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16 주안3부예배 / 지장규 목사
말씀 : 열왕기상 19:9-14
제목 :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질문(6)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9절)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
하나님, 오늘도 주님 앞에 예배자로 불러 주시니 감사합니다.
예배 드림이 기쁨이 되게 하시고, 오늘도 주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생명의 말씀으로 나를 채우사 주의 길 예비케 하소서.
성령의 능력으로 기름 부으사 진리를 선포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도 여러분의 삶과 가정에 다함이 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길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선지자 중에서 엘리야 만큼 많은 기적과 많은 이적을 보여준 선지자도 없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엘리야의 능력을 혹시 아십니까?
열왕기상 18장, 우리가 오늘 읽었던 19장 그 전 장에만 보더라도 엘리야가 손을 들고 기도하니까 어떤 일이 일어나요?
하늘에서 막 불이 떨어져요. 그래서 제단을 태웁니다. 불만 임했나요? 그 다음에 보니까 3년 6개월 동안 마른 땅에
손을 들고 기도하니까 비가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가뭄을 종식시켰던 사람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구약에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갔던 에녹과 함께
이 엘리야가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갔던 사람이었습니다.
뭐, 이루 말할 수 없지요...
그 가운데 우리가 다 알고 있는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 850명과의 대결,
갈멜산에서의 대결은 성경에 가장 흥미한 얘기, 하나님께서 승리하셨다는 가장 백미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야말로 그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 전역에 하나님이 살아계심이 증거되었습니다.
성경의 모든 사건 가운데 가장 통쾌한 사건이 바로 이 사건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러분, 이 사건을 통해서 어떤 일이 일어난지 아십니까?
믿음을 떠났던 하나님의 사람이 믿음의 사람으로 회복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라고 고백되어지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열왕기상 18:39절의 말씀,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 이 사건 이후에 고백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백이었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러한 엘리야의 모습은 우리가 신앙인으로써 늘 동경하는 모습입니다.
여러분, 기도하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주를 떠났던 자들이 하나님을 고백하고,
무너져가고 있는 한 나라가 다시 한 번 하나님으로 인하여서 세워지는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
우리 모두가 꿈꾸는 일이고, 신앙인이라면 '나도 저 주인공이 되고 싶다',
특별히 저같은 목회자들은 더욱 더 간절한 마음이 들겠지요.
그런데, 열왕기상 18장의 엘리야의 모습과 19장의 엘리야의 모습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입니다.
19장의 상황은 이렇습니다.
18장에서 엘리야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의 대결(1:850)을 통하여
이 엘리야가 승리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증거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광경을 당시의 북이스라엘 왕이었던 아합이 다 지켜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지켜 본 그 사건을 집에 와서 자기의 마누라(이세벨)한테 얘기를 하는 거예요.
어떻게 얘기하냐면, 왕상 19장 1절,
"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하니"
*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아합은 북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세벨은 시돈 사람이었는데 정략적으로 결혼했습니다. 그래서 아합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상황을 지켜본 아합이 이 사실에 대한 본질을 이세벨에게 말해야 됩니다.
맞지요?
18장의 핵심이 이런 것 아닙니까..
※ 하나님이 살아 계십니다.
※ 하나님 만이 유일한 신이십니다.
※ 바알의 신은 참 신이 아닙니다.
※ 우리가 살 길은 하나님께 나아가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는 것이 살 길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말씀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해서 하늘에서 불이 내려
제단의 모든 것들을 태우시고 850명과의 싸움에서 승리케 하셨던 것 아닙니까!
여러분, 적어도 이스라엘의 왕이었다고 한다면, 아합도 그 사실을 자기가 보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들을 이세벨에게 그대로 알려야 되는데, 아합이 뭐라고 이야기하냐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 또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 일이 엘리야가 한 것처럼 보이지만, 엘리야가 한 겁니까?
