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KBS 사우회 문화답사위원회 】
행주산성 편
행주산성 대첩문
【 (사)KBS 사우회 문화답사위원회 】
. (사)KBS사우회 2023 하반기 문화답사위, 등산위원회 합동 개최
1. 행사일시 : 2023년 10월 20(금)
2. 답사장소 : 행주산성
3. 행사일정 : 당일 KBS별관 버스 편 출발
〔 행주산성 〕
행주산성의 원 이름은 덕양산성이다
북한산의 원명<原名>인 삼각산 서북안(西北岸)의 주천인 창릉천은 노적봉 턱 옆에서 발원하여 동원서류(東源西流)하니, 무려 약 예닐곱 마장 쯤 일까를 달려가게 되면 바로 덕양산을 감돌아 흘러 한양 도성의 젖줄인 한강과 합류되니 바로 덕양산 아래의 행주나루를 접해 있다.
행주나루는 도성(都城) 한양(漢城) 북부의 관문으로서 덕양산은 수로교통과 군사기지의 요충지이다
1593년 2월 덕양산성 행주나루 전투의 승리는 왜군에게 엄청나게 큰 타격을 주게 되었으니 두 말할 나위가 없이 한양 서울의 수복 탈환과 복귀에 목적을 둔 전투였다.
그 후 행주산성이라 하였되, ‘행주대첩’ 이라 하였다..
행주산성과 고양시
북쪽 고봉산의 ‘고’와 남쪽 덕양산 ‘양’ 따서 고양시 명칭이 되었다
〔행주대첩〕
癸巳.계사 宣祖26년 2.12 개시된 행주대첩은 대군 왜를 어떻게 물리칠 수 있었을까?
이 궁금증 해소를 위하여 실록에 버금 갈 역사실화장편소설 ‘돌의 춤’에서 그 전투장면을 불러와 본다.
역사 장편실화소설 「돌의 춤」은 1592년 임진왜란 때 여성의병단장이 그 휘하 의승병단을 이끈, 여성 주인공의 이야기로서 작중의 백미인 덕양산성 전투<행주대첩> 부분의 원작을 옮겨, 행주대첩 전투장면을 스토리화로 연상하여 이해하는 데에 도우미로서 게재해 봤다.
다물모<多勿母>는 「고양시향토문화재 제46호 밥 할머니」의 대명사로서,
실화 역사장편소설 작중<作中>의 주인공 역 ‘밥 할머니’ 작중 이름이다
〔 돌의 춤 〕
덕양산성 전투<행주대첩>에서 한 낟 관군에 돌을 주워 나른 당시의 부녀자 아낙네 들이 아닌, 사전에 이미 결성되어 훈련을 다진 여성의병단과 휘하 양성해 낸 의승병단을 총 지휘해 낸,
여성의병장군 다물모 대장(女性義兵將軍多勿母大將)으로서, 덕양산성 전투에 참전하여 승전에 크게 기여함으로써 훗날 명실공히 ‘행주대첩’의 명명을 받게 되는 공로로 이어지게 되었고,
작중의 다물모<多勿母>는 「고양시향토문화재 제46호 밥 할머니」로서 21세기인 지금도 후대에 보전 계승되고 있다.
행주대첩비
역사실화장편소설 '돌의 춤'
〔 돌의 춤 〕
중략
제 10장
덕양산성 전투
다물모 여성의병단과 삼각산 의승병단 일행은 덕양산에 무사히 이동작전에 성공했다.
계사년 2월 9일 다물모는 관군이 도성 탈환을 목표로 하여 덕양산정 성곽에 진을 친다 하여 일찍이 이동해 와서 자리를 잘 잡았다.
한성 탈환을 위한 대접전지는 덕양산성이 유력하다는 것을 중흥사 의승병중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세작(細作)에 의거 입수하게 되었는데 권율의 관군 거동을 이미 수집한 것이 정보의 수집원(收集源)이 되었던 것이며, 이를 다시 묘향산에 급 전파 하였고, 삼각산 다물모 여성의병단과 의승병군은 이에 거병(擧兵)을 하게 된 것이다.
이제, 완벽하게 이동하여 전투태세를 갖추게 된 것 이었으니, 의승병군 소속 세작(細作)들은 마을의 백성, 관군, 왜군 등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의 정보를 어찌나 정확히 파악하는지는 도무지 알 수없는 그들만의 특급 비밀 이었다.
그들은 축지(縮地)와 둔갑(遁甲) 등의 무예에 도통(道通)하였고 전술 전략에 뛰어난 기법을 지닌 실력자들로 구성되어 신출귀몰(神出鬼沒)하였다.
그 정보는 법구에 의하여 묘향산 그리고 각처의 의승병군에게 전달하여 정보를 동시에 공유 하였는데 그 방법으로는 중간 거점에서 서로 만나서 교환하고 귀환하는 연줄 식으로 접선하였으며 법구와 기량처럼 고도의 무공을 쌓은 중들로 구성하여 작전에 임 하였기에 여태껏 적에게 낌새 하나를 보이지 않았다.
총본부는 묘향산 이었고 부 본부는 삼각산을 왕래하며 각처의 의병들과 의승병군에게 정보를 나누어 보급해 주었는데 개성의 국청사가 중간 거점 였으며 후에 계룡산, 가야산, 팔공산, 내장산 등으로 거점화 하였고 매우 긴급하거나 동시에 거병을 해야 한다든지 하게 된다면 산 정상에 올라 봉화로 교신을 하기로 밀통(密通)되어 있었다.
삼각산 의승병들도 야간에 이동하여 덕양산에 무사히 안착하니 다물모 여성의병단 옆에 합류하여 자리를 잡았다. 그간 다물모의 군량 제공과 갖가지 지원으로 인하여 작전 구상과 대원들의 훈련 강화를 쌓으니 사기도 충천 하였고 전투 기량도 정규 관군의 실력에 비길 바가 아닐 정도의 뛰어난 전투 전술 전법을 갖고 있었다.
다물모가 “스님! 삼각산에 오셔서 전투훈련 하시느라고 그간 노고가 많으셨습니다”하니 법구는“저흰 두 국사 대사님의 배움에 따라 이 날을 대비하여 왔을 뿐입니다만, 저희들에게 군량과 갖가지 모든 지원을 하여 주시었기에 오늘이 있게 된 것입니다“라 하였다.
“맞지요 이 난리 통에 군량(軍糧)이 아니라면 오늘의 우리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라 기량이 나서서 말하는데, “자! 지난 업 보다 향후 공이 더 중요 합니다”라며 다물모는 자신을 겸허하게 낮추어 말하면서, 잘 싸워 이기는 공을 세우라는 의미의 격려를 하는 것 이었다.
전라도 순찰사 권율은 수원부 독왕산성에서 북상하여 덕양산성 행주나루에서 배수의 진을 쳤다.
조방장 조경이 “수가 적은 병력으로서 왜군은 병력이 꽤 크므로 성책이 반드시 필요 합니다”했다.
그 때 권율이 “양주에서 체찰사가 의논 차 나를 찾으니 다녀 오겠소”라 하며,“ 왜군의 숫자가 많으니 성책은 쳐야만하겠소“라 하며 자리를 뜬 사이, 조경은 집요하게 서둘렀다.
조경은 “제장들은 들으시오! 모두들 목책을 속히 치십시다!” 밤낮으로 긴 목책을 높고 두텁게 치고 말목을 깊이 땅에 박아 겹으로 목책을 축조 하는데 꼬박 밤낮으로 쉬지 않고 이틀이 걸렸다.
다물모가 다가가서 인사를 하였다.“우리 아낙네들도 장군을 도와 싸우기로 하였으니 받아 주시오”라 겸손하게 물으며,“우리 여성단원들은 방금 이곳에 오다보니 장군님의 부대원들이 목책을 치는 것을 돕지는 못하였으나, 조그만 힘이라도 같이 거들겠소“ 라 하니, ”하여간 뜻이 그러시다 하시니 그리들 하시지요, 참으로 갸륵하고 고맙습니다만, 부녀자들의 용기에 감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부인!“ 라 조방장 조경이 다물모의 인사에 답하였다.
전라도 순찰사 권율 부대 조방장 조경에 다가가 여성의병단을 이끌어 왜적과 같이 싸우겠다는 뜻을 전한 다물모 여성의병단의 소식은 덕양산 가까운 동네에 금방 퍼져 나가니 인근 동네 부녀자와 할머니 청소년 까지 동원돼 덕양산으로 모두 몰려 오는 게 아닌가!
그 때 전라도 순찰사 권율이 체찰사를 양주에서 만나고 방금 전에 돌아왔다. 관군 외에 수많은 아낙네들이 몰려있고 동네 부녀자와 주민들이 몰려드는 걸 보고 권율이 다물모 여성의병단에 다가 왔다. 다물모가 나서서 “우리 아낙네들도 장군을 도와 싸우고자 여기에 왔습니다”라 하니 “어허! 이런 용기와 정성이 또 어디 있겠소이까?!! 어서들 오시지요” “허나, 어히 싸우시겠소? 연약한 부녀자들과 아녀자들로서 말씀입니다!”라 했다
“장군님! 괜찮습니다. 우리는 지금 나라를 빼앗겨, 전 강토가 저 왜놈들의 소굴이 되었고, 우리의 재산을 다 빼앗겼으며, 노인들과 어린아이까지 가리지 않고 살상하는 저 짐승만도 못한 왜적들을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잡아내고 이 땅에서 몰아내야만 합니다, 우리는 아낙네들로서 전투에는 좀 설지마는 투석전을 벌려서라도 싸울 것입니다, 이에 필요한 돌이라도 주워 나르고, 물을 길어 올려 끓여 저놈들에게 비 오듯 끼얹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 아녀자들은 싸움 중에 부상당한 병사들을 치료하며 간호하고 부축할 것이오니 전장에서는 여성 부녀자들도 급할 땐 요긴한 한 몫을 반드시 해 낼 것입니다“ 라 하였다.
권율이“ 오호라! 이 충정의 정신은 어찌 비굴한 남정네 보다 낫고 호국의 일념은 어찌 우리조정 만대의 충렬이 아니고 무엇이겠소이까? 부인! 참으로 훌륭하시고 높은 발상을 구비해 오늘의 준비에 임해 오신 노고를 숭고히 존경 합니다. 자, 그럼 우리 관군 병장들과 함께 싸워 저 왜놈들에게 싸워 꼭 이기고 도성을 수복 하십시다“ 라 하는데, 권율이 삼각산 의승병군을 보더니, “승병군 이라! 어허! 이런 용기가 어디에 있겠소이까!” 그렇지 않아도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의 뜻을 같이하는 처영대사의 의승군부대가 저희와 합류하여 싸우기로 되어 있는데 또 의승병군이 일대가 가담해 주니 이 어찌 반갑지 않으리오!“라 하니, 다물모가 이어“저희와 연합전선을 펼칠 승병들로서 삼각산에 숨어 별도로 양성 되었습니다” 라 하니, 권율이 어서 오시오 스님..!, 허나, 어떻게 싸우시겠소?“ 라 하니 법구가 “저흰 이미 이날을 대비, 육칠 개월 전부터 다물모의 지원을 받아 훈련을 닦았습니다,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께서 전국의 의승병 1,700 명으로 평양성 전투에 참전 하였던바, 일찍이 다물모 께서 삼각산에 저희와 함께 모여 일어나니 저희는 300여 명의 승군으로써 장군의 곁에서 같이 싸우게 되었으니 무한한 영광 입니다“라 하였다.
권율은 놀라며 “우리 함께 싸워 반드시 도성을 수복 하십시다”라 하더니, “여봐라! 병장과 장정들은 듣거라! 여기 나라를 구할 스님들이 일어섰도다! 이 나라가 위태하여 여기 부녀자 의병들이 나섰도다! 여기 이 부녀자여성의병장 다물모와 법구 승병장에게 격려의 박수를 다 같이 치자!“ 라 하니, 관군들은 일제히 주먹을 들어 하늘에 올려 치며 함성을 질렀는데 그 소리는 덕양산 절벽에 부딪쳐 하늘에 치솟더니 메아리 져 한강 상류로 물결 쳐 퍼져 나갔다.
권율이 “그럼 저 우측 우리 관군의 후방에서 지원을 해 주시지요”라 하니 법구가“우리 승병들은 이 행주산성에서 죽기를 각오하였소!, 우리 승병들이야말로 왜놈들의 조총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그들도 탄환이 떨어지지 말라는 법은 없겠지요, 저희들은 바로 그 때가 절호의 기회를 포착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곧 이어 기량이 ”우리는 이 장대 봉무술 검법이요! 저 고구려의 조의 봉 무술과 고려국의 국청사 육전 법에는 우릴 당할 왜군들은 별로 없을 것이외다!“ 라 하니 권율은 놀라는 기색을 하면서, 스님들! 진정 잘 싸워 주십시오“ 라 하였다.
