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롬비아 여행이 끝나갈 무렵부터 베네수엘라에 갈 것인가를 놓고 한참을 고민했다. 베네수엘라는 남미에서 치안이 나쁘기로 양보 없는 1등 국가로 꼽히기 때문이다. 남미를 여행하던 지난 10개월 동안 내가 겪은 크고 작은 사고를 떠올리면 쉽게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마침 친구가 남미로 날아온다고 했다. 그에게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로 오겠냐고 운을 띄웠다. 여행이라곤 해본 적이 없는 이 친구, 카라카스가 도대체 어디 있는 도시인지 검색을 해봤단다. ‘살인의 도시’,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도시’ 등등의 연관검색어가 뜨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나. 결국 우리는 콜롬비아에서 만나 둘이 함께 카라카스로 날아가기로 정했다.
수직 낙차 979미터로 세계에서 가장 긴 앙헬폭포
위험을 무릅쓰고 베네수엘라에 가는 이유
위험을 무릅쓰며 왜 베네수엘라에 가느냐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련다. 폭포 때문이라고. 어이없이 들릴 수도 있겠지만, 사실이다. 많은 여행자들이 앙헬 폭포(Salto Angel / 천사 폭포)를 보기 위해 이 나라에 오니까. 그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은 천사 폭포. 우리는 카라카스는 건너뛰고 바로 앙헬 폭포로 향하기로 했다. 카라카스는 석유가 가져온 부로 인해 급속한 도시화를 이룬 곳이다. 그래서 남미 다른 나라의 수도처럼 역사지구가 딱히 없다. 건너뛰어도 아쉬울 게 별로 없었다. 카라카스의 공항에서 우연히 만난 한국인은 그런 우리의 선택이 나쁘지 않았음을 입증했다. 카라카스에 주재원으로 온지 1년이 되었는데 그 사이 식당에서 권총강도를 네 번 당했다고 한다.
앙헬 폭포를 만나기 위해서는 2박 3일의 시간을 꼬박 바쳐야 한다
앙헬 폭포는 그 웅장한 아름다움 못지 않게 진입 장벽이 높기로도 유명하다. 폭포 하나를 보러가기 위해 2박 3일의 시간을 투자해야 하니 말이다. 앙헬 폭포로 가는 길은 이렇다. 우선 카라카스에서 비행기(1시간 40분 소요)나 버스(10시간)로 시우다드 볼리바르(Ciudad Bolivar)까지 간다. 그곳에서 경비행기로 갈아타고 카나이마(Canaima)까지 다시 한 시간을 날아간다. 도로가 없는 카나이마에서는 쪽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4시간을 올라간다. 그게 끝이 아니다. 배에서 내린 후에 다시 한 시간 남짓 산길을 걸어야 겨우 앙헬 폭포 전망대에 다다른다. 그러니 평생 한 번 보기가 힘든 폭포임에 틀림없다. 물론 돌아오는 길도 그 과정을 고스란히 거쳐야 한다.
앙헬 폭포를 만나러 가는 길 자체도 멋진 볼거리다
각오하고 떠난 길임에도 예상치 못한 시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카라카스에서 시우다드 볼리바르로 가는 비행기가 만석이란다. 이리 뛰고 저리 뛰어 겨우 구한 표는 결국 시우다드 볼리바르와 가장 가깝다는 도시 푸에르토 오르다스(Puerto Ordaz)행. 들어본 적도 없는 마을이다. 낯선 마을에 내리니 이미 어둠이 내리고 있다. 처음 가는 도시에 한밤에 도착해 택시를 타는 일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일. 그나마 친구가 곁에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휑한 도로를 불안함 속에 30분 남짓 달리니 드디어 시우다드 볼리바르. 숙소에 짐을 풀고 나니 그제야 피로가 몰려온다.
기아나 고지의 평화로운 풍경
앙헬 폭포가 있는 곳의 지명은 마시조 과야네스(Macizo Guayanez), 우리말로 기아나 고지다. 베네수엘라, 브라질, 기아나의 3개국에 걸쳐 있는 기아나 고지의 총 면적은 한국의 8배에 이른다. 베네수엘라 지역의 기아나 고지는 카나이마 국립공원 구역으로 지정되어 세계 자연유산에 등재된 곳이기도 하다. 이곳을 유명하게 만든 이는 [셜록 홈즈]의 작가 코난 도일. 그가 1912년에 발표한 소설 [잃어버린 세계]의 배경으로 이곳을 쓰면서 그 이름이 전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신들의 정원
기아나 고지 여행의 베이스 캠프 역할을 하는 곳은 카나이마(Canaima). 20인승 경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카나이마는 인구 천 명도 안 되는 페몬 족의 마을이다. 짐을 풀어놓고 바로 산책을 나선다. 호숫가를 향해 걸어가는 길. 간간히 작은 식당이나 카페가 보일 뿐, 마을은 고즈넉하다. 오후의 나른한 적막을 깨는 것은 학교에서 돌아오는 동네 아이들의 소리뿐. 호수에 다다르니 상상도 못한 풍경이 기다리고 있다. 푸른 호수의 한 쪽으로 거대한 폭포가 떨어져 내리고, 바닷물 속에 야자나무들이 서 있다. 그 앞에는 벌거벗은 동네 꼬마가 하염없이 호수를 바라보며 서있다. 이토록 초현실적인 풍경이라니...
