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프 갈라츠의 <음악을 사랑한 늑대>와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Violin concerto in D minor, Op.47)
맹위를 떨치던 장마가 마침내 떠난 자리에 살인적인 더위가 기승을 부리며 본격적으로 사람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나는 이런 때 조차도 방문을 꽉 닫아두고 책상에 앉아 일하는 게 습관이 되어버렸는데, 어느 순간 순환하지 않는 무더운 방안 공기 안에 날카로운 면도날이 떠다니는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할 때면, 여간 불안해지는 것이 아니다. 자칫 덥다고 짜증이나 부리며 방구석을 딩굴다가는 그만 날라든 예리한 면도날에 여린 살점이라도 베이게 될 것 같아 두렵다. 이처럼 나의 병적이면서도 고질적인 한여름의 공포는 결국 꼼짝없이 어느 한 가지에 몰두할 때야 비로서 극복이 되곤 하는데, 내가 바이올린 독주곡을 잘 안 듣는 이유 역시 어찌 보면 날카로운 것에 대한 공포증과 그 이유가 닿아있는 듯싶다. 바이올린 활이 네 줄의 현을 긁어대면서 내는 고음의 소리는 분필이 미끄러지며 칠판을 긁는 소리를 연상시키지 않던가? 하기는 그로테스크한 것을 즐기는 가학적 성향이 있지 않고서야 누군들 영화 <13일의 금요일>에서 프레디의 철제 손톱을 편안하게 즐길 수 있을까마는.
열대야에 선풍기를 틀어 놓고 며칠째 밤을 낮 삼아 추리 소설을 읽고 있다. 내게는 추리 소설하면 아주 오래 전에 읽었던 빨간 표지의 아가사 크리스티의 문고판이 가장 친근하지만, 어젯밤에 읽은 책은 아서 코난 도일(Arthur Conan Doyle)의 <셜록 전집> 중 <주홍색 연구>이다. 나도 그렇다 치지만 일반적으로 우리들은 날도 덥고 짜증이 나는 여름 날, 추리 소설을 꺼내 읽는다. 아서 코난 도일은 홈즈의 입을 빌어 우리가 추리 소설을 읽는 이유랄까 목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주홍색 연구라 함은 비유적으로 죄악을 상징하는 빛깔인 주홍 색을 대표화하여 "삶의 무채색 꾸러미 속에, 주홍색 살인의 혈맥이 면면히 흐로고 있어요. 우리가 할 일은 그 실꾸리를 풀어서 살인의 혈맥을 찾아내어 그것을 가차없이 드러내는 것입니다."<주홍색 연구, 71쪽, 황금가지>
그렇다면 하필 불쾌감이 최고치를 달할 때 사람들은 왜 우리들 속의 광기를 돌아보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악마나 악을 떠올리면 너나 할 것 없이 대체로 뒷목이 뻣뻣해지고 모공이 송연해지면서 적어도 체감 온도를 2℃ 정도 식힐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여하튼 나는 추리 소설이 주는 서스펜스와 스릴에 여름 밤을 맡긴 채 매미가 우는 새벽녘에야 간신히 잠에 들 수 있었다. 그런데 잠에서 깨어 손톱 밑을 보니 때가 끼어있다. ‘도대체 무엇을 긁었기에?’목이다. 목에 또렷한 혈흔의 선이 남겨있다. 필시 모기에게 빨린 혈맥을 찾아 가차없이 손톱으로 긁어댄 것이 분명하다. 순간 마음 속으로 북구의 찬 바람이 ‘쌩’하고 불어 닥쳤다. 분해서이다. 그 때 CD 플레이어에서는 카밀라 위크스가 연주하는 바이올린의 카랑카랑한 소리가 차갑게 맨 살을 스쳤다. 살이 에인다. 폭염과 모기의 습격에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속내까지 피요르드 협곡에서 불어오는 칼 바람에 휘청거렸다.