다물모가“자! 그럼...(법구를 보며 합장 하더니) 뒤로 걸어 총총히 물러나더니 조방장 조경에게 다가갔다. 조경이“부인! 여성 의병단은 산성 후미 쪽 가파른 지세를 맡아 주시오, 혹여 절벽을 타고 오르는 왜군이 필경 있을 겁니다“ 라 하면서, “우리 관군은 왜군 접근이 용이한 북측 완만 지형을 맡겠는바, 만약에 왜병이 쏘는 화기나 조총에 목책이 불이 날것에 대비하여 물을 속히 길어 올릴 수 있도록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부인!“ 라 했다.
“예 장군님, 참 좋으신 의견 이십니다. 그리 하겠습니다”라 다물모가 답하는데, 그 때 민보령과 우승미, 곽영신, 셋이 나서며 “아하 우리들이야말로 물 당번이다!”라 하며 환호할 때 다물모는 천립을 급히 불렀다.
수앙기 작전반의 지시는 천립에게 지시했기 때문 이었다. 민보령이“석전쯤이야 삼각산에서 많이 연습 하지 않았소! 굵은 돌 잔 돌 모두 쓸모가 있소이다!“ 라 우승미와 곽영신에게 하니 ”이봐요 우리의 실력을 보여줄 날이 드디어 왔단 말이요, 그려!“ 하였는데, 이들 핵심 여성대원들은 의욕이 어찌나 큰지 주먹밥 조리, 석전에다 이번에는 물 길어 올리는 일까지 자원하려 하였으니 다물모는 원래의 수앙기 조(組)인 천립과 기룡 등을 부르게 된 것 이었다.
천립이 뛰어왔다.“ 예 어머니! 부르셨습니까?”“그거 있잖느냐! 수앙기를 속히 차려라!”라 하니, “ 예 어머니! 그리 하겠습니다”라 천립이 준비에 급히 들어가며, “어디 계시오?, 기룡 동수를 부르며 찾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보고 석무기1조 인곤은 찬호와 종국을, 제2조 선익은 태룡과 강우 등을 불러 석무기(石舞機)두 대를 각각 열심히 조립하는 등 사대(射臺)의 마땅한 데를 이쪽저쪽 장소를 찾아 고르느라 두리번거리고 다니기도 하였다. 이윽고 말뚝을 박고 석무기를 묶어 고정을 하는 등 사대를 다 정하고는 모두 휴우 하면서 엎드리고 꾸부렸던 허리를 펴고 일어났다.
“히야! 네놈들 이 맛을 좀 보거라! ”석무기1조 장 인곤이가 하니 석무2조 남 강우가“여보게, 이젠 왜놈들 자네한테 다 죽었네, 안 그런가?!“하니, ”아닐세, 그건 자네 손에 달린 것 아닌가?“ 라 하며 여유를 부리는 등 심기가 깊은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며 석무기를 조립하여 사대까지 다 정하기를 끝마친 것 이었다. 석무기는 다물모가 발명의 고안을 제시하여 옥형이 주책임을 갖고 인곤, 찬호, 종국, 선익, 태룡, 강우 등이 합류하여 만들어낸 돌 날리는 전투 투석기인데 유독 이름만큼은 옥형의 고집으로 “춤추는 돌 기구“라 하여 꼭 그렇게 부르기로 한 것이다.
癸巳(선조 26) 2월 12일 관군, 다물모 여성의병단, 삼각산 의승병대 등의 연합전투군이 행주나루 덕양산성에 모이다 보니 어언 약 삼천여 명 남짓한 병력이 전투 대열에 집결하게 되었다.
덕양산은 창릉천이 흘러 한강과 만나는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맴돌 듯이 동그랗게 솟은 자그마한 산인바, 한강을 드나들며 한성에 이르는 도성의 북부 관문이다. 덕양산 위에는 산성이 옛날부터 있기에 행주나루의 덕양산성 이라 부르더니 이를 줄여서 이제는 행주산성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니 지금의 고양시 덕양구라는 이름은 바로 이 덕양산의 이름을 따 온 것이다. 또 북쪽 고봉산의 고자에 남쪽 덕양산의 양자를 붙여 ‘고양’이라 하게 되었다.
덕양산 정상은 맨 위를 중심으로 하여 쌓은 토성의 성내에는 백제시대의 기와, 토기 등이 산재한 것으로 미루어 이 성의 축조는 삼국시대로부터 축조해 왔으니 한성의 서북 요충지였으므로 행주나루를 거점으로 하여 한성 도성으로 닿는 길목이 되는 매우 중요한 장소가 되어 왔었다. 덕양산성은 해발 124m 덕양산 위에 위치한다. 북동쪽으로는 삼각산이 발원지인 창릉천이 직접 흘러 들어오고, 동남쪽은 한강의 상류를 보면서 강물과 맞닿았고 서북쪽은 한강의 하류로서 임진강과 합류하여 파주의 서쪽 강화도를 측면에 두고 서해로 흘러드니 행주산성은 한강의 하류를 살펴서 도도히 흘러 오늘에 먼 역사를 품고 강은 마냥 흘러만 가고 있었다.
행주나루 덕양산성 전투를 지휘한 관군 대장은 권율인바, 후에 도원수가 되었다. 권율은 수원 독왕산성(禿旺山城)에서 지구전과 유격전으로 왜군의 서진을 막았고 왜4군대장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부대를 싸워 격퇴 시켰다. 이어 권율은 병력을 나누어 부사령관 선거이(宣居怡) 에게 시흥 금주산(衿州山)에 진을 치게 조치하였고, 자신은 승병포함 2,8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에 주둔하여 대치하게 되었다.
권율은 조방장(助防將) 조경(趙儆)을 시켜 성을 수축케 하고 목책(木柵)을 만들어 이를 대비 시켰으며 병사(兵使) 선거이(宣居怡)는 금주(衿州-始興),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은 강화(江華), 충청감사 허욱(許頊)은 통진(通津)에서 각각 그를 응원키로 하였었다.
조방장(助防將) 조경(趙儆)은 지모와 전술이 탁월한 장수였다. 목책을 칠 때 왜적이 달려들을 언덕에 침으로써 왜병의 접근을 어렵게 하였고 목책은 반드시 2중으로 두 벌씩 겹쳐서 쳐 나갔다. 그리고 종횡으로 목책을 쇠줄로 엮어 묶어서 좀처럼 목책이 붕괴되어 흩어지지 않게 하였고, 목책이 무너져 뚫려도 또 한 겹의 목책이 교차되게 쳐져 있으므로 왜군의 공격행동을 어렵게 만들고, 침투할 때 시간을 지체하고 체력을 소모 하도록 목책을 치는 전술적 지략을 갖춘 장수였다.
다물모가 이끄는 여성의병단은 삼각산에서 칠팔 개월 간의 훈련을 거친 이미 준비된 여성 의병단 이었다. 한성의 북방 동네 지금의 불광동, 연신내 일원, 구파발동 일원과 고양시 덕양구 창릉동, 효자동 일대의 온 동네 모든 부인들이 다 들고 일어나니 지금의 서울 은평구와 고양시 덕양구 2개구의 아줌마 부대가 대거 모여, 여성 의병장 다물모를 따라 나서게 되니 여성의병군이 되었다. 다물모의 지시대로 부녀자들은 현장에서 긴 치마 자락을 잘라서 짧게 만들고 자른 치맛단을 덧치마로 만들어 입으니 그것이 바로 돌을 나르는 앞치마가 되었으니 행주치마라 일컬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당시 여성들의 긴치마자락을 자른 자투리 천 치마 즉 덧치마로 돌을 날라서 석전(石戰)으로 왜군에게 타격을 입히게 되는데, 그 최초 착안은 다물모가 고안해 지시한 것이며, 그것은 당시 치마가 길기 때문에 엎드려 돌을 주으려 할 때 치마 끝단 자락이 자꾸 발에 걸리기 때문에 그 즉시 현장에서 자르고 덧붙인 치마가 나오게 된 것이 오늘에 전래 되니 행주산성의 행주 자를 붙어 행주치마가 된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오늘날에는 아리따운 신부가 밥상을 차리든가 음식을 요리할 때에 여성들이 입은 행주치마를 생각하노라면 격세지감이 들게 된다. 그 때 부터“행주치마”라는 명칭이 생기게 되었으니, 그 연유가 여기 이 행주대첩의 다물모가 있었기 때문인 것 이었다. 이처럼 덕양산성 전투를 후에 부르기를 행주산성 싸움이니 행주대첩 등으로 부르게 되었다.
덕양산성 행주나루 전투에 참여한 의병과 승병 그리고 관군 등이 연합군병으로 싸우게 되었다. 조선 관군은 삼 일전부터 이중으로 목책(木柵)을 단단히 쳤는데 그것도 서로 얽어서 흩어지지 않거나 쉽게 무너지지 않게 쳤다. 조방장(助防將) 조경(趙儆)이 정면에 진을 치고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다물모가 인솔하는 여성의병단도 역시 격전의 태세를 갖춰 관군의 부대 뒤쪽에 훈련 시에 짜놓은 반편성대로 진을 치고 싸울 태세를 갖췄다. 관군이 선 약간 비스듬한 측면엔 삼각산 의승병대가 믿음직하게 동선(動線)을 유동성 있게 하여 진을 쳤다.
왜군은 평양성 패배에 이은 개성 패퇴와 연안성 침탈 실패 등으로 총퇴각해 남하하며 그 모독을 만회하기 위한 적개심이 응집되어 한성 안에서 약 한 달쯤 전력을 가다듬고 있었던 터 였고, 집결된 병력은 대단히 많은 숫자로 참전이 예상되게 되었다. 더욱이 명기할 것은 계사년 1월 27일 경 벽제관(碧蹄館)에서 명의 제독 이여송에게 승리한 직후여서 그들은 싸울 의지가 왕성했고 사기 또한 대단히 높았다.
전라도 순찰사 권율이 이끄는 관군 부대의 무기로는 화차 40기와 각종 화포인 총통과 비격천뢰 등을 상당량 갖추고 있었는데 이는 한성을 하루속히 수복하고 임금을 모셔야 된다는 일념으로 그 무기들은 관군이 각고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준비를 해 온 무기들 이었다. 관군 병사의 개인 무기를 말할라 치면 그 중엔 대나무 끝에 창 같이 뾰족한 날을 달되 대나무 가지를 여덟 개 내지 열 개 정도를 남겨두어 마른 잔가지 자체가 할퀴고 찔리게끔 한 “낭선”을 갖추고 있었다. 이 낭선은 원래 명(明)에서 처음 쓰던 것이었는데 전래되어 의병과 관군이 같이 쓰게 되었다. 길이가 여덟 자 반 쯤 되는 “장창”이 있고 길이가 다섯 자 내지 다섯 자 반 정도 되는 “기창”이 있는데 원래 이것은 기병이 쓰는 창이라 하여 기창 이라 했지만 모병이나 자원된 농민이나 일반 백성이 나서게 된 관군에게는 낭선과 기창과 그리고 긴 낫이 주 병기였다. 또 길이가 대 여섯 자 되는 “삼지창”이 있었는데 이 삼지창은 세 날 끝이 나란히 뾰족이 뻗다가 가운데 날을 뺀 나머지 두 날이 외곽으로 약간 굽듯이 벌어진 것과 세 날이 모두 일직선인 것 두 종류가 있었고 “자루 긴 낫”은 길이가 일곱 여덟 자 정도 되었으며 개인에 따라 장검을 차는 등의 무장과 병기를 갖추어 소지하고 있었다.
