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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nPopta]하나님의성령에의해압도된발람은이스라엘의영광스런미래와발락의임박한곤경에대해말한다(Num23;27-24;14;VanPopta).hwp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압도된 발람은 이스라엘의 영광스런 미래와 발락의 임박한 곤경에 대해 말한다.
민 23:27-24:14
발락이 발람에게 또 이르되 오라 내가 너를 다른 곳으로 인도하리니 네가 거기서 나를 위하여 그들을 저주하기를 하나님이 혹시 기뻐하시리라 하고 발락이 발람을 인도하여 광야가 내려다 보이는 브올 산 꼭대기에 이르니 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여기 일곱 제단을 쌓고 거기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준비하소서
발락이 발람의 말대로 행하여 각 제단에 수송아지와 숫양을 드리니라
발람이 자기가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심을 보고 전과 같이 점술을 쓰지 아니하고 그의 낯을 광야로 향하여
눈을 들어 이스라엘이 그 지파대로 천막 친 것을 보는데 그 때에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임하신지라 그가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 전능자의 환상을 보는 자, 엎드려서 눈을 뜬 자가 말하기를
야곱이여 네 장막들이, 이스라엘이여 네 거처들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그 벌어짐이 골짜기 같고 강 가의 동산 같으며 여호와께서 심으신 침향목들 같고 물 가의 백향목들 같도다 그 물통에서는 물이 넘치겠고 그 씨는 많은 물 가에 있으리로다 그의 왕이 아각보다 높으니 그의 나라가 흥왕하리로다 하나님이 그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으니 그 힘이 들소와 같도다 그의 적국을 삼키고 그들의 뼈를 꺾으며 화살로 쏘아 꿰뚫으리로다
꿇어앉고 누움이 수사자와 같고 암사자와도 같으니 일으킬 자 누구이랴 너를 축복하는 자마다 복을 받을 것이요 너를 저주하는 자마다 저주를 받을지로다
발락이 발람에게 노하여 손뼉을 치며 말하되 내가 그대를 부른 것은 내 원수를 저주하라는 것이어늘 그대가 이같이 세 번 그들을 축복하였도다 그러므로 그대는 이제 그대의 곳으로 달아나라 내가 그대를 높여 심히 존귀하게 하기로 뜻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그대를 막아 존귀하지 못하게 하셨도다 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당신이 내게 보낸 사신들에게 내가 말하여 이르지 아니하였나이까 가령 발락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나는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간에 내 마음대로 행하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말하리라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이제 나는 내 백성에게로 돌아가거니와 들으소서 내가 이 백성이 후일에 당신의 백성에게 어떻게 할지를 당신에게 말하리이다
시편찬송: 시편 118:1,5; 시편 119:13;찬송 22:; 시편 68:1,8; 찬송 12:1,3,5.
성경낭독: 요한계시록 5장
사랑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회중이여!
교회는 위대한 미래를 가지고 있습니다. 경이로운 전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왕을 모시고 있습니다. 왕이신 예수, 다윗 가(家) 유다 지파의 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입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전능한 왕이십니다. 우리를 위해 자기 피를 쏟으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십니다. 그분은 자기 피로 하나님을 위해 우리를 사셨습니다. 그분은 자기 교회를 사셨습니다. 주 하나님을 섬기는 한 왕국과 제사장들이 되도록 모든 종족과 언어와 나라로부터 한 백성을 사셨습니다.
참으로 경이로운 전망입니다. 영광스러운 미래입니다.
오늘 아침 저는 여러분에게 발람의 세 번째 신탁을 방편으로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은 제목으로 설교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압도된 발람은 이스라엘의 영광스런 미래와 발락의 임박한 곤경에 대해 말한다.
1. 하나님의 성령께서 발람을 사용하신다.
2. 이스라엘의 영광스러운 미래
3. 발락에 대한 임박한 파멸
1. 하나님의 성령께서 발람을 사용하신다.
