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이래로 한국에서 맺은 나의 인연과 경험
Meine Begegnungen und Erfahrungen in Korea seit 1975
1. 민중신학과의 교류
1975년 3월 나는 처음으로 한국에 발을 디뎠다. 세계개혁교회연합에서 알게 된 박봉랑 박사가 나를 한국에 초청했던 것이다. 한국에서의 나의 첫 강연은 한국신학대(현재의 한신대)에서 “민족의 투쟁 속에서의 희망”에 대한 강연이었다. 이 강연은 정치신학의 하나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이에 내가 당시 이러한 위험한 테마와 함께 한국의 국가보안기관에 의해 감시를 당했던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연세대에서 나는 서남동 박사를 알게 되었고, 한국신학대에서 안병무 박사는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막 풀려난 그의 제자들과 함께 나를 맞이하였다. 이를 통해 나는 한국의 민중신학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내가 소유한 한 사진 속에서는 내 옆에 앉아있던 한 불행해 보이는 남자를 볼 수 있다. 그는 북한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스파이 노릇을 했다는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는데, 재판정에서 당시 막 번역된 나의『희망의 신학』(Theologie der Hofffnung, 1964)을 인용했다고 한다. 이후 그는 다행스럽게도 사면되었고 오늘날 일본에 거주하고 있다.
1975년 5월 네 명의 신학자들을 위시하여 열한 명의 교수들이 무기한으로 풀려났다. 후일 대통령이 된 김대중과 또한 내가 2년 전 프랑크푸르트(Frankfurt)에서 만났던 시인 김지하는 당시 사형수로서 독방에 수감되었다. 이리하여 나는 한국을 처음에는 군사독재 치하에서 농부들과 노동자들이 가혹하게 착취당하는 제3세계로서 알게 되었는데, 특히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고난당하는 자국민 안에서 착취와 억압에 항거한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나는 한국이라는 나라와 한국 민족을 사랑하게 되었다.
1984년 나는 독일에서 『한국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의 민중-신학』(Minjung-Theologie des Volkes Gottes in Korea)이라는 저서를 새로운 민중신학의 텍스트와 기도문, 찬양과 함께 출간하였다. 나의 제자 볼프강 크료거(W. Kröger)는 장기간 한국에 체류했고 『민중의 해방. 에큐메니컬적 전망 속에서 아시아를 위한 개신교 해방신학의 프로필』(Die Befreiung des Minjung. Das Profil einer protestantischen Befreiungstheologie für Asien in ökumenischer Perspektive)이라는 저서를 저술하였다. 안타깝게도 그는 2년 전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30년 전 안병무 박사는 이미 이 세상에 잘 알려진 갈릴리 공동체, 곧 노동자들과 비판적 지식인들로 구성된 공동체를 창설했는데, 이 공동체는 한국의 비밀 정보기관에 의해 기습을 당하였다. 이 일로 인해 안병무 교수는 재판을 받게 되었고 2년 동안 감옥에 투옥되었다. 우리는 독일에서 한국에 있는 저항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운명에 대단한 관심을 갖고 참여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에게 나치 독재 치하의 고백교회 시절과 디트리히 본훼퍼(D. Bonhoeffer)의 능동적 저항의 길을 회상케 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은 고도의 기술을 지닌 선진 산업국가로 발돋음 했는데, 현대와 삼성은 세계 도처에 널리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억압과 저항의 시대를 결코 잊어선 안 될 것이다.
신약성서 안에서 해석학적인 발견은 새로운 공동체 운동과 새로운 신학을 전개하도록 동기부여하였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 Luther)는 로마서 3:28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발견함으로써, 종교개혁을 감행하였다. 안병무 박사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의 수학과정에서 가난한 민중 - 희랍어로 오클로스(ochlos) - 이 주는 복음에 대한 의미를 발견함으로써, 한국의 신학과 교회 안에서 민중-운동을 일으켰다. 이것은 대단한 인정을 받았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마가복음에 등장하는 ‘민중’에 대해 결코 한 번도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단지 예수와 그의 사역에만 주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병무 박사는 예수와 가난한 민중 사이에 언제나 특별한 상호 관련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여주었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민중과 자신을 동일시하셨고, 그들은 예수의 ‘가족’이 되었다. 예수는 민중을 가르치셨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으며,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으며, 그들을 위해 십자가 죽음을 당하셨다. 그는 민중을 대리하셨고, 민중은 예수를 대리하였다. 마가복음서에서 예수는 결코 고독한 개체로서 묘사되지 않으시고, 오히려 가난한 민중의 형제로서 나타나신다. 안병무 박사는 예수와 함께, 민중과 함께 동일한 현실성을 표현한다고 생각하였다. 예수께서는 민중을 위해 죽임을 당하셨고, 민중은 예수를 위해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민중신학 안에서 예수는 황금 면류관을 쓴 교회의 그리스도가 아니고, 오히려 고난당하는 민중의 형제이신데, 이는 그가 자신의 육체 안에서 몸소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이다. 민중-그리스도론은 서구 전통신학이 배타적으로 견지하는 대리의 그리스도론(Stellvertretungschristologie)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고난을 짊어지고 우리의 아픔을 나누시는 하나님의 형제들을 포괄하는 연대의 그리스도론(Solidaritätschristologie)이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고 사람의 아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이러한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 속에서 나는 1972년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Der gekreuzigte Gott) 이래로 한국의 민중신학과 전적으로 연합하였다.
