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1)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오늘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데 얼마나 충실한지 돌아보고 또 돌아봐야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하는 복음 구절은 무척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대로 짚고 넘어 가야 할 대목이 두 군데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라는 표현입니다. 어떤 분들은 화들짝 놀라면서 반문합니다. “아니, 성모님께 예수님 말고 또 다른 아들이?”
일부 개신교 신학자들은 이 대목을 물고 늘어지며 성모님의 평생 동정과 관련된 가톨릭 교리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교부들의 가르침은 이렇습니다.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 문화 안에서 ‘형제’란 표현은 광의(廣義)의 의미로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형제라는 표현 안에는 친형제뿐 아니라 사촌 형제, 팔촌 형제, 더 나아가서 그 이상의 존재들까지도 포함시켰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교회 안에서 피 한방울 섞이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형제 자매라고 칭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마르코 복음사가가 강조하는 예수님의 형제는 예수님의 친형제가 아니라, 사촌 형제 정도로 바라보면 무방할 것입니다.
눈여겨 봐야 할 또 다른 대목이 있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라고 반문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의 말씀에 당혹해합니다. 애써 찾아오신 어머니를 홀대하는 듯한 그분의 태도에서 한 인간으로서 갖춰야 할 가장 기본적인 도리인 효도에 소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가집니다.
물론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인류 구원 사업을 위한 더 큰 바다로 나아가기 위해 혈육이나 지연 같은 사사로운 정을 끊겠다는 예수님의 결연한 의지를 확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또 다른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인류 역사상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데 있어 가장 충실했던 사람은 바로 성모님이셨습니다. 따지고 보니 예수님의 말씀은 성모님을 홀대하거나 무시하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성모님을 극도로 칭찬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데 얼마나 충실한지 돌아보고 또 돌아봐야겠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찾고 헤아려 보는 데 있어서는 프로요 전문가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우리들의 구체적인 실생활 안에서 실행하는 데는 왜 그리 굼뜬지 모르겠습니다.
2)전삼용 요셉 신부님
마르코 3,31-35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가족 공동체
어떤 청년이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는 성당에서 사람들을 대할 때, 친구들을 대할 때, 가족을 대할 때의 저의 모습이 다 달라요.
특히 가족을 대할 때 가장 나빠져요.
밖에서는 사람들에게 잘 하고 칭찬받는데 가족들에게는 짜증내고 투덜거리고 막 그래요.
뭐가 문제일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 인간으로서의 핏줄보다 지금 당신과 함께 있는 이들이 당신의 어머니요 형제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을 모두 당신 친 핏줄처럼 가족처럼 여기고 계신 것입니다.
가족처럼 여긴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오늘 ‘연탄길’에 소개된 ‘아빠의 눈물’을 읽어보며 가족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 싶습니다.
명지가 열여섯 살 때였다.
명지네 가족은 여름휴가를 보내기 위해 강릉경포대로 갔다.
바다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물 위를 비행하는 갈매기들의 모습이 은빛으로 출렁거렸고 바다 끝 수평선은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채 푸른빛으로 넘실거렸다.
아름다운 나흘을 보내고 마음은 그대로 남겨둔 채 명지 네는 경포대를 떠나왔다.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폭우가 쏟아지는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명지네 가족은 큰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그 사고로 명지는 다리를 많이 다쳤다 .
그날 이후로 명지는 두개의 보조다리 없이는 몇 걸음도 걸을 수 없게 되었다.
불행은 명지 하나에게만 그치지 않았다.
명지보다는 덜했지만 명지 아빠도 보조다리 없이는 걸을 수가 없었다.
그 후로도 명지 엄마의 도움을 받으며 명지아빠는 하시던 약국을 계속 경영했다.
명지는 사춘기를 보내며 죽고 싶을 만큼 열등감에 시달렸다.
명지가 밥도 먹지 않고 책상에 엎드려 울고 있을 때 위안이 되어준 사람은 명지 아빠뿐이었다.
명지의 엄마도 위로와 격려를 보내주었지만 정상인인 엄마가 해주는 위로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정신까지 절룩거리는 명지에게는 엄마의 사랑으로도 끌어안을 수 없는 아픔이 있었다.
아빠는 말할 수 없는 명지의 아픔까지도 낱낱이 알고 있었다.
길을 다닐 때 명지는 사람들이 동정 어린 눈빛이 싫어서 땅만 쳐다보며 다녔다.
어느 겨울엔가는 얼어붙은 땅 위를 걷다가 미끄러져서 얼굴이 온통 까진 채 아빠의 약국으로 간 적도 있었다.
명지는 아빠의 품에 안겨서 울었다.
"아빠,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불쌍한 눈으로 보는 게 너무 싫어 ."
"명지야 , 아빠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어.
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단순한 연민이 아니라 사랑 같은 거야.
그걸 알고 나서 아빠는 오히려 그들의 눈빛이 고맙기까지 한걸."
명지 아빠는 조심스럽게 명지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 내고 약을 발라 주었다.
명지 아빠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아빠는 우리 명지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 명지야, 아빠 말 잘 들어 봐.
