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걸 미실궁주의 파란만장한 일생
김별아 - 미실 - 문이당
한명숙
사랑으로 천하를 얻은 신라 여인 "미실" 신라시대 의 전성기 인 24대 진흥왕, 25대 진지왕,
26대 진평왕, 3대 걸쳐 대원신통(왕과 그 일족에게 색공 했던 혈통) 및 인통(왕과 혼인할 여자나 색공 할 여자를 배출했던 모계혈통.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을 지칭) 의 신분으로, 여성의 신분을 억제한 제도 확립하기 전 , 즉 현대와 같은 성 모럴이 정립되기 전 한 시대의 전면에서 사랑으로 천하를 사로잡은 여인 신라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안정적인 시대로 꼽히는 진흥왕 시대. 왕에게 색공을 바치는 대원신통의 옥진은 칠색조와 사랑을 나누는 신비로운 꿈을 꾼 후, 귀한 손을 볼 것을 예감한다. 아름다운 정기를 지니고 태어난 미실은 할머니 옥진으로부터 교태부리는 법과 방중술, 가무를 배우며 색공지신(色供之臣)으로 성장한다.
미실의 집안은 대대로 대원신통(왕에게 색을 제공하고 후사를 생산하는 역할을 가진 색즉지공의 집안)의 역할을 가지고 있는 집안으로 그녀의 할머니인 옥진과 어머니인 묘도는 차례로 당시의 왕인 법흥제에게 색을 제공했으며, 미실 역시도 그 신성한 역할을 승계 할 사명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그렇기에 미실은 할머니인 옥진으로부터 어려서부터 갖가지의 잠자리 기교를 배우며 남자를 사로잡는 기술에 대해 터득해 나가게 된다.
어느 날 화랑과 처녀 유화들이 어울려 노는 자리에서 화랑 사다함을 만나는 미실, 첫눈에 사랑을 느끼고 그와 사랑을 나눈다. 그러나 미실은 세종전군의 잉첩으로 간택되어 입궁하라는 명을 받든다. 미진부에게는 1남 1녀가 있었는데 그 중 딸 미실은 자색이 곱기로 소문이 나 진흥왕의 왕비인 지소태후의 주선으로 처음 황궁으로 입궁을 했다.
지소태후에게는 '세종'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세종은 지소태후와 이사부가 서로 통정을 해서 낳은 아들이다.
아들 세종을 위해 귀족 처녀들을 고르던 중 미실의 이야기를 접하고 그녀를 들이게 되고, 세종은 단번에 미실의 자색에 빠져 그녀를 지목하게 되었다.
그러나 진흥왕의 어머니이자 진골정통인 지소태후는 미실을 궁에서 내쫓고 진골정통의 여인으로 아들 세종의 정실로 삼는다. 궁에서 쫓겨난 미실은 첫사랑 사다함과 재회하지만 사다함은 곧 출정을 해야 한다. 미실과 사다함은 슬픔 속에 향가 풍랑가를 노래하며 부부의 연을 맹세한다. 세종은 미실을 그리워하다 상사병까지 얻게 되고, 사경을 헤맨다. 결국 지소태후는 미실을 다시 궁으로 불러들이고, 미실을 세종의 정실로 삼는다. 사다함이 전장에서 돌아오지만, 이미 세종의 아내가 된 미실을 그리며 청조가를 노래한다. 이미 남의 아내가 되어버린 그녀를 보며, 속 알이만 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충복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까지 겹쳐 병으로 세상을 뜨게 된다. 이때부터 미실은 사랑에 대해 지나치게 감상적인 감정을 버리게 되고 사다함은 끝내 죽음을 맞이한다. 미실이 세종의 아이를 임신 할 무렵 미실의 꿈에서 사다함이 나타나 "너와 맺어지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너의 뱃속의 아들로 태어나고 말겠다"라고 말하여 하종이 태어났는데 하종은 세종보다는 사다함을 더욱 많이 닮아 있어 세상 사람들은 하종이 세종의 아들이 아니라 사다함의 아이라고 생각했다.하종을 낳은 미실은 그 때부터 색에 미친 미치광이가 되어 남편인 세종뿐만 아니라 진흥왕, 사도부인의 아들인 동륜과 금륜 태자, 진평왕 심지어는 자신의 친동생인 미생에게까지 그 손을 뻗치게 되는데 워낙 색사가 뛰어난 여자이다 보니 남자들이 어찌 할 수 없었다.
