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 누구의 글씨인가 ? 서울 성곽 4대문 중 동대문만은 ' 흥인지문(興仁之門) '이라 해서 유독 네 글자를 사용하였다. 정설은 아니지만 4대문 중에서도 동대문이 가장 지대가 낮아 .... 그 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그렇게 명명하였다고 한다. 흥인지문이란, 인(仁)을 일으키는 문이라는 뜻이다. 남대문은 정식 명칭이 숭례문(崇禮門). 글자 그대로 예(禮)를 높이는 문이라는 뜻인데... 다른 대문 현판과는 달리 이 문만은 유독 현판의 글을 세로로 썼다. 공손한 자세를 나타내기 위하여 그렇게 했다고도 하고 .... 서울 남쪽에 있는 관악산의 나쁜 기운을 누르기 위해 그렇게 썼다는 주장도 있으나, 어느 것이나 확실하지는 않다.
숭례문 글씨를 양녕대군이 썼다고 하나 확실치는 않다. 그러나 양녕이 글씨에 능하였다는 것은 사실이다. 세종은 양녕의 글씨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글을 읽는 것은 임금에게 유익하나 글씨를 쓰고 글을 짓는 것 따위의 일은 유의할 필요가 없다...... 양녕대군은 학문에는 게을렀으나 글씨에는 능하였고 세종은 학문은깊었으나, 글씨는 잘 하지 못하였다. 우리는 남대문 숭례문 .... 현판의 글씨는 조선조 태종의 맏아들 양녕대군(1394~1462)가 쓴것으로 배웠고 그렇게 알고 있다. 조선후기 실학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을 보면 " 지금 남대문 현판인 숭례문 석 자는 양녕대군이 쓴 글씨 "라는 ... 절이 있어 통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하지만 추사 김정희는 ... " 완당전집 "에서 ' 지금 숭례문 편액은 곧 신장의 글씨 "라고 적어 놓아 이긍익의 주장과는 다르다. 신장(신장. 1382~1433)은 대제학을 지냈으며, 초서와 예서에 능했던 사람이다. 역시 조선 후기 실학자 이규경의 " 오주연문장전산고 "에는 " 숭례문이라는 이름은 삼봉정도전이지은것이요, 그 액자는 세상에 전하기를 양년대군의 글씨라 한다. 그러나 숭례문의 편액은 정난종이 쓴 것 "이라고 못박았다. 그는 근거로 " 정난종은 세조 때 사람으로 비석이나 종에 글을 새기도록 임금의 명을 많이 받았다. 글씨체를 보아도 그의 것임이 분명하다 "고 밝혔다. 그는 또한 이 글에서 임진왜란 때 현판이 왜놈들에 의해 없어졌다가 난리가 수습된 뒤에 다시 걸렸는데.... 이는 좋은 글씨가 땅에 묻히면 괴이한빛이 나기 때문이라는 일화도 소개되어 있다. 정난종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서예에 뛰어났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양녕대군 그리고 세종대왕 태종의 국상을 치른 조정은 서서히 세종 체제로 굳히기에 들어갔다. 세종에 아부하는 무리들은 양녕대군을 더 멀리 내치라고 아우성이었다. 임금의 두 분 형님,즉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을 성내는 물론 한강 이북에 들이지 말라는 .... 태종의 유지를 받든다는 명분도 있었지만... 양녕을 좇는 무리가 어떠한 흉계를 꾸밀지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 양녕대군, 광주에서 청주로 양녕은 당시 아버지 태종에 의하여 경기도 광주에서 유배당하다시피 살았다. 세상은 양녕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온갖 나쁜 소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도총제 이순몽의 보고를 맏은 세종은 양녕의 험담을 퍼뜨린 자를 궁에 불러들여 직접 추국하여, ... 형을 감싸고 돌았으나 무위에 그쳤다.
마침내 신하들의 성화에 못 이겨 세종은 양녕을 청주로 내쳤다. 세종도 가슴이 아팠던지 충청감사에 이르기를 ' 문은 지키지 말고 잡인들의 출입만 금하라 '고 명하였다. 마음이 괴로운 세종은 양녕을 다시 경기도 이천으로 옮기라고 명하였다. 이에 대사헌 '하연'이 상소문을 올리고 다른 신하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다. 청주로 다시 내려보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종은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태종의 대상에 참여시켜서는 안 된다는 간언을 물리치고 양녕을 헌릉에 참사케 하였다.
세종 10년 10월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 양녕대군이 병권을 장악하여 대궐을 도모하려 한다 '는 소문이 한양 도성에 파다하게 퍼졌다. 소문의 진원지 갑사 '지형우'를 잡아들여 세종이 직접 추국하자, 제조 유정현이 지형우를 거들며 지원사격에 나섰다. 양녕에 대한 임금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은 이때다 싶은세종은 '지형우'를 장 100대에 처하라고 명령하였다. 세종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신하들에게 이런 말을 빠트리지 않았다. 과인이 앉아 있는 이 자리는 형님이 앉아야 할 용상이다. 그 자리에 과인이 잠시 앉아 있을 뿐이다.
양녕, 드디어 한양으로 세월은 흘러 세종 17년, 한 해도 다 저물어 가는 섣달 열사흘날, 세종은 사정전에서 교지를 내려 공표하였다. 양녕의 이천 유배를 풀고 한양으로 불러들인다는 것이다. 양녕의 유배생활에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사정전에 나아가서 신인손을 불러 교지를 내리기를... 근일에 여러 번 양녕을 불러 서울의 집에 머물게 하니, 대간이 의논하여 고집하면서 옳지 않다고 하는데, 그 뜻 또한 좋다. 양녕의 일은 처음부터 종사에는 관계되지 않았으며, 다만 한 몸의 실덕한 때문이었다. 태종께서 대의로써 결단하여 밖에 내쫓았는데, 그 때는 비록 서울에 왕래하지 못하게 했지마는... 그러나 이것은 곧 세자를 폐하고 새로 세웠던 초기인 까닭으로 이와같이 했던 것이다. 지금은 오랫동안 내쫓아 밖에 있어서 거의 그전의 허물을 뉘우쳤으므로 특별히 우애의 정으로써 불러 보는 것이니... 만약 지금 태종께서 세상에 생존하셨던들 또한 나의 처치와 같으실 것이다. 나도 또한 전적을 대략 보아서 전대의 일을 알고 있는데... 어찌 감히 도의에 어긋난 일인데도 강제로 이를 하겠는가. 대간이 고집하여 논쟁하니, 내가 매우 이를 그르게 여긴다. 마침내는 마땅히 서울로 불러 돌아오게 하여 효령과 같이 대접할 것이니, 경이 이 뜻을 전해 개유하라. 이러한 중대결심을 하게 된 배경에는 세종 나름의 확고한 철학이 있었다. 부자간에는 본디부터 모반한 죄가 없었다. 형제간에도 또한 시기하고 싫어하는 일이 없었는데도 의친의 장으로서 오랫동안 외방에 쫓겨나서 종친의 반열에 참예하지도 못하였으니 나의 마음에 항상 미안하였다. 이제는 이미 나이도 연로하였으니, 서울 집에 들어와서 살게 하여 때때로 만나보고 우애하는 정을 펴고자 하노라
세종의 이와같은 교지에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영의정 황희는 물론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등 삼사가 모두 들고 일어났다. 태종대왕의 유지를 어기는 일이니 철회하라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