그렇지만 하나의 질문이 아직도 답변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안병무 박사는 민중이 이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그의 고난을 통해 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즉 민중이 당하는 고난과 굴욕은 이 세상을 구원하는 고난이라는 것이다. 나는 안병무 박사의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숨이 멎는 것 같은 당혹감에 사로잡혔다. 당시 나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 만약 민중이 이 세상을 구원한다면, 누가 민중을 구원할 것인가? 민중은 고난을 당하려 하기보다, 오히려 그의 고난을 극복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신학자는 민중의 고난을 종교적으로 그다지 잘 해석할 수 없으며, 이를 통해 고난을 영속화할 수 있다. 가난하고 굴욕을 당하는 민중 가운데 현존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민중을 위로하시는데, 이는 그가 부활을 위해 정의로운 삶과 자유로 이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는 곳에 그의 백성인 민중이 현존한다는 사실은 옳다. 계시된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는 우리를 이 세상 안으로 보내신다. 누구든지 너희의 말을 듣는 사람은 나(그리스도)의 말을 듣는 것이다. 숨어계신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가난한 사람과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신다. 누구든지 그들을 찾아 돌보는 사람은 나(그리스도)를 찾아 돌아보는 것이다.
2. 1984년 한국 개신교 전래 백주년: 교회 분열에 대한 상념
1984년 나는 한국의 개신교 전래 백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에 한국 개신교를 에큐메니컬으로 연합하기 위한 강연에 주강사로 강연해 달라는 명예스러운 초청을 받았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교회협/KNCC)에 소속되지 않은 보수적인 교회들은 백주년 기념강연을 위해 캘리포니아에 주재한 풀러 신학대학원(Fuller Theological Seminary)의 맥가브란(D. McGavran) 교수를 초청하였다. 1984년 9월 나는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총회에 앞서 강연을 시작하였다. 한국기독교장로회가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교회로서 간주되었기 때문에 나는 독일의 나치 독재치하에서 저항했던 고백교회의 순교에 대해, 신앙의 순교자 파울 슈나이더(P. Scheinder) 목사에 대해, 정의의 순교자 디트리히 본훼퍼(D. Bonhoeffer)에 대해 그리고 이름 없는 백성들의 순교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나는 이 주제를 그리스도론에 대해 다룬 나의 저서 『예수 그리스도의 길』(Der Weg Jesu Christi, 1989)의 284-304쪽에 수록하였다.
백주년 기념강연 후 나는 크리스천 아카데미(현재의 대화 아카데미)에서 협의회를 가졌다. 여기서 나는 화해에 대해 말했는데, 안타깝게도 안병무 박사와 그의 그룹들을 다른 편에 서 있는 보수적인 근본주의자들과 화해시키는 일을 성사시키지는 못하였다. 이튿날 나는 많은 대학과 신학대학원에서 강연한 후, 영락교회에서 나의 한국방문을 마무리하는 설교를 하였다. 당시 나는 아직 젊었기 때문에 한국방문에 연이어 대만을 방문하여 타이페이와 타이난에 있는 장로교 신학대학원에서 강연하였다.
나는 이번에 한국 개신교의 기념비적인 행사에 참여하면서 다양한 한국 개신교의 모습, 이를테면 정치적으로 의식적인 교회로부터 비정치적인 교회에 이르기까지, 근본주의적인 교회로부터 현대적인 교회에 이르기까지, 장로교회로부터 감리교회와 성결교회를 넘어 오순절 교회에 이르기까지 몸소 체험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내게 개인적으로 중요했던 것은 신앙과 정치적 책임, 기도와 불의에 대한 저항을 행하면서 헌신하는 그리스도인들과의 만남이었다. 이들은 도래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구현하기 위해 개인적 신앙과 사회적 책임, 하나님을 향한 기도와 불의에 대한 저항 속에서 교파적 신앙고백과 에큐메니컬적 연합을 기존의 흑백논리적인 양자택일이 아닌 상호 불가분리의 관계성 속에서 서로 통합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그 당시 나는 한국에서 엄청난 규모와 속도로 두각을 나타내며 성장하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발견하였다.
