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예닮
작성시간:2022.10.10 조회수: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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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륜교회 김은호목사의 저서 < 인생의 어두운 밤을 만날 때 >중에서
16.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라
베드로전서 2장 1-3절
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2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 이라
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현대 문화의 트렌드는 "내 인생의 주인공은 바로 나"라는 슬로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현대 사회는 남의 눈치 보지 말고, 주도적으로 자신의 인생과 이 시대를 호령하라고 이야기합니다. 기독교 사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중에 아우구스티누스와 C. S. 루이스(C. S. Lewis)가 있습니다. 이들 역시 거듭나기 전까지는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최선으로 여기고 불신앙과 씨름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거듭난 이후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게 됩니다.
알다시피 아우구스티누스는 32세에 회심했는데 그 전까지 음란에 빠져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늘 진리를 향한 갈망에 몸부림쳤습니다. 어느날 동네 아이의 노랫소리를 우연히 듣게 됩니다. "톨레 레게 톨레 레게!" (Tolle lege Tolle lege! 들고 읽어라! 들고 읽어라!) 그때 그가 곧바로 집어든 책은 신약성경이었습니 다. 이 과정을 통해 회심을 경험하고 거듭난 그는 이후 하나님의 진리를 전파하며 고백록」이라는 기독교 걸작을 남기게 됩니다.
나니아 연대기로 유명한 기독교 변증가 C. S. 루이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유물론에 심취해 있던 그는 34세에야 비로소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특히 「반지의 제왕」을 쓴 옥스퍼드 동료 교수]. R. R. 톨킨이 그와 우정을 나누며 하나님을 찾도록 도와준 일화는 유명합니다. C. S. 루이스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이 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드디어 항복했고,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했으며, 무릎 꿇고 기도했다."
복음을 받아들인 후 누구보다 복음의 순전함을 가지고 살았던 두 인물은 지금까지 많은 이에게 영적 도전을 안겨 줍니다.
갓난아이에서 장성한 분량으로
그리스도인은 부모님이 물려 준 생명이 아닌 예수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으로 내 영혼이 다시 태어날 때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영적 아이의 모습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갓난아이로 태어납니다. 장성한 상태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은 자라야 합니다. 성장해야 합니다.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2절)
우리를 그분의 생명으로 낳으신 하나님은 갓난아이로 태어난 우리가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기를 원하십니다.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계속 자라기를 원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 2:12b)라고 표현했습니다. 구원을 받았다면 그것으로 끝나지 말고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어 가라'는 것입니다.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은 다른 말로 주님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성도는 이제 두렵고 떨림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가야합니다. 주님을 닮아가는 성화의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야 합니다.
성장은 기쁨이다
거듭난 우리가 성장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영적으로 자라야 할까요? 우리의 영적 성장이 주님의 기쁨이 되기 때문 입니다.
한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성장하는 것을 보면 참 신기합니다. 울면서 태어난 아이가 시간이 지나면서 눈을 마주치고 웃기 시작합니다. 피곤한 몸으로 퇴근해 집에 왔는데 아이가 눈을 마주치고 웃어 주면 하루의 모든 피로가 사라집니다.
그러다 뒤집기를 시작합니다. 조금 더 성장하면 무릎으로 기어 다니고, 그러다 아장아장 걷기 시작합니다. 첫 발을 떼는 순간, 월드컵에서 결승골을 넣은 것처럼 온 가족이 박수치고 환호성을 지르며 어쩔 줄 몰라 합니다. 엄마의 손을 붙잡고 다니던 아이가 어느덧 성장해 엄마의 옷을 함께 입게 되고 아빠보다 더 큰 신발을 신게 될 때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흡족한지 모릅니다. 자녀의 성장은 부모에게 더할 나위없는 기쁨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기쁨이 되기 위해 우리는 자라야 합니다. 성장해야 합니다. 생명의 특징은 자라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가 자녀의 성장을 바라보며 기뻐하듯,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는 그분의 자녀인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기뻐하십니다.