아닙니다. 여러분, 그 싸움은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들과의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과 바알 선지자들과의 싸움이었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한다면, 그 정도는 눈치챘어야 됩니다.
"아! 하나님께서 역사하셨구나!"
"하나님께서 지금도 일하고 계시는구나!"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해서 살아계심을 증거하셨구나!"
그러니까 그 사건 가운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셨는지 알아야 되는데,
여러분, 그 아합이 알아야 되는데...... 아합이 아내 이세벨에게 뭐라고 말하나요?
'엘리야가 행한 일', 하나님이 행한 일이 아니라 엘리야가 행한 일
그 행한 일 가운데,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 850명을 죽였다'
여러분, 단순히 이 사건에 대해서 이세벨에게 고자질합니다.
'엘리야가 당신의 선지자 850명 다 죽였어'라고 지금 이야기한 겁니다.
이 말을 전해 들었던 이세벨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안 그렇겠습니까..
그래서 자신의 사신을 보내서 이렇게 엘리야에게 전달하라고 서신을 보냅니다.
그 내용이 뭐냐면, "내일 이 맘때쯤 반드시 너를 죽여 버리겠다" 여러분, 이것이 이세벨의 경고였습니다.
(열왕기상 19:2)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 그리고 이세벨의 이 경고를 들었던 엘리야의 반응이 열왕기상 19장의 전체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엘리야, 능력의 사람이었던 엘리야,
기도의 사람이었던 엘리야, 그 엘리야가 얼마 전까지 보여줬던 그 능력의 모습, 그 승리의 모습은 어디간데 없고,
19장에 보면, 완전히 패망한 패전병의 모습같은 엘리야가 등장합니다.
낙심해 있습니다.
탈진해 있습니다.
슬럼프에 빠진 것처럼 보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종종 이런 모습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일에 몰두하게 되면, 몸 안의 아드레날린이 소모가 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소모가 되면 그 이후에는 급격한 탈진이나 급격한 공허감이 온대요.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심각해지면 우울증까지 찾아온다고 말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지요. 마치 세상에 나가 모두 승리할 수 있을 것처럼
기도하고 능력 받아 기쁨으로 열정적으로 사역의 현장에 있다가 교구를 섬기다가 급작스럽게 허무해지고,
급작스럽게 공허해지고 그래서 심지어 하나님에 대해 실망하는 모습을 우리 주변에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연말, 연초가 되면 이런 증상이 더 잘 나타나는데, 누구보다 열심히 주의 일을 하다가 어느 순간 사람에게 치이고, 일에 치이고,
나와 주변에 대한 반응 때문에 탈진하고 번아웃 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내가 다시는 교회일 하나 봐라, 내가 다시는 구역장 하나 봐라, 내가 다시는 찬양대 하나 봐라' ㅎㅎ
여러분,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이 종종 있습니다.
오늘 엘리야도 이런 증상이었습니다.
탈진되었습니다.
의기소침해졌습니다.
번아웃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런 사람을 다시 한 번 사역의 자리로 나오게 하는 방법이 뭘까요?
막 다그치는 겁니까? 협박하는 겁니까?
사역에 지쳐서 다시는 주의 일 못하겠다고 그러고 있는데, 주변에서는 막 다그칩니다.
권사님들이 찾아가고 지역장님이 찾아가고 교구장님이 찾아가서 이렇게 얘기해요.
뭔 믿음 없는 소리냐고.. 그러다가 하나님께 벌 받는다고... 젊은 사람들 다 지켜보고 있는데,
권사라는 양반이 지역장이라는 양반이 구역장이라는 양반이 지금 이러고 있으면 되냐고... 일어나라고... 이런 경우 있지요..
그런데 그렇게 다그친다고 해서, 그렇게 협박한다고 해서
의기소침해 있고 의욕을 다 잃어버려서 아무것도 하기 싫은 자를 일으켜세울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이런 식으로 반응합니다.
