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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존경하는 인물과 나에게 끼친 영향 (3)
- 청암 박태준 POSCO회장 중심
제3장. 결론
제1절 나에게 끼친 영향
청암이 나에게 끼친 영향은 여러 가지지만 크게 거론한다면 조국애(祖國愛), 책임감(責任感), 무사심(無私心) 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조국애(祖國愛)이다.
자기가 속해 있는 나라를 사랑하고 그 사랑을 바탕으로 국가에 대하여 헌신하라는 의식이나 신념이 애국심이며 그러한 사상을 애국사상이라 할 수 있다. 전체 국민의 이익을 대표하는 국가에서 진정한 애국심은 직장이나 가족 및 고향에 대한 애정을 모순됨 없이 결부되어 평화적 성격을 지니며 그것이 지도자의 리더십에 의하여 표출되기도 한다. 그것은 자기만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고, 조국애라 한다.
청암은 청년 시절에‘짧은 인생을 영원(永遠) 조국에’라는 인생의 좌표를 설정하고, 그의 다짐대로 조국 근대화의 선두 주자로 제철 보국, 교육 보국의 신념 아래 평생을 조국 대한민국에 헌신하여 왔다.
청암은 6‧25 한국전쟁 시 청년 장교로 전선의 최일선에서 싸웠고 5.16혁명 후에 최고회의 상공위원을 지냈으며 국가 경제 발전에 기여하였다. 적자 기업인 대한중석 사장에 취임하여 1년 만에 흑자 기업으로 전환시켜 당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경영 능력을 인정받았다. 또한 제철소 건설의 중책을 맡아 25년간 초인적인 능력을 경주하여 조강 연산 2,100만 톤의 일관 제철소를 건설, 대한민국을 세계 3위의 제철소 보유 국가로 국가 위상을 높였다.
일본 최대 종합상사인 미쓰비시 상사의 야스히로 도스쿠니 사장은 헌사를 통해 ‘누를 수 없는 용광로 같은 뜨거운 조국애로 박태준은 대사업을 이룩했다.’는 말로 청암의 포스코 건설이라는 위업과 용광로보다 뜨거운 그의 조국애를 잘 표현해 주었다.
둘째, 책임감(責任感)이다.
1967년 11월 박정희 대통령은 청암을 종합제철소 건설 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하며 “나는 경부고속도로를 책임질 테니 자네는 제철소를 맡게. 제철소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그러나 임자는 할 수 있어.”라고 말했다.
청암은 대일 청구금 자금을 제철소 건설자금으로 전용하자는 발상을 내고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총 5억 달러 중 포항제철소 1기 건설에 소요되는 유상 4,290만 달러, 무상 3,080만 달러, 수출입은행 사업 차관 5,000만 달러 등 총 1억 2,370만 달러로 제철소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는, 제철소 건설 자금은 우리 선조들의 피와 땀이니 기필코 목숨을 걸고 제철소 건설에 성공하여야 한다고 자신과 전 직원을 독려하였다. 만일 실패하면 제철소에서 ‘우향우’하면 영일만 바다이므로 자신부터 빠져 죽겠다면서 전 직원에게 우향우 정신을 주지시켜 그들의 사명감을 북돋았다. 목숨을 걸겠다는 청암의 우향우 정신이야말로 책임감과 리더십의 극치라 하겠다.
청암은 1968년 시작한 제철소 건설을 1992년 10월 2일 광양제철소 4기 설비 준공을 끝으로 연산 2천 100만 톤의 생산능력을 보유한 세계 제3위의 일관 제철소 건설을 성공적으로 이룩하였다.
준공식 다음 날, 그는 서울 동작동 현충원의 박정희 대통령 묘소 앞에서“각하! 불초 박태준, 각하의 명을 받은 지 25년 만에 포철 건설의 대역사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삼가 각하의 영전에 보고드립니다.… ”라고 말하였다. 생전에 그는“박정희 대통령에게 임무 완수를 보고한 1992년 10월 3일이 인생에서 가장 기쁜 장면이었다.”고 회고하였다. 청암의 제철소 건설 25년간 그의 책임감의 무게가 태산보다 더 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으로서는 감내하기에 힘든 무게였으리라…. 나 같은 범인(凡人)으로서는 상상이 되지 않을 뿐이다.
