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의 감격이 채 가시지 않은 1946년, 한국야구의 산실인 청룡기 고교야구가 화려하게 탄생했다. 처음 대회를 주최한 곳은 자유신문사였다. 현재까지 우승기로 이어져 오고 있는 청룡기의 청룡은 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 화백이 그렸고, ‘선수권대회’ 휘호는 성재(惺齊) 김태석(金台錫)선생이 썼다.
해방 후 1년 만에 열리는 최대 규모의 전국고교야구대회에 국민들은 뜨겁게 호응했다. 개막일인 9월11일 경성운동장(현 동대문야구장)에는 1만이 넘는 인파가 몰렸다. 전국 각지의 24개 팀 528명이 출전한 이 대회는 숱한 명승부로 감동과 즐거움을 선사했다. 휘문중과 개성중의 개막전은 연장 11회 승부로 팬들을 열광시켰고, 광주서중의 김성중은 인천상업과의 경기에서 5개의 볼넷과 1개의 몸에 맞는 볼만 허용하며 대회 첫 노히트 노런 기록을 작성했다. 부산상중(현 개성고)은 결승에서 경남중을 8대6으로 제치며 첫 우승의 영광을 안았다.
개막부터 전국에 야구 붐을 몰고 온 청룡기 대회는 이후 한국 야구사의 초석을 다진 스타들을 대거 배출했다. 1회 대회 때 좌타자로 유격수를 맡았던 장태영(작고)은 이후 투수로 변신, 2·3회 대회에서 경남중의 2년 연속 우승을 이끌며 해방 후 야구 1세대의 최고 스타로 등극했다. 당시 장태영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한국의 홈런타자 박현식씨는 동산중·경기중 소속으로 세 차례 장태영과 대결했으나 모두 쓴잔을 맛봐 가장 불운한 청룡기 스타의 한 명으로 역사에 남았다.장태영이 마운드에 선 1947년 이후 4개 대회에서 무패 행진을 벌였던 경남중의 연승가도를 저지한 사람은 바로 광주서중(현 광주일고)의 좌완투수 김양중. 객관적 전력 열세라는 전망에도 불구하고, 김양중은 결승에서 장태영과 팽팽한 투수전을 이어갔다. 결국 연장승부 끝에 기적같은 2대1 승리를 거두며 4회 대회 우승기를 휘날렸다. 우승을 눈앞에 두고 실책으로 무너진 경남중 선수들의 눈물은 아직도 원로 야구인들의 기억에 생생하다. ‘기적같은 역전승’으로 회자되고 있는 당시 결승 명승부를 지켜본 미 해군소장 스테이트먼 제독은 한국 야구 수준과 인기에 찬사를 보내면서 곧바로 한국의 세계연맹 가입을 성사시켰다. 대구상중(현 상원고)이 우승한 1950년 5회 대회 직후 6·25가 터지면서 청룡기는 1951·1952년 대회를 중단하게 된다. 전쟁이 끝난 1953년 대회 주최자인 자유신문이 간부들의 납북으로 신문도 발행하지 못하는 처지가 되자 발벗고 나선 것은 조선일보. 이미 광복 전인 1925년 중등학교 야구리그전을 신설, 학생야구의 존립 기반을 닦았던 조선일보는 ‘전쟁의 상처를 스포츠로 씻자’는 의욕으로 2달 만에 청룡기 고교야구선수권대회를 부활시켰다. 당시 조선일보는 사무실을 구하지 못하던 야구협회를 위해 본사 사옥에 사무실을 마련해 줄 정도로 야구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전쟁의 상흔을 딛고 재건에 나섰던 50년대는 인천야구 전성시대였다. 인천고는 1953년 8회대회에서 서동준이 투타에서 맹활약하며 선린상고를 제치고 첫 우승을 차지했고, 1954년 9회 대회에서도 선린상고와 결승에서 만나 김일겸의 호투로 5대2로 승리, 경남중에 이어 2번째로 대회 2연패를 차지했다. 이후 청룡기는 인천고의 동향 라이벌이자 불세출의 투수 신인식을 배출한 동산고의 몫이었다. 신인식은 171·65㎏의 비교적 작은 체구였지만, 동산중 3학년때부터 고교팀 주전으로 발탁돼 홈런왕에 올랐을 만큼 천부적 재질을 보였다. 신인식은 동산고 1학년이던 1955년 10회 대회에서 3연패를 노리던 인천고를 누르는데 기여했고, 1956년 11회 대회에선 중앙고와의 결승전에서 탈삼진 11개를 기록하며 무안타 무사사구 무실점 노히트노런으로 1대0 승리를 이끌어냈다. 이 경기는 1회 동산고 내야수가 첫 타자를 실책으로 내보내지 않았다면 한국야구 최초의 퍼펙트게임으로 기록에 남을 뻔 했다. 동산고는 1957년에도 인천고를 결승 상대로 맞이해 신인식의 호투로 3대1 승리를 이끌며 청룡기 사상 유일하게 3년 연속 우승의 위업을 이뤘다.