폭염 속에만은 나는 아주 예외적으로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Violin Concerto in D minor, Op.47)을 연거푸 듣는다. 바이올린의 음색이 부담스러운 것은 여전하지만, 극도로 신경이 날카로워질수록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이라면 살 맛이 난다. 밥 맛이 난다.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의 제 1악장의 오프닝에서 독주 바이올린의 호흡은 냉동고 문을 열었을 때 마냥 차갑고 청량한 기운을 뿜어낸다. 그러다가도 북구에서나 볼 수 있다는 오로라마냥 현이 신비로운 춤을 춘다. 눈을 감고 싶지 않아도 어느새 눈은 자동으로 감기고, 큰 빙산이라도 썰어낼 듯한 기세로 몰아치는 톱날(바이올린 현)의 거침없는 움직임에 화들짝 놀라 눈을 다시 뜨고 보면 좁은 피요르드 해협을 따라 떠다니는 조각난 유빙들이 보인다. 지친 톱질이 잠시 숨을 돌리는 사이, 찬 바다 위를 둥둥 떠다니듯 관현악 파트의 악기들은 고요한 북구의 숲으로 안내한다. 가문비 나무 숲을 헤치고 숲 길을 따라 들어가 보니, 오래된 낙엽처럼 마르고 건드리면 부서질 것처럼 연약한 무엇이 보였다. 무엇일까? 새까만 것. 꼼짝 없이 누워있는 것. 그런데 눈에는 뭔가를 흘리고 있는 것, 그것은 늑대였다. 외로운 늑대. 음악을 사랑했던 늑대. 이처럼 제 2악장은 ‘아다지오 디 몰토’로 그리움과 아쉬움으로 가득한 외로운 늑대의 눈물이 되어 흐른다. 바라보는 이의 눈에서도 어느덧 조르륵 눈물이 흐른다. 공허한 울림처럼 가문비 숲을 울리는 바이올린의 투명한 슬픔이 늑대의 식어가는 주검을 위안해 줄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이지만….
이것은 한 소녀의 이야기이다. 이것이 오래된 이야기인지 아니면 요즘 있었던 이야기인지는 아무도 확실히 모른다. 어쨌든 소녀의 이름은 애니였고 그 때 아홉 살이었는데, 이 숲에 서 살고 있었다고 한다. 소녀는 꽤 오랫동안 바이올린을 배웠다. 비록 악보를 정확하게 읽을 줄 몰랐지만, 자신의 바이올린에서 솟아나는 소리들로 음악을 만드는 것이 그냥 좋았다. 어느 여름 날 새벽, 모두 아직 깊이 잠들어 있을 때, 애니는 바이올린을 팔에 끼고 풀을 헤치고 들판을 건넜다. 들판 끝에서 숲 속으로 들어서게 된 애니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점점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간 애니는 연못과 빈터를 발견했다. 마침 빈 터에는 걸터앉기 좋게 생긴 작은 바위 하나도 보였다. 애니는 그 바위 위에 올라가 앉아 바이올린을 조율하고 활을 당겨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어둠이 내릴 때까지….
한편 그녀의 부모님은 밤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애니를 찾아 다녔지만 집 안에서는, 오솔길에서는 그녀의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애니를 찾기 위해 이웃 사람들과 수많은 경찰관들이 함께 숲 속을 샅샅이 누비며 밤을 꼬박 지새게 되었는데, 숲 속의 빈터에서
다음 날 새벽, 엽총을 들고 숲 속으로 들어간 경찰관들은 몇 개조로 나눠 숲 속을 샅샅이 뒤졌다. 늑대 사냥을 나선 것이다. 그리고 저녁이 다 되어갈 무렵, 숲 속에서 여러 발의 총소리가 메아리쳤다. 앞 뜰에 나와 있던 애니 머리 위로 하늘은 연한 파란색에서 점점 짙푸른 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이 때 갑자기 자동차들이 경적을 울려 대며 한꺼번에 애니의 집 앞에 멈춰 서고 엔진을 껐다.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들기 시작하고 두 사람이 차의 트렁크에서 무엇인가를 끌어냈다. 죽어있는 늑대였다. 모두들 흐뭇한 표정으로 서로의 어깨를 두드렸지만, 애니만은 예외였다. 그로부터 이삼십 년의 세월이 흘러 이제 애니도 더 이상 작은 소녀가 아니지만, 매일같이 그 숲 속의 빈터까지 긴 산책을 다닌다. 하늘 위에 띠처럼 펼쳐져 있는 길다란 구름들이 처음엔 조금 붉은 색이었던 것이 파란색으로 변하고 짙은 어둠으로 물들 때까지 애니는 바이올린을 꺼내 연주를 한다. 그 잔인함, 그 슬픔, 그 감미로움, 그 외로움. 네 발 달린 짐승의 두 눈에서 흘러내리던 그 무엇까지를 다 바이올린의 음으로 표현하기 위해 절실하게 연주한다.