누구보다도 열심이었던 사람이 그렇게 한 순간에 무너지는데 있어서는
다 이유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그렇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엘리야가 우리 교회 목사님이었다면, 그런데 갑자기 그 능력 있는 목사님이 로뎀나무 아래 가서 하나님 나 죽여 달라고,
아무것도 하기 싫다고.. 도망가고 있는 모습을 본다면 여러분 뭐라고 이야기하겠습니까?
'선지자라는 양반이 말야~ 목회자라는 양반이 말야~ 어떻게 떠한 경우에서든지 하나님 붙들고 살아가야지,
그럴 때일수록 기도해야지 그럴 때일수록 주님 붙들어야지, 그럴 때일수록 믿음을 더 강하게 해야지
죽여 달라고 하나님께 시위하는 것도 아니고, 참 은혜가 되겠냐?' 주변에서 이런 말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그런데 보세요..
여러분 중에 누가 엘리야보다 많이 기도했으며, 여러분 중에 누가 엘리야보다 많은 능력을 경험했으며,
여러분 중에 누가 하나님과의 더 깊은 교제를 갖고 있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엘리야가 그랬다면, 혹시 지목사가 그렇게 되면, 당연하다고 생각해 주셔야 됩니다.
그럴 수 있다라고 생각해 주셔야 됩니다. 아셨지요..
옆에 있는 권사님이 갑자기 그러면, '아, 쟤는 또 그래..' 그러지 말고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해 주셔야 합니다.
왜? - 엘리야가 그랬으니까....
옆의 분하고 인사하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엘리야도 그랬습니다.'
여러분 지쳐 있는 엘리야, 왜 지쳐 있는지 우리가 좀 보겠습니다.
* 엘리야가 지쳐 있는 이유 - 마음과 육체의 탈진
일단은 그의 마음과 정신과 영적인 부분이 지쳐 있었습니다.
자, 보세요.. 얼마 전까지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 850명과 영적인 전투를 했습니다.
이 영적인 전투는 어마어마하게 에너지가 소진됩니다.
설교 30분 하면 한 500g은 빠지는 것 같아요.
제가 실제로 예전에 금요철야 기도회 한 시간 인도하면 얼만큼 빠지나 정말 재 봤거든요..
딱 한 근, 돼지고기 한 근...이 빠져 나가더라구요...ㅋ 여러분, 진액이 빠지는 일입니다.
그리고 승리하고 나서 그가 어떻게 했냐면, 850명의 선지자를 다 죽였습니다. 칼로 하나 하나 죽였습니다.
여러분, 850마리의 생선을 잡아도 얼마나 힘든 일인데, 850 마리의 벌레를 잡아도 어마어마하게 힘들텐데
850명의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얼마나 힘든 일이겠습니까..
그리고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협박하니까 그 소식을 듣고 엘리야가 브엘세바까지 도망쳤다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가 있었던 이스르엘이라는 곳이 도망쳤던 브엘세바까지의 거리는 약 50km가 됩니다.
19장 3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 여러분, 자기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도망가는 사람이 쉬엄쉬엄 룰루랄라 구경할 것 다 구경하고 갈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늙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걸음을 가지고 최선의 속도로 도망갔을 것입니다. 50km를......
마라톤이 42.195km잖아요..
42.195km를 뛰면, 선수들은 약 4kg-5kg의 몸무게가 빠진다고 그럽니다.
그리고 다시 체력이 회복되는데 약 2주간의 시간이 걸린대요.
한 번 마라톤을 뛰고 또 다시 마라톤을 뛰려면 최소한 보름 있다가 그 일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엘리야는 지금 굉장한 체력적인 소진, 체력적인 고갈,
정신적인 고갈, 영적으로도 완전히 탈진한 상태였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에게 우리가 선지자가 그러면 되겠냐고, 더 기도하라고, 믿음 없어서 그렇다고 함부로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죽기를 구하는 엘리야의 모습이 안타까워 보이면서도 안쓰러워 보이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지쳐 있는 엘리야를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다루고 계시는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좀 볼까 합니다.