부산과 인천 야구에 눌려 해방 이후 단 한 차례도 정상에 오르지 못한 서울 야구는 1958년 경기공고가 13회 청룡기대회에서 강호 인천고를 누르고 첫 우승을 차지하면서 기지개를 켰다. 당시 경기공고 멤버는 프로야구 초창기 심판위원장을 지낸 김옥경, 공주고 감독을 역임한 김영빈 등이었다. 경기공고가 서울 야구의 초석을 다졌다면 전성기를 구축한 것은 경동고였다. 일본프로야구에서도 크게 활약하게 될 백인천을 비롯, 이재환·주성현·오춘삼·명정남·김휘만·이용숙 등 쟁쟁한 멤버들이 경동고 시대를 열었다. 경동고는 1959년 14회 대회 승자 준결승에서 4대0으로 눌렀던 동산고에게 1·2차 결승을 내리 지는 바람에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1960년 대회에서는 승승장구하며 부산상고를 제치고 첫 우승의 감격을 누렸다. 경동고는 그 해 청룡기 우승을 시작으로 화랑기와 황금사자기까지 거머쥐면서 전국대회 3관왕에 올랐다. 경동고의 간판타자 백인천은 한·일초청야구대회에 출전해, 메이지 진구구장에서 홈런을 날리며 이후 일본프로야구에 진출한 첫 한국인 선수가 됐다.
6·25이전 5차례 대회에서 4번이나 우승기를 가져갔던 영남야구는 1962년부터 1979년까지 18년간 14차례나 우승하는 전성기를 구가했다. 가장 먼저 우승 테이프를 끊은 팀은 부산고. 현재 대한야구협회 임원으로 활동중인 김소식씨가 포수 박명렬과 배터리를 이룬 부산고는 1962년 17회 대회에서 대구상고를 제치고 첫 우승의 감격을 맛봤다. 이어 63년 부산공고, 64년 부산상고가 청룡기에서 우승하며 ‘구도(球都) 부산’의 이름을 빛냈다.1965년 동대문상고(현 청원고), 1966년 동산고에게 우승기를 내준 영남야구는 경북 팀들에 의해 다시 살아났다.서영무 감독이 사령탑을 맡았던 경북고는 임신근, 강문길, 조창수 등 화려한 멤버를 앞세워 1967년 22회 대회 결승에서 배문고를 5대2로 꺾고 1950년 대구상업 이후 17년 만에 청룡기를 대구 시민의 품에 안겼다. 경북고는 1968년에도 임신근과 강문길의 투타 활약으로 동향 대구상고를 3대0으로 제압하면서 2년 연속 정상에 등극했다. 경북고는 이후에도 1971년(26회) 1974~75년(29~30회) 등 3차례 우승을 차지했다. 또 대구상고(1970·75년) 경남고(1973·1976년) 부산고(1978~1979년) 등 영남야구의 대표주자들이 번갈아 가며 청룡기를 품에 안았다. 이 기간 동안 영남야구를 누르고 우승한 팀은 단 두 팀. 유남호·이해창·정장헌·홍창권·박준영 등이 투타에서 활약한 선린상고(1969년)와 윤몽룡·홍재진이 이끈 중앙고(1972년)였을 정도로 영남 야구의 위세는 강했다. 당시 배출된 영남야구 스타로는 김명성·임신근(이상 작고) 강문길·남우식·황규봉·천창호·김용희·성낙수·최동원·이만수·양상문 등이 있었다.
1973년 28회 대회에서 경남고 4번타자인 김용희는 첫 경기를 제외한 5경기에서 모두 안타와 타점을 기록하는 등 22타수 12안타(타율 0.545) 7타점 3도루로 팀 우승을 이끌며 최우수선수·타격상·타점상을 휩쓸었다. 선동열과 함께 역대 최고 투수로 평가받는 최동원은 1976년 31회 대회 때 경남고를 우승으로 이끌며 팀의 5승 가운데 4승을 책임졌다. 4승 모두 완투승에, 2차례가 완봉승이었다. 군산상고와의 승자 결승에서는 탈삼진 20개를 기록하면서 청룡기 한 경기 최다 탈삼진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5경기에서 뽑아낸 삼진이 56개, 방어율은 0.24. 37이닝 동안 단 2점만 내줬고, 그 중 1점도 비자책이었다. 이들에 의해 우승과는 인연이 멀었지만 이광은(배재고)김용남·김성한(이상 군산상고), 강만식·이상윤(이상 광주일고), 이길환(선린상고) 인호봉(인천고) 등이 청룡기를 통해 전국구 스타로 등장했다.배재고 이광은은 1973년 6월14일 광주상고 전에서 3이닝을 던진 뒤 15일 대건고 전에서 9이닝 무실점으로 호투했다. 하지만 0대0 무승부여서 16일 오전 서스펜디드게임을 가진 끝에 3회를 더 던져 12회 완봉승을 엮어냈다. 이광은이 펼친 ‘고난과 영광의 행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오후 곧바로 열린 승자 준결승 중앙고전에서 연장 13회를 무실점으로 버텼지만 0대0. 17일 오전 재개된 경기서 연장 20회 4점을 내주면서 0대4 패배를 당한 이광은은 역시 오후 치른 대건고와의 패자 준준결승에서 9이닝 완투로 1대0 승리를 끌어냈다. 이광은은 18일 군산상고와의 패자 준결승에서도 연장 15회 동안 2점만 내줬으나 완투패를 당했다. 5일 동안 5경기에서 59이닝 223명의 타자를 맞아 공 697개를 던졌고 32안타를 맞아 7점을 내줬다. 방어율은 1.07. 이광은은 청룡기 사상 가장 값진 감투상의 주인공이었다.