나만의 작곡가에 대한 편견이겠지만, 북유럽 출신의 작곡가 중 시벨리우스(Jean Sibelius,1865~1957)의 곡들은 여름철에, 그리그의 곡들은 겨울철에 제격인 듯 하다. 왜냐고 묻는다고 하면, 그리그의 곡들이 따듯한 서정을 노래하는 것에 비해 시벨리우스의 곡들은 차갑고 어두운 음감을 잘 표현하기 때문이라고 둘러댈 수는 있겠다. (그러나 시벨리우스 ‘Valse Triste’에서 차가움을 느낀다는 사람은 여태 보지 못했으니 어디까지나 개인적 취향의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생활고에 찌든 상태에서 작곡을 해야 했던 불우한 환경의 작곡가들과는 달리 시벨리우스는 핀란드 정부로부터 평생 충분한 연금을 받으며 풍족한 풍토 속에서 마음껏 작곡 활동을 할 수 있었던 행복한 작곡가였다. 게다가 타고난 바이올린 비루투오조로서 바이올린에 대한 재능과 애착도 남달랐다. 그런데도 그가, 37세가 되던 해인 1902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바이올린 협주곡을 완성했다는 점은 그의 음악을 좋아하는 팬의 입장에서는 무척 아쉬운 일이다. 한편 이 곡을 작곡한 당시의 시벨리우스는 귓병 때문에 고생을 했는데, 이 곡에서 보여주는 아름답지만 무언가 어둡고 격렬한 음향은 당시 그에게 찾아 든 신체적 고통이 예술적으로 전이되어 표출된 된 경우라 볼 수도 있겠다.
바이올린 비루투오조 사이에서나 지휘자들 사이에서는 너무나도 인기가 있는 곡이기에 이 곡의 명반을 꼽으라고 하면 무척 주저하고 조심스럽게 된다. 그런데 그런 주저함 중에도 나만의 취향에 따라 남성 비루투오조보다는 여성 비루투오조의 연주에 가점을 주게 된다. 여류 바이올리니스트인 이다 헨델, 정경화의 연주도 훌륭하지만, 전설적인 삶을 살다간 프랑스의 바이올리니스트 느뵈(Ginette Neveu,1919-1949)와 이 곡의 연주를 들은 시벨리우스로부터 직접 그의 집에까지 초대를 받았다는 미국 출신의 카멜라 위크스(Camilla Wicks,1929~)의 연주가 더욱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내가 느뵈의 음반에 손을 들어준 이유는, 열 다섯 살의 나이로 오이스트라흐를 누르고 비니아브스키 콩쿠르에서 우승을 하며 천재 소녀라는 명성을 듣게 된 그녀가 고작 나이 서른로 비행기 사고로 인한 비극적 죽음을 맞게 된 운명에 비애감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보다는 이 곡에서 요구하는 끊어질 듯 이어지는 비브라토며 울 듯하던 표정을 금방 거두고는 다시 씩씩해지는 감정의 변화를 그녀가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느뵈의 음반과 나란하게 꼽는 카밀라 위크스의 음반은 작년 여름에야 알게 되었다. 안동림선생이 <이 한 장의 명반>에서 이 음반을 추천함으로써 우리들이 이 복각된 음반을 구할 수 있게 된 것은 고마운 일이다. 게다가 이 음반의 연주는 에를링크(Sixten ehrling)의 지휘 아래 북구 출신의 오케스트라 스톡홀름 라디오 방송 교햑악단(symphony Orchestra of Radio Stockholm)이 담당하고 있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 동북아시아인들 사이에는 알게 모르게 면면히 흐르는 정서가 있듯이 북유럽인들끼리만 더욱 긴밀하게 공감할 수 있는 정서가 있으리라고. 그런 점에서 핀란드와 바닷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스웨덴 방송 악단의 연주이기에 일단 신뢰하게 된 것이다. 물론 카밀라 위크스의 연주는 작곡가 자신이 감동을 할 정도로 작곡가의 작곡 의도를 충분히 표현한 명연주임에 분명하다. 시벨리우스 자신의 ‘죽음의 무도’라고 부른 민속 무곡풍의 동기가 화려한 바이올린의 연기를 따라 점점 치달아 오르면서 멋진 휘날레를 이루는 가운데에도 선명한 바이올린의 레가토와 액센트는 분별력을 잃지 않는다. 게다가 오케스트레이션과 독주 악기인 바이올린 간의 음의 균형도 잘 맞아 아름다움과 질서를 추구하려는 인간의 마음과 광란하고픈 디오니소스적 욕망이 제대로 균제를 이루고 있다.
우리들 마음 속의 악마는, 눈물을 지을 줄 아는, 바이올린 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자연의 늑대만 못할 때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우리들 깊숙한 내면에 있는 추한 존재를 인정하기를 두려워한다. 사실 누구나 내 안의 악과 만나는 것이 영 불편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퍼소나(persona)가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자기 자신마저 속일 수 있을 정도로…. 벌써 몇 번째 이 곡을 듣고 있자니 선풍기에서 부는 바람이 이제야 제대로 청량하게 느껴진다. 격렬하면서도 우아하고 아름다우면서도 서글픈 이 곡을 들으면서 옆 사람 눈치 볼 것 없이 울다가 웃기를 반복할 수 있을 때까지 잠시라도 각자의 사회적 가면(퍼소나)를 벗어두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