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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 여행 스크랩 (하나패밀리)충절과 명승의 고장 충주여행(0.8.15)
숲길 추천 0 조회 62 10.08.20 09:07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충절과 명승의 고장 충주여행(0.8.15)

 

이번 여행은 충절과 명승 그리고 사과가 유명한 충주를 가게 되었다.

광복절 행사 때문에 시청역에서 버스가 출발할 수 없어 교대역 9번 출구에서 버스가 출발한다고 문자와 확인 전화가 미리 왔었다.

대방동에서 버스를 타고 노량진역에서 9호선 전철을 타고 동작역에서 급행으로 갈아타고 고속버스터미날에서 3호선을 타고 교대역 9번 출구로 나왔다.

버스 2대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1대는 횡성가는 버스, 1대는 충주가는 버스이다.

지하철 역에서 나오면서 보니 횡성가는 가이드는 지난 번 연기 복숭아 여행을 갔던 박혜진가이드였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충주가는 버스를 탔는데 우리 가이드는 김상범가이드이다.

남한강을 지나는데 그동안 비가 많이 와서 그런 지 물이 많이 불었다.

먼저 도착한 곳은 신립장군이 장렬하게 전사한 탐금대였다.

기억으로는 원래 우리가 10시 30분에 도착하도록 예정되어 있는데 길이 막히지 않아 10시경에 도착해서 문화해설사 선생님이 오기를 기다렸다.

탄금대 주차장에서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악성 우륵선생추모비였다.

탄금대를 가보기 전에는 탄금대가 남한강변 평야인가 생각을 했는데 그런대로 언덕이었다.

해설사 선생님은 당시 상비군도 없는 상황에서 한성부윤이던 신립장군이 80명의 군사를 데리고 오다가 가는 곳곳에서 강제로 징집을 해서 겨우 8천명을 만들었으나 아무 훈련도 없는 오합지졸이었다고 한다.

새재 등에 진을 치려고 했는데 일본군의 진군속도가 너무 빨라 그곳에 도달하지 못했고 노루목이라는 곳에 진을 칠까도 생각을 했으나 확 터진 곳이라서 오합지졸이 무조건 도망갈 곳이 뻔하기에 이곳에 진을 쳤다고 한다.

결전의 그날 비가 왔는데 이 또한 활을 주무기로 하는 우리군사에게 활에는 아교를 사용하므로 하늘도 우리를 돕지 않는다고 탄식했다고 한다.

신립은 당시 유성룡과 다른 정치적 이념을 가지고 있었는데 신립이 죽자 유성룡이 징비록에서 신립의 작전을 낮추었다고 해설사께서는 이야기 했다.

입구에서 조금 가니 탄금대사연노래비가 있었고 길가에는 조각품들이 전시되어 유적지를 더욱 빛나게 하는 것같았다.

길은 숲이 아주 울창하여 산책로로서는 아주 괜찮은 곳이었다.

이 탄금대는 안동김씨들의 사유지라서 이렇게 잘 보존이 되었다는 것이다.

근처에는 순조의 장인인 김지순의 묘가 있었다.

김지순은 선암사의 대웅전 편액을 쓴 것으로 지난번 선암사에서 본 것같은데 같은 사람인지 모르겠다.

충혼탑으로 가는 길에 청설모가 길에서 먹이를 찾으며 가고 있었다.

저 충혼탑의 글씨는 초대대통령 이승만박사의 글이라는 것이다.

당시에는 국가재정이 부족하여 민간단체가 모금을 하여 공사비를 충당하고 나라에서는 글을 내려보내는 형식이었다고 한다.

탑의 위는 탄환의 모양이고 탑의 기단에 물이 새어 위패가 손상되므로 기단만 공사를 다시 하였다고 한다.

원래는 위도 보수를 할려고 했으나 이것도 근대문화유산이 될 수 도 있다고 탑윗 부분은 그냥 두고 아래 기단부분만 보수를 했다고 한다.

충장공신립장군과 팔천고혼위령탑도 있었는데 신립장군과 병사 들의 모습이 분노와 고통에 찬 모습이라고 하는데 이는 패전으로 위로하는 탑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감자꽃 노래비도 있었는데 애국지사 권태응 선생의 시인데 1968년 윤석중선생의 후원으로 건립되었다는 것이다.

지나다 보니 층층나무 같은데 열매가 익어가고 있었고 탄금대기라는 비석도 있었다.

탄금정 가기 바로 전에 김조순의 묘가 있었는데 비석 머리만 보였고 탄금정은 기둥은 콘크리트로 만든 느낌이 들었다.

탄금정에서는 소나무가 풍경을 가려 전망이 보이지 않았고 열두대로 내려가야 전망을 볼 수 있었다.

탄금정내에는 편액에 시 3편이 새겨져 있었다.

탄금정에서 주차장으로 가야하는데 김상범가이드가 대흥사를 지나 돌아서 가는 길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흥사쪽으로 가는데 지붕에 무엇을 씨운 비각이 있는 것이다.

