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류지(法隆寺)는 나라 공원에서 아스카로 가는 도중의 논 한가운데 있다. 근처에 약사사(藥師寺), 당초제사(唐招提寺), 법기사(法起寺) 등의 많은 가람이 있다. 절 앞에는 소나무들이 가로수를 이루고 있다. 호류지는 바로 일본 불교의 시원이고 역사 자체이기도 하다. 호류지는 이카루카(斑鳩)에 있으므로 이카루카사로 불리는데, 발견된 금당 약사불의 광배에 의하면 스이코 천황 15년인 607년에 쇼토쿠(聖德) 태자가 창건한 절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수수께끼의 왕인 덴치(天智) 9년인 670년에 화재가 일어나 건물이 소실되었다고 한다. 이해는 일본이란 국호가 처음으로 생긴 해이다.
정문 격인 남대문은 무로마치 시대인 15세기에 세워진 것이다. 양 옆으로 노란 담벼락들이 100여 m 이어지고 있다. 중문 앞 안내판에는 호류지의 전모가 그려져 있다. 서원에는 탑, 금당(金堂), 강당, 못은 물론이고, 동대문을 경계로 동원(東院)으로는 중궁사(中宮寺)와 전시실 등 부속건물들이 있다. 국보만 50여 점, 문화재가 150여 점 소장되어 있다. 1993년 12월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렇지만 이 문화재들이 모두 창건 당시의 것들은 아니다.
아스카 시대 이후 각 시대의 문화재들이 있는데 심지어는 금당이나 탑도 그 후에 재건된 것이라고 한다. 들어가면 왼쪽에는 목조 5중탑이 있다. 이중의 기단으로 넓고 커서 안정감을 주면서도 각 층의 비율이 10, 9, 8, 7, 6으로 균형을 잡으면서 5층으로 우아하게 얹혀 있다. 105척이니까 32m 높이의 기와집이 마치 날아갈 듯 날렵한 모습을 하고 있다.
오른쪽에는 그 유명한 금당이 있다. 금당은 2층 목조건물로 아래층이 크고 넓다. 첫 층이 유난히 넓고 양감을 주며 2층도 팔작지붕으로서 내려오는 선이 경사가 약간 급한 듯하면서도 네 귀가 조용히 쳐들려 있어 안정감을 준다. 더구나 기둥도 엔타시스 양식으로 되어 있어 장중한 분위기를 더한다.
호류지의 가람 배치 양식을 두고 백제계라고 한다. 1939년 백제계 기와조각이 발견되고, 670년에 소실되었다는 본래의 호류지 터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이 부여 군수리(軍守里) 절터에서 볼 수 있는 백제계 양식이었기 때문이다. 친(親)백제계인 소가(蘇我)씨가 세력을 떨쳤던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도 백제계의 영향이 적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일본서기』에는 백제로부터 와박사(瓦博士), 조사공(造寺工) 등 수많은 사원 건축 기술자들이 건너왔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금당의 벽화를 그린 사람이 고구려 승려 담징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고구려가 가야나 백제, 신라에 비해 거리가 멀고 항해조건이 나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 고구려는 정치 군사적으로 가장 강력한 나라였고, 뛰어난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중국의 수와 대결하고 있었던 당시에 고구려는 군사외교의 일환으로 동아시아 모든 나라들과 교섭을 하고 있었다. 당연히 왜와도 교섭을 갖고 있었다.
고구려는 왜국에 사신은 물론, 승려들을 보내기도 하고 왜국의 승려들을 받아 공부를 시키기도 했다. 혜자는 쇼토쿠 태자의 스승 노릇을 했고, 혜관은 승정(僧正)에 임명되기도 했다. 이들은 왜국의 정치개혁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이는 왜국 조정에 대한 고구려의 강한 영향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바로 이런 시기인 610년에 담징이 법정(法定)과 함께 와서 채색 도구와 종이, 먹 등을 전했고, 맷돌을 만들어 사용법을 알려줬다. 금당벽화는 담징으로 대표되는 고구려계 화공집단의 창작물이다. 『일본서기』 스이코 12년(604년)조에는 황서화사(黃書畵師), 산배화사(山背畵師)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황서화사는 고구려계이다. 고구려 출신 화가들은 여러 절의 불상그림을 그렸다.
