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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제의 소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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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근대화론'이란 한국의 역사학계에서 사용하는 용어로서, 넓게는 최근의 동남아 신흥공업국가에서 보여지듯이 세계적으로 과거 피식민국가들이 식민지하에서 근대화되었다는 것을 통칭하는 것이지만, 좁게는 일제 강점기에 우리 나라가 식민지하에서 근대화되어갔다는 것을 이른다. 이 용어는 '식민지 수탈론'에 대칭되는 말로서, 종래 일제 하에서 일방적으로 수탈을 당하기만 했다는 역사인식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나오게 된 '식민지 자본주의화론' '식민지 개발론', '식민지 공업화론' '식민지 산업화론' '식민지 미화론'등을 통칭해서 역사학계에서 사용하고 있다.1)
일제 강점기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최근 우리 학계에서 부쩍 관심을 모으고 있는 과제다. 일제 강점기에 대한 연구가 부문별 혹은 개별적인 연구에서 적은 편은 아니지만, 그 시기를 총체적으로 이해하여 우리 역사에 자리매김하는 일에는 소홀하였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한국현대사의 원죄처럼 남아' 있는 이 시기는 종래 우리의 기억과 역사에서 제거하고 싶었던 부분이었다. 때문에 일제 강점기를 우리 역사에서 외민족에게 주권을 강탈당했던 한 특정한 시기로 이해하기는 해왔지만 그것을 우리 역사에 어떻게 자리매김할 것인가를 두고 차분히 고민한 적은 별로 없었다. 그것이 우리 역사에서 제거했으면 하는 정서 때문이었다면 역사학계는 자신의 학문과 민족 앞에 정직하지 못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역사학계가 일제 강점기를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었던 것은 오래지 않다. 해방 후 일제의 잔재가 제대로 청산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제시대사 자체에 대한 연구가 금기시되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해방 후에 친일파를 청산해야 한다는 민족적 여망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친일세력이 온존하고 있었다는 것과 좌우가 대립하는 이데올로기적 상황에서 친일세력이 반공세력과 제휴하여 우리 사회의 가치를 혼란하게 만들었던것은 어쩔 수 없이 일제 강점기에 대한 연구를 회피하게 만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일제시대사에 대한 연구는 자칫 친일반공 세력과 충돌을 맞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학계가 금기시된 일제시대사에 연구에서 자유로울 수 있게 된 것은 역설적이게도 극우적인 군부파쇼정권이 지배하던 1980년대에 이르러서다. 종래 비교적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하던 학계가 시련을 겪으면서, 극우적인 군부정권에 맞설 수 있는 대항력을 이 때 키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동안 일제 강점기에 대한 역사인식은 그 전후의 시기와 형식상으로는 연결되어 있었지만, 민족운동사를 제외하고는 단절되어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일제 강점기가 한국사에서 제대로 자리매김되지 않는 데에는 이같은 역사인식상의 문제와도 관련되어 있다. 일제 강점기와 관련하여, 강점 행위를 부각하여 민족의식 내지는 적대의식을 고양해야 할 필요성이 있을 때에는 역사인식보다는 역사의식이, 그것도 깊고 광범한 역사인식을 수반하지 않은 채 즉흥적으로, 먼저 발동되곤 하였다.
민족사에서 통한과 철저한 반성 더 나아가 청산의 대상으로 단죄해야 할 이 시대는 냉정한 이성에 입각한 역사인식으로 정리되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가끔 항일적 민족정서에 기초한 대(對)일본 '역사의식'을 앞세움으로, 광범한 자료와 정확한 논리를 바탕으로 분석적이면서 종합적인 해석을 구사하는 역사인식을 혼란스럽게 하였고 결국에는 그러한 역사의식 자체마저 공허하고 무기력하게 만들지는 않았는지 되씹어 본다.
강한 운동력과 호소력을 갖는 역사의식일수록 냉엄하고 논리적인 역사인식에 기초(제휴)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대한 역사의식은 적대의식을 고양할 필요가 있을 때 감초처럼 동원되긴 하였으나, 때로는 우리 자신의 무능력과 낙후성의 책임을 전가하는 도피처 혹은 분노로 치환되었음을 부끄럽게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일제 강점기와 관련하여 운동성을 수반한 역사의식은 때때로 역사인식을 선행하면서 역사인식의 방향을 규정하곤 하였다. 그 결과 연구의 관심영역이 우선 독립운동사 혹은 민족해방투쟁에 무게를 두도록 하였다. 이것은 해방을 맞은 우리 역사학계가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였음에 틀림없다. 일제 강점기를 거친 우리 민족이 이만큼이라도 민족적 자부심을 갖게 되는 것은 바로 떳떳한 민족독립운동사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일제 강점기를 민족독립운동기로 보고 거기에 열중하는 동안 우리를 강점했던 일본은 그들의 한국 강점기를 합리화하는 수많은 '망언'들을 되풀이해 왔고, 종군위안부 같은 반인륜적인 범죄들을 정당화 내지는 책임회피해 왔다. 이것은 우리의 일제 강점기 연구에서 일제의 침략과정·정책·사회사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거나 불철저했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동안 일본은 여러 차례에 걸쳐 '망언'들을 늘어놓았지만 원론적인 차원을 넘어선, 실증적인 논거를 제시하는 데 미흡했던 것이나, 종군위안부 문제가 자주 대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들의 항의수준에도 도달하지 못하고 정부와 역사학계가 마땅한 대응자세를 취하지 못했던 것은 결국 일제 강점기 연구에서 틈을 보였던 문제와도 관련되었다고 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제 강점기 침략과정과 정책사에 대한 연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제 강점기는 한민족사에서 유일하게 주권을 상실당한 피압박시기였고, 강점당한 그 시기가 세계사상 문명화의 속도가 가장 빠른 시기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에게는 주·객관적으로 근대화를 가장 강력하게 추진할 수 있었던 시기였던 만큼, 결국 일제시기는 한국인에 의한 자율적 문명화와 근대화를 가로막은 시기였다는 인식이 공유되고 있었다.