가까이 가서 보니 신립장군순절비이다.

대흥사로 가보았는데 대흥사는 태고종사찰이고 본당은 대웅전이었다.

대웅전 우측에 약사석불이 입석으로 세워져 있었고 좌측에 산신각이 있었다.

대웅전 외벽에는 팔상도가 그려져 있었고 대웅전내 부처님은 석가모니불과 두분의 협시보살이 있었다.

약사불뒤에는 공덕비가 3개있고 부도도 하나 있었다.

대흥사 옆길로 걸어오니 팔천고혼위령탑이 있었다.

주차장에 와보니 주차장에 충주문화원이 있었고 탄금대가야금 무료 체험교실이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근처에는 임란충신백기장군조응기적비도 있었다.

탄금대를 떠나 다음에 간 곳은 충주시장이었는데 마침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

처음에 무학시장 안을 돌아다녔는데 별로 특이한 것이 없고 복숭아를 5천원어치 사고 시장안에서 병천순대집이 있어 병천순대와 순대국을 먹었다.

장이 서진 충주풍물시장에서 풍란을 샀는데 소엽풍란인지 모르겠다.

다음에 간 곳은 송계계곡이었는데 계곡 옆으로 야영시설이 잘 설치되어 있었고 그간 비와 와서 그런지 계곡의 물이 무섭게 흙탕물이 흐르고 있었다.

덕주사쪽으로 갔는데 큰 나무가 있어 보니 밤나무였다.

제일 먼저 만난 것은 송계계곡의 제4경인 수경대였다.

덕주사를 가다가 중간지점에 위치한 곳으로 북편으로 우뚝한 기암절벽이 빽빽한 수림에 둘러싸여 있고 그 아래 계곡을 따라 흐르는 맑은 물은 거울이 되고 그 속에 담긴 산은 선경을 이룬다 월악신사를 차리고 제천하던 곳으로 이곳에서 제를 올려 산신의 영험으로 난이 평정되었다고 전하며 반석 옆 부분에 수경대라 새겨져 있다.

덕주사 가다가 콧구멍다리를 만났는데 그 곳을 지나가는 물이 무서울만큼 많이 흘렀다.

중간에 가다보니 계곡 중간에 나무가 있었는데 물이 양쪽으로 흘러 뿌리가 드러나는 등 위태롭게 보였다.

드디어 학소대, 덕주산성과 덕주루에 도착했다.

덕주산성도 쌓은 것을 보니 엄첨나게 웅장했고 공이 많이 들어간 것같았다.

학소대는 송계8경중 하나로 월악산(月岳山) 깊은 골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이 감도는 곳으로 절벽을 따라 긴 덕주산성이 자리잡고 있다.

덕주산성 동문과 학소대위 망월대가 어울려져 일대 장관을 이룬 곳인데 덕주사 불경소리가 은은히 울려 퍼지고 엣부터 학이 서식하고 있는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덕주사 마애불(德周寺磨崖佛)로 가는 등산객들이 찾아 쉬어 가는 안식처로 여기에 앉으면 신라 천년사직의 비운을 회상케 한다.

학소대에서 조금 더 올라가니 덕주사가 있었다.

덕주사에서 먼저 눈에 보이는 것은 범종각이고 우측에 아미타불인지 훼깔리는 입상석불이 있고 월악산 영봉 안내석이 있었다.

관음전 앞에는 특이하게 남근석이 있는데 월악산이 음이어서 양인 남근석이 있다 뭐 그런 이야기가 쓰여 있다.

관음전 앞에는 노랑어리연을 키우고 있었고 관음전 우측에는 요사채가 있었다.

관음전 좌측에는 약사전이 있고 약사전 안에는 약사여래입석상이 있었다.

고려시대 조성된 것으로 장인의 것이아닌신심이 돈독한 불자가 원력으로 소박하게 만든것이다. 아픈사람이 기도하고 자기 아픈 부위와 같은 부처의 몸을 긁어다. 그 가루를 먹고 낳았다한다 긁은 자국이 남아 있다.

관음전 좌측에는 팔상도중 부처님이 세상에 코끼리 타고 마야부인의 몸으로 오는 그림이 있었다.

대웅보전에는 부처님 세분이 있었는데 이상하게 가운데 비로자나불이 있고 우측에 노사나불, 좌측에 석가모니불이 있었다.

보통은 비로자나불을 모시면 대적광전 이런 편액이 있는데 좀 특이했다.

대웅보전의 꽃살문이 아주 특이하고 멋지게 조각되어 있었다.

대웅보전의 외벽에는 나그네가 코끼리에게 쫓겨 구덩이의 칡덩굴에 메달려 있는 사람이 세상사는 모습, 원효스님이 해골의 물을 마시는 그림, 목탁의 기원에 관한 그림, 심우도, 팔상도가 그려져 있었다.