얼마 후 지소태후를 경계하는 사도황후의 간계에 따란 태자인 동륜과 관계를 맺게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흥제의 눈에 들어 색즉지공으로써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그리고 이에 충격을 받은 세종은 전황을 핑계로 고구려와 대치중인 전방으로 도피 아닌 도피를 떠나게 된다. 왕을 손에 넣고 태자의 마음까지 사로잡은 미실에게 이제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자신을 천대시 하던 지소태후의 눈빛도 더 이상 자신의 행보를 막아설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녀의 탁월한 문장력과 명석한 두뇌 덕분에 정치 분야에 있어서도 뛰어난 조언자로써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니 날이 갈수록 왕의 총애는 두터워지게 되고, 급기야는 궁주라는 칭호를 얻게 될 정도로 그녀의 권세는 나날이 높아만 가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총애를 등에 입은 미실은 요부로써의 기질 또한 적극적으로 발휘한다. 언제나 왕의 시중을 들어야만 하는 대원신통의 숙명에 반항이라도 하듯 뒤로는 세간의 눈을 피해 많은 남자들과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게 된다. 겉으로는 진흥제에게 대원신통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면서도 그의 눈을 피해 많은 외간 남자들과 정을 통하게 되는데, 그 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동륜을 꼽을 수 있는데 동륜은 진흥제와 사랑을 나누기 전부터 정을 통한 사이로 아슬아슬한 사랑을 계속해서 나누고 있었다.
또한 7세 풍월주이자 사다함의 동생인 설원과도 은밀한 정을 통하게 되고, 심지어는 친동생인 미생과도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게 된다. 그만큼 미실의 성욕은 권력욕 못지않게 왕성했으며, 그러한 행실로 인해 그녀를 추종하는 자 못지않게 반대하는 세력 또한 적지 않게 생겨나게 된다. 어쨌든 그녀는 그녀의 본분대로 진흥제의 많은 적자들을 생산해낸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힌다 하였던가. 그녀의 행실이 뜻하지 않는 사건으로 인해 드러나게 된다. 동륜태자의 죽음이 바로 그것이다. 동륜태자는 미실이 아버지와 사랑을 나누자 이에 불만을 품고 장안의 미인들을 찾아 미실에게 풀지 못한 성욕을 풀 듯 망나니짓을 하고 다닌다. 그러다 왕의 후궁인 보명에게 눈독을 들이게 되고, 어느덧 사랑하는 사이가 되지만 어이없게도 한밤 중 월담을 하다 그녀의 처소를 지키던 맹견들의 공격으로 숨지게 된다. 이 사건으로 분노하여 진상을 조사하던 진흥제는 미실의 그간 행적을 모두 알게 그녀를 궁 밖으로 내치고, 결국 또다시 궁으로 내쳐진 미실은 조용히 때를 기다린다. 이때 소문을 들은 세종은 변방에서 급히 달려와 다시금 그녀에게 간청을 하여 부부로써의 정을 되살리게 된다. 그동안 세종은 항상 미실을 그리며 독수공방을 해왔을 정도로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생활도 그리 오래 가지는 못한다. 그녀를 잊지 못한 진흥제는 결국 그녀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고, 다시금 그녀를 궁으로 불러들이고, 예전의 지위와 권력을 복귀시켜 준다. 이 때부터 미실의 무소 불위의 권력 행사는 과거보다 더욱 강력해진다. 적지 않은 나이 탓에 기력이 쇠하여진 왕을 대신하여 탁월한 능력으로 정사를 주관해 신라에 모든 권력이 그녀에게 집중되어간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흥제가 죽음을 맞이하자 금륜 태자였던 진지제가 즉위하고, 그 역시도 미실과 정을 통하지만 지나친 향락으로 머지않아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이에 또 다른 성군 진평왕이 즉위한다. 물론 미실은 그 또한 자신의 성애의 노예로 만들어버리며, 바야흐로 당대 최고의 권력가로 군림하게 된다. 3대에 걸친 신라의 왕들을 모두 자신의 손아귀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이렇게 희대의 여걸로 한 세기를 풍미하던 최고의 권력가 미실은 진평왕 시절인 606년 그 파란 만장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렇게 신라 사회를 자신의 손바닥 안에서 주무르던 미실은 문란한 성생활 덕분에 성병을 얻게 되었는데 다 죽어갈 때 즈음 그녀의 곁에 있던 사람은 정부인 설원랑이었다. 미실을 너무도 사랑한 설원랑은 매일 하늘에 대고 "미실 대신 저에게 중병을 내리게 해주소서"라고 빌었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미실은 차츰 회복세를 보이게 되었지만 대신 설원랑은 병을 이기지 못해 죽어버리게 되고, 미실은 자신의 속옷 하나를 설원랑의 관 속에 넣어 "이제 곧 나도 그대를 따라 갈 것입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라며 며칠 후 죽었는데 그녀의 나이 58살이었다.