왜군은 특유의 야행성을 발휘 하였다. 벌써 새벽 여섯 시 쯤 인 묘시(卯時)에 선발대 약 이백 명 쯤 돼 보이는 왜병이 한 밤중에 이동해 왔는지 이 이른 시간에 벌써 도착해 집결 하였다. 그들은 선무부대인 듯 도착하여 자리도 잡는 듯 마는 듯 우선 함성을 지르며 기세를 과시하려는 듯이 첫 행동거지로 무력시위를 보이고 조선군의 기세를 꺾으려 허세 부리는 작태를 보이는 것 이었다. 왜군들은 괜히 행동 기세로 과시하는 것을 보니 분명히 싸우기 전에 상대의 기세를 꺾으려는 선무병졸들이라 먼저 집결해 와서 위세를 떨치려는 것도 있었거니와 참전대의 기수단을 선투입, 집결하며 위세를 떨쳐 보이려는 듯 각 왜군 대장기 기수병을 먼저 내세우고 있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왜1군대장의 기는 붉은 바탕에 흰색으로 아주 큰 열십자를 수 넣어 그려 넣고 마치 중세의 십자군기로 착각할지도 모를 그런 기였으면 했으나, 그도 그럴 것이 고니시는 이미 카톨릭 신자였으니 그런 기로써 자신의 대장기로 만들고 싶은 것은 개인적인 바램 일 뿐, 그것은 아주 빠른 속단 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아니나 다를까!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임진왜란 5년 전인 정해(丁亥.1587년) 부터 금교령을 내려 천주교를 못 믿게 하였으니 고니시의 기는 흰 바탕에 뫼 산자 같은 띠가 3중으로 겹쳐 그려 넣었으니 저희 딴에는 독수리가 나는 형국을 새겨 넣은듯한데 보기에는 전혀 그렇게 봐줄 리 없었고 기 바탕엔 왜1군대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라 검은 글씨로 써 넣었는데 왜 제1군 고니시는 최초 부산 성을 함락 시킨 뒤, 중로(中路)로 동래-양산(梁山)-청도-(淸道)-대구(大邱)-인동(仁同)-선산(善山)-상주(尙州)-조령(鳥嶺)-충주(忠州)-여주 (驪州)-양근(楊根)-용진(龍津)나루-경성동로(京城東路)로 쳐들어오던 과정과 한성 흥인지문에 입성 후 북진하여 평양성을 점령 후 패퇴하여 남하해 오다가 벽제관 전투에서 명(明)의 제독 이 여송을 반격하고 이 행주산성 전투까지의 오게 된 긴 전장의 여정에 깃발을 앞세워 다닌지라 기는 갓이 헤지고 바람에 올이 풀려 너덜대고 있는가 하면 소서행장의 끝 장자가 닳아빠져 안 보이니, ‘소서행’이라고만 읽다보니 필경 덕양산성 행주나루 전투에 패해 후퇴하는 꼴의“작은 서쪽행차”가 되는 것을 예언이라도 해 주는 듯하였다.
왜2군대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기는 긴 직사각형의 천 갓에 굵은 검은 실을 달아서 수술처럼 늘어뜨렸고 그 안에는 거미 비슷한 독충 같은 걸 그려 넣고 왜2군대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라 붉은 글씨로 적혀 있었는데, 왜 제2군 좌로(左路)는 동래-언양(彦陽)-경주 (慶州)-영천(永川)-신녕(新寧)-군위(軍威)-용궁(龍宮)-조령-충주-죽산(竹山)-용인(龍仁)-한강을 건너 도성 숭례문으로 쳐 들어와 다시 경기북부와 강원도를 거쳐 함경남도와 북도를 거쳤으나 북관대첩 의병장 정문부에 의해 때는 동짓달에서 이월 강추위에 동상이 걸리는 등 험난한 지리에 곳곳마다 복병에게 패하여 삼분지 이만 간신히 함흥을 벗어나 돌아와 한성에 입성 하였다가 덕양산성 행주나루 전투에 나오게 된지라 기는 갓의 수술이 거의 다 빠져나가 이빨 빠진 것처럼 듬성듬성 수술이 박혀있고 깃봉은 없는 채 기수병은 괜히 흔들어대기만 하고 있었다.
왜3군대장 기는 푸른 바탕에 기의 가엔 물고기 등지느러미 같이 생긴 삼각형 검은 천을 전 둘레에 붙이고 바탕에는 원을 그려 넣고 그 안에는 무슨 짐승의 머리를 그려 넣었는데 살쾡이인지 고양이인지 원숭이인지 기가 퇴색되어 잘 나타나지를 않았고 안에는 왜3군대장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라 검은 글씨로 써 넣었는데, 왜 제3군의 우로(右路)는 김해(金海)-성주(星州)-무계(茂溪)-지례(知禮)-등산(登山)-추풍령(秋風嶺)-영동(永同)-청주(淸州)-경기도로 하여 한성 입성 후 북상하여 평양성과 황해도 일대에서 주둔 하다가 얼마 전 벽제관 전투에서 명의 제독 이 여송을 이긴 후 덕양산성 행주나루 전투에 참전하여 사기가 살아있는 듯해 기수 병은 제법 깃대를 높이 치켜세워서 흔들어 댔다.
왜4군대장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의 기는 왜1군대장 고니시 유키나가와 비슷한데 하단 좌측 모퉁이에 청색으로 물 들여 넣은 삼각형이 있고 그 안에는 수리인지 매인지 헐어서 잘 안 보이는데, 흐릿하게 무슨 뱁새인지 좌우간 새 머리를 그려져 있는데 기 바탕에는 왜4군대장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라 써 넣은 것 이었다.
왜5군대장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는 깃봉 위에 수술을 달고 안에는 저희들이 좋아하는 무슨 꽃인지를 사쿠라 인지 살구꽃 같은 걸 넣고 바탕에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라는 군장을 새겼고,
왜6군대장 기는 분홍 바탕에 붉은 별을 크게 그려 넣고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小早川隆景) 대장의 이름을 새긴 기의 갓은 수술을 달고 있었으며,
왜7군대장 기는 누런색 바탕에 원형 고리가 연결된 무늬를 갓에 달고 바탕엔 자색으로 제7군대장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라 쓰고 기 안 상단에 큰 활을 그려 넣고 있었다.
왜8군대장 기는 깃봉에 바람이 나부끼도록 옷고름 같은 댕기 천을 달고, 바탕엔 성(城)무늬 같은 걸 그려 넣은 안에 월아(月牙) 극(戟) 창을 그려 넣고, 자주색 바탕에 왜8군대장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라 씌여있다.
모든 대장기들을 기수 병이 흔들어 대고, 고함을 질러 대지만 깃발은 바람에 나부껴 용기가 북돋워질 기가 아니라 기는 너무 헐었기에 마치 희고 검고 붉은 천들이 빨래 줄에 널려 바람에 펄럭이는 것같이 보이는가 하면 서낭당의 고목나무 가지에 달라붙어 너풀대는 희 검붉고 푸르스름한 천 조각이 너풀대는 것 같기도 하며 딴 각도로 보아 생각할 때에는 여우 떼가 패거리 늑대 떼를 만나 두려움에 떨며, 등뼈의 털을 뻗혀 곤두세우는 것 같이 보였다.
왜병들의 야유하는 작태를 본 그 때를 놓칠세라 천립이 삼각산 의승병대로 뛰어 가더니 법구와 기량을 향하여 급히 합장을 하고 깃발을 확 풀어 보이는 것 이었다. 하늘을 향해 곧장 세워 올리는데 검은 바탕에 굵은 흰 글씨로 삼각산의병승장법구경상대사(三角山義兵僧將法九敬相大師)라 씌여 있는데, 깃발 사면의 외곽은 흰 삼족오로 수를 놓아 둘렀다. “법구와 기량이 같이 나서며 ”다물모 대장님! 감사 합니다!“를 연발 하였다.
그 때 당차 보이는 의승병 성찬이 급히 나와 천립 으로부터 기를 교차 인계 받더니 치켜세워 흔들었다. 진중의 모든 의승병들이 주먹을 하늘에 던지며 함성을 질렀다. 만세! 만세! 만만세! 법구승병대장 만세! 라 몇 번 씩이나 외쳐댔다. 의승병기는 이 귀분과 오 인영이가 수를 놓고 자체는 옥형이 썼으며 그림은 천립이 떴고 제작은 장 인곤이가 만들어 낸 것 이었다. 삼각산의병승장법구경상대사(三角山義兵僧將法九敬相大師) 대장기가 솟아 나부끼며 의승병대의 함성이 울려 퍼지니 왜병들은 잠시 야유를 멈추고는 이쪽을 쳐다보며 눈이 휘둥그레 해 지는 것 이었다.
다물모 여성부대의 돌을 줍고 모으는 편성 조 여성들은 덕양산성의 모든 돌을 주워 모으느라 정신 차릴 여가가 없었는데, 돌은 참으로 질이 좋았다. 창릉천변에 다듬어져 동글동글하고 반질거리는 것이 오랜 기간 물살에 다듬어져 매끈매끈한 돌이 있는가 하면 둥글넓적한 타원형의 손바닥 같은 돌도 있고 덕양산 끝자락 천애절벽 위 오랜 풍화에 견디다가 흩어져 부스러기로 떨어져 내린 돌은 거무스레하고 예리하게 뾰족하며 칼처럼 날이 서 있는 돌도 있었는데 어쨌든 수많은 여성의병단과 부녀자들의 손이 총동원 된 돌이니 만큼 짧은 시간대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량의 돌은 이미 작은 언덕처럼 쌓이게 되었다. 어떤 이는 기와 깨진 것이든 토기나 사기 깨진 사금파리 까지도 주어 모아왔다. 가까운 동네에서 금방 참여한 부녀자는 치마가 길어 발에 걸리니 즉석에서 잘라 덧치마로 하여 그 덧치마에 돌을 실어 나르기도 하였는데 이 덧치마 역시 다물모가 현장에서 긴급히 지시했다.
덕양산성 반경 4,5십리 향리 마을 전체의 부녀자들이 모두 다물모 여성부대에 합세하여 일치 단결하여 이러한 힘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으니 그야말로 다물모의 지모(智謀)요, 지도력이 발휘된 것을 보여준 것 이었다. 다물모는 민보령과 우미, 곽영신을 시켜 삼각산에서 만들어 기 지급한 앞 덧치마를 각자 두르고 돌 줍는 것을 독려 하였다. 돌을 줍는 덧치마는 개인장구로서 행주산성 전투에 참여하게 된 지금에 와서는 너무나 요긴하게 잘 쓰게 된 보물 같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 덕양산성에 도착하자마자 먼저 돌 줍는 것이 승리의 길이라고 다물모는 힘주어 지시를 하니, 모든 여성의병단원들은 돌을 먼저 주워 날라다가 쌓아놓는 등 전투준비에 들어갔다.
왜군 선발대 병졸들이 약 이백 명의 뒤에 또 삼백 여 명이 더 몰려들더니 삼각산의병승장 법구경상대사(三角山義兵僧將法九敬相大師) 깃발을 솟구쳐 흔들며 소리 높여 지르는 함성에 기세를 꺾일세라 왜병 오백 여명이 이상한 소음으로 시끄러운 괴음을 내며 조선군 쪽에 들리라고 연거푸 질러대기 시작 하였다.
응발이 재빠르게 달려와 다물모 앞에 다가 서더니, “대장 마님! 저희 의승병들이 만든 마님 의병부대 대장기 입니다, 어서 기수 병을 세워 기를 앞장세워 싸움에 나서시지요!“ 하는 게 아닌가! 기수에 키 큰 종국이 즉시 다물모 여성대장기를 세우니 갑자기 하늘에서 상서(祥瑞)로운 한 줄기 빛이 무지개처럼 내리 비추이는 게 아닌가! 그 빛은 매우 하얗고 섬광처럼 빛을 발산하고 있었는데, 왜병들이 이를 쳐다보다가 눈이 어찌나 부셔 오는지 왜병들이 이쪽을 쳐다보더니 겁에 질려 놀라고 있었다. 여성대장기를 더 치워 세워 올리니 기는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여성의병장군다물모대장(女性義兵將軍多勿母大將)이라 체가 굵게 씌여 있었고, 기의 바탕 상단에는 큰 삼족오가 그려져 있으며 기 둘레에는 세로로 작은 삼족오가 나란히 생기 있게 나르는 그림이 새겨져 펄럭이는데 다물모 대장기는 그 상서로운 섬광의 빛을 후광으로 삼족오가 유유히 훨훨 떼 지어 나는 듯하였다. 여성의병장군다물모대장(女性義兵將軍多勿母大將)기의 제자(題字)는 법구가 썼고 삼족오는 기량이 떴으며 조립 제작은 이응발이 마감을 하였다. 이 때 기수의병인 종국이 기를 높이 치켜세워 흔들며 “야! 이놈들아 이걸 봐라!”라 외치니, 여성 의병단 일행 전부가 목이 터져라 하고 왜병 진지를 향해 함성을 질러 외쳐댔다.