덕주사 주위의 풍경은 월악산의 아름다운 풍경이 병풍처럼 쌓여져 있었다.

대웅보전 옆에는 대불정주비각이 있었는데 안에는 대불정릉엄신주비가 있었다.

비문의 첫줄은 대불정주라 음각된 한자로 시작하고 105자로 추정되는 범문(梵文)이 기록 되었다.

고려후기 성행하던 수능엄경(首楞嚴經)에 있는 능엄주(楞嚴呪)를 새긴 것이다.

범문으로 된 비문이 현존하는것으로 유일하며 국보급이다.

고려후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덕주사 산신각도 있었는데 두 개의 큰 돌 사이에 부조 형태로 산신을 조각해 놓았는데 처음 보는 특이한 형태였다.

덕주골로 내려왔는데 우리의 김상범가이드는 초딩 1년생과 재미있게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다음으로 간 곳은 사과를 따는 체험을 하는 것이었는데 알고보니 사과는 가을에 따는 것과 지금 따는 것이 구분이 되어 있었고 주인아주머니와 잘 생긴 아들의 안내로 사과 3개를 딸 수 있었다.

그곳에는 작은 야생화 화원도 만들어 놓았고 연못도 있었다.

여기는 네발나비가 많아 네발나비를 담을려고 많이 씨름을 하였다.

야생화 화원 앞에서 기념사진을 담았는데 김상범 가이드가 사진을 잘 찍으니 김상범 가이드만 사진을 담았다.

사과 따는 체험을 마지막으로 충주를 떠나 교대역 9번출구까지 무사히 왔다.

오는 도중에 차에 보니 입벌레같은 친구가 딸려 와서 그냥 버스에 두면 죽을 것 같아 교대역에 있는 풀밭에 두었는데 살 수 있을련가 모르겠다.

지나와 보니 이 여행도 참으로 이야기가 많은 곳이었고 한번쯤 가볼만한 곳이었다.

김상범가이드와 기사님이 너무 수고하셨고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립니다. ^^

 

이 여행의 다양한 이야기는 아래에 옮겨왔으므로 관심있는 분은 읽을 수 있습니다. ^^

 

탄금대

 

1976년 12월 21일 충청북도기념물 제4호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7월 9일 명승 제42호로 변경되었다. 탄금대는 본래 대문산이라 부르던 야산인데, 기암절벽을 휘감아돌며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과 울창한 송림으로 경치가 매우 좋은 곳이다. 탄금대란 신라 진흥왕 때 우리나라 3대 악성(樂聖) 중 하나인 우륵(于勒)이 가야금을 연주하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삼국사기》에 보면, 우륵은 가야국 가실왕(嘉悉王) 때의 사람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가야금을 가지고 신라에 귀화하였다. 진흥왕이 기뻐하여 우륵을 충주에 살게 하고는 신라 청년 중에서 법지(法知)·계고(階古)·만덕(萬德)을 뽑아 보내 악(樂)을 배우게 하였다. 우륵은 이들의 능력을 헤아려 각기 춤과 노래와 가야금을 가르쳤다 한다. 그가 이곳에 터를 잡아 풍치를 즐기며 커다란 바위에 앉아 가야금을 타니, 그 미묘한 소리에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이곳을 탄금대라 불렀다. 칠곡리(지금의 칠금동), 금뇌리(지금의 금능리), 청금리(지금의 청금정) 등의 마을 명칭은 지금까지 전한다.

탄금대는 또 임진왜란 때 무장 신립(申砬)이 8,0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군대를 맞아 격전을 치른 전적지이기도 하다. 탄금대 북쪽 남한강 언덕의 열두대라고 하는 절벽은 신립이 전시에 12번이나 오르내리며 활줄을 물에 적시어 쏘면서 병사들을 독려하였다고 하는 곳이다. 전세가 불리하여 패하게 되자 신립은 강에 투신자살하였다.

이곳에는 신립의 충의심을 기리는 탄금대비를 비롯하여 신립장군순절비, 조웅장군기적비, 악성우륵선생추모비, 충주문화원, 야외음악당, 충혼탑, 감자꽃노래비, 탄금정, 궁도장, 대흥사 등과 조각공원 및 체육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충주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탄금대사연노래비

1968년 당시 KBS 충주방송국에 근무하던 이병환 씨가 글을 쓰고 향토작곡가 백봉 씨가 곡을 붙인 '탄금대 사연'은 충주 지역의 대표적 관광지인 탄금대를 소재로 한 노래로 40년 가까이 충주의 대표적인 향토가요로 애창돼 오고 있다.

남한강과 달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해 있는 탄금대(彈琴臺)는 신라 때 악성(樂聖) 우륵이 가야금을 타고 풍류를 읊으며 후학을 양성했고 임진왜란 당시 충장공 신립 장군이 왜적을 맞아 배수진을 치고 싸우다 장렬히 산화한 곳으로 노래에는 이같은 사연이 아련하게 표현돼 있다.