그렇게 지쳐 있는 엘리야, 죽기를 구하는 엘리야, 육체적 영적 정신적으로 모두 고갈되어서 탈진한 엘리야에게
오늘 본문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이렇게 물으십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 질문을 다른 사람에게 했던 적이 있어요. 기억 나시나요?
첫번째 설교 질문..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범죄한 아담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여러분, 사실 이 두 질문이 동일한 질문이지만, 뉘앙스는 좀 달라요.
매일 아침 우리가 읽고 있는 공동체 성경읽기에 보면 드라마 바이블이라고 하는 목소리가 나옵니다.
거기서 하나님 역할이 누군지 아십니까? 배우 한인수씨입니다.
드라마 바이블로 이 본문과 하나님이 아담에게 하셨던 그 부분을 읽으면 정확하게 어떤 뉘앙스인지 구별이 됩니다.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셨던 말씀은 이렇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하나님의 목소리는 좀 다릅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여러분, 이런 목소리입니다. 좀 구분이 되시나요?
물론 두 말씀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같습니다. 뭐냐면, 지금 네가 있어야 될 곳이 여기가 아니라는 거예요.
로뎀나무 밑이 아니라는 거예요. 무화과 나무 밑이 아니라는 거예요.
너가 있어야 할 자리는 하나님께서 너에게 주신 사명의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된다라고 하는 의미가 같습니다.
아담에게도 하신 말씀이 동일한 의미입니다.
에덴 동산을 다스리고 모든 만물의 이름까지 지으라는 권세를 부여받았는데, 범죄함을 통해서 나무 뒤에 숨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네가 여기에 있느냐?
세상을 다스릴 권세, 에덴을 누릴 권세를 주었는데 그 권세를 누리지 못하고 왜 지금 여기에 숨어 있느냐?'
답답해 하시면서 호통치시면서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그런데, 아담에게 동일한 질문을 하셨지만,
오늘 엘리야에게 하신 질문은 아담에게 하셨던 질문과는 다릅니다. 측은한 마음이 듭니다.
하나님의 마음, 안타까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그 목소리에서 녹아 있음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여러분, 똑같이 나무 그늘 아래 숨어 있는데
아담에게 내리셨던 하나님의 처방과 엘리야에게 내리셨던 처방이 너무나 다른 것을 보게 됩니다.
아담에게 는 우리가 아는 것처럼 죄에 대한 심판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와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해산하는 고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땀흘려 일해야 되는 고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야에게는 똑같이 나무 아래 숨어 있었지만, 하나님이 엘리야에게는 왜 여기 있느냐고 호통치지 않으셨습니다.
빨리 일어나라고 다그치지도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정신이 번쩍 들도록 아담에게 하셨던 것처럼 벌을 주지도 않으셨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주의 천사를 보내셔서 그를 위로해 주시고, 그를 힘 주시고, 그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힘들고 지쳐 있는 엘리야에게 하셨던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라는 질문 속에 담겨 있는 의미가 무엇일지 제가 두 가지만 볼까 합니다.
첫번째, 그 질문에 대한 의미는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의 의미 ⓵
: "엘리야야, 어디에 있든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와의 싸움 가운데서도 내가 너와 함께 하였던 것처럼
"나 여호와가, 지금 네가 힘들고 지쳐서 심지어 죽기를 구하고 있는 이 시간도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라고 약속하신 약속의 말씀이라는 겁니다.
사실 지쳐 있는 엘리야가 그 상황 가운데 가장 많이 했던 말이 뭔지 아십니까?
"하나님, 나 혼자 남았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외롭겠습니까.. 몸도 지치고 마음도 지쳤는데, 혼자 있다는 그 고독감이 죽게 만드는 것 아닙니까..
(10절) "오직 나만 남았거늘..."
(14절) "오직 나만 남았거늘..."