카나이마 호숫가의 풍경
가이드북을 펴들고 눈앞에 보이는 폭포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본다. 우카이마, 골론드리나. 와다이마, 아차 폭포. 줄지어 선 폭포 너머로는 쿠사리와 쿠라바이라는 이름의 탁자 모양 산이 솟아있다. 바로 폭포 못지 않게 유명한 테푸이(Tepui)다. 정상이 평평한 대지로 이루어진 탁상 산지인 테푸이는 이곳 원주민 페몬족의 언어로 ‘신들의 정원’을 뜻한다. 남미를 여행하며 매번 느끼는 거지만 자연에 이름 붙이기에 있어 원주민과 서양인의 태도는 어쩌면 이리도 다를까. 원주민들이 매번 상상력이 한껏 발휘된 시적인 이름을 붙이는 것에 비해 서양인은 기껏해야 처음 발견한 이의 이름을 갖다 붙이는 정도다. 그 이름에는 상상력도 없고 오직 자연을 향한 오만한 태도와 정복욕만 드러날 뿐이다.
기아나 고지에는 테푸이가 100개 이상 솟아 있다. 수직으로 뻗은 산은 고도차 1000미터의 외벽을 만들어 마치 육지에 떠있는 거대한 탁자처럼 보인다. 그 중 가장 높은 테푸이가 바로 로라이마 테푸이로 그 높이가 2722미터에 달한다. 기아나 고지의 지질은 약 20억 년 전의 것으로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종류의 암석이다. 그 긴 세월 동안 비바람에 풍화된 암석은 부드러운 흙이 사라지고, 단단한 암반만이 남아 지금의 모양이 되었다고 한다.
오후에는 보트를 타고 아나톨리 섬(Isla Anatoly)으로 간다. 카나이마에 떠 있는 아나톨리 섬은 폭포 엘 사포(El Sapo)로 유명하다. 거세게 흘러내리는 폭포의 안쪽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길 때문이다. 귀를 뚫을 듯 울려대는 폭포의 굉음 속으로 들어간다. 물줄기가 쏟아져 눈앞은 보이지도 않고, 온몸은 순식간에 흠뻑 젖어버리고, 바닥은 미끄럽기만 하다. 내 평생 가장 무서웠던 폭포길이었다. 이번에는 폭포 위로 걸어 올라가 펼쳐진 풍경과 만난다. 거칠고 요란하게 떨어져 내린 후에는 강과 몸을 섞어 부드럽게 대지 속으로 흘러드는 폭포의 물줄기. 그 너머로 드넓은 평야가 이우는 저녁 햇살을 받고 반짝인다. 마음이 따사로워지는 풍경이다. 아름다운 것들을 볼 때면 늘 혼자라는 사실이 안타까웠는데, 지금 내 곁에는 이 아름다움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이가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가장 깊은 곳에 있는 폭포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앙헬 폭포
다음날, 우리는 강을 남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앙헬 폭포를 향해 간다. 의자도 없는 작은 쪽배에 쪼그리고 앉아 4시간을 가야 한다. 30분쯤 강을 거슬러가던 배가 기슭에 닿는다. 이곳에서부터 걸어서 반대편 강둑으로 건너간다. 발바닥으로 전해지는 모래의 부드러운 감촉이 좋다. 슬리퍼를 벗어들고 맨발로 걷는다. 저 멀리로는 책상 모양의 산 테프이가 솟아있다. 반대편 강기슭에 도착해 이곳에서 샌드위치로 점심을 먹는다. 다시 배에 오른다.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은 고통의 3시간을 보낸 후 야영장에 도착한다. 해가 넘어가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서둘러 전망대를 향해 산길을 오른다. 한 시간 후, 마침내 전망대 앞에 섰다. 전체 길이 979미터, 막힘 없이 수직으로 낙하하는 길이만 807미터. 세계에서 가장 긴 폭포가 눈앞에 있다.
페몬 족은 이 폭포를 ‘가장 깊은 곳에 있는 폭포’라는 뜻으로 ‘파레쿠파 메루(Parekupa-meru)’라 부른다. 오리노코 강의 지류 카로니 강이 기아나 고지에서 낙하해 형성된 폭포다. 원주민들이 ‘악마의 산’이라 부르는 아우얀 테푸이의 절벽을 타고 떨어져 내린다. 앙헬 폭포의 바닥에는 물웅덩이가 없다. 어마어마한 낙차로 흘러 떨어지는 물이 지표에 닿기 전에 운무가 되어 흩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폭포 바로 밑으로는 끝없는 운무가 흩뿌린다. 금세 운무에 몸이 젖는다. 추운 줄도 모르고 하염없이 폭포를 바라본다. 아, 지구에는 이런 폭포도 있었구나. 모두들 경외감 속에 할 말을 잃은 채 서 있다.
폭포에서 떨어져내리는 물줄기는 모두 운무로 흩어져 버린다
카리브 해의 바람과 아마존의 바람이 부딪히는 이 지역의 상공은 일년 내내 구름에 싸여있다. 그래서 비행기를 타도 전체를 조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1937년 10월 9일, 비행 중이던 미국의 억만장자 지미 엔젤은 운이 좋았다. 수천 년 간 알려지지 않았던 이 폭포를 구름 사이로 발견했으니. 2년 전 금광을 찾아 비행하던 도중에 우연히 폭포를 본 후, 두 번째로 찾아온 터였다. 그제야 폭포의 존재를 인정 받고, 자신의 이름을 폭포에 붙일 수 있었다.
폭포의 물줄기 안으로 이어진 길이 유명한 사포 폭포
해먹에서 하룻밤을 보낸 다음날 아침. 우리는 강변으로 나간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강변에는 아무도 없다. 둘이 함께 폭포를 바라본다. 산허리에 감긴 구름이 그 신비로움을 더한다. 이토록 완벽한 하루의 시작이 또 있을까. 파랗게 갠 하늘가에 솜털 같은 흰구름이 둥실 떠간다. 배를 타고 카나이마로 돌아오는 길, 내내 테푸이들이 따라온다. 이 풍경이 끝나지 않고 계속 되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