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 중 한 문제만 골라 답하시오.(2007.중간시험)
1. 연쇄극이 출현한 배경과 그 양식적 특징에 대해 서술하시오.
2. 희극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음의 순서에 의해 서술하시오.
1) 기원과 특징 / 2) 희극의 인물 / 3) 희극의 단계
※ 다음 중 한 문제를 택하여 답하시오.(2006.중간시험)
1. 연쇄극을 정의하고 조선 최초의 연쇄극에 대해 아는 대로 설명하시오.
2. 멜로드라마(melodrama)가 지니는 특징을 3개 이상 들고, 이를 대중성과 연관하여 설명해 보시오.
※ 다음 중 한 문제만 선택하여 답하시오. (2005.중간시험)
1. 멜로드라마(melodrama)가 지니는 전형적인 특징을 3가지 이상 들고 설명하시오. (단, ‘시적 정의’, ‘희극적 이완’, ‘선정성’에 대한 설명을 포함하여 서술할 것.)
2. 연쇄극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나누어 설명하시오.
1) 연쇄극의 정의, 2) 한국에서의 연쇄극의 출현배경, 3) 최초의 연쇄극 ‘의리적 구토’에 대해 설명하시오.
※다음 중 하나를 골라 설명하시오. (2004.중간시험)
1) 표현주의
2) 서사극
2. 1960년대 이근삼 희곡의 비사실주의적 경향을 작품 「원고지」를 예로 들어 설명하시오.
※ 브레히트의 서사극 이론을 “소외효과” 개념을 중심으로 설명하시오.(2003.중간)
※2002.중간시험
1) 우리나라의 전통 인형극인 꼭두각시놀음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나열하고, 꼭두각시놀음의 무대와 연출 방식, 인형조종법 등을 설명하시오. (10점)
2) 지상강좌에 나온 주요 민속연극 형태 중 특히 자신있게 쓸 수 있는 내용을 하나 골라 설명하시오. (20점)
☞ 2005년~2007년까지의 출제되는 문제 유형을 보면 거의 주제가 같음을 볼 수 있지요?^^
그래서 ↓요아래에 있는 지상 강좌만 충분하게 숙지한다면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에 2008년 2학기 '지상강좌'를 보충한다면 더.더~좋은 점수인 ,,,만점이 나올거라 확신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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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한국 희곡론>지상강좌
연쇄극의 기원과 형성에 관한 소고
들어가는 말
한국에서 영화가 만들어진 날을 기념하는 영화의 날은 10월 27일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영화의 날의 기원은 1919년 10월 27일 단성사에서 공연된 연쇄극(連鎖劇) <의리의 구토>(義理的 仇討)에서 유래한다. 다시 말해 영화의 날은 이 <의리의 구토>가 공연된 날을 기준으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영화의 날의 기원이 극 형식인 연쇄극으로부터 출발하게 된 것일까? 이 같은 공연 양식은 초창기 영화의 출발에 있어 영화와 연극 간의 밀접한 공모관계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 양식의 형성-소멸과정을 통해 특정한 시기에 출현했던 양식의 미학적 특징들을 보여준다. 이 글에서는 연쇄극의 출현과 양상을 살펴봄으로써 한국의 근대 대중문예의 형성과정의 한 단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일본 연쇄극의 형성과 유입
연쇄극은 연극공연 중에 영화장면을 삽입한 공연양식을 일컫는다. 다시 말해 무대에서의 공연과 영화화면의 영사를 교대로 함으로써 극적효과를 꾀하고자 했던 연극과 영화의 절충형태라고 할 수 있다. 연쇄극이란 명칭은 연쇄극의 ‘연쇄’란 단어가 의미하듯 연극과 영화가 사슬의 고리처럼 이어진다는 의미에서 유래된 것이다. 한국에서 이 같은 양식이 보편화된 것은 1919년 신파극단 신극좌(新劇座)가 제작한 <의리적 구토>가 단성사에서 공연된 것을 계기로 대중적 인기를 얻은 이후다.
그러나 이 같은 공연형식은 원래 일본에서 시작된 것으로 1910년대에 한국에 유입된 것이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연쇄극 공연은 1901(명치 34)년 11월, 이치무라좌(市村座)
가 이 방식을 이용해 사와라 도스코(澤村訥子)의 <미켄쟈크(眉間尺)>라는 연극을 선보이면서부터였다. 이후 1904년 3월, 동경 니혼바시(日本橋) 부근에 있던 마사고좌(眞砂座)에서 무라다 마사오(村田正雄) 등이 출연한 일종의 전황극(戰況劇) <세이로노 코테이(征露の皇軍)>에서 극적 효과를 높이고 러일 전쟁에 참전한 일본군들의 무용담을 실감나게 묘사하기 위해 어뢰를 발사하는 등의 해전 장면을 극중에 삽입하여 진일보시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작품은 전장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또 전달받고자 하는 공급자와 수용자의 욕망이 만남으로써 새로운 공연형식을 요구하게 된 것으로 전쟁과 영화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도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전황에 대한 대중의 호기심은 영화의 대중적 관심과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당시 새로운 공연양식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신파극에도 영향을 미쳐 새로운 무대재현을 위한 장치로 쓰이면서 이른바 연쇄극의 탄생을 예고하게 된 것이다. 전쟁 장면처럼 초기에는 주로 실제 장면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실경응용’(實景應用) 또는 ‘실물응용’(實物應用) 등의 명칭으로 불렸던 이 공연형식은 1913년 6월 고베(神戶)의 오구로좌(大黑座) 공연에 출연중이던 야마자키 나가노보(山崎長之保)가 연쇄극이란 명칭을 사용한 것을 계기로 일반화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1910년대 중반까지 극장가의 인기 프로그램으로 대중들의 흥미를 사로잡았던 연쇄극은 그러나 영화가 본궤도에 오르면서 기형적 존재로 인식돼 마침내는 1917년 6월, 무대공연과 영화를 한 작품 내에 수용하는 형식을 금지하는 일본흥행법의 개정으로 소멸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가부키와 신파극의 배우들이 대거 연쇄극으로 몰리면서 극단운영이 어렵게 된 데에 대한 자구책이 국가적으로 받아들여져 흥행의 주도권을 빼앗긴 연극 쪽의 압력과 이를 반영한 국가 정책이 함께 작용했다. 결국 일본의 연쇄극은 1904년부터 1917년까지 존속한 양식으로 신파극단들이 무대에서는 표현하기 어려운 스펙터클한 장면을 삽입함으로써 서사성을 높이는 한편 점증하는 영화의 인기를 공연에 접목하는 방법의 하나로 도입된 양식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일본에서는 이미 1917년에 소멸된 공연형식이었던 연쇄극이 어떤 경유를 통해서 한국에서 출현하게 된 것일까. 일본에서 막을 내린 연쇄극의 잔양은 완전한 자취를 감추기 전에 한국을 향해 손을 뻗치기 시작했던 것으로 이미 소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에 연쇄극이 처음 들어온 것은 1915년 10월 16일 신문연재소설을 무대화환 미즈노 강게쓰(水野觀月) 일행의 <짝사랑>이 부산의 부산좌(釜山座)에서 개연하면서부터였다.