호류지가 고구려와 관련이 깊은 것은 다른 사실에서도 나타난다. 호류지 안 중궁사(中宮寺)에 보관되어 있는, 쇼토쿠 태자의 부인이 극락에 있는 쇼토쿠 태자의 모습을 그린 저 유명한 ‘천수국만다라수장(天壽國曼茶羅繡帳)’의 밑그림은 고구려 출신인 고마노가세이(加西溢) 등의 화공집단이 그렸다. 쇼토쿠 태자와 혜자의 관계도 그렇고, 실제 제작도 고구려 고분벽화 양식을 본받았다. 전시관으로 옮긴 다마무시(玉蟲) 주자(廚子)는 스이코천황의 소유라고 하는데, 그곳의 밀다화 역시 고구려 화공들이 그렸다. 호류지는 백제 양식의 건축배치와 기와, 담징으로 상징되는 고구려의 영향, 그리고 신라의 영향도 받았다.
금당 안에는 불상이 몇 구 있다. 쇼토쿠 태자를 위해 주조한, 강건, 엄숙하고 절제미를 풍기는 금동석가삼존상이 있고, 금동약사여래좌상이 있으며, 후대인 가마쿠라 시대에 주조된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이 있다. 그리고 사방 벽과 천장에는 다양한 형태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담징을 포함한 고구려 창작집단의 작품으로,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보는 낯익은 그림들이다. 실물은 1947년에 불타 없어졌고, 1968년에 모사한 것만이 남아있다. 그것도 복잡한 전시구조와 어두운 실내조명 탓에 제대로 볼 수가 없다.
서원을 나서면 쇼토쿠 태자를 모신 성령원이 있고, 일종의 창고 격인 봉강장이 정창원과 비슷한 형태로 서 있으며, 몇 년 전에 새로 만든 백제관음입상을 모시기 위해 건립한 전시관 건물이 있다.
이곳에는 아스카·나라 시대의 불상 기와 그림 등 다양한 명품들이 전시되어 있지만 가장 큰 감동을 주는 전시물은 무엇보다도 백제관음입상이다. 처음에는 금당 안에 모셔져 있었으나 다시 대보장전으로 옮겨졌다가, 이제는 새로 만든 건물 안에 다른 유물들과 함께 자리하고 있다.
이 관음상은 인간의 마음을 천의(天衣) 한 자락 끝에 살며시 묻히고 있는 보살의 모습이다. 2m가 넘는 훤칠하게 큰 키와 우아한 손끝으로 휘날리는 옷자락을 살며시 들고, 고개는 살포시 숙인 채 눈길은 주는 듯 마는 듯하다. 더구나 천의 자락은 금칠이 벗겨져나가 건칠(乾漆)한 몸의 곡선을 드러내면서 인간의 육체가 결코 천박하지 않음을, 마음과 몸이 다르지 않음을 법문 대신 전하고 있다. 이 입상에 왜 백제란 이름이 붙었는지는 모른다. 일본학자들은 지리(止利) 계통과는 달리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냐고 하지만, 백제계인 것은 논할 필요조차 없다.
서원을 넘어 동원으로 들어서면 마치 막 피어나는 연꽃 봉우리 같기도하고, 반짝거리는 별무더기 같기도 한 몽전(夢殿)이 있다. 쇼토쿠 태자의 덕을 기릴 목적으로 739년에 건립한 상궁 왕원의 중심으로 세워진 것이다. 이 안에 비불(秘佛)인 구세관음(救世觀音)이 안치되어 있는데, 공개하지는 않는다. 쇼토쿠 태자의 실물 크기라는 설도 있지만, 백제의 성왕이라는 설도 있다.