* 그렇게 모든 것이 탈진해서 고독감에 싸여 있는 자에게 가장 큰 위로가 뭘까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엘리야 주변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는 그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약속의 말씀이
"내가 전에 너와 함께 했던 것처럼 지금도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여러분, 얼마나 큰 위로가 되겠습니까?
여러분, 혹시 주변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 들 때가 있습니까?
내 아픔과 내 상처 내 상황을 이해해 줄만한 사람이, 심지어 같은 이불을 덮고 있는 내 배우자가 그것도 모를 때가 있습니까?
여러분, 그런 상황 가운데 마치 내 자리를 이탈해서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구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까?
그럴 때마다, [사랑하는 내 딸아, 사랑하는 내 아들아, 어디 있느냐?
네가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라고 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길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여러분, 그런데 엘리야는 오직 자기만 남았다고 호소하고 있잖아요..
하나님은 그런데 아니라고 합니다.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왕상19: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아멘!
- 엘리야가 생각하기에는 나 혼자 남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더 외롭고 그래서 더 고독하다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엘리야의 착각이었습니다.
여러분, 내 주위를 돌아봐도 나를 도와줄 이가 아무도 없다라는 생각, 착각이었다는 것입니다.
누가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고 그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칠천 명을 내가 남겨 두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외롭다고 고독하다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혼자 남았다는 생각, 나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생각,
내 심정을 이해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생각은,,,,
이 모든 것은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우리에게 상처 주려고 하는 사단의 생각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아니라는 거예요.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아무리 외롭고 아무리 힘들고 고독한 상황 가운데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도 여전히 여러분을 위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도하고 계시는 여러분의 믿음의 동역자가,
하나님께서 남겨 두신 믿음의 칠천 명의 동역자들이 여러분의 뒤에 있음을 우리가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게 부모일 수 있습니다. 구역장일 수 있습니다. 지역장일 수 있고, 교구장일 수 있습니다.
누가 되었든지간에 여러분이 걸어가는 그 길 가운데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그곳에서 여러분을 위해서 눈물 흘려 기도하고 있는 사람, 무릎 꿇어 기도하고 있는 사람을 통하여
지금 저와 여러분이 이곳에 서 있는 줄 믿습니다. 그것을 기억한다면,
'아, 내가 혼자가 아니구나. 하나님 뿐만 아니라 믿음의 동역자가 여기 이렇게 든든히 있구나'라는 것을 기억하게 된다면,
우리가 걸어가는 길 힘내서 걸어가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 옆에 있는 분이 여러분들을 위해서 남겨두신 칠천 명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인사하겠습니다.
두번째 의미는 이것입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의 의미 ⓶
"내가 너를 회복시키고 치유하겠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지쳐 있는 엘리야를 어떻게 치유하십니까?
치유하시는 첫번째 방법은 어루만져주는 겁니다.
치유의 방법 ⓵ - 어루만져 주심
직접 다가가 주셨습니다.
(5절)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7절)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 여러분, 지식이 부족한 자, 뭔가 모르는 사람은 그냥 불러서 조용조용하게 가르쳐주고 훈계하면 되지만,
마음과 몸이 무너진 자에게는 훈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어루만져 줌이 필요합니다. 함께 있어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나 혼자 남았다고 하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말로만
'내가 너의 힘이 되어 줄께, 내가 너와 함께 할께, 내가 너를 도와 줄께'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 주시고, 그를 통해서 어루만져 주십니다.
피곤한 육체 피곤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엘리야를 어루만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힘들고 아파하는 사람, 특히 외로운 사람에게 백 마디 말보다 꼭 안아주는 위로가 큰 힘이 됩니다.
사람은 안아주고 또 보듬어주고 어루만짐을 통해서 만족과 위로를 경험하게 됩니다.
제가 대학교 시절, 제가 집을 떠나 대전에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방학이라도 되면 며칠씩 집에 내려가지요.