발락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두 번이나 발람은 발락을 위해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시도했으나, 실패했습니다. 두 번이나 이미 하나님께서 발람의 시도를 좌절시키시고 발람의 입에 축복의 말을 넣어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 술사를 사용하셔서 당신의 언약 백성을 축복하셨습니다. 그러나 발락은 다시 시도하고자 생각했습니다. 세 번째는 행운(幸運) 바로 이것이 발락의 모토였습니다. 본문 23장 19절의 메시지가 발락을 지나갔습니다.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발람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아니하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시랴?
하나님께서 이전에 자기 백성에게 복을 내리셨기에, 이제 마음을 바꾸어 저주를 내릴 수 없다는 것을 대단히 강력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달리 말해서 이 말에 함축된 의미는 “발람과 발락이여, 이제 포기하라! 하나님의 백성을 저주하려는 너의 수고는 시간 낭비일 따름이다. 아무리 애써도 실패할 것이다”입니다. 실제로 두 번째 축복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굶주린 짐승과 같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으로 가만히 앉아 기다리고 있다고, 먹잇감이 나타나면 덮칠 준비를 하고 있는 암사자와 수사자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발락은 좌절 속에서도 낙관주의적인 태도를 견지하고선 다시 다른 장소로 옮겨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시도합니다. 필시 이번에는 장소를 변경한다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발락은 발람이 다른 산꼭대기로 가서 거기에서 저주해주기를 바랐습니다. 이번에는 브올 산입니다. 발람은 이 산꼭대기 저 산꼭대기로 옮겨갑니다. 첫 번째로 발락은 발람을 밧모 바알(Bamoth Baal)로 데려갔습니다. 그 다음 비스가(Pisgah) 산꼭대기입니다. 이제 세 번째로 브올(Peor) 산 정상으로 데려갔습니다.
발람은 이 산 꼭대기로 발락과 함께 갔습니다. 발람은 자신을 발락의 세 번째 여정에 맡겼습니다. 발람은 주저하지 않고 발락을 따라갔습니다. 발람도 이번이야말로 계약을 성사시킬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발람은 혹 이스라엘을 성공적으로 저주할 수만 있다면 여전히 발락이 제의했던 뇌물을 챙기기를 바랍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축복하실 목적으로 발람을 계속 사용하고 계십니다. 발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용하시려 하시며, 그를 전적으로 통제하시며, 이 전 두 번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그를 압도하셔서, 그를 통하여 언약 백성의 유익을 위해 말씀하시려고 하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이 진을 치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라는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저 모압 평지 서쪽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산꼭대기, 즉 브올 산 정상에서, 발람이 다시 세 번째로 발락에게 일곱 제단을 쌓고 일곱 마리 소와 일곱 마리 양을 희생 제물로 드리라고 말했습니다. 발락은 두 번이나 실패한 것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단념하지 않았습니다. 발락은 즉각적으로 단을 쌓고 열네 마리 희생 동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본문 24장 1절은 얼핏 보면 발람이 이스라엘을 축복하고자 시작하는 것처럼 말합니다. 발람이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이 야웨의 선하신 뜻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 시작합니다. 마치 야웨께서 이스라엘 사방으로 축복의 벽을 쳐놓으신 것처럼 말입니다. 거기에는 결코 저주가 이 벽을 뚫고 들어갈 수 없듯이 말입니다. 이렇듯 세 번째 시도에서 발람은 앞에 두 번이나 시도했던 사술 혹은 복술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징조나 조짐을 살펴보기 위해서 희생 동물의 내장과 간을 살피는데 시간을 보냈습니다. 발람은 메시지를 얻기 위해서 [이전처럼] 발락에게서 한 치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제단 곁에 머물렀습니다. 광야 남서쪽을 둘러보았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몇몇 지파가 짝을 이루어 진을 치고 있던 이스라엘을 보았습니다. 밧모 바알과 비스가 산꼭대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일부를 보았는데 비해서, 이제는 이스라엘 전부를 다 볼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몽땅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하시기 위해서 거처를 삼으셨던 성막 주변으로 진을 치고 있던 이스라엘 전부를 말입니다.
발람의 눈이 이스라엘에 맞추었을 때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발람에게 임하셨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성령이 발람 위에 내려오셨다고 말할 때에, 우리가 누가복음 4장 18절에서 읽을 수 있는 메시아 즉위식과 같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가리키는 말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본문에서 주 예수님께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그가 나에게 기름 부어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려하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발람에게 성령이 임하셨다는 것은 오순절 신약 교회에게 주신 성령의 선물을 가리키는 것도 아닙니다.