처음 여가수 백진주 씨가 취입한 이후 주현미 씨 등 모두 6명의 가수가 이 노래를 취입해 대중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왔으며 지난 2000년부터는 노래방 기기를 통해 충주는 물론 국내외에도 알려지게 됐다

이병환 작사/백봉 곡/ 주현미, 백봉 노래

1) 탄금정 굽이돌아 흘러가는 한강수야 신립장군 배수진이 여기인가요

열두대 굽이치는 강물도 목메는데 그 님은 어데가고 물새만이 슬피우나

2) 송림이 우거져서 산새도 우는가요 가야금이 울었다고 탄금인가요.

우륵이 풍류 읊던 대문산 가는 허리 노을진 남한강에 님부르는 탄금아가씨

 

충혼탑

충주상이군부용사분회와 대한제대장병보도분회에서는 호국영령들의 위한 충혼탑을 건립하게 하여 그뜻을 기리고 건립하기로 결의하고 건립장소를 모색하다가 선열들의 피가 맺힌 전적지인 탄금대에다 건립하게 된 것이다.

충혼탑은 건립준공은 1956년 9월(기공 9개월만에)이다. 이탑의 건립 안치대상은 해방후 특히 6.25동란등으로 국가의 방패가 되어 낙화한 충주 중원지방 전몰장병들이다.

충혼탑은 문화관에서 열두대로 가는 길 옆에 넓은 부지 위에 서 있다. 주변을 괘 넓고 잔디를 잘 가꾸었고 그 가운데 978㎡의 넓이에 직사각형 모양으로 철책을 세워져 있고 정면에 310cm크기의 철문을 만들어 출입을 통제하였다. 철책 양옆에는 2개의 국기게양대를 세웠고 탑 앞에는 78 ×124cm 크기의 화강암으로 만든 상석을 놓고 상석 앞에는 향로석이 있으며 향로석 옆에는 6각의 향합석이 있다. 상석 뒤에는 탑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고 탑의 기단부는 2층으로 구성하였는데 초층 기단의 크기는 360cm 정방형에 높이는 165cm이며 2단 기단은 240×245cm에 높이는 118cm 정도이며 그 위에 10cm의 탑신받침을 놓고 5개의 탑돌을 층층으로 쌓아올려 탑신을 구성하였다. 탑신의 아래쪽에는 전면에 무궁화를 양각하고 그 위로 忠魂塔(충혼탑)이라 음각하고, 그 위에 태극기를 조각하였으며, 맨 위의 돌은 탄환 모양으로 만들어 탑신을 마무리지었다. 전체의 석재는 모두 화강암이며 높이는 8.5m이며 특히 충혼탑이란 글씨는 초대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이라는데 의의가 크다

이 탑은 서기 1955년 11월에 대한민국 상이군인용사회 충청북도 충주분회와 대한민국제대장병보도회(현 재향군인회)에서 광복 이후 전몰한 충주 중원지역의 장병과 경찰관 군속 군노무자 2,838위의 넋을 추모하기 위하여 충혼탑을 건립하였으며 매년 현충일에 제향을 올린다. 건립예산은 200만환이며 건립위원회 위원장 김영호 부위원장 이낙진 오동필 총무군장에 장세진 외 11명의 임원들로 구성되었다. 충혼탑에 모신 영령들은 모두 충주지역 출신자로 2,838위(位)이다.

 

감자꽃

 

자주꽃 핀 건 자주 감자

파 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 보나 마나 하얀 감자

 

탄금대기

탄금대 북쪽 강 쪽, 열두대 입구에 이르는 곳에 육당 최남선이 글을 썼다는 탄금대기가 세워져 있다. 이 비는 높이 294㎝, 너비 67㎝, 두께 36㎝로 1953년 7월에 세워졌는데 충주의 지리적 위치의 중요성과 탄금대의 유래 및 충주의 변천과 신립 장군의 순절, 고려 몽고와 침입 때에 김윤후의 활약 등 지난날 충주의 역사를 내용으로 하고있어 오늘의 우리에게 거듭 역사적 사적지로서의 위치를 돋보이게 해주고 있다.

 

탄금정

과거의 탄금대 육각정이 새로 이층 콘크리트 건축으로 단장된 후 이름까지 탄금정으로 바뀌었다.

탄금정이란 정자는 2층으로 누각형태의 정자다. 탄금대 열두대 가는 길목 전망이 좋은 곳에 서 있다. 탄금정의 1층은 2단의 기단을 만들고 한 변의 길이가 7m의 정방형 위에 한 변의 길이가 80cm이 정방형의 주초석(柱礎石)을 놓고 그 이에 사방 50cm크기의 사각기둥을 각각 280cm 거리에 4개를 놓아 2층 누각을 지탱하고 있으며 폭 120cm의 계단을 만들어 2층으로 올라가는 통로를 만들었다. 2층은 720cm를 한 변의 길이로 하는 정방형으로 가운데 일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고 가에는 난간을 둘러 전망대로 이용되고 있으며 네 기둥사이에는 지름 60cm의 원형콘크리트 기둥을 세워 초익공(初翼工) 계통의 공포를 구성하였다.

