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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의들의 진료행위는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널리 이루어졌다. 그런데 기록으로 남아 있는 부분은 대다수 임금을 치료한 내용이고, 그 외에 양반 사대부들을 치료한 기록이 일부 있다. 그렇다보니 침의들의 활동 범주가 궁궐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
조선 후기 가난한 백성들만 치료한 침의에 대한 기록이 하나 전해져오고 있어 그나마 기록의 편중을 만분의 일이나마 덜어주고 있다. 홍양호(洪良浩, 1724~1802)가 쓴 문집 '이계집(耳溪集)' 조광일전에는 가난한 백성들을 돌보는 침의의 모습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사진1:침은 조광일이 우거한 합호(합덕저수지) 전경. 충남 당진군 합덕읍 합덕수리민속박물관에 전시한 디오라마. 현재 저수지 안쪽에는 물이 없고, 논으로 활용되고 있고, 일부는 연꽃 연못으로 복원하여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사진2: 합덕저수지. 사진은 1952년 합덕성당에서 행사를 하던 중에 찍은 사진.(합덕수리민속박물관 제공.)
사진3: 조광일의 행적을 보고 감동하여 침은 조광일전이라는 글을 남긴 이계 홍양호.영정.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진4: 침은 조광일이 가난한 사람들을 침술로 치료하며 살았다는 합덕방죽에는 연꽃이 만발하여 그 경관이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최근 당진시는 합덕제를 연호(蓮湖 연꽃의 호수)로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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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일찍이 그런 어진 사람을 몰래 구하였으나 찾을 수 없었다. 근자에 나는 타향인 충청도에 잠시 거처하게 되었다. 그 곳의 풍토를 잘 알지 못하여 지역 주민에게 의원에 대해 물었는데, 한결같이 “훌륭한 의원은 없어요”라고 하였다. 억지로 다시 물으니 “조(趙) 의원이 있기는 하지요”라고 대답하였다.
조 의원의 이름은 광일(光一)이고 선조는 태안(泰安)의 번창한 집안이었으나, 얼마 뒤 집안이 가난해져서 나그네로 유랑하다가 합호(合湖, 충청도 합덕의 저수지)의 서쪽 물가에 우거(寓居)하였다. 그는 특별한 능력은 없으나 침(針)으로 명성을 얻어 스스로 침은(針隱)이라고 불렀다. 조 의원은 일찍이 권세 있고 지체 높은 집에는 가지 않고, 벼슬이 높은 양반한테도 진료를 가지 않았다.
얼마 전 동이 틀 녘에 내가 조 의원의 집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어떤 노파가 남루한 옷차림으로 엉금엉금 기어서 그 문을 두드리면서 말했다.
“나는 아무 마을에 사는 백성으로 아무개의 어미입니다. 내 자식이 원인 모를 병이 들어 죽어 가니 제발 살려주십시오”
조 의원이 즉시 말했다.
“알았소. 먼저 가 있으면 내 곧 뒤 따라 가리다”
그러고는 일어나 뒤따라 걸으면서도 난처한 기색은 하나도 없었다.
또 한 번은 길에서 조 의원을 만났다. 마침 비가 내려 흙탕길이 되었는데 조의원이 삿갓을 쓰고 나막신을 신고 바삐 걸어가고 있었다. 내가 물었다.
“어디를 그리 바삐 가시오?”
그러자 조의원이 대답했다.
“아, 예. 아무 마을 백성의 아무개 아비가 병이 들었지요.
지난번에 침을 한 번 놓아 주었는데 효과가 없어 지금 다시 침을 놓아 주려고 가는 길이지요”
괴이한 생각이 들어 물었다.
“그대에게 무슨 이익이 된다고 이렇게 몸소 고생을 하는 것이오?”
조 의원은 빙그레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고 가 버렸다.
그의 사람됨이 대략 이와 같았다. 내 마음에 그의 행동이 범상치 않다는 생각이 들어, 그가 왕래하는 것을 가만히 살펴보고 마침내 그와 친분을 쌓고 교유하게 되었다.
조 의원은 소탈하고 너그러우며, 편안하고 곧은 품성을 지녔다. 또한 세속 사람과 잘 화합하지 않았으며 오직 자신이 의원이 된 것만을 기뻐하였다.
그는 예전부터 내려오는 처방을 따라 약을 달여 치료하지 않고, 항상 자그만 가죽 주머니 하나를 들고 다니며 치료를 하였다. 주머니 속에는 동철(銅鐵)로 만든 십여 개의 길고 짧고 둥글고 모난 모양의 침이 들어 있었다. 그는 이 침으로 종기를 터뜨리고 부스럼을 다스리고, 뭉쳐 있는 혈(血)과 막힌 것을 뚫어 주고, 풍기(風氣)를 통하게 하며, 쓰러지고 위독한 사람을 다시 일으켰는데 즉시 큰 효과가 있었다.
대체로 조 의원은 침술에 정밀하여 그 해법을 얻은 사람 같았다.
내가 일전에 그에게 조용히 물었다.
“무릇 의원은 천한 재주며,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 중 미천한 경우에 해당됩니다. 하지만 그대의 능력은 탁월합니다. 어쩌면 지체 높고 높은 벼슬을 하는 사람들과 교류하여 명성을 얻으려 하지 않고 여항(閭巷)의 백성이나 쫓아다니며 자신을 높이지 않습니까?”
조 의원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대장부는 정승이 되지 못하면 차라리 의원이 되는 것이 낫지요. 정승은 도로서 백성을 구제하지만 의원은 의술로서 사람을 살리지요. 궁핍하고 높은 지위로 이름을 드러내는 것은 어떤 일을 하여 그 공을 드러내는 것에 달려 있답니다. 하지만 정승은 때를 얻어 자신이 추구하는 도를 행하더라도 행운과 불행이 있을 수 있지 않겠소.
