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나, 김수임
[작가] 정복근
[연출] 한태숙
1997.4.29 - 1997.6.8
동숭아트센터
등장인물
1. [김수임] (30세에서 1950년 현재의 39세까지) 실존인물
2. [이강국] (30세에서 1946년 현재 40세 까지) 실존인물
3. [모윤숙] (40세에서 43세까지) 실존인물
4. [양계선] (당시 43세) 가상인물
5. [최만용] (당시 36세) 실존인물
6. [검사] (43세) 가상인물
7. [변호사] (50세) 가상인물
8. [김종현] (47세) 가상인물
외에 헌병 몇 명이 필요하나 김종현등이 겸할 수 있다.
시일
현실적으로는 두달 사이
장소
김수임의집 두군데와 모윤숙의 집등 여기저기
때
현실적으로는 1950년 4월부터 6월사이, 과거속에서는 1946년 9월
무대
무대는 이층을 포함하여 세군데의 주택을 상상할 수 있는 구조였으면 한다. 사건이 진행되는 김수임의 옥인동 집을 중심으로 과거의 공덕동 한옥, 모윤숙의 회현동집 일부 그리고 재판정 등이 추상적 구도로 세워졌으면 한다. 김수임의 옥인동집 거실은 구체적일 필요가 있다. 사건이 일어나던 1950년대의 집기와 가전제품, 커튼이 드리워진 거실의 한편으로는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고 반대쪽으로는 정원이 보인다. 나무들이 우거진 마당 저쪽으로는 이웃집과의 담이 보인다.
((막이오르면 어두운 무대 한쪽에 폐허를 상징하는 구조물 앞에 허탈한 모습으로 앉아있는 모윤숙이 보인다. 바람이 부는 무대 여기저기에서 폐허를 바라보는 지친 사람들의 모습이 멀리 움직이지 않는 그림자처럼 보인다. 모윤숙 바람을 피하듯 옷을 여미며 자신에게 말하듯 나직하게 말한다.))
[모윤숙] 바람이 분다. 때이른 태풍이 오늘도 갈퀴같은 손으로 비에 젖은 폐허를 헤집는다. 천지에 아직도 온전한 것이 남아 있을까? 찢기지 않은 마음이 한조각인들 남아 있을까? 1953년 7월 27일 오늘 마침내 휴전협정이 조인되고 사년에 걸친 동족상잔의 전쟁은 끝났다. (침묵 하다가) 이제와서 무슨 할말이 있겠는가? (침묵하다가) 나는 이제 내 오랜 고통의 응어리, 수임을 놓아 보내려한다. 저 광기 가득한 시절의 바람결에 갈갈이 찢기운 한 생애가 그냥 홀로 떠내려가게 하려한다. 누가 기억이나 하겠는가? 삼년전 유월 그 초여름을---
((음악과 함께 조명이 사라졌다가 이내 밝아진다.))
((1950년 4월4일 밤, 김수임의 옥인동집 거실이 보인다. 거실 한쪽으로는 옆집 담이 보인다. 커튼을 내려 거실은 침침해 보인다. 불안한 느낌의 음악이 들린다. 개짖는 소리와 함께 검은 그림자가 무대 안쪽을 지나간다 김수임 방에서 나와서 불안한듯 이층을 쳐다본다. 최만용 이층에서 내려온다))
[김수임] 거기서 뭐하니? 저 집에 가만히 숨어있지 못하구?
[최만용] 쉿 골목안에 수상한 녀석들이 있어.
[김수임] 들킨거 아냐? 낮에 옥인시장에두 형사들이 쫙 깔렸더랜다.
[최만용] (라디오를 들으며) 난리야 남로당 지도부 김삼룡과 이주하 체포 뒷얘기하구 사형수 이중업의 탈출소식뿐이야. 홀딱 뒤집혔어.
[김수임] 어떻게 하니? 들켰으면 어떻게 해?
[최만용] 여기 숨은줄은 모를거야 아직 서울에 있는줄은 모를걸?
[김수임] 이번에 가면 거기서 자리잡고 다시는 올 생각하지마라. 공산당한다구 뛰지말구 농사나짓구 점잖게 살 생각해.
[최만용] 쉿 (개짖는 소리를 듣다가) 뭐지? 잘못 봤나?
[김수임] 안되겠다. 차 빨리 보내라고 독촉해야지 (전화하려 한다)
[최만용] (전화를 뺏는다) 차가 와두 오늘은 안돼. 그렇게 빨리는 못가.
[김수임] 왜? 들키면 어떻게 할려고? 이젠 나두 겁이 나.
[최만용] 경찰놈들이 미국 헌병사령관 부인을 어떻게 잡아? 여긴 안전해. 치외법권지역이거든. 여기가 이제 우리 남로당 아지트가 될거야.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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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룡 동지하고 이주하 동지를 탈출시키면---
[김수임] 얘가 무슨 소릴하니? 어림없다. 그러다가 들키면 난---
[최만용] 걱정 마. 대한민국 경찰하구 군대의 반은 우리 프락치야.
[김수임] 안돼. 싫어. 이번이 마지막이야 대령이 알면---
[최만용] (품에서 편지를 꺼내 던져준다) 껄적치근해서 안 줄까 했더니---
[김수임] (긴장해서 본다)
[최만용] 이선생 편지야 한달전 올 때 줍디다.
[김수임] 이제와서 그사람 편지 받을 일 없다. 잊은지 오래야.
[최만용] (편지를 빼앗아 불 붙인다) 그럼 됐어. 다시는 생각도 하지 마
((김수임 외면하다가 타들어가는 편지를 집어들고 읽는다.))
[최만용] 그양반 잘못하면 숙청되겠더먼, 눈치없이 김일성장군을 비판했어
((김수임 편지를 들고 한옆으로 가서 앉아 스탠드의 불을 켜고 읽는다. 무대 안쪽에서 좌절한 모습의 이강국 천천히 거닐며 말한다.))
[이강국] 당신 소식은 풍문에 간간 들었소. 비어드 대령 하고 살림을 차렸더구먼. 소식을 들은 며칠은 참 견디기 어려웠소. 여기와서 나는 술이 늘었어. 사회주의 체제속에서의 인텔리겐차의 말로가 이런 것인가 생각할 때가 많지. 뜻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어. 나는 정말 무슨 함정에 빠진 것만 같아.
[김수임] (근심스럽게 바라본다) 왜요? 또 무슨 일이 있었군요.
[이강국] 전쟁이 일어날지도 몰라. 권력과 재물을 창출하려면 필연코 전쟁을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더군. 당신 말이 맞았어. 사상이 현실에 적용되면 얼마나 추하게 변질되는지 진작 알았어야했어. (생각하다가) 당에서는 내가 당신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강요하더군. 나는 거절했어. 이중업이 남로당 간부이기는 하지만 그사람을 위해 당신을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다고 거절했소.
[김수임] 김일성파에 몰려 궁지에 빠졌다는 말이 사실이군요.
[이강국] 후회하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쓰는지 몰를거요. 수임 우리가 과연 어떤 시대에 태어났단 말이요? 우리만큼 불행한 민족이 또 있을까? 우리는 지금 전혀 낯선 삶의 방식을 선택하도록 강요당하고 있어. 가장 옳은 방법으로 새나라를 세우자고 높게들 애썼건만--- 무엇하러 젊은 날을 그렇게 치열하게 싸웠는지 무엇하러 당신을 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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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두고 예까지 왔는지 쓰라린 생각만 드는구려. 돕지 않아도 원망하지 않을거요. 어떻게 지내고 있소? 아직도 악몽에 시달리는 거요? 보고 싶구려. 당신 웃음소리, 머리냄새, 자박자박 골목을 걸어오던 발자국 소리까지--- 잠시도 잊을수가 없소 수임
((이강국 주변의 조명 사라진다. 수임 움직이지 않는다. 갑자기 남자들의 그림자가 담장 밑으로 뛰어 지나간다. 호각소리가 들린다. 두사람 벌떡 일어난다. 호각소리와 함께 (서라) (누구냐)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김수임 일어나서 내다본다. 최만용 이층으로 숨는다. 양계선 어리둥절해서 서있는다.))
[김수임] (놀라서) 어디루 들어오는거야? 계선언니? 왜 그집 담장구멍으로 들어와? 큰길에 있는 대문으로 오지않고?
[계선] 여기가 어디니? 너희집이야? 깜짝 놀랬네 저 골목안에 있는 대문으로 들어왔는데 여기로 나왔어.
[김수임] 우리집은 그렇게 막 들어오면 안돼. 언니 정문으로 허락받고 들어와야지. 보초가 알면 조사 받아요. 왜 거기루 들어왔어?
[계선] 형사들이 너희집을 기웃대다가 저집으루 가길래 이상해서 따라가 봤어.
[김수임] (급히 창밖을 보며) 형사? 형산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계선] 난 척 보면 다 알아 일동이 잡으러 드나들때 다 봤어 도둑들처럼 이방저방 막 뒤지더라 (커튼을 들치며) 여기두 하나 숨었네?
[최만용] (당황한다) 계선누님
[계선] 누구야? (자세히 보며) 빨갱이 만용이구나 이북에 있다더니?
[김수임] 방에 들어가 있어 언니 빨리--- (계선을 밀어보내고 돌아서며) 큰일났구나 수색 당했어. 그사람 잡혔으면 어떻게 하지?
[최만용] 아냐 저기 숨었어. 김삼룡 이주하 동지는 단념하고 우리라도 빨리 가야겠어. 짐싸요 신분이 노출됐어. 같이 가야해
[김수임] 난 안가. 내가 거기 가서 뭘 하니? 공산당도 아닌데?
[최만용] 왜 못가? 여기 뭐가 있어서 ? 북에는 이선생이라도 있지.
[김수임] 가족이 있는데 가서 뭐하니? 우리관계는 그때 다 끝났어.
[최만용] 그런데 왜 못 잊어서 절절매? 그럼 이 위험한 일을 뭐하러 도왔어? 사람 복장터지게 좀 하지마. 언제면 속 차리고 살거야? 보고 싶으면 따라가서 살고. 같이 살고 싶으면 이혼하라구 그래. 뭐가 무서워서 자꾸 물러서? 안쓰럽게 구는거 보기싫어서 안오려고 했는데--- 에이 이까짓 공산당이고 뭐고 나두 그냥 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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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용 의자를 걷어차며 나간다. 천둥 번개한다. 바람이 커튼을 흔든다. 김수임 추운 듯 의자에 웅크리고 앉는다. 계선이 이층 층계참에 나와 앉아서 머리 빗으면서 노래한다. 사방의 커튼들이 천천히 조금씩 흔들리면서 조명이 변해 과거가 된다. 이층 김수임의 공덕동 집 한옥의 방안이 밝아진다.))
[이강국] (가운을 덧입은 차림으로 나오며) 우린 그냥 가도 돼. 삼팔선 경비가 아직은 엉성해서 괜찮을거야. 당신까지 개입시키고 싶지 않아
[김수임] 뾼차를 구했어. 군정청의 버츠중위가 주선해줬어, 개성에 계신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의사하고 조수를 데리구 가야한다고 했더니 도와 줬어. 미군뾼차는 검열도 하지않고 통과시키니까 괜찮을거야. 체포령이 내려서 그렇지 새우젓 장수도 마음대로 드나드는덴데---
((김수임 옆방으로 가려는데 갑자기 모윤숙 들어온다. 두사람 놀란다.))
[모윤숙] 아유 데모대 피해 오느라고 혼났어. 신탁통치 반대 데모대하고 찬탁데모대가 마주쳐서 막 패싸움을 하는데--- 바람은 또---
[김수임] 웬일이야? 나 오늘 여행가서 집에 없을거라고 했잖아?
[모윤숙] 그랬니? 잊고 있었어 그런데 왜 안 갔어?
[김수임] (나가며) 우리 지금 갈거야 잠깐 기다려
[모윤숙] (이강국을 보며) 체포령이 내려서 피신했다더니 여기 계셨군요 변장까지 하고 어딜 가세요?
[이강국] 북으로 피신하려던 참입니다
[최만용] (가방들고 오며) 반탁괴수 이승만이 숭배자가 오셨군. 하필 이런날--- 이승만이하고 반탁데모나 하러가지 여긴 왜 오셨소?
[모윤숙] 말버릇은 ? 이박사가 신탁통치에 반대하는게 어때서 그래? 겨우 독립을 했는데 또 남의 지배를 받아야 하니? 네가 뭘 안다구 함부로 나서? 데리구 다니지만 말구 좀 나무라세요
[최만용] (나가며) 못배운 사람은 사람도 아니요 ? 하는 말마다 재수없게---
[이강국] 미소공동위원회 감시 아래 통일과도정부를 갖자는데 자꾸 반대만 하니 욕먹게도 생겼지요 백범선생, 몽양선생 같은분들도 다 찬성하는데 말이요
[모윤숙] 좌익 정치인 숫자가 더 많으니 과도정부는 결국 좌익차지가 될것 아니예요?
[이강국] 통일정부가 중요하지 누가 정권을 잡느냐가 중요합니까?
[모윤숙] 좌익이 주도하는 과도정부는 절대 용납할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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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국] 잘못하면 우리는 강국들의 냉전논리에 말려서 분단국가가 될지도 모릅니다. 정신차리고 외세를 경계해야 할 때지요 진정한 우리편은 우리밖에 없어요
[모윤숙] 편협한 식견이군요 냉전은 이미 시작됐고 소련은 미국을 못 당해요 소련이 미국만큼 넉넉한가요? 좌익은 이제 끝났어요 공연한 말로 수임이를 세뇌하지 마세요
[이강국] 모선생은 늘 이기는 편만 들고 싶어 하시는군요 지금 당장 우세해보이는 쪽이 꼭 정의는 아니지요. 젊은애들한테 친일시인으로 매도당하는 것두 아마 그런 심약함 때문일겁니다.
[모윤숙] 친일이라니? 내가 언제 좋아서 친일시를 냵어요? 난 창씨개명도 하지 않았어요. 그때는 그럴 수 밖에 없었다는 걸 잘 알면서---
[이강국] 좋아서했던 아니던 전력은 전력이지요. 언제까지나 피하기만 할 수는 없을겁니다. 기왕에 저지른 일이라면 사죄를 하던 해명을 하던 입장은 분명히 밝혀야지.
[김수임] (들어오며) 속상하게 왜 만나기만하면 다퉈요? 이렇게 헤어지면 언제 또 만날지 모르는데--- 윤숙이 너두 이선생님 한테 너무 그러지마.