일제는 국가의 주권을 강탈하고 국토를 강점하고 백성을 노예화하였으며, 자원과 금융, 공공사업을 독점 지배하는 한편 민족산업을 억제하였으며 사회·문화면에서는 전통적인 공동체 사회와 민족문화를 파괴하고 민족말살 정책을 강행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일제 강점기를 인식하는 대체적인 내용이었다. 이것은, 일제 강점기가 한국에 대한 수탈과 민족말살 정책으로 한민족의 발전이 저지되었다고 일관되게 주장한 것으로 뒷날 일부 연구자들에 의해서 '식민지 수탈론'으로 불려졌다.
한국이 1960년대 이래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룩하여 신흥산업국(NICs,NIEs)에 이르게 되자, 이러한 한강변의 기적을 가져온 원인이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작업들이 국내외에서 진행되었다. 이 문제에 관해 그 동안 식민주의 사관에 기초하여, '망언'을 되풀이해 오던 일본 학계가 먼저 나서게 되었다. 그들은 과거 일본에 지배하에 있던 한국과 대만이 전후에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있는 것에 착안, 두 나라가 아사아에서 신흥산업국에 도달하게 된 것은 과거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도출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곧 일제의 식민지배가 한국에 은혜를 베풀었다는, 말하자면 일제의 식민통치가 한국의 근대화·산업화에 도움을 주었다는 주장이었다. 이를 앞서의 '식민지 수탈론'과 구별하여 '식민지 근대화론', '식민지 개발론'이라 한다.
'식민지 근대화론'과 관련, 강점 후 일제는 그들의 식민통치를 '개혁 reformation'이라는 말로 포장하여 외국에
선전물을 뿌렸다. 한말 한국에 와서 활동하던 외국인들 중에도, 한국 정부의 부패 때문에 차라리 '개혁적'인 일본의 진출이
한국민에게는 더 인간다운 삶을 보장할 것이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그는 뒷날 3·1운동에서 일제의 만행을 보고 자기의 옛생각을
고치긴 하였지만, 만약 일제가 더 이상 만행을 자행하지 않았다면 그 외국인은 자신의 생각을 어떻게 정리하였을지 궁금하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딜렘마를 상정할 수 있다. 민족간의 문제에서 그러한 유토피아적인 세계가 실현될 리가 없겠지만, 생존권을 포함한
인간의 제반 권리와 자유를 보장하는 외래적인 지배권력이 있다면, 그 외국인의 생각처럼, 그런 지배체제 하에서 이루어지는
사회변화를 '개혁'이니 '근대화'니 하는 말로서 미화하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1980년대에 일본인 학자들이 먼저 제기한 '식민지 근대화론'은 그 뒤 미국과 한국의 학자들이 가세하여 하나의 '학문적인' 흐름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 주장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경제사학자들은 그들의 주장의 영역을 일제 강점기의 정책 전반에 대한 검토로 확대하면서 종래 '수탈론'적 관점에서 논의된 명제들에 대해서도 거침없는 재검토와 비판을 가하고 있다. 1990년대에 들어서서 한국의 역사학계가 소장 학자들을 중심으로 '식민지 근대화론'이 제기하는 문제들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이제는 논쟁의 단계로 들어섰고 최근에는 '변증법적 지양'을 모색하는 주장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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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근대화론'을 떠올리면서 함께 연상되는 것은 일제 관학자들이 한국을 강점할 무렵에 내세웠고 그 뒤 강점 후에도 줄곧 주장했던 정체성 3) 이 론이다. 정체성 이론은 일제가 한국을 침략·감정하고 그것을 정당화·합리화하기 위해 내세웠던 주장으로 '식민주의 사관'을 골간을 이루고 있다. 이 이론은 처음 한국사회의 정체성을 주장하면서 한국을 근대화시키기 위한 그들의 침략을 합리화하다가 일제 강점하에서는 한국의 자본주의화가 일본 자본의 영양과 혈맥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일제 강점의 '시혜론'을 주장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학자들에 의해 주장된 이 이론은 일본의 정치인과 사회지도자들에 의해서는 일제의 한국 지배 미화론으로 각색되어 오랜 동안 우리의 둔화된 역사의식을 경책해 왔다.