이 정자의 내력을 보면 본래 천운정(天雲停)으로 1903년(광무7년) 충청북도 관찰사 김양규씨가 자기조부가 충주목사로 재임당시 지금의 교육청자리에 있던 연못(당시는 상연당이라고 했다)가운데에 석가산을 쌓고 그위에다 육각정을 세우고 천운정이라 이름짓고 매년 7-8월이 되면 수령과 유생들이 모여 시를 짓고 즐기던 곳이었다.

광무10년(1906)에 충주공립보통학교(현교현초등학교)를 이곳에 건축하고 운동장으로 사용키 위해 상연정을 메우게 되며 육각정은 사직산으로 옮기고 임시 석영으로 사용하다가 , 1955년 당시 충주읍장이었던 박승두가 이 정자가 사직산에 이건되어 있던 것을 탄금대 열두대 위로 옮긴 것이다. 목조로 된 이 정자는 낡아서 1976년 6월 이 자리에 현재의 탄금정을 세우고 6각형이던 천운정은 1977년 호암지 3번 국도 옆 동산에 콘크리트 건물로 6각정 정자가 다시 지어졌다.

 

충장공신립장군순절비(忠壯公申砬將軍殉節碑)

 

있는곳 : 충주시 칠금동 탄금대

크기 : 전체높이 376cm

만든때 : 서기 1981년

충장공신립장군순절비(忠壯公申砬將軍殉節碑)는 탄금대 대흥사 뒷편에 있다. 비의 받침돌으 거북 형태로 만들고 앞 뒤 길이가 260cm에 달하고 폭이 147cm이며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거북 형태로 조각한 수법은 간단하며 치졸하다. 빗돌은 높이가 197cm이며 너비가 79.5cm, 두께는 28.5cm로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앞면에는 한자로「忠壯公申砬將軍殉節碑」라 쓰고 뒷면에는 전부 한글로 비문을 쓰고<>안에 한자를 넣어 뜻을 명확히 하였다. 대체로 비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띄어쓰기는 하지 않았다. 비(碑)의 우측면에 사람(서번 박재륜), 글자를 쓴 사람(유재 김성규), 세운사람(충주시장 김태수)을 기록하였다. 蓋石(개석)은 이수형태로 너비 100cm, 두께 51cm, 높이 100cm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앞면과 뒷면에 각각 용 두 마리를 양각하였으나 그 조각 수법이 치졸하다.

忠壯公申砬將軍殉國之碑(충장공신립장군순국지비)비문내용

조선(朝鮮)조(朝) 선조(宣祖) 二十五年인 서기 一五九二年 四月二十 대군으로 부산(釜山)에 침입하여 부산성(釜山城), 동래성(東來城)이 함락되고 계속해서 영호남 일대의 패전 급보가 조정에 전해지자 평소에 유비무환의 국가적 시책 없이 동서 당쟁에 펴할 날이 없던 정국과 민심은 큰 동요를 겪지 않으면 안되었다.

다시 두 갈래의 방어책이 있었으니 그 하나는 도성을 수호하는데 맹장인 한성판윤(漢城判尹) 신립(申砬)이어야 하겠다는 것이 선조대왕의 뜻이요. 다른 하나는 조정대신 일부에서 신립장군이야 말로 그의 온성 ,경원 동북방면에 있어서 뛰어난 지모 방약으로 야인을 소탕하여 백년강의 변환을 평정한 공으로 미루어 마땅히 그를 도순변사로 삼아 적의 기세를 새제의 요충에서 막아야 한다는 대립된 의견이었으나 여러번 왕에게 주청하게 되어 왕도 그의견을 따라 신립(申砬)을 팔도도순변사(八道都巡邊使)로 삼아 병마를 갖추어서 의주목사(義州牧使) 김여물(金汝 )을 종사관으로 하고 왕이 친히 상방보검(上方寶劍)을 하사하여 출전케 하였다.

신립장군이 충주에 도달하기는 四월 二十七일로 병사 八천여명을 인솔하여 충주 단월역에 진을 치고 천연의 요새 새제를 정찰케 하였으나 적의 노도 같은 기세로 봉아 그 선봉이 새제를 침범하였을 것이 확실한 사태이므로 차라리 달천강에 배수진법으로 훈련이 미흡한 병사로 하여금 최후의 일병까지 싸워서 적세를 꺾기로 결정하였다. 다음날 二十八일 적의 무리는 산허리와 들판으로 밀어 다치니 칼을 번쩍이고 총포소리 요란히 터지는 가운데 창검궁시등 불리한 무기로 아군의 병사를 몇 번이고 적진에 직격시겼으나 저세가 불리함을 판단한 신립장군은 단기로 적진에 돌입하기를 몇 차례 수십명의 목을 베고 혈전사투하다가 왕에게 장계를 올리게 하고 결국 탄금대 위에서 강물에 몸을 던져 순국하였다. 아아 슬프도다. 장군의 나이 四七세로 호국의 초석이 되니 뒤에 영의정(領議政) 평양부원군(平壤 府院君)에 추증되고 시호(諡號)는 충장(忠壯)이며 三八九년이 지난 오늘 비로소 민족의 한이 서린 이 자리에 돌을 닦아 비문을 새겨 그 순국충의를 천추만대에 길이 저하고자 한다.

