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석의 올드보이 7] ②김종부 “비운의 스타란 꼬리표를 이젠 떼고 싶다” |
[ 2006-12-28 ] |
- LA 올림픽 예선 탈락 이후 88팀이 만들어졌던 걸로 기억합니다. 특히 85년 메르데카컵 결승전에서 브라질 선발팀을 7 대 3으로 대파하고 대회 2연패 했던 게 생각납니다. 청소년 4강 멤버를 주축으로 88대표팀이 만들어졌는데, 그때만 해도 박종환 감독님과 함께 그 멤버 그대로 88년 서울 올림픽에 갈 것 같은 분위기였어요. 88대표팀이 국제 대회에도 많이 참가를 했습니다. 아마도 그 무렵이 대표팀의 세대 교체가 이루어질 때였던 것 같아요. 많은 선수들이 대표팀을 들어왔다 나갔다 했거든요. 88팀이 인기는 있었지만 완성된 팀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는 팀이었다고 봐야지요. - 고려대 83학번이신데 당시 고대에 유명한 선수들이 많았지요? 신연호, 김판근이 저와 동기고 노인우, 조민국, 박양하, 함현기, 노수진 형이 1년 선배였습니다. 거의 국가대표나 마찬가지였어요. 학교는 다르지만 (김)주성이 하고 (이)기근(한양대)이도 같은 학번이에요. 주성이는 중앙고 출신인데 조선대학에 입학한 후 크게 성장을 했고, 88대표팀에 선발되면서 스타가 된 거지요. - 고려대 시절 연세대와의 정기전 성적은 어땠나요? 저는 당시 청소년 대표팀과 A대표팀을 오갔기 때문에 많이 출전은 못했습니다. 경기 성적은 정확히 기억 안나는데, 아무튼 그 때는 연대보다 고대가 전력이 많이 앞섰어요. - 김주성 씨와 더불어 팀 막내로 86년 멕시코 월드컵에 출전을 하셨잖아요. 당시 감독님은 멕시코에서 경기를 해봤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유리한 점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그렇지요. 당시 멤버 중에 멕시코 현지에서 경기를 해본 선수가 저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지대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었고, 그라운드 적응도 쉽게 했습니다. - 멕시코 월드컵 두번째 경기 불가리아전에서 동점골을 터뜨렸지요? 그 날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는데 후반전에 (노)수진이 형하고 교체되어 들어가 골을 넣었습니다. 불가리아 문전 앞에서 볼을 가슴으로 트래핑한 후 떨어지는 볼을 차 넣었지요. 사실 그 날 우리가 불가리아를 이길 수 있었어요. (변)병주 형의 슛이 골포스트를 맞고 나왔는데 그게 골로 연결이 됐다면 우리가 그 때 월드컵 1승을 했을 겁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아쉬워요. |
- 조심스러운 질문인데요. 고려대 4학년 때 스카웃 파동을 겪었잖아요. 그 얘길 좀 해주십시오. 왜 현대와의 계약을 파기한 겁니까? 그에 관해서 자세히 얘기하자면 무척 길기 때문에 간단히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당시에 저는 고대 졸업 후 대우에 입단하고 싶었습니다. 저의 중동고 시절 감독님이 고재욱 선생님이셨고, 고대 시절 감독이 이차만 선생님이셨어요. 두 분이 무척 친하십니다. 그런 인연도 있고 해서 저는 대우로 가고 싶었어요. 대우에서도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당시에 다른 팀을 일체 생각하질 않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 후에 현대가 저를 영입하겠다고 나온 거예요. 현대는 저한테 굉장히 좋은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당시로는 정말 파격적인 조건이었어요. 대우보다 훨씬 좋은 조건이었지요. 그래도 저는 대우 쪽에 더 마음이 가 있었는데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제가 현대와 계약을 하게 됐습니다. 사실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건 제가 아니고 매형이 찍었어요.