대신에 특별한 과업을 위해 하나님의 성령의 일시적인 특별한 경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개개인이 여러 방면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했던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시적인 경험에 대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사사기에서 자주 접합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성령이 특정한 과업을 위해 특정한 사람, 즉 옷니엘이나 기드온이나 에후와 같은 사람에게 임해 그들을 무장시킨 기사에 대해 읽을 수 있습니다. 원수와 맞서 전쟁에서 싸워야 하기에 그들을 강하게 하고 용기백배하게 해야 했습니다. 출애굽기 31장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령을 충만케 하셔서 그들을 구비시켜 설계도를 만들어 금과 은과 동과 돌과 나무로 성막을 아름답게 장식하도록 하신 브사렐(Bezalel)이라는 사람에 대해 읽을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예는 사무엘상 10장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사울 왕에게 임하여, 사울이 예언했습니다.
특별한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성령의 일시적인 경험이 있었습니다. 발람이 했던 경험이 바로 이와 같은 유형이었습니다.
첫 두 번은 하나님께서 발람의 입에 말을 넣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발람과 만나, 하나님이 말씀하셔야 했던 내용을 발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성령이 발람을 압도하셨습니다. 그래서 발람은 무아지경으로, 즉 혼수상태(ecstatic trance)에 빠졌습니다.
발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성령이 그를 어떤 모습으로 압도하는지에 대해 묘사했습니다. 발람의 눈은 분명하게 보았습니다. 발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발람은 전능하신 이로부터 온 묵시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발람을 땅바닥에 드러눕히셨습니다. (이 말은 발람이 땅바닥에 엎드려 있었다는 뜻이다.) 발람은 하나님의 성령이 자신 위에 임하므로 땅바닥에 드러누워 있을 동안, 그의 눈이 열렸습니다.
이전에 발람은 말 못하는 동물만도 못할 정도로 인지력이 없었습니다. 자기가 부리는 나귀는 주의 천사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발람은 볼 수 없었습니다. 발람의 나귀가 발람보다도 훨씬 더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발람은 분명히 봅니다. 발람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봅니다. 발람은 평범한 인생이 볼 수 없는 것들을 인지할 수 있습니다. 모든 방해물이 모든 장애물이 제거되었습니다. 발람은 정상적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을 봅니다. 발람은 미래를 봅니다. 발람이 선견자가 되었습니다.
2. 이스라엘의 영광스러운 미래
발람이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압도되어 이스라엘의 영광스러운 미래를 보고 말합니다.
첫 번째 신탁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서 과거에 행하셨던 바에 대해서, 다시 말해서 어떻게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언약관계를 체결하셨는지에 대해서 말했습니다(과거). 두 번째 신탁은 자기 백성에 대해 현재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서 말했습니다(현재). 세 번째 신탁은 이제 과거와 현재에서 미래로 옮겨갑니다. 세 번째 신탁은 장차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할 것에 대한 묵시적인 예언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정착하여 왕정을 세우고,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물리치는 것에 대해서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발람을 통해서 말씀하시면서 이스라엘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하셨습니다. 5절과 6절을 보십시오. “야곱이여 네 장막이, 이스라엘이 네 거처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그 벌어짐이 골짜기 같고 강가의 동산 같으며 야웨의 심으신 침향목들 같고 물가의 백향목들 같도다.”
이스라엘이 광야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발람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살게 될 미래로 빠져 들어가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들이 거기에서 무성한 숲과 같이 퍼져나갈 것입니다. 그들은 강가에 있는 아름다운 정원과 같아질 것입니다.
발람이 이스라엘을 두 종류의 나무로 묘사했습니다. 첫 번째는 침향목(aloe trees)이요, 두 번째는 백향목(cedar trees)입니다. 이 나무들은 생명을 주는 강가에 심겨졌습니다.