"한국에 있어서의 경제단위의 발전은 마침내 자발적인 것일 수는 없고, 전래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전래적이란 어떤 다른 경제단위의 발전된 경제조직을 갖는 문화에 동화됨에 있다.……한국의 토지를 개척 경작하여 서서히 이를 자본화할 수 있게끔 그 가치를 높이는 방법을 아는 자가 아니면 아니된다. 그렇다면 한국에 있어서 많은 경제적 설비를 베풀고 수천년간 교통을 해온 결과 얻어낸 양해와 동정으로써 한인의 사역함에 익숙하고 또 한인의 토지를 사실상 사유로 삼아 서서히 농사경영을 시도하였으며, 더구나 그 생산품인 미(米)·대두(大豆)에 대하여 최대의 고객인 우리들 일본인은 즉 이 사명을 다 할 수 있는 가장 적당한 자가 아닌가! 하물며 그 봉건적 교육은 세계사상에서 가장 완미(完美)한 것 중에 하나에 속하며, 토지에 대해서는 가장 집중적인 농업자요, 인간에 대해서는 한인에게 가장 결핍된 용감한 무사적 정신의 대표자인 우리들 일본 민족은,… 아무런 봉건적 교육과 이를 바탕으로 하는 경제단위의 발전을 이룩하지 못한 한국과 한국인에 대하여, 그 부패쇠망의 극치에 달한 민족적 특성을 근저에서 소멸시켜,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에 동화시킬 자연적 명운(命運)과 의무를 갖는 유력우수(有力優秀)한 문화의 중대한 사명에 임하는 자가 아닐까!" 5)
복전(福田)의 정체성 이론은 그 뒤 경도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 교수로 있던 흑정엄(黑正嚴)(1895-1949)과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 교수였던 삼곡극기(森谷克己)(1904-1964)와 사방박(四方博)(1900-1973) 등의 경제(사)학자들에 계승되면서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하는 식민주의 사관으로 요지부동의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흑정(黑正)이 한국의 지방경제가 2천년간 진보의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고 그 정체적인 성격을 설명하고 복전(福田)과 같이 '봉건제 결여설'을 주장한 데 비하여, 삼곡극기(森谷克己)와 사방박(四方博)은, 주장의 차이와 강도(强度)의 상이성에도 불구하고, 동양 제국 혹은 한국이 일본의 힘에 의해 '정체성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야 함을 강조하였다는 점에서 일치하였다.
그는 정체성 이론과 관련하여 <<조선(朝鮮)에 있어서의 근대자본주의(近代資本主義)의 성립과정(成立過程)>>(<조선사회경제사연구(朝鮮社會經濟史硏究)>1933)과 <구래(舊來)의 조선사회(朝鮮社會)의 역사적(歷史的) 성격(性格)에 하여> (<<조선학보(朝鮮學報)>>1·2·3집, 1946-1947) 등을 썼는데, 이들 논문에서 구래(舊來)의 한국사회는 발전이라고는 볼 수 없는 정체된 사회라고 규정하고, 한국이 근대화(자본주의화)하는 것은 일본 자본의 영양과 혈맥에 의해서라고 갈파하였다. 특히 한국의 자본주의의 성립과 관련하여 그는 세계사상 자본주의의 성립과정을 다음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였다.
하나는 자기 사회의 진통을 통해서 이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연히 외래 자본주의의 자극에 강요되어 부득이하게 자본주의의 단계로 진입하는 것인데, 전자는 서구의 경우이고 한국은 후자의 경우에 속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사방박(四方博)의 견해에 따르면, "한국의 자본주의화는 외국(일본)의 자본과 외국인(일본인)의 기술능력에 의하여 순수히 타율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그 이유는 개항 당시 한국내에서는 자생적인 자본의 축적도 없고, 기업적 정신도 없었으며, 자본주의의 형성을 희망하는 사정과 그것을 필연케하는 조건이 모두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라" 6) 는 것이다. 여기서 한국의 자본주의화 혹은 근대화를 위한 일본의 역할이 강조되는 반면 그들의 침략과 수탈은 은폐되는 것이다. 결국 일본이 한국에 '진출'한 것은 한국을 근대화하기 위한 것으로 미화되고, 따라서 일본은 한국에서 근대적인 산업과 인프라스트럭쳐, 학교와 각종 시설을 설비하여 한국의 문명화를 도왔다는 것으로 결론나게 되었다.