(웃음) 그 때 매형이 저의 대리인 역할을 해주셨거든요. 솔직히 말씀드려서 당시에 저하고 매형은 그 A4 용지가 정식 계약서인 줄 몰랐습니다. 그 때는 법률 문제도 제대로 몰랐기 때문에 별 생각 없이 도장을 찍은 거예요. 그게 그렇게까지 큰 파장을 일으킬 지는 당시에 전혀 생각지 못했습니다. 물론 저희가 경솔했던 거지요. 제가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기 때문에 현대에서는 당연히 계약이 된 걸로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 후에 제가 현대에 안가고 대우에 가겠다고 하니까 파장이 커진 거예요. - 고려대 축구부에서 제명당한 것도 그 일 때문인가요? 그렇습니다. 어떤 선수든 간에 프로팀에 입단할 때는 학교의 동의가 있어야 돼요. 당시 학교에서는 제가 현대와 계약을 했기 때문에 당연히 그런 줄 알았다가 제가 계약을 파기하자 발칵 뒤집혔지요. 그런데 그 무렵 멕시코 월드컵이 있었기 때문에 일단 제명이 보류됐다가 월드컵이 끝나고 난 뒤에 완전히 제명된 겁니다. 그래서 제가 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 출전을 못한 거예요. 소속팀이 없는 무자격 선수가 됐기 때문에요. - 요즘처럼 에이전트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었다면 일이 그렇게까지 커지지는 않았을 것 같네요. 당연하지요. 에이전트가 있었다면 아주 순조롭게 풀렸을 겁니다. 당시엔 구단 관계자와 선수 혹은 선수 가족이 직접 만나서 협상을 했기 때문에 스카웃 파동이 심심치 않게 일어났습니다. 스카웃 문제로 구단과 선수가 싸움을 하게 되면 선수가 이길 수 없었던 시절이었지요. - 기록을 보니까 프로 입단도 다른 동기 선수들보다 1년 늦었네요. 그렇습니다. 고대 축구부에서 제명당하면서 다른 선수들보다 반 학기 늦게 졸업을 했습니다. 일명 ‘코스모스 졸업’을 한 거지요.(웃음) 87년 가을에 졸업하고 대우에 입단을 하긴 했는데, 현대와의 문제가 전혀 해결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공식 대회에는 참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9월쯤인가, 대우가 일본 대표팀을 초청해 부산 구덕운동장에서 친선 경기를 가졌어요. 그 때 대우 구단에서 부산 시민들한테 ‘일본 대표팀과의 친선경기 때 김종부가 출전한다‘고 홍보를 했습니다. 그 때문인지 그날 많은 축구팬들이 부산 구덕운동장에 오셨거든요. 제가 후반전에 교체 투입 됐습니다. 팬 서비스 차원에서 출전을 했던 거지요. 그런데 이게 큰 문제가 된 거예요. 제가 대우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나서자 현대에서 강력 반발하면서 축구팀을 해체하겠다고 나온 겁니다. 공식 경기가 아닌 친선 경기조차도 제가 뛰어서는 안된다는 거지요. 그 일로 인해 제가 1년 징계를 받았습니다. 물론 현대 입장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사실 제 입장에서는 너무 가혹한 징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대우에서 뛰질 못하고 어쩔 수 없이 포철로 가게 됐죠. |
- 어린 나이에 마음의 상처가 컸겠습니다. 그걸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저 혼자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이었어요. 그렇다고 주위에 어드바이스 해주는 사람도 없었구요. 그 무렵이 제가 축구에 눈을 뜰 시기였습니다. 선수들의 움직임이 보였고, 수비수들의 태클 들어오는 다리가 보이더라구요. 선수는 그 때 실력이 크게 향상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좋은 시기에 시합을 뛰지 못한 거예요. 그때 제가 술을 배우게 됐습니다. 그 전에는 술을 전혀 안마셨거든요. 당시 스포츠 신문을 비롯한 언론에서 ‘김종부가 현대 측에 너무 무리한 조건을 요구한다’ 이런 식으로 보도를 하면서 저를 완전히 부도덕한 놈으로 몰아세우더라구요. 