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씨(呂氏)는 원래 중국의 성씨다. 주나라 무왕이 개국공신이자 전설적 인물인 강태공 망(望)을 여(呂)에 봉하고 호를 여상(呂尙)이라고 하자 후손들이 성을 여씨라고 했다.
그의 후손 여불위의 아들 여영은 중국을 통일한 진시왕이다. 진시왕에게는 아들 여부소와 여호해가 있었으며, 여부소는 아들 여몽과 여자앵이 있었다.
여몽(呂夢)의 후손 여어매(呂御梅)는 중국 래주(萊州)사람으로 당나라 회종 때 한림학사를 지냈다. 그 뒤 황소의 난을 피하여 877년(신라 헌강왕 3년) 신라에 들어 와서 전서를 지내고 성주군 벽진면에 대대로 살았다. 그 때부터 우리나라 여씨가 시작되었다.
여어매의 두 아들은 고려 때 대장군을 지낸 여임청과, 낭장을 지낸 여광유 형제가 있었다. 여임청의 후손으로는 여양유, 여자열, 여자장, 여자혁이 있었다.
이 가운데 여양유와 여자열은 본관을 성주로 하였으며, 여광유의 계통과 여자장, 여자혁은 본관을 함양으로 하였다.
고려시대에 공조전서를 지낸 여어매(呂御梅)은 그의 9대손인 여칭(呂稱) 이후 많은 명신을 배출하였다.
여칭은 고려 말에 문과에 급제, 조선 태조 때 도총제, 형조판서를 역임했으며 청빈하기로 이름났다. 그의 증손 여자신(呂自信)은 성종~중종대에 걸쳐 이름난 무신으로 병조판서를 지내고 청백리에 올랐다.
성주이씨는 여어매 이하의 세계를 상고할 수 없어 여양유를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성산여씨족보(星山呂氏族譜)와 함양여씨족보(咸陽呂氏族譜)를 대동합본하여 여씨전국종친회를 조직하였다.
함양여씨는 여칭의 8대 손인 여우길(呂祐吉), 여유길(呂裕吉)의 대를 고비로 선조~숙종대에 걸쳐 가장 위세를 떨쳤다.
여우길은 선조 때 문과에 급제, 여러 벼슬을 역임하고 광해군 때 관찰사에 이르렀다. 대명외교에 공헌하고 임진왜란 뒤에는 일본에 건너가 중단된 국교를 회복시켰다.
독립운동가 여운형(呂運亨)은 여우길의 11대손이다. 여유길은 선조 때 알성문과에 급제, 광해군 때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여유길의 아들 여이징(呂爾徵)은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한 뒤 대사헌, 도승지, 부제학 등을 지냈다. 여이징은 성리학에 밝고 천문, 역법(曆法), 시문, 서화에도 뛰어났다. 그의 종제(從弟) 여이재(呂爾載)는 인조 때 문과에 급제, 심기원이 모반했을 때 공을 세워 영국공신(寧國功臣)에 책록되고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함양여씨의 유일한 상신 여성제(呂聖齊)는 소론의 한 사람이다. 영의정에 이르렀다가 남인과 의견이 맞지 않아 중추부판사로 전임했다. 함양여씨는 2000년 현재 25,667명이 있다.
여씨는 함양과 성주의 2본이 주종을 이룬다. 나머지 본관은 대부분 함양여씨와 성주여씨의 세거지를 나타낼 뿐이다.
여씨는 2000년 현재 고성, 김해, 단양, 대전, 밀양, 범중, 상주, 선산, 성량, 성산, 성주, 안동, 여주, 여흥, 전주, 진풍, 창원, 청주, 풍천, 함녕, 함안, 함양, 함흥, 해영, 해주 등 25개 본관에 인구는 모두 56,692명이다.
시조는 고려 때 삼중대광에 오른 여양유(呂良裕)다. 성주는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의 지명이다. 성주여씨는 성산여씨(星山呂氏)라고도 한다. 성산은 성주의 옛 이름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본관을 성주와 성산으로 각각 쓰는 후손들이 있다. 2000년 현재 성주여씨는 11,012명, 성산여씨는 7,796명이다.
시조 여양유의 아들 여위현(呂渭賢)은 고려에서 판도판서를 지냈다. 문장이 뛰어났던 손자 여극회(呂克誨)는 조선에서 공조판서를, 5세손 여문승(呂文承)은 사복시정을 역임하여 가문을 중흥시켰다.
성산여씨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시조의 7대손인 원정(圓亭) 여희림(呂希臨)이다. 중종 2년에 생원시에 합격한 그는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었으며,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와 도의로 사귀었다.
중종 28년 김안로가 경빈박씨(敬嬪朴氏)를 폐하고 복성군(福城君)을 영일에 유배할 때 전에 스승이었다는 이유로 기장에 유배되기도 했다. 다시 기용되어 사헌부지평을 역임했던 여희림은 성주(星州)에서 정주학(程朱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했다. 특히 남전향약(藍田鄕約)을 시행하기 위해 월회당(月會堂)을 일으켜서 향약의 보급자가 되었다. 현재 월회당은 경북 성주군 벽진면 수촌리(야동)에 있으나 방치되어 있는 상태다.
선조 때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군수(郡守)를 지낸 여대로(呂大老)는 청백리에 올랐다. 조선 말 의병장으로 임실군의 대운치(垈雲峙) 전투에서 많은 전공을 세운 여주목(呂柱穆)도 유명하다.
북간도에서 이동녕, 이상설과 함께 서전의숙(瑞甸義塾)을 세워 후진 교육에 힘쓴 독립 운동가 여준(呂準)도 가문을 빛냈다.
성주여씨는 조선시대에 여영징(呂榮徵.문과.효종5년.1654), 여명거(呂命擧.문과.숙종28년.1702), 여홍간(呂弘幹.문과.영조44년.1768), 여명진(呂鳴震.문과.숙종43년.1717), 여수징(呂壽徵.문과.현종7년.1666), 여응구(呂應龜.문과.선조5년.1572), 여효증(呂孝曾.문과.인조13년.1635), 여성거(呂聖擧.문과.숙종9년.1683), 여대로(呂大老.문과.선조16년.1583), 여경(문과.인조20년.1642) 등 문과 12명, 사마시 17명 등 모두 29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 경북 성주군 벽진면 일원, 경북 금릉군 구성면 금평동이 집성촌이다
(출처 : 우리의 뿌리를 찾아서, 언론인 정복규)
첫댓글 자료 감사합니다.![짱](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_44.gif)
입니다.
말씀 고맙습니다
더운날 자료 찾아 올려 주시고... 수고 많이 하시네요^^
좋은 자료 잘보고 여씨의 뿌리도 알게되어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