버리는 만큼 성장한다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 저절로 영적 성장이 이루 어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영적 성장은 시간이 간다고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 주실 테니까 나는 그냥 가만히 있을거야'라는 생각은 엄청난 착각입니다. 신앙 훈련을 열심히 받고 교회 봉사를 오래 했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 영혼에 유익하지 않는 것들을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반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1절)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은 우리는 이제 추하고 더러운 옛 사람의 옷을 과감히 벗어 버려야 합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버리라'라는 말이 가장 마지막에 나오지만, 원문의 어순은 명령형 '버려라'가 가장 앞에 나옵니다. 단순히 '버렸으면 좋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도 베드로는 거듭난 성도들에게 단호하고 강력하게 영혼에 유익하지 않는 것들을 과감히 버리라고 명령합니다.
하늘에 속한 우리가 과감히 버려야 할 것들은 무엇일까요?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 "외식", "시기" 그리고 "모든 비방하는 말'입니다. '악독'은 다른 사람을 해치려고 하는 모든 악한 생각과 행동을 말합니다. '기만'은 자기 유익을 위해 남을 속이는 모든 잔꾀를 말합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 자기에게 유익만 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을 속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외식'이라는 말은 본래 무대 위의 배우를 가리킵니다.
두 얼굴을 가지고 살아가는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외식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비난 받는 가장 큰 원인도 바로 외식입니다. 외식하는 자는 남이 볼 때와 보지 않을 때의 행동이 다릅니다. 남들이 인정해 줄 때와 인정해 주지 않을 때의 자세가 다릅니다. 상대방이 누구냐에 따라 대하 는 태도와 마음이 다릅니다. 외식하는 자들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식합니다.
'시기'는 남이 잘되는 것을 배 아파하는 마음입니다. 남의 행복을 원치않는 악한 마음입니다. '비방'은 남 뒤에서 헐뜯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인관계를 파괴하는 대표적인 원인이 무서운 악담과 중상모략입니다.
이렇게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릴 때 영적 성장이 이루어집니다. 주님을 닮아 가기를 원한다면,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기를 원한다면, 가장 먼저 내 영혼에 유익되지 않는 것들을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버리는 만큼 성장합니다.
말씀을 먹고 성장한다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기 위해서는 또한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 합니다.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2절)
"순전하고 신령한 젖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잠 30:5a)
하나님의 말씀은 순전합니다. 불순물이 없습니다. 깨끗합니다. 구원받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렇게 순결하고 신령한 젖인 하나님의 말씀을 "갓난 아기들 같이" 사모해야 합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엄마젖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신기하게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갓난아이는 젖을 찾아 빨아먹습니다. 젖을 먹어야 살 수 있고 자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갓난 아이는 젖을 사모합니다. 배가 고프면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체면도 없습니다. 엄마의 사정을 조금도 봐주지 않습니다. 지하철에서도 울어 대고, 아무리 좋아하는 뽀로로 장난감을 손에 쥐어 줘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다 엄마가 젖을 물리면 정신없이 빨아먹기 시작합 니다.
예수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 우리 역시 갓난아이들 같이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 합니다. 말씀을 먹지 못하면 내 영혼이 죽는다는 절박함으로 말씀을 받아먹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비타민 같은 영양제가 아닌 생명의 양식으로 받아먹어야 합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 같은 열정으로 말씀을 받아먹어 야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사모했습니다.