일본 관학자들의 한국사의 정체성론은 해방 후 남북한 학자들에 의하여 논파되었다.7) 이 점에 관해서는 여기서 상론하지 않겠다. '자생적(自生的) 근대화론(近代化論)' 혹은 '자본주의(資本主義) 맹아론(萌芽論)'은 한국의 역사학계가 실학시대를 연구하면서 거둔 학적인 결실로서 정체성론을 극복하는 이론의 하나다. 이 이론에 의하면, 17-18세기에 이르러 농업·수공업·상업·신분제의 측면에서 큰 변화가 나타나는데 이를 자생적인 근대화의 싹(맹아(萌芽))이라는 것이다. 외세(일본)의 침략은 먼저 이 '자생적인 근대화(자본주의화)'를 철저히 잘라버리고 산업 교육 사회 전반에 걸쳐 식민지적 근대화를 이 땅에 심었던 것이다.
해방 이후 일본은 1953년 제3차 한일회담 때의 소위 구보전관일랑(久保田貫一郞)이 일본의 조선통치는 조선인에게 은혜를 베풀어 준 면이 있다는 요지로 발언한 이래 기회있을 때마다 '망언(妄言)'을 되풀이해 왔다. 8) 망언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되겠기에 여기서 그 역사와 내용을 소개하지 않겠다.
다만 여기서는 그 대체적인 내용이, 첫째 일본이 한국을 무력이나 불법에 의해 강점한 것이 아니고 합법적으로 병합했다는 '한국강점 합법론'과 둘째 강점 후 일제는 한국을 수탈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은혜를 베풀었다는 '식민통치 미화론' 또는 '식민지 시혜론'으로 요약될 수 있다는 점만 지적하겠다.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바로 둘째 번에서 언급되는 '식민통치 미화론' 혹은 '식민지 시혜론'이 바로 '식민지 근대화론'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그들이 조선을 무력으로 불법 강점한 사실과 민족말살을 감행한 사실을 부정하는 한편 그들의 식민통치가 조선의 낙후성을 극복하고 근대화에 기여한 것처럼 주장하는, 전형적인 식민주의사관에 입각한 '조선침략정당화론'이라 할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최근에 와서는 '종전' 50주년을 맞아 '아세아 해방론'도 점차 열을 올리고 있다. 이 또한 '대동아공영권'이라는 기만적인 슬로건 아래 일으킨 만주침략,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아시아인을 구미 제국주의자들로부터 구하기 위한 해방전쟁이었다고 강변하는 것이다.9)
'망언'의 사례에서도 보이듯이, 일본 식자들의 '식민통치 미화론'이나 '식민지 시혜론'은 다음에서 언급할 '식민지 근대화론'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식민통치 미화론'이 '정체성 이론'이라는 '식민주의 역사관'에 기초해 있다면, '식민지 근대화론' 또한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간다면 '식민주의 역사관'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이데올로기성을 앞세워 주장하기에 급급했던 '식민통치 미화론'과는 달리, 통계학적인 근거를 정치(精緻)하게 제시하여 그 실증성(實證性)이 비교가 안될 정도로 뛰어나다 할지라도, '정체성 이론'에 근거하여 설정된 '식민지 시혜론'과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를 제시해야 하는 과제도 안고 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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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통치 미화론' 혹은 '식민지 시혜론'에 입각한 일본인의 '망언'이 거듭되는 동안에, 한국의 대응이 민족적 감정의 차원을 넘어서서 이성적인 치밀성과 보편적인 가치관에 입각한 수준을 유지한 것은 아니었다. 한국 경제가 성장할수록 그 경제성장의 원인이 일제 식민통치의 시혜의 결과라는 류의 '망언'은 빈도도 높아졌고 다양성을 띠면서 체계화되어 갔다. 그런 추세 속에서 1980년대에 들어서서 한국의 경제성장이 식민지하의 경제성장과 밀접하게 관련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학문의 이름으로 포장되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망언'의 기본발상이 식민지 미화론에 있었던만큼 그 아류라 할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전회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가 대학에서 관계(官界)로 진출할 즈음에는 한국의 정부 내에서도 일제 강점기의 경제성장이 한국의 경제성장에 중요한 기반을 제공했다는 인식을 광범위하게 공유하게 되었다.12) 식 민주의에 대한 이같은 견해들의 점출(漸出)과 함께 일제 강점기를 수탈론적 시각에서 이해하던 인식이 '성장론'적 시각으로 변화하는 조짐들이 일본의 경제사학계를 비롯하여 미국과 한국의 학계에도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장(章)에서는 그런 움직임의 과정을 일본의 학계로부터 검토하고자 한다.
3-1, 중촌철(中村哲)13): '식민지 근대화론'이 학계의 차원으로 전화되는 것은 경도대학(京都大學) 교수 중촌철(中村哲)의 활약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그는 1975년 4월부터 경도대학 경제학부의 대학원세미나에서 <일본제국주의(日本帝國主義)의 식민지(植民地)>라는 테마로 연구회를 시작하면서 한국경제사에 관심을 가졌다. 그런 과정을 통해 그는 종래의 설과 어긋난 사실이 많고 이론적으로도 문제가 많은 것을 알게 되어 그런 것들을 검토하면서 '이조(李朝)말'로부터 식민지에 관한 역사적 이미지 혹은 역사과정을 이해하는 틀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는 1983년 마르크스 몰후(歿後) 100년을 맞아 일련의 학술회의를 통해, 당시 겨우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한국자본주의에 대해 역사적 성격을 규정하는 일이 현대의 세계사 인식에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한국자본주의를 역사적으로 파악하는 시점의 필요를 느꼈고, 또 일본의 명치유신(明治維新)과도 공통점을 발견하면서 '중진자본주의라고 하는 일반적이며 역사적인 개념'을 도입하게 되었다고 한다.