이 침향목은 우리에게 친숙한 식물 알로에 베라(aloe vera plant)와는 다릅니다. 알로에 나무(eaglewood tree라고도 불린다)는 원산지가 인도입니다. 알로에 나무는 진한 향을 내는 목재입니다. 나무가 부패할 때에, 향수로 사용되는 독특한 향을 뿜어냅니다. 시편 45편 8절은 새로운 왕이 기름 부음 받을 때에, 왕의 옷은 침향으로 향을 냅니다. 예수님의 몸에 몰약과 함께 알로에를 사용하여 향이 나도록 했습니다.
이스라엘을 알로에 나무와 비교한 것은 이 백성이 대단히 값 비싼 방향제와 향수에 비교한 것입니다. 대단히 사랑스럽고 탐스러운 존재로 말입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또한 발람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백향목과 비교하셨습니다. 백향목은 레바논의 삼나무(cedar)입니다. 레바논 삼나무는 북미(北美)가 원산인 삼나무와는 다릅니다. 우리가 자주 삼나무라고 부르는 것과는 다르다는 말입니다. 삼나무라 불리는 많은 나무들이 사실은 진짜 삼나무가 아닙니다. 실제적으로 제가 곧바로 말씀드린다면, 캐나다에도 “가짜 삼나무” 큰 군락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팔레스틴 산(産) 삼나무는 팔레스타인 나무들 중에 제일 큽니다. 발람이 이스라엘을 비유한 삼나무의 높이는 약 35미터정도 됩니다. 물론 그 이상 되는 것도 있습니다. 발람이 이스라엘을 삼나무에 비교할 때에, 덤불이나 울타리 용 삼나무로 우리가 생각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레바논의 거대한 삼나무를 연상해야 됩니다. 이 삼나무는 줄기가 거대하고 많은 가지가 뻗어나 줄기로부터 수평적으로 펴져나 하늘을 향해 있습니다.
레바논의 삼나무는 왕들이 왕궁을 짓는데 사용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기둥이나, 벽판이나, 천정이나 조각상 등에 말입니다. 솔로몬이 삼나무를 광범위하게 사용해 왕궁을 지었습니다. 삼나무는 왕의 권세와 부와 성장과 힘을 상징했습니다.
교회에 대한 참으로 멋진 이미지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여왕입니다. 교회는 왕족입니다. 교회는 거대한 부와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안에 부와 힘을 말입니다. 하나님께 아름다움이자 향기입니다.
발람이 7절에서 이 사실을 말했습니다. “그 통에서 물이 넘쳐 나겠고 그 종자는 많은 물가에 있으리로다.”
지금 이 이미지는 양어깨에 양동이를 메고 있는 사람에 대한 것이며, 양 끝에 양동이를 매달고 물을 주는 것을 그려줍니다. 이 사람은 자기 정원에 심은 씨에게 물을 뿌리고 있습니다. 물이 아주 많습니다. 그가 걸을 때에 양동이로부터 물이 튀어나갈 정도로 물이 넉넉합니다. 그는 물을 아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물의 양이 많기 때문입니다. 물이 넉넉한 기름진 정원입니다.
이스라엘이 아름답고 강력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이를 가질 수 없습니다. 스스로 그들은 아름답지도 강하지도 않습니다. 신약의 하나님의 이스라엘인 우리도 우리 스스로는 아름답지도 강하지 않는 것과 똑같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잘 압니다. 우리 스스로는 죄인이며 또 우리 죄 때문에 비참합니다. 우리 스스로는 모든 점에서 허약하고 허약합니다. 순종하는데도 허약합니다. 지혜도 부족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으로 일관되게 살아가는 모습 역시 허약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에, 그분은 아름다운 것을 보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셨던 일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아름다운 것으로 보십니다. 아름다운 아내, 사랑스런 신부, 여왕으로 말입니다.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존재로 보시는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목전에 아름다운 것은, 하나님의 거저 베푸시는 은혜 때문에 아름다운 것은 약속의 땅에서 영광스러운 미래를 고대할 수 있었듯이,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때문에 하나님의 목전에서 아름다운 우리도 천상의 약속의 땅에서 영광스럽고 영원한 미래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고대할 수 있었던 영광스런 미래의 일부는 이스라엘이 왕정시대, 강력한 몇몇 왕들의 발흥이었습니다. 발람은 7절에서 “그 왕이 아각보다 더 크니 그 나라가 진흥하리로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족장들에게 왕들이 그들에게서 나오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를 번성케 할 것이라(창17:6)고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창17:16)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여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창35:11)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아각(Agag)보다 더 위대할 것입니다. “아각”은 아멜렉 왕들이 사용했던 호칭이었을 것입니다. 마치 애굽의 모든 왕들이 바로(Pharaoh)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블레셋 왕들에게는 아비멜렉(Abimelech)을 로마 왕들에게는 시저(Caesar)를 사용했듯이 말입니다.