이 때 오 인영이의 목소리는 남성의병 열대여섯 명이 지르는 고함과 맞먹었는데, 오 인영의 숨은 특 대형 용량의 성대(聲帶)는 천부적인 것 이었는데 이는 삼각산 훈련장에서 익히 알고 있는 터 였으니 함성으로 한 몫을 해 내는 데 충분한 전술의 한 부류가 되었다. 다물모는 법구를 향하여 “스님 고맙습니다”라 하며 합장을 하며 반배를 올렸다.
왜군 선발대 병졸들 약 이백 명의 뒤에 또 삼백 여 명이 몰려들더니 또 뒤를 이어 다시 오백 여 명이 도착하니 어언 천 여 명이 모여, 와아! 와아! 고함들을 질러 대는데 바로 조금 전 조선군 진지 쪽에서 여성의병장군다물모대장(女性義兵將軍多勿母大將)기를 솟구쳐 흔들며 함성을 지르니 보잘것없는 아낙네와 아녀자들의 함성에 기가 막힐 노릇이란 뜻으로 생각해서 인지 보다 더한 야유와 함성을 대꾸삼아 질러대는 것이었다.
이제는 점점 더 다급하고 긴장이 고조되어 다가오는 시각이 되었다. 이귀분이 오인영과 함께 다물모 에게 뛰어 오더니 “어머니!, 이걸 꼭 차시지요”하며 보자기를 풀더니 손바닥 두 개 크기의 벙어리장갑 같은 털가죽 천으로 된 가슴 덮개를 꺼내 다물모의 저고리 앞섶 고름을 풀더니 끈을 뒤로하여 달아주는 게 아닌가! “어머니!, 이건 반드시 차셔야만 합니다. 하기에 자세히 보니 그 건 ‘방탄 앞치기’였다. 원래‘앞치기’는 어린아이들이 침을 흘리매 앞에 차던 턱받이였지만 이것은 어른의 ‘가슴 가리개’요 여성의 것으로는 “심장(心臟) 보호대”인바, 다물모를 모시는 이귀분이는 순수한 충성심이 울어나 기발한 착상의 새로운 제품을 만든 것 이었다.
이어서 민보령, 우승미, 곽영신, 원송자, 이금자, 안미자, 김정임, 구본영 등 핵심 여성의병단원의 열 명쯤 에게도 모두 차게 해주었으니 이귀분은 그 바쁜 시간에 틈을 내어 다물모를 위하면서 선배 여성의병이 것까지 “방탄 앞치기”를 만드는 배려심을 발휘해 낸 처녀 였다.
귀분이는 토끼털가죽에 대(竹)판과 갈근 판을 겹치고 굵은 삼배 천 수 겹을 봉합한 심장 방탄 막이를 그간 남모르게 만들어 만일의 왜병 조총탄환을 방어토록 만들어 존경하는 다물모에게 드리고자 하였던 것이니, 다물모는 이귀분의 등을 토닥이며 감격해 하고, 민보령, 우승미, 곽영신을 위시한 십여 명의 핵심 여성의병들도 감격해하며 시큰해 오는 콧등을 쓰다듬고 있었다.
이 때 발 빠른 응발이 뛰어 오더니 접시 한 개만한 방탄판을 법구와 기량에게 다가와 장삼자락을 풀더니 왼쪽가슴에서 우측 어깨와 등을 이어 끈으로 달아주는 게 아닌가! “두 대장 스님!, 이걸 꼭 다시지요”하고는 이어 저쪽으로 달려가더니 솥에다 불을 지피느라 열중인 옥형을 일으켜 세워서 방탄 판을 달아주더니, 천립도 찾아내어 따라가 달라주는 것 이었다. 응발은 옥형에게 구한 괭이 날과 쟁기 보습 날을 자르고 다듬고 갈아서 방탄 판을 만들어 오직 법구와 기량과 옥형 그리고 천립 에게 만은 달아주는 것이었다. 방탄 판은 튼튼한 굵은 삼베 천 수 겹의 주머니에 넣어 고양이털 가죽으로 감싼 탄환 방지용 심장 가리개 철판 막 이었데 왜적의 조총탄환에 사람의 심장만큼은 막아 가리게 된다면 결코 목숨만은 살게 되어 죽지는 않는다는 자신만의 소신이 있었기에 그 성의를 행한 것 이었다. 이미 전투는 벌어졌지만 그걸 받아 찬 이들은 모두 응발에게 머리를 굽혀 고마워하며 감격해 하였다.
도원수 김명원은 파주에, 통진 에는 허욱, 강화에 경기수사 이빈과, 충청수사 정걸이 주둔 중이었고, 경기도 강화부에는 전라도 절도사 최원이 병력 4,000명이, 경기도 순찰사 권징은 주로 보급담당을 하며 주둔 중 이었고, 경기 방어사 고언백은 양주 해유령에 벽제관전투 후 병력 2,000명을 인솔하고 주둔 중 이었고, 창의사 김천일은 의병 3,000명을 준비시켜 강화에 있었고, 의병장 우성전이 의병 2,000명을 준비하고 있었으니, 이 때는 계사년 1월 10일 조선 관군의 전황은 위와 같았다.
계사년 2월 12일 이었다. 이른 아침에 이르니 어디서부터 몰려 왔는지 왜군은 어느덧 3만여 명의 대군으로 늘어나 집결하더니 행주산성을 물샐 틈 없이 여러 겹으로 포위한 채 3진(陣)으로 방향을 나누더니 공격을 가해오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조선 관군 측 권율의 핵심 병력은 이천 팔백에서 삼천 명쯤 이었다. 각지의 차출된 병력과 조력 지원 온 병력을 합치게 되면 겨우 오육천여 명 정도의 병력이니 왜군과의 전투인력 비율은 아군은 한 명이 대여섯 명의 왜적을 상대하는 격 이었다. 싸움에 대응 하려면 최소한의 전투훈련을 한 병사로 구성 되어야 하였음에도 그러하지를 못 하였으니 실제로 전술 기량을 발휘하여 싸울 수 있는 병력은 한참 부족한 실력 이었다. 다물모 여성의병단과 삼각산 의승병대 오백 명을 합하게 되니, 이들은 이미 준비해 온 의병들로서 혼자서 열 명을 상대하여 싸워도 되는 형국의 사기가 높은 의병단 이었다.
왜군의 제1진으로 공격 개시해 쳐들어오는 건 왜1군대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전열이란 데에는 이제 눈 여겨 보지 않아도 알 듯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왜1군대장으로 편성되어 있되, 왜란의 사실상 총사령관 이었다. 고니시의 휘하 무장으로는 대마도주인 소 요시토시宗義智)와 마쓰라 시게노부(松浦鎭信)가 주된 무장 이었다. 당초 조선 상륙 시 왜1군대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만 팔천여 명의 병사를 지휘하며
쳐 들러온, 조선에 있어서는 가장 큰 원흉이요, 악랄한 행위를 자행한 자들이다. 평양성 전투 패퇴 이후 지금의 행주대첩 현재의 병사는 이미 절반은 잃은 상태이었기에 행주산성 전투 개시 첫 진에는 사 오천 명의 조총대를 내세워 대대적으로 쏴 대며 돌진해 쳐들어왔다.
이에 조선군은 화살을 최대한 아끼면서 화포로 최대효과를 거두기 위하여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지체 하다가 동시에 화포 발사와 함께 활을 쏘아 격퇴 시키는 전법으로 맞 공격을 가하여 타격을 주는 전투계획을 세운 전술을 쓰기로 하였는데 워낙 왜적이 많은 수로 공격해 오는지라 전투는 초반부터 예견한 대로 격렬해 져 갔다.
이때를 놓칠세라 다물모는 삼각산 의승병군 훈련대장 기량(奇亮)에게 급히 제언을 했다. “기량 스님! 초전에 기선을 잡아야만 하겠는데, 저의 생각으로는 스님의 궁술로 제압을 해 주신다면 효과가 매우 크리라 생각 합니다“라 하니 기량은 즉시 ”맞습니다, 전투 개시 초부터 저리 공격해 들어오는데 저도 역시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속히 시행 하겠습니다“ 하더니 눈 깜짝할 사이도 없이 고니시의 조총병 중 맨 앞 열을 향하여 연달아 화살을 날리는데 무려 숨 두 번 쉴 때마다 한 발씩 쏴 명중을 시키는 것이다. 기량의 활시위를 떠난 화살은 그대로 왜병을 적중시켜 쓰러뜨리는데 벌써 앞 열로부터 그 뒤를 향하는 순서로 이미 삼십 명이 쓰러졌는데 가슴과 인후 명치 아니면 목 결후와 배에 맞고 쓰러지는 게 아닌가! 기량은 호흡을 스무 번 쯤 고르면서 왜병의 동태를 보더니 다시 활을 쏘는데 반드시 아군에게 가장 근접한 맨 앞에 선 순서대로 왜병의 조총병을 맞춰 쓰러뜨리는 것 이었다. 그러기를 계속 그대로 되풀이 하였는데 맨 앞의 조총병은 백구십 명이 거의 모두 인후와 목 밑 울대뼈인 결후를 맞고 쓰러져 나갔으니 기량의 활솜씨는 진정 신궁(神弓) 그대로 였다.
이귀분의 아버지가 보내준 화살이 이백 개 이니 최후의 화살 열 개는 비상으로 남기고 전부를 쏴 백구십 개의 화살이 단 하나의 불발도 없이 적을 맞춰 쓰러뜨린 것 이었으니, 왜1진군 부대는 주춤하고 더 날뛰며 덤벼들지를 않는데 이 때를 놀칠세라 관군이 총통을 날리고 화차로 맞 공격을 하니 왜병은 부상자가 속출하게 되어 더 이상은 접근치 못 하고 당분간 소강상태가 되게 되었다.
왜 2진군은 이시다 미나리(石田三成)로서 임진왜란 삼 봉행 중 행정 무관의 한 사람으로서 이 싸움에 가담하게 되었으니 이 덕양산성 행주나루 전투에 왜군은 총동원하여 싸운 것이 되겠으니, 이시다 미나리(石田三成)는 자신의 친위병 까지 투입하였던바, 조선에 들어온 전 병력을 지금 덕양산성 행주나루 전투에 사활을 걸고 총 투입을 하게 된 것이었다. 조선에 온 3봉행들은 제각각 호위병인 친위대를 이끌어 왔는바, 각각 그 수는 천오백 명 정도의 병력으로서 조총을 쏘아대며 쳐들어 왔다. 이 때 조선군은 화포와 화살로 맞 사격을 가하여 왜군의 공격을 무력화 시키는 전법을 쓰며 맞 공격을 감행 하였다. 특히 관군의 총통은 어찌나 멀리 나가는지 왜군의 진지 복판과 후미에서 터지게 되니 엉뚱한 데에서 부상자의 수가 점점 늘어나기 시작 하였으니 권 율의 총통에 왜병은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 이었다.
다물모 여성의병대 아낙네들은 남자 못지않게 관군에 버금가게 당찬 순발력을 발휘 했다. 천립은 신속히 수앙기(水昻機)를 기룡과 동수와 함께 가동을 시작하였다. 길고(桔橰)의 원리를 착안한 수앙기는 두 말(斗) 들이 두레박으로 하여 행주산성 끝자락 덕양산 절벽 백오십 척이 되는 아래의 한강물을 낭떠러지에 닿을 듯 말 듯 퍼서길어 올리는 것이 아닌가! 곧 이어 옥형과 선원이가 언제 준비 했는지 솥에 불을 지피니 금방 물은 펄펄 끓고 있었다. 곧 이어 인곤과 찬호가 각각 본인의 조 두 사람씩을 인솔하여 석무기 두 대를 조립하여 이미 사대(射臺)에 얹혀 놓았는데 눈치 빠른 의병단원들이 벌써 돌을 날라다 놓고 어떤 이는 연이어 얹을 태세를 갖춰주고 있었다. 찬호와 인곤이가 석무기 첫 발사를 하는데 특유의 그 이름만큼의 “춤추는 돌 기구”에 실려 날아가는 돌덩어리는 공중에서 마냥 춤을 추다가 왜병의 머리를 직격탄으로 때렸다. 그 화려한 춤은 갑자기 독수리 춤으로 돌변하더니 매가 닭을 채려 내리꽂는 듯이 왜군에게 찍어 내리는 것이었고, 다른 석무기 에서 발사된 춤추는 돌은 마치 장마철 소나기가 뭉쳐서 무더기로 내려 박히듯이 왜병에게 퍼부어 쏟는 것이었으니 이번의 잔돌맹이에 눈 두덩이를 맞은 왜병들이 비틀비틀 춤추듯이 하다가 주저앉고 꿇어앉고 고꾸라지는 것이 아닌가!