[모윤숙] 너 지금 내 앞에서 이강국씨 편드니? 남편이나 돼? 체포령 내린 좌익일뿐이야. 당장이라도 신고하면---
[최만용] (들어오며) 내 수상하다고 했었지? 정탐하러 온거야. 밀고했을지도 몰라.
(권총을 장전하며) 내 전부터 별렀어. 이 친일 반동---
[이강국] (총을 뺏는다) 이자식이? 너 나가있어.
[김수임] (긴장하며) 너--- 정말 여기 왜 왔어? 내가 집에 없을줄 알면서?
[모윤숙] 내가 네집에 갑자기 오면 안돼니? 무슨 소릴 하는거야? 친일파라더니 이젠 밀고자로 몰아?
[김수임] (당황하며) 아니 그게 아니고---
[모윤숙] (나가며) 같잖게 굴지마라 정떨어진다. 친구보다 남자가 더 중요해? 쏘고 싶으면 쏘라고 그래 다시는 네꼴 안볼테니까---
[김수임] (차츰 상황을 깨닫고 당황한다) 얘 윤숙아
김수임 모윤숙을 잡으려다가 멈춘다. 잠시 침묵한다. 음악이 들린다.
[김수임]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세상이 이렇게 불안한데 혼자 남기 싫어.
[이강국] 가두 오래있지 않을거야. 미군이 철수하면 곧 돌아와서 공산주의 통일정부를 세울 수 있을거야. 유럽공산주의에 대해서 공부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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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드므니까 도울 수 있을 때 도와야 해.
[김수임] 혼자만 남았다는 기분이 드는게 정말 싫어.
[이강국] 의지할데 없는 사람을 두고가는 나는 좋을 것 같아? 지금이라도 북에 같이 가면 될 것 아냐? 왜 고집을 피워?
[김수임] 자기자신의 존재가치를 의심해 본일이 없으면 내마음이 어떤지 모를거야. 아홉 살때 어머니가 날 버리고 가버렸을때 나는 정말 내가 값없다는 생각을 했었어 얼마나 싫었으면 엄마까지 버리고 갔을까하고--- 열두살때 계부가 날 벼두가마값에 포천사는 머슴한테 팔았을때도 그런 생각을 했었어 난 돈으로 팔고 사는 물건이구나--- 하고
[이강국] 그만해 제발--- 그 얘기를 듣는 기분이 어떤줄 알아?
[김수임] 불안하면 난 언제나 혼자 내버려지는 꿈을 꿔요 쓰레기나 강아지나 뭐 그런것처럼--- 그런 꿈을 꾸고 깰때마다 나는 속으로 주문처럼 말해요. 나는 나자신의 삶을 살 수 있다 아무것에도 좌우되지 않고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내 손으로 내 운명을 결정한다--- 나자신한테 최면을 거는거지.
[이강국] 다시 만날거야 잊지 마. 죽어서라도 난 당신한테 돌아와
갑자기 차 멎는 소리가 들린다. 두사람 긴장한다. 이강국 초조하게 말한다.
[이강국] (권총을 준다) 감춰두었다가 만일의 경우에--- 운나빠서 잡히기라도 하면 당신도 심문 받을지도 몰라. 내가 드나들은 흔적을 없애고 나와의 관계는 모두 부인해야해. 알겠어? (급히 나간다)
((현실의 조명 들어오며 차 멎는 소리가 들린다. 양계선이 창밖을 보며 흥분해서 말한다. 바람이 분다. 천둥번개한다. 커튼들이 어지럽게 날립니다.))
[계선] 다 날라가네 빨래 신문지 쓰레기 간판이 다 날라가네. 다 날라가네 막 날라가---
[최만용] (밖에서 소리만 들린다) 왔어. 누님 차가 왔어요. 갈테니까 내다보지 말아요. 이선생한테 안부 전할게.
[이강국] (과거속에서 나가며) 쉽게 단념지마. 수임이 난 돌아올거야.
[계선] (옷을 잡아 뜯다가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불이 나 속에서 불이나. 아 답답해 답답해 (소리 죽여운다)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니? 남편두 자식두 다 죽어버렸으니 이 일을 어떻게하면 좋아? 난 이제 어떻게 사니? 누굴보구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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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임] (발작하는 계선을 끌어안는다) 쉿 진정해 언니 간 사람은 가고 남은 이는 남는거지 걱정하지마 우리끼리 살면 돼 쉿
((천둥번개한다. 바람소리가 거칠게 들린다. 조명 변하며 갑자기 조용해진다. 음악이 들리다가 멎는다. 어두운 무대 한쪽이 차츰 밝아지면 웅크리고 앉아있는 김수임이 보인다. 계선이 유령처럼 서성이며 낮게 노래하듯))
[계선] 잘 갔겠지? (침묵한다) 잘 도망갔겠지? (사이) 운전수 한테서 아무 연락없는걸 보면 잡히지 않고 잘 갔을거야. (침묵하다가 명료했던 음성이 흩어지며) 우리 일동이도 보낼 걸 그랬지?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나서 군인들이 잡아다가 죽이기 전에--- 글세 열일곱살 짜리를 빨갱이라고--- 살려달라고 막 우는데--- 에미가 보는데서---
(뛰어나가려한다) 사상이 뭐라고--- 그래서 누가 무슨 덕을 본다고---
[김수임] 이리와 언니 머리빗겨 줄게. (머리 빗긴다) 머리에 상처가 있네. 또 어디서 넘어졌어? (끌어안으며) 바람불 때마다 미쳐서 헤메고 다니지마. 마음 잡아야지 죽은사람 생각하면 뭐해?
[계선] (웃는다) 시이소오 같지? 빨갱이는 우익이라고 남편을 죽이고 군인들은 내 아들을 빨갱이라고 죽이고--- 사상이 뭐라고---
[김수임] 우리끼리 있으니까 무섭지? 언니? 윤숙이한테 전화해 볼까? 잘있는지 물어볼까? 이제는 화가 좀 풀렸을지도 몰라
[계선] 올라갔다 내려왔다 이렇다고 죽이고 저렇다고 죽이고---
[김수임] 또 안 받을거야. 성격이 무섭거든. 나한테 정말 화가 났어.
[계선] 옆집 담밖에서 형사들 머리통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구나. 쳐들어 오고 싶어서 죽겠나보다. 어떻게하면 좋아? 쳐들어오면?
[김수임] (소름끼치는듯 웅크리며) 여긴 괜찮아 언니. 무슨 일이 있어두---
[계선] 빨치산들처럼 숨었다가 벌컥 덤벼들거야. 늑대처럼 숨어서 엿보다가 왁 하고 덤벼들거야 너두 무섭지? 그지? 우리 문 꼭 닫고 숨어있자 이렇게하고 있으면 아무도 우릴 못 찾을거야
((계선이 옆에 와서 웅크리고 앉는다. 어둠속에서 조명 한줄기가 천천히 전화와 수임을 연결한다. 수임 구식 전화를 건다.))
[김수임] (영어로 말한다) 여보세요? 회현동에 전화 걸어줘. (기다리다가) 여보세요? 나야 윤숙언니 나--- 수임이 (침묵하다가) 귀국했다는 소식 신문에서 봤어. 유엔에서 활약이 컸다구? 반가웠어. (망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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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 음력 삼월 초닷새 네 생일 아냐? 그래서 전처럼 우리 같이 생일상을 받으면--- (전화가 끊긴 듯 가만히 수화기를 내려놓고 말한다) 아직두 화가 안 풀렸나봐. 한번 만났으면 좋겠어. 사람이 그리워서 그래. 왜 이렇게 불안하고 심란하지? (수화기를 놓고 돌아서는데 다시 벨 울린다) 여보세요? (반색하며) 응 그래 언니 반찬 없으면 어떻구 미역국 하나면 어때? 회현동으루 곧 갈게 고마워.
((기뻐하며 서둘러 외출준비를 한다. 계선 옆에와서 서성인다.))
[계선] (망설이며) 나두 따라가면 안돼?
[김수임] 애기 아직 자지? 애보는 이하고 원일이 데리고 여기 있어. 바람불면 언니 또 마음 못 잡고 미치잖아? 잠깐 나갔다 금방 올게.
[게선] 가서 못 오면 어떻게 해?
[김수임] (웃옷을 입으며) 왜 못 와?
[게선] 나 꿈꿨다? 네가 시집가는 꿈꿨어. 족두리 쓰고 활옷입고 연지곤지 찍고 시집가더라. 둥실둥실 꽃가마 타고---
[김수임] (나가며) 좋은 꿈이네. 언니 애기하고 놀면서 기다려 응? 빨리올게.
수임 웃으며 웃옷을 걸치고 서둘러 나간다. 조명이 차츰 어두워진다. 무대 안에서 남자들의 그림자가 일렁이며 일어선다.
[계선] (좁혀드는 조명속에서) 꿈에 시집가면 죽는다던데--- 족두리 쓰고 꽃가마타고 시집가면--- (창밖을 보며) 그런데 저게 누구지? 형산가? 웬남자들이 수임이 뒤를 따라가네 하나 둘---
((조명이 차츰 어두워진다.))
((무대 안에서 남자들의 그림자가 일어서서 낮고 빠르게 속삭인다.))
[소리1] 기회야 외출한다는 제보를 받았어.
[소리2] 체포합시다.
[소리3] 운전병이 있어 저지 당할걸?
[소리1] 미리 가 있다가 운전병 몰래 뒷문으로 슬쩍 빼돌려
[소리2] 따라 가 따라 가
((그림자들 갑자기 호각소리, 시끄러운 구둣발 소리와 함께 빠른 몸짓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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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간다. 조명이 바뀌어 어두워진다 빠른 박자의 음악과 함께 차츰 밝아지면 냉냉하고 살벌해 보이는 심문실이 된다. 검사 책상 앞에 앉아 냉정하게 서류를 읽는다.))
[검사] 에 또--- 이름 김수임 나이 설흔아홉 주소 서울시 옥인동 십구번지 직업은 없고 이화여전 영문과 졸업, 세브란스병원, 반도호텔, 미대사관에서 일한 바있고 미 제24사단 헌병사령관 비어드대령과 동거중, 북에 있는 정부 이강국을 위하여 간첩행위를 한 혐의로 회현동 모윤숙 시인의 집에서 체포되었음. (김수임에게) 시인합니까?
((차츰 무대 한쪽이 밝아지며 지친 듯 서있는 김수임의 모습이 보인다.))
[김수임] 또 그러시는군요 벌써 몇번째지요? 지겹지도 않아요? 친구집 생일파티에 간사람 잡아다가 가둬두더니 간첩이라니요?
[검사] 남파간첩 최만용과는 어떤 사이지?
[김수임] 동생이라고 말씀드렸을텐데요
[검사] 정부가 아니고? 성두 다른데 무슨 소리야?
[김수임] (화내며 외면한다) 말같지도 않은 소리를---
[검사] 이중업과는 어떤 사이고?
[김수임] 얼굴도 본적 없어요 모른다고 말했잖아요? 정말 끈질기군요
[검사] 모르는 사내를 동거하는 남자 몰래 감췄다가 탈출시키나?
[김수임] (침묵한다)
[검사] 북에서 미군철수 계획을 자세하게 알고 있던데도 남편한테서 빼낸 정보를 이강국한테 보내지 않았다고 잡아떼겠어?
[김수임] 신문에 실린 기사도 국가기밀에 속해요? 그 정도는 뉴스 앤 월드 리포트 같은데 늘 실리는 뉴스예요.
[검사] 비어드대령도 공범아냐? 잡아다가 대질을 해봐? 지금 그쪽도 심문받는 중인겻 알고있나? 이젠 헌병사령관도 아무것도 아냐
[김수임] 그사람은 외국인이예요. 아무 상관없으니까 연관짓지 마세요.
[검사] 남파간첩 최만용에게 돈을 줬다던데?
[김수임] 땅살 돈을 좀 줬어요. 위험한짓 하지 말고 농사짓고 안정하라고---
[검사] 공산당에 거액의 정치자금을 헌납한건 확실하군, 집도 사줬다던데?
[김수임] 마침 옆집에 빈집이 있어서 잠시 묵으라고 세를 얻어주었지요.
[검사] 남로당 비밀아지트를 장만해주었으니 북조선에서 훈장하난 받겠군.
[김수임] 왜 하는 말마다 그렇게 이상하게 듣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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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 거액의 정치자금을 자신의 차를 이용해서 이북으로 운반해주었고?
[김수임] 이중업이가 떠날 때 뭘 갖고 갔는지 모른다고 했을텐데요. 자동차 태워준것도 죄가 되나요? 뭘 잘못했다고 이러지요?
[검사] 사형수를 탈출시켜서 집안에 감췄다가 북으로 도망시키지 않았나? 다 자백해놓고 잡아뗄거야? 언제까지 특별대우를 해줄 줄 알아?
((밖에서 다시 비명소리 길게 들린다 김수임 진저리친다.))
[검사] 양키하고 사는 것도 정부 이강국이 지시해선가? 문화예술계 사람들과 외국인, 고위공직자들을 청해서 파티도 자주 열던데 정보수집을 위해서겠지? 그런데서 만난 양키들 이놈저놈한테 몸을 팔아서 까지 당에 충성하나? 이렇게 얼굴 반반하다고 막 놀아났어?
[김수임] (뿌리치고 화내며 일어선다) 무례하군요. 감히 누구한테?
[검사] 당신들 생각성 없는 유한계층 신여성들은 한번 호된 맛을 봐야겠어. 지금이 어느 땐지 알고있나? 본때를 봐야겠어?
[김수임] (꺾이며 주춤한다)
[검사] 이중업이가 삼팔선을 넘어 개성에 닿자마자 최만용이를 죽여서 암매장했다는 소식은 알고 있나?
[김수임] (타격받는다) 만용이가 죽어요?
[검사] 개성부근 야산에서 시체가 나왔더군
[김수임] 이중업이 이용하고 배신했군요. 정말인가요? (운다)
[검사] 이강국이가 지시했겠지?