 

一九八一년 十월 十五일

서번 박재륜 짓고

유재 김성규 쓰고

충주시장 김태수 세우다.

 

임란충신백기장군조웅기적비

 

임진왜란 중 의병활동을 하다 장렬히 전사한 조웅 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994년 유림(儒林)에서 탄금대 충주문화원 앞에 세운 비석이다. 비의 구조는 거북모양의 화강암 받침돌에 대리석으로 비석을 세우고 위에는 화강암제의 이수를 얹었다. 비에는『임란충신백기장군조웅기적비』라고 새겨져 있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조웅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된 건물로 정면 1칸, 측면 1칸으로 구획하여 사면에 홍살을 두른 내부에 편액이 붙어 있다. 구조는 긴 네모꼴의 다듬은 돌로 낮게 쌓은 기단 위에 둥근 주춧돌을 놓고 둥근 기둥을 세웠는데, 기둥 윗부분 주두(柱頭)위에 다시 소형주두(小形柱頭)를 놓고 전형적인 이익공계통(二翼工系統)의 공포로 구성하였으며, 창방으로 연결된 기둥 사이에는 하나의 화각반(花刻盤)을 놓아 주심도리(柱心道里) 장혀(長舌)를 받쳐주고 있다. 가구(架構)는 양쪽 대들보 상부에 화려하게 풀모양 조각을 한 파련대공(波蓮臺工)을 설치하여 굴도리의 종도리(宗道里)를 받치도록 한 삼량집으로 홑처마 맞배지붕을 이루고 건물에 모두 단청(丹靑)을 하였다.

 

덕주산성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된 포곡식 산성.

석축과 토축의 혼합 형식으로, 현재 유구는 거의 무너졌으나 조선시대에 쌓은 남문·동문·북문 등이 남아 있다. 이곳은 문경과 충주를 잇는 도로를 차단하는 전략적 요새지로서 월악산 산마루와 그 지맥을 둘러싸고 내성과 외성을 갖춘 나성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일반적인 성곽과는 달리 계곡을 성으로 쌓고 그밖에는 험준한 산 능선과 암벽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는데, 성벽은 2m 정도의 높이로 쌓았다.

이 산성은 신라 경순왕의 큰딸 덕주공주가 피난하였던 곳이라고 전해오며, 1256년(고종 43)에는 몽고병이 충주를 공략하고 이곳으로 진격하자 관리들과 노약자들이 이 산성으로 피신하였는데, 갑자기 구름·바람·우뢰·비·우박이 쏟아지므로 적병들은 신이 돕는 땅이라 하여 달아났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또 조선 말 명성황후가 흥선대원군과의 권력 암투에서 패배할 것을 예상하고 은신처를 마련하려고 이곳에 성문을 축조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이 산성이 축조된 이후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시대에도 중시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월악산과 덕주사

월악산의 주봉인 영봉靈峰의 높이는 1,097m.

달이 뜨면 그곳에 걸린다 하여 '월악'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덕주사의 창건 연대는 587년(신라 진평왕 7)으로 처음에는 월악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고 한다.

신라가 멸망한 후 경순왕의 장녀 덕주공주와 오빠 마의태자가

국권 회복을 다짐하며 금강산으로 가던 길에 이곳에 3년간 머물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덕주공주는 커다란 바위에 마애불을 조성하고 이곳을 덕주사라고 개칭하고

죽을 때까지 머물렀지만 마의태자는 금강산으로 올라가 신계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화강암에 양각된 산신도가 봉안된 산신각과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비문 중에 유일하게

범문梵文으로 기록된 대불정릉엄신주비는 덕주사의 연륜 대변하고 있었다.

한국의 5대 악산(嶽山)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월악산(1,094m)은 경치 좋은 계곡을 여럿 거느리고 있다. 그중 월악산 서쪽 한수면 송계리를 거쳐 충주 미륵리까지 이어진 8㎞의 송계계곡은 기암절벽을 휘돌아 흐르는 맑은 물길 주변에 성문·불상·석탑 등 유물이 흩어져 있어, 관광을 겸한 문화유산답사를 함께 할 수 있는 코스로 꼽힌다.