서울에서는 이보다 늦은 1917년 3월 14일 을지로 황금관에서 흥행한 <운명의 복수>로 이는 실제로 울산에서 일어난 백골 사건의 진상을 파헤친 것으로, 울산 조선 부락의 주막 장면은 카메라에 담고 부산지방법원 공판장 전경은 연극으로 구성한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1918년, 세토나이카이 일행이 내한하여 <선장의 처>와 <불여귀> 등을 공연함으로써 활동극 사진 연쇄극 제작기의 발화를 촉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최초의 연쇄극 <의리적 구토>의 감독인 김도산(金陶山)이 이 때 내한한 <선장의 처>에 자극을 받았던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2. 한국에서의 연쇄극의 출현 배경
한국에서 연쇄극 제작에 가장 먼저 참여한 인물은 극단 신극좌를 이끌고 있던 김도산이었다. 국내 최초의 신파극단이라고 할 수 있는 혁신단(革新團) 설립 때부터 극계의 중요한 인물로 활동한 그는 신극좌를 새로 창단해 좌장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191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심각하게 나타난 신파극계의 불황을 맞아 새로운 흥행요소의 도입을 절실하게 느꼈던 것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이를 타개하기 위한 대응책으로 모색된 것이 바로 연쇄극이었던 것이다.
조선신파 경성 신극좌는… 이번에 특히 내용을 충실케 하기 위하여 조종 연구한 결과 전기응용(電氣應用)(키네오라마) 기계를 구입하여 무대상에서 구름, 비, 눈, 해, 달, 별, 파도 등을 수시 현출케 하고 연극의 화려를 더하여 일반 관객으로 하여금 다대한 쾌락과 감상을 일으키게 할 계획으로 신극좌 좌장 김도산군이 그 기계를 구매하기 위하여 일전에 내지 대판에 건너간 바 약 2주간 그곳에서 참신한 제반 자제를 실제로 견습하고 오는 25일경에 귀선하여 경성에서 그 기계를 일차 시험한 후 각 지방으로 순회 흥행할 예정이라는데 이는 실로 극계의 일대 특색이라 하겠더라.
결국 일본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연쇄극의 출현은 신파극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신파극의 상업적 가치를 높이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특수효과를 내는 데 필요한 일종의 환등장치라고 할 수 있는 키네오라마 기계를 구입하고자 김도산이 일본과 중국을 다니러 갔다는 위의 기사는 이러한 정황을 잘 보여준다. 키네오라마(kineorama)라는 기계를 구입하기 위해 일본에 갔던 김도산이 그곳의 흥행추세를 파악하고 이를 한국에 도입했으리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추정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1919년 9월 23일부터 단성사에서 공연하고 있던 <카츄사>는 키네오라마를 이용한 특수효과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러한 특수효과는 영화에서는 이미 실현되고 있는 것이었으며 영화가 유입된 지 22년이 되던 해였기 때문에 영화는 상당한 대중적 지지층을 마련하고 있었다. 따라서 신파극단들이 신파극의 불황을 극복하기 위해 대중적으로 인기가 높은 영화를 연극공연에 활용할 수 있는 방안으로 연쇄극 제작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수입영화의 지속적이면서도 대중적인 흥행은 자국영화에 대한 제작의 필요성을 가중시켜 나갔다.
3. 최초의 연쇄극 <의리적 구토>
신파극의 흥행 여건에 대한 활로 모색과 ‘조선사진’-조선인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조선적인 것을 담은 활동사진-에 대한 기대가 맞물려 만들어진 최초의 연쇄극은 바로 1919년 10월 27일 김도산이 단원들을 이끌고 단성사주 박승필(朴承弼)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단성사 무대에 올린 <의리적 구토>이다. 이 작품은 비록 1권 분량의 1,000피트 길이의 필름을 연극 중간에 삽입한 것에 지나지 않았으나 구경꾼들이 “단성사의 초일 관이 물미듯이 드러와…쵸져녁부터 됴수(潮水)갓치 밀니 관남녀 삽시간에 아의 칭(層)을 물론고 히 챠셔 만원(滿員)의 (牌)를 달고 표지 팔지 못 셩황”에 힘입어 한 달 동안이나 장기 공연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흥행에 성공했다
그러나 <의리적 구토>는 연쇄극 공연 이전에 앞서 이미 전 9장으로 구성된 신파 인정극으로 7월 4일에서 7월12일까지 우미관에서 한 차례 연극으로 상연된 바 있었다. 이 때, 이 연극을 눈여겨본 박승필이 김도산을 알게 되었고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연쇄극을 만들기로 작정하고 실제 제작에 착수하게 된 것이다. 연쇄극 제작에 있어 박승필의 참여는 대단히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연쇄극 제작에 투자함으로써 흥행자본이 제작 자본으로 전화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으로 평가된다. 구극을 전문으로 공연하고 있던 극장 광무대의 운영을 시각으로 흥행사업에 손대고 있던 박승필은 단성사의 실질적인 경영자가 된 이후 영화의 상업적 가치 상승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무대공연을 위주로 운영되고 있던 단성사를 1918년부터 영화상영 위주의 극장으로 바꾼 것은 흥행추세의 변화를 감지한 그의 사업가적 수완을 드러내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땅에 영화가 수입된 지 20여년이나 되는 시점에서 날이 갈수록 영화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감에도 불구하고 거의 전부가 외국영화였다는 점은 한국영화 제작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있었음을 의미하며 이를 박승필은 민감하게 주목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연쇄극 제작은 영화적인 면모를 보여주면서도 영화제작에 들어가는 비용이나 기술만큼은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영화제작보다는 훨씬 부담이 적으면서도 흥행성과를 기대할 수 일석이조의 양식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모두 8막 28장으로 구성된 <의리적 구토>에는 거금 5~6,000원의 제작비가 들어간 것으로 당시 쌀 한말에 80전 내외하던 것을 고려한다면 엄청난 액수가 아닐 수 없었다.