뭐 집에는 왔지만 제 짐은 학교에 있고, 책도 학교에 있고, 옷도 학교에 있고, 친구도 없고, 동네에 아는 사람도 없고,
집에 와서 할 수 있는 것은 그동안 못 잤던 잠을 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님께 인사 드리고 방구석에서 이렇게 누워 자고 있으면, 그러면 뭔 낮잠을 자느냐고 잔소리 하지 않으시고
어머니는 슬그머니 오셔서 머리 한 번 쓱 쓰다듬어 주시고 이불을 덮어주시고 방을 나가십니다.
부모님은 다 아시지요?
자녀들이 얼마나 힘든지, 아니면 하는 일이 잘 되고 있는지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 아닙니까..
잘 되고 있으면, 말하라고 하지 않아도 와서 재잘재잘 얘기할 것이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지금 잠만 잔다는 것은 '아 힘들구나', '아 어렵구나', '아, 고생하고 있구나' 여러분, 다 아시지 않습니까..
주변에 홀로 아파하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혹시 지쳐 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그 사람에게 다가가 '그렇게 된 건 네가 잘못해서 그런 거야, 네가 기도 안 해서 그런 거야. 믿음이 없어서 그런 거야'
그러지 마시고, 그분에게 다가가셔서 어깨라도 감싸 주시고 어루만져 주시면서
'힘들지?' 라는 말 한 마디 해 주십시오. 그 한 마디가 그분을 살리게 될 줄 믿습니다.
여러분, 그분도 그 한 마디를 통해서 새로운 삶의 희망을 품게 될 것이고,
그분이 혹시 내 옆에 앉아 있는 그분일지도 모르니까
이 옆의 분에게 동성이라면 손이라도 잡아 주시면서 이렇게 위로했으면 좋겠습니다.
"힘 내십시오! 하나님이 다 아십니다!
치유의 방법 ⓶ - 음식을 대접해 주심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치유하셨던 두번째 방법은 음식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엘리야에게 제공해 주십니다.
인간은 영혼 뿐만 아니라 육체를 가지고 있는 존재입니다. 전인적인 존재라고 이야기하지요.
예수를 믿는 사람이 하는 가장 치명적인 실수 가운데 하나는
너무 영적인 면을 강조한 나머지 육적인 것을 무시하는 경우가 있게 됩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지금 엘리야는 정서적으로 고갈되어 있습니다. 영적으로도 고갈된 게 맞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중요한 건, 육적으로도 굉장히 어려움 가운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정서적으로 영적으로 힘들 때는 다가가서 어루만져 주는 것으로 회복될 수 있지만,
그와 더불어 육체적으로 극한의 상황 가운데 처해 있는 자에게 필요한 건 음식물입니다.
50km를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 달려 갔습니다. 갈멜산 전투로 인하여서 모든 체력이 소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어루만지신 다음에 음식을 주십니다.
우리 5절의 말씀을 다같이 한 번 읽겠습니다.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아멘!
(6절)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 예수님도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찾아갔을 때 제자들이 밤새도록 그물질하고 있을 때,
아무것도 잡지 못했던 제자들이 얼마나 허기졌겠습니까..
그들에게 다가가셔서 예수님이 해 주셨던 것은 '너네 왜 날르 부인했니?'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숯불에 구운 떡과 생선을 가지고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해서 죽은 예수님 때문에 실망하여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제자들에게도 예수님께서는 떡을 준비해 주시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의 의미가 뭔지 아십니까?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지만 육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몸과 영혼이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의 은혜로 살아가야 합니다. 기도의 은혜로 살아가야 하는 것 맞습니다.
그 기도의 은혜로 힘든 상황 가운데 일어설 힘을 제공 받을 수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육신의 양식을 통하여서도 지친 우리가 힘을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아무리 영적인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천사의 떡과 물을 통해서 기운을 얻었듯이
우리에게도 우리의 연약하고 피곤한 심신을 일으켜 세울만한 음식물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타지에서 살고 있다가 집에 가면, 자고 있잖아요..
