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은 이 문단에 몇 가지 비상한 진리를 기록하고 있다. 이 진실들은 인간들 중 생각없는 부류, 즉 최다수 부분을 차지하는 사람들에게는 역설로 보이는 것이다.
Ⅰ. 덕목(Virtue)의 명예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재산과 쾌락보다 가치가 있으며 바람직하다(1절).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다"(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좋은 이름은 좋은 기름에 우선하여서 지혜로운 사람이면 누구나가 오히려 좋은 이름을 선택할 것이다. 여기서 "좋은 기름"이란 것은 땅의 모든 이익을 나타내며(땅의 소산 중 기름은 가장 값비싼 것 중 하나로 치기에), 감각적인 모든 즐거움을 나타내고(왜냐하면 이것은 "심정을 기쁘게 해주는 기름과 향수" 여서 "즐거움의 기름"이라고 불리우는 까닭에), 또 사람들이 위엄을 부리는 최고의 명예로운 칭호를 뜻한다(왕들은 기름 부음을 받고 왕으로 삼아지기 때문에). "아름다운 이름"은 모든 "재물보다" 낫다(잠 22:1). 이 방명(芳名)은 곧 지혜롭고 인자한 이들의 지혜와 인자를 위한 이름이며 "정직한 자에게 대한 기억"이다.
이 아름다운 이름은 가장 "귀한 기름이 담긴 옥합"보다 낫다. 이것은 옥합 속의 기름보다 한층 더 마음에 은혜로운 즐거움을 가져다 주고, 사람에게 보다 쓸모있는 큰 기회를 부여해 주신 선이다. 이것은 "보배로운 기름을 담은 옥합"보다 더 멀리 가며 더 오래 지속된다. 그리스도께서는 마리아의 기름 부음에 대한 답례로 "좋은 이름"을 주셨고 그가 갚아 주신 이름은 복음서 안에서 향기로운 이름이 된 사실(마 26:13)로 알 수 있다. 그가 언제나 더 유리하도록 갚아 주신다는 것은 확실하다.
Ⅱ. 모든 것을 고려할 때 우리가 세상에서 나가는 것이 우리가 세상에 들어오는 것보다 더 큰 호의가 된다. "죽는 날"이 "나는 날"보다 더 낫다. 어떤 사람에게는 "아이가 세상에 태어날 때" 기쁨이 있고, 임종시에는 애도가 따르지만 우리는 다르다.
만약 우리가 좋은 이름을 얻을 만큼 훌륭히 살았다면 "우리가 죽는 날"이야 말로 우리의 염려와 수고와 슬픔에 종지부를 찍는 날이며, 우리를 안식과 희열과 영원한 민족에로 이사시켜 주는 날이 될 것이다. 이 날은 이토록 많은 죄악과 고통과 허무와 번뇌의 세계 속에 첫 발을 디디게 하는 날인 "우리가 출생하는 날"보다 더 낫다. 우리는 불확실하게 태어났으나 선한 자들은 불확실한 중에 죽지는 않는다. "우리의 출생일"은 영혼에 육체의 중한 짐을 지워주지만 "우리의 사망일"은 영혼을 육체의 부담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것이다.
Ⅲ. 장례에 가는 것이 축제에 가는 것보다 우리에게 더 유익할 것이다(2절). "잔칫집" 즉 결혼식이나 헌당식에 "가서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서 우는 자와 함께 우는 게 더 낫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더 유익할 것이며 더 인상깊게 될 것이다. 우리는 기회가 있다면 이 양쪽을 다 떳떳하게 출입할 수 있다. 우리의 구주께서는 가나에 있는 친구의 혼인잔치에 참석하시는 가 하면 베다니에 있는 친구의 무덤에서 눈물을 흘리시기도 하였다. 아마 우리는 잔치집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선을 행하며 유익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주 헛되고 물거품 같은 존재이다. 또 매우 교만하고 안심하기 쉬우며, 육에 탐닉하기 쉬운 존재이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우리는 "초상집에 가는 것이 더 낫다." 장례식의 화려함을 보러 가는 게 아니라 그 슬픔에 동참하고, 자기의 먼 집으로 떠나는 죽은 자와 길거리를 배회하게 되는 조상객들로부터 좋은 교훈을 얻으러 가는 것이다.
1. "초상집" 으로부터 얻어 낼 수 있는 유익한 점은 다음 두 가지이다.