지금 경셩황금유원 안에셔 됴션 구파연극으로 열 동안을 한갈 갓치 경영여 오 사람은 경향에 쇼문이 자자 박승필 씨 그 사람 한아이라 오날 날 연극계에 헌신뎍 다대공로를 친 사람은 박씨를 여노코는 다시 구슈 업 터이다. 열 의 댱규(長久) 셰월을 지리(支離)타 아니고 시종이 여일토록 분투에 분투를 야 오날의 넉넉산을 압헤 두고 대셩공으로 젼진야 가 것도 희한 일이 안이면 긔막힐 일이다.
이처럼 연쇄극 <의리의 구토>에 대한 박승필의 투자는 당대에서도 희귀한 일로 평가되었다. 사실 영화제작에 비해서는 비용에 대한 부담이 적었다고 할지라도 제작 장비와 촬영기사를 들여오는데 상당한 비용을 필요로 하는 연쇄극의 제작은 신파극의 흥행부진으로 곤란을 겪고 있던 극단으로서는 쉽게 감당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김도산이 흥행추세의 변화를 읽고 그에 대한 대응방법으로 연쇄극 제작의 필요성을 간파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이 같은 엄청난 제작비용을 독자적인 힘으로 감당하기에는 어려운 일이었음에 틀림없다. 따라서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자본의 힘은 연쇄극 제작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박승필의 제작아래 김도산이 감독을 맡고 촬영기사는 미야카와 소우노스케(宮川早之助)로 일본인을 기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일본인 촬영기사와 장비를 이용한데 따라 각 작품에 필요한 장면을 한꺼번에 촬영하여 가능한 한 많은 편수를 제작해두고자 하여 <의리적 구토>는 <형사의 고심>(혹은 형사고심(刑事苦心))이나 <시우정>(是友情)과 한꺼번에 촬영되었으나 가장 먼저 상영된 것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의리적 구토>는 송산 역에 김도산이, 죽산 역에 이경환이, 매초 역에 윤화가, 영보 역에-강원형이, 부호 역에-최일이, 세간 청지기 역에-양성현이, 계모 역에 남장여배우 김영덕과 기타 신극좌 단원들이 출연했으며 스토리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 송산(松山)은 본시 부유한 집 아들로 태어났으나, 일찍이 모친을 잃고 계모 슬하에 불우하게 자라난 몸이었다. 집안이 워낙 부유하고 보니, 재산을 탐내는 계모의 간계로 말미암아 가정엔 항상 재산을 둘러싼 알력이 우심했다. 송산은 이리하여 새 뜻을 품되 이 추잡한 가정을 떠나 좀더 참된 일을 하다가 죽으려는 결심을 하는데, 우연히 뜻을 같이 하는 죽산(竹山)과 매초(梅草)를 만나 의형제를 맺고 정의를 위해 싸울 것을 다짐한다. 한편 계모의 흉계는 날로 극심해 가서 드디어는 송산을 제거하려는 음모까지 모의하게 된다. 송산의 신변이 위태로워짐을 알게 된 의동생 죽산과 매초가 격분해서 정의의 칼을 들려 하지만 송산은 동요하지 않고 이를 말린다. 송산인들 어찌 고민이 없을까마는 그는 오직 가문의 부친의 위신을 생각해서 모든 것을 꾹 참고 견디자는 것이었다. 그러하자니 자연 마음이 울적하고 괴로운 송산은 매일 술타령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송산의 은인자중(隱忍自重)도 보람이 없이 드디어 최후의 날이 오고야 만다. 계모 일당의 발악이 극도에 올라 송산의 가문이 위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좌시할 수 없게 되자, 송산은 죽산과 매초의 독촉도 있고 해서 눈물을 머금고 정의의 칼을 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스토리만을 가지고는 연쇄극의 공연 형태가 어떠했는지를 확인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당시 <의리적 구토>에 대한 원로연극인이나 이를 관람했던 이들의 증언에 의해 부분적으로 추정될 뿐이다.
필자가 소년시절에 단성사에서 본 연쇄극(아마 그것이 <의리적 구토>라는 것이었을 것이다>은 숲이 있고 양관(洋館) 현관이 있는 정원에서 청년과 악한이 싸우다가 악한이 도망을 하는 것을 청년이 쫓아가는 데서 호루룩하고 호각을 부니까 불이 꺼지고 천장에서 어둠 가운데 흰 포장이 내려와 무대의 삼분의 일 정도의 넓이로 중앙에 매달리더니 좌우에서 배우들이 포장 뒤로 숨으니까 다시 호루룩하고 호각소리가 나자 2층 영사실에서 터르르하자 빛이 비치는데 사진이 나와서 악한이 산으로 기어 올라가고 뒤미쳐서 청년이 따라가면 막 뒤에서 말을 주고받고 이렇게 한참 험한 산비탈에서 싱갱이를 하다가 이윽고 악한이 잡히자 당화한 악한이 품에서 단도를 꺼내어 청년을 찌르려 하는 위기에서 별안간 호각소리가 또 나더니 순식간에 포장이 올라가고 불이 켜지니까 무대는 악한의 칼이 청년을 찌르려 한다. 이래서 한바탕 ‘다찌마와리’가 벌어지고 객석에서는 박수가 쏟아진다.