[김수임] 나한테는 하나밖에 없는 혈육인줄 잘 아는걸요. 즈이 아버지가 버리고 떠난뒤엔 나한테만 의지하고 살았는데--- (운다) 차라리 보내지 말걸---
[검사] 얘기 좀 합시다. 김여사 일로 우린 아주 곤란하게 됐어요 석방하라고 사방에서 압력은 오고--- 미국 신문들까지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데---
[김수임] (눈을 가리고 듣는다)
[검사] 털어놓고 얘기해서 이번일의 문제는 물증이 없다는 겁니다 영장도 없이 잡아다 가둬두고 심문했는데 증거가 없어서 기소를 못하면 관계자 모두 목이 달아날지 모릅니다 신분이 신분이시니만큼 정부입장까지 곤란해 지지요. (혀를 차며) 대어를 낚았다고 흥분해서 경쟁하다 그만--- 정적을 좌익으로 몰아서 탄압 한다고 벌써 말이 많은데--- 일이 커져버렸어요. 와주셔야겠습니다
[김수임] 어떻게하면 되지요? 아이 때문에라도 난 빨리 집에 가야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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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 문제는 증거예요 증거만 있으면 우리는 절차대로 기소할수 있고 김여사는 빨리 재판을 받아 끝내게되니 서로 좋은데---
[김수임] 재판을 받으면 어떻게 되는데요?
[검사] 재판이라야 요식절차지요 구형은 검찰에서 하기 나름인데 협조하시면 이쪽에서도--- 이강국이나 최만용하고 상관있는 물건이 있다면---
[김수임] (망서리며) 이강국씨가 놓고 간 총이 있긴 있어요.
[검사] 총이라면 확실한 증건데 어디 있지요? 우린 영장없이는 김여사댁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김수임] 집에 가게 해주시면 갖고 올 수 있어요 아이도 잠깐 볼 수 있고---
[검사] (비루하게) 저 설마 거기서 헌병을 부르던가 나오지 않겠다고 하시지는 않겠지요? 솔직히 말해서 김여사가 버티시면 우린 김여사를 다시 연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 우린 큰일 납니다.
[김수임] 증거만 주면 놔줄거라면서요? 언제 내가 거짓말하는 것 봤어요?
[검사] (얼버무린다) 그야 그렇지요. 약속하지요. 충분히 배려를 하겠습니다.
[김수임] 만용이가 죽은건 확실한가요? 그 불쌍한 애를--- 그 사람만 믿고 맡겼는데--- 그사람도 구할수 없었다면---
[검사] 이강국의 총이라--- 뭐 또 다른건 없습니까? 편지나 무전기나--- 생각해 보세요 떠나기전 만났을 때--- 뭔가 도 있을겁니다 생각해보세요
((김수임을 벽으로 몰며 강요한다. 김수임 외면한다 조명이 변하면서 과거가 된다. 음악과 함께 무대한쪽이 밝아지면 촛불 앞에서 이강국 말한다))
[이강국] 축제때는 정말 대단하지. 학교부근 온동네가 꽃으로 덮이고 사방에서 음악이 울리고 밤에는 광장마다 무도회가 벌어져. 독일사람들은 무뚝뚝한 것 같아도 정말 춤을 좋아하거든. 전통이 오랜 사회라서 그런지 우리하고 비슷한데가 있어. 핑계만 있으면 술마시고 춤을 춰. 늙은이 가리지 않고 춤추는데 부르스나 탱고 같은게 아냐 다함께 추는 원무 같은거지. 이렇게 말야
((음악에 ?춰 춤춰 보인다. 김수임이 들어오며 같이 스텝을 밟은다.))
[이강국] 이쪽으로 이렇게 오리처럼 뒤뚱거리지 말고 이렇게--- 그건 독일 전통춤이고 유학온 코삭크 친구들은 이런춤도 추더라구---
((이강국이 해보이는 격렬한 스텝을 어색하게 따라하다가 김수임 숨차서 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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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면서 주저 앉는다. 이강국도 김수임 옆애 기대어 앉아 술 따른다.))
[김수임] 그리워요? 베를린 시절이?
[이강국] 허전했어.
[김수임] 왜? 당신 얘기를 들으면 꿈의 도시 같던데? 티어가르텐의 장미 정원과 호수, 슈프레강위의 페르가몬 박물관--- 당신 말만 들었는데 난 우리가 거기 함께 있었던것만 같아.
[이강국] 쓸쓸했어 이국적이고 다 좋았지만 함께 나눌 사람이 없었거든. 함께 할 사람이 없다면 그런건 다 아무 의미도 없는거야.
[김수임] 밤에 눈감고 있으면 당신하고 독일에 있는 상상을 해요 당신이 말한 길 가로수 도서관 같은 것들이 다 보이는 것만 같아. 둘이 손잡고 낙엽깔린 길을 걸어 오페라극장으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보러가는 거예요. 데모두 파업두 좌익우익 테러두 상관없이---
[이강국] 거기서 처음 자기연민을 느끼게 되더군. 우리 젊은이들이 가엾었어 우리는 투쟁하고 참으며 사느라고 인생이 무엇인지 조차 모르고 젊음을 보내잖아? 돌아가서 빨리 무언가 도움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니 초조했어.
[김수임] 또 바람부나 보다. (웃는다) 우리도 이만하면 꽤 낭만적이예요 봐요 정전이 잘 되니까 이렇게 촛불도 켤수 있고---
((갑자기 문열리면 최만용 술취해서 들어온다.))
[최만용] 당신 이강국선생 우리누나한테서 손떼지 않으면 죽일거야. 결혼할 것도 아니면서 왜 자꾸 찾아다녀? 이북으로 갈거면서 왜 찾아와? 죽여버릴거야. 당신 때문에 아까운 나이 십년을 허송했어. 우리누나 착하고 불쌍한 사람이야 선교사집에서 식모살이 하면서 피한방울 안섞인 나를 키우느라고 고생 많이 했어 당신 죽여버릴거야 내가 공산당은 괜히 하는줄 알아? 혁명이 일어나면 너 같은건---
[이강국] (피하며) 만용아 너 또 취했구나?
[김수임] 나가지 못하니? 어디와서 주정을 해?
[최만용] 쥐구멍에도 볕들날 있어 우리가 언제까지 이렇게 살줄 알아? 책임을 지라고 해 누님. 관계를 끊던지 책임을 지우던지 결정을 해. 노동자 농민을 착취하는 저런 부르조아지는 다 죽여버려야 해. 우리를 막봐서 저러는거야. 책임지라고 해 누님, 또 속지마
[이강국] 이녀석 이리 나와라. 찬바람 쐬고 정신차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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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고 나와서 팔을 비틀어서 밀어버린다))
[최만용] (나가며) 아무나 믿지 말고 제발 속 좀 차려 누님
[김수임] (어쩔줄 모르며) 만용아 만용아 거기 길 험하니까 멀리 가지 마.
((바람 분다. 이강국 김수임의 외투를 입혀준다. 조명이 변한다.))
[김수임] 이북갈 때 데리고 가세요. 철없고 성급해서 여기 두기는 위험해요.
[이강국] 안정만 되면 사람을 보내겠어. 인민정권이 수립되면 난 외국에 대사로 나가게 될 가능성이 커. 그럼 밖에 나가 함께 살수도 있어.
[김수임] 첩으루?
[이강구] (화낸다) 또---
[김수임] 당신을 나눠 갖으면서까지 나를 모욕하진 않겠어.
[이강국] 공연한 자존심 내세우지마. 왜 틈만나면 맞서려 들어?
[김수임] 비현실적인 소리를 할 때마다 화가나요 왜 꼭 이북으로 가야해?
[이강국] 삼팔선이 뭐 저승이나 되는 줄 알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넘나들 수 있는 줄 다 알면서 그래? 인생을 가치있게 하는 것은 감정이 아니라 대의에 바친 신념이야. 실천할수 없는 지식은 지식이 아냐. 뭘 바라는지 다 알면서 왜 그래?
[김수임] 당신은 인생의 진실을 몰라. 사람끼리 사는거예요 (기대며) 왜 우리는 만나기만하면 싸우는지 몰라. 다시는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이강국] 마지막인 것처럼 말하지 마. 돌아온다고 했잖아? 죽으나 사나 같은 배를 탔다는 확신을 가져야지 왜 자꾸 헤어진다고 생각해?
[김수임] 난 집착하지 않으려고 애써왔어. 내 마음대로 떠내려가게 날 내버려 두세요. 헛된 꿈을 꾸지 않으려고 난 정말 노력해요.
[이강국] 모윤숙 시인의 시에 담긴 진실을 한번 생각해봐. 사랑에 관한 한 그 여자는 언제나 정직했어.
한쪽이 밝아지면 스탠드가 놓인 책상 앞에서 시를 읽는 모윤숙이 보인다.
[모윤숙] 오직 그대 내 등불 가까이 오라 침묵의 흰하늘 그 달빛 비치는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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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불 가까이 오라 물먹은 보리수 그늘아래 표류하는 혼 어둠에 고달프리 오직 그대 내 등불 가까이 오라
[김수임] (같은 시를 영어로 읽는다)
[이강국] (같은 시를 독일어로 읽는다)
((바람이 두사람을 날려보낼듯 불어온다. 조명이 좁혀든다. 차츰 과거의 조명 사라진다. 현실의 조명이 들어온다. 두사람 나간다. 조명이 바뀌면 추상적인 구도의 고등군법회의의 군사재판 법정이 된다. 검사 변호사 사이에 머리를 단정하게 가매틀어 올리고 하늘빛 모시적삼에 짙은 보라빛 벨벳치마를 입고 흰손수건을 손에 든 김수임의 모습이 보인다.))
[변호사] 피고는 공산주의가 무어라고 생각했습니까?
[김수임] 빈부의 차이를 없애자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변호사] 공산주의를 좋아합니까?
[김수임] 부자연스러운 생각이라고 알뿐 깊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변호사] 왜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했습니가?
[김수임] 억지로 소유와 경쟁을 제한하는 것은 사람의 본성에 맞지않기 때문입니다
[변호사] 이강국이가 공산주의자라는 알고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김수임] 진보적인 생각이라 심취한 줄은 알았지만 섭섭했습니다
[변호사] 사년전에 체포령이 내렸을 때 이강국을 탈출시킨 이유를 밝히시오.
[김수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변호사] 이번 이중업의 탈출을 도운 이유는?
[김수임] 이강국이 궁지에 몰렸다기에 도움이 될까해서 했습니다
[변호사] (대답을 강요하며) 이강국을 지금도 사랑하고 있습니까?
[김수임] (망서린다)
[변호사] 대답하세요 이강국을 아직도 사랑하고 있습니까?
[김수임] (변호사의 유도에 응하며) 아니요.
[판사] (소리만 들린다) 잠시 휴정합니다.
((봉을 두드린다. 김수임 주저앉는다. 김수임과 변호사 주변만 밝아진다.))
[변호사] 뭘 우물우물하는 거요? 시키는대로 제깍제깍 대답해야지. 죄진 주제에 빳빳하게 굴어서 이로울게 없어요. (짜증내며) 성가시게 됐어요. 신문들이 김여사를 한국의 마타하리라고 더럽다고 떠들어서 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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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해 졌어. 창피하게 나하구 관꼐까지 의심하더구먼. 대체 같이 잔 남자가 몇 명이나 되는거요? 에이---
[김수임] (당황한다) 더럽다니--- 내가요? 누가 그런 말을 해요?
[변호사] 당장 양코배기 미국놈하고 같이 살면서--- 부끄러운줄 좀 아슈 (서류 던져주며) 나 원 이건--- 운수불길 하려니까 사건이라고 이런게 걸려서--- 아무튼 기자들이 보는 듯하면 손수건으로 자꾸 눈물을 닦고 청승을 떨어요. 동정받지 않으면 큰일납니다. 저쪽에서는 이일로 큰공을 세웠다고 나서고 신문들은 차제에 상류층 신여성들에게 본때를 보여 혼뜨검을 내자고 저 야단이니 우린 옹골지게 걸린거에요. 알았습니까? 아 저 아주머니 또 오셨구먼. 온전한 사람이요? 천치같기도 하고--- (나간다)
[계선] (울먹인다) 수임아
[김수임] (손을 잡는다) 원일이아빠 소식은 들었어 언니? 아기는 잘있어? 엄마 찾지 않아? (운다) 밤엔 꼭 품어줘야 잘 자는데---
[계선] 아기는 잘있어. 엄마 찾아서 좀 보채기는 해도 잘 먹고 잘 놀고 똥두 잘 누고--- 대령은 본국에서 재판받아야 할거래. (갑자기) 어제는 모윤숙이한테 갔었는데--- 윤숙아 불러두 만나주지도 않더라. 대통령하고 그렇게 친하니 명령 한마디만 얻어오면 당장 끝날거라구 원일이 아빠두 몇번이나 갔었는데--- 날 보구두 못 본척해. (나가다가) 그런데 너 정말 죄졌어? 무슨 죄?
((계선 나간다. 지친 김수임 좁혀드는 조명속에 혼자 남아 생각에 잠긴다. 갑자기 봉소리와 함께 조명이 변하며 검사가 등장한다. 김수임 지쳐서 초라해진다. 손수건을 초조하게 매만진다.))
[검사] 정부 이강국이 북으로 데려간다고 했을텐데도 외국인과 동거를 한것은 그 직위를 이용하여 간첩행위를 하려고 한것이 아닙니까?
[김수임] 이강국은 제게 아무 약속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도 약속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같이 있는 동안 유감없이 행복했기 때문에 더 바라지 않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동거하는분은 비록 외국인이지만 오랫동안 제게 구애해왔고 성실한 애정과 안정을 주었습니다.
[검사] 피고의 집은 아방궁처럼 호화로워서 냉장고 선풍기 피아노등 온갖 사치품이 없는 것이 없다고 하던데 간첩활동 댓가로 받은것입니까?
[김수임] 아닙니다 그런것은 모두 동거하는 분의 생활용품일뿐입니다
[검사] (객석을 향해) 여기 피고가 사는 집의 내부 사진이 있습니다. 온 국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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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새나라를 세우고 허리띠를 졸라매며 근검절약하는 이때 피고가 외국물건들로 얼마나 뻔뻔하게 염치없이 호화사치하는 생활을 하는지 증거가 될것입니다. (돌아오며) 피고는 이렇게 허영스러운 생활을 하기 위하여 거액의 돈을 받고 간첩행동을 했다고 자백했는데?
[김수임] (놀라며) 그런일 없습니다
[검사] 정보를 모으기 위해서 외국인과 고위층인사들을 청해서 파티를 열어 매춘행위를 했다고 자백했지요?
[김수임] (분해서) 그런 말 한일 없습니다.