중촌(中村)은, 1987년 8월4일 '낙성대연구실(落星臺硏究室)'에서 보고한 바 있고 그 뒤에 문장화한 자신의 논문 14)을 통해, 동아시아 NICs 4개국(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이 급속한 자본주의화를 달성한 요인을 그들이 갖는 공통점에서부터 전반적으로 검토하였다. 말하자면 그들 4나라가 다같이 식민지였으면서도 다른 독립국가였던 나라들보다 먼저 '근대화'를 달성한 이유가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그가 제시한 공통점은 4개국이 영국과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것 외에 첫째 식민지화에 의하여 구사회=전근대적 사회·경제구조가 꽤 철저하게 파괴되고 해체되었다는 것, 둘째 그 위에 본국에 종속하는 경제구조가 다른 식민지에 비하여 보다 깊이 만들어졌다는 것, 셋째 그 과정에서 본국자본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경제가 급속하게 발달했다는 것-식민지자본주의의 형성-인데, 한국과 대만이 특히 이 세가지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며, 바로 이러한 점들이 '동아시아 NICs의 중요한 역사적 조건의 하나'였다고 주장하였다. 즉 식민지가 되어 구사회가 철저히 파괴되고 식민지 본국에 더 철처히 종속화되어 본국으로부터 더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그러한 정지작업을 기초로 하여 본국자본이 활동할 공간이 커졌기 때문에 '식민지 자본주의의 형성'이 가능했다는 뜻이다. 우리는 여기서 그가 주장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의 발상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NICs 4개국이 과거 식민지였기 때문에 해방 후에 급격한 자본주의화가 가능하였다는 발상이다. 이 발상에는 이러한 '근대화'를 가능케 한 식민주의를 꼭 '수탈론'으로만 몰아야 할 것인가 하는 반론적(反論的)인 의혹을 제기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식민지 시혜론을 주장하고 있다는 인상마저 갖게 된다.
1930-1940년대의 공업화와 관련하여 중촌(中村)은 이렇게 주장한다. 앞에서 거론한 토지정책과 산미증식계획의 효과 위에서 1930년대부터 일질(日窒)을 비롯한 일본의 독점자본이 조선에 본격적으로 진출하여 독점자본에 의한 공업화가 급격하게 진행된다. 이 과정에서 조선경제는 20년대까지의 종속경제가 한층 강력하게 일본경제에 종속되어 갔고 식민지자본주의가 공업부문을 중심으로 급속하게 발전하게 되었다. 일본으로부터 진출한 독점자본으로 재조일본인자본(在朝日本人資本)과 조선인자본(朝鮮人資本)이 공업 상업 금융 등에서 급격하게 형성되어 갔다. 그러나 종래의 연구에서는 이 점이 간과되고 일본독점자본의 수탈과 전시체제로 조선인자본의 몰락이 강조되어 왔으며 일본 독점자본은 일본본국경제와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조선내에서는 그 관련산업은 발전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의 공업화는 확실히 일본 본국으로부터 진출하여 온 일본독점자본을 중심으로 하고 있으나, 그 진출에는 조선경제가 그것을 가능케 하였던 조건-앞에서 언급한 식민지적 원축(源蓄)의 진행에 더하여, 인프라스트럭처, 유통조직의 발달 및 관련된 부문의 최소한의 설립 등-이 필요함과 동시에, 진출 자체가 그러한 관련부문을 발달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의 공업화는, 물론 일본 본국까지도 포함하는 조선경제전체를 끌어들이면서 진전된 것이다." 여기서 그는 1930년대의 공업화에서 조선경제의 역할을 강조함으로 식민지 자본주의가 성립되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3-2, 에커트와 미국의 '식민지 조선' 연구 15): 종래 미국인들의 한국에 관한 연구는, 1882년 그리피스Wm E.Griffis의 Corea, The Hermit Nation에서 본격화된다고 하겠지만, 19세기 말부터는 주로 선교사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해방후 미국에서의 한국사연구는 국내에서 섭렵하지 못하는, 예를 들면 북한관계나 공산주의운동, 미국정부문서, 선교사문서 등의 자료를 통해 연구분야를 확대하고, 북한과 공산권의 한국사 연구를 국내학계에 소개하는 데에 크게 공헌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대한 연구도 차차 제고되었는데, 연구분야는 일제의 한국침략에 관한 것이거나 공산주의운동을 포함한 항일민족운동에 관한 테마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연구자들 중 한국인 혹은 한국계가 이런 분야의 연구를 이끌었던 것도 하나의 추세였다.