그 두 대의 투석기는 교차적으로 장전되어 발사를 연속적으로 퍼 부어 대니 왜병들은 우왕좌왕 하다가 고개를 숙여 피하는 등 안절부절 하니 조총을 쏘지 못하고 조선 관군이 쏘는 화살에 타격을 받고 쓸어져 갔다.
그 때 왜3진군이 쳐들어오는데, 왜3군대장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군대였다. 구로다는 황해도 연안성 전투 등으로 일부 병력의 손실이 있다 보니 약 삼천 이삼백 명 정도의 병사로서 제 3진 공격대로 편성되어 쳐들어 왔다. 구로다의 휘하 무장으로는 나베시마 나오시게 (過高直茂)와 사가라 요시무사(相良賴房) 둘을 두고 있었다. 구로다 군은 긴 나무를 이용해 높은 망대 틀을 만든 다음 그 망대의 누각 위에 조총 병사를 올려서 조선 연합군 쪽으로 사격을 가해 댔다. 그 때다. 이미 은폐된 자리를 만들어 사대(射臺)를 갖춘 기량이 어깨 위의 활을 잽싸게 잡아 정확히 조준해 겨누더니 한 발에 누각 위 왜군 조총 사수(射手)를 맞춰 떨어뜨리니, 귀분이의 아버지가 만들어 준 화살은 어찌나 성능이 좋은지 명궁 기량의 손에 넣어졌으니 조준 율은 과연 백발백중 이었다. 기량의 활 쏘는 솜씨는 그야말로 신궁(神弓)의 경지 였는데 이귀분이로부터 받은 이백여 개의 화살은 불발 하나 없이 왜병 이백여 명을 적중 시키니 왜군은 짐짓 놀라 물러서는 것 이었다. 이를 신호라고 하듯이 관군 전위대 조방장 조경이 조선의 화차로 쏘아 누각을 파괴시켜 구로다 군을 꺾으니 적이 우왕좌왕 할 때 다물모 여성의병대가 석무기(石舞機)를 발사하니, 그 돌은 메주덩이만한 크기로 날아가 떨어질 때 망대 틀을 부수는가 하면 다른 석무기에서 쏘는 잔돌은 우박처럼 왜병의 머리 위에 쏟아 붓고 어떤 잔돌들은 강풍을 동반한 폭우처럼 적의 얼굴을 후려쳐 쏟아져 내리니 왜적은 눈을 감은 채 비틀거리며 어지럽게 흩어졌다.
왜4진군으로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왜8군대장이 네 번째 진으로 쳐들어 왔다. 우키타가 처음 조선을 침입할 때의 병력은 일만 명의 병사로 들어와 한성 일대와 경기도 일부 지역을 침탈하고 있었는데 행주산성 전투에는 전체 병력이 참전치는 않고, 약 오 육천 명 정도의 병사로 전투에 참여 하였는데 우키타는 본인이 직접 선두에 나서서 돌격하여 진격해 왔다. 관군 조방이 쳐 놓은 제1차 목책을 돌파하더니 어느새 토성에 까지 기어 올라오더니 제2차 목책까지 접근하여 쳐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이에 조선 관군은 한 때 사기가 떨어져 흔들리게 되더니 전투는 혼미하게 되어가는 듯하였다.
그 때다. 다물모가 나서더니 몸소 직격탄으로 잔돌을 뿌려 날리니 적의 맨 앞의 왜군 일 열(列)이 적중으로 맞아 쓰러졌다. 다물모는 세 섬쯤의 돌을 발아래 준비 하고는 숨을 세 번을 쉴 동안의 짧은 시간 중에 입정(立靜)을 굳히는 것이었으니, 그녀는 기(氣)로써 이미 진(陣)을 치는 것이었다. 무도(武道)의 경지에 오른 무술인이 진을 치는 것은 아무리 짧은 시간에도 장소를 초월하여 진을 쳐 내공을 불러 쌓는 것 이었으니, 우주의 기를 몸 안에 불러 기를 쌓아, 이를 불러내어 돌을 다루니 나중에는 몸과 손과 돌의 셋은 하나가 되어 도저히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강한 힘이 발휘되는데, 이는 친정 할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저 고구려의 조의선인(皂衣仙人)의 무예 법 이었다. 조의(皂衣) 무예는 저 단군조선의 천왕랑(天王郞)의 별칭인 화랑(花郞)에서 비롯되어 고구려에 전수됨에 최고의 경지를 이룬 무예인바, 을지문덕이 수(隋)를 물리칠 때 지대한 공을 세운 한민족 고유의 무림(武林) 무도였는바, 이를 이수(移受)해 간 것이 신라의 화랑 이었다. 다물모는 별도로 특수 우주의 기(氣)를 모아 내공을 합치는 법을 썼는데, 거기에다가 또 짧은 시간에 한임이신 하느님과 닿는 단축형 제사(祭祀)의 진을 쳐 셋을 하나로 굳혀 세우는 것 이었다. 손을 가슴 앞에서 원을 그리다 손바닥을 하늘을 보게 하여 하늘의 기를 받아 합치더니 장력을 앞으로 펴 날리는 듯하다가 두 손으로 한꺼번에 돌을 가득 움켜 지고는 머리와 어깨위로 여덟팔자를 좌, 우로 교차하여 몇 번 그리다가 다시 기를 뭉쳐 일시에 불어 넣고는 허공을 향해 뿌려 날렸으니, 돌들은 거의 수평으로 날아가는데 무슨 삼족오가 우는 소리 같이 까우 까우욱 하면서..., 눈 깜짝할 사이에 왜병의 얼굴에 탄환같이 쳐 박히는 것이 아닌가! 세 섬쯤의 돌들을 왜적에게 움켜 던져 날린 시간은 불과 설흔 번 숨 쉴 동안의 빠른 시간에 던져 날리니 왜병은 이미 열 열(列)과 다섯 오(伍)가 넘는 수가 비틀 거리며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다물모의 석전(石戰)기술은 오직 그녀 자기 스스로의 것인바, 그 투격술(投擊術)은 바로 신기(神技)에 가까운 기법 이었으니 평생에 닦아 수련해 낸 손 기술로서 이 춤추는 돌을 맞은 왜병은 하나같이 비틀거려 춤추듯 쓸어져 갔다. 다물모가 동시에 지시를 했다.“열수총을 쏘시요!”라는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이미 준비 되었던 끓는 물을 백여 개의 열수총에 장전하자마자 쏘아대니 우키타의 선발대는 토성을 더 기어 오르지 못하고 엉키더니 떼굴떼굴 굴러 떨어졌다. 그 때다. 전라도 관찰사 권율이 지휘하는 조선 관군이 때를 놓칠세라 비격천뢰와 총통 그리고 화차를 동시에 발사하니 왜4진군인 왜8군대장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는 부상을 당하여 부하들에게 부축을 받으면서 간신히 퇴각하는 것 이었다. 권율과 접전하다 퇴각한 전적도 있고, 이 땅에 쳐들어와 수많은 조선인을 살상케 한 우키다 였잖은가! 지금 이 행주나루 덕양산성 에서는 본인도 부상을 톡톡히 당하고 물러서게 되었으니 전장에서는 이기고 짐은 정해진 게 아닌 것 이었다.
왜5진군 깃타가와 히로야스(北川廣康)가 진격해 쳐들어 왔다. 깃타가와는 왜7군대장 모리 가가야모토(毛利輝元)와는 사촌 간이며, 왜6군대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의 조카인바, 왜(倭) 본토 모리가문의 선봉장으로 출전했다. 병력 삼천 명으로 쳐 들어오는데 짚단으로 방어 목책에 불을 질러 공격을 가해 왔다.
그 때다. 천립과 기룡, 동수가 수앙기(水昻機)로 덕양산 서남단 절벽 밑의 한강물을 연달아 길어 올려 불을 손쉽게 끄니 왜적들은 기가 막히고 맥이 빠지게 되었다. 거기에다가 또 여성단원과 남성단원을 가리지 않고 이백여 개의 열수총으로 끓는 물을 쏴대니 왜적은 끓는 물을 얼굴에 맞아 열수상(熱水傷)을 입으니 그냥 고꾸라져 떨어져 나갔다. 수앙기는 길고(桔橰)의 원리를 개량하여 톱니바퀴와 도르래를 병렬로 연결하여 만든 기중기식 수동식 양수기인 것인바, 다물모가 고안하고 옥형이 만들어 낸 여성의병장 다물모 부대의 쾌거였다.
또 한 쪽으로는 다물모 여성의병 석전(石戰) 정예대가 나타나 호두알에서 밤알만 한 돌 수천 개를 수평에 가깝도록 쏜살같이 날려 왜적의 머리와 얼굴에 적중 시키니 왜병은 정신을 못 차리고 무너지기 시작했다.
왜병 제5진 부대의 선발대는 마지막 목책을 넘지 못하고 머뭇거릴 때 조선 관군 전위대인 조경의 휘하 관군이 활을 비 오듯이 퍼부어 쏴 대니 왜군은 부상을 수없이 당하며 일단 물러서 후퇴 하는데 조선 관군이 쏜 화살에 마침내 왜5진의 깃타가와 히로야스(北川廣康)는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고 물러섰다. 그 때, 이귀분이가 오인영을 동행해 주동하여 나섰으니 오인영이는 목소리가 커서 일명 고함조(高喊組)라 여성의병단원들이 불렀었다. 그녀는 통통하게 생겼고 얼굴은 계란형인데 쾌활하여 의병단원들을 자주 웃겨주는 명랑처녀였는데 그녀가 소리를 지르면 참으로 삼각산이 찌렁찌렁 울리는 통에 나무가 흔들리고 새들이 다 날아가며 바위가 덜렁댈 정도의 특유한 성대(聲帶)를 지닌 처녀라서 의병단원들은 그 음성으로 놀래 킬까봐 좀처럼 옆에 가까이 가지 않고 슬슬 비켜 다녀야만 했던 재미있는 처녀 였었다. 인영이가 고함대에 서더니 야유를 불러 일으켜 함성을 질러대며 여성단원들의 함성을 지휘하였다. “야아! 이놈들아! 맛을 봐라!”“와아! 아! 물러가라, 뒈져라 이놈들아!”를 연발하며, 여성의병단원 모두가 같이 소리를 질러대며 왜병에게 야유를 던져댔다. 왜병들이 볼 때 나약한 여성과 아낙네들이 소리를 지르니 왜병들은 맥이 빠지고 약이 올라 어리둥절해 할 때 열수총 조는 열수총을 쏘는가 하면 끓는 물을 퍼부어 대니 정신이 벙벙해 하며 기가 막힐 노릇이 되어 갔다. 또한 그간 삼각산에서 익힌 석전(石戰)법을 여기서 몽딸 털어 발휘해야만 했으니, 돌을 날라다 석전법으로 쏘는데 여성의병단 핵심조 민보령, 우승미, 곽영신 세 여성이 최고의 실력을 발휘해 돌을 던지니 참았던 한이 풀리는 듯하였다. 석무기로 주먹 만 한 돌을 더 멀리 까지 비 오듯 쏴 날리니 왜병들은 이를 피하느라 머리를 숙이고 땅바닥에 몸을 움츠리고 꼼짝도 못 하였는데 잔돌에 맞아도 그 타격은 엄청나게 컸다. 석무기의 메주덩이 만 한 돌이 날아가면 왜병들은 이를 맞고 부상당하는 자가 속출하여 전열이 흩어져 우왕좌왕 하기를 계속 거듭하게 되었다.
