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업뒤 같은 건물 개업 1000곳 넘어
감시단 117곳 고발…행정처분은 '0'
서울 마포구 ㅅ약국 약사 최아무개(38)씨는 최근 기어이 옆 건물 2층의 ㄷ의원을 찾았다. 의원 원장에게 건넬 `촌지'를 담은 봉투를 가슴에 품은 채였다.
“한참 망설였어요. 하지만 `인사'를 한 다른 약국에만 손님을 몰아주는 것을 그냥 지켜볼 수만은 없었습니다.” 하루 두세명에 그치던 ㄷ의원의 환자들은 그 뒤 20명 넘게 ㅅ약국을 찾아오고 있다.
서울 강서구 ㅌ약국 약사 안아무개(32)씨는 다른 방법을 택했다. 같은 건물 3·4층의 의원 손님들이 꼭 한 블럭 떨어진 약국으로 몰려가곤 했다. 그는 지난달 이 약국과 의원이 서로 담합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고발했다. 하지만 당국은 아직 별다른 조처가 없다.
의약담합이 `처방전 발급권을 쥔 의원에 대한 동네약국의 상납'이라는 신종 리베이트의 부작용을 낳고 있다. `의사와 약사의 상호견제를 통한 약물남용 방지'라는 의약분업의 대명제가 `담합 안하면 바보'라는 일그러진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약국이 대개 처방전 1건당 500원씩을 의원쪽에 사례비로 줍니다. 다달이 수입의 일정 비율을 건네는 약국도 있습니다.”(권태정 동네약국살리기모임 대표)
지나친 상납 요구에 시달리다 문을 닫는 약국도 나오고 있다.
약사 최아무개(42)씨는 지난달 초 브로커의 소개로 서울 강남구 ㅎ클리닉 안에 약국을 열었다가 한달만에 폐업했다. 애초 내과와 이비인후과, 피부과 등이 모인 이 클리닉에 조제료의 20%를 리베이트로 내기로 했다. 하지만 클리닉쪽은 이내 처음 약정보다 고율의 리베이트를 요구해왔다. “하루 100건 넘는 처방전을 독점했지만, 막상 고용약사에게 월급을 주고나면 투자이익조차 건지기 어려웠어요. 그런데 리베이트를 더 달라니 문을 닫을 수밖에요.”
같은 건물에 의원과 약국이 자리잡거나, 친·인척 이름으로 약국을 개설하는 방식은 차라리 고전적이다. 의약분업 시행 뒤 의원이 있는 건물의 지하나 2층 이상에 약국을 연 경우만 1000곳이 넘는다. 서울 마포구 ㅊ약국 출입문엔 ㅇ이비인후과, ㄱ안과, ㅎ병원 등 인근 병·의원의 이름들이 버젓이 내걸려 있다. 대한약사회 박인춘 홍보이사는 “지난달에만 이런 식의 담합행위 40건을 고발했지만 새발의 피”라고 말했다.
이런데도 보건당국은 속수무책이다. 약사회 의약분업감시단이 지난해 담합 의혹이 제기된 약국 117곳을 고발했지만, 행정처분이 내려진 곳은 아직까지 단 한 곳도 없다. 복지부 의약분업감시단 관계자는 “수사권이 없어 은밀한 상납 같은 담합 내막을 파헤치기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서울시 의약분업추진본부 관계자는 “담합 증거를 발견하기 어려운데다 자칫 약국 등과 충돌하거나 민원에 휩싸일까봐 조심스럽다”고 말했다.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변은영 사무처장은 “담합이 이대로 방치되면 약물 오남용 방지라는 의약분업의 원래 목적을 이루기는커녕, 세 차례나 인상된 보험수가로 부담이 늘어난 시민들의 반발만 거세질 것”이라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