아말렉은 광야에 사는 대단히 강력한 유목민족의 왕이었습니다. 자기들에게 방해가 되면 모조리 쓸어버리는 광야의 무법자였습니다. 아말렉 왕이 시내 광야의 많은 부분을 통치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은 아말렉의 어느 왕보다도 더 강해질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높아져, 아말렉 왕 아각을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8절에서 발람은 두 번째 신탁에서 말했던 중요한 내용을 반복했습니다. 발람은 하나님이 어떻게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건져내셨는지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들소와 같은 힘을 가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서 자기 왕국을 세우시고 높이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과 하나님을 개적했던 적의에 찬 열방들을 철저하게 파멸시킬 것입니다.
또 다시 발람은 두 번째 신탁에서 했던 대로, 여기 세 번째 신탁에서, 이스라엘을 사자와 비교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하나님의 성령께서 발람을 통해서 말씀하시면서 창세기 49장 9절로 거슬러 올라가시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발람은 창세기 49장 9절의 마지막 부분을 인용합니다. 창세기 49장 9절은 아버지 야곱이 유다에게 비는 복의 일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야곱은 유다가 왕족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유다에게서 왕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 유다 왕이 사자와 같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솔로몬은 자자를 자신의 상징 가운데 하나로 취했습니다. 솔로몬은 자기 왕좌에 14마리 사자를 새겨놓았습니다. 양면에 한 마리씩, 이를 올라가는 계단에 각 여섯 마리씩으로 말입니다.
마지막 왕이자 가장 위대한 유다 왕도 그의 상징들 가운데 하나는 사자였습니다. 요한계시록 5장 5절에서 우리의 높아지신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유다 지파의 사자”라 불렸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 모두를 합쳐보면, 발람이 여기에서 유다 지파의 사자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을 분명하게 봅니다. 높아지신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입니다. 이 왕이 아각보다 훨씬 더 위대합니다. 이 왕은 하나님의 가장 지독한 원수의 왕보다도 더 위대합니다. 그리스도의 왕국이 지상의 모든 왕국보다 높아져 이를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어둠의 왕국, 사단의 왕국도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고대할 수 있는 영광스러운 최상의 미래의 일부입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왕을 모시고 있습니다. 강력한 왕이 계십니다. 그는 우리의 왕시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 안으로 접붙임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우리는 왕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왕과 한 왕국을 말입니다. 그 왕은 사자와 같습니다. 그분은 영원한 왕국을 세우실 것입니다. 만물 위에 높아질 왕국을 말입니다. 그분은 영원토록 통치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과 함께 만물을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 신탁에서 하나님의 성령께서 발람을 통해 말씀하시면서 이스라엘의 영광스러운 미래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3. 발락에 대한 임박한 파멸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님은 발람을 통해서 발락의 임박한 파멸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사실상 하나님의 이스라엘의 저주하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의 임박한 파멸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세 번째 신탁의 마지막 말이 9절에 나와 있는데, 여기에서 “너를 축복하는 자마다 복을 받을 것이요 너를 저주하는 자마다 저주를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의 모임(congregation)을 향한 그 사람의 태도가 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태도를 결정한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이 모임을 사랑하듯이, 오늘날 그는 신약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만일 교회의 개개 지체가 교회에 대해 좋은 말을 한다면, 하나님께서 이를 사랑하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복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약 이스라엘인 교회의 유익을 도모하는 사람은 누구나, 교회의 유익을 위해 신실하게 돕는 사람은 하나님의 복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만일 하나님의 교회를 중상하고 저주한다면, 오로지 하나님의 저주를 기대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교회를 대적하는 일을 행하는 사람은 누구나, 돕기를 거절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에 의해 멸절될 것입니다.