남의 봉급을 받고 책임을 맡아 한 번이라도 잘못 하게 되면 비난과 벌이 따르지만 의원은 그렇지 않지요. 의술로 자신의 뜻을 행하면 대개 뜻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자신이 다스릴 수 없는 병은 내버려 두고 환자를 보내더라도 나를 탓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의원으로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더욱이 내가 의술에 힘쓰는 것은 이익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내 뜻을 행하려는 것이므로 환자가 귀한 사람이건, 천한 사람이건 가리지 않는 것이지요.”
또 말을 이었다.
“나는 세상의 의원들이 자신의 의술을 믿고 남한테 교만하게 대하며, 문밖으로 나갈 때는 정승과 권세가들의 집에서 보낸 말을 타고 술과 고기를 차린 음식상을 대접받으며, 대개 서너 번 청탁을 해야 마지못해 왕진가는 것을 미워하지요. 하지만 세상의 의원들은 대부분 귀하고 권세 있는 집안이나 부유한 집안으로 왕진을 갑니다. 만약 병자가 가난하고 권세가 없으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거절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부재중이라 속이고 가지 않기도 합니다. 심지어 이들이 계속해서 백 번을 청하더라도 한 번도 왕진을 나가지 않는 경우도 있으니, 어찌 어진 사람의 마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겠소? 그러므로 나는 오직 백성을 돌보며 부귀와 권세 있는 사람에게 구하지 않고, 다른 의원의 본보기를 보이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 존귀하고 세상에 알려진 높은 자들이 어찌 나를 비난할 수 있겠소? 그런데 내가 슬프고 가엽게 여기는 것은 오직 여항의 곤궁한 백성일 뿐이라오. 내 이미 침을 잡고 사람들 사이에서 침술을 행한 것이 십여 년인데, 어떤 날에는 몇 사람을 살리고 어떤 날에는 열 서너 사람을 살렸으니, 아마도 침술로 온전하게 살린 사람이 수천 수백 사람 가량 될 것이오. 내 나이 지금 사십이니, 다시 수십 년 동안에 만 명을 살릴 수 있으며 살린 사람이 만 명쯤 되면 아마 내 일을 마칠 수 있을 것 같소”
나는 조 의원의 말을 듣고 놀라서 바라보았다. 이윽고 탄식하며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지금 사람들은 한 가지 재주라도 있으면 세상에 자신의 재주를 팔려고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조그마한 은혜를 베풀면 그 증서를 잡고 대가를 받아내려고 요구한다. 또 권세와 이익 사이에서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자신이 취할 게 없으면 침을 뱉고 돌아보지도 않는다. 하지만 조의원은 의술이 높은데도 명예를 구하지도 않고 은혜를 널리 베풀면서도 그 대가를 바라지도 않는다. 병자들 중 급한 사람한테 먼저 달려가되, 반드시 곤궁하고 권세 없는 사람들을 먼저 치료하니, 그 어짊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다. 천 명의 목숨을 살리면 녹봉이 있고 남모르게 보답을 받는다고 하니 조 의원은 반드시 이 나라를 위하는 훌륭한 후손이 있을 것이다.’ 이에 내가 직접 보고 들은 것을 서술하고 조 의원을 위해 전기를 지어 역사를 서술하는 사람의 요구에 스스로 답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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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쓴 이계 홍양호는 1764년(영조 40년) 가을부터 홍주목사에 임명되어 홍주(지금의 홍성)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다.
조광일이 유랑하다가 정착하여 살았다는 합호는 합덕저수지를 말하는 것이다. 지금 행정구역상 합덕읍은 당진군 소속이지만 당시엔 합덕이 홍주목에 속해 있었다. 합덕이라는 지명 자체가 합덕제(合德堤)라는 이름에서 왔다. 이곳 저수지는 후삼국시대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유명한 곳이다.
홍주목사로 부임한 홍양호는 지역주민과 인근 고을의 군정(軍丁) 수천 명을 동원하여 합덕제(合德堤)를 대대적으로 중수하였다.
이때의 사업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중수비(重修碑)에는 홍양호(洪良浩)가 홍양한(洪良漢)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동일인이다. 홍양호의 문집 이계집의 호서록에는 합덕저수지를 합호(合湖)라고 표현한 시가 여러 군데 나타난다. 합덕제 중수 현장과 저수지의 아름다운 풍경을 묘사한 시에서도 합호라는 명칭을 쓰고 있다.
이계 홍양호는 바로 이 합호 중수사업을 일선에서 지휘하면서 조광일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저수지의 서쪽 끝(현 합덕리 쪽)에 사는 그를 만나 사귀게 되었던 것이다.
홍양호가 본 조광일의 의술은 예전부터 내려오는 약처방 같은 것을 하지 않고 오로지 침으로만 치료하는 모습이었다. 가죽 주머니 속에 있는 십여 개의 길고 짧고 둥글고 모난 모양의 침으로 종기를 터뜨리고, 부스럼을 다스리고, 뭉쳐 있는 혈(血)과 막힌 것을 뚫어 주고, 풍기(風氣)를 통하게 하며, 쓰러지고 위독한 사람을 다시 일으켰다는 것이다.
허임의 침구경험방이 나온 이후 조선에서는 침구의 활용이 더욱 널리 확산되었고, 조광일과 같은 침구술이 뛰어난 침구의원들이 방방곡곡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 허임 조선의 침구사 278쪽~187쪽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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