미실은 한국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도 고도의 스캔들을 낳은 여인이다.
그녀는 아버지 미진부와 법흥왕과 내연의 관계에 있던 옥진궁주이다.
그녀의 아비 미진부는 나당 연합군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 아찬의 벼슬로 있어 거칠부, 구진, 노부와 더불어 고현의 10개성을 탈취한 공적이 있는 중급의 귀족이다.
미실은 지소태후에 의해 궁 밖으로 내쳐지는 신세가 되고, 이러한 수모가 미실의 인생을 바꾸는 중요한 원동력이 된다. 처음엔 앞쪽에 나와 있는 가계도(?)를 함께 보느라 책장이 넘겨지는 속도가 무지 느렸다.
왕실의 색공지신-색사로 왕실을 섬기는 신하였던 미실의 사랑과 삶의 이야기다.
소설이긴 하지만 평론가들에 의하면 6세기 화랑세기의 미실궁주를 바탕으로 당시를 그려내 1500년 전의 역사를 살려냈다는 평가들이 있었다.
3대에 걸쳐 왕과 왕실이 부르면 어느 자리라도 기꺼이 받들어야 하는 운명의 색공지신이지만 한편으로는 왕의 총애를 바탕으로 막강한 권력을 누리며 골품에 맞서 신원대통이라는 권력 흐름을 갖기도 했다.
실제 미실은 진흥왕 때 최고의 권력자로 화랑도를 이끄는 최고 결정권자가 되기도 했다.
물론 아버지와, 아들과, 조카와 ,손자와 성관계를 갖는 부분, 거침없는 성애 묘사가 일품이었다. 혼불의 최명희님의 묘사와 비슷했지만 분위기는 좀 다른 유교적 성문화에 익숙한 내게는 많은 부분이 거슬리기도 했다. 그러나 미실이 마지막으로 색공 했던 진평왕(아마도 진흥왕의 아들이었지)에게 성을 가르치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신라가 가졌던 색공의 문화가 거룩하게 느껴졌으니 앞쪽 내용에 단련된 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또한 색공의 위치에 있는 미실이면서도 사다함과의 짧지만 굵은 사랑,
사랑하기에 자신의 모든 걸 버리고 어려운 시간에 미실을 끝까지 보살피다 먼저 죽어간 설원의 모습에서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도 생각하게 했다. 어릴 적 미실이 할머니로부터 색공으로 길러지는 과정에서 오간 대화가 오래 남는다.
어찌 보면 사실,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 할 것 없이 위에 나온 거의 모든 남자들이 미실에게 작업 당했다고 볼 수 있다.
미실은 애인의 아버지인 진흥왕에게도 전문적인 방사솜씨를 발휘했으며 그 덕택에 왕의 총애를 입어 곁에서 직접 정사에 참여할 수 있는 신분으로 격상 되었다.그 이름만으로도 한 세기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던 역사 속 최고의 여장부이자 요부였던 미실. 하지만 평소 삼국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그녀에 대해 아는 이는 극히 드물 것이다. 물론 나 역시도 평소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없었기에 미실 이라는 인물에 관해서는 이번 기회를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현재 자료가 그리 많이 남지 않은 신라 시대의 인물인 데다가 이 땅에 유교 사상이 도입되고 난 후 남성 위주의 문화가 정착되어가면서부터 미실 이라는 존재는 뭇 남성들에게 있어서는 실로 요부와도 같은 존재였을 것이기에 역사의 표면 위로 올라오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을 것이다. 수많은 권력자들과 호걸들을 자신의 치마폭 속에서 어린애 다루듯 가지고 놀며, 수 십 년 동안이나 최고의 실권을 자랑하던 그녀의 존재야말로 여성의 권위를 억압하던 보수적인 유교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보았을 때, 극악무도한 죄인이 아닐 수 없었으리라. 때문에 그녀의 존재는 억압된 분위기 속에서 금기 아닌 금기가 되었을 것이며, 그러한 연유로 미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그녀가 역사적으로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다는 사실만큼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며, 때문에 지나치게 주관적인 사실보다는 보다 객관적이고 진취적인 역사관을 통해 그녀의 삶을 복원하는 작업이 우선 시 되어야 할 것이다.
미실은 ‘왕의 여자’로 태어났다. 전래의 미태술 방중술을 익혀 일생동안 왕을 색(色)으로 섬겨야 하는 모계혈통 색공지신(色供之臣). 절대권력 앞에 그들의 색은 생존의 근거였고 삶의 의미였다.
