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울 때는 스승이 필요하다. 좋은 스승은 배움의 길에서 접하게 되는 낭비를 많이 줄여줄 수 있다. 벤자민 프랭클린처럼 독학으로 성공한 사람도 물론 있지만 시대가 달랐고, 그 시대에서도 특출난 사람이었다. 현대에도 로켓 엔진을 거의 독학으로 공부한 일론 머스크 같은 사람이 있지만, 역시 특출난 사람이라 가능한 일이다.
독학은 외롭고 힘든 길이다. 대학입시처럼 공부의 양과 방향이 비교적 명확히 정해져 있는 분야도 독학은 대단히 어렵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 보면 최종적으로 자기 것이 되는 공부는 결국 독학의 결과라는 것을 알게 된다. 스승이 아무리 잘 인도해주더라도 혼자 하는 공부가 없으면 스승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게다가 스승의 답이 정답이 아닌 경우에는 큰 혼란이 올 수 있다. 그런데 살다 보면 그런 일이 의외로 자주 일어난다.
근래 새로이 공부하는 분야에서 만난 멘토는 나보다 십여 년 어리지만 이 분야에서 제법 성공한 사람이고 자기 나름의 원칙이 확립되어 있는 사람이다. (나는 배움에 있어 나이는 따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배울 만한 것이 있느냐, 그리고 가르치는 태도가 진지한가 여부다.)
처음에는 개안하는 기분이었다. 그가 설명하는 원칙을 따르면 거의 모든 문제가 해명될 것 같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자 그의 지도와 나의 성향 또는 가치관 사이에 약간의 이질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성장이 정체되기 시작하던 시점이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과연 정답일까. 다른 방법은 없을까 하는 생각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경제와 관련이 있는 분야라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경제는 수학, 공학, 물리학과 달리 정답이 있지 않고, 있더라도 하나의 점이 아니라 확률적 분포에 가깝다. 사람 사이의 상호작용이 중요한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벨상을 받은 경제학자들 간에도 경제 현황에 대한 해석 차이가 있고 그에 따라 제안하는 정책도 다르다.
그러므로 나의 행동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미숙하더라도 나의 해석이 있어야 한다. 나의 해석은 무엇인가.
한동안 고민하다가 멘토에게 조언을 구하는 일을 당분간 중단하기로 했다. 그리고 과거에 읽었던 책을 뒤적였다. 과거에 인상 깊게 읽었지만 당시에는 다 이해하지 못했던 책을 지금 다시 읽으면 뭔가 새로운 것이 보일 것 같았다.
과연! 일 년 전에 읽은 책을 다시 읽다가 눈이 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당시에는 복잡하기만 하고 모호하게 느껴졌던 구절이 눈 앞에서 하나 하나 살아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 그간의 고민과 방황이 헛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 책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현상에 대한 저자의 해석과 나의 해석이 다른 지점이 보이면 그의 해석을 나의 방식으로 번역해보고, 때로는 물음표를 남겨두기도 했다. 그리 중요하지 않은 대목은 술술 넘기는 여유도 생겼다.
그렇게 하니 예전에는 일 주일 가까이 걸려 겨우 읽었던 400쪽 가까운 책을 중요 부분은 자세히, 다른 부분은 술술 넘기면서 이틀 만에 끝내고, 책의 핵심에 대한 요약과 그에 대한 나의 해석을 어느 정도 정립할 수 있게 되었다. 멘토의 그늘에서 한 걸음 벗어나 비로소 홀로 서기 시작한 느낌이랄까.
어느 분야든 자신만의 관(觀)을 갖춘 사람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자립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자립을 향해 겨우 첫걸음을 내디딘 셈이다. 제대로 된 방향으로의 첫걸음인지는 나중에 판명되겠지만 적어도 지금의 느낌은 그렇다.
하지만 그 한 걸음을 내딛기 위해 들인 시간과 노력은 결코 적지 않다. 어느 길이건 어느 단계를 넘으면 혼자 걸어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한 걸음에 대해 자만하지도 않지만 과소평가하지도 않는다. 그저 내면의 기쁨을 담담히 음미할 뿐이다.