[검사] 해방이후 정부요인등 우익인사들에 대한 총기 테러가 잦았는데 증거로 나온 무기를 테러에 몇번이나 사용했는지 진술하시오.
[김수임] (당황하며) 그건 정표지 무기가 아니에요. 사용한 일 없습니다.
[검사] 피고의 집에서 압수된 무전기로 동거하는 외국인에게서 얻은 정보를 이강국에게 보냈다고 했는데?
[김수임] (울듯) 그건 만용이 두고 간 것이고 저는 만질 줄도 모릅니다
[검사] 지난 5월 27일 조국전선 중앙위원회는 이주하 김삼룡의 석방을 위한 투쟁을 결의했는데 이강국이 조만식선생 부자와 교환해서 석방시켜야할 구속 남로당 주요간부 명단에 김수임을 포함시키라고 주장해서 모종의 사태가 있었다는 정보가 있는데도 이강국과 계속 접촉한 사실을 부인합니까? 이강국에게 구조를 요청하지 않았어요?
[김수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본다) 이강국이 제 석방을 요구한다구요?
[검사] 이강국이 직접 당간부들을 면대해서 자신이 사주한 여간첩 김수임의 교환석방을 요구했다는 기록을 입수한 바 있으므로 여기 제출합니다.
조명이 변하면 무대위에 나란히 앉은 남자들의 실루땛을 향해 무대를 사납게 거닐며 말하는 이강국의 모습이 보인다.
[이강국] 이건 대체 어떤 모임에서 누가 결의한거요? 노동장 중앙위원회의 결의가 맞소? 왜 이 명단에서 김수임의 이름이 빠졌소? 조만식 선생을 석방하는 댓가로 남한이 구속하고 있는 우리동지들을 맞바꾸는건 좋소. 만로당 지도부 이주하 김삼룡 동지를 포함시키는 것도 옳소. 그런데 김수임은 왜 빠졌소? 대답하시오. 위원회의 설명을 들어야겠소. 당신 처음보는 동진데 이름이 뭐야?
[김종현] 조국전선 중앙위원회의 김종현이요. 조만식 부자와 교환할 구속자 명단은 공화국을 위해 투쟁하다가 남조선 감옥에 억류중인 우리 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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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레타리아 애국동지들의 명단이요. 여기에 미제국주의자의 애첩을 포함시키자고 말하는거요? 사상이 의심스럽소. 이강국동지 남로당은 조선인민공화국의 극히 일부분일뿐이요. 종파주의로 김일성동지 한테 맞서려는거요? 상급자라해도 용서하지 않겠소
((김종현의 뒤에서 나온 남자들 이강국의 뒤에 위협적으로 선다))
[이강국] 김수임은 지금 남로당 조직책 이중업동지를 탈출시킨 죄로 간첩혐의를 받고 있소. 그 이중업이는 지금 남쪽에 있소. 겨우 한달만에 되돌아가서 지리산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할 이중업을 탈출시키기 위해서 그여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소. 그만하면 충분히 당에 기여한거요. 당이야말로 분파주의를 획책하고 있소. 연안파와 남로당을 이렇게 하대할 수 있는거요? 당에 헌신한 김수임을 배신할거요?
((등뒤의 남자들 갑자기 이강국의 팔을 잡아 꺾는다. 이강국 저항한다.))
[김종현] 남조선에서 묵묵히 투쟁하는 노동자 농민들은 그보다 더한 희생을 하고 있소. 직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분파주의는 용서하지 않겠소.
[이강국] 이놈 김종현. 김수임의 특별한 입장을 철저하게 이용한 사실을 부인할거냐? 김수임을 부추겨 이중업 백형복등의 월북을 돕게하라고 내게 강요했던걸 다 잊었냐? 그사람은 헌신했어. 이제와서 배신하고 개처럼 내던져 죽게 할거냐? 이놈
[김종현] (등을 보인채 이강국을 때린다) 닥치지 못하나? 공화국은 인민을 이용하지 않소. 공산당은 오류를 범하지 않아. 분파주의적이며 종파주의자 다운 폭언은 용서하지 않겠소. (쓰러진 이강국을 걷어찬다) 그여자가 뭐요? 부르주아 탕녀요 당신 애첩일뿐 아니요? 부끄럽지도 않나? 이 타락한---
[이강국] (일어서려 애쓰며) 그여자는 공화국을 위해 목숨을 걸었소. 명색인민을 위한 정부가 이렇게 신의를 저버려도 좋소? (다시 걷어차이며) 김수임을 이명단에 포함시킬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겠소. 진정한 인민의 국가라면 인민을 배신할 수 없을거요.
((남자들 이강국을 에워싸고 구타한다.))
[김종현] 이성을 찾으시오. 이강국동지 연안파와 남로당이 다 함께 숙청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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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이라는 걸 모르시오? 여자 때문에 몰락을 시작하지 마시오. 당신도 미제간첩 이라는 의심을 받을 수 있어.
((남자들 이강국을 억지로 일으켜 세운다. 이강국 피흘리며 말한다.))
[이강국] 내가 아직 숙청당한게 아니라면 북조선 인민위원회 외무국장의 직위를 걸고 명령하겠소. 협박이라고 생각해도 좋소. 조만식과 김수임을 맞바꾸시오. 미제간첩이라고 의심받아도 상관없어. 한푼가치도 없는 정치생명 따위는 아무래도 좋소. 흑백논리의 비틀린 사상을 내세울뿐 신의도 신념도 아무것도 없는 당신들의 정치 놀음에는 벌써 신물이 났어. 이렇게 부패하고 타락했으니 북과 남이 다를게 뭐 있단 말이요? 맑시즘의 이상향을 어디가서 찾겠어? (뿌리치고 돌아서며) 수임 당신을 결국 궁지에 몰아넣고 말았어. 내가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거요? 수임.
((이강국이 말하는 동안 현실의 김수임 조용히 마주 바라본다.))
((조명 엇바뀌어 그림자와 이강국 사라지고 재판정이 된다.))
[검사] 피고 김수임은 고등교육을 받은 인텔리여성으로서 사회의 지도적 위치에 있으면서도 다만 일신상의 쾌락에 응하여 간첩행위를 해온 자입니다. 이북의 거동이 심상치 않은 이즈음 국민들의 안이한 사고에 경종을 울리고 국방경비태세를 확인하기 위하여서라도 국가안전을 위협하는 이런 흉악한 범죄에 대하여는 엄벌을 내릴 수밖에 없다는 판단아래 국방경비법 제32조, 제33조, 위반, 무기 및 범인은닉, 국가기밀누설, 반역죄등을 적용하여 여간첩 피고 김수임에게 사형을 구형합니다.
((사방에서 사형이라는 말이 메아리져 울린다. 김수임 당황하며 돌아선다.))
[김수임] 협조하면 잘 해준다더니? 증거도 다 줬는데? 왜 나한테 이러지요? 나는 간첩이 아니예요 (절망하다가 모윤숙을 보며) 윤숙아.
((김수임 헌병에게 끌려서 자리에 앉혀진다. 흰모시저고리 남색반점이 있는 벨벳통치마에 중힐을 신은 모윤숙이 나온다. 잠시 수임을 보다가 말한다.))
[모윤숙] 특별증언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산당의 주구노릇을 한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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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 죄상은 극형을 당해도 마땅합니다. 그러나 학창시절을 함께한 친구로서 피고 김수임의 사람됨을 밝히고 관대한 처분을 호소하기 위하여 이 자리에 섰습니다. 수임은 어려서 부모에게 버림받고 불우하게 자라나 평생 한번도 편안하고 안락한 생활을 해본 일이 없었습니다. 이화여전 기숙사에서 살던 동안에도 틈틈히 선교사집에서 일하며 의붓동생을 키웠습니다 학교시절에는 모범생이었고 사회에 나와서도 바르고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평생 따뜻한 사랑에 굶주렸다가 남자를 잘못 만나 헌신한다는 것이 이렇게 되었으니 인생이 가엾지 않습니까? 수임에게는 빈집에서 홀로 어미를 기다리는 이제 겨우 두살된 아들이 있습니다. 의지할 데 없는 불쌍한 아이를 생각하셔서라도 관대한 처벌을 내려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절하고 물러나는 모윤숙 주변의 조명 사라지면 변호사 나서며 말한다))
[변호사] 나흘동안의 재판을 통해서 본 바와 같이 피고는 시국이 사상투쟁으로 치열한 때를당하여 어리석은 여성의 몸으로 정치나 사상을 알지못하는 관계로 공산당의 사주를 받아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피고가 그동안 저질러온 행적중 사년전 이강국의 탈출을 말할 것 같으면 분단이 시작된 직후로 삼팔선도 검문만 받으면 쉽게 넘나들던 때여서 검문을 통과시켰다는 것으로 간첩죄를 적용하기는 무리라고 하겠습니다 남로당 조직부장 이중업을 탈출시킨 죄 역시 경미해서 실제로 피고는 이중업의 감옥탈출에 전혀 관여한바 없습니다 자금을 대었다고 하나 동생인 최만용에게 용돈을 주었을뿐이어서 검찰의 주장에는 무리가 있다 할것입니다 동거하는 외국인의 차를 이용하여 삼팔선 검문을 통과시켰다고는 하나 이즈음 역시 삼팔선을 오고가는 일이 어렵지 않다는 것은 월북했던 이중업이 돌아와서 현재 지리산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한다는 관계기관의 보고로도 확인되니 이역시 간첩죄를 적용하는 검찰의 의도는 심히 의심스럽다 하겠습니다 피고가 그 동안 저질러온 행적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나 그죄는 경미한 법적용으로도 충분할뿐 국방경비법이나 국가반역죄등을 적용하는 것은 닭잡는데 소잡는 칼을 휘두름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본 변호인은 이 법정이 잘못된 시대조류에 휘말려 과장되고 경직된 안보논리로 돌이킬수 없는 잘못을 범한 냉전시대의 대표적인 법정으로 후세에 두고두고 기억되지 않기를 바랄뿐입니다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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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 (소리만 들린다) 본 법정은 이제 나흘간의 심리를 마치며 피고 김수임에게 국방경비법 32조위반 간첩 및 이적행위를 범한 죄로 구형과 같이 사형을 언도하여 총살형에 처할 것을 선고합니다.
((봉을 두드린다.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던 김수임 벌떡 일어난다. 경악한 얼굴로 서있는 김수임 주변으로 조명이 좁혀진다.))
[김수임] 간첩이라니? 총살이라니--- 사상이 다른 사람을 도왔다고 사형이라니? 어떻게 그런 말을 할수있어? 사람이 중하지 사상이 중해요? 그게 어디 우리가 만들어낸 사상인가요? 그렇게 억지같은 사상이나 이념이 사람이 사는데 무슨 상관있어요? 증거만 주면 놔주겠다고 약속해놓고--- 이럴수 없어 난 죽을수 없어 천벌을 받지 사람이 사람한테 어떻게 이런 짓을 해? 아 우리애기--- 원일아---
외치며 운다. 어둠속에서 악몽같은 음악과 환상들이 보여진다. 사방에서 철창문이 소리를 내며 닫힌다. 김수임 차츰 구석으로 몰리며 웅크린다. 무대 한쪽이 밝아지며 철창 밖에 서있는 모윤숙이 보인다.
[모윤숙] 수임아 수임아
[김수임] (돌아보고 사슬을 끌고 다가가다가 넘어진다)
[모윤숙] (손잡고 운다) 천천히 와 천천히--- 그날 널 괜히 불렀어 우리집에만 오지 않았어도---
[김수임] 원일이 아빠두 내 소식 들었니? 그사람 지금 어디있어?
[모윤숙] 본국으로 소환된것 몰라? 군법재판을 받을 거랜다
[김수임] 우리 아기 원일이를 어떻게 해? (매달리며 울다가 웅크리며) 나 언제 죽는대니? 말해줘 (화낸다) 말해봐 나 언제 죽인대?
[모윤숙] (고민하며) 오늘이 이십일이니까 일주일 뒤
[김수임] 그렇게 빨리? 이선생이나 남로당이 손을 써줄틈도 없겠네 그 사람들 본심이 아닐거야 약속했었어 협조만하면 잘해주겠다고---
[모윤숙] (운다) 너 누군가가 구해줄줄 믿는구나? 이지경이 되어서도 남이 하는 말은 다 믿니? 사상에 대해서 넌 너무 안이했어 사람들이 친일은 괜히 한줄 아니? 남이야 뭐라던 안전한 길을 택했어야지---
[김수임] 그래 난 공산당을 탈출시켰어 범법을 했어 그렇지만 도와주지 않으면 또 감옥에 갈텐데 어떻게 그냥 내버려둬? 도와주지 않으면 저쪽에서 또 무슨일을 당할지 모르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어? (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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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꺾인다) 왜 이렇게 춥지? 뼈가 다 저리네.
[모윤숙] 손 내밀어 봐 (손을 비벼주며) 발두 시려워? 잠깐 참아 내일은 버선 갖다줄게
[김수임] 너하고 이선생하고 보비아빠가 각각 움직이면 이박사던 공산당이던 미국이던 누구 손인가는 닿겠지 죽지는 않을거야 그렇게 쉽게 죽이기야 하겠어? 무기징역쯤 되겠지? 그렇지? 윤숙아?
[모윤숙] (운다) 수임아
[김수임] 이젠 결심했어 삼복만 지나면 미국으로 갈거야 원일이 아빠가 하자는대루 결혼도 하구--- 다 잊고 잘 살거야 윤숙이 너두 나 만나러와야 해 응? 꼭? 네 신접살이때 옆동네루 내가 이사갔던것처럼---
[모윤숙] 그래 만나러 갈거야 (혼잣말로) 매일 올거야
[김수임] (갑자기 울면서 걸어간다) 재판에서 난 더이상 그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해버렸어 변호사가 시키는대로 해버렸어 그이를 배신했어 다시 만난다해도 볼 낯이 없어 그 사람은 목숨을 걸고 날 살리려고 하는데--- 만나면 뭐라고 말해야 하니?
((김수임 천천히 안으로 걸어간다. 무대전체로 총쏘는 소리 폭발음과 함께 전쟁을 알리는 당시의 신문기사들이 보여진다. 조명이 변하며 무대 안쪽에서 갑자기 일어선 헌병들 김수임을 향해서 총을 겨눈다. 총성이 울린다. 명멸하는 조명속에 쓰러지는 김수임의 모습이 사진처럼보인다. 조명이 변한다. 폐허의 사진들이 더큐멘타리 화면처럼 겹쳐지나. 사람들이 음악에 맞춰서 느린걸음으로 지나간다. 양계선 머리를 풀고 앉아서 머리를 빗다가 지나는 사람들에게 호소하듯 말한다.))