셋째, 무사심(無私心)이다.
무사심은 개인적인 욕심, 즉 나와 내 가족과 내 주변을 위한 욕심을 갖지 않고 오로지 공정(公正)을 추구하는 마음이다. 바로 공익(公益)을 위한 마음이다. 그 것은 지도자의 덕목인 청렴성이다. 청렴은 자신에 대한 욕심의 자제 행위이다. 청암은 개인적인 욕심을 버린 청교도적인 마음으로 공익을 앞세운 삶을 살았다. 그의 무사심은 제철소 건설과 조업 과정은 물론 그가 세계 제3위의 제철소를 건 설하고 퇴임할 때 단 한 푼의 퇴직금도 받지 않았고 1988년 포스코 직원에 대한 발행주식의 10%를 우리 사주에 배당하였을 때 단 한 주도 배당받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의 집을 14억 원에 팔고 그 중 10억 원은 아름다운 재단에 기부하였다. 정작 자신은 전셋집에 살다 세상을 떠남으로써 청빈 정신을 우리에게 되새기게 했다. 황경로 포스코 2대 회장은‘그분(박태준)의 리더십 근간은 청렴결백이었다.’고 회고하였다. 청암은 철저히 사욕을 버리고 오로지 대한민국의 부(富)를 쌓는 데 일생을 바친 국가 대표급 전문 경영인이다.
제2절 연구의 한계
청암의 업적 중심으로 연구 주제를 설정하고 기술하다 보니 내용 중 일부가 주관적인 견해에 치우칠 수 있으나 본인은 그러한 평가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수용한다. 가급적 개인적인 소견을 배제하려고 노력했고, 객관적인 평가를 위하여 개인적인 생각보다는 표기한 참고문헌 중에서 인용하였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는 옛말처럼, 햇빛이 밝으면 그늘도 있는 법인데 비록 공직자에 대한 인사청문회 자료 수집 차원은 아니지만 논문 작성을 위해 다방면의 자료 수집과 연구 과정에서 새삼스럽게 다시 본 청암에게는 허물다운 허물을 발견하지 못했다. 비록 내 연구가 사실을 기록하였을 뿐이라고 주장하더라도 나의 주관적이고 선입견적인 관점에서의 일방적인 숭배, 예찬의 기술로 평가되지 않을까 하는 기우가 없지 않아 내 연구의 한계임을 절감하였다.
그러나 조정래(2007)의 글에서 읽은 ‘그는 거의 완벽한 사람이었다.’라는 평가에 다소나마 위안을 받았다. 성경에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예수를 지키던 백부장이 말했다.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청암의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한 결과 솔직한 내 심정을 밝히자면 ‘참으로 청암은 위대한 사람이었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청암에 대한 자료 수집에는 크게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포항제철의 사사지 및 여러 간행물, 연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인 송복(2011)의 연구 논문 「특수성으로서의 태준이즘(Taejoonism) 연구」 그리고 이대환(2004)의 『박태준 평전』, POSCO(2012)의 『박태준 명예 회장 추모 기사 모음』 등 기타 여러 도서와 자료를 참고하였다.
청암의 별세에 즈음하여 조백건(2011)의 칼럼에‘철강 인생에 하나의 오점 … 정치 입문’(조선일보 12.14 A 11면)이라며 청암의 허물로 현실 정치 관여를 언급하였다. 하지만 『박태준 평전』의 저자 이대환(2012)은 시론 ‘박태준의 길 젊은이의 길’에서 청암을 이렇게 변호하였다. ‘설령 박태준의 정치적 과오가 63빌딩에 들어간 철근의 무게와 맞먹는다 하더라도 그가 포스코를 통해 한국 현대사에 이바지한 공적은 63빌딩을 63개나 건설한 철근의 무게와 맞먹는다.’