왜가 도다이지(東大寺)를 창건한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한민족과 완전히 결별하고, 동아시아 신질서에 진입했다는 것을 선언하기 위한 것이었다. 663년 백제의 광복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백제 유민들은 일본 열도로 밀려들었다. 이들은 곳곳에 방어체제를 구축하면서도 열도의 기존 세력들과 힘을 합쳐 일본국가 건설에 매진했다. 그 후 몇 년 지나지 않아 고구려 유민들도 밀려들었다. 670년 일본(日本)이란 새 국호가 선언되고 국가가 탄생했다. 그러나 국가체체의 정비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8세기 들어 일본 열도는 율령체제가 성립되고 천황제가 확립됐다. 하지만 지배계급 내부에서 중앙의 후지와라 씨(藤原氏)와 다른 우지(氏)들 간의 투쟁이 격화되어 반란이 일어났다. 당시 동북지방은 아직 개척이 진행 중이었으며 그 외에도 각 세력이 지방에 흩어져서 독자적인 권한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방 세력들의 반발을 무마해야 했다. 더구나 백제, 고구려 유민들의 집단 이주로 중앙지배는 뜻대로 되지 않았다. 도쿄 지방은 한반도계 진출자들에 의해 개척이 되었다. 『속일본기』 영구(靈龜) 2년 (716년)조에 의하면 스루가(駿河), 가이(甲裴), 사가미(相模), 가즈사(狀總), 시모우사(下總), 히다치 (常陸), 시모쓰케(下野)의 고려인 1799명을 무사시국(武藏國)에 옮기게 하고 고마군을 설치하였으며 약광왕(若光王)을 그 군의 대령(大領)으로 삼았다고 한다.
친 데 덮친 격으로, 흉작이 거듭되고 질병이 창궐했다. 위기에 처한 신흥국가인 일본 조정은 국가적으로 민심을 수습해야 했고, 왕실의 존엄성도 높여야 했다. 특히 적대관계인 신라에는 국력을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일본의 신흥세력들은 일련의 새로운 정책들을 추진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지금껏 고대 한일관계사 해석에 문제를 일으키는 『고사기』(712년), 『일본서기』(720년) 같은 역사책을 편찬하는 일이었다. 당시 편찬 작업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이 오오노야스마로(太安萬侶)를 비롯한 백제 유민들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가 이데올로기의 통일, 지방세력의 약화 등을 목적으로 도다이지(東大寺) 같은 군분사(國分寺)를 전국에 창건하는 일이다.
쇼무(聖武)천황은 741년 ‘국가진호’란 이름 아래 지배체제의 강화와 사상의 통일을 위해 전국의 국마다 국분사(金光明四天王護國寺)와 국분니사(法華滅罪寺)를 건축하였고, 도다이지는 천황가의 우지테라(氏寺)로서 국분사의 총본산이었다.
도다이지 창건의 대역사를 추진하고 완성시키는 데는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의 힘이 절대적이었다. 도다이지와 대불 주조의 발원, 설계와 제작을 지휘한 양변(良弁) 스님은 근강(近江) 지방에 정착한 백제계 씨족의 후손이었다. 승려인 고키(行基)는 왕인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는데, 일본 민중신앙의 창시자이다. 처음엔 절 건설에 반대했으나 태도를 바꿔 적극적으로 나섰다. 후에 대승정의 자리에 올랐다. 이분의 목상은 대불전 문 바로 옆에 있다. 교토의 우지인 하타노초겐(秦朝元)이 도움을 주었고, 공사 책임자인 구니나카노키미마로(國中公麻呂)는 550명의 기술자를 거느리고 일을 추진했는데, 그는 바로 망명한 백제 귀족인 국골부(國骨富)의 손자였다. 뿐만 아니라 비로자나불인 대불 주조에 사용된 구리는 708년에 신라계인 김상원이 발견한 것이다. 또 경비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인 749년에 황금 900냥을 바쳐 일을 마무리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사람이 바로 백제 왕족인 경복(敬福)이었다. 이 사업에는 7년의 세월과 국비의 1/5이라는 막대한 돈, 연 220 만의 노동력이 투입됐다. 현재 높이 52m의 대불전과 14.8m의 대불이 있는데, 이는 건축 당시의 것보다 축소되어 다시 만들어진 것이다.
도다이지와 대불의 완성은 신흥 일본국의 탄생을 대내외에 알리는 의미 깊은 사업이었다. 신라는 이 기회를 이용해 700명에 달하는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했고, 발해 역시 3척의 배와 함께 사신을 파견했다. 그 바로 1 년 전에 신라에서 석굴암이 조영된 것은 이 사업들이 당시 동아시아 질서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려준다. 이후 일본은 비로소 국가의 체제를 갖추고, 고유의 문화를 발전시키면서 독자적으로 성장하게 된다.