[계선] 죽었다는군요 한강변 모래밭에서 쏴 죽였대요 쾅하고 쏴 죽였대 누가 죽였는지 모르겠어 좌익인지 우익인지--- 누가 죽였는지 모르겠어 수임이가 죽었다는군요 간첩이라고 죽였대요 그놈의 사상이 뭐라고--- (나가다가) 어떻게하면 좋아? 날 보구 기다리라고 했는데--- 누구보구 머리를 빗겨 달래면 좋아? 수임아
((바람속에서 쪼그리고 앉아서 운다. 무대 한쪽의 조명속에서 모윤숙 폐허를 돌아보며 말한다.))
[모윤숙] 수임의 처형소식을 나는 자세하게 들은 일 없다. 닷새 뒤 6. 25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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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던 날 급박한 상황속에서 날짜를 앞당겨 한강변에서 처형되었다고도 하고 남로당이 구출해서 달아났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확인할 길은 없었다. (생각하다가) 전쟁이 끝난 뒤 곧 북에서 이강국이 간첩죄로 재판받아 사형을 선고 받았다는 소식이 왔다. 이강국이 김수임과 손잡고 미국을 위해 간첩행위를 한 죄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날 역시 비오고 바람이 몹씨 불었다. 시대를 휩쓸어간 사상의 격랑 속을 덧없이 떠내려간 이파리 두 개---
쓰고 뜨거운 차를 준비하고 나는 밤새 빗소리를 들었다.
((전쟁직후의 폐허 같은 광경이 보이는 무대로 허무한 느낌의 음악에 맞춰 사람들 천천히 유령처럼 엇갈린다 계선이 울며 반대쪽으로 걸어간다. 희미한 무대 안쪽 바람부는 언덕으로 손잡고 걸어가는 김수임과 이강국의 뒷모습이 보인다. 어두워 진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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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숭아트센터 두 번째 제작공연 / 한국현대사 재조명 시리즈1
나,김수임
정봉근 작, 한태숙 연출
1997.4.29-6.8
동숭아트센터 동숭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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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1. [김수임] (30세에서 1950년 현재의 39세까지) 실존인물
2. [이강국] (30세에서 1946년 현재 40세 까지) 실존인물
3. [모윤숙] (40세에서 43세까지) 실존인물
4. [양계선] (당시 43세) 가상인물
5. [최만용] (당시 36세) 실존인물
6. [검사] (43세) 가상인물
7. [변호사] (50세) 가상인물
8. [김종현] (47세) 가상인물
외에 헌병 몇 명이 필요하나 김종현등이 겸할 수 있다.
시일
현실적으로는 두달 사이
장소
김수임의집 두군데와 모윤숙의 집등 여기저기
때
현실적으로는 1950년 4월부터 6월사이, 과거속에서는 1946년 9월
무대
무대는 이층을 포함하여 세군데의 주택을 상상할 수 있는 구조였으면 한다. 사건이 진행되는 김수임의 옥인동 집을 중심으로 과거의 공덕동 한옥, 모윤숙의 회현동집 일부 그리고 재판정 등이추상적 구도로 세워졌으면 한다. 김수임의 옥인동집 거실은 구체적일 필요가 있다. 사건이 일어나던 1950년대의 집기와 가전제품, 커튼이 드리워진 거실의 한편으로는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고 반대쪽으로는 정원이 보인다. 나무들이 우거진 마당 저쪽으로는 이웃집과의 담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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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이 오르면 어두운 무대 한쪽에 폐허를 상징하는 구조물 앞에 허탈한 모습으로 앉아있는 모윤숙이 보인다. 바람이 부는 무대 여기저기에서 폐허를 바라보는 지친 사람들의 모습이 멀리 움직이지 않는 그림자처럼 보인다. 모윤숙 바람을 피하듯 옷을 여미며 자신에게 말하듯 나직하게 말한다.))
[모윤숙] 바람이 분다. 때이른 태풍이 오늘도 갈퀴같은 손으로 비에 젖은 폐허를 헤집는다. 천지에 아직도 온전한 것이 남아 있을까? 찢기지 않은 마음이 한조각인들 남아 있을까? 1953년 7월 27일 오늘 마침내 휴전협정이 조인되고 사년에 걸친 동족상잔의 전쟁은 끝났다. (침묵 하다가) 이제와서 무슨 할말이 있겠는가? (침묵하다가) 나는 이제 내 오랜 고통의 응어리, 수임을 놓아 보내려한다. 저 광기 가득한 시절의 바람결에 갈갈이 찢기운 한 생애가 그냥 홀로 떠내려가게 하려한다. 누가 기억이나 하겠는가? 삼년전 유월 그 초여름을---
((음악과 함께 조명이 사라졌다가 이내 밝아진다. 1950년 4월4일 밤, 김수임의 옥인동집 거실이 보인다. 거실 한쪽으로는 옆집 담이 보인다. 커튼을 내려 거실은 침침해 보인다. 불안한 느낌의 음악이 들린다. 개짖는 소리와 함께 검은 그림자가 무대 안쪽을 지나간다 김수임 방에서 나와서 불안한 듯 이층을 쳐다본다. 최만용 이층에서 내려온다))
[김수임] 만용이니? 거기서 뭐하니? 저 집에 가만히 숨어있지 못하구?
[최만용] 쉿! 골목안에 수상한 녀석들이 있어. 누나.
[김수임] 들킨거 아니니? 낮에 옥인시장에두 형사들이 쫙 깔렸더랜다.
[최만용] 지금 라디오에서는 난리났어 우리가 빼돌린 사형수 이중업의 탈출소식뿐이야. 홀딱 뒤집혔어.
[김수임] 그사람 들켰으면 어떻게 하지?
[최만용] 여기 숨은줄은 모를거야 아직 서울에 있는줄은 모를걸?
[김수임] 이번에 가면 거기서 자리잡고 다시는 올 생각하지마라. 공산당한다구 뛰지말구 농사나짓구 점잖게 살 생각해.
[최만용] 뭐지? 잘못 봤나?
[김수임] 왜 안오지? 안되겠다. 차 빨리 보내라고 독촉해야지 (수화기 든다)
[최만용] (전화를 뺏는다) 차가와두 지금은 안돼. 그렇게 빨리는 못가.
[김수임] 왜? 들키면 어떻게 할려고? 이젠 나두 겁이 나.
[최만용] 경찰놈들이 미국 헌병감 부인을 어떻게 잡아? 여긴 안전해. 치외법권지역이거든. 남조선 노동당 지도부 김삼룡, 이주하 동지가 합류하면 여기가 이제 우리 남로당 아지트가 될거야.
[김수임] 얘가 무슨 소릴하니? 어림없다. 그러다가 들키면 난---
[최만용] 걱정 말아요. 대한민국 경찰하구 구내의 반은 우리 프락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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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임] 안돼. 싫어. 이번이 마지막이야
[최만용] 왜 이래? 누님은 엄연한 남로당 간부당원이고 체포된 당지도부 탈출시키는건 당원의 의무야. 당을 배반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김수임] 내가 언제 당원한댔어? 네가 나 몰래 억지로 만들었지. 뭐라고해도 이젠 어림없어
[최만용] (품에서 편지를 꺼내 던져준다) 껄적치근해서 안 줄까 했더니---
[김수임] (긴장해서 본다)
[최만용] 이선생 편지야 한달전 올 때 줍디다.
[김수임] 이제와서 그사람 편지 받을 일 없다. 잊은지 오래야.
((김수임 외면하다가 타들어가는 편지를 집어들고 읽는다.))
[최만용] 그양반 잘못하면 숙청되겠두만. 눈치없이 김일성장군을 비판했어
((김수임 편지를 들고 한옆으로 가서 앉아 스탠드의 불을 켜고 읽는다. 무대 안쪽에서 좌절한 모습의 이강국 천천히 거닐며 말한다.))
[김수임] 당신 소식은 풍문에 간간 들었소.
[이강국] 당신 소식은 풍문에 간간 들었소. 비어드 대령하고 살림을 차렸더구먼. 소식을 들은 며칠은 참 견디기 어려웠소. 여기와서 나는 술이 늘었어. 사회주의 체제속에서의 인텔리겐차의 말로가 이런 것인가 생각할 때가 많지. 뜻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어. 나는 정말 무슨 함정에 빠진 것만 같소. (생각하다가) 남북이 모두 이렇게 나가다가는 조만간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오. 권력과 재물을 창출하려면 필연코 전쟁을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더군. 당신 말이 맞았어. 사상이 현실에 적용되면 얼마나 추하게 변질되는지 진작 알았어야했어. (생각하다가) 당에서는 내가 당신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강요하더군. 나는 거절했어. 이중업이 남로당 간부이기는 하지만 그사람을 위해서 당신을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다고 거절했소. 수임, 후회하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쓰는지 모를거요. 우리가 과연 어떤 시대에 태어났단 말이요? 우리만큼 불행한 민족이 또 있을까? 우리는 지금 전혀 낯선 삶의 방식을 선택하도록 강요당하고 있어. 가장 옳은 방법으로 새나라를 세우자고 그렇게들 애썼건만--- 무엇하러 젊은 날을 그렇게 치열하게 싸웠는지 무엇하러 당신을 놓아두고 예까지 왔는지 쓰라린 생각만 드는구려. 보고싶구려. 당신 웃음소리, 머리냄새, 자박자박 골목을 걸어오던 발자국 소리까지--- 잠시도 잊을수가 없소 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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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국 주변의 조명 사라진다. 수임 움직이지 않는다. 갑자기 남자들의 그림자가 담장밑으로 뛰어 지나간다. 호각소리가 들린다. 두사람 벌떡 일어난다. 호각소리와 함께 (서라) (누구냐)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김수임 일어나서 내다본다. 최만용 이층으로 숨는다. 양계선 어리둥절해서 서있는다.))
[김수임] (놀라서) 아니 계선언니, 어디루 들어오는거야? 계선언니? 왜 담장구멍으로 들어와? 큰길에 있는 대문으로 오지않고?
[계선] 깜짝 놀랬네! 저 옆집 대문으로 들어왔는데 여기루 나왔어 이상두 하지?
[김수임] 언니! 우리집은 정문으로 허락받고 들어오지않으면 보초한테 조사받는거 알잖아, 왜 옆집으로 갔어?
[계선] 형사들이 너희집을 기웃대다가 저집으루 가길래 이상해서 따라가봤어.
[김수임] (급히 창밖을 보며) 형사? 형산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계선] 일동이 잡으러 드나들 때 다 봐서 난 척 보면 다 알아. 도둑들처럼 저집을 이방저방 막 뒤지더라 애기는 자니? 그녀석 밤낮 잠만 자더라 깨워야지.
[최만용] (당황한다) 계선누님!
[계선] 누구야? (자세히 보며) 빨갱이 만용이구나 이북에 있다더니?
[김수임] 방에 들어가 있어 언니 빨리--- (계선을 밀어내고 돌아서며) 큰일났어 수색 당한거 같아. 이중업 그사람 잡혔으면 어떻게 하지?
[최만용] 뒷마당 창고에 있어 이상한 소리가 나서 담 타넘어 뒷마당 창고에 숨었대. 안되겠어 다른 동지는 단념하고 우리라도 빨리 가야겠어. 누나도 짐싸요.
[김수임] 얘가 무슨소리 하는거니?
[최만용] 옆집이 수색당했다면 누님 신분이 노출됐을지도 몰라. 차 오는대로 같이 갑시다.
[김수임] 내일은 내가 알아서 해! 나는 남로당이나 공산당에 관심없다. 더이상 날 끌어들이지 마!
[최만용] 내가 여기 왜 내려온줄 알아? 할수만 있다면 이선생한테 누날 데려 가고 싶었어. 서로 못 잊으면서 왜 이래?
[김수임] 북에 가도 내가 있을 자리는 없어. 우리관계는 그때 다 끝났어.
[최만용] 그럼 이 위험한 일을 뭐하러 도왔어? 사람 복장터지게 좀 하지마. 보고 싶으면 따라가서 살아 뭐가 무서워서 (차 멎는 소리)
[김수임] 알지? 검문소 통과할때 까지는 안심할 수없어. 운전수 한테 다 말해놨으니까 넌 가만 있으면 돼.
[최만용] 우린 그냥 갈테니까 내다보지마.
[김수임] (긴장하며) 만용아!
[최만용] 언제 또 만날지 몰라. 제발 잘 좀 살아봐. 누나만 잘 살면 나두 다시는 여기 안 내려와. 잘 있어. 누나 몸조심하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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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김수임을 보다가 독촉하는 듯한 클랙션 소리를 듣고 이층을 향해서 신호하고 나간다. 천둥 번개한다. 바람이 커튼을 흔든다. 김수임 추운듯 의자에 웅크리고 앉는다. 계선이 창밖을 보며 방심한듯 말한다.))
[계선] 만용이하고 누군지 처음보는 남자하고 둘이 가방을 들고 가네 그런데 만용이는 왜 화를 내고 가니? 바람두 심한데 이밤에 어딜간다는거지? 이상하지? 전에두 이런일을 본 것 같은데--- 그날밤하고 똑같애 너두 생각나지? 왜 일동이는 살아있고 일동이 아버지가 좌익청년단테 검거하러 갔다가 빨갱이들 한테 맞아죽던해--- 생각안나? 나두 공덕동집에 있었잖아, 왜 그때 사년전 이강국씨가 도망가던때---
((사방의 커튼들이 천천히 조금씩 흔들리면서 조명이 변해 과거가 된다. 이층 김수임의 공덕동 집 한옥의 방안이 밝아진다.))
[이강국] (가운을 덧입은 차림으로 나오며) 당신한테 어머니 없는줄을 다 알텐데 개성사는 어머니가 편찮아서 의사를 데려간다고 둘러댔단 말이야.
[김수임] 군정청 버츠중위가 짚차를 빌려줬어 검문소에서도 미군뾼차는 대강 그냥 통과시키니까 괜찮을거야.
[이강국] 우린 그냥 가도 돼 시국이 수상한테 당신까지 개입할것 없어.
