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이 주는 유익 중 하나는 대상을 미워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알면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하면 미움이 누그러진다. 이해하지 못하면 불편하고, 불편하면 싫어하게 되며, 싫은 감정이 계속되면 미워하게 된다. 이해하게 되면 덜 불편해지고 그러면 미움도 차츰 잦아든다. 아주 사라지지는 않더라도 견딜 만하게 된다.
최정균의 이 책은 그런 앎을 도와주는 책이다. 고도로 문명화되어 보이는 현대인의 삶에도 남녀간의 연애와 결혼이라는 가장 사적인 영역에서부터 경제, 정치, 종교라는 사회적 영역까지 생존과 번식이라는 유전자의 명령이 얼마나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지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유전자로 인간 사회를 설명하려는 시도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이기적 유전자>를 쓴 리처드 도킨스일 것이다. 이 책도 크게 보아 그 부류에 속한다.
대중과학서를 표방하고 쓰여졌지만, 책의 말미에 실린 방대한 (그것도 영어로 된!) 주석을 검증하는 일은 일반 독자의 눈높이를 한참 벗어난다. 그런 검증작업은 전문가에게 맡겨두고 일반 독자는 저자의 메시지를 따라갈 정도로만 이해하면 되며, 그 작업이 크게 어려울 정도는 아니다. 우리가 막연히 그럴 것이라고 추정했던 것이 유전자의 시각에서 볼 때 명료하게 이해되거나, 원인은 모른 채 현상만 알고 지내던 것에 대해 나름대로 설득력 있는 해석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 사회의 모든 면이 유전자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설명된다고 해서 그것이 다 정당화되는 것도 아니다. 저자의 입장은 유전자의 명령은 우리의 실존이지만 유전자의 제약에서 벗어나 더 가치 있고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는 것이 오히려 과학적 자세라고 본다 (나의 해석임).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우리 안에 있는 유전자의 작동 방식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십분 동의한다).
대중과학서에 맞게 글이 조금 더 유려했으면 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그것을 덮고도 남을 만큼 장점이 많은 책이다.
더 길게 쓰기 보다 책에서 몇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다른 분들의 일독을 권하고자 한다. (e-book으로 읽었기에 쪽수가 들쭉날쭉하여 쪽수는 표기하지 않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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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괄 적합도를 최대화하고자 하는 부모들의 양육 본능은 경쟁에서 뒤처지는 것이 곧 죽음을 의미했던 원시시대와 똑같은 상태로 남아 있다. 이것은 현대사회에서 많은 부모들이 한두 명의 자녀에게 무제한적인 투자를 하도록 만든다. 결국 부모의 양육 본능이란, 유전자가 자신의 번식 성공을 위해 부모라는 아바타를 조종하는 강력한 동력인 것이다.”
“사랑이 유전자의 ‘번식’을 위해 ‘혈연’을 향해 ‘조건적으로’ 발휘된다면, 혐오는 유전자의 ‘생존’을 위해 ‘타인들’을 향해 ‘무조건적으로’ 행사된다. 혐오의 진화적 근원은 유전자의 두려움이다. 병을 옮기거나 유발할 수 있는 대상을 기피하기 위해 진화적으로 발달한 행동면역계의 반응은 인간을 대상으로도 동일하게 발현된다... 이민자를 비롯한 다른 인종의 사람들, 각종 장애나 기형, 심지어 비만과 같은 정상에서 벗어나 보이는 겉모습을 가진 이들, 동성애자를 비롯한 다양한 성소수자들이 현대사회에서 주된 혐오의 대상이다.”
“번식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값비싼 신호를 과시하는 동물적 본능은, 과시적 소비의 형태로 현대인들의 경제활동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번식을 위해 필요한 자원 획득 경쟁도 마찬가지다. 생태학에서 정의되는 간섭 경쟁과 착취 경쟁은 인간 경제에서 독점과 착취로 나타난다. 특히 부동산, 주식, 대중 예술과 스포츠, 그리고 이른바 ‘혁신’ 기업들의 시장에서 지대라는 형태로 교묘하고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는 가치 착취 행위는, 그저 운 좋게 유리한 위치를 선점함으로써 다른 개체들이 자원을 이용할 기회를 빼앗는 생태계 경쟁의 모습을 그대로 되풀이한다.”
“생물학적으로 정의할 때, 보수란 성공적으로 전화한 유전자들의 발현이자 자연이라는 원초적인 체제에 대한 정당화이며, 진보란 진화로부터의 일탈이자 자연 체제에 대한 저항과 도전이다.”