-- 저녁 단상
첫댓글 언어쪽에 관심이 많아서 ,
마침 도서관에서 일주일에 한번
우리나라로 유학온 중국학생이 재능기부로 회화를 강의한다 해서
그동안 혼자했던 공부를 같이 하니 재미납니다.
영어도 교육방송 교재로 출퇴근 길에 공부하는데
그것 역시도 즐겁습니다.
뭐든 부족하고 빈한한 시대에 태어나고 자라
새로움을 받아 들이는건 행복합니다.
커다란 목표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공부가 재미있어서...
본문의 내용과 부합되는 댓글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배움의 첫걸음은 재미지요. 재미있어서 자꾸 하다 보면 깊어지는 것이고요.
나이가 들수록 이런 재미를 잃기 쉬운데 훌륭하십니다.^^
공부의 재미, 배움의 재미를 제대로 느끼고 계시네요.
멋지세요!!
요즘 종종 하는 생각이네요. "최종적으로 자기 것이 되는 공부는 결국 독학의 결과"라는 부분에 특히 동의합니다.
많은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적용 가능한 것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많더군요. 예전에는 "남들이 비슷한 말을 할 때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면, 지금은 "내가 또는 남이 겪거나 체득한 걸 일반화할 수 없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도 종종 합니다.
예전에는 더 어린 세대들의 생각은 경험이 부족해 잘못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고 주로 생각했다면, 지금은 그들에게는 그들의 고민과 그들의 해법이 있을 뿐 내가 아는 것과 다를 수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섣부르게 조언하지 않으려 합니다. 반대로 더 나이 많은 세대들의 생각과 경험을 들어보더라도 '예전과는 달라서 지금 내게 도움되지 않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자주 하게 되네요.
직업 문제, 결혼과 출산의 문제, 재테크의 문제, 더 나아가서는 건강이나 다이어트에 관련된 이슈까지 각자에게 도움이 되는 건 스스로 노력해서 얻은 결과 위주인 것 같네요. 물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고, 그걸 나름대로 해석하여 적용할 수 있는 내 능력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쓰신 내용에 다 동의합니다. 사람 사는 데 필요한 약간 넓은 범주의 원칙이 있지만, 그것을 개개인이 적용할 때는 맞춤형이 되어야 힘을 발휘한다고 봅니다. 그렇게 자신의 몸과 기질에 맞추는 것이 살아가는 데 정말 필요한 공부라는 생각이 요즘 들어 부쩍 커지네요.^^
그렇지요.
결국엔 홀로서기.
그 어려운 걸 해내셨네요.^^
그 기쁨 뭔지 알것 같아요.
아무리 관심분야이고 공부를 한다지만 400쪽이나 되는 책을 이틀만에 독파하실 정도라니 정말 대단하세요.
그야말로 술술 넘어간다는 의미겠지요?
성장하셨네요. 축하드려요!!
저도 지금 하고 있는 분야에서 새로운 스승을 만나 눈을 뜬 기분이에요.
이렇게 배워가며 저도 나만의 노하우를 만들고 언젠간 홀로서기를 해야겠지요.
이제 겨우 첫발을 내디딘 셈이지요.
그래도 어느 정도 뿌듯한 마음이 드는 건 사실입니다.^^
냉홍차님의 분야는 짐작할 것 같은데, 조만간 진경(眞境)에 접어드시기를 기원합니다.^^
저희 큰 아이한테 저는 불안하면 기다려주지 못하고 계속 좋은 선생님을 찾아 억지로 붙어줬던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 깨달아지는건 그시간들을 버린것 같아요
지금 원하는 결과도 얻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시기지만
자기만의 방향을 찾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
지켜보기 힘들지만 이제는 제가 놓아야 온전히 자립을 할수 있겠지요.
때로는 부모의 도움이 필요하겠지만 최종적으로는 본인의 의지와 깨달음이 있어야겠죠.
의지가 있다면 결국 자기 길과 자신만의 방법을 찾을 겁니다.
그 때까지 부모는 믿고 기다려주고 격려해주는 것이 최선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