[김수임] 내걱정은 말아요. 체포령이 내려서 그렇지 삼팔선이야 새우젓 장수도 마음대로 드나드는데---
((김수임 옆방으로 가려는데 갑자기 모윤숙 들어온다. 두사람 놀란다.))
[모윤숙] 아유 데모대 피해 오느라고 혼났어.
[김수임] (놀라며) 윤숙이 너 웬일이니?
[모윤숙] 신탁통치 반대 데모대하고 찬탁데모대가 마주쳐서 막 패싸움을 하는데 바람은 또---
[김수임] 나 오늘 여행가서 집에 없을거라고 했잖아? 잠깐 기다려. 우리 막 나가는 참이야 (나간다)
[모윤숙] (이강국을 보며) 체포령이 내려서 피신했다더니 여기 계셨군요 변장까지 하고 어딜 가세요?
[이강국] 모선생한테 들켰군요. 여기 있을줄 몰랐습니까?
[최만용] (가방들고 오며) 반탁괴수 이승만이 숭배자가 오셨군. 하필 이런날---
[모윤숙] 말버릇은 ?
[최만용] 이승만이하고 데모나 하러가지 여긴 왜 오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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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윤숙] 이박사가 신탁통치에 반대하는게 어때서 그래? 겨우 독립을 했는데 또 남의 지배를 받아야 하니? 네가 뭘 안다구 함부로 나서? 데리구 다니지만 말구 좀 나무라세요
[최만용] (나가며) 못배운 사람은 사람도 아니요 ? 하는 말마다 재수없게---
[이강국] 이박사 말입니까? 애들한테 욕먹게도 생겼죠, 미소공동위원회 감시 아래 통일과도정부를 갖자는데 자꾸 반대만 하니 욕먹게도 생겼지요 백범선생, 몽양선생 같은분들도 다 찬성하는데 말이요
[모윤숙] 좌익 정치인 숫자가 더 많으니 과도정부는 결국 좌익차지가 되지 않겠어요?
[이강국] 통일정부가 중요하지 누가 정권을 잡느냐가 중요합니까?
[모윤숙] 좌익이 주도하는 과도정부는 절대 용납할수 없어요.
[이강국] 좌익 우익 다 정신차리고 외세를 경계해야 할땝니다. 잘못하면 강국들의 냉전논리에 말려서 분단이 굳어질 위험도 있어요. 진정한 우리편은 우리밖에 없다는걸 알아야지요
[모윤숙] 편협한 식견이군요 냉전은 이미 시작됐고 소련은 미국을 못 당해요 좌익은 이제 끝났어요 공연한 말로 수임이를 세뇌하지 마세요
[이강국] 모선생은 늘 이기는 편만 들고 싶어 하시는군요 지금 당장 우세해 보이는 쪽이 꼭 정의는 아니지요. 젊은애들한테 친일시인으로 매도당하는 것두 아마 그런 심약함 때문일겁니다.
[모윤숙] 내가 언제 좋아서 친일시를 냵어요? 난 창씨개명도 하지 않았어요. 그때는 그럴 수 밖에 없었다는 걸 알면서도 모욕하는군요
[이강국] 좋아서했던 아니던 전력은 전력이지요. 언제까지나 피하기만 할 수는 없을겁니다. 기왕에 저지른 일이라면 사죄를 하던 해명을 하던 입장은 분명히 밝혀야지.
[모윤숙] 이강국씨야말로 입장을 밝혔으면 좋겠군요 수임이 착하고 불쌍한 아이예요. 정많고 마음 여린걸 이용하지 마세요.
[이강국] 이용이라니요 모윤숙선생---
[김수임] (들어오며) 속상하게 왜 만나기만하면 다퉈요? 이렇게 헤어지면 언제 또 만날지 모르는데--- 윤숙이 너두 이선생님 한테 너무 그러는거 아냐.
[모윤숙] 너 지금 내 앞에서 이강국씨 편드니? 남편이나 돼? 체포령 내린 좌익일뿐이야. 당장이라도 신고하면---
[최만용] (들어오며) 내 수상하다고 했었지? 정탐하러 온거야. 밀고했을지도 몰라. (권총을 장전하며) 내 전부터 별렀어. 이 친일 반동---
[이강국] (총을 뺏는다) 만용아!
[김수임] (긴장하며) 너--- 정말 여기 왜 왔어? 내가 집에 없을줄 알면서?
[모윤숙] 내가 네집에 갑자기 오면 안돼니? 친일파라더니 이젠 밀고자로 몰아? (나가며) 같잖게 굴지마라 정떨어진다.
[김수임] (당황하며) 윤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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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윤숙] 이십년 친구보다 몇년 사귄 남자가 더 중요해? 우리 우정이 겨우 이정도였니? 넌 이강국씨 여기 있는걸 나한테 끝까지 감췄지만 나는 그래두 걱정이 돼서 와봤어 쏘고 싶으면 쏘라고 그래 다시는 다시는 네꼴 안볼테니까---
((김수임 모윤숙을 잡으려다가 멈춘다. 잠시 고민에 싸여 침묵한다.))
[김수임] 당신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혼자만 남았다는 기분이 드는게 정말 싫어.
[이강국] 가두 오래있지 않을거요. 미군만 철수하면 곧 돌아와. 의지할데 없는 사람을 두고가는 나는 좋을 것 같소? 공연한 자존심으로 일을 복잡하게 하는건 당신자신이요. 이북에서도 당신만큼 외국어에 능한 사람은 꼭 필요하오. 왜 여기 남겠다는거야?
[김수임] 자기자신의 존재가치를 의심해 본일이 없으면 내마음이 어떤지 모를거야. 아홉살 때 어머니가 날 버리고 가버렸을때 나는 정말 내가 값없다는 생각을 했었어 얼마나 싫었으면 엄마까지 버리고 갔을까하고--- 열두살때 계부가 날 벼 두가마값에 포천사는 머슴한테 팔았을때도 그런 생각을 했었어 난 돈으로 팔고사는 물건이구나---
[이강국] 당신은 가끔 날 고문해. 데려가지 못하는 사람 기분을 생각해 봐.
[김수임] 불안하면 난 언제나 혼자 내버려지는 꿈을 꿔요 쓰레기나 강아지나 뭐 그런것처럼--- 그런 꿈을 꾸고 깰때마다 나는 속으로 주문처럼 말하지. 나는 나자신의 삶을 살 수 있다 아무것에도 좌우되지 않고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내 손으로 내 운명을 결정한다---
(갑자기 차 멎는 소리에 긴장한다)
[이강국] 가야 돼 (나가다가) 혼자라는 생각 하지마. 죽어서라도 난 당신한테 돌아와.
((김수임 잠시 서있다가 급히 따라나간다. 현실의 조명 들어오며 천둥번개한다. 바람소리가 거칠게 들린다. 조명 변하며 음악이 들린다. 어두운 무대 한쪽이 차츰 밝아지면 계선 현관에서 꽃들을 안고 들어온다.))
[계선] (환하게 웃으며) 꽃이 왔어 대령이 보냈댄다. 아유 이게 몇송이야? (장미 꽃을 여기 저기 꽂으며) 장미꽃을 많이두 보냈어. 수임아 나와봐 집안이 다 환해졌어. 카드도 보냈네?
((김수임 지친 모습으로 방에서 나온다. 카드를 보다가 영어로 읽는다.))
[계선] 뭐라고 했니? 형사들인지 누군지 이상한 사람들이 옆집이랑 담밖에 매일 어른거려서 무서워 죽겠는데 왜 집에 못들어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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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임] 또 어디서 빨치산이 나와서 비상 걸려서 못 들어온대. 바쁜가봐. 생일상 같이 못받아서 미안하다고. 내가 장미꽃을 좋아하니까.
[계선] 대령은 정말 신사야. 점잖구 친절하구--- 한국남자들이 어디 그러는것 봤니? 일동이 아버지두 착하긴 해두 그렇지는 않았어 너두 대령한테 잘해야해. 만용이가 여기 왔다 간거 알아? (음악 끈다)
김수임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서 감췄어. 알면 화낼거야. 엄격하고 철저한 사람이거든 . 직위때문에라도 조심 해줬어야 하는데--- 배반했다고 생각하겠지?
[계선] 그래 화를 내겠지. 우리 일동이 아버지도 왜놈들 쫓아내고 해방만 되면 잘 살줄 알았는데--- 사상이 뭐라고--- 그놈의 사상이 뭐라고.
[김수임] 언니 죽은사람 자꾸 생각하면 뭐해! 바람불 때마다 헤메고 다니지 말고 매일 우리집에 와. 누구--- 정말 마음이 통하는 가까운 사람하고 말을 하면 안정이 되니까---
[계선] 왜 이렇게 을씨년 스럽지? 집이 우는것 같다. 바람소린가? 온 세상이 다 머리풀고 앉아서 어이 어이 우는것 같다.
잠시 고적하게 서있다가 수임 결심한듯 구식 전화를 건다.
[김수임] 여보세요? 나야 윤숙아 나--- 수임이 (침묵하다가) 너무 오랜만이지. 귀국했다는 소식 신문에서 봤어. 유엔에서 활약이 컸다구? 반가웠어. (망서리며) 오늘이 삼월 초닷새 네 생일 아냐? 그래서 전처럼 우리 같이 생일상을 받으면--- (가만히 수화기를 귀에 대고 듣다가) 너 아직두 화가 안 풀렸니? 한번 만났으면 좋겠어. (혼자말로) 사람이 그리워서 그래. 너 아직 듣고 있니? (기다리다가 풀 죽으며 수화기를 놓으려다가) 여보세요? (반색하며) 응 그래 윤숙아 반찬 없으면 어떻구 미역국 하나면 어때? 회현동으루 곧 갈께. 고마워.
((기뻐하며 서둘러 외출준비를 한다. 계선 옆에 와서 서성인다.))
[계선] (망설이며) 나두 따라가면 안돼?
[김수임] 애보는 이하고 보비 데리고 여기 있어. 바람불면 언니 또 마음 못잡잖아? 잠깐 나갔다 금방 올게.
[계선] 가서 못오면 어떻게 해?
[김수임] (웃옷을 입으며) 왜 못와?
[계선] 나 꿈꿨다? 네가 시집가는 꿈 꿨어. 족두리쓰고 활옷입고 시집가더라.
[김수임] (나가며) 좋은 꿈이네. 빨리올께.
((김수임 웃옷을 걸치고 서둘러 나간다. 어두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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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선] 꿈에 시집가면--- 뭐라고 했지? (창밖을 보며) 저게 누구지?
((조명이 차츰 어두워진다.))
((무대 안에서 남자들의 그림자가 일렁이며 일어서서 낮고 빠르게 속삭인다.))
[소리1] 기회야 외출한다는 제보를 받았어.
[소리2] 체포합시다.
[소리3] 운전병이 있어 저지 당할걸?
[소리1] 미리 가 있다가 운전병 몰래 뒷문으로 슬쩍 빼돌려
[소리2] 따라 가 따라 가
((그림자들 갑자기 호각소리, 시끄러운 구둣발 소리와 함께 빠른 몸짓으로 뛰어간다. 조명이 바뀌어 어두워진다 빠른 박자의 음악과 함께 차츰 밝아지면 냉냉하고 살벌해 보이는 심문실이 된다. 검사 책상앞에 앉아 냉정하게 서류를 읽는다.))
[검사] 에 또--- 이름 김수임 나이 설흔아홉 주소 서울시 옥인동 십구번지 직업은 없고 이화여전 영문과 졸업, 세브란스병원, 반도호텔, 미대사관에서 일한 바있고 미 제24사단 헌병사령관 비어드대령과 동거중, 북에 있는 정부 이강국을 위하여 간첩행위를 한 혐의로 회현동 모윤숙 시인의 집에서 체포되었음. (김수임에게) 시인합니까?
((차츰 무대 한쪽이 밝아지며 지친 듯 서있는 김수임의 모습이 보인다.))
[김수임] 벌써 몇번째지요? 친구집 생일파티에 간사람 잡아다가 가둬두더니 간첩이라니요?
[검사] 남파간첩 최만용과는 어떤 사이지?
[김수임] 동생이라고 말씀드렸을텐데요
[검사] 정부가 아니고? 성두 다른데 무슨 소리야?
[김수임] (화내며 외면한다) 말같지도 않은 소리를--- 이런 법도 있습니까? 도와달라고 데리고 와서는
[검사] 이중업과는 어떤 사이고?
[김수임] 얼굴도 본적 없어요 모른다고 말했잖아요? 정말 끈질기군요
[검사] 모르는 사내를 동거하는 남자 몰래 감췄다가 탈출시키나?
[김수임] (침묵한다)
[검사] 북에서 미군철수 계획을 자세하게 알고 있던데. 남편한테서 빼낸 정보를 이강국한테 보내지 않았다고 잡아떼겠어?
[김수임] 신문에 실린 기사도 국가기밀에 속해요? 그 정도는 뉴스 앤 월드 리포트 같은데 늘 실리는 뉴스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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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 비어드대령도 공범아냐?
[김수임] 그분은 아무것도 몰라요 이일과 연관짓지 마세요
[검사] 당신--- 남파간첩 최만용에게 돈을 줬다던데?
[김수임] 위험한짓 하지 말고 농사지속 안정하라고 땅살 돈을 좀 줬어요.
[검사] 공산당에 거액의 정치자금을 헌납한건 확실하군, 집도 사줬다던데?
[김수임] 마침 옆집에 빈집이 있어서 잠시 묵으라고 세를 얻어주었지요.
[검사] 남로당 비밀아지트를 장만해주었으니 북조선에서 훈장하난 받겠군. 거액의 정치자금을 집에 감췄다가 자신의 차를 이용해서 이북으로 운반해주면서 얼마나 받았지?
[김수임] 그건 이중업이 돈이고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했을텐데요. 그 점에 대해서 저는 아는바 없습니다. 뭘 잘못했다고 이러세요?
[검사] 사형수를 탈출시켜서 집안에 감췄다가 이북으로 도망시키지 않았나? 다 자백해놓고 잡아뗄거야? 언제까지 특별대우를 해줄 줄 알아? 빨치산 가족을 집에 드나들게 하면서 보호한 이유는 뭐야? 저 미친 양계선이를 통해서 빨치산과 계속 접촉한 사실을 부인할건가?
[계선] (비명) 수임아! 수임아!
((밖에서 다시 비명소리 길게 들린다. 김수임 진저리친다.))