(1) "모든 사람의 종말은 이것이다" 라는 것을 알려 준다. 그것은 이 세상에 대한 "사람의 종국"이며 이 땅에서의 생을 끝맺는 시기이다. 그는 자기 집에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죽음은 모든 사람들의 끝이다." 모든 사람이 "범죄" 하였으므로 "사망은 모든 사람에게 통용된다." 우리는 조객들처럼 우리 친구들에게서 버림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되고, 또 죽은 자들이 그러는 것처럼 우리 친구들을 버려 두고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 타인들이 당하는 경우가 또한 우리의 몫이 될 것이다. 잔은 한 순배씩 돌아가고 있으며 곧 축배를 들 차례가 우리에게도 돌아올 것이다.
(2) "산 자는 이 점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라고 훈계해 준다. 인간들은 이 점을 마음에 둘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다행한 일이다. 영적으로 살아 있는 자들은 "그것에 유의할 것이며" 다른 모든 점에 유의하지 않는 자들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 자신의 잘못이다. 왜냐하면 타인들의 죽음을 염두해 두는 일보다 더 쉽고 자연스런 것은 없는 까닭이다. 좋은 설교를 마음에 두지 않으려는 자들도 아마 "이 점은 마음에 둘 것이며 저들의 나중 결말을 곰곰히 생각할 것이다."
2. 그는 이 점에 대한 증명을(4절) 보다 상세히 보완시키기 위해 다음 사실을 둔다.
(1) "자기 마음을 초상집에 두는 것"은 지혜자의 특성이다. 현인은 슬픈 일에 매우 가까우며 이것은 그의 지혜에 대한 증거이고 촉진제가 되기도 한다. "초상집"은 지혜로운 자의 학교이다. 그는 거기서 좋은 교훈을 많이 배우며, 그 곳에 진지하게 임함으로써 자신의 활동영역 안에 있게 된다. 그가 "초상집에 있을 때" 그의 "마음"은 자기 눈 앞에 전개되는 죽음의 광경을 보게 된다. 더구나 그가 초상집에 있지 않고 "잔치집"에 있을 때도 그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어서" 슬픔 중에 있는 자들을 동정하고 있다.
(2) "마음을 열락하는 집에 두는 것"은 우매자의 특성이다. 그의 마음은 온통 즐겁고 유쾌한 장소에 쏠려 있다. 그의 온 기쁨은 놀이와 환락에 있으며, 즐거운 얘기와 즐거운 노래에 있고, 또 즐거운 사교와 환락의 낮과 밤에 있다. 그가 "초상집"에 있을 때는 항상 구속당하고 있는 셈이다. 그 때도 역시 그의 마음은 "연락의 집에 있다." 이것은 그의 어리석음으로서, 그를 더욱 더 어리석게 하는 촉진제가 되는 것이다.
Ⅳ. 우리는 환희에 차 있고 기쁨에 들떠 있는 것보다 근엄하고 진지한 것이 더 나으며 그것이 우리를 위해서도 더 좋다(3절).
흔한 속담으로 "일 온스의 환락은 일 파운드의 슬픔과 맞먹는 가치가 있다"고 하는 말이 있다. 그러나 전도자는 "슬픔이 웃음보다 더 낫다"는 정반대의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슬픔이 우리의 현재 상태에는 더욱 어울린다. 많든 적든 간에 매일 죄를 범하고 고통을 입고 있으며, 타인들의 죄와 고통을 날마다 보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가 눈물의 골짜기에 있는 동안은 그 풍토와 기후에 맞추어 살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그것은 우리에게 이득이 된다. "왜냐하면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은 더 좋게 되기 때문이다."
1. 우리의 영혼에서 가장 좋은 것이 우리에게도 최선의 것이며 그것이 우리 감각에게는 불쾌한 것이 될지라도 "마음은" 그것으로써 "좋게 된다."
2. 슬픔은 흔히 우리를 진지하고 심각하게 만들어 주는 행복한 방편이 되며, 건강이나 재산이나 가족을 해치는 고난도 마음을 개선시킬 수 있게 한다. 즉 인간은 고난을 통하여 아주 깊은 감동을 받게 되어 자기의 기질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고, 겸손하고 온유하게 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물러서고 죄를 참회하며 의무에 마음을 기울일 수도 있게 된다.
Vexatio dat intellectum─-즉 "번민은 지성을 예리하게 만든다. perissem nisi perissem 즉 "내가 만일 비참하게 되지 않았다면, 나는 망했을 것이다." 이 말은 반대로 얼굴의 명랑함과 희희낙락으로 인해 마음은 더욱 악화되며 공허하게 되고, 물욕과 정욕에 더 어둡게 된다는 것이다. 그 마음은 더 안도감을 느끼고 세상과의 사랑에는 더욱 깊이 빠져드는 반면 하나님과 영적인 것에서는 더욱 소원해져서(욥 21:12, 14)급기야는 아모스 6장 5, 6절에 나오는 자들이나 에스더 3장 15절의 "왕과 하만"처럼 "요셉의 고난"에 전혀 무관심하게 되고 만다.