물론 아빠나 명지가 어쩌면 그들보다 더 불행할지도 몰라.
그렇지만 우리의 불행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위안을 받을지도 모르잖아.
그렇다면 우리야 말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는 거구.....
명지야, 조금만 더 견뎌. 아빠가 네 곁에 있잖아."
그 후로도 명지 아빠는 명지의 마음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 명지를 지켜 주었다.
아빠의 사랑으로 명지는 사춘기를 넘기고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대학 입학식 날, 아빠는 명지가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명지도 아빠가 자랑스러웠다.
입학식장에서 아빠는 두개의 보조다리에 몸을 기댄 채 가슴 가득 꽃다발을 안고 있었다.
입학식을 끝내고 나올 때 그들의 눈앞에서 아주 긴박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차가 다니는 도로 쪽으로 어린 꼬마가 뛰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앞서 걸어가던 명지의 아빠는 그 아이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명지의 눈앞에서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명지아빠는 보조다리도 없이 아이를 향해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명지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아빠가 아이를 안고 인도로 나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빠?"
명지는 너무 놀라 소리쳤지만 아빠는 못 들은 척 보조다리를 양팔에 끼고 서둘러 가벼렸다.
"엄마? 엄마도 봤지? 아빠 걷는 거........."
명지 엄마의 얼굴은 담담해 보였다.
"명지야, 놀라지 말고 엄마 말 잘 들어 .
언젠가는 너도 알게 될 거라고 생각했어.
아빠는 사실 보조다리가 필요 없는 정상인이야.
사고 났을 때 아빠는 팔만 다치셨어.
그런데 사 년 동안 보조다리를 짚고 다니신 거야 .
너 혼자 아프게 해서는 안 된다고.....
성한 몸으로는 아픈 너를 위로할 수 없다고 말야."
"왜 그랬어? 왜 아빠까지......" 명지는 울음이 터져 나왔다.
"울지 마,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으면 아빠는 견디지 못하셨을 거야.
불편한 몸으로 살아오셨지만 너를 위로할 수 있는 자신의 모습을 아빠가 얼마나 자랑스러워 하셨는데 오늘은 그 어린 것이 교통사고로 너처럼 될까봐서...."
멀리 보이는 명지 아빠는 여전히 보조 다리에 몸을 의지한 채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아빠를 보고 있는 명지의 분홍색 파카 위로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 내렸다.
마음이 아픈 날이면 명지는 늘 아빠 품에 안겨서 울었다.
소리 내어 운 것은 명지였지만 눈물은 아빠 가슴속으로 더 많이 흘러 내렸다.
저도 다른 사람에게는 친절하면서 어머니에게는 투덜거렸던 이유를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가족이 아닌 사람과 가족에게 대하는 나의 모습이 다른 이유는 내가 이중 인격자여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은 그렇게 투덜거리면 다 내가 싫다고 달아나버리겠지만 우리 가족은 그렇지 않을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가족, 그 울타리에서는 내가 마음을 놓아도 되는 유일한 공간이고 나를 있는 그대로 이해해주고 받아줄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곳입니다.
그 공간이 없으면 우리는 세상을 살아갈 힘을 다시 회복하기가 불가능 할 것입니다.
그 따듯한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인 바로 부모님의 조건 없는 사랑과 자녀들의 감사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을 이런 가족의 공간으로 만들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도 우리처럼 죄인의 모습으로 살아가신 것입니다.
마치 명지의 아빠가 명지를 위해 목발을 짚어준 것처럼 말입니다.
세상을 가족으로 만들고 싶으면 누군가는 먼저
그 무한한 사랑을 보여주어야만 합니다.
우리도 우리가 속해 있는 사람들을 그저 스쳐지나가는 인연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 참 가족으로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참으로 우리가 형제님, 자매님이라고 부르는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3)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3,31-35: 예수님의 형제, 자매, 어머니인 사람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33절). 이 말씀은 당신 어머니를 부끄럽게 여기신 것도 아니다. 부끄럽게 여기셨다면 그 태를 거쳐 나오지도 않으셨을 것이다. 마리아도 해야 할 바를 다하지 않았더라면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했으리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35절) 마리아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셨기 때문에 마리아는 가장 확실한 가족이시다. 우리는 당신 가족으로 우리를 불러주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여야 한다. 예수님 말씀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하느님의 가족이 되기 위한 요건을 말한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다면 그는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가 되는 것이다. 어머니라는 것은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낳아줄 수 있다면 그것은 가족에서 어머니의 역할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 때문에 우선은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는 태도와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삶이 있어야 예수님의 가족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가족이란 육적인 가족보다 영적인 가족이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즉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육신을 잉태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때문에 더욱 복되신 것이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루카 11,27). 주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예수님의 혈육들은 그분을 믿지 않았다(요한 7,5 참조). 혈연관계는 그들에게 아무런 득이 되지 않았다. 마리아는 그리스도를 잉태하신 것도 복되시다고 천사도 엘리사벳도 말하였다. 그보다 더 행복하게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지 않았더라면, 어머니라는 친족관계조차 마리아에게 아무런 유익도 되지 못했을 것이다(참조: 마태 3,8-10; 루카 11,27-28; 로마 9,1-8).