[김수임] (화낸다) 무슨짓을 하는 거예요. 온전치도 못한 사람에게 무슨짓을 하는거예요? 저 사람은 아무것도 몰라요. 아들은 공산당이었지만 남편은 좌익에게 학살당한 경찰가족이예요,저사람은 괴롭히지 마세요.
[검사] 양키하고 사는것도 정부 이강국이 지시해선가? 문화예술제 사람들과 외국인, 고위공직자들을 청해서 파티도 자주 열던데 정보수집을 위해서 겠지? 그런데서 만난 양키들 이놈저놈한테 몸을 팔아서까지 당에 충성하나? 이렇게 얼굴 반반하다고 막 놀아났어?
[김수임] (뿌리치고 화내며 일어선다) 무례하군요. 감히 누구한테?
[검사] 당신들 생각성 없는 유한계층 신여성들은 한번 호된 맛을 봐야겠어. 지금이 어느 땐지 알고있나? 본때를 봐야겠어?
[김수임] 신여성이 이일하고 무슨 상관있습니까? 그정도 협박에는 넘어가지 않습니다.
[검사] 이중업이가 삼팔선을 넘어 개성에 닿자마자 최만용이를 죽여서 암매장했다는 소식은 알고 있나?
[김수임] (타격받는다)
[검사] 개성부근 야산에서 시체가 나왔더군. 이강국이가 지시했겠지?
[김수임] 만용이를 왜? 그럴리가,믿을수가 없어요. 거짓말까지 하는군요
((갑자기 전화벨이 울린다. 검사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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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 응, 연결해줘 (준다)
[김수임] 누군데요?
[검사] 받아보쇼 반가울테니.
[김수임] (의심하며 받는다, 듣다가) 여보세요?--- 울지마 아가 그래. 엄마야 엄마 곧 갈게 조금만 기다려 보비야
[검사] (수화기를 뺏어 놓으며) 얘기 좀 합시다. 김여사 일로 우린 아주 곤란하게 됐어요 석방하라고 사방에서 압력은 오고---
[김수임] (운다)
[검사] 털어놓고 얘기해서 이번일의 문제는 물증이 없다는 겁니다 영장도 없이 잡아다 가둬두고 심문했는데 증거가 없어서 기소를 못하면 관계자 모두 목이 달아날지 모릅니다 신분이 신분이시니만큼 정부입장까지 곤란해졌어요. (혀를차며) 정적을 좌익으로 몰아서 탄압 한다고 벌써 말이 많은데---
[김수임] 어떻게하면 되지요? 저는 우리애 때문에라도 빨리 집에 가야합니다.
[검사] 증거만 있으면 빨리 재판으로 들어갈수 있으니 서로 좋은데---
[김수임] 재판을 받으면 어떻게 되는데요?
[검사] 구형은 검찰에서 하기 나름인데 협조하시면 이쪽에서도 충분한 배려를 해주겠습니다만. 우린 영장없이는 김여사댁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김수임] 집에 가게만 해주시면 제가 찾아볼께요 아이도 잠깐 볼 수 있고--- 그런데 특별한데 없으면 어떻게 하지요?
[검사] 뭔가 있을겁니다. 틀림없어요 잘 생각해보세요 떠나기전 만났을 때---
((김수임을 벽으로 몰며 강요한다. 김수임 외면한다. 조명이 변하면서 과거가 된다. 음악과 함께 무대한쪽이 밝아지면 촛불 앞에서 이강국 음악에 맞춰 춤춰 보인다.))
[이강국] 축제때는 정말 대단하지. 학교부근 온동네가 꽃으로 덮이고 사방에서 음악 울리고 밤에는 광장마다 무도회가 벌어져. 독일사람들은 무뚜뚝한거 같아도 정말 춤을 좋아하거든.
((음악에 맞춰 춤춰 보인다. 김수임이 들어오며 같이 스텝을 밟다가 앉으며))
[김수임] 그리워요? 베를린 시절이?
[이강국] 허전했어.
[김수임] 왜? 당신 얘기를 들은면 꿈의도시 같던데? 당신 말만 들었는데 난 우리가 거기 함께 있었던것만 같아.
[이강국] 쓸쓸했어 이국적이고 다 좋았지만 함께 나눌 사람이 없었거든, 함께 할 사람이 없다면 그런건 아무 의미도 없는거야.
[페이지] 012
[김수임] 밤에 눈감고 있으면 당신하고 독일에 있는 상상을 해요, 당신이 말한길 가로수 도서관 같은 것들이 다 보이는 것만 같아. 둘이 손잡고 낙엽깔린 길을 걸어 오페라를 보러가는 것만 같아. 둘이 손잡고 낙엽까린 길을 걸어 오페라를 보러가는 거예요. 데모두 파업두 좌익우익테러두 상관없이---
[이강국] 거기서 처음 우리 젊은이들이 가엾다는 생각이 들더군. 투쟁하고 견디며 사느라고인새이 무엇인지 조차 모르고 젊음을 보내는 우리 젊은애들을 생각하니 초조했어. 얼른 돌아와서 좀더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사상으로 희망을 갖게 해주고 싶었어.
[김수임] (흥이 깨지며) 겨우공산당 사상을 교육하는걸로요. 이상과 현실은 다른 거에요.
[이강국] (화낸다) 우익이 정권을 잡은 여기서 쫓긴다고 맑스레닌의 주장에 오류가 있는건 아냐.
[김수임] 해방이 되더니 우린 모두 미쳤나봐. 어디를 가나 사상논쟁으로 패싸움만하고 어떻게하면 같이 행복하게 살수있는지는 상관도 안해.
[이강국] (달래며) 공산주의는 인류가 생각해낼수있는 가장 이상적인 삶의 방법이야. 인간의본성을 통제할수 없다면 구원도 없거든. 종교같은 일시적 마약으로는 불가능한걸 공산주의는 가능하게 할수있어. 경성제대에서 처음 맑시즘 연구를 시작했을 때 나는 이 사상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쳐도 좋다는 생각을 했었어.
[김수임] 그런 감상적인 사상이 나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이강국] 중요한건 우리가 함께 살 가장 좋은 삶의방법을 택하자는 거야.
((갑자기 문열리며 최만용 술취해서 들어온다.))
[최만용] 당신 이강국선생 우리누나한테서 손떼지 않으면 죽일거야 결혼할 것도 아니면서 왜 자꾸 찾아다녀? 이북으로 갈거면서 왜 찾아와? 죽여버릴거야.
[이강국] 만용아! 너 또 취했구나.
[최만용] 당신 때문에 아까운 나이 십년을 허송했어. 우리누나 착하고 불쌍한 사람이야 선교사집에서 식모살이 하면서 피한방울 안섞인 나를 키우느라고 고생 많이 했어 당신 죽여버릴거야
[김수임]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거야
[최만용] 내가 공산당은 괜히 하는줄 알아? 혁명이 일어나면 너 같은건---
[김수임] 나가지 못하니? 어디와서 주정을 해?
[최만용] 쥐구멍에도 볕들날 있어 우리가 언제까지 이렇게 살줄 알아? 책임을 지라고 해 누님. 관계를 끊던지 우리를 막봐서 저러는거야. 누님, 또 속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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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고 나와서 팔을 비틀어서 밀어버린다))
[최만용] (나가며) 저따위 부르조아지는 철저한 공산당이 될 자격이 없어 언젠가는 자기도 망하고 누님도 배신할거야 제발 속 좀 차려 누님
[김수임] (어쩔줄 모르며) 만용아 만용아 거기 길 험하니까 멀리 가지 마.
((바람 분다. 이강국 김수임의 외투를 입혀준다. 조명이 변한다.))
[김수임] 이북갈 때 데리고 가세요. 철없고 성급해서 여기 두기는 위험해요.
[이강국] 설익은 공산당은 거기서두 위험해. 인민정권이 수립되면 난 외국에 대사로 나가게 될지도 몰라. 그럼 우린 밖에나가 함께 살수도 있어.
[김수임] 첩으루?
[이강국] ---
[김수임] 당신을 나눠 갖으면서까지 나를 모욕하진 않겠어.
[이강국] 상황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라. 여기서 이승만 단독정부가 수립되면 분단이 굳어질수도 있어. 무슨 위험이 닥칠지 모른다구--- 같이 가는걸 다시 생각해봐 일단 가기만 하면---
[김수임] 당신은 인생의 진실을 몰라. 사람끼리 사는거예요 (기대며) 왜 우리는 만나기만 하면 싸우는지 몰라. 다시는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이강국] 마지막인 것처럼 말하지 마.
[김수임] 우리에게 아직도 사랑할 시간이 남아있을까?
[이강국] 돌아온다고 했잖아? 죽으나 사나 같은 배를 탔다는 확신을 가져야지 왜 자꾸 헤어진다고 생각해?
[김수임] 난 집착하지 않으려고 애써왔어. 내 마음대로 떠내려가게 날 내버려두세요. 헛된 꿈을 꾸지 않으려고 난 정말 노력해요.
[이강국] 모윤숙 시인의 시에 담긴 진실을 한번 생각해봐. 사랑에 관한 한 그 여자는 언제나 정직했어.
[김수임] 오직 그대 내 등불 가까이 오라 침묵의 흰하늘 그 달빛 비치는 내 등불 가까이 오라 물먹은 보리수 그늘아래 표류하는 혼 어둠에 고달프리 오직 그대 내 등불 가까이 오라
[이강국] (권총을 준다) 이총 감춰두었다가--- 만일의 경우에--- 운나빠서 잡히기라도 하면 당신도 심문 받을지도 몰라. 내가 드나들은 흔적을 없애고 나와의 관계는 모두 부인해야해. 알겠어?
[모윤숙] 오직 그대 내 등불 가까이 오라 침묵의 흰하늘 그 달빛 비치는 내 등불 가까이 오라 물먹은 보리수 그늘아래 표류하는 혼 어둠에 고달프리 오직 그대 내 등불 가까이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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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조명 사라진다. 현실의 조명이 들어온다. 추상적인 구도의 고등군법회의 군사재판 법정이 된다. 검사 변호사 사이에 머리를 단정하게 가매틀어 올리고 하늘빛 모시적삼에 짙은 보라빛 멜멧치마를 입고 흰손수건을 손에든 김수임이 보인다.))
[변호사] 피고는 공산주의가 무어라고 생각했습니까?
[김수임] 제가 알기에는--- 빈부의 차이를 없애자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변호사] 공산주의를 좋아합니까?
[김수임] 부자연스러운 생각이라고 알뿐 깊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변호사] 왜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했습니까?
[김수임] 억지로 소유와 경쟁을 제한하는 것은 사람의 본성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변호사] 이강국이가 공산주의자라는 알고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김수임] 진보적인 생각이라 심취한 줄은 알았지만 섭섭했습니다
[변호사] 사년전에 체포령이 내렸을 때 이강국을 탈출시킨 이유를 밝히시오.
[김수임] 체포되면 또 옥살이를 할 것 같아서 돕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변호사] 사년전에는 공산주의자 이강국이를 탈출시켰고 최근에는 남로당 조직 부장인 사형수 이중업이를 북으로 탈출시켰는데 자신이 국법을 어겼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까? 죄의식도 없었어요?
[김수임] (고개 숙이며) 떳떳치 못해서 두렵고 죄스러웠습니다. 동거하는 분께도 미안하고 곧 체포될 것 같아서 이중업을 보낸 뒤 하루하루가 무서웠습니다.
[변호사] 자수할 생각은 안했습니까?
[김수임] 그런 의논을 해보려고 친구 모윤숙 시인을 찾아갔다가 잡혔습니다.
[변호사] (대답을 강요하며) 북으로 보낸 뒤에도 이강국에게 돈과 커피 등 물자를 보냈던 이유가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이강국이를 지금도 사랑하고 있습니까?
[김수임] (망서린다)
[변호사] 대답하세요 이강국이를 아직도 사랑하고 있습니까?
[김수임] (변호사의 유도에 응하며) 아니요.
[변호사] 이상입니다.
((김수임 주저앉는다. 김수임과 변호사 주변만 밝아진다.))
[변호사] 뭘 우물우물하는 거요? 시키는대로 제깍제깍 대답해야지. 죄진 주제에 빳빳하게 굴어서 이로울게 없어요. (짜증내며) 성가시게 됐어요. 신문들이 김여사를 한국의 마타하리라고 더럽다고 떠들어서 곤란해 졌어. 창피하게 나하구 관계까지 의심하더구먼. 대체 같이 잔 남자가 몇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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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 되는거요? 에이---
[김수임] (당황한다) 누가 그런 말을 해요?
[변호사] 부끄러운줄 좀 아슈 당장 양코배기 미국놈하고 같이 살면서--- (서류 던져주며) 나 원 이건--- 운수불길 하려니까 사건이라고 이런게 걸려서--- 아무튼 기자들이 보는 듯하면 손수건으로 자꾸 눈물을 닦고 청승을 떨어요. 동정받지 않으면 큰일납니다. 저쪽에서는 이일로 큰공을 세웠다고 나서고 신문들은 차제에 상류층 신여성들에게 본때를 보여 혼뜨검을 내자고 저 야단이니 우린 옹골지게 걸린거에요. 알았습니까? 아 저 아주머니 오셨구먼. 온전한 사람이요?
[계선] (멍든 얼굴로 들어오며 울먹인다) 수임아
[김수임] 언니 괜찮아? 언제 석방됐어? 혼났지?
[계선] (끄덕인다) 무서웠어 자백해라 자백해라 하면서 막 때리더라 좌익두 아니구 우익두 아닌데 나까지 죽일려구해 왜들 그러지?
[김수임] 미안해 그런일 당하게해서--- 아기는 잘있어? 나 찾지 않아?
[계선] 잘있어. 엄마 찾아서 좀 보채기는 해도 잘 먹고 잘 놀고 똥두 잘 누고---
[김수임] 보비아빠 소식은--- ?
[계선] 대령은 본국에서 재판받아야 할거래.
[김수임] 부탁해 언니 애기 좀 잘 봐줘 이젠 언니밖에 믿을 사람이 없어
[계선] 그럼 너 나올때까지 애기는 내가 잘 볼거야 약속할게 잘 데리고 있다가 네품에 돌려줄게 그런데 너 정말 죄졌니? 무슨 죄?
((계선 나간다. 조명이 변하며 검사가 등장한다. 김수임 지쳐서 초라해진다. 손수건을 초조하게 매만진다.))
[검사] 정부 이강국이 북으로 데려간다고 했을텐데도 외국인과 동거를 한 것은 그 직위를 이용하여 간첩행위를 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까?