왜 6진군은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와 고바야카와 히데카나(小早川授金)의 두 무장의 병력이 돌진해 쳐들어오는데 그 수는 이천오백에서 삼천 명으로 추산되는 병력이 떼를 지어 뛰어들었다.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는 왜 6군대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의 조카이자, 왜7군대장 모리 가가야모토(毛利輝元)와는 사촌지간 이었는데 놀랍게도 그 때 단 열네 살 어린나이 임에도 불구하고 참전(參戰)을 하게 하였으니 그 족속들은 무던히도 전쟁을 즐기며 사는 인종이었는가 보다. 고바야카와 히데카나(小早川授金)는 왜6군대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의 친아들로서, 부자가 같이 참전하게 된 것이니 이 가문은 전쟁을 마치 해외 가족나들이 나가는 양 싸움만을 즐겨찾기 식으로 조선을 쳐들어 온 모양 이었다. 행주산성 서쪽 삼각산 의승병이 방어를 전담하는 지역을 공격해 오니 자연적으로 제2 목책까지 돌격해 들어오게 되니 이제 제2차 방어선마저 뚫리려는 순간 이었다. 이제는 이판사판 백병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막 백병전이 일어나기 시작 하였다. 행주산성 주변 하늘 전체가 갑자기 컴컴해 지더니 삼족오가 맨 앞에 날고 그 뒤를 이어 삼 백여 마리 까마귀들이 날아들더니 다물모 머리 위를 선회하여 인사를 하더니 솟구쳐 올라, 까마귀 전체 대열은 뒤따라 같이 급상승 해 높이 솟다가 갑자기 지상으로 급강하 해 폭격이라도 하듯이 내리꽂는데 방향을 바꿔 왜6진군 병사들을 날개로 얼굴과 머리를 후려치고 다시 급상승 하며 비행을 해 대는데 삼백 여 마리의 까마귀가 연거푸 3회씩 반복하여 왜군의 목덜미며 등을 후려쳐 쓸어 트리니 날개깃으로 할퀴어 놓고 모두 한꺼번에 먼 공중을 향해 급속도로 날아가는 것 이었다. 이에 왜병들은 갑자기 닥친 일에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흩어지며 어쩔 줄을 몰라 하였다. 삼족오의 까마귀 대열은 삼각산 에서 한 번 그리고 행주산성에 날아들었으니 다물모의 어떤 계기(計期)성 행동반경에 따라 수행이라도 하듯 나타나는 것 이었는바, 이의 원인과 연유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으니 주변의 사람들은 삼족오의 대열을 신성시하게 되었고 다물모를 더 존경하는 여성 지도자로써 부각해 생각하게 되었음은 너무 당연한 일이 되게 되었다.
바로 그 때다 삼각산 의승병 삼백 여명이 왜6진군들이 백병전으로 쳐들어오는 대열과 정면으로 맞부딪히게 되었다. 이미 장대 봉 검법으로 단단히 무장하고 전투 연습을 대 여섯 달여 동안 집중해 온 것이니 그 무예는 대단하여 당할 자가 없었으니 의승병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는 듯하였다. 이윽고 법구와 기량 그리고 응발이 각고의 훈련을 쌓은 실력이 터져 나왔다. 바로, 최기룡이 수앙기를 뒤로 두고 다물모 의병단원 중 핵심 남성의병 용직, 기철, 종인, 보국, 광영, 준걸, 호권, 근수, 종운, 상우, 동관, 광환 등 봉 무술 고급과정 단련자 열두 명과 봉 무술 훈련자 백여 명을 인솔하여 삼각산 의승병군의 뒤를 이어 함께 쫓아 나서서 쳐들어 가니 왜병들은 개인 무기로 칼을 들었기에 긴 장대 봉이 더 유리 하였으므로 연달아 왜병 들를 쳐부수는데 목과 옆구리 그리고 하체를 불문하고 두들겨 패고 내리쳐 때려 눕혔다.
삼각산 의승병 삼백여 명이 백병전에 뛰어들어 장대봉 검법을 휘둘러 대니 왜병은 닭 잡히듯이 목이 쓸어져 나갔다. 중흥사 상좌 승(僧)법구(法九) 그는 누구인가? 삼각산 노적봉 비탈을 축지(縮地)로 나르듯 행동이 날렵한 무예의 소지자가 아닌가! 봉(捧)검법 한 번 휘두르는데 그의 검은 장삼 자락에서는 홱홱 하는 소리가 나고 바람이 사납게 부는 것이니, 왜6진군 병졸들이 한꺼번에 대여섯 명씩 팍팍 고꾸라져 나가 떨어졌다.
기량(奇亮)은 봉(捧)을 어찌나 빨리 돌리는지 회오리바람이 일고 윙윙 소리가 나더니 왜6군 병장과 병졸들은 덤벼들지를 못하다가 숫자가 많으니 벌떼처럼 몰려들어 법구와 기량을 에워 싸아 생포라도 할 듯이 몇 겹을 에워쌌다. 말 할 것도 없이 응발도 왜병이 원을 그려 몇 겹 에워싼 그 안에 들어 있었다. 허나 이를 겁낼 세 사람이 아니다. 셋은 서로 등을 지고 몇 겹으로 둘러 싼 왜 병졸들을 쳐 나갔다. 기량이 장대 봉을 땅에 꽂는 듯하더니 몸을 하늘로 솟구치다 땅으로 내리 꽂으며 왜6진대 병졸들을 쳐부수니 한 번에 대여섯 명 씩이나 목이 홱홱 돌아가 떨어져 나갔다.
응발이 휘두르는 봉술은 소위 철소추(鐵掃箒)기법에서 착안한 것으로서 본인의 작은 키를 응용해 봉 무술을 휘두르는데 왜 병졸들의 허벅지나 무릎과 다리를 향해 휘두르는 무예기법으로 쳐 들어가니 백병전에서 왜병이 중창을 쓴다고 해봤자 응발의 쏜살같은 봉술 법에는 당할 자가 없는지라 응발은 오직 왜 병졸의 하복부와 다리만을 노려 후려쳐 나가니 응발의 봉에 맞은 자는 한꺼번에 네 댓 명씩 그 자리에 폭싹 폭싹 주저앉고 마는 것 이었다.
법구, 기량, 응발 셋이 동아리 지어 등을 맞대고 왜병을 상대하니 왜병들은 이 셋을 잡지 못하고 점점 다치고 상하는 자가 셀 수 없이 많이 나자빠져 즐비하게 땅에 깔리게 되었다. 그 때다 저 멀리 나무 위에 오른 왜군 저격병 두 명이 이쪽 법구와 기량 그리고 응발을 향해 표적으로 세 사람의 동선을 따라 총구를 이동 시키며 겨누더니 이윽고 연발로 사격을 가하여 왔다. 바로 그 때 왜병이 조총을 겨눠 맞히니 응발이 맞고 쓸어 졌다. 이윽고 응발을 부축하여 일으켜 세워 상처를 확인하고 치료를 하려 후방 쪽으로 의승병 성찬과 기태와 기현이 양어깨를 걸고 뒤를 부축하여 물러난 뒤 장삼을 벗기고는 총상을 확인 하였더니, 이때를 놓치랴 하며 병 관리와 약초에 능통한 우승미와 병 치료와 간병을 잘 알고 조리(調理)에 밝은 곽영신이 달려 왔다.
아차! 이게 무슨 조화인지 웬일인가?! 응발이 세 의승을 뿌리치며 벌떡 일어서는 것이 아닌가! “우홧 홧타하! 야이, 놈들아! 나다! 내가 살았다!”하니 부축하던 의승 셋은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응발은 다시 한 손에 봉을 들고 백병전하는 쪽으로 뛰어 나가더니, “야이 놈들아! 이걸 봐라!”내가 죽기는 왜 죽냐! 이 싸가지 없는 놈들아!“라며 함성을 질러! 대는데 응발의 다른 한 손에는 본인이 만든 방탄 판을 풀어 들고서 왜군을 향해 막 흔들어 보이는 것 이었다. 이 광경을 본 왜병들은 눈이 왕방울만 하게 휘둥그레지면서 어처구니가 없는 듯이 의승병들의 공격에 모두 방어 자세만을 취하기 바쁜 채 슬금슬금 후퇴를 하였다.
하지만 아군인 남성의병과 의승병과 관군 측에서도 부상자가 도출 됐다. 이를 본 우승미와 여성단원들이 함께 잽싸게 치마폭이며 옷가지 천을 찢어 상처를 동여매 지혈을 시키는 등 부상자를 부축하여 이동 시키고 안전한 곳에서 간호에 최선을 다하니 곧 호전되게 되었다. 우승미의 할아버지는 침술과 약재를 다루시는 분 이었고 본인은 약초를 잘 다룰뿐더러 병리를 잘 아는 우승미를 다물모가 일찍이 지명하여 적시에 부상병을 치료를 잘해 내고 돌봐주는 역할을 하도록 하라고 미리 일렀으니 다친 이들의 간호가 잘되었다.
왜7진군은 왜6군대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였는바, 병력 사오천 명으로 이 행주산성 전투에 참여했다. 고바야카와의 휘하의 대표적 무장으로는 모리 히데카스(毛利秀包)와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를 두고 있었다. 고바야카와는 왜6진군의 조카와 아들의 합세병력이 조선군과 의병 그리고 의승병을 공격하는 정황을 좀 떨어져서 자세히 살펴보면서 전투방침을 파악하고 있더니, 이윽고 제7진으로서 행주산성 서북쪽을 택하고는 맹공격을 하여 쳐들어왔다. 결국 제1목책이 뚫리더니 제2목책이 뚫리고 산성에 돌입하여 직접 칼을 들고 도망가는 자 몇 명을 베어내는 등 조선 측에 최대의 위기가 닥치게 되었다.
바로 그 때다 여성의병장 다물모가 나서서 지휘하니 약 백여 명의 여성단원들이 달려들어 석전 법으로 주먹만 한 돌을 화살처럼 수평으로 날려 던지는데 삼각산 에서 그간 얼마나 훈련이 잘 되었는지 나르는 돌들은 마치 우박이 내리 듯이 많은 량이 되어 왜병들의 머리와 얼굴을 후려 때리고 시야를 가리며 온 몸에 직격탄으로 꽂히는 것이 아닌가! 왜병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모두 흔들흔들 비틀비틀 돌고 돌며 춤을 춰댔다. 먼데서 보니 언 듯 야외의 어느 무대에서 벌어진 춤 향연을 감상하고 있는 것 같았으니, 여성의병장 다물모가 지휘하는 음악에 맞춰 꿈에 젖은 듯 흥겨운 돌의 춤은 날이 저물어야 비로소 그 춤사위가 끝날 듯하였다.
대첩 벽화
여기에서, 하나 짚어 읊조리고 가자하니 詩 “돌의 춤”이다.
「 돌의 춤 」
쇠 노래 퍼져
대 가락 나니
강물도 놀라 출렁여
덕양산 얹힌 해
망울진 꽃 피지 않으니
이 나라 품을
행주치마
돌이 춤 췄네.
이에 왜군들은 아예 눈을 감은 채 더듬어 싸며 엉금엉금 기면서 우왕좌왕 하는 자가 속출하는 것이었다. 여성부대의 석전 기법을 보고 관군도 기가 막힌다며 신기한 노릇이라 하였다. 이는 삼각산 바위 골에서 숨어 단련에 단련을 거쳐 훈련을 쌓은 결과였으니, 이를 본 조선 관군과 남자의병, 승병들은 일제히 고함을 지르게 되니 덕양산성 전체가 울리고 지축은 흔들리며 한강물조차 파도가 일어나더니 나머지 함성은 강물의 파고에 스며 흘렀다. 함께 고함을 질러 기합(氣合)을 모으던 법구와 기량과 응발이 지휘할 이때를 놓칠세라 정예승병 삼백여 명이 뛰어 나가고 다물모 부대 최기룡이 이끄는 남성의병 백여 명이 뒤를 이어 쳐들어오는 왜군의 진을 봉 무술로 마구 쳐부수며 나가니 마치 멧돼지가 밀밭을 쓸고 나가듯이 왜군을 쓸어 뜨리는 것이 아닌가!
드디어 법구와 기량은 응발과 최기룡 그리고 또 두 명의 향도(嚮導)승병 성찬과 기현을 조를 짜니 바로 이 진(陣)은 거북이의 등 무늬 육각형 대오를 갖추는 것 이었다. 그리고는 다시 주위에 열여덟 명의 엄호조를 짜더니 그 스물네 명이 동시에 자전과 공전을 같이 하면서 회전해 돌진해 들어가는데 이는 왜6군대장 고바야카와를 잡기 위한 전술을 법구가 즉석에서 지휘하여 진을 치게 된 것이다. 고바야카와 휘하의 대표 무장 모리 히데카스(毛利秀包)와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가 역시 이백여 명의 진을 쳐 가로막고 서니 진정 십 대 일이니, 과연 맞상대가 된다고 할까? 그들은 기창과 삼지창 그리고 극(戟)을 들고 법구와 기량과 응발, 기룡의 봉 무술을 꺾으려고 대항해 달려 들었다. 그중 극(戟)은 일명 월아(月牙)라 하니, 달의 어금니 란 뜻으로 창 날 끝에 초승달 같이 유연한 곡선 날이 나있어 보기만 하여도 사람들은 스스로의 목을 옴 추릴 정도로 기분이 언짢은 그런 무서운 창 이었다. 그러나 법구와 기량이 이를 두려워 할 승군이 절대로 아니었다. 이미 대치된 상태지만 진(陣)은 거북이 등처럼 바둑이나 고누를 두 듯이 선을 따라 적과 아가 섞여 져 서게 된 형국이 이미 되었다. 디어 법구가 축지(縮地)에 올라서니 이를 뒤질세라 기량이 둔갑(遁甲)의 속을 파고 들었다.