나라 시대는, 한반도와 깊은 관련을 맺으며 성장 발전한 고대국가가 그 특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점차 일본화되어가는 시기였다. 그러나 헤이안 시대에 들어오면서 일본은 비로소 한반도에 대한 종속적인 관계에서 탈피해 하나의 국가와 민족으로서 자기 문화를 갖게 되었다.
남대문 안으로 들어가니 금강역사상이 나타난다. 현존하는 일본 최대의 목조인왕상인데 국보답게 예술성이 뛰어나다. 나약하고 소심해진 현대 일본인들에게 강한 근육과 사나운 표정이 생동감 넘치게 표현되어 있는 인왕상은 인기가 있을 법 하다.
문 양 옆에 몸을 일으킨 채 출입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고마이누가 있다. 고마이누는 우리로 말하면 돌사자 혹은 해태의 역할을 한다. 어느 나라에든 신성한 장소 앞에는 다 있다. ‘고마’란 신을 나타내는 ‘감 ’‘검’ ‘금’ ‘개마’ 등과 함께 알타이어다. 백두산 옆의 개마고원이나 백두산의 또 다른 이름인 개마대산도 다 신성한 산이라는 의미이다. 백제의 수도였던 웅진도 고마나루인데, 이는 신성한 나루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고마이누(犬)는 신견(神犬)이라는 의미이다. 일본 열도에서 백제는 ‘구다라’, 신라는 ‘시라기’, 그리고 고구려는 ‘고마’라고 불렀다. 일본의 신사에는 도리 옆에 반드시 고마이누가 쌍으로 서 있는데, 이곳의 고마이누는 거의 개와 유사한 모습이다.
동서 57m, 높이 47.5m. 세계에서 제일 큰 단일 목조건물이다. 그래도 752년 처음 건축했을 때의 3분의 1 규모밖에 되지 않는다. 길게 뻗은 용마루 끝에서 2m가 넘는 황금치미(雉尾)가 햇살에 샛노란 금빛을 튕기고 있다. 경주 안압지(雁鴨池)의 신라 것보다는 크고, 고구려의 평양성 안학궁(安鶴宮) 터에서 발견된 치미보다는 작을 듯하다. 내부에 안치한 청동대불은 에도 시대에 다시 주조된 것인데 무게가 425t이고 높이가 15m에 달한다. 이것도 처음에는 16.9m에 달했다고 한다.
춘일신사(春日神社)의 총본산이다. 춘일신사는 8세기 도다이지를 창건할 때 큰 공을 세운 후지와라(藤原) 가문을 모신 신사이다.
후지와라 가문은 신흥귀족인데 그 성분에 대해서는 백제계다 혹은 신라계다 말이 있지만 한반도계인 것은 틀림없다. 일본이 생길 무렵, 삼국 통일전쟁이 일어날 때를 전후해 현해탄을 건너온 가문이다. 이들은 천황가의 외척이 되어 정치실권을 장악해 내내 귀족정치를 이끌어 나간다. 바로 이 유명한 후지와라 가문이 우지가미(氏神)로 모신 동물이 사슴이다.
도다이지(東大寺)의 대불전을 보고 나와 오른쪽으로 돌아 언덕을 올라간다. 이월당, 삼월당이라고 쓴 흰 팻말이 계단의 좌우 언저리에 불규칙하게 붙어 있다. 이월당, 삼월당을 왼쪽으로 보고 지나면 묵직하고 정중하며, 포만감에 그득 찬 자태로 두 채의 건물이 서있다.
원두막처럼 흙바닥에 여러 개의 다리를 뻗고, 텅 빈 공간 위에 통나무가 아귀를 꼭 맞춘 채 층층이 쌓인 귀틀집 모양의 창고이다. 그러니까 일종의 고상식(高床式) 창고이다. 하나는 장방형, 또 다른 하나는 정방형이다. 성보전이란 이름답게 도다이지의 역사를 담고 있어 흰색 고베이몬으로 만든 봉인을 뜯으면 숨겨진 역사가 판도라의 상자처럼 튀어나올 것만 같다.