[김수임] 이강국은 제게 아무 약속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도 약속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같이 있는 동안 유감없이 행복했기 때문에 더 바라지 않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동거하는 분은 외국인이지만 오랫동안 제게 구애해왔고 성실한 애정과 안정을 주었습니다.
[검사] 피고의 집은 아방궁처럼 호화로워서 냉장고 선풍기 피아노등 온갖 사치품이 없는 것이 없다고 하던데 간첩활동 대가로 받은것입니까?
[김수임] 아닙니다 그런 것은 모두 동거하는 분의 생활용품일뿐 입니다
[검사] (객석을 향해) 여기 피고가 사는 집의 내부 사진이 있습니다. 온국민이 새나라를 세우고 허리띠를 졸라매며 근검절약하는 이때 피고가 외국물건들로 얼마나 뻔뻔하게 염치없이 호화사치하는 생활을 하는지 증거가 될것입니다. (돌아오며) 피고는 이렇게 허영스러운 생활을 하기 위하여 거액의 돈을 받고 간첩행동을 했다고 자백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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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임] (놀라며) 그런말 한일 없습니다
[검사] 정보를 모으기 위해서 외국인과 고위층인사들을 청해서 파티를 열어 매춘행위를 했다고 자백했지요?
[김수임] (분해서) 아니요 그런 자백을 한 일 없습니다.
[검사] (화낸다) 본인이 조서에 서명을 해놓고 부인할겁니까? 다시 시작하고 싶어요? 어때요? 자백했습니까? 아닙니까?
[김수임] (풀죽으며) 했습니다
[검사] 그럼 정신차리고 똑바로 대답하세요 해방이후 정부요인등 우익인사들에 대한 총기 테러가 잦았는데 증거로 나온 무기를 테러에 몇번이나 사용했지요?
[김수임] (당황하며) 그건 정표지 무기가 아니에요. 사용한 일 없습니다.
[검사] 피고의 집에서 압수된 무전기로 동거하는 외국인에게서 얻은 정보를 이강국에게 보냈다고 했는데?
[김수임] (울듯) 그건 만용이 두고 간 것이고 저는 만질 줄도 모릅니다. 그때도 그렇게 말씀드렸는데요
[검사] 지난 5월 27일 조국전선 중앙위원회는 이주하 김삼룡의 석방을 위한 투쟁을 결의했는데 이강국이 조만식선생 부자와 교환해서 석방시켜야할 구속 남로당 주요간부 명단에 김수임을 포함시키라고 주장했다는 정보가 있는데도 계속 접촉한 사실을 부인합니까?
[김수임] (믿을 수 없다는 듯) 그 사람이 제 석방을 요구한다구요?
[검사] 이강국이 직접 당간부들을 면대해서 자신이 사주한 여간첩 김수임의 교환석방을 요구했다는 기록을 입수했으므로 여기 제출합니다.
((조명이 변하면 무대위에 나란히 앉은 남자들의 실루땛을 향해 무대를 사납게 거닐며 말하는 이강국의 모습이 보인다.))
[이강국] 이건 대체 어떤 모임에서 누가 결의한거요? 노동당 중앙위원회의 결의가 맞소? 왜 이 명단에서 김수임의 이름이 빠졌소? 조만식 선생을 석방하는 댓가로 남한이 구속하고 있는 우리동지들을 맞바꾸는건 좋소. 남로당 지도부 이주하 김삼룡 동지를 포함시키는 것도 옳소. 그런데 김수임은 왜 빠졌소? 대답하시오. 위원회의 설명을 들어야겠소. 당신 처음보는 동진데 이름이 뭐야?
[김종현] 조국전선 중앙위원회의 김종현이요. 조만식 부자와 교환할 구속자 명단은 남조선 감옥에 억류주인 우리 애국동지들의 명단이지요. 그런데 여기에 미제국주의자의 애첩을 포함시키자고 말하는거요? 사상이 의심스럽소 이강국 동지. 종파주의로 김일성동지한테 맞서려는 거요?
((김종현의 뒤에서 나온 남자들 이강국의 뒤에 위협적으로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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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국] 김수임은 지금 남로당 조직책 이중업동지를 탈출시킨 죄로 간첩혐의를 받고 있소. 그 이중업이는 지금 남쪽에 있소. 겨우 한달만에 되돌아가서 지리산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할 이중업을 탈출시키기 위해서 그여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소. 당이야말로 분파주의를 획책하고 있소. 연안파와 남로당을 이렇게 하대할 수 있는거요?
((등뒤의 남자들 갑자기 이강국의 팔을 잡아 꺾는다. 이강국 저항한다.))
[김종현] 남조선에서 묵묵히 투쟁하는 노동자 농민들은 그보다 더한 희생을 하고 있소. 직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분파주의는 용서하지 않겠소.
[이강국] 이놈 김종현. 김수임의 특별한 입장을 철저하게 이용한 사실을 부인할거냐? 김수임을 부추겨 이중업 백형복등의 월북을 돕게하라고 내게 강요했던걸 다 잊었냐? 그사람은 헌신했어. 이제와서 배신하고 개처럼 내던져 죽게 할거냐? 이놈
[김종현] (등을 보인채 이강국을 때린다) 닥치지 못하나? 공화국은 인민을 이용하지 않소. 공산당은 오류를 범하지 않아. 그여자가 뭐요? 부르주아 탕녀요 당신 애첩일뿐 아니요? 부끄럽지도 않나? 이 타락한---
[이강국] (항거하며) 그 여자는 당을 위해 목숨을 걸었소.
((남자들 이강국을 에워싸고 구타한다.))
[김종현] 이성을 찾으시오. 이강국동지 연안파와 남로당이 다 함께 위기에 몰렸다는걸 모르시오? 여자 때문에 몰락을 시작하지 마시오. 당신도 미제간첩 이라는 의심을 받을 수 있어.
((남자들 이강국을 억지로 일으켜 세운다. 이강국 피흘리며 말한다.))
[이강국] 북조선 인민위원회 외무국장의 직위를 걸고 명령하겠소. 지시하겠소. 협박이라고 생가해도 좋소. 조만식과 김수임을 맞바꾸시오. 미제간첩이라고 의심받아도 상관없어. 한푼가치도 없는 정치생명 따위는 아무래도 좋소. 흑백논리의 비틀린 사상을 내세울 뿐 신의도 신념도 아무것도 없는 당신들의 정치 놀음에는 벌써 신물이 났어. 이렇게 부패하고 타락했으니 북과 남이 다를게 뭐 있단 말이요? 맑시즘의 이상향을 어디가서 찾겠어? (뿌리치고 돌아서며) 수임 당신을 결국 궁지에 몰아넣고 말았어. 내가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거요? 수임(일어나 항거하며 외친다)
((조명 엇바뀌어 그림자와 이강국 사라지고 재판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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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 피고 김수임은 고등교육을 받은 인텔리여성으로서 사회의 지도적 위치에 있으면서도 다만 일신상의 쾌락에 응하여 간첩행위를 해온 자입니다. 이북의 거동이 심상치 않은 이즈음 국민들의 안이한 사고에 경종을 울리고 국방경비태세를 확인하기 위하여서라도 국가안전을 위협하는 이런 흉악한 범죄에 대하여는 엄벌을 내릴 수밖에 없다는 판단 아래 국방경비법 제32조, 제33조 위반, 무기 및 범인 은닉, 국가기밀누설, 반역죄등을 적용하여 피고 김수임에게 사형을 구형합니다.
((사방에서 사형이라는 말이 메아리져 울린다. 경악한 얼굴로 서있는 김수임 주변으로 조명이 좁혀진다. 두사람의 남자가 나와서 반항하는 김수임에게 사슬을 채운다. 김수임 분노해서 반항하며 외친다.))
[양계선] 아니 거짓말이야 저이들이 그냥 해보는 말이야 협조하면 잘해준다고 했잖니? 보비아빠가 시경국장하고 장관을 마났었구 노천명이하구 우리 동문들이 장도영 장군한테 진정서도 냈댄다. 모윤숙이는 대통령을 만나러간다고 했대 걱정마 잘될거야 간첩은 뭐 아무나 하는거니?
[이강국] (일어나 항거하며 외친다) 명색 인민을 위한 정부가 이렇게 신의를 져버려도 좋소? 김수임을 이 명단에 포함시킬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겠소. 진정한 인민의 국가라면 인민을 배신할 수 없을거요.
[김수임] 증거만 주면 놔주겠다고 해놓고 사형이라니? 간첩이라니 사람이 중하지 사상이 중해요? 대체 누가 만들어낸 사상이야? 그렇게 억지같은 사상이나 이념이 사람 사는데 무슨 상관이 있어요? 증거만 찾아주면 놔주겠다고 약속해놓고--- 이럴 수 없어, 난 이런 죄로 죽을 수 없어. 사람이 사람한테 어떻게 이런짓을 해?
((양계선 헌병에게 끌려서 나간다. 흰모시저고리 남색반점이 있는 벨벳통치마에 중힐을 신은 모윤숙이 나온다. 잠시 절망하는 수임을 보다가 말한다.))
[모윤숙] 존경하는 재판장님 특별증언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남북이 서로 갈라져서 적대하고 있는 이 마당에 공산당의 주구노릇을 한 피고의 죄상은 극형을 당해도 마땅합니다. 그러나 학창시절을 함께한 친구로서 피고 김수임의 사람됨을 밝히고 관대한 처분을 호소하기 위하여 이 자리에 섰습니다. 김수임과 저는 이화여전 시절내내 한방에서 살았습니다. 무모가 없어서 언제나 외로웠던 수임은 학교시절 명랑하고 공부도 잘하는 모범생이었지만 단순하고 솔직할 뿐 사상에는 백치와 다름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만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강국을 피신시켜려 했던것이라고 봅니다. 이데올로기에 길들여지지 않은 현실속에서 사랑하는 남자의 코취를 받은 결과로 이렇게 되었으니 인생이 가엾지 않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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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 수임에게는 빈집에서 홀로 어미를 기다리는 이제 겨우 두 살된 아들이 있습니다. 의지할 데 없는 불쌍한 아이를 생각하셔서라도 관대한 처벌을 내려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절하고 물러나는 모윤숙 주변의 조명 사라지면 변호사 나서며 말한다.))
[변호사] 나흘동안의 재판을 통해서 본 바와 같이 피고는 시국이 사상투쟁으로 치열한 때를당하여 어리석은 여성의 몸으로 정치나 사상에 무지하여 공산당의 사주를 받아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피고가 사년전 저질렀던 이강국의 탈출방조역시 실제로 피고는 이중업의 감옥탈출에 관여한바가 없었습니다. 무기은닉죄와 자금제공건 또한 동생인 최만용의 주장에 이끌려 이용 당했을뿐입니다. 피고가 그동안 저질러온 행적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나 그 죄는 경미한 법적용으로도 충분할 뿐 국방경비법등을 적용하는 것은 닭잡는데 소잡는 칼을 휘두름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아녀자라는 말이 있듯 여자와 어린애는 본래 아둔하니 사상에 대해 무엇을 알아 죄를 지었겠습니까? 그저 관대한 처분을 바라며 본 변호인은 이 법정이 잘못된 시대조류에 휘말려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범한 냉전시대의 대표적인 법정으로 후세에 기억되지 않기를 바랄뿐입니다. 이상입니다.
[판사] (소리만 들린다) 본 법정은 이제 나흘간의 심리를 마치며 피고 김수임에게 국방경비법 32조 위반 간첩 및 이적행위를 범한 죄로 구형과 같이 사형을 언도하여 총살형에 처할 것을 선고합니다.
((사방에서 철창문이 소리를 내며 닫힌다. 김수임 사슬을 끌고 천천히 걸어오다가 넘어진다. 다시 일어나서 온다. 모윤숙 바라보며 손 내민다.))
[김수임] 윤숙이
[모윤숙] 수임이
[김수임] 추워 왜 이렇게 춥지? 발이 시려워
[모윤숙] 춥니? (손을 만지며) 내일은 버선 갖다 줄게 (운다) 수임아
[김수임] 괜찮을거야 울지 마. 그사람들도 본심이 아닐거야 약속했었어 협조만 하면 잘해주겠다고--- 약속했었어
[모윤숙] 아직도 남이 하는 말은 다 믿니? 모두 너 같은줄 알아? 사상에 대해서 넌 너무 안이했어 사람들이 친일은 괜히 한 줄 아니? 남이야 뭐라든 안전한 길을 택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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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임] 이세상 모든 사람은 적과 동지일 뿐이니까 어쩔 수 없었어. (갑자기 울면서 걸어간다) 재판에서 난 더 이상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해버렸어 변호사가 시키는대로 해버렸어 그이를 배신했어.
((조명이 변하면 무대 안쪽에서 갑자기 총성이 울린다. 명멸하는 조명 속에서 쓰러지는 김수임의 모습이 순간순간 정지된 사진처럼 보인다. 조명이 변한다. 전쟁의 발발을 알리는 신문기사들과 폐허의 다큐멘터리 사진들이 겹쳐진다. 사람들이 음악에 맞춰서 느린걸음으로 지나간다. 무대 한쪽이 조명속에서 모윤숙 폐허를 돌아보며 말한다.))
[모윤숙] 수임의 처형소식을 나는 자세하게 들은 일 없다. 닷새 뒤 6. 25가 일어나던 날 급박한 상황속에서 날짜를 앞당겨 한강변에서 처형되었다고도 하고 남로당이 구출해서 달아났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확인할 길은 없었다. (생각하다가) 전쟁이 끝난 뒤 곧 북에서 이강국이 간첩죄로 재판받아 사형을 선고 받았다는 소식이 왔다. 이강국이 김수임과 손잡고 미국을 위해 간첩행위를 한 죄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날 역시 비오고 바람이 몹씨 불었다. 시대를 휩쓸어간 사상의 격랑 속을 덧없이 떠내려간 이파리 두 개--- 쓰고 뜨거운 차를 준비하고 나는 밤새 빗소리를 들었다.
((전쟁직후의 폐허 같은 광경이 보이는 무대로 허무한 느낌의 음악에 맞춰 사람들 천천히 유령처럼 엇갈린다 계선이 울며 반대쪽으로 걸어간다. 희미한 무대 안쪽 바람 부는 언덕으로 손잡고 걸어가는 김수임과 이강국의 뒷모습이 보인다. 어두워진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