'한국 자본주의의 식민지적 기원'과 관련해서는 1990년대에 앞서 이미 커밍스 교수에 의해서도 이미 언급되고 있었다.18) 그 러나 식민지시기 연구에서 종래의 보수적이고도 민족주의적인 기존의 해석에 정면으로 맞선 사람은 하버드 대학의 에커트 Cater J.Eckert 교수였다. 그는 그의 저서 《제국(帝國)의 후예(後裔) Offspring of Empire는, 부제(副題) '고창(高廠) 김씨(金氏) 일가와 한국 자본주의의 식민지적 기원(起源)'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일제 강점기에 김성수(金性洙)·김연수(金秊洙)가 설립한 경성방직의 성장과정을 분석한 것으로서 이를 통해 한국의 재벌과 자본주의 형태가 식민지시기에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밝힌 것이다.
그는 자신의 조사에 의하여 조사 당시 한국의 50대 재벌기업의 설립자 중 60퍼센트가, 김씨 일가와 마찬가지로 식민지에서의 사업경험을 어느 정도씩 갖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식민주의는 좋건 나쁘건 한국의 산업발달의 촉매이자 발상지이며 이 식민주의를 연구해 나가다 보면 근대한국의 기원 그 자체와 얼굴을 맞대게 된다"고 갈파하였다. 그는 또 "식민주의는 전후(戰後)시기의 미래의 발전을 위한 사회적 바탕만 남겨 준 것이 아니라 역사에 바탕한 성공적인 자본주의 성장의 방식을 남겨주었다. 여기서 성공적이란 적어도 급속한 산업화를 촉진한다는 좁은 의미에서 성공적이란 의미이다"고 주장하였다.19)
이같이 에커트는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적 이해를 위해서는 식민지시기 이해가 필수적이며 일제가 남긴 경제적·물질적 유산 못지않게 경험적·제도적 유산(산업화의 경험)도 중요하다" 20) 고 주장하였다. 결국 에커트는 일본의 식민지 통치가 한국의 산업발전의 근대적 기초를 다졌음을 주장하는 한편 일제의 강점으로 '자본주의의 싹'이 잘려 나갔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자생적 근대화론'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3-3, 안병직(安秉直) 22) 과 그의 문하의 한국 근대경제사학자들:' 식민지 근대화론'은 안병직(安秉直)교수가 경도대학(京都大學) 교수 중촌철(中村哲) <중진자본주의이론(中進資本主義理論)>을 수용함으로 한국의 경제사학계에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안병직은 1980년대 전반까지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을 주창해 왔던 진보적인 경제(사)학자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다가 1986년에 그가 연구차 동경대학(東京大學)에 가서,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미촌수수(梶村秀樹) 중촌철(中村哲) 굴화생(堀和生) 등 사회경제학자들과 학문적으로 교류하는 동안 특히 중촌(中村)의 주장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 같다. 귀국하여 안(安)교수는 중촌(中村)의 '중진자본주의이론(中進資本主義理論)'에 입각한 한국경제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학계에 커다란 파문을 던졌다. 그는 '식민지 개발론'에 입각한 역사해석을 추구하고 동학·제자들 및 일본 학자들과 학문적인 교류를 넓히며 그들과 함께 몇 권의 책을 도요다(풍전(豊田))재단의 연구비 지원으로 간행하기도 하였다.23)
"이러한 사실은, 한국민들에게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으며, 그들의 세계관을 크게 바꾸도록 강요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 세계관의 전환 속에는 당연히 역사관의 전환도 포함된다. 종래의 한국근대사의 기본구도는, 정치사에 있어서는 「침략(侵略)과 저항(抵抗)」이었고, 경제사에 있어서는 「수탈(收奪)과 저개발화(低開發化)」이었으나, 이제 그러한 구도가 일방적으로 통용되는 시대는 끝난 것이다. ‥‥‥ 한국근대사의 연구가 여전히 「침략과 저항」이라는 구도 속에 매몰되어 있는 것은 시대착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침략과 저항」이 아니라, 근대 국제학계에 제시되고 있는 「침략과 개발」이라는 한국근대사의 구도에 대해서도 눈을 돌려야 한다. 「침략(侵略)과 개발(開發) 」을 경제학적 개념으로 일원화시키면 「수탈(收奪)과 개발(開發)」이 될 것이다." 24)
그는, 현재 한국이 근대화(중진화)를 끝내고 현대화(선진화)를 바라보는 단계에 이르렀는데, 근대화는 모방활동에 의해 가능하나 선진화는 '창조활동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이 창조활동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한국근대사 연구에서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과 민족운동에 대한 상찬(賞讚)'을 강조하는, 독립운동만을 특권화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식민지적 개발은 물론 한국민의 근대민족으로서의 자기변신활동전체(自己變身活動全體)가 일괄적으로 무시되거나 반민족적인 것이라고 매도(罵倒)되기 일수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왜 그렇게 되는가에 대한 설명은 없지만, 독립운동사의 강조가 일제 강점기를 부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안 교수의 논문에서 주목되는 것은 '조선인의 자기개발' 부문이다. 종래에는 '식민지개발'이 수탈일변도였기 때문에 조선인은 일방적으로 몰락하였다고 보았으나, '실증적인 연구'를 통해 "조선인도 자유로운 활동공간을 가질 수가 있었으며, 그들은 농민·자본가·노동자의 제계급으로서 그 나름대로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조선인이 농업, 공업, 노동 등에서 자기개발에 '자발적'으로 노력하였다고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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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에 대한 이해의 주류는 종래 한마디로 '식민지수탈론'이었다. 일제는 식민지수탈을 목적으로 한국을 침략, 강점하였고, 강점하자 '수탈'의 정도를 넘어서서 세계 식민정책사상 그 유례를 쉽게 찾을 수 없는 '민족말살' 정책을 감행하였다. 해방 후 일제의 수탈 및 민족말살 정책에 대한 연구서가 일본에서는 더러 나왔으나 국내의 역사학계에서는 뚜렷한 것이 없었다. 아마도 이 분야에 대하여 가장 먼저 눈뜬 인사 중의 한분이 문정창(文定昌)이 아니었는가 싶다.