그러면 막내가 왔다고 없는 살림에도 저희 어머니가 부지런히 뭐를 만드십니다.
그리고 자고 있는 저를 깨우십니다. '밥 먹고 자야지~'
오후 세 신데... 끼니 때도 아닌데 밥 먹으래요..
그래서 제가 뭐라고 하냐면, '엄마, 휴게소에서 다 먹고 왔어요'
우리 어머니 꼭 한 마디 하십니다. '휴게소에 뭐 먹을게 있다고...'
괜찮다고 배 부르다고 해도 끼니 때마다, 아니 끼니 사이 사이 때마다 이것 저것 차려 주십니다. 그것이 사랑 아닙니까!
그렇게 가끔 부모님 계시는 집에 방문하면, 뭐 특별한 음식 먹은 것도 아닌데, 부모님하고 뭐 특별한 것 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부모님을 뵙고 부모님이 차려주시는 밥 몇 끼 먹고 오면
보약을 먹은 것처럼 힘을 내서 또 한 학기, 또 몇 달 그렇게 살아가게 되더라고요..
여러분, 의기소침해 있는 엘리야에게 죽기를 구한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꾸짖지 않으시고 먹을 것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죽기를 구하고 의기소침하고 슬럼프에 빠져 있는 것처럼 힘이 없었던 그가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하나님의 만져주심과 구운 떡과 물 한 병, 그거 먹고 나서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8절의 말씀을 다같이 한 번 읽도록 합니다.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아멘!
여러분, 엘리야가 그 일 이후에 사십 주 사십 야, 호렙산까지 가는 사십일의 여정을 떠나야 했는데,
그 긴 여정의 길을 떠나는 순간 그 곳까지 갈 수 있는 힘의 원천은 다른게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기도의 힘이 아니었습니다. 성령의 능력의 힘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음식물에 의지하여] 갔다고 기록합니다.
지금까지 엘리야가 보여 주었던 그 능력의 원천은 기도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 때문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의 산 호렙까지 가는 그 머나 먼 여정, 사십일 간 주야로 달려야 하는 그 여정의 힘의 원천은 다른 게 아니라
하나님이 그에게 공급해 주셨던 음식물 때문이었습니다.
때로는 영혼이 지친 나를 위로해 주고,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는 사람과 먹는 식사 한 끼를 통해서 회복되게 됩니다.
여러분,
이번 한 주간 주변을 한 번 돌아 보세요.
혹시 힘들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분이 계시는지,
아파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분이 계시는지, 탈진한 것 같은 분이 계시는지...
여러분, 탈진해 있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서 구운 떡과 물 한 병으로 그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셨듯이
저와 여러분이 이번 한 주 동안 누군가에게 하나님이 보내주신 천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힘들어하고 있는 사람에게 찾아가서
요 앞의 굴국밥 집에라도 가서 국밥 한 그릇 시켜 놓고 힘드셨냐고 말을 건네며 같이 밥 한 번 드셔 보시길 바랍니다.
밥 먹다가 이런 저런 얘기 하다가 눈물이 떨어지고
아픈 것들을 이야기하다가 국밥이 다 식어서 맛이 없을지 모르지만, 그 국밥을 먹은 사람은 죽지 않을 겁니다.
그 국밥을 먹은 사람은 다시 힘을 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사명의 자리에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물과 구운 떡 한 덩이를 먹고 사십 주야를 가서 다시 한 번 그에게 주셨던 사명의 자리를 엘리야가 지켜나갔던 것처럼
여러분, 저와 여러분도 힘들고 지친 경우라면,
누군가 천사가 되어 음식물을 제공해 주고 식사 한 끼 대접해 주면, 그걸 통해서 새 힘 얻게 될 줄 믿습니다.
♬ 찬양 :
사랑하는 내 딸아 너의 작음도 내겐 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