우선 송계계곡의 여덟 절경을 이르는 송계팔경부터 짚어보자. 월악산의 최고봉인 월악영봉, 넓은 암반과 깊은 소가 절경을 이루는 송계계곡 입구의 자연대, 30m의 3단으로 이루어진 월광폭포, 신라시대에 사당을 설치하고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수경대, 한 쌍의 학이 월악산을 오가며 살았다는 학소대, 기암의 계곡을 굽이도는 맑은 물과 어울린 절벽이 일품인 망폭대, 용이 승천하였다고 하는 와룡대, 하늘나라 공주가 하강하여 목욕을 했다고 전해지는 팔랑소가 그것이다.

이런 절경으로 둘러싸인 송계계곡은 전설의 공간이다. 옛날엔 문경~하늘재~충주 수안보를 잇는 큰 길에서 송계계곡으로 들어서려면 샛길로 닷돈재를 넘어야 했다.

그러면 계곡을 따라 나있는 길은 남한강과 곧바로 연결되고 사방으론 험한 바위산들이 솟아있으니, 좁은 계곡 길에 성벽만 버티고 있다면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가 된다. 그래서 쌓은 게 덕주산성(德周山城)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처음 쌓은 덕주산성은 문경과 충주를 잇는 도로를 차단하는 역할을 해온 석성이다. 당시 둘레가 9,800m에 이르렀다는 성벽은 거의 무너졌으나, 조선시대에 세운 남문·동문·북문 이렇게 3개의 성문이 남아 있는 송계계곡을 돌아다니다 보면 마치 과거의 한때를 거닐고 있는 듯한 즐거움에 빠져들게 된다.

 

약사전

 

덕주사약사여래입상(충북 유형문화재 제196호)

 

원래 정금사 절터라고 전해오던 곳에 있던 불상으로, 충주댐 건설로 1983년 4월 현위치로 옮겼다. 부분적으로 닳았을 뿐 비교적 완전한 모습에 속한다. 특히 오랫동안 땅에 묻혀 있었기 때문에 몸통의 밑부분이 약간 파손되었을 뿐 옷주름 등은 상태가 양호하다.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낮고 작은 머리묶음이 있으며, 얼굴은 길쭉하지만 풍만하다. 양쪽 눈은 가늘고 긴 듯 하나 닳아서 구분하기 어렵고 양쪽 귀는 길게 늘어져 어깨에 닿았다. 옷은 왼쪽 어깨에만 형식적으로 표시하고 가슴 부분이 널찍하게 드러났으며 왼쪽편에 주름이 몰려 있다. 오른손은 가슴에 들고 손바닥을 밖으로 드러내어 엄지에 새끼 손가락을 구부려 대고 있으며, 왼손은 수평으로 배 아래 부분까지 들어 약그릇을 받들고 있으므로 약사여래불임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몸통에 비해 머리가 크며 대좌(臺座)는 별도로 만들어 양 발만을 윗면에 조각하고 위로 몸통을 얹고 있다.

 

남근석 - 하덕주사는 어느때 절이 소실되었는지 모르나 절입구의 남근석을 보면 이곳이 남아선호 신앙이 깃들었던 원시 신앙지였음을 알 수 있고 탑 기단석,부도,연꽃무늬 석등, 와편등이 남아있어 절터였음을 증명한다.

 

대불정주범자비(유형문화재 제231호)

1988년 2월초에 한수면 송계리에서 덕주골까지 도로확장공사중 월광사지(月光寺址) 입구인 송계리 답(沓) 147번지 논둑에서 발견되었고 월악산국립공원관리사무소로 옮겨졌다가 현재는 하덕주사(下德周寺) 경내로 옮겨 비각을 세웠다.

비문은 첫줄에만 한자로 대불정주(大佛頂呪)라 새기고, 다음 줄부터는 범자문(梵字文)으로 새기었는데 모두 11행이다. 각 행의 자수도 고르지 않고 범자로 새긴 부분은 글자의 크기도 일정하지 않다. 4행까지는 8자, 5~6행은 7자, 7~11행은 12~13자로 글자의 크기도 일정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글자 수는 모두 105자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며, 월광사(月光寺)와 관련있는 것으로 보인다.

월광사는 원랑선사탑비(圓朗禪師塔碑: 보물 제360호)가 있었던 곳으로 통일신라 시대의 명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비석은 질이 떨어지는 화강암 자연석으로 세로 161cm, 가로 163cm의 방형을 이루는 자연석으로 모두 둥글다. 두께는 상단부는 30~40cm로 불규칙하며, 하단부는 28cm이다.

특히 하단부 바닥면은 정으로 다듬은 흔적이 뚜렷하여 비의 좌대 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현재까지 알려진 범자문비는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에 4개가 소개되고 있다.

이는 모두 대불정다라니당(大佛頂多羅尼幢)이라는 동일 제호들로 모두 현재 휴전선 북방에 있다.