그는 "36년사에 관한 집필은 깨끗하고 허물없는 인사들이 할 일이요 필자 그사람 아님을 자인(自認) 자하였던 것인바, 일제가 패주한 후, 이미 20년이 지난 이 나라에, 그 잔악무도하였던 학탈(虐奪)의 36년사는 나타나지 아니하고 만근(輓近) 재현시(再現視)되는 일본제국주의자(日本帝國主義者)들이 득세(得勢)하여 도리어 '36년간의 통치(統治)가 유익(有益)했다'고 횡역(橫逆)의 소리들을 연발(連發)하는 등의 현실(現實)에 심히 자극(刺戟)"되어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등에 관한 그 모든 수법을, 실무면을 통하여 잘 아는" 자신이 붓을 들게 되었다고 하였다.26)
그 뒤 많은 저술들이 나와 일제 강점기에 대한 '수탈론'적 시각은 한국 역사학계의 통설이 되었다. 신용하에 의하면, 일제의 사회경제적 수탈정책으로는 한국을 일본 경제발전을 위한 식량공급지, 일본의 공업발전에 소요되는 원료 공급지, 일본 공업제품 판매를 위한 독점적 상품 판매시장, 일본 자본수출에 의한 식민지 초과이윤의 수탈지, 일본을 위한 노동력의 공급지, 일본의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개편하여 착취·수탈하는 것이었고, 한국민족 말살정책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민족형성 요소들을 말살하기 위하여 언어, 문자(한글), 민족사, 성명(창씨개명(創氏改名)), 민족의식, 민족교육을 말살하고 일본어 사용 강제정책, 일본숭배사상 주입정책, 일본역사 주입정책, 일제의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를 위한 서약정책·동방요배정책·일본신 봉숭정책 등을 강제하였다는 것이다. 27)
4-1, '내재적 발전론'의 거부: 해방 후 한국역사학계가 이룩해 놓은 가장 중요한 업적 가운데 하나가 '내재적 발전론'이다. '식민지 근대화론'의 주장자들은 한국사의 '내재적 발전론'에 대하여 거부하는 입장이다. '내재적 발전론'은 '자본주의 맹아론' 혹은 '자생적 근대화론'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것은 일제 관학자들의 '한국사의 정체성 이론'을 극복하는 이론으로 제시된 것이다. 이것은 조선후기에 한국은 농업, 상업과 화폐, 수공업과 광업 및 신분의 변동면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데에 필요한 여건들이 싹트고 있었다는, 다시 말하면 서구적인 이론으로 보더라도 사회경제적인 각 분야에서 자본주의의 싹(맹아(萌芽))이 보였고 이것이 자라 한국의 근대화를 가능케 했을 것이라는 이론이다.
4-2, 토지조사사업의 문제: 토지조사사업에 관한 토론은 일제강점기에 사회경제사를 연구하는 분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는데, 박문규 인정식 박문병 이청원 등이 주로 식민지 조선사회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 토대가 되는 토지소유관계를 파악하려는 데서 시작하였다. 그 뒤 권영욱은 역둔토사업에 관한 연구를 통해 이 사업의 식민지적 폭력성 내지는 약탈성을 부각시켰다. 이재무 김용섭에 이어서 신용하는 토지조사사업에 관한 연구를 본격화시켰다.37) 그는 조선 봉건사회말기부터 발전되어 온 토지사유제를 일제가 그들의 침략에 적합하도록재확인(재법인)한 과정이 토지조사 사업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이 사업은 토지소유관계의 근대화라는 미명하에 이루어졌지만 이것이 조선의 농업발전의 필요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일제의 식민지수탈정책의 하나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 사업의 본질은 토지를 약탈하고 지세를 수탈하는 데에 있었던만큼 조사사업의 실시과정에서 농민의 권리를 박탈하는 폭력성이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토지의 측량과 신고·사정 과정에서 '민족적·계급적 자의성이 작용'했다는 것이다. 또 실시과정에서 조선 후기 이래 내재적으로 발전해 오던 경작권 개간권 도지권(賭地權) 입회권(入會權) 등 농민의 각종 권리는 부정되고 지주의 사유권만 보장되었다는 것이다.