옴삼매야기니하리훔바탁! 법구가 불주문(佛呪文)을 외치더니 양 다리를 어깨의 두 배 넓이로 벌리더니 다시 쟁기로 밭을 가는 양 긁어 양발을 모아 붙이니 주변 땅 열대여섯 평에는 주름이 잡히어 갔다.
다냐타바로기제사바라야살바도따오하야미사바하! 기량이 주술(呪術)을 불러 외치며 그 땅 주름 사이로 기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는데 이응발 마저 없으니 나머지는 조를 맞춰 진을 친 최기룡이가 앞을 가로막고 우뚝 버티어 서서 봉 무술 회전 타(打)기법을 쓰고 있으며 향도 승병 둘 성찬과 기현이 또한 봉을 찍어 오르내리는 것 이었으니 이게 어찌된 것이냐? 법구와 기량은 서로 눈치를 보내며 왜6군대장 고바야카와와 휘하 무장 모리와 다치바나 등 셋을 쳐 꺾으려고 축지법과 둔갑술에 든 것이었다.
응발은 이 전투에서 본인이 그 다지고 이룩해 내려던 무공의 득도에 든 것 이었으니 참으로 기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아까 기량이 주문을 부를 때 응발도 주술을 외운 것이다. 본인이 늘상 삼십육계라 하며 주변사람들에게 외치던 것은 축지(縮地)를 하려하는 염원차 구호에 그친 말이었고 이제는 둔갑법을 완전히 익혀 본인의 것으로 만든 것이다. 그래도 응발은 또 축지술에 대하여 연민을 갖게 되는 것일까?
이윽고 “봉 무술(棒武術) 휘(輝), 소(消), 포(泡) 은(隱)의 순으로 봉법 진을 쳐 나가는데 하늘의 운모가 번쩍여 동시에 날려 때리며 찌르는 공(攻) 타법(打法)은 휘(輝)황 찬란히 앞에 보이고 걸리는 것은 모조리 싹 쓸어버리는 격(擊) 파법(破法)은 소(消)로 쓸어내며, 포(泡)는 한꺼번에 16방을 흩어트려 제압하다 막기도 하는 동(動) 혼법(混法)으로 포(泡) 괄해 공격과 수비를 함께 하니, 수중의 물방울에 가린 시야를 어이 분별하랴?
삽시간에 둔갑하여 숨어버려 사라지는 행(行) 은법(隱法)이니 은(隱)은 상대를 택하여 공격할 시간을 놓치게 되었으니 왜군 병졸들은 수리 앞에 병아리에 불과하지 않았던가! 엄호 의승군 스물네 명이 휘, 소, 포, 은 순으로써 적을 타격하고 제압하며 혼돈케 하고 빠지는데 왜 제7진군의 맨 앞에 선 고바야카와와 휘하 무장 모리와 다치바나 등의 선발대는 눈이 휘둥그레 해지면서 고개를 저어 둘레를 번갈아 보다가 봉 무술에 타격을 당하고 쓸어졌다.
봉 무술은 회오리바람을 일으켜 추풍에 낙엽이 휘날리는 듯이 동작되어 갔다. 드디어 사라지고 없어졌던 법구가 공중에서 내리 꽂고 기량과 응발이 각각 다른 방향 땅 속에서 솟으니 먼지바람과 안개가 뿌옇게 끼게 하고 봉 무술을 휘두르는데, 최기룡은 봉 무술 소(消)와 포(泡)를 동시에 들어가니 왜병의 눈에는 기룡의 봉 무술이 마치 바람개비처럼 급히 돌더니 나무토막으로 짧게 잘려 마구 날아드는 것이 아닌가!
향도(嚮導) 의승병 성찬과 기현 둘도 휘(輝)와 은(隱)을 각각 번갈아 들어가니 왜병들은 어떤 마술에 걸린 듯이 눈동자가 흐려져 몽롱해 지더니 모두 힘이 빠져 일격에 서너 명씩 태풍에 쓸어진 볏단처럼 쓸어져 풀이 죽은 채 일어서지를 못 하였다. 법구의 봉에 맞은 고바야카와가 큰 부상을 입고 쓸어져 일어나지 못하니 병졸들이 업고 부축해 자리를 뜨고 기량과 응발에 타격을 받은 고바야카와 휘하 무장 모리와 다치바나 둘은 어깨뼈와 다리가 부러져 일어나지를 못하고 있었으며 그들을 엄호하며 진을 쳤던 친위조 삼십여 명의 특공 병졸들도 전원이 목이 꺾이고 팔이 부러지며 다리가 부러져는 등 일어서지를 못했고 잔여 왜병 이백여 명은 땅에 주저앉았거나 그냥 엎어져 있거나, 비틀거리며 도망가고 엉금엉금 기어서 후진을 하는데 마치 게걸음질을 치는 듯하였다.
이 봉 무술 전법으로 적대한 왜병 이백 명은 모두 쓸어져 일어나지를 못하고 있었으니 의승병과 의병의 연합 봉 무술 공격 전법은 과연 일대 십의 상대에서 일기당천(一驥當千)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의 무술의 극치를 보여준 것 이었다.
법구와 기량이 닦은 무술은 저 고구려 조의선인(皂衣仙人)으로부터 전래해 와 기창(騎槍)과 월도(月刀), 쌍곤(雙棍), 인부(刃斧), 장검(長劍)은 물론이요, 지금 왜병의 손에 쥔 월아(月牙) 극(剋) 창(槍)인들 이 봉 무술(棒武術)앞엔 무릎을 꿇어야 하는 것이었으니, 우리의 상고 조상님들의 고유 무술법이 번져 나가 중원의 소림무술 이라든지 여타 무림의 파벌로 보급 되어 나갔으되, 우리 한민족의 무술법이 저 중원(中原) 무림(武林)무예의 고조할아버지가 되는 것 이었다.
삼각산 의승병군을 이끌어 오며 법구와 기량이 가르쳐 온 무술은 바로 조의선인(皂衣仙人)인 고구려 장군 명림답부(明臨答夫)가 쓰던 병법으로서 전(前)으로는 저 배달국의 제 15대 치우천황의 수박 검법으로 부터요 후로 전해지기로는 사포공 맨손 격투법인바, 이는 고구려 주몽 태조 15년에 태어나 제8대 신제에 이르기 까지 무장으로서 무공이 역사에 길이 빛나는 한민족의 장군 명림답부가 일구어 낸 우리 고유의 무술전법 이었다. 손 무술인 선인장(仙人掌)기법이나 발 무예인 철소추(鐵掃箒)기법도 기초를 두고 잇었으니 고구려 대에 조의선인(皁衣仙人)의 무예로 발전하게 되었던 무예로서 우리민족 후대에 암암리에 지속적으로 물려받게 되어 주로 사찰 스님들이 전수하여 왔던 것이다. 한편 명림답부의 무예는 서기 496년에 소림사가 창건된 이후 그리 이전되어 갔으니 우리의 전통 무예가 소림사 무예를 태동시킨 어머니 격 무술이 되었던 것이다.
그 때다. 왜병들이 이쪽을 주시해 보니 웬 부녀자와 아녀자들로 구성 된 여성 의병부대가 나타나더니 왜병 자기들을 향하여 얕잡아 놀리는 야유의 함성을 지르며 손짓 등의 시늉으로 약을 올려 대는데 또 고함조(高喊組) 오인영이 주 인물이고 이귀분이 끼어 있으며 젊은 여성과 처녀이거나 아녀자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어디서 저 따위 온나(여자)들이 와서 약 올리느냐!“ 라며 왜병들은 분통이 터질 지경이 되니 제풀에 사기가 떨어졌으니, 그것은 여성이라고 비하해 보던 못된 시각들을 가진 왜병들 스스로에게 악재가 되게 되니 이젠 전의를 상실하게 될 수뿐이 없었다. 이는 모두 다물모가 지시하니 열의파 민보령과 우승미, 곽영신 세 참모 급 여성의병단원이 즉각 주도하여 만들어 낸 전술인 바, 왜병 약 올리기 작전은 적시에 주효 했었다.
바로 이때를 맞춰 전라도 순찰사 권율과 조방장 조경이 지휘하는 관군이 대거 돌입하여 백병전으로 돌격해 오는 왜7진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군을 마구 쳐 나갔다. 왜병들이 비틀대며 앞을 못 가리고 쓰러지며 퇴각을 하는 등 요동이 일기 시작 하였다. 또 이어 틈을 주지 않고 때는 이 때다! 승병 삼백여 명과 의병 백여 명이 지속적으로 일제히 조선관군 권율의 휘하 조방장 조경의 부대 측면에서 뛰어 나아가 장대 봉을 휘둘러 대니 마치 회오리바람에 폭풍이 불어 다 자란 벼가 쓰러지듯이 납작하게 왜군은 진지가 뚫리게 되니 주저앉거나 뒷걸음질 쳐 후퇴하게 되었다.
천립과 동수, 인곤 등은 남성의병단원과 힘을 합해 언덕과 절벽으로 이 삼백여 왜병이 밧줄을 타면서 기어오르는데 이는 덕양산 정상을 점거하려 오르는 왜군들이라 그들을 향해 열수총으로 끓는 물을 쏘고, 끼얹어 뿌리며 큰 돌을 굴리고 잔 돌을 뿌려도 왜병들은 수가 어찌나 많은지 굴러 떨어지고 고랑에 쳐 박혀 있다가도 계속 기어오르는지라 수앙기를 차려놓은 산 정상의 남서쪽은 워낙 많은 왜병이 공격을 받게 되다 보니 수원지 채수 구역을 잃게 되어 물을 길어 올릴 수 없게 되었다. 거기에다가 남동쪽이 허약하여 그쪽을 막느라고 다물모 여성의병단원들은 전력을 다하여 돌을 던지다 못해 주워 모은 돌도 고갈이 되어가니 이제는 잡석이든지 돌 부스러기 찌끼이든지 사금파리며 깨진 기왓장 조각에 흙덩이 까지 긁어 후벼 파고 모아서 왜병을 향해 뿌리고 던지며 고전을 하면서 요충지 방어에 애를 썼으나, 다물모 여성의병단원들도 이젠 지치고 힘도 빠지니 전의도 짐짓 소강상태에 빠져가고 있었다.
조선 관군이 있는 쪽에서 나머지의 활을 날려 쏘아대니 왜적들도 이제는 조총알도 떨어지고 점점 지쳐가는 모습들이 보여져 갔다. 한편 산정상의 북서쪽 나루터 끝 멀리에서는 황해도 묘향산 서산과 사명이 지시해 권율과 합류키로 하여 이미 도착해 잠복해 있던 처영대사가 승군 삼백 여 명을 지휘하여 왜군진지의 후방 발밑까지 쳐들어와 진을 치더니 함성을 질러 기세를 돋우고 협공으로 쳐들어 왔다. 의승군 처영대사는 평양성과 황해도 등지의 왜란 전투에서 엄청난 전적을 올린 승장 이었다. 행주산성 전투에 이미 도착하였지만 권 율의 동조에 맞춰 작전의 위치를 달리 진을 쳤는데 그 계획이 지금 바로 딱 맞아 떨어지게 되었다.
행주산성을 두 세 겹으로 에워쌌던 왜군이 점점 힘이 빠져가는 싸움의 중반이후에 모았던 힘을 한꺼번에 발휘하기로 하였으니 승장 처영대사는 소강상태에 빠진 걸 지켜보다가 드디어 기회를 포착한 것 이었으니 이는 바로 그의 전술 지략 이었던 것이다. 왜군은 후면에서 공격해 들어올 줄은 전혀 판단치 못하다가 처영대사의 승병군이 맹렬히 공격해 쳐들어오니 왜군은 아군 쪽의 가운데에 박힌 꼴이 되었으니 난감하게 되어, 어찌할 바를 몰라 하였다. 승장 처영대사는 평양성 전투에서 왜병을 몰아낸 전적이 있듯이 실전에 능란한 전술을 지닌 정예 승병군이 되어 있었다. 처영대사는 공격을 좀 늦추면서 왜군의 길을 아주 좁게 터주는 듯하더니 조선 관군 권율과 조경의 군대와 삼각산 의승병군이 내리 몰 때 뒤로 밀리는 왜적을 일격에 타격키로 하여 지금 맹공격을 퍼붓는 것 이었다. 아군 측에서 삼각산의병승장법구경상대사(三角山義兵僧將法九敬相大師)기와 여성의병장군다물모대장(女性義兵將軍多勿母大將)기를 높이 쳐들어 처영대사 승군 진영을 향하여 높이 흔들며 함성을 지르니 처영대사 승군 진영에서도 이를 알아채고 답신을 했다. 전체가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지르며 위압감을 주게 되니 왜병들은 진이 빠져 전의를 잃어 슬금슬금 뒷걸음을 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때다! 승군대장 처영대사가 “공격하라! 왜적이 퇴각한다, 더 공격하라!“ 라고 외쳐 대니 처영대사 승군은 이 때를 놓칠세라 맹공격을 가하였다. 이 때를 놓칠세라 삼각산 의승병 전원이 또 내리밀고 더불어 다물모 여성의병단이 내리 밀고 있는가 하면 조선군 권율의 휘하 조방장 조경의 관군이 맹공격을 퍼 부었다.