그렇지만 나는 근본주의자들이 지닌 지나친 교파주의의 한계와 아울러 한국에 있는 그리스도 백성의 분열을 목도하기도 하였다. 이를 바라보면서 나는 마음이 무척 아팠다. 이러한 교회 분열은 한국 개신교에 있어서 결코 명예로운 일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의 수치이다. 물론 교회의 연합이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놓여 있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진리는 교회를 연합시키지, 결코 교회를 분리시키지 않는다. 성서해석에 있어서, 교리에 있어서, 윤리와 정치에 있어서 우리가 가진 차이점은 우리 모두와 우리의 공동체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과 연합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포기할 때 진정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3. 여의도 순복음 교회의 조용기 목사와의 만남
내가 1975년 처음으로 한국에 왔을 때, 저항운동을 하던 신학자들은 나에게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목사가 개최한 복음성회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오순절 교회가 그를 한국에 초청했던 것이다. 자신의 자녀가 감옥에 투옥된 어머니들은 목사들과 함께 빌리 그래함 목사에게 공식석상에서 독재치하에서 감옥에 갇힌 이들과 죄수들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한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빌리 그래함 목사는 자신의 비정치적 복음성회가 위협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를 거절하였다. 당시 나는 ‘오순절 교회가 독재정권과 타협할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의구심을 가졌는데, 왜냐하면 오순절 교회는 내세에서의 개인의 영혼구원만을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장로교회에 소속된 근본주의자들은 영혼구원만을 중요시하는 면에서 오순절 교회 성도들보다 더 낫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1995년 당시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총회장이었던 나의 제자 박종화 목사가 조용기 목사와 함께 하는 조찬모임에 나를 데려갔다. 우리의 대화는 아침 7시에 시작되어 10시에 끝났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끌린바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상호 간에 깊은 유대감을 발견하였다. 그러고 나서 나는 조용기 목사의 교회와 선교단체로부터 강연요청을 받았다. 그리하여 나는 여의도 순복음 교회의 10시 수요예배에서 많은 성도들에게 설교하였다.
2000년 조용기 목사는 나를 여의도 순복음 교회 부설 ‘국제신학 연구소’로 초청하였다. 나는 “성령과 교회”에 관한 주제로 강연했고, 한신대의 교수들과 함께 하는 자리에서 조용기 목사와 오랜 대화를 나누었다. 조용기 목사는 나에게 요청하였다. 자신의 교회에서 금요 철야예배 때 설교해 줄 것을 나는 감동적이고 신앙을 일깨우는 설교를 하고자 노력했지만, 이는 뜻대로 잘 되지 않았다. 이튿날 나는 장로회 신학대에서 처음으로 ‘개교기념일’을 위한 강연을 했는데, 여기서 나는 좀 더 편안함을 느끼는 가운데 내 생각을 자유롭게 토로할 수 있었다.
이후 2004년 조용기 목사는 ‘국제신학 연구소’가 주관하는 희망의 신학에 관한 심포지엄에 나를 초대하였다. 그는 나에게 자신의 교회가 설립된 역사적 내력에 대해 말하면서 ‘순복음의 7대 신학적 기초’를 설명하였다. 나는 이에 대해 들으면서 그 안에서 매우 강한 십자가 신학과 상당히 고무적인 오순절 신학을 발견하였다. 하지만 그리스도 부활의 신학은 십자가 신학만큼 그렇게 정교하게 발전되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희망의 축복’을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빛 속으로 제시하였다.