정말 기가 막혔습니다. 당시 스카웃 문제로 인한 충격, 그리고 억울함과 분노를 삭이는데 15년 걸렸습니다. 마음 비우는데 15년이란 세월이 걸리더라구요. - 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을 앞두고 대표팀의 이회택 감독이 김 감독님을 한때 대표팀 명단에 뽑았던 걸로 기억되는데요?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제가 포철에 있을 때인데, 이회택 감독님이 저를 어떻게 해서든 재기를 시켜보려고 했는지 대표팀에 뽑아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제 몸이 정상이 아니었어요. 그러다 보니 대표팀 경기에서도 별 다른 활약을 못했지요. 제가 포철에 가서 나름대로 열심히 훈련을 했지만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였기 때문에 집중이 되질 않는 거예요. 운동 선수는 정신적으로 안정이 안되면 정상적인 컨디션을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 그후 대우로 다시 돌아왔지요? 네. 포철에서 두 시즌을 뛴 후 90년에 대우로 복귀했습니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프런트진이 완전히 바뀌어 있더라구요. 몹시 낯설었습니다. 그리고 팀에서도 제 자리가 없는 거예요. 그때 대우는 이미 김주성의 팀이 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감독이 동독 출신의 엥겔 감독님이었는데 그래도 엥겔 감독님한테 많은 걸 배울 수 있었어요. 그 분이 추구하는 축구가 상당히 선진적이더라구요. 제가 운이 나빴던 게, 그 이듬해인가 동대문 운동장에서 경기를 하다가 무릎을 크게 다쳤습니다. 과거에는 그라운드 라인을 횟가루로 뿌렸어요. 그 횟가루가 굳으면 몹시 딱딱해집니다. 그 굳어 있는 횟가루를 제가 잘못 딛는 바람에 무릎 인대가 파열됐습니다. 그 부상 때문에 꽤 길게 고생을 했지요. 사실 제가 대우로 돌아와 재기를 해보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12kg의 납조끼를 입고 강훈련도 해봤는데 몸이 정상적으로 돌아오질 않더라구요. - 93년에는 박종환 감독이 있는 일화로 또 이적하셨네요. 제가 일화에 간 건 은퇴를 생각하고 간 겁니다. 일화에서 2년을 있으면서 시합도 몇 번 뛰질 못했어요. 그리고 나서 95년에 대우로 돌아와 은퇴를 했지요. - 80년대 초반에는 많은 축구팬들이 ‘최정민-이회택-차범근-최순호로 이어지는 한국 축구 스트라이커 계보를 김종부가 이어줄 것이다’ 예상을 하고 또 기대를 했는데요. 당시 주위에서 그렇게들 말씀해 주셨지요. 제 키가 183cm인데 당시로서는 무척 큰 키였습니다. 그래서 '대형 센터포워드'라고들 말씀하셨는데 스카웃 파동을 겪으면서 제가 팬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말았지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축구에 눈을 뜰 무렵에 스카웃 파문에 휩싸인 겁니다. 만일 그 일만 없었더라면 팬들의 기대에 부응을 할 수 있었을 것 같아요. |
- 감독님은 현역 시절 전형적인 센터포워드였지요? 그렇지요. 좌우로도 많이 움직였지만 그래도 전형적인 센터포워드라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제가 차범근-최순호 선배님하고는 스타일이 많이 다르거든요. 차범근 선배님은 윙에 가까운 스트라이커였고, 순호 형은 공격형 미드필더로서도 활약을 했지요. 당시 축구계 선배님들은 제 플레이가 일본의 전설적인 센터포워드인 가마모토와 비슷하다고 말씀해 주시더라구요. 그래서 저도 가마모토 같은 플레이를 하고 싶었습니다. - 감독님 이후 국내에 훌륭한 스트라이커들이 여러 명 배출 됐는데 그 가운데 누가 최고라고 생각하십니까? 역시 황선홍이 가장 훌륭하지요. 선홍이는 마무리를 참 잘 지어줬잖아요. 움직임도 좋았구요. 이동국도 좋은 공격수라고 생각합니다. - 한국 축구의 고질병이 '문전 처리 미숙'인데 그 원인이 선수들(공격수들)에게 있다고 보십니까? 