무대에서 연극이 벌어지다가 등장인물이 급히 퇴장한다. 함께 연극하던 배우가 뒤따라간다. 이때 호루라기 소리가 나며 무대 위에서 옥양목 스크린이 내려오고 거기에 활동사진이 비친다. 방금 무대에서 본 배우들이 활동사진에서 연기를 한다. 쫓는 자가 대기시켰던 자동차를 타고 쫓는다. 추적 또 추적! 자동차가 5리 밖에서 달려온다. 카메라는 고정돼 있고 그 자동차가 스크린 전면까지 와서 비켜질 때까지 약 5분. 그다음 장면은 추적하는 자동차가 보이기 시작해 그것도 스크린에서 사라지기까지 5분쯤. 이렇게 자동차와 자동차가 쫓기고 쫓고 하다가 마침내 뒤차가 앞 차를 바짝 몰아 두 사람이 격투를 시작할 때 다시 호루라기 솔가 나며 옥양목 스크린이 위로 밀려 올라가면 무대에 바로 영화장면이 이어져 실제로 배우들이 격투를 한다. 희한하기란 말할 수 없었다. 연극과 영화, 다시 연극으로 또 영화로 이렇게 연결되는 것이 소위 연쇄극. 필자가 본 연쇄극은 <의리적 구토>인데 이것이 한국 최초의 영화 촬영기를 쓴 필름이었다.
박진과 조풍연, 두 사람의 회고에 따르면 공통적으로 무대에서 공연 도중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스크린이 나타나며 그 위에 영사화면이 비친다. 즉 다시 말해 무대에서 어떤 장면을 공연하던 중에 영사막이 설치되고 일부 장면이 영사되었다가 다시 실제 무대공연으로 복귀하는데 그때 사용된 것이 바로 호루라기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화면들은 주로 “한강철교, 장충단, 청량리, 영미교, 남대문정거장, 뚝섬, 살곶교, 노량진공원” 등이며 주로 전차나 기차, 자동차의 추격 장면을 박은 것이다. 주로 추적, 추격 장면이나 활극을 연출하고 있는 이들의 영사는 배경화면을 비추는 수준을 넘어 극적인 연출도 가능케 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의리적 구토>와 함께 박승필 제작의 기록 영화 <경성 전시의 경(景)>이 같은 날 공개되었다는 그 보완적 시점의 비중을 고려한다면, 연쇄극은 단순한 화면의 배경처리만이 아닌 이야기, 즉 스토리를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극이 연출할 수 없었던 박진감과 생동감을 불러일으키면서 극적 효과를 배중시키면서 스펙터클의 가시화를 가능케 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체험장으로 기능했음을 알 수 있다.
4. 연쇄극의 쇠락과 평가
박승필과 김도산은 <의리적 구토> 이후 <시우정>(1919.11.3-6), <형사고심>(1919.11.9-17), <천명>(天命)(1920.4.16-21) 등의 연쇄극을 선보이면서 흥행을 주도해 나갔다.
그러나 연쇄극은 비단 신극좌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당시 연극계에 군림하고 있었던 신파극단 역시 여기에 가세해 임성구(林聖九)가 이끄는 혁신단에서 <학생절의>(學生節義)(1920.4.26-30)와 <보은>(報恩)(1920.5.12-) 이기세(李基世)가 이끄는 조선문예단의 <지기>(知己)(1920.4.24-27)와 <황혼>, 김소랑(金小浪)이 이끄는 취성좌(聚星座)의 위생계몽 활동사진 <인생의 구>(人生의 仇)(1920.7.30-8.1) 등의 다수가 경작(競作)하여 이른바 연쇄극의 시대를 열었다.
특히 이 시기 연쇄극은 이필우(李弼雨)라는 한국인 촬영기사를 탄생시켰으며 더욱이 한국 최초로 여배우 마호정(馬豪政)이 출연하여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러나 연쇄극의 시대는 그리 길지 않았다. 김도산과 임성구의 타계와 이기세의 신문기자로의 전향은 연쇄극을 끌고 가던 주지도부를 해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요컨대 1919에서 1923년에 이르는 기간을 연쇄극 시대라 부를 수 있다. 임화에 의하면 이 시기는 ‘조선영화가 감상의 수준에만 머물러 있다가’ 이른바 부분적인 제작을 시도한 일종의 모방기로 초기영화의 틀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규정된다.
그러나 이 같은 평가는 영화의 기원을 찾는 데서 얻어지는 적극적인 결과물이고 실제로 연쇄극을 보는 연극사와 당대 지식인의 시각은 그다지 곱지 않았다. 왜냐하면 신파극의 흥행 부진을 면하기 위해 계발된 연쇄극은 주로 대중의 흥미몰이에만 치중하였으며 그러다 보니 연극의 계몽적 기능을 약화시키면서 연극의 순수성을 타락시켰다는 비난을 면키 어려웠다.
사정이 이러고 보니 연쇄극에 대한 당대의 시각은 대단히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윤백남의 신문화 정신은 변태극의 양상인 연쇄극에 대해 신파극이 타락일로의 길을 걷게 된 주원인으로 규명하고 연극이 사도에서 벗어나 진정한 연극을 제작하도록 촉구하였다. 연쇄극이 영화촬영으로 낭비하는 제작비를 순수연극제작을 위해 투자해야만 연극문화의 낙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이후 연극사에서도 마찬가지로 이어져 “연극도 영화도 아닌 통조림 연극”,이라든가 “신파극의 변태” 혹은 “연극의 타락” 등의 비판적 시각의 일로로 평가되어 왔다.
정리하면 연쇄극이란 초창기 영화, 즉 활동사진과 영화의 절충 형식으로 신파극의 흥행부진에 맞서 고안된 대안으로 연극에서 영화로의 과도기적인 시기에 나타난 양식이다. 그러나 연쇄극은 결국 연극의 부진한 상황을 타개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영화적인 장르에 귀속된 우려를 배제시키지 못하고 연극의 타락으로 규정되어버림으로써 그 미학적 특성은 무시되어 왔다. 그러나 연쇄극의 출발에는 신파극이 표현할 수 없었던 스펙터클한 극적 효과를 내기 위한 뚜렷한 목적과 분명한 방향이 있었던 만큼 매체의 경계 속에 불안하게 존재하고 있는 연쇄극에 대한 폄하는 재고되어야 한다.