그 무렵, 충청도 수군절도사 정걸(丁傑)이 배 두 척에 화살 수만 개를 싣고 한강으로 들어와 인계하니 조선군의 사기가 충천해 올라갔다. 그 기세를 몰아 조선관군이 공격을 감행하니 왜군은 한 발자국씩 물러나게 되었다. 또한 한강 이남지역과 강화 쪽 등의 조선군들이 행주 쪽으로 급거 이동하여 지원하는 움직임이 보였고, 왜군은 그간 7진의 공격에 많은 부상자가 속출하고 힘도 빠지는 등 전의를 상실하여 퇴각을 하게 되었다. 이른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하루 종일 왜적이 7진으로 나누어 파상공격을 해 쳐들어오니 이젠 다물모 여성의병단도 삼각산 의승병대도 모두 다 지쳐서 정신적으로만 왜적에 싸울 수 있을 태세일뿐 몸은 지쳐서 팔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그 때, 왜군 저격병이 쏜 조총에 방탄 판으로 살아난 응발이 어디서인지 뛰어 나오며 외쳤다. “야! 배고파 못 싸우겠다”하니 “맞아요 나도 배고프면 아무것도 못해요”라 하며 오인영이 나서서 주먹밥 좀 먹고 싸웁시다 워낙 고함을 지르다 보니 배가 꺼져서 소리가 안나요 라 하며, 오인영이는 무슨 생각에인지 마치 표어와 격언 같은 말로 또 소리를 질러대는 게 아닌가! “전장에서는 굶는 게 밥이다! 끼니를 건너 띄는 게 이기는 거다!” 라 했다. 그러고 보나 이 덕양산성 전투에 참여한 모두에게 점심 주먹밥을 나눠 주다보니 정작 그 일에 참여한 다물모 여성의병단원들은 본인들도 언제 주먹밥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가 조차 생각이 안 나는 것이었다. 남을 먼저 주다보니 제 것은 언제 챙길 수도 업지 않은가! 끼니를 건너 띤 것은 분명한데 배고픈 걸 잊었었다! 새벽녘에 겨우 주먹밥 한 덩이 먹고 여태껏 버텼으니 모두 다 허기가 진 걸 이제 느끼는 모양 이었다.
민보령, 우승미, 곽영신 등 여성의병단 세 참모와 이귀분, 오인영 등은 다물모가 주먹밥 관리 담당으로 정.부를 정하여 각별히 지시하였는데, 그 임무를 확실하게 완수 시켰으니 과연 다물모 여성의병단은 관군에 버금가게 자율에 의한 군기가 매우 엄정한 의병군이 확실하였다. 이귀분과 오인영은 유독 처녀로서 젊어 재빠른 몸으로 여성의병단 삼십 명의 보조를 받아 행주산성에서 전투 중인 관군 모두에게 한참 전투 중임에도 불구하고 하루 종일 주먹밥을 나눠주고 다녔는데 이 또한 다물모의 지시사항 이었으니 이귀분과 오인영은 큰일을 해낸 호국의 낭자들 이었다. 귀분과 인영이는 주먹밥을 보관하되 덕양산 정상 쯤 성곽의 양지바른 데에다 두꺼운 검은 천으로 감싸서 잘 덮어 보관 하였기에 초봄의 짧은 햇볕에도 불구하고 온기가 살아있을 정도로 잘 보관 하였으니 이를 먹는 관군과 의병단원들의 입맛에 차게 느껴지지 않고 온기가 살아 있어서 좋았다. 이월 열이틀이니 초봄이면 봄이요 늦겨울 이라하면 아직은 바람이 차지 따뜻하지는 않았다. 수앙기로 길어 올린 맑은 창릉천 물로 옥형과 선원이가 끓인 뜨거운 물도 나누어 주었다. 주먹밥은 미리 계획하여 준비 되었으니 여성의병단과 삼각산 의승병대와 동네주변의 참전한 아낙네들과 동네사람들 모두에게 배급하여 먹으니 허기진 배에 그만한 꿀맛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듯하였다.
권율이 지휘하여 이끄는 관군은 왜군의 뒤를 이어 추격하게 하여 13여 명의 목을 더 베었다. 왜8군대장인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와 이시다 미나리(石田三成)와 요시가와 히로이에(吉川廣家) 등에게도 크게 부상을 입혔다. 덕양산성 행주나루 전투는 후에 행주대첩이라 줄여 일컬으며 이 전투는 왜란 때 김시민의 진주대첩, 이순신의 한산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삼 대첩의 하나로서 후에 전하여 왔다.
왜군이 퇴각한 후 시체를 너더댓 무더기로 쌓아 놓고 마른풀로 덮어 태웠는데 그 냄새가 몇 십리 밖까지 풍겼다. 조선군이 끝까지 나머지 시체를 거두어 참획한 것만도 1백 30급에 이르며, 노획한 창검이 727여점 였다.
다음날 명나라 부총병관 사대수가 와서 보며 말하기를 조선에 참 장군이 있다 라 하며, 명나라 송경략 이 조선에 자문(咨文)을 보내어 위로하고 비단과 은(銀)으로 상을 주고 황제에게 주문(奏聞)하였다 했으니, 황제가 홍려사(鴻臚寺)의 관원을 보내 우리나라에 선유(宣諭)하기를, 지금 보건대 권율이 참획한 것이 매우 많으니 해국(該國)의 인민이 그래도 진작될 수 있겠다. 라 하고는 내가 매우 가상하게여긴다 라 하였다.
明의 제독 이여송은 덕양산성 행주나루 전투 소식을 듣고 급히 회군한 것을 후회 하면서 장세작과 이덕형을 개성에 다시 보내어 군량을 비축하게하고 기다리게 하였다. 전라도 순찰사 권율은 그 후에 파주의 대흥산성으로 군영을 옮기게 되었는데, 이는 도성을 수복키 위한 한 단계의 준비로서 명군과 관군 간에 밀접하며 긴요한 작전수립을 위함 이었다.
실록 26년 2월 24일에 전라도 순찰사 겸 관찰사 권율이 고산현감 신경희를 조정에 보내어 승첩을 아뢰었다 라 하였는데, 상(上.宣祖)은 신경희에게 묻기를 적의 숫자가 얼마인가? 라 하니 대답하기를 3만 명 쯤 되었습니다 라 하였다 하고, 또한 아뢰기를 여러 장수들이 멀지 않은 곳에 있으매 형세가 구원할 수 있었는데도 구원하지 않았으니 극히 통분 합니다. 양천 건너편에 건의부장 조대건이 있었고, 심악 에는 추의장(秋義將) 우성전이 있었으나 모두 구원하러 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묘시부터 신시에 이르도록 싸우느라 화살이 거의 떨어져 가는데, 마침 충청병사(忠淸兵使) 정 걸(丁傑)이 화살을 운반해 와 위급을 구원해주었습니다 라 기사하고 있다.
여성의병장 다물모는 구국의 훈(勳) 대상에 올랐다. 명(明)황제에게 까지 삼각산의 중흥사(中興寺)에 이은 개성의 국청사(國淸寺)의 전승(傳僧)이 보내어 지니 거리가 멀어 한참 후에서야 조선 여성의병들의 선유(宣諭)가 보고 되었는 바, 지금 보건대 권율의 지략과 충의는 대단하려니와 현모양처를 넘어 구국에 이르게 된 데까지 몸을 던지는 조선의 부녀자들의 심기를 불러 일으켜 선봉에 서서 지휘한 영도력을 갖춘 여성 의병장 다물모를 보고, 이 어찌 매우 거룩하고도 수려한 인민의 진작(振作)할 수 있을 일이아니겠는가! 라 하며, 명(明)황제는 내내 거듭 이를 매우 가상하게 여기노라 라 하였다. 이는 서산과 사명당 두 대사의 지시와 천거로서 그렇게 된 것이었으니, 상(上)에게 까지 공훈을 보고하게 되었는데, 당시 도체찰사 유성룡에게 전보(轉報)하기로 하고 법구와 기량이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이를 늦게 알고 다물모는 이르기를 “어찌 싸웠느냐가 중요하지 결말을 내세우는 건 필요치 않고 좋은 건 아니다”라 하며 구태어 몽진 중 분란한 상(上)의 거동에 불공(不恭)이 염려스럽다 라 하였다. 그러니 그 천거는 다물모가 극구 만류 되었다 라 전하여 지니 전체 승병과 의병들은 후에 말하기를 다물모야 말로 겸손의 미덕을 갖추고 있는 참된 구국의 영도자라 입에 오르내렸다. 이에 여성의병장 다물모의 정신세계는 가히 미래를 보고 더 너른 시공을 아는 의병지도자였음이 분명하다 라 주변에서 일컬었으니 그 덕망은 모든 이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나아갔다.
또한 명(明)의 송 경략이 조선에 자문(咨文)을 보내어 위로하며 비단과 은(銀)으로 상을 주고 황제에게 주문(奏聞)하였다 했으니, 이는 권 율 등 관군을 표적하여 포괄적으로 시행한 공훈의 사안으로 파악하고 있었던 바, 다만 여비남존(女卑男尊)의 당대 시류를 다물모는 여성의병장을 넘어 마치 국모(國母)의 위상에라도 미치는 포용심을 내포하며 이미 깊은 자애와 겸허를 품어 싸운 결과에 대한 어떤 추호의 수급일지언정 원치 아니하는 드높은 관전(寬展)을 보듬고 있었던 것 이었으니 과연 여성중의 영도자였음이 틀림없었다.
...중략.
다물모<多勿母>는 「고양시향토문화재 제46호 밥 할머니」로서
실화 역사장편소설 작중<作中>의 주인공 역 ‘밥 할머니’의 작중 이름이다.
덕양산성 전투<행주대첩>에서 한 낟 관군에 돌을 주워 나른 당시의 부녀자 아낙네 들이 아닌, 사전에 이미 결성되어 훈련을 다진 여성의병단과 휘하 양성해 낸 의승병단을 총 지휘해 낸, 여성의병장군 다물모 대장(女性義兵將軍多勿母大將)으로서 덕양산성 전투<행주대첩>에 참전하여 승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仁堂 李載信은 「고양시향토문화재 제46호 밥 할머니 보존위원회」 자문위원으로서, ‘고양 밥 할머니’ 주제 仁堂 李載信 2013년 발표, 창작역사실화장편소설<421쪽> 「돌의 춤」을 펴냈다.
행주대첩비
합동답사 (사)KBS사우회등산위원회와 동참
약 0.7Km 쯤 가벼운 등정 결과 행주 대첩비 정상에 올랐다
행주산성 정상에 위치한 충의정
게재자 <(사)KBS문화유적답사위원장)
대첩비에서 바라다 본 창릉천 발원지 북한산 주봉 백운대
《돌의 춤》은 임진왜란의 전쟁일지이며,
설화 전설을 통한 임진왜란의 난중기록사이다.
《돌의 춤》집필원은 경기도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 46호로 지정(2006.11.1)된 “밥 할머니”이다.
동“밥 할머니”의 전설은 단 네 가지 이야기 인바, 즉 ‘북한산 노적봉을 군량미로 위장했다’와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에 행주치마를 입고 참전하여 투석전 돌을 주워 날랐다’‘ 와 '임진왜란 전후 주먹밥으로 동네사람을 구제 했다’와 ‘무언의 의미를 내포한 처음엔 두상이 있었으나, 임의로 가해진, 저 목 없는 돌미륵 상’이다.
고양시 향토문화제 제46호 밥 할머니 상
경기 고양시 덕양구 동산동 374
밥 할머니 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