주님께서 마리아를 칭송하신 것은 혈연관계로 당신을 낳아주셨기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실행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이 말씀은 마리아 안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시고 우리 가운데 사셨기 때문이 아니라(요한 1,14 참조), 자신을 지어내시고 자신 안에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을 지켰기에 복되다는 것이다. 즉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셨기 때문에 복되시다는 말씀이다. 말씀을 실천하는 삶으로 가족이 되어야 한다.
4)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 35)
실행은 사랑입니다.
누군가의 뜨거운 실행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입니다.
실행할 줄 모르는 우리들에게 실행을 가르쳐주십니다.
탯줄보다 더 뜨거운 것은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합니다.
실행하는 사람이 새로 태어나는 사람입니다.
깨어나게 하는 실행으로 사랑은 더욱 깊어집니다.
실행은 실행을 알아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실행을 우리에게 남겨두셨습니다.
실행 속에 예수님이 계시고 형제와 누이 어머니가 계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실행 속에 있습니다.
그리하여 관계의
중심이 실행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소금또한 실행으로 녹아들며 하나가 됩니다
.
5)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024년 1월 23일 연중 제3주간 화요일
“속았다”라고 말하는 어느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연애한 지 석 달 만에 서로 ‘내 남자, 내 여자’라고 생각했고, 곧바로 결혼까지 했습니다. 만날 때마다 마치 구름 위를 나는 것 같은 황홀감이 있었지만, 결혼과 동시에 하나씩 깨졌습니다. ‘내 사랑’이 아니라 ‘내 원수’가 되고 만 것입니다. 누군가 ‘결혼은 현실이다’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나면서, 이상과 현실은 완전히 다름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많은 부분에서 공통점이 있기에, 나와 딱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달라도 너무 다른 것입니다. 치약 짜는 것도, 빨래를 벗어두는 것도, 청소하는 것도 모두 달랐고, 그 다름을 인정하지 못해서 계속해서 싸웠습니다.
연애할 때의 그 감정이 이렇게 쉽게 사라졌을까요? 사랑이란 신기루 같은 것일까요? 사실 사랑에만 빠져 있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학창 시절에 공부 잘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에게 사랑하는 여자 친구가 생긴 것입니다. 성적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성적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으니, 공부가 되지 않는 것이었지요.
사랑은 다른 것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연애할 때는 다른 곳에 신경 쓰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오로지 상대방에게 맞춰서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결혼 후, 이제는 불타는 사랑이 아니라 현실적인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즉, 나만을 바라보는 사랑이 아니라, 가정을 만드는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사회생활도 잘해야 하고, 배우자의 가족과 친구들에게도 신경 써야 합니다. 이 밖에도 신경 써야 하는 것이 많아집니다. 따라서 사랑이 식은 것도 또 없어진 것이 아니라, 사랑이 익어갈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습니다. 혈연에 따른 가족이니 그 사랑이 더 지극해야 할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혈연을 뛰어넘는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 안에서 모두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이 사랑의 삶을 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라고 반하시면서, 믿음을 가지고 당신 주위에 있는 사람을 둘러보시며 이르시지요.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이제까지 다른 사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혈연관계처럼 가까운 사람에게만 행하는 사랑이 아니라, 모든 이를 향한 사랑을 실천할 때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이로써 하느님 안에서 진정한 하나의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과연 하느님 안에서 한 형제로 새로운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지를 묵상했으면 합니다.
오늘의 명언: 인생을 사랑하는 것과 탐욕을 부리는 것은 한 끗 차이이다(마야 안젤루)
6)이병우 루카 신부님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3,35)
참가족!
오늘 복음(마르3,31-35)은 '예수님의 참가족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마르3,32)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마르3,33) 하고 반문하시면서, 당신을 따르는 이들을 보시며 이르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3,35)
참가족!
어제는 1597년 2월 5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26명(선교사6명,예수회3명,신자17명)이 순교하신 나가사키 순교지를 순례했습니다.
26명의 순교 성인 중에서 6명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수사 신부님들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스페인(4명)과 포루투칼(1명)과 멕시코(1명) 선교사들이었습니다.
이들 중 멕시코 선교사였던 필립보 성인(24세)은 인도에서 신학을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가다가 배가 좌초되어 붙잡히시게 되었는데, 이곳의 어려운 현실을 보고 본국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고 이곳에 남아 순교하셨습니다.
또 한 분이신 루도비코 성인(12세)은 가장 어린 나이에 순교하셨는데, 본래는 체포시 제외되었지만 스스로 그리스도교 신자라고 자청하여 체포되어 순교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형장에 가서는 "내 십자가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고 합니다.
당시 그 어린 나이에 이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힘이 어디에서 나왔을까?
그 힘이 바로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부터 나오지 않았을까?
26명의 순교 성인들이야말로 오늘 복음이 전하는 참가족입니다. 하느님을 굳게 믿고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한 참가족입니다.
우리도 참가족이 되어봅시다!
첫댓글 복음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
그분 둘레에는 군중이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마르 3, 3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