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오 크뢰거 24.- 토마스 만
토니오 크뢰거는 자신의 선실 좁다란 침대에 가서 누웠으나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거센 바람과 그 바람이 풍기는 자극적인 냄새가 야릇하게 그를 자극하여,
어떤 즉러운 일을 불안하게 기다리는 듯 심장이 울렁거렸다.
배가 가파른 파도의 언덕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오며 스크루가 경련을 이으키듯
물 밖에서 헛 돌아갈 때 일어나는 동요 역시 심한 메스꺼움을 느끼게 했다.
그는 다시 옷을 모두 걸쳐 입고 갑판 위로 올라갔다.
바다는 춤을 추고 있었다.
둥글고 규칙적인 파도가 질서정연하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멀리 창백하고 가물거리는 빛 속에서 바다는 찢어지고, 채찍질당하고, 뒤흔들리고,
채이고, 뾰족하니 불길 같은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뛰어오르기도 하는 것이었다.
거품이 부글거리는 아득한 물구덩이 옆에서는 뿔이 돋친 생소한 형상이 일어나,
거대한 팔을 미친 듯이 휘두르며 있는 힘을 다해서 물거품을 사방에 집어 더지는 듯했다.
배는 어렵사리 운항하고 있었다.
물결에 쿵 부딪치고 흔들리고 신음소리를 내면서 이 북새통을 헤쳐나가느라고 쩔쩔맸다.
배 밑바닥에서는 바다 물결에 시달린 북극곰과 호랑이가
괴롭게 울부짖는 소리가 가끔 들려 왔다.
비옷을 입은 한 남자가 다리를 벌려서 가까스레 균형을 잡으며 갑판위를 오르내렸다.
그는 수건 머리에 뒤집어 쓰고 허리에는 등불을 졸라매고 있었다.
그런데 고물에는 함부르크에서 온 그 젊은이가 뱃전에 깊숙이 몸을 수리리고서,
심한 고초를 겪고 있는 듯했다.
"맙소사"그는 토니오 크뢰거를 보자 떨리는 공허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귀신이 울부짖으며 날뛰는 이 꼴을 좀 보십쇼, 선생님."
그러나 그는 말을 하다 말고 급히 돌아서고 말았다.
토니오 크뢰거는 팽팽하게 쳐놓은 밧줄을 하나 움켜쥐고서
걷잡을 수 없이 오만방자하게 나대는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가슴 속에서 환희의 함성이 복받쳐 올라서,
폭풍과 파도를 압도하는데 부족함이 없을 것 같았다.
바다에 대한 사랑에 도취하여 바다에 부치는 노래 소리가 마음 속에서 울려 나왔다.
그대, 내 청춘 시절의 길들여질 줄 모드던 벗이여,
이제 우리는 다시 한 번 하나가 되었노라...
그러나 시는 거기서 끝이 났다.
그것은 완성이 되지 않았다.
원만하게 형성괴지 못했고, 침착하게 전체적인 그 무엇으로 용해되지 못했다.
그의 감정이 너무나 살아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렇게 오랫동안 서 있었다.
그리고 나서 조타실 곁에 놓인 벤치 위에 드러누워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는 조금 졸기까지 했다.
얼굴에 튀어오르는 차디찬 물거품조차 선잠에 취한 자기를 애무해 주는 것만 같았다.
달빛을 받아 유령처럼 괴기스러운 수직의 흰 절벽이 시야에 들어오더니 점점 다가왔다.
묀이라는 섬이었다.
다시금 졸음이 쏟아졌다.
살을 에이듯 얼둘을 파고 들며 마비시켜 버리는
소금기 섞인 물보라 세례에 깜짝깜짝 정신이 들기도 하면서...
완전히 잠을 깨었을 때는 벌써 날이 새었고 밝은 회색빛의 상쾌한 아침이 되었다.
초록색 바다도 잠담해졌다.
아침 식사 때 젊은 상인을 다시 만났는데 그는 낯을 붉혔다.
어둠 속에서 그런 시적인 창피스런 말을 털어 놓은 것이 아무래도 부끄러웠던 모양이었다.
다섯 손가락을 다 사용하여 붉은 빛이 감도는 짤막한 수염을 쓰다듬어 올리고,
병정처럼 활기차게 아침 인사를 하고 나서는 애써 그를 피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토니오 크뢰거는 덴마크에 상륙했다.
그는 코펜하겐에 도착하여 호텔 방을 잡고는,
여행안내서를 펴들고서 호텔을 중심으로 사흘 동안 도시 이곳 저곳을 돌아 다녔다.
그는 팁을 받았으면 하는 눈치를 보이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돈을 주면서,
견문을 넓히려는 돈많은 외국인처럼 행동했다.
그는 국왕신광장과 그 가운데 있는 마상도 보았고,
성모 성당의 원주도 경건한 마음으로 올려다 보았다.
토오르발트젠이 창조해낸 고귀하고도 사랑스러운 조각 앞에서는 오랫동안 서성거렸고,
원형 탑에 올라가 보기도 했고, 여기저기 성곽을 구경하기도 했다.
티볼리에서는 이틀 밤을 다채롭게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이 그가 보았던 전부는 아니었다.
이곳의 집들도 고향의 낡은 집과 꼭 마찬가지로
활처럼 휘고 격자무늬가 있는 뾰족지붕으로 되어 있었는데,
집집마다 옛날부터 익히 알고 있는, 정감어리고, 소중한
그 무엇을 표시하고 있는 듯한 이름들이 붙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 이름들에는 사라져버린 것에 대한
질책과 하소연과 동경 같은 것이 간직되어 있었다.
그리고 눅눅한 바다 바람을 쐬며 생각에 잠겨 천천히 이곳저곳 발걸음을 옮기면서,
그는 고향에서 보냈던 날 밤에 꾸었던 이상하게도 구슬프고 회한이 섞인
꿈 속에서 본 것과 꼭 같은 푸른 눈, 꼭 같은 금발의 머리카락,
꼭 같은 기질과 형태를 가진 얼굴을 보았다.
어느 한길에서는 누군가의 눈길, 쟁반에 구르는 듯한 누군가의 말,
누군가의 까르르 웃는 소리가 그의 가슴 속을 파고드는 일도 있었다...
활기 가득 찬 도시에서 그는 오래 견디지 못했다.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관광객 노릇을 그만두고
어느 해변가에라도 가서 조용히 눕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게다가, 때로는 달콤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어리석기 그지 없는 들뜬 기분,
추억과 기대가 반반씩 뒤섞인 불안감이 그를 자극했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 배를 타고 어떤 흐린 날에(바다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제엘란트 해안선을 따라 헬진괴르를 향해 북쪽을 올라갔다.
거기서부터는 바로 마차를 타고서 포장도로를 따라서 여행을 계속하였다.
해안선을 따라 약간 위쪽에 나 있는 도로를 사십오 분쯤 달려서,
마침내 이번 여행의 당초 목적지이자 마지막 목적지인 온천 호텔에 도착했다.
그 호텔은 초록색 차양을 창문에 달고 흰색으로 칠을 한 아담한 호텔이었고,
그 주변에는 작은 집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리고 나무로 지붕을 얹은, 호텔의 작은 탑은 해협과 스웨덴 해안을 거너다 보고 있었다.
그는 마차에서 내려, 미리 예약해 두었던 밝은 방에 투숙했다.
선반과 옷장 속에 가지고 온 물건을 챙겨 넣고, 잠시 여기서 살 수 있는 채비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