※희극과 희극성(이상진 교수)
<일러두기> 이 강좌에서는 교재 제6장 희곡의 유형 중 희극에 대해서 공부해 보기로 한다. 희곡은 비극과 희극 외에, 이에서 파생된 멜로드라마, 소극, 그리고 서사극과 부조리극으로 유형화시킬 수 있다. 이 중 희극(comedy)은 고대 그리스시기에 발생된 오래된 장르임에서 불구하고, 비극에 비해 소략하게 다루어져 왔다. 그런데 희극은 그 장르 범주를 정하기가 매우 까다롭고, 현대에는 그 변형이 심각해져서 장르 규정을 위한 희극성 자체에 대한 논의가 매우 필요하다. 이 강의에서는 희극 장르가 가지는 본질적인 측면, 곧 웃음을 유발하는 여러 가지 수사적 영역을 포함한 미적 대상으로서의 희극성에 대해 알아봄으로써, 장르로서의 희극과 그 본질적 측면에 대해 이해해보기로 하자. |
1. 희극의 본질
희극이란 웃음 자체를 의도하는 것은 아니지만, 웃음이라는 미학적 가치를 생산하는 것에 목표가 있으며 이를 위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예로부터 삶과 예술에서 ‘진지함’이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으므로 이와 대립되는 웃음은 예술에서 분명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변부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웃음을 유발하는 희극을 비롯하여 우화, 풍자문학과 같은 장르는 전범화되지 못한 문학 장르로 남아있었고, 이와 연관된 아이러니, 유머, 위트, 우스꽝스러운 것 등은 이런 문학 및 예술장르의 수사적 영역으로 남아 있었다. 이런 이유로 희극과 희극이 유발하는 웃음에 대한 미학적 고찰은 다른 장르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져 온 면이 없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희극을 비극의 대립되는 장르 정도로나 언급했을 뿐이며, ‘웃음’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를 전개한 베르그송조차 희극은 물질(기계)과 영혼(자연, 인간)의 대립에 바탕을 두고 있어 완전한 예술장르가 되기에 부족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1961년 스타이너는 비극의 죽음을 선포했다. 이제 비극성 개념자체가 모호해졌기 때문에 과거와 같은 비극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일 것이다. 이것은 희극도 마찬가지이다. 희극은 과거보다 훨씬 더 많이 공연되고 있지만, 과거같이 비극과 대립되는 의미에서의 희극의 의미도 모호해졌다. 그리하여 현대극에서는 풍자적, 공격적인 희극의 변형이 훨씬 더 중점적으로 다루어지며,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결말은 반어적으로 전도되거나, 희극의 긴장완화가 외견상 개방적인 결말로 변형된다. 따라서 고대극의 희극성에 근거하여 희극의 본질을 논의하는 것은 이제 지나간 이론이 되고 있다. 희극 역시 그 죽음 선포를 눈앞에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희극과 희극성에 대한 논의는 이 점에서 장르의 영역을 넓히고 다시 경계 짓기 위해 매우 중요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2. 희극
1) 희극의 기원과 정의
희극(comedy)이 어디에서 유래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그리스어의 ‘Komoidia’에서 나온 말인데 촌락을 뜻하는 'Kome'와 노래를 뜻하는 'Oide'의 합성으로 촌락제에서 발행하였다고 한다. 또 그리스어로 행렬을 뜻하는 ‘Komos’와 노래를 뜻하는 'Oide'의 합성어로 행렬의 노래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디오니소스 축제 때 사람들은 탈을 쓰고 광란적인 춤을 추었으며, 남근 형태의 조형물을 들고 남근 찬가를 불렀다고 전한다. 이와 같은 남근숭배사상은 풍요와 번성을 기원하는 것으로 남근 찬가는 유희와 웃음으로 짜여진 행복한 놀이였을 것이다. 이 점에서 본다면 축제는 사회적, 종교적, 도덕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고 이를 통해 에너지를 방출하는 한바탕 놀이라고 할 수 있다.
일설에 의하면 희극은 디오니소스 축제 때 풍자적인 노래를 부르면서 평소에 불쾌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을 비꼬기 위해 흉내를 내거나 주위의 구경꾼과 간단한 응답을 하는 과정에서 발생되었다고도 한다. 그러니까 축제와 제의는 낡고 부조리한 것에서 벗어나 새로움을 지향하는 태도의 구체적 표현이기도 한 것이다. 희극의 이러한 속성은 더욱 확장되어 후에 사회 풍자극으로까지 발전했다. 그런 점에서 희극은 축제의 정신과 동시에 사회비판적인 성격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1)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
아리스토텔레스는 희극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희극은 보통 이하의 악인의 모방이다. 그러나 이때 보통 이하의 악인이하 함은 모든 종류의 악과 관련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종류, 즉 우스꽝스런 것과 관련해서 그런 것인데, 우스꽝스런 것은 추악의 일종이다. 우스꽝스런 것은 남에게 고통이나 해를 끼치지 않는 일종의 실수 또는 기형이다. 비근한 예를 들면 우스꽝스런 가면은 추악하고 비뚤어졌지만 고통을 주지 않는다.
그는 희극이 보통보다 못난 사람들의 모방이라고 한다. 비극이 고귀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는다면 희극은 우리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인물들이며, 사랑이나 금전과 같은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며 자기 꾀에 자기가 속아 넘어가는 인물들이다. 그런데 이 ‘못남’, 곧 희극적 결함은 실수나 기형과 같은 것으로 인간에게 고통이나 파괴를 가져다주지 않는다. 그것이 전달될 때 관객은 조소하고 경멸할 뿐이다. 이것은 비극적 결함이 관객에게 연민과 공포에 시달리게 하는 것과 다르다.