사람마다 여러 관점에서 바라보는 공과 허물이 있겠지만 청암도 한 인간이었기에 어찌 허물이 없겠는가. 하지만 그의 포스코 건설과 포스텍 설립으로 국가 발전에 공헌한 사실만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으리라 믿는다. 이것은 나의 주관적인 평가만은 아니었다.‘담백, 정직했던 정도(正道)의 삶… 늘 국가 생각으로 공적에 헌신’(한국일보, 2011. 12. 14. 7면)이라는 기사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별로 없으리라 생각한다. 지난 2007년 작가 조정래가 한국일보의 ‘내가 본 박태준’이라는 기사에서 인터뷰한 내용을 인용함으로써 청암에 대한 객관성을 담보하고자 한다.
“한국의 경제 발전을 가장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성공시킨 분이다. 위대한 업적이 국민 전체의 생활에 영향을 미쳤고 우리나라가 세계경제 대국이 되는 데 가장 선봉적인 역할을 했다. 가장 모범적인 기업인이었다. 사원들 집을 모두 지어주고 그들의 자녀들에게 모두 장학금을 대주었다. 이런 기업인은 거의 없다. 유일한 분이다. 1991년 구 소련이 무너진 이후 모스크바 대학 총장이 방한하여 포스코를 방문 시‘레닌 동지가 이루고자 했던 이상향이 여기에 있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공장이 완벽하게 전원에 지어졌고 오염을 배출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었다. 사원 주택이라든지 교육 편의시설이 완벽했다. 25년 동안 현재의 포스코를 만들어 놓고 김영삼 정부가 집권했을 때 해외로 쫓겨났는데 퇴직금도 안 받고, 공모주 한 주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자택을 팔아 그 일부를 아름다운 재단에 기부했던 청빈한 사람이었다.
청암의 성품을 보면 사무적이나 업무적으로 엄하고 강직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그림도 잘 그리고 음악, 문학, 예술에 관심이 많았다. 조정래는 그를 거의 완벽한 사람이었다라고 기술하였다. 또한 청암이 국무총리 시절에 경제부총리였던 진념 전 부총리는 이렇게 회고하였다.
“우리나라 산업 근대화의 주역이다. 산업의 쌀이라는 철강 산업을 일으켰고 포항제철(POSCO)이라는 기업을 세우면서 오늘날 세계적인 철강회사로 발돋움시켰다. 관련 산업에도 큰 역할을 하였고 총리 때도 그랬지만 항상 나라 생각, 국민 생각 그런 일념으로 공직에 헌신하였다. 그는 영원히 우리 곁에 함께할 것이다.”
【 참고문헌 】
박태준(1987),『신종 이산가족』, 포항제철 중우회, p138. p175.
2. 이대환(2004),『박태준 평전』, 현암사
3. 이대환외(2012), 『청암 박태준』, 한영문화사, pp35 ~ pp36, p155,
4. 이호(1992),『박태준』, 자유시대사, p91.
5. 조정래(2007),『박태준』, 문학동네, p6.
6. 포항종합제철(1978),『포항종합제철 10년』, p69.
7. 포항종합제철(1989).『언론에 비친 포항제철 20년』, p52.
8. 포항종합제철(1992),『내가 본 포항제철 그 성공의 비결』
9. 포항종합제철(1993),『영일만에서 광양만까지 포항제철 25년사』, p112.
10.포항종합제철(1998),『포항종합제철 30년 발자취』, p116.
11.허남정(2014),『박태준이 답이다』, 씽크스마트 , p171.
12. POSCO(2012), 『청암 박태준 명예 회장 추모기사 모음』
박태준의 삶
1927년 1세
음력 9월 29일, 경남 동래군 장안면(지금의 부산광역시 기장군)에서 태어남.
1933년 6세
아버지를 뒤따라 어머니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감.
1945년 18세
4월, 와세다 대학 기계공학과 입학.
1948년 21세
와세다 대학 중퇴 후 귀향.