하지만 그녀는 특별했다. 태(態)는 아름다웠고, 기(技)는 현묘했다. 열 네 살에 황후의 아들 세종과 혼인한 이래 진흥 진지 진평 3대의 왕과 왕자들, 화랑 사다함을 비롯한 숱한 호걸 영웅들을 미색으로 녹였고 왕실권력을 품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책을 접한 후 하나같이 충격적이라는 반응을 보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특히 성에 대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개방적이고, 여성의 권리 또한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상위에 존재하였기에 항상 유교 사상의 엄격한 절제의 미덕을 강요당해온 상당수의 현대인들에게 있어 신라의 그러한 문화는 가히 상상 속에서나 이루어질 법한 세계였으리라. 스스로가 개방적이라고 생각하는 나 역시도 신라의 문화와 사상을 접한 후 그 충격에 할말을 잊었을 정도이니 상당수의 보수적인 독자들에게 있어 신라의 문화와 사상, 그리고 미실의 존재는 그리 유쾌한 경험만은 아니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 한들 남녀칠세 부동석과 남존여비의 뿌리 깊은 유교 사상이 많은 사람들의 머리속에 건재하기에 당시 신라 사람들의 행실은 가히 부도덕을 넘어 패륜의 수준으로 보였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시대에도 기준이라는 것이 있듯 신라 시대 역시도 그 시대만의 잣대가 엄연히 존재할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혼인을 하여 정인을 둔 남녀가 외간 사람과 통정을 한다는 것은 극히 잘못된 행동이며, 그것은 분명 그 시대에도 처벌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와 같은 성 모럴이 확립되기 이전에 시대이고, 현재나 가까운 과거에 비해 법률과 세습에 크게 억매이지 않고, 인간의 본성과 미적 감각을 크게 중시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그 처벌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극히 관대했던 것뿐이다. 그것은 시대의 흐름이 그러했을 뿐이지 신라의 사람들이 무지했다거나 부도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그러했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비단 신라뿐만 아니라 고구려에도 형의 사후에 동생이 형수를 취하는 제도가 있었음을 미루어 당시 대륙을 비롯한 대부분의 국가들이 성에 대해 다른 어느 때보다 개방적이었으며, 또한 여성의 권리에도 무척이나 옹호적이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한없이 환하고 다사로운 빛을 보았다. 빛을 향해 온몸을 늘여 발돋움했다. 손끝에 잡힐 듯 말 듯 안타까웠던 빛이 눈부시게 작열하는 동안, 동륜은 몸을 떨며 파정하였다.’ ‘(사내들에게) 그녀만큼 잔인하고 아름다운 적(敵)은 없었다.’
작가는 신라 김대문의 ‘화랑세기’가 기록한 미실의 사건을 고대사료(史料)의 건조한 문장으로, 작가의 상상력이 더듬어낸 그의 내면을 농밀하고 함축적인 시적 문장으로 거침없이 이어간다.
중국의 측천무후(624~705)가 성을 매개로 절대권력의 고독한 자유를 추구했다면, 미실의 성은 인간 본성의 자유를 향한 갈구인 동시에 견성(見性)의 현재태였다. ‘낮거나 높고, 천하거나 고상한 세상만사가 모두 성애 안에 있었다. 성애 자체가 하나의 완전한 세상이었다.’
작가는, 권력자 미실이 성의 정치를 통해 구현한 그 화합의 세상을 ‘어머니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상이라고 썼다. 서사의 호방함에 비해 극적인 꺾임과 출렁임은 덜하지만, 작가는 화랑의 남성적 세계를 비롯한 당대의 풍속과 문화를 적절히 배치함으로써 읽는 재미와 긴장을 유지시킨다.
현대의 ‘성(sex)과 성(gender)의 중층적 고리들을 겨냥한 미실의 테러를 마주하는 일은, 그래서 짜릿하고 저릿한 것이었다. 작가에게 고료가 1억원인 ‘제1회 세계문학상’ 당선의 영예를 안긴 작품이기도 하다.
미실궁주는 후궁의 신분이었지만 신라 도약기인 진흥왕 중기부터 진평왕 초기까지 약 40년 동안 오로지 비상하게 빼어난 미색과 총명한 머리로 제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휘두르며 정계를 좌지우지한 여걸이다
신라 진흥왕때부터 진평왕때까지 40년간 정계를 주름잡았던 여걸 미실궁주의 파란만장한 일생 시대를 뛰어넘어 우리 앞에 우뚝 선 신라 여인 미실! 그녀를 위하여 어설픈 축배를 들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