이 사실은 오늘 신약 교회에도 요지부동의 진실로 계속됩니다. 우리는 이 사실들을 주목하는 것이 유익합니다. 주님께서 교회에 대해 악담하는 자는 누구든지 악담하실 것입니다. 바로 이 기본 원리는 여러분과 여러분 자신의 교회 사이에 바로 거기에서 출발합니다. 만일 이것이 어딘가에 시작되는 곳이 있다면, 바로 여러분이 있는 자리에서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는지를 살피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저주하지 않으시게 하려면, 교회에 대해 좋은 말을 하십시오.
발람의 신탁이 발락에게 경고하기를, 발락이 교회가 저주받는 것을 보고자 했기 때문에 발락 자신이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발락은 꼭 이스라엘이 저주받게 되기를 바랐습니다. 이스라엘이 저주 받기를 결단했습니다.
발락은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앞에서 발락이 발람이 어찌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대신에 복을 비는지에 대해서 불평을 쏟아냈습니다. 그러나 이제 발락이 격노했습니다. 발락이 그의 손바닥을 치면서 경멸했습니다. 발락은 북방의 가장 탁월한 선견자 발람이 신들을 조종할 수 없다는 사실을 믿기지 않았습니다. 발람이 거액을 챙길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발락은 발람을 쫓아내버립니다. 발락은 발람을 비꼽니다. 발락은 발람을 조롱합니다. 왜냐하면 발람이 너무도 잘 안다고 큰 소리쳤던 그 하나님, 즉 앞에서 심지어 그를 “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이제는 그 하나님의 입이 되어버렸음이 분명해졌기에, 자신이 시도하려 했던 것과는 반대로 말하는 사람이 되어버렸기에, 이제 하나님이 보상도 대가도 없이 발람을 떠나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발람은 시작부터 자신은 발락이 약속한 보상이 얼마만큼 거액인지 상관없이 단지 야웨가 자신에게 말하라고 한 것만을 말할 수밖에 없노라 했다고 발락에게 상기시킴으로 전문가로서의 체통을 상쇄하고자 애씁니다. 이것은 결코 발람 편에서 겸손으로부터 나온 표가 아닙니다. 발람은 겸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대신에 발람은 자신이 술사라는 범위 내에서는 패자(敗者)라는 생각을 불어놓기를 원치 않습니다.
발람은 발락에게 자신이 떠나고자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항차 이스라엘이 모압에게 하게 될 일에 대해 발락에게 경고했습니다. 24장 17절을 보면, 발람이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왕이 모압에게 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했습니다. “모압이 이편에서 저편까지 쳐서 파하고 또 소동하는 자식들을 다 멸하리라.”
이 말은 발락을 기다리고 있는 임박한 파멸을 가리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백성을 저주하는 모든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참담한 미래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눈동자를 건드리는 사람들에 대한 비참한 말로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하여 비난하는 자들을 향한 참혹한 결말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머리통을 날려버리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박살내실 뱀의 머리통과 함께 말입니다. 그분은 또한 마귀들의 자식들의 머리통을 날려버리실 것입니다.
우리는 한 왕을 모시고 있습니다. 우리를 돌보시는 왕을 모시고 있습니다. 우리를 축복하시는 왕을 말입니다. 유다 지파의 사자이신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왕은 자기 왕국 안에서 우리가 영원토록 살도록 하십니다. 우리가 영광스러운 미래에 참여하도록 하시는 왕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우리와 언약을 체결하셨습니다. 그분은 현재까지도 여전히 우리에게 신실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영광스러운 미래를 제공하십니다. 당신을 사랑하고 순종하고, 자신을 그의 신실한 돌봄에 맡기는 자들을 위해 영광스러운 미래를 보장하십니다. 그들에게 영광스러운 미래가 있습니다. 개인으로서 여러분은 이 미래에 참예하려고 하십니까? 아멘.
[이 설교문은 캐나다 앙케스트 개혁 교회에 시무하는 판 폽타 목사께서 2001년 12월 9일 주일 예배 시에 전달한 설교를 번역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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