부산국방경비대 자원.
남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생도로 선발.
교관으로 있던 소령 박정희와 처음으로 만남.
1950년 23세
6∙25전쟁 발발. 최전선에서 중대 지휘.
발발 이후 명령에 따라 후퇴와 진격을 거듭.
1953년 26세
최전선 투입을 요청, 화천수력발전소를 지켜냄.
5사단 병력을 지리산으로 완벽하게 이동시켜 뛰어난 전략가로 인정받음.
1954년 27세
육군대학 수석 졸업.
1954년 12월, 장옥자와 결혼.
1956년 29세
국방대학 졸업 후 국가정책 수립 담당 제2과정 책임교수로 부임.
1956년 11월, 국방부 인사과장으로 이동.
1963년 36세
1963년 12월, 군인 생활 마침.
1964년 37세
경제개발 5개년계획 실행을 위해 대통령 특사로 일본에 파견.
1964년 12월, 대한중석 사장으로 취임.
1967년 40세
종합제철소 건설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 취임.
1968년 41세
1968년 4월1일,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POSCO) 출범.
동년 11월, 기술연수 프로그램 추진.
1969년 42세
1969년 12월 3일, 포항제철 건설자금 조달을 위한 한일기본협약 체결.
1970년 43세
오스트리아 푀스트의 투자 이끌어냄.
1971년 44세
원료 구매를 위해 호주로 건너가 협상, 일본과 동일한 조건의 장기 구매 계약을
성사시킴.
1972년 45세
1972년 7월, 최초의 국산 후판 생산.
1973년 46세
1973년 6월 9일, 포항제철의 제1 고로에서 처음으로 쇳물이 나옴.
1973년 7월 3일, 포항제철 제1기 설비 종합 준공식.
1974년 47세
제2기 건설의 입찰을 유럽에 개방, 성공적으로 입찰 마무리.
제철소 가동 6개월 만에 1200만 달러의 이익 창출.
1980년 53세
국가보안위원회 입법회의 제1경제위원장으로 부임.
1981년 54세
1981년 3월 2일, 포항제철 초대 회장으로 취임.
1987년 60세
포항공과대학교 첫 입학식.
1987년 4월25일, 광양제철 제1기 설비 종합 준공.
‘철강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영국 금속학회의 ‘베서머 금상’ 수상.
1988년 61세
카네기멜런 대학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 수여.
포항제철 주식 상장.
1991년 64세
세계 양대 신용 평가 기구인 S&P, 무디스에서 포항제철을 최고 수준의 신용 등급으로 책정.
1992년 65세
포항제철 회장 사퇴, 명예 회장으로 추대됨.
해외 업무에 전념.
2004년 77세
미국의 철강 전문 분석 기관인 WSD가 세계철강회사 중 경쟁력 1위 기업으로 연속 3년 포항제철을 선정.
2007년 80세
2007년 육군사관학교 자랑스러운 육사인상 수상.
2011년 84세
2011년 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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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나라는 이런 훌륭한 분이 계셔서 현재 이차대전 이후 독립한 국가 중에서 유일하게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성취한 국가라고 하잖습니까?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변했고... 좋은 글 감명스럽게 읽었습니다.
만근형의 글이 실감나는 것은 누구보다도 지근거리에서 박태준회장의 삶을 지켜봐온 까닭이외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만근형 마음에 새겨있기에 형의 목표도 그 뒤를 따르는 모습이 되지않을까 하는 예감이오. 만인의 사표가됨은 이 나라 정치지형에서는 썩 어려운 일이지만 박태준회장 만큼은 우리모두의 사표임에 틀림없소. 형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그의 발자취가 더욱 뚜렸해졌고 이 글을 보는 우리 또한 그에 대한 많은 사살을 알게 되었네요. 우리나라 소설의 대표작가인 조정래씨가 만약 박태준회장의 일대기를 배경으로 소설을 집필한다면 우리소설에 좋은 지평이 열릴것 같아요, 반근이형이 추구하는 목표도 틀림없이 이루어질것이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