아니면 지도자들의 지도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보십니까? 둘 다 문제가 있겠지만, 저는 지도 방식에 더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을 해요. 문전 처리 미숙은 공격수들의 냉정함과 침착성이 부족해서 그런 건데, 우리 공격수들이 골문 앞에만 가면 서두르고 정교한 맛이 떨어지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안정감을 가질 수 있게끔 지도자들이 잘 가르쳐야 돼요. 그것도 선수들이 어릴 때 가르쳐야 됩니다. 나이를 먹어선 절대 익힐 수가 없어요. 물론 골게터는 타고나야 합니다. 그렇지만 성장 과정에서 지도자들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해요. - 스위스 같은 경우는 ‘FW 육성 시스템’이라고 해서 자질이 있는 유소년 스트라이커들을 국립 트레이닝 센터로 불러들여 스위스 대표팀의 스트라이커 출신들이 골 넣는 기술을 집중적으로 가르친다고 하더군요. 그런 시스템이 있군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원하고, 또 하고 싶은 게 바로 그런 거예요. 우리나라에서는 코치를 몇년 하면 다들 감독이 되고 싶어합니다. 물론 저도 코치를 한 후에 감독이 된 건데, 사실 한 분야의 전문적인 코치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자면 공격이면 공격, 수비면 수비, 이렇게 한 분야에서 경험 많고 노련한 전문 코치가 있어야 돼요. 공격수 출신의 코치가 어린 공격수들을 전문적으로 지도를 하게 되면 발전 속도가 빠를 겁니다. 솔직히 저는 나이를 먹어도 공격 전문 코치를 하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제가 공격수 출신이기 때문에 저의 경험을 어린 공격수들에게 전해주고 싶거든요. - 프로팀 지도자로 진출할 생각은 없으신지요? 저는 현재 생활에 크게 만족하고 있습니다. 물론 앞 일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저는 중동고 전력 강화 이외에는 다른 걸 일체 생각하고 있질 않습니다. 모교에서 저를 감독으로 불러주셨는데 그 은혜에 보답을 해야지요. - 손태호 코치 말에 의하면 선수들을 부드럽게 지도한다고 하더군요. 저희 때는 매를 많이 맞으면서 운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방식에서 탈피를 해야 돼요. 요즘 선수들을 옛날 스타일로 지도하면 안됩니다. 이젠 지도자들도 마인드가 바뀌어야 되거든요. 지도자는 선수를 이해해주고, 또 기다릴 줄 알아야 돼요. 저는 선수들을 강압적으로 지도하지 않습니다. 물론 테두리를 벗어나면 그 때는 엄하게 다루지요. 경우에 따라선 선수들을 엄하게 다뤄야 될 때가 있습니다. 대신에 평소에는 자유스럽고 흥미를 가지게끔 운동을 시키고 있어요. 저는 선수들에게 기술적인 면을 강조합니다. 요즘 축구가 무척 빠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빠른 축구만 하다보면 선수들의 시야가 좁아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빠른 건 좋지만 무턱대고 뛰는 축구는 안된다는 거지요. 저는 손태호 코치와 힘을 합쳐 중동고 축구부에 새로운 전통을 세우려고 합니다. 기술 축구의 전통을 심고 싶어요. 중동고는 다른 학교에 비해서 축구부에 대한 지원이 좋은 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가 노력을 하면 좋은 성과가 나올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대학 졸업 후 지금까지 ‘비운의 스타’란 딱지를 달고 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도자로 성공을 해서 비운의 스타란 꼬리표를 이제는 떼어내고 싶습니다. -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네, 고맙습니다. 인터뷰=김유석(축구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