이 건물은 이곳에 있기 이전에 이미 고구려에 있었다. 수도였던 집안(集安)의 서쪽 교외로 나가면 압록강 물소리가 들리는 마선구(痲線溝) 지역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분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한 고분(1호분)의 벽화에 이 창고(雙倉形)가 그려져 있다. 덕흥리 벽화에도 유사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만주의 한겨울을 나야했던 고구려인들에게는 식량과 의복 그리고 귀중한 물건들을 보관하는 창고가 매우 중요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고구려에는 “이 나라에는 큰 창고는 없고 집집마다 조그만 창고가 있는데, 이름을 부경(?京)이라고 한다”고 했다. 부는 뗏목을 의미하고, 경은 창고를 말한다. 그러니까 뗏목처럼 통나무를 엮어 만든 창고를 말하는 것이다. 물론 지금도 옛 고구려지역이나 발해지역을 달리다 보면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길가나 옥수수가 무성하게 자란 기찻길 옆에서 이러한 모습의 부경들을 볼 수 있다. 내가 보기에는 많이 사라져가고 있지만, 그래도 농촌에는 집집마다 한두 개씩은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도다이지 뒤편 언덕 위의 성보전은 바로 고구려 부경의 원형인 셈이다. 일본 열도의 곳곳에는 ‘고마계’의 문화가 숨겨져 있는데, 이는 대체로 고구려나 발해와 관련된 것이다. 교토 외곽의 가쓰라강이 흐르는 야마시로(山城國)에는 매우 큰 규모의 고려사가 있다. 또 오사카의 바다 가까운 곳에는 고구려 사신들을 맞이하는 고려관도 있었다. 아스카 지역의 다카마쓰(高松)총 외에, 근래에는 기토라 고분 등에서 고구려 고분벽화가 발견되고 있다. 오늘날의 도쿄 지방도 8세기 초 고구려 유민들이 개척한 지역이다.
그런데 이러한 부경 양식의 건물은 다른 곳에도 있다. 바로 대불전 뒤편에 있는 정창원(正倉院) 건물이다. 일 년에 봄 가을 두 차례만 공개하기 때문에 늘 가도 겉모습만 보고 돌아오기 일쑤다. 8세기경에 지어진 건물로 알려져 있는데, 이곳에는 동아시아 여러 나라들, 특히 삼국과 통일신라, 발해의 유물들이 보관돼 있다. 신라인들이 만들고, 장보고의 배에 실려왔던 각종 물품들도 있지만, 발해인들이 수출한 질 좋은 가죽들도 많다. 그러니까 이곳은 지금껏 일본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귀한 물건만 보관한 그야말로 국가창고이다.
그렇다면 부경 양식은 비단 고구려 것만이 아니라 백제, 신라 등 우리 문화에서 즐겨 사용했던 건축양식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일본인들 가운데는 고분에서 발견된 오경(吳鏡)이나 칼(大刀)의 손잡이에 새겨진 고상식 주거와 비교해 이 양식이 중국 강남지역에서 건너왔다는 주장을 펴는 사람들도 있다. 호류지에도 이런 부경과 닮은 건물이 있다. 경내로 들어와 금당을 둘러보고 높이 솟구친 몇 그루의 소나무 곁을 지나 옆문을 나서 쇼토쿠 태자를 모신 성령전(聖靈殿)을 지나면 강봉장(綱封藏)이 있다. 비교적 크고 몸은 흰 회벽으로 되어 있어 귀틀집은 아니지만 고상식 형태이다. 후대에 만들어진 탓에 이런 모습이지만 역시 부경의 영향이 잔영을 길게 드리우고 있다. 또 규슈 중부의 미야자키현 산골에는 백제의 왕족으로 추정되는 정가왕(禎嘉王) 일행이 개척했던 백제촌(南鄕村)이 있다. 10여 년 전부터 알려지기 시작했고, 부여와 자매결연을 맺기도 했는데, 근래에 이런 정창원 양식으로 새로 건물을 지었다. 그만큼 부경 양식은 일본 고대문화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고류지(廣隆寺)의 미륵보살반가사유상(彌勒菩薩半跏思惟像)은 삼국 통일의 원동력이 된 화랑도와 연결되어 미륵신앙이 성행한 신라의 양식으로 알려져 있다. 그 형태나 작품으로 보아 신라의 반가사유상(경주 五陵 부근 출토품인 국보 83호)과 비슷한데, 이곳 사전(寺傳)에는 한반도에서 도래한 것이라는 기록이 있다 한다. 이 기록을 둘러싸고 논란이 많다가 근년에 이 사유상의 재료가 적송(赤松)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아스카(6~7세기)와 핫코오(7세기 중엽~말기)의 목상은 모두 녹나무를 사용했는데 이 사유상만이 유일하게 적송인 것이다. 적송은 한반도의 춘양, 부안 등에서만 자라는 나무이기 때문에 신라에서 건너온 것이 밝혀진 셈이다.
