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미술] 알렉산더 폰 바그너의 ‘Titusz Dugovics의 헌신’(1859)
조국을 위한 용사의 헌신 정오의 타종 (교황 갈리스토 3세 ‘noon bell’ 지시)으로 알리다
오스만튀르크의 베오그라드 봉쇄를 막아낸 헝가리 민중의 의지 담아
전사의 결연함과 감동 전한 역사화 … 시대정신 표현한 낭만주의 작품
|
① 헝가리 깃발과 이중십자가 작가는 전투 당시에 없었던 헝가리 깃발을 그려넣음으로써 헝가리의 민족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그 옆의 이중십자가(double cross) 역시 헝가리를 상징하는 데 늘 사용되는 스테판의 십자가다.
② 집요하게 공격하는 예니체리 오스만튀르크의 술탄은 기독교 집안의 어린 남자를 데려다 자신들의 왕실근위대, 예니체리로 양성했다. 예니체리는 오직 술탄에게만 충성하는 전문군인집단으로서 뛰어난 전투력을 자랑했다. 전투 시에는 주력 공격부대로 투입됐다.
③ 적과 함께 뛰어내리는 Dugovics 그는 하급 군인이었지만 조국을 위한 헌신이 어떤 것인지를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헝가리 국기를 향해 치켜든 그의 손과 눈길은 그가 무엇을 위해 희생하는지를 감동적으로 전해준다.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성당이나 교회의 정오 타종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기독교 세계의 운명을 건 전투가 이 종소리와 연관돼 있다. 1458년에 벌어진 베오그라드 봉쇄전이 바로 그것이다. 1450년대 유럽은 다시금 서쪽으로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는 이슬람 세력에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1453년 유럽의 동쪽을 간신히 지켜내고 있던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이 오스만튀르크(이하 ‘튀르크’)에 함락되자 이슬람의 위협은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튀르크인들이 몰려오고 있다’는 풍문에 온 유럽이 술렁거렸다.
튀르크 10만 대군 베오그라드로 향하다
24살의 젊은 술탄 메흐메트 2세(Mehmet II)가 이끄는 튀르크 10만 대군의 칼날은 곧장 헝가리로 향했다. 유럽 내륙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열기 원했기 때문이다. 당시 헝가리는 지금의 발칸 지역 대부분을 포함하고 있었고 그 남쪽 거점인 베오그라드(지금의 세르비아 수도)를 중심으로 북상하는 튀르크군을 차단하기 위해 강력한 방어진을 구축하고 있었다. 방어의 중심에는 얀 후너디(John Hunyadi·1406~1458) 장군이 있었다. 그는 이미 튀르크군과 수차례 교전한 경험을 갖고 있었고 적으로부터 ‘튀르크의 재앙’이라 불릴 정도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헝가리 국왕은 트랜스바니아 총독이었던 그에게 베오그라드 방어 책임까지 맡겼다. 그는 잘 무장되고 전투 경험이 많은 직업군인의 장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일반 농민군을 운용했지만 전투의 핵심에는 자신이 직접 지휘하는 직업군인, 즉 전문용병들을 적극 활용했다. 이들이야말로 술탄의 근위부대인 예니체리(Janissary)와 맞상대할 수 있는 부대였기 때문이다.
적의 공격을 예상한 후너디는 방어에 필요한 자원을 비축하는 한편 지원부대를 모으기 위해 나섰다. 하지만 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인근의 영주들은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를 꺼렸다. 그나마 교황 갈리스토 3세(Callixtus III)가 기독교 세계를 구해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베오그라드와 후너디를 ‘기독교의 방패’로 선언하고 그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그는 프란시스코 수도사 가피스트라노(Gapistrano)를 보내 십자군을 모집해 후너디를 돕도록 했다.
그러나 1458년 7월 초 후너디와 가피스트라노가 지원군을 모집해 베오그라드에 채 돌아오기도 전에 베오그라드는 튀르크군에 의해 봉쇄되고 만다. 메흐메트 2세가 직접 이끄는 튀르크군은 10만의 보병과 300여 대의 대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게다가 200여 척의 전함을 동원해 도시 동쪽에 자연적인 방어벽을 형성하고 있던 사보(Savo) 강을 차단하고 나섰다. 당시 성 안에는 후너디의 이복동생과 장남이 5000여 명의 부대를 이끌고 이들의 공격을 가까스로 막아내고 있었다.