"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시 119:131)
마치 갓난아이가 젖 달라고 보채는 것처럼 그렇게 말씀을 사모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거듭난 내 생명의 양식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을 '이해하고 분석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먹으라'고 말합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렘 15:16)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로 부르실 때에도 "너는 이 두루마 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겔 3:1)라고 말씀하 셨습니다. "두루마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에스겔은 이 두루마리를 먹었더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과 같았다' (겔 3:3b)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자라게 하는 신령한 젖입니다. 거듭난 내 생명의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신령한 젖인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합니다.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2절)
왜 우리는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가까이 하는 것만큼 거듭난 내 생명이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기 때문입니다. 영혼에 유익하지 않는 것들을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사모하고 가까이 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말씀이 주시는 지혜로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워싱턴의 한 박물관에는 미국의 전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 (Abraham Lincoln)이 쓰던 낡은 성경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 성경에는 링컨이 생전에 유독 많이 읽은 흔적이 남은 구절이 있습 니다. 그 주변에는 눈물 자국도 있습니다. 단어마다 손가락으로 눌러서 생긴 손때 묻은 자국도 있습니다. 바로 시편 34편 4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 를 건지셨다"(시 34:4)
모두가 아는 대로 링컨은 살아오면서 많은 실패를 겪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숱한 어려움 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 낸시는 링컨이 아홉 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신앙심이 깊었던 낸시는 사랑하는 아들 링컨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했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아! 나는 네가 부자가 되는 것보다도, 위인이 되는 것보다도 성경 읽기를 즐기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부디 매일 성경을 읽도록 하여라. 그리고 네가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에 삶의 위기가 닥칠 때에는 더욱 열심히 성경을 읽도록 하여라. 이것이 내가 너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하는 말이다."
링컨은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어릴 때부터 성경을 부지런히 읽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삶 속에 살아 역사하면서 그를 붙들어 주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미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16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무디((D. L. Moody)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Dirty Bible Clean Christian, Clean Bible Dirty Christian,
"손때가 묻고 해질 정도로 성경을 많이 본 사람은 깨끗한 그리 스도인이고, 성경이 깨끗한 사람은 더러운 그리스도인이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가까이하는 사람은 그 삶이 깨끗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신령한 젖인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 갓난아이는 신령한 젖을 먹지 않으면 죽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거듭난 하나님의 사람은 말씀을 먹어야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혼의 양식인 말씀을 먹지 않고 살아가는 성도가 많습니다. 새는 먹지 않고 9일을 살고, 개는 20일까지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거북이는 자그마치 500일을, 뱀은 800일 동안 먹지 않고도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성도 중에도 먹지 않고 버티는이들이 있습니다. 위험한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자라면 결코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잘먹고 잘 사시길바랍니다)
주의 인자하심으로 성장한다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기 위해서는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아야 합니다.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3절)
인자하심은 언약에 근거한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용 서받을 수 없는 완벽한 죄인이 구원을 받은 것도 주의 인자하심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거듭남을 통해서 주의 인자하심을 맛본 사람들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라고 말합니다.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인 신령한 젖을 더욱 사모하는 이유는 주의 인자하심을 이미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관념이나 철학이 아닙니다. 단순한 지적 인식이나 지식을 쌓는 과정이 아닙니다. 신앙은 말씀을 통해 그 진리를 경험하는 삶입니다. 다윗은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시 348a)라고 했습니다. 음식을 맛보는 것처럼 실제로 하나님을 경험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진리는 체험되는 것입니 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에 기록된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실하심을, 위대하심을 맛보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주의 인자하심을 맛볼 때 믿음이 성장합니다. 그렇게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경험할 때 영적 성장의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사사시대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모든 큰일을 본자들은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을 섬겼습니다(삿 2:7b). 그러나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을 보지 못하는 자들은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다른 세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삿 2:10b)
체험하는 신앙이 중요합니다. 머리로 알고 있는 지식이 실제로 체득될 때 능력의 믿음이 됩니다.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에 기록된 하나님을 경험하면 결코 다른 세대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아 알면 주께서 기뻐하시는 뜻대로 그들의 믿음이 자랄 것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거듭났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났습니까? 그렇다면 거듭난 여러분의 생명은 이제 자라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를 구원하신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주님의 최고 기쁨은 거듭난 우리가 구원에 이르도록 성장하는 것입니다.
내 영혼에 유익되지 않는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십시오! 갓난아이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십시오!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십시오! 그럴 때 거듭난 우리는 구원에 이르도록 조금씩 조금씩 성장합니다. 여러분이 삶 속에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날마다 새롭게 경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동교회
지양구 목사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