또한 희극은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의 불완전한 면에 그 초점을 두고 있다. 그래서 희극의 관객은 이런 열등한 인간들의 행위를 보면서 ‘우월감’을 느끼게 된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스꽝스런 인물의 번영과 몰락이 분노의 감정을 자아내고 정화함으로써 관중에게 지적인 카타르시스를 야기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을 분명하게 희극보다 우월한 장르로 보았고, 따라서 '시학'의 대부분은 비극에 대한 설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2) 프라이의 희극론
N. 프라이는 '비평의 해부'에서 희극의 유형적인 인물과 희극공식에 대해 상세히 언급함으로써 희극에 대해 좀 더 심도 있는 논의를 펼쳤다. 그는 비극의 대표적인 인물유형을 아담형, 그리스도형, 프로메테우스형, 욥형으로 나누었고, 희극의 대표적인 인물유형을 알라존, 에이론 / 보몰로초스, 아그로이코스로 나누었다. 이중 희극의 인물이 비극보다는 훨씬 유형성이 두드러진다. 우리가 잘 아는 아이러니라는 문학용어는 바로 알라존과 에이론의 대립과 에이론의 승리에서 나온 말이다. 아이러니는 희랍어 Eironeia에서 온 말인데 이 말은 원래 사람들을 속이는 매끄러우나 비열한 방법 정도를 의미하던 말이었으나, 지금은 뜻하고자 하는 것의 반대의 말을 하는 것이라는 뜻을 포함에서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어쨌든 여기에서 나오는 에이론(eiron)은 외형상 약하고 겸손하고 못난 체하지만 영리한 인물이고, 알라존(alazon)은 강하고 오만하고 잘난 체하지만 우둔한 인물이다. 그래서 에이론은 겉으로는 항상 알라존에게 패배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실상은 관객의 예상을 뒤엎고 알라존을 굴복시키거나 골탕먹이는 것으로 극이 마무리된다. 희극적인 갈등은 대개 이 두 인물 사이에서 발생하는데, 알라존은 보통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훼방꾼, 봉건적인 인물로 형상화되고, 이것을 재치있고 지혜롭게 바꾸어 나가는 인물형이 에이론이다. 이외 희극적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조연급으로 어릿광대인 볼모로초스와 촌뜨기 아그로이코스를 들 수 있다. 볼모로초스는 즐거운 분위기를 돋우는 광대, 팔푼이 같은 인물이고, 아그로이코스는 인색하고 속되고 깐깐한 인물이어서 때로 흥을 깨는데, 여기에서 웃음이 발생한다.
프라이는 그리스 신희극의 플롯구조가 희극의 공식이라고 말한다. 곧 서로 결혼하고 싶어 하는 젊은 남녀가 양친의 반대로 어려움을 겪다가 결국 결혼하게 된다는 공식이다. 이렇게 새로운 사회의 출현을 축하하는 파티로 대단원을 맞는데, 이것은 한 사회에서 새로운 사회로의 전환으로 파악될 수 있다.
이런 희극의 대립은 주로 젊은 세대와 늙은 세대 간에 벌어진다. 즉 불합리한 법률이나 우스꽝스러운 사회제도를 고집하는 기성세대와 그것에 반발하는 신세대 사이의 대립이 희극의 전형적인 대립구도이다. 이 대립에서 구세대는 훼방꾼이고 장애물이며 남의 말을 듣지 않는 권력자로서 알라존형 인물이다. 이들은 경직성 때문에 매우 어리석어 보이지만 지배계층으로서 힘을 가지고 있다. 알라존의 대립인물인 에이론은 신세대로서 힘도 없고 겸손하지만 결국 새로운 사회를 향한 유연성과 지혜로 알라존을 이겨낸다.
그러나 모든 희극이 에이론의 승리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좀 더 복잡한 사회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희극이라면 이렇게 간단히 새로운 사회의 도래를 그려낼 수 없을 것이다. 곧 현대 희극에서는 이런 유형적 인물의 공식화된 이야기는 점차 사라지고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요컨대 프라이는 이런 인물유형과 희극의 구조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갈등에서 해결과 변화하는 플롯 구조가 격분과 동정의 감정을 자아내고 정화함으로써 관중에게 사회적 비판 성격을 지닌 카타르시스를 야기함을 강조하고 있다.
2) 희극의 계보
희극은 디오니소스 축제의 희극경연대회를 통해 발전했다. 이런 희극은 통렬한 현실풍자와 비판을 보여주는 구희극과 낭만적인 연애와 생활묘사를 다룬 신희극을 거쳐 전 유럽에 퍼져 나갔다. 이탈리아의 코메디아 델라르테는 젊은 연인들의 사랑 이야기를 주로 다루었다. 이런 낭만적 희극의 경향은 영국의 셰익스피어를 거쳐 퍼져나갔고, 17세기 프랑스의 몰리에르의 희극에서는 비판적이고 풍자적인 희극이 다시 나타났다.
희극은 관객에게 어필하는 양상에 따라 이성적인 것과 감성적인 것으로 나뉜다. 이성적으로 어필하는 유형을 풍자적 희극, 감성적으로 어필하는 유형을 낭만 희극이라고 부른다. 풍자적 희극은 유머감각과 우스꽝스러움으로 씁쓸한 웃음을 유발하는데, 그 기저에는 불합리, 모순, 부조화를 알아차리고 반응할 수 있는 관객의 지성적인 감수성이 있어야 한다. 이런 연극에서 알라존과 에이론은 서로 팽팽한 대립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곧, 알라존이 자신의 고집을 끝내 버리지 못하고, 에이론과 화해를 이루지 못한다. 고대 그리스의 구희극, 자코뱅시대의 희극, 몰리에르의 희극, 왕정복고기의 희극이 여기에 속한다.
반면 낭만희극은 특정한 인물에 대한 강한 동정심과 다른 인물에 대한 혐오감을 만들어 내는 연극이다. 결국 선인의 행복한 결말, 악인의 징벌 혹은 개과천선이 이어짐으로써 심리적 안도감을 준다. 즉 알라존이 개심하여 에이론과 화해하는 낭만적인 극이다. 그리스 신희극과 로마희극, 세익스피어의 희극, 이탈리아 코메디아 텔라르테의 희극, 18-19세기의 감상적 희극이 여기에 속한다.
3) 희극의 단계와 소극
희극은 그 범주를 정하기가 아주 까다로운 장르이다. 왜냐면 광의에서 희극은 그저 웃음을 가져다주는 극형태를 모두 포괄하기 때문이다. 이 같이 희극은 범위가 무척 넓어서 작은 카테고리들로 나눠 볼 수 있다. 곧 상황이나 성격, 또는 사고에 초점을 맞추어 상황희극, 소극, 성격희극, 낭만희극, 사상희극, 풍습희극, 사회희극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희극이 환희와 경멸 사이의 범주에 드는 감정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톰슨은 '드라마의 해부'에서 이런 희극을 6가지 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그 첫째는 외설적이고 음탕한 연극으로 가장 낮은 단계의 연극을 말한다. 둘째는 신체적 결함을 통해 웃음을 유발하는 연극이다. 이를 테면 신체적 기형을 지닌 사람과 지나치게 못생긴 얼굴, 지나치게 크거나 작은 사람, 홀쭉이와 뚱뚱이등의 기형을 통해 보기만 해도 웃게 만드는 것이다.