이듬해 새해 나는 조용기 목사로부터 기억에 남을 만한 매우 뜻 깊은 새해 안부인사를 받았다. 조용기 목사는 나
에게 자신의 교회가 2005년을 ‘적극적인 사회구원의 해’로 정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는 자신이 그동안 영혼의 구원만을 선포했으며 사회의 구원과 자연의 구원에 대해 등한히 했다는 사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새로운 한해의 시작에 나는 하나님께 어떠한 일에 대해 깊은 회개를 했습니다. 이는 내가 나의 조국의 정치에 대해 충분히 기도하지 않은 일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신학에 대해 편협하게 해석하였습니다. 나는 사회적 불의를 도외시했고 자연의 대재난에 대해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조용기 목사는 다음의 말로 끝을 맺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인간을 지향하는 순복음의 공동체였지만, 이제 우리 주님 그리스도와 함께 이 세상을 포용하는 순복음이 되고자 합니다.” 나는 조용기 목사의 인간성에 대단한 존경심을 갖게 되었고, 매우 기쁜 마음으로 그와 맺은 새로운 신학적 사귐에 대해 ‘순복음가족신문’에 다음과 같은 글로 화답하였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전체 피조물을 구원하기 위해 이들을 포괄하십니다.” 이것은 여의도 순복음 교회 안에서 경이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4. 정치적 통일을 넘어서
독일과 한국의 처지가 매우 유사하던 시절이 있었다. 즉 양국은 모두 동병상련의 아픔을 지닌 분단된 국가였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이후 승전국에 의해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되었고, 한국은 6.25 한국전쟁 이후 남한과 북한으로 분단되었다. 이에 양국의 국민들 사이에는 많은 공감대가 존재하였다. 그러나 차이점도 존재했는데, 이는 곧 전범국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 죄과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나누어진 데 반해, 한국은 한국전쟁에 대해 전혀 무죄함에도 불구하고 분단되었다는 사실이다. 한편으로 사회주의 진영과 다른 한편으론 자본주의 진영 사이에서, ‘소비에트 연방’과 ‘자유세계’ 사이에서 서로 군사적으로 대치하는 최전선은 우리 독일과 한국의 국가와 국민을 관통하였다. 그리하여 세계 어느 곳에서도 독일과 한국보다 더 군사적 위협의 가능성이 상존하는 지역은 없었다. 우리는 늘 군사적 위협을 받으면서 위험 속에서 삶을 영위하였다. 만약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면, 이는 분단된 독일과 분단된 한국에서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그토록 우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미하일 고르바초프(M. Gorbatschow)가 사회주의 국가의 재건을 위해 추진한 개혁정책, 곧 페레스트로이카(Peristroika)와 글라스노스트(Glasnost)를 통해 소련연방은 몰락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동ㆍ서로 나뉘었던 독일은 분단으로부터 놓여남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1989년 평화적인 개혁을 통해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다. 이제 유럽은 기존의 사회주의자본주의 이데올로기 냉전체체가 아닌 새로운 질서로 재편성되었다.
그런데 매우 유감스럽게도 1989년 한국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중국이 시장경제를 개방하고 경제적 열강으로 급성장할 때에도, 북한은 전혀 변화되지 않았다. 이와는 정반대로 북한은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는데, 이는 비생산적으로 널리 알려진 군대가 국가의 모든 재정과 자원을 탕진하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의 한국 친구들은 한탄하면서 독일의 통일을 무척 부러워하였다. 이는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가난한 동독으로부터 부유한 산업국가 서독으로 이주하는 엄청난 수효의 난민들 -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2백만이 넘는 - 을 경험하면서 사회주의 체제를 흡수한 독일의 통일이 최근에 이르기까지 경제적으로 대단히 큰 부담을 짊어진 통일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목도하면서 우리의 한국 친구들은 통일에 대해 보다 심사숙고하게 되었다. 갑작스런 북한의 체제 전복은 남한으로 하여금 그의 경제적 급성장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과중한 부담이 될 것이다. 만약 수백만에 달하는 북한의 난민들이 남한으로 마치 폭풍우처럼 몰려든다면, 과연 어떠한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인가? 그러므로 남한과 북한이 서서히 가까워지도록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보다 현실적일 것이다.
지난해에 한국에서 일련의 실천신학 교수들이 독일을 방문하여 우리와 함께 ‘사회적 통합의 관점에서 본 통일’에 대해 토론하였다. 정치적 통일은 빨리 이루어질 수 있지만, 문화적ㆍ사회적 통일은 한 세대, 곧 40년이 넘는 세월이 걸린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독일에서 몸소 겪은 체험에 근거한다. 문화적ㆍ사회적 통일의 과정에서 두 단체가 특별히 중요하다. 이는 곧 가족과 기독교 공동체인데, 왜냐하면 이들은 개체로 뿔뿔이 흩어진 개인들에게 사회적 고향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독재와 계획경제로부터 모든 이들이 노동시장에서, 삶에 대한 준비에 있어서 모든 일을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하는 국가체제로 이행함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특히 모든 것을 결정하고 지배하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50년 이상 살아온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는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자유는 대단히 소중하고 경이로운 것이지만, 모든 것을 스스로 자기가 결정하고 책임지며 살아가는 삶이 언제나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체제의 이행과정에 있어서 기독교 신앙과 기독교 공동체가 감당해야 할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과 기독교 공동체는 불확실함 속에서 인간과 사회가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의 국민들이 통일과 함께 자유와 사회적 정의 속에서의 공동체를 실현하게 되기를 소망한다.
독일 사람들은 헤어질 때 다시 만납시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마도 제 평생에 한국을 또 다시 방문하지 못할 것 같기 때문에,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경험했던 모든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한국의 교회와 성도들을 지켜주시고 축복하시길 기도합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