광주의 십신사지 범자비(광주시 유형문화재 제3호, 광주민속박물관 앞뜰 소재)가 이름대로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도 범자비라고 하였으나 비신 상단부에만 범자의 옴(Om)자를 도안화하고 있을 뿐 비문은 모두 한자로 되어 있어 엄밀히 보아 범자비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현재까지 남한에는 이 송계리의 『大佛頂呪碑』가 사실상 유일한 “범자문비”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여행의 대표적 사진이다. 송계계곡에서 덕주산성과 덕주루를 같이 담아 보았다.

 

 

고속버스터미날에서 3호선으로 갈아타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을 담아 보았다.

 

 

충주시내에서 다리를 건너며 그동안 비가 많이 와서 남한강에 물이 많다.

 

 

탄금대에 도착했다, 악성우륵선생추모비이다.

 

 

탄금대공원 안내도이다.

 

 

탄금대노래사연비이다.

 

 

조각품이 전시되어 있다.

 

 

충혼탑을 보는데 청설모가 뭐 먹을 것이 있나 두리번 거린다.

 

 

충혼탑이라는 글씨가 이승만대통령 글씨라고 하며 탑의 위가 탄환처럼 만들었다고 한다.

 

 

저기 묘가 순조의 장인인 김지순 정승의 묘라고 한다.

 

 

충장공신립장군과 팔천고혼위령탑이다.

 

 

해설사가 열심히 해설하고 있다.

 

 

감자꽃 노래비이다.

 

 

탄금정으로 가는 길인데 송림이 빽빽하다.

 

 

탄금대기이다.

 

 

탄금정이다.

 

 

소나무 사이로 보이는 저 바위가 열두대인가 보다.

 

 

신립장군순국지가 열두대 바위 바로 옆에 있다.

 

 

열두대에서 본 풍경이다.

 

 

 

 

 

열두대에서 탄금정을 본다.

 

 

신립장군순절비이다.

 

 

대흥사 대웅전과 산신각 그리고 약사불이다.

 

 

석가모니불과 협시불이다.

 

 

옆에서 본 대흥사의 모습이다.

 

 

공덕비들이 있다.

 

 

탄금대공원에 있는 충주문화원의 모습이다.

 

 

임란충신백기장군조웅기적비가 있다.

 

 

저기가 무학시장이다.

 

 

병천순대집의 벽에 낙서가 많다.

 

 

충주풍물시장의 풍경이다.

 

 

 

송계계곡의 수경대이다.

 

 

가는 길에 본 콧구멍 다리이다.

 

 

물이 많이 흐르니 계곡 중간의 나무가 위태롭다.

 

 

 

덕주산성과 덕주루이다.

 

 

학소대이다.

 

 

우측에 보이는 것이 남근석이다.

 

 

관음전의 모습이다.

 

 

관음전의 관세음보살이시다.

 

 

약사전이다.

 

 

 

관음전 옆과 요사채이다.

 

 

석불과 영봉 안내표지석이다.

 

 

신도가 대웅전을 향하여 기도하고 있다.

 

 

대웅보전의 모습이다.

 

 

대웅보전의 부처님이시다.

 

 

대웅전의 꽃살문이다.

 

 

대웅보전 외벽에 그려진 그림인데 위는 인간의 삶의 모습을 아래는 부처님이 사람이 죽은 모습을 보는 그림같다.

 

 

대웅보전 외벽에 심우도와 팔상도가 같이 그려져 있다.

 

 

범종각과 병풍처럼 둘러싼 산이다.

 

 

대웅보전 옆면의 벽화이다.

 

 

산신각이다.

 

 

대불정주비각이다.

 

 

내려가면서 덕주산성과 덕주루를 다시 본다.

 

 

가이드와 어린이가 물싸움을 하고 있다.

 

 

비가 와서 송계계곡의 물이 대단하다.

 

 

야영장의 모습이다.

 

 

누리장나무 꽃을 향하여 박각시가 돌진하고 있다.

 

 

제비나비도 누리장나무꽃에 붙어 있다.

 

 

드디어 사과체험 장소에 왔다.

 

 

사과가 탐스럽게 익어간다.

 

 

사과를 따 가지고 와서 쉬고 있다.

 

 

 여기는 네발나비가 많다.

 

 

박주가리를 마지막으로 충주를 떠났다.

 

 

하나투어에 하나패밀리 덕분에 좋은 여행을 하게 되었다.

하나투어 임직원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더욱 발전하길 기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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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0.08.20 20:48

    첫댓글 좋은글 즐감했습니다.

  • 10.08.20 21:49

    숲길님 문화 탐방은 역사 소설을 읽는 마음으로 봅니다.
    머리가 얼마나 좋으시면 해설사의 말한마디 한마디를 놓지지않고 다 머리에 담아오시는지
    사진찍고 해설사 얘기 귀담아 두시랴 정말 바쁘신 문화탐방기행을 편히 앉아 봅니다.
    감사합니다.^-^

  • 10.08.21 05:06

    님처럼 방방곡곡을 여행하면 님처럼 마음이 넓어질까요? 꽃구름님께 소식 자주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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