4-3, '식민지 공업화'의 문제47) : '식민지 근대화론'이 가장 역점을 두고 주장하는 것이 이 분야이다. 1960년대에 한국의 경제성장을 분석하면서 자연히 1930년대 이후의 식민지시기의 경제성장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식민지시기 조선의 국내총생산량(GDP)은 연평균 1912-27년간에는 5.32%, 1927-37년간에는 2.39%, 1912-37년간에는 4.15%씩 성장했는데, 이는 같은 시기의 세계자본주의 제국의 성장률보다도 훨씬 높을 뿐만 아니라 세계적 고도성장이라고 일컬어지는 일본본토의 그것을 상회하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또 1912-37년간의 년평균 산업부문 성장률은 농업 1.63%, 광업 9.84%, 제조업 10.83%였는데, 여기서 농업도 비교적 높은 성장률을 보이고 있었지만 광공업은 이보다 더 높았다. 조선은 같은 시기의 대만과 비교해 보더라도 광공업의 성장률이 높았다.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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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부 정치인들 사이에서 대통령후보 경선과정에서 '박정희 신드롬'이 대선 예비주자들 사이에서 전개되어 국민들의 역사의식을 마비시킨다는 여론이 없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은 지성의 산실이라고 하는 대학의 여론조사에서 먼저 나타났으니, 시정(市井)의 여론에 민감한 정치인들에게서 그 이상의 역사의식을 기대한다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일지 모른다. 경제가 파국을 치닫고 정치가 실종된 상황에서 그같은 불안과 기대를 박대통령을 통해 해소하고자 하는 심리를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가 간지 20년도 되지 않아 유신정권의 그 포학상을 망각해버린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아직도 단련이 필요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것은 해방 후 친일세력을 청산하지 못한, 그리하여 독립운동 세력이 해방된 조국에서 자기공간을 거의 갖지 못하도록 했던 저간의 역사적인 과정을 의도적으로 의식하지 않으려는 것일 뿐 아니라 '독립운동을 담지하였던 민족세력'을 '한국 경제발전의 중심인물'인 '만주군의 육군중위출신 박정희'에 대비시킴으로써 해방 후의 한국의 경제발전에 장애적인 요소가 되는 것처럼 오해토록 유도하는 인상마저 지울 수가 없다. 그 논리대로라면 한국이 다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면 더 발전하였을수 있었겠다는 느낌이고, 만주군 출신이 아니라 일본군 출신이라면 더 경제가 성장했을 것 같다는 상상도 가능하다고 본다. 만주군을 일본군이라고 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 할까. '만주군출신'과 '망언'을 같이 생각하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셋째, 그러면 경제사가들이 주장하는, 일제시대의 숫자상에 잡히는 그런 '성장'이란 것을 어떻게 평가되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다. 이 점은 우리가 앞으로 세워가야 할 성장의 방향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본다. 식민지하에서 개발과 성장이 숫자적으로 잡힌다면, 그것은 <수탈을 목적으로 한 개발(성장)> 혹은 <식민지적 개발(성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며, 그런 개발은 해방 후의 한국 민족사에 긍정적으로 기여했다기보다는 왜곡된 질서로 작용했을 것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수탈을 목적으로 한 개발 혹은 성장은 숫자상의 증가에 관계없이 역사발전을 왜곡시킨다는 것이다. 이 점과 관련, <강도의 논리> 혹은 <사창굴 포주 방식의 논리>를 거론한다는 61) 것은 지나친 주장일까.
63) '식민지 근대화론'이 일제의 수탈속에서도 한국(인)의 변화를 추구하려는 문제의식을 거론했다는 점과 일제의 질곡하에서도 생존투쟁을 벌인 한국인을 부각하려고 한 것은 괄목할 만하다. 또한 일제 강점기를 우리 민족사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도 환기시켜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식민지 근대화론'에서 제기된 문제들은 역사학계가 더욱 심화시켜 역사 이해의 폭을 넓혀가야 할 것이다. 학계 일각에서 '수탈론'과 '근대화론'의 일방적인 역사 이해를 지양하려고 시도하는 것 64) 은 학문연구의 '변증법적 발전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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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ㅋㅋ,.,,왜 ..수탈론과 근대화의 접점에서..안교수의 잔인한 근성을 읽게 되는지는 알겠다./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을 통해 규명하고 싶진 않지만..안교수가 이탈한 학문적 오류는 무엇일까..누가 보면 안명직을 케인즈로 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