Ⅴ. "어리석은 자들의 노래"로 우리의 부패한 마음을 충족시키기 보다는 "지혜로운 자의 책망"을 통해 우리의 부패를 정화시키는 것이 훨씬 더 낫다(5절).
지혜로운 자의 지식에 접하기를 매우 기뻐하고 그들의 권장이나 위로에는 더욱 솔깃해 하는 자들은 많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들도 "그들의 책망을 듣는 일"은 좋아하지 않는다. 즉 아무리 지혜롭게 견책하더라도 사람들은 자기들의 잘못을 지적당하는 일은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행동이 못된다. 왜냐하면 "훈계의 책망은 생명의 길"이며(잠 6:23), 책망의 소리는 "우매자들의 노래 소리" 만큼 듣기 좋지는 않으나 보다 유익한 것이기 때문이다. "지혜자의 책망을 듣되" 인내와 즐거움으로써 듣는 것은 지혜의 표시오, 지혜를 얻을 수 있는 수단이다. 그러나 "우매자의 노래"를 좋아한다는 것은 마음이 공허함을 나타내는 표적이 되며, 동시에 마음을 더욱 공허하게 하는 길이 된다. "우매자의 웃음소리"와 같은 일시적 쾌락에 사람이 그토록 혹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이와 같이 덧없는 즐거움은 "솥 밑에 지펴놓은 가시덤불"에 비유하는 것이 적절하다. 가시나무는 탈 때는 소리만 요란하게 나고 화염이 잠깐은 크게 일어나지만 곧 꺼져 버리고 그 재를 흩날리게 된다. 그리고 발열량으로는 무엇을 끓일 정도의 열을 얻어내는 데에는 거의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정도의 열을 얻자면 계속 타오르는 불길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매자의 웃음소리"는 시끄럽고 순간적이어서 진정한 기쁨의 본보기는 아니다. "이것도 또한 헛된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을 기만하여 파멸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니 "그 환락의 끝은 비애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복된 구주께서는 우리 운명을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해석해 주셨다.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너희가 웃을 것임이다." "이제 웃고 있는 너희에게 화가 있나니, 너희가 슬퍼하며 눈물을 흘릴 것임이다"(눅 6:21, 25).
● 지혜의 유익함(1) (전도서 7:7-10)
솔로몬은 앞에서, 자기가 "해 아래서" 본 "억압"에 대해 가끔 불평을 토로하였었는데, 이런 "학대"는 우울한 생각을 많이 불러 일으키며 덕행이나 경건을 크게 실망시키는 것이 된다.
Ⅰ. 그는 강해지고자 하는 유혹을 인정하고 있다(7절). "탐학이 지혜자를 우매하게 하는 것은 참으로 너무나 흔한 사실이다. 현명한 자도 장기간에 걸쳐 너무 심하게 억압을 당하면 그답지 않게 말하고 행동하기 쉽다. 자기 열정의 목에 매둔 고삐를 풀어 버리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대해 외람되게 불평을 터뜨리거나, 자신의 구제 수단으로 비합법적이고도 불명예스런 방법을 사용하기가 쉽다. "의인들은 "악인의 막대기"가 "자기들의 분깃"에 오래 "머물면" "자신들의 손을 불의에 내밀" 위험에 처하게 된다(시 125:3). 지혜로운 사람도 부당한 고난에 압박을 당하게 되면 자기 성미를 죽이고 자기 분수를 지키느라고 무척 고심을 한다.
"그것은 선물의 마음을 망하게 한다"(후반절은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선물들을 기꺼이 주고 싶어하는 관대한 마음의 소유자가 훌륭한 은사를 많이 부여받은 은혜로운 마음의 소유자라도 학대를 받음으로 인해 멸망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학대 당하고 그릇된 취급을 받는 자들을 크게 참작하지 않으면 안 되며, 비록 그들이 당연히 해야 할 만큼 분별있게 행동하지 않더라도 너무 가혹하게 그들을 비난해서는 아니 된다. 만일 우리의 경우가 그들의 처지와 같다면 우리도 어떻게 행해야 할지 모를 것이다.