특히 이런 인물들이 계속해서 실수를 하는 것은 웃음을 배가시킨다. 셋째는 계략, 희극적 장치를 쓰는 연극이다. 오해와 오인, 쌍둥이 형제나 자매와 같은 인물을 잘못 알아보는 의도적인 설정으로 상대방을 곤란하게 만드는 계략, 그런 상황을 통해 웃음을 유발하는 극이다. 네 번째는 언어적 위트를 통해 웃음을 유발하는 연극이다.
경구, 개그, 말의 우스꽝스러운 오용, 재치 있는 말장난 등을 통해 웃게 만드는 것인데, 이것은 매우 지적인 언어유희를 말한다. 자신이 학식있고 박식하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단어를 잘못 사용함으로써 웃음을 유발시키는 실수 등이 그런 예이다. 다섯 번째는 성격의 불일치를 통해 웃음을 유발하는 것이다. 즉, 웃음거리가 될 만한 성격적 결함이나 특성으로 웃음을 자아내는 것으로 기질희극이 여기에 속한다. 마지막 단계가 사상풍자이다. 인생과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풍자를 말하며, 특정한 개인이나 사회, 제도, 계층 등을 조소함으로써 대상의 가치와 의미를 격하시키거나 새롭게 재평가하려는 문학적 시도이다. 이런 연극은 희극의 목적에 가장 부합하는 연극으로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이 여기에 속한다.
희극은 넓게 말해서 톰슨이 분류한 모든 단계의 극을 포함하며 때로는 소박한 결말을 맺는 연극을 일반적으로 희극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좁은 의미에서는 소극(笑劇:farce)과 구별하여 문학적으로 수준 높은 해학극(諧謔劇)을 희극이라 지칭한다. 다시 말하자면, 희극은 어리석음과 가식과 모순 등을 꼬집는 가운데 우러나오는 지적인 웃음을 지향하지만, 소극은 터무니없는 상황이나 농담과 익살, 어릿광대의 우스꽝스런 행동 등을 통해 아무런 저의가 없는 폭소를 지향한다. 일반적으로 간단하고 가벼운 희극, 또는 웃음을 유발시키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는 극작품이 바로 소극인 것이다. 데이비스는 ‘재미만을 노리고 그 효과가 유별나게 연극적인 시끄럽고 물리적이며 시각적인 희극, 다소 일관성 있게 우스운 얘기로 된 익살스런 활극적인 희극’으로서의 성격을 지닌 극을 소극이라고 설명한다.
일반적으로 소극은 상황희극으로 지칭하는데, 어처구니없는 상황이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처한 처지를 과장되게 표현하고, 그런 상황을 우연적으로 그리는 것이 그 특징이다. 때로는 스랩스틱 코미디(slapstic comedy)라고도 부르는데, 원래 스랩스틱은 어릿광대가 상대역을 때릴 때 소리만 크게 나는 가짜 방망이를 뜻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코메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조금만 밀쳐도 넘어지고 자빠지고 하는 과장된 제스추어를 의미하는 것으로 소극의 과장적 속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한 마디로 소극은 희극의 필수적인 구성요소이지만 사려 깊은 웃음을 목적으로 한 고급희극보다 열등한 양식이라 할 수 있다.
3. 희극성
1) 희극성의 특성
웃음을 일으키는 현상을 보통 희극성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웃음은 어떻게 유발되는가?
첫째, 희극성은 인간이 상상하는 인간의 모습과 태도에서 생겨난다.
앙리 베르그송은 희극성이란 인간적인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사실 경치가 아름답거나 장엄하다고 할 때 우리는 감격하여 눈물을 흘릴지언정, 웃어젖히는 일은 없다. 자연물은 결코 우스꽝스럽지 않다. 혹시 동물의 동작이나 표정이 인간을 웃게 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그 동물이 인간의 어떤 면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이처럼 웃음이란 인간이 상상하는 인간의 모습과 태도에 한정되어 생겨난다.
둘째, 희극성은 시간적, 공간적 거리두기와 관련된다.
인간이 웃음을 유발시키는 때는 언제인지 생각해 보자. 관객은 무대 위의 어떤 사건이나 인물의 성격 또는 사상이 비정상적으로 느껴지고, 그것이 심각하게 여겨지지 않을 때 웃는다. 이때 관객은 무대에 대해 객관적으로 반응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자신들의 공감이나 반감이 무대와 너무 밀착되면 웃음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무감각이 웃음을 유발하는 것이다. 무감각은 다시 거리화로 바꿔 생각할 수 있다. 길거리를 지나던 사람이 돌이 걸려 넘어졌을 때, 그것을 보는 사람은 웃을 수 있다. 하지만 넘어진 사람이 자신이라면 절대 웃을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희극은 다른 사람에게 일어나면 우습지만, 나에게 일어나면 불유쾌할 그런 사건에 기반한다. 또 자기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라도 이전에 일어났던 일을 거리를 두고 생각하면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그런 사건에 기반한다. 이처럼 희극성은 시간적, 공간적 거리두기와 깊은 연관이 있다.
셋째, 희극성은 기계적인 것, 곧 경직성에서 비롯된다.
자연적인 것이 아닌 기계적인 것,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기 방식을 고집하고 나아가는 것은 웃음거리가 된다. 사회적으로 이런 것은 보수적인 세력의 완고함과 일방성, 융통성 없음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경직성을 보고 웃을 수 있는 개인은 정치, 경제적으로 종속관계에 속하지 않는 자유로운 계급의 집합이어야 가능하다. 이는 낭만희극에서 알라존이 가진 경직성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런 경직성은 불균형이나 전도된 세계, 신체의 결함이나 위엄의 실추, 역전 등에 의해 유발된다고 볼 수 있다. 찰리 채플린의 유명한 영화 '모던 타임즈'를 떠올려보자. 그 영화의 주인공은 공장에서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사람으로 공장에서 나왔을 때도 그 동작을 반복하여 관객의 웃음을 자아낸다. 이것은 자율성을 잃어버린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비애감 섞인 웃음을 가져다준다. 그의 경직성이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산업사회가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희극은 그저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는 것에서부터 그 이면에 진지한 의미를 깔고 있는 것까지 그 범위가 다양하다.