부산고 2학년으로 1977년 32회 대회에 출전한 양상문은 배문고를 상대로 9이닝 2안타 1실점으로 완투승을 엮어냈다. 광주일고와 2회전에서 맞붙은 양상문은 10회 동안 삼진 8개를 잡고, 5안타 2실점으로 호투했지만 1대2로 분패했다. 연장 10회 광주일고 에이스 이상윤에게 맞은 홈런이 결승점. 1978년 대회에 재도전한 양상문은 광주일고와의 승자결승에서 9이닝 2실점으로 3대2 승리를 이끌어 내며 1년 전 패배를 갚았다. 양상문은 경북고와의 결승에서도 선발로 나서 7이닝을 무실점으로 막는 등 5경기에서 5승을 올렸고, 41이닝 2실점으로 방어율 0.44의 괴력을 과시했다.
80년대 초반부터 고교야구는 어느 한 지역에 편중되지 않고 전국에서 고루 우승팀이 나오며 인기를 이어갔다.당시 고교야구 인기의 중심에 섰던 팀은 선린상고였다. 박노준·김건우 등 2년생 ‘원조 오빠부대’를 앞세운 선린상고는 1980년 35회 대회에서 마산상고를 5대0으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프로야구가 생기기 1년 전 열린 1981년 36회 대회 결승은 아직도 많은 야구 팬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추억의 명승부’였다. 경북고와 선린상고가 맞붙어 연장 11회까지 가는 접전 을 펼친 끝에 성준의 투구를 앞세운 경북고가 박노준·김건우가 이끄는 선린상고를 6대5로 제쳤다. 그 동안 청룡기에서 준우승 2차례에 그쳤던 군산상고는 1982년과 1984년 정상에 오르며 1980년대 청룡기를 2차례 차지한 유일한 팀으로 기록됐다. 군산상고는 1982년 37회 대회에선 천안북일고와 사상 초유의 결승 재경기를 벌인 끝에 조계현·장호익 배터리의 활약으로 처음 우승을 차지했고, 1984년 39회 대회에선 박찬홍·이광우·정명원의 활약으로 두 번째 우승을 일궈냈다. 명문으로 꼽히면서도 청룡기와 인연이 없었던 천안북일고는 1983년 38회 대회에서 한을 풀었고, 서울고(1985년 40회) 덕수상고(1986년 41회) 대전고(1987년 42회) 동대문상고(1989년 44회)가 첫 우승의 기쁨을 누렸다. 광주일고는 4회 대회에서 당시 ‘천하무적’으로 통하던 경남중을 꺾고 우승한 뒤 오랜 침묵을 지켰으나, 1988년 43회 대회에서 이종범·성영재·정영규를 앞세워 연승행진을 벌였다. 광주일고는 군산상고와의 결승에서 연장 11회말 이종범의 끝내기 2루타로 5대4 역전승을 거두며 39년 만에 대회 패권을 되찾았다.
1990년대도 군웅할거의 판세가 이어졌다. 1948년 팀을 창단한 경남상고(현 부경고)와 공주고가 1991년과 1992년 꿈에 그리던 청룡기를 품에 안았다. 공주고 노장진은 1992년 47회 대회 결승에서 선린상고를 상대로 4대0 노히트노런 피칭을 기록하며 스타로 떠올랐다. 서울의 강호 휘문고도 1907년 팀 창단 이후 87년 만인 1994년 김선우를 앞세워 처음으로 정상 등극에 성공했다. 휘문고는 1996년에도 우승을 차지하면서 1990년대의 강호로 자리매김했다. 이밖에 신일고(1997년 52회) 성남고(2000년 55회) 광주동성고(2003년 58회)가 각각 첫 우승으로 청룡기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광주일고는 서재응(뉴욕 메츠) 김병현(콜로라도 로키스) 최희섭(LA다저스) 등 메이저리그 트리오를 앞세워 1995년 50회 대회에서 세번째 정상에 섰다.
청룡기는 2006년과 2007년에는 초창기부터 대회를 빛내온 전통의 명문 경남고의 품에 안겼고, 지난해 결승전을 끝으로 ‘동대문 구장 시대’를 마감했다. 팬들은 2008년 목동 구장에서 처음 열리게 된 청룡기 우승의 영광이 과연 어느 팀에게 돌아갈지 주목하고 있다. 한국 야구와 함께 해 온 청룡기를 더욱 뜻 깊게 하는 것은 학생다운 패기와 투지, 겸손과 예절을 잃지 않았던 모든 선수들과 팀들이 최선을 다하며 빛나는 전통을 만들어왔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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