립종인 칼로스는 일단 알이 큰 모양새부터가 국내 소비자들의 저항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밥맛이다.농촌경제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일반 소비자들이 쌀을 고를 때 가장 중시하는 것은 밥맛이다.가격은 그 다음이다(대형 급식업소 같은 데는 반대이다). 칼로스가 한국 시장에서 처참하게 깨지고 있는 핵심 이유도 “밥맛이 나쁘다” “차진 맛이 떨어진다”라는 것이다.
칼로스에 이어 들어온 중국 쌀 ‘칠하원(七河源)’은 거꾸로 반사이익을 얻고 있다.“생각보다 밥맛이 괜찮다”라는 소문 덕분이다.칠하원은 5월3일 공매를 시작한 이래 5월23일까지 9백20t가량이 팔렸다.평균 낙찰률도 10%대로 비교적 고른 편이다.
전문가들은 칼로스 밥맛이 떨어지는 가장 큰 이유로 도정 기간을 꼽는다.
농촌진흥청 작물과학원 이춘기 박사는 “과일이 신선도가 중요하듯 쌀도 신선도가 중요하다.일본의 경우 여름에는 도정한 지 15일, 겨울에는 도정한 지 30일 이내에 밥을 지을 것을 권장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미국 현지에서 백미로 도정한 채 배를 타고 운반해 와야 하는 칼로스는, 도정에서 밥상에 오르기까지의 기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짧게 잡아도 30~40일이 걸린다.중국 동북 3성(헤이룽장·지린·랴오닝)에서 생산·운반되는 칠하원이 칼로스에 비해 경쟁력을 갖는 것도 이 때문이다.도정 기간이라는 면에서 칠하원은 국산 쌀에 크게 뒤지지 않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칼로스 밥맛에 대한 최근의 부정적 평가는 지나치게 부풀려진 면이 있다고 김상숙 박사는 지적했다.최근
전북도청은 공무원들을 상대로 시식 조사를 벌인 결과 94%가 칼로스보다 국산 쌀로 지은 밥이 더 맛있다고 응답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농협하나로마트가 벌인 조사에서도 국산 쌀 선호도가 78%였다.
당국은 소비자 테스트 결과 ‘쉬쉬’
그러나 지난 2004년 농촌경제연구원이 주부 3백10명을 상대로 벌인 블라인드 테스트(상표를 가리고 하는 테스트) 결과는 다르다.국산 쌀 7종과 미국 쌀·중국 쌀로 지은 밥을 각각 먹어본 다음 소비자가 해당 쌀에 얼마만한 가격을 지불할 의향이 있는지 물어본 이 조사에서 응답자들은 미국 캘리포니아 산 ‘그린’ 쌀(품종 칼로스)에 4만4천6백88원(20kg 기준)을 지불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이는 국내 최대 브랜드 파워를 자랑하는
임금님표 이천쌀에 지불하겠다는 것과 동일한 가격이었다.반면 중국 칠하원은 평가액이 4만1천2백원으로 아홉 종 쌀 가운데 최하위를 기록했다.
최근 연구에서도 결과는 비슷하게 나타난다.4월 공매가 시작된 이후 농림부와 농수산물유통공사가 전문 기관에 의뢰해 각국 쌀의 품질이며 밥맛을 비교해 본 결과 그 순위가 국산>미국산>중국산 쌀 순서로 나타났다고 농림부 관계자는 밝혔다.그러나 그 차이가 최근 민간 기구 조사에서 나타난 것처럼 ‘9:1’ ‘8:2’ 수준으로 압도적인 것이 아니라 상당히 근소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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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수입 쌀이 국내에서 고전하면서 재고가 쌓이고 있다.위는 인천항에 하역되는 미국 칼로스 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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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조사의 구체적인 수치 내역은 공개되지 않고 있다.농수산물유통공사는 처음에는 아예 조사 의뢰 사실 자체를 부인했다.그러다 나중에는 “조사의 신뢰성이 떨어져 결과를 폐기했다”라고 했다가 다시 “신뢰성에는 문제가 없지만 내부 사정 때문에 공개할 수 없다”라고 말을 바꿨다(이에 대해 검사를 담당했던 기관은 "신뢰성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라고 밝혔다). 농림부 관계자는 “적당한 시기가 되면 구체적 수치를 공개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그런가 하면 이들과는 별도로 최근 칼로스와 국산쌀의 비교 연구를 수행했던 농촌진흥청 또한 조사 결과를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들이 이렇게 조사 결과 공표를 놓고 전전긍긍하는 이유는 이른바 ‘국민 정서법’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농림부의 표현을 빌리면 한국에서 쌀은 소비재라기보다 ‘정치재’에 가깝다.한 연구 기관 관계자는 수입쌀 구매 행위가 매국 행위로 치부되는 분위기에서 “수입쌀과 국산쌀 품질이 비슷하다는 객관적인 조사 결과가 나온들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라고 반문했다.
대형 유통 업체나 대기업 계열 급식 업체가 수입 쌀 구매에 소극적인 것도 이 때문이다.돈 몇 푼 아끼자고 기업 이미지를 떨어뜨리는 모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입 쌀을 극단적으로 배척하는 상황이 계속되면 한국에도 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관계 기관의 분석이다.“낙찰률이 이렇게 저조하면 미국·중국에서 당장 쌀값을 더 내리라는 요구를 들고 나올 수 있다”라고 농수산물유통공사 담당자는 말했다.4월5일 20kg 한 포대당 3만1천원이었던 칼로스 낙찰가는 5월9일 2만5천원까지 낮아졌다(칠하원은 2만7천원). 여기서 값이 더 크게 내려가면 시장도 동요할 수밖에 없다.특히 전체 사용 쌀 중 86%가량이 저가미인 단체 급식 업체들로서는 구매 유혹이 커질 수밖에 없다.
이밖에 칼로스를 현미 상태로 국내에 들여와 도정하는 방안, 공매 대신 직판을 허용하는 방안 등을 미국이 들고 나올 것이라는 관측도 제기되고 있다. 이렇게 되면 한국 농가는 더 심각한 어려움을 겪게 될 수도 있다.
이에 대해
주한 미국 대사관 농무관은 “모든 것은 한국 정부가 알아서 할 일이다.우리가 구체적으로 요구한 것은 현재까지 전혀 없다”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수입 쌀이 국내 시장에 연착륙하되, 일본에서처럼 수입 쌀은 중저가, 국산 쌀은 고가 시장을 형성하는 구조로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