넷째, 희극성은 사회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웃음은 일종의 공범의식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즉 혼자서보다는 여러 사람이 함께 있을 때 그 웃음은 증폭된다. 공통적인 삶의 어떤 필요에 의해 우리는 웃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웃음은 사회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정리하자면 희극적인 것은, 집단적으로 모인 사람들이 그들의 감성을 침묵시키고 지성만을 행사하는 가운데 그들 중 한 사람에게 그들의 모든 주의를 집중하는 것에서 나온다.
다섯째, 웃음은 주관적인 것이다. 곧 관찰하는 사람에 따라 웃음 여부가 결정된다.
장 파울은'미학입문'에서 우리가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사람이나 사물 자체가 우스꽝스러운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해와 견해를 빌려 줄 때’ 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우스꽝스러운 대상을 관찰하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우스꽝스럽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희극적인 것은 주체에 의해 좌우되는 주관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희극성의 목적
18세기에 Horace Walpole은 “세상은 생각하는 자에게는 희극이고, 느끼는 자에게는 비극이다”라고 말했다. 희극과 비극은 모두 가르침을 주는 점에서 같지만, 대상에 대한 작가의 인식과 판단에 따라 달라진다. 비극을 보면서는 독자가 공감하여 연민과 공포를 느낌으로써 가르침을 얻지만, 희극은 철저한 거리, 무대의 객관화를 통해 조소와 경멸, 그리고 환희의 감정을 통해 교화된다.
비극이 인간의 존재나 영혼의 문제와 같은 철학적인 성찰을 목표로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희극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 삶의 구체적인 모습들을 문제 삼는다. 희극은 인간의 우매함, 결핍, 악덕 등에 관심을 집중하고, 비극적 비전이 아닌 웃음과 기지를 통해 경쾌하게 그려낸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우매함이나 악덕, 결함 등이 교정되고 극복되는 것이다. 그런데 희극은 비극과 달리 큼직한 도덕적 문제들을 제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사회적 관계 속의 인간에 집중한다. 사회는 정상적인 인간적 충동에 적당한 범위를 허락하며, 희극은 그 사회적 가치를 파괴하고자 하는 이탈행위를 견제한다.
희극은 사회적 통념과 인물이 보여주는 행동의 불일치에서 시작한다. 전통적으로 희극 작가는 사회적, 도덕적 인습을 수용하면서 작품을 썼는데, 잘못은 개인에게 있으며 개인이 무절제해서 사회와 불일치를 이룬다고 보았다. 따라서 희극적 인물이 가지고 있는 인간의 무절제, 사기성, 위선, 우둔함 등을 사회 통념에 빗대어 비웃는 것이 희극이다. 이런 인간의 욕망을 희극적 결함이라고 할 수 있는데, 희극적 결함과 사회와의 불일치가 클수록 웃음은 더 유발된다. 다시 말하자면 희극은 인간이 바람직한 세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음을 전제로 바람직하지 못한 것들을 비웃음과 조소를 통해 제거하고자 하는 연극 형태이다.
한편 희극은 무대로부터 거리를 갖고 웃음을 통해 비판적 현실인식을 가지게 한다. 이 점에서 희극은 인간의 어리석음이나 잔인함, 실수, 탐욕 등 윤리나 이성에 억압당해 왔던, 그러나 무의식의 영역에 잠재되어 있는 강력한 인간 본성에 대한 경고이다. 프로이드에 따르면 희극은 ‘가면 벗기기’로서 우리가 일상에서 억압해야 하는 충동들의 자유로운 방출을 허용하는 메카니즘이다. 심리적 차원에서는 억압된 충동과 성적 공포나 증오를 마치 꿈의 기능처럼, 희극의 인물에 전가하여 추방한다는 의미를 지니며, 그것은 심리적 해방감을 안겨준다.
이처럼 희극을 보면서 관객은 희극의 인물과 자신이 궁극적으로 비슷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자신의 허위의식이나 어리석음을 발견하고 교정하는 계기를 발견하기도 하며, 동시에 그 인물에게 자신의 부정적 충동을 전가시켜 추방함으로써 심리적 안도감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이 희극의 목적이며 효과이다.
3) 희극성의 구조
칸트는 그의 판단력비판에서 ‘웃음은 긴장된 기대가 무로 갑작스럽게 변하는 것에서 유래한다.’고 말하고 있다. 또 카이저는 ‘희극적이라는 것은 긴장의 뜻밖의 해소이며, 이 해소는 다른 존재영역으로의 예기치 않은 전환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이처럼 희극성은 변화를 전제로 하는데 이 변화는 예상치 않은 순간에 빠른 속도로 일어난다. 이런 이유로 희극성이 구현되기 위해서는 순간적 웃음을 유발하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잘 이어갈 개방적인 구조가 필요하다.
변화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칸트가 말한 대로 ‘긴장된 기대’를 만드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런 구조를 희극적 상황이 나타나기 위한 전반부와, 이 상황의 결과가 나타나는 후반부, 곧 웃기지 않는 전반부와 웃음을 동반하는 후반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긴장된 기대를 만드는 전반부는 논리적, 이성적, 규범적으로 전개된다.
그러나 갑작스런, 예상치 않은 규범 파괴로 사건은 논리와 합리성을 상실하고 ‘황당무계한 것’으로 바뀐다. 곧 후반부에 사건은 갑자기 비논리적, 비이성적, 비규범적인 것으로 바뀌면서 앞서의 윤리적, 미학적 규범을 순간적으로 파괴시켜 버린다.
이러한 과정에 따라 관객 역시 동일화와 거리두기의 변화를 겪는다. 곧 규범적이고 논리적인 전반부에 대해서 동일화하다가도 규범이 파괴되는 상황에 처하면 관객은 그것에 대해 크게 웃어줌으로써 거리를 확보한다. 이 거리두기와 웃음은, 우둔하거나 기계적이고 열등한 인물이나 상황에 대해 관객이 여러 가지로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것은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희극성은 거리두기에 의해 가능한 것이며 주체의 주관적 판단에 의해 좌우된다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