“유전자는 이기적이다. 그러나 이기성이 유전자의 본래 속성은 아니다. 그저 우연히 생겨난 이기적인 변이들만이 진화 과정에서 경쟁을 통해 살아남은 것이다. 각 유전자의 입장에서는 변이의 발생이 자신의 죽음을 의미하지만, 생명의 진화는 혹독한 자연 속에서 일부 개체라도 살리기 위해 불가피하게 변이를 통해 다양성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적대적인 자연환경에서의 기대 수명은 어차피 제한되어 있기에, 우리는 건강을 챙겨 장수하는 대신 젊을 때 더 많은 자식을 낳고 일찍 죽는 방향으로 진화한 것이다. 다시 말해, 개체들 간에 일어나는 약육강식의 생존 투쟁과 사회적 갈등 뿐만 아니라 개체 안에서 일어나는 생물학적 비극 역시 궁극적으로 자연의 문제다. 그럼에도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연을 경외하고 선망하며, 많은 문제에 대해 (...) 문명의 진보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을 갖는다. 특히, 인간보다 자연을 우선시하는 극단적인 생태주의와 환경운동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
“종교는 보수적 성향, 특히 자연에서 도덕과 규범을 찾으려는 인간 본능의 극단적 발현이다.... 그러나 창조 신화는 자연을 탈신격화하고 자연신을 숭배하던 고대 원시종교에서 인간을 해방시킴으로써 과학의 태동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럼에도 과학자들조차 종종 자연주의적 오류에 발목이 잡히며, <창세기>를 비롯한 성서 역시 자연주의적 종교로 왜곡되고 제도화되어 그 진정한 의미가 퇴색되기에 이르렀다...
예수의 행위와 가르침은 자본주의적 착취로부터 경제 정의가 실현되고, 혐오와 사회의 낙인으로부터 소수자와 약자가 보호받으며, 질병과 죽음으로부터 인간이 해방되는 새로운 세상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다시 말해, 성서가 말하는 창조란 태초에 일어난 일회적 사건, 즉 자연 세계의 발생이 아니라 이러한 인간 세상을 만들어 가는 진보적 창조다. 그러한 의미에서 진정한 창조주는 초월적 신이나 조물주가 아니라 인간이다. 성서는 자연의 노예였던 인간들을, (역사적 인물이건 가상의 인물이건) 예수를 본보기 삼아 스스로 신이 되는 해방의 길로 초청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성은 절대적인 초인을 통해서가 아니라 인류 공동체로서만 발휘된다.”
첫댓글 제목부터 관심이 갑니다. 추천 감사합니다.
출간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도서관에는 아직 없는 것 같습니다.
<이기적 유전자 >를 읽고
약간 충격을 받았으나
인간세계의 여러 현상을 이기적 유전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습관도 생기면서 해석의 폭이 넓어진 것 같아요
소개하신 책의 말미에 있는 종교에 대한 해석은 새롭네요.
기독교가 인류역사에 미친 영향도 받아들일만한 점도 있어 보이구요.
기독교에 대한 해석이 저도 신선했습니다. 수긍할 만한 점도 많고요.
물론 현대의 제도화된 교회에서 이런 해석은 매우 소수의견이겠지만요.
굉장히 호기심가지게하는 내용이네요.
다행히 우리동네 도서관에는 들어와있어요.
당장 도서관가봐야겠습니다.
흥미로운 책 추천 감사합니다^^
다행이네요. 우리 동네 도서관에도 곧 들어오겠죠.^^
결론은 스스로 해방해 신이 되라는 의미로 읽히는데 맞나 모르겠어요
잘못 해석되고 있는 기독교의 참 의미를 말해주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불교와도 연결되는 부분이 의미심장합니다
저도 성경을 제법 읽었지만 이런 해석은 신선했습니다.
생각을 하게 해주시는 글 매번 감사합니다
네. 시간 날 때 한 번 읽어보세요.^^
"앎이 주는 유익 중 하나는 대상을 미워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는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그 중에서도 직접 경험해야만 이해되는 것들이 있지요. 하나로 예전에는 노인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 그 비슷한 나이가 되니 이해되는 것들이 생기더군요. 그러면서 인간이 참 약한 존재임을 깨닫게 되기도 하고요.
좋은 책 추천 감사합니다.
네. 한 번 읽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