영보전(靈寶殿) 안으로 들어가면 사바세계와는 전혀 다른 시공이다. 고요하고 은은한, 그러면서도 신선한 공기가 공간을 가득 채우며 영겁(永劫)의 세월을 간직하고 있다. 흙빛이 도는, 결코 밝지 않은 분위기는 세진(世塵)을 채 떨구지 못하고 들어온 중생의 몸뚱이를 자비로 감싸준다.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국보 83호)은 한쪽 다리를 걸치고 앉아 한 손을 들어 슬쩍 얼굴을 받치며 웃음을 띠고 있다. 미(美)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며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것인지 알려준다. 움직임이 없는 가운데서의 움직임이 얼마나 성스럽고 힘찬 것인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한다. 인간은 자신 속에 무한한 아름다움과 성스러움을 갖고 있으며, 그것을 구현할 능력이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해준다. 인간 속에 있는 모든 가능성을 하나로 조화시켜 빚어내는 저 아름다움. 종교란 미의 극치인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이 사유상을 가리켜 ‘동양의 모나리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류지의 반가사유상과 신라의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여러 가지 면에서 닮았다. 하지만 풍기는 멋이나 형태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사용한 재료에 따라 표현 양식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 금동상은 주조한 것이고, 목조는 마음대로 깎고 다듬을 수 있는 특징이 있다.
이곳 고류지의 보살은 적송에다가 칠박(漆箔)을 덧붙인 것으로, 흙빛 나는 몸은 퇴색한 금빛보다 친근감이 들고 정이 흐르는 성스러움이 있다. 콧마루는 금동상이 중간에서 약간 솟아오르면서 활 같은 곡선을 이루는 데 반해, 목조는 곧게 뻗어 내렸다. 입술이 얇고 활처럼 굽으면서 위로 향하는 느낌을 주는 금동상에 비해, 목조는 도톰하고 약간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또 얼굴은 전체적으로 금동상의 외형이 섬세한 느낌을 주는 반면, 목조는 곡선형으로 비교적 풍만하고 원만한 느낌을 준다. 목조는 턱도 역시 넉넉하게 여유가 있으며 볼은 자세히 보면 나뭇결이 드러나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이 전체적으로 리듬을 느끼게 하는 것 같다. 그 외 손가락의 모양이나 손목의 굽은 정도, 목의 삼도(三道)나 하반신에 걸친 천의(天衣)의 주름 등에서도 약간의 차이를 갖고 있다.
이 반가사유상의 좌측으로는 십이 신장상(神將像)이 나란히 제각기 개성 있는 모습으로 서 있다. 이 목조상들은 후지와라 시대(藤原時代, 1064년)의 작품들이다. 목조만이 가질 수 있는 정교함, 다양하고 자유로운 풍경이 헤이안 시대 후기, 즉 후지와라라는 시대적 배경에 힘입어 화려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졌다. 이것은 반가사유상 정면에 위치한 천수관음좌상(千手觀音坐像)을 보면 더욱 잘 알 수가 있다. 글자 그대로 천 개의 손이 뻗어 나와 제각기 한 손에 한 가지씩 상징적인 물건을 들고 있는데 이것을 한몸에 안고 있는 관음상은 일본미술이 화려하고 정교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분명히 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