성벽을 불태워 적을 막다
7월 14일 지원군을 이끌고 베오그라드 인근에 도착한 후너디를 막고 있는 것은 튀르크군이었다. 후너디는 익숙한 지형과 기후조건을 이용, 사보 강을 차단한 튀르크 함대를 공격해 적의 봉쇄를 뚫고 성 안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30여 척의 튀르크 함선을 분쇄했을 뿐만 아니라 적의 전열을 흩트려 놓는 쾌거를 이룩한 것이다. 이로써 병력의 증원뿐만 아니라 농성에 절대 필요한 식량을 조달함으로써 장기적인 방어가 가능하게 됐다.
후너디의 외곽 공격에 당황한 메흐메트 2세는 성곽을 향해 맹포격을 시작했다. 베오그라드는 4개의 문과 이중 성벽을 갖고 있는 발칸 최고의 방어요새로 어지간한 공격에는 끄떡도 하지 않을 정도로 튼튼했다. 하지만 튀르크군 역시 당시 최고 수준의 대포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곽만으로 방어가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일주일간 계속된 대포 공격에 베오그라드의 성곽도 조금씩 붕괴되기 시작했다.
결정적 전투는 7월 21일 남쪽 성곽 일부가 허물어지면서 시작됐다. 이날 성곽 일부가 붕괴되면서 구멍이 난 것을 확인한 메흐메트 2세는 해가 지자마자 전면 대공세를 명령한다. 여기저기 붕괴된 성곽을 뚫고 튀르크군이 성 안으로 난입하면서 전투는 치열한 백병전으로 전개됐다.
결정적인 순간에 후너디는 이들의 진입을 막기 위해 온갖 화염물질을 퍼붓기 시작했고 급기야 성벽 전체에 타르를 뿌리고 불을 붙여 적의 접근을 막았다. 결국 성 안으로 진입한 튀르크군을 소탕하고 가까스로 적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기적은 다음 날 일어난다. 일단의 농민 십자군이 무너진 성곽을 넘어 튀르크군 진지를 공격하면서 작은 전투가 벌어졌다. 여기에 다른 십자군들이 합세하면서 전투는 커졌다. 가피스트라노가 이들의 맨 앞에 있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놀란 튀르크군이 혼란에 휩싸여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전열이 허물어졌다. 이 광경을 목격한 후너디의 부대와 기사들이 성 밖으로 달려 나와 이들을 공격하자 튀르크군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정예 예니체리 부대가 혼란을 수습하려 했으나 패닉 상태로 도망치는 이들을 막지 못했다. 보다 못한 메흐메트 2세가 뛰어들어 전투에 임했지만 허벅지에 화살을 맞고 혼절하는 사태까지 발생하게 된다.
민족의지 살리기 위한 작품
다음 날 헝가리군은 적의 공격에 대비했지만 아무런 공격도 없었다. 술탄까지 부상당한 상태에서 더 이상 전투를 계속할 수 없었던 튀르크군은 후퇴를 결정한 것이다. 이 전투의 승리는 유럽의 기독교 세계 전체에 큰 감흥과 안도감을 심어주었다. 교황 갈리스토 3세는 이를 축하하기 위해 모든 성당과 교회에 ‘정오의 타종(noon bell)’을 지시했고 지금도 지켜지고 있다. 유럽에서 정오에 울려퍼지는 교회 종소리는 바로 이러한 투쟁과 승리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19세기 헝가리 화가 알렉산더 폰 바그너(Alexander von Wagner, 1838~1919)의 작품 ‘Titusz Dugovics의 헌신(Titusz Dugovics Sacrifices Himself)’은 격렬했던 전투의 한 장면을 다루고 있다. 작가는 집요하게 성벽으로 기어오르는 튀르크군을 결사적으로 막아내고 있는 헝가리군의 모습을 생동감 넘치게 묘사했다. 그림 상단 오른쪽에는 성곽에 오른 한 튀르크군을 몸을 날려 밀어내는 Dugovics의 모습이 감동적으로 그려져 있다. 조국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전달하고자 했던 작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19세기 중반 유럽은 민족주의 열정이 넘쳐났다. 그림이 그려졌던 1859년만 해도 헝가리는 오스트리아 지배 아래 있었고 민족의 독립을 요구하는 결연한 목소리가 터져 나오던 시기였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민족의 독립과 자결을 요구하는 헝가리인의 시대정신을 표현하고 있다. 더욱이 위대한 장군의 빛나는 성취가 아니라 이름 없는 민중의 투쟁과 헌신이야말로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는 데 가장 중요한 자산임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중앙대학교 정치국제학과 교수
즐겁고 행복한 나날 되세요....
UP↑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