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부
12월
사랑을 보내놓고
동묘 저녁
기러기
녹산에서 하루
언덕 위에 성당이
구름 마을
새벽빛
두만강 건너온 레닌
성모병원 난간에 서서
처서
영락원
꼬질대
오륜동
구덕포
2부
저녁달
욕지 목욕탕
산해정
상추론
누부 손금
발해를 꿈꾸며 동해에 지다
석기시대
광한루 가는 길
법화사
문풍지
황강 18
황강 19
황강 20
황강 21
황강 22
황강 23
황강 24
3부
안개와 함께
가을은 달린다
을숙도
시의 탑차를 타고
고죽을 나서며
비둘기 운력
해인사
별나라
시인의 손
또 한 잔
어머니의 잠
성묘
두 딸을 앞세우고
소껍데기회
다람재 넘으며
청사포 이별
4부
우포 기별
문산 지나며
다대포
겨울 정선
목포는 항구다
순천만
저세상에 당신에게
대보름
여름
옥비의 달
이별
비둘기 눈물
비 내리는 품천역
곤달걀
여우비
쿠쿠
마른번개
해설·굴불굴불, 생의 공간과 시간과 언어의 결_장철환
떠난 이들에 대한 제례의 언어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경남 지역어에 대한 애정으로 한국 시의 맛을 지켜온 박태일 시인의 신작 시집 『옥비의 달』(문예중앙시선 35)이 출간되었다. 2014년 편운문학상을 수상한 제5시집 『달래는 몽골 말로 바다』의 뒤를 잇는 여섯 번째 시집이다. “언어의 생김새와 색깔, 소리 등을 예민하게 포착”(이승하 시인)하고 “의성어와 의태어의 절묘한 활용”(권혁웅 시인)을 선보였다는 평을 받아온 박태일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도 지역어를 십분 활용해 한국 땅 예제에 깃든 아름다움과 그리움을 담아낸다. 특히 이번 시집은 그리운 기억에 대한 제례라고 할 수 있다. 「성탄절」의 김종길 시인, 발해 항로 개척에 힘쓰다 간 장철수 대장, 민족 소설가로 불리운 표문태 소설가 등의 이름을 부르며 ‘굴불굴불’한 생의 길을 떠난 존재들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다. 이육사 시인의 딸인 이옥비 여사를 주인공으로 한 「옥비의 달」이 표제작인 점도 이러한 맥락에서 비로소 의미심장해진다.
굴불굴불, 생을 주유하는 노래들
상추와 상치를 왔다 갔다 하는 사이
치마를 입었다 치매를 벗었다 하는 사이
입맛이 바뀌고 인심이 달라졌단 뜻인가
아 조선흑치마라니 청치마라니 오늘은
알타리무가 치마아욱 곁에 쪼그려 앉았다
― 「상추론」 부분
박태일 시인의 언어는 한국어의 결을 살린 유려한 리듬으로 생의 굴불굴불한 길을 따라 주유한다. 그 결을 따라 읽다 보면 말놀이에서 배어 나오는 해학과 풍경에 스며드는 슬픔이 동시에 발생하는 기이한 순간이 찾아온다. 이러한 박태일 시의 특징을 두고 해설을 쓴 장철환 문학평론가는 “(시인이) 다양한 생의 공간을 주유하면서 공간의 질서를 탐색하는 것은” “시적 리듬을 통해 죽음의 한계에 대응하기 위함이다.”라고 해설한다. 박태일 시인의 시에 나타나는 생의 무게와 이에 대한 반발력은 일찍이 “이별과 유랑과 상실과 죽음의 비극적 사건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고독과 슬픔의 세계”(오형엽 평론가)로 지칭되어왔는데 이번 시집은 그러한 상실의 정서에 한층 더 가까워진 것이다.
한 굽이 골바람
한 굽이 강바람
땅고개 지나 성채에 묻힌 할메는
길 되고 밭 되어 주무시는가
― 「황강 21」 부분
시인이 『풀나라』에서 시작해 십수 해에 걸쳐 쓰고 있는 황강 연작은 특히나 죽음과 관계 깊다. 흔히 강은 슬픔과 인생에 비유되기 때문에 더 그러할 것이다. 시인은 과거 『가을 악견산』 을 통해 “죽음은 늘 턱없이 넘치려 하는 생각이나 부풀리고 싶은 느낌을 다독거려주는 힘이 있다.”고 밝혀온 바 있는데, 장철환 평론가는 이를 “죽음과 언어 표현 사이의 상관성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죽음이라는 중력이 있기에 삶은 무게감을 지니며, 시인은 그러한 죽음에 대한 인식을 통해 감정이 과장되지 않은 순정한 리듬을 우리에게 들려줄 수 있는 것이다.
육사 가고 난 원천
탄신 백 주년 오늘 문학관이 서고
집안 어른에 묻혀 네 살 옥비 걷는다 울며
예순네 살 옥비 웃는다
어디 사시느냐 물었더니
일본 신사
어떤 팽팽한 인연이 놓치듯 옥비를
아버지 죽음으로 몬 나라에 머물게 했을까
― 「옥비의 달」 부분
표제작인 「옥비의 달」은 이육사 시인의 유일한 혈육 이옥비 여사의 삶을 그리고 있는 시편이다. 어린 옥비의 시선과 노년의 옥비를 오가며 순국한 이육사 시인과, 아버지를 여읜 어린 딸의 기구한 운명이 애달프게 그려진다. 네 살 옥비의 눈물과 예순네 살의 옥비의 웃음이 교차되어 그러한 정서는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60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삶을 짓눌렀던 죽음의 무게가 노년에 와서는 역전되는 것이다. 이는 어둔 밤이 되어서야 환해지는, 떠오르는 달 같은 역설이다. 장철환 평론가는 “박태일 시의 기저에는 죽음과 슬픔이라는 강력한 중력장이 내재해 있다.”라며 “그 역설의 봉두난발을 빗질하는 가운데 비로소 결이 고운 언어가 탄생한다.”고 이야기한다. 그것이 바로 박태일의 시가 결코 외양의 아름다움에 그치지 않는 비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