Ⅱ. 그는 탐학에 반론을 펴고 있다. 우리는 압제자들의 권세와 성공을 초조하게 여기거나 부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학대자들의 성격은 매우 악하다(어떤 이는 그렇게 이해한다. 7절).
만약 "지혜자"의 명성을 얻었던 사람이 "학대자"로 된다면 그는 "미친 자"가 된다. 그의 이성은 그에게서 떠나버려서 그는 울부짖는 사자나 어슬렁대는 곰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 선물들" 즉 그가 받는 뇌물들이나 자기의 탐학으로써 거두어 들이는 것 같이 보이는 이득은 "그의 마음을 망하게 할" 따름이며 그나마 그에게 조금 남아있던 지각과 덕성을 아주 없애 버리고 만다. 따라서 그는 선망의 적이라기보다 연민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를 혼자 내버려 두면 그는 너무나 어리석게 행동하고 아주 맹렬히 돌진하다가 순식간에 자멸해 버릴 것이다.
2. 결과는 마침내 좋을 것이다. "일의 시작보다 끝이 더 낫다."
신앙의 눈으로 마지막이 어떠할지 내다보며 인내로써 그 종말을 고대하라. 교만한 자들이 그들의 가난하고 정직한 이웃들을 억압하기 시작할 때는 그들의 권력이 자기들을 끝까지 지지해 줄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승리를 거두고 소기의 목표를 달성할 것이라고 믿어 마지 않는다. 그러나 처음에 보던 것보다 마지막에 그들의 행동이 더 잘 판명이 될 것이다. 그들의 권력은 꺾어질 것이며, 압제로 거둬 들인 재물은 소모되어 없어질 것이다. 그들은 겸비케 될 것이고 낮아질 것이며 자신들의 불의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반면 무고한 피압제자들은 구출되고 보상을 받을 것이다. 저 교만한 압제자 바로와 모세의 협상은 벽돌 수를 두 배로 불리고, 만사가 절망적이었던 담판의 "시초보다" 이스라엘이 의기양양하게 인도함을 받고 나왔던 "끝이 더욱 나았다."
Ⅲ. 그는 몇 가지 필요한 지시를 내림으로써 탐학에 대비하여 우리를 무장시킨다. 만약 우리가 압제로써 미치게 되지 않고자 하며 우리 자신의 영혼을 보존하려고 한다면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1. 우리는 자비(自卑)의 옷을 입지 않으면 안 된다. "마음이 교만한 자들은" 차마 압제받는 것을 견디어 낼 수 없어서 난폭하게 되며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면 안달을 내게 된다. 그러한 것은 교만한 자의 마음을 부숴버릴 것이지만 겸손한 자의 수면은 깨뜨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교만한 마음을 극복하라. 그러면 낮춰진 마음은 비천한 처지에도 쉽사리 조화될 것이다.
2. 우리는 인내를 지니지 않으면 안 된다. 고난 속에서라도 "끈기있는" 인내로 하나님의 뜻에 승복해야 하며 "기다리는 인내"로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나타날 결과를 고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서 "참는 마음"이란 말은 "교만한 마음"의 대가 되는 말이다. 왜냐하면 겸손이 있는 곳에는 인내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들이 하나님의 손에 있는 어떤 것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자인하는 자들은 어떤 일에 대해서도 감사히 여긴다. "그래서 참는 자는 교만한 자보다 더 낫다"고 일컬어진다. 그들은 자기 자신에게 더 손쉬운 존재이며, 남들에게는 보다 환영을 받는 자들이다. 또한 그들의 고난은 유종의 미를 거두게 될 가능성이 큰 것이다.
3. 우리는 격정을 지혜와 은혜로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된다(9절).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성급히 기대하고 지체하는 것을 참지 못하는 자들은 자기들의 기대가 즉각 충족되지 않으면 화를 내기 쉽다. "교만한 억압자들이나 너희 고난의 앞잡이가 되고 있는 자 누구에게도 화를 내지 말라."
(1) "쉽사리 화를 내지 말며, 모멸하는 것이라고 성급하게 감지(感知)하고 분개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고, 그 모욕에 대한 분개를 표현하는 데에 있어서도 서두르지 말아라."
(2) "오랫동안 화내지 말아라." 분노는 지혜로운 자의 가슴에 들어올 수는 있으나 그러한 것은 여행자처럼 통과해 버리고 오직 "우매자의 품 안에만 머무른다." 그것은 거기에 거주하고 남아서 머무르며 가장 깊은 곳에, 가장 첨단의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그래서 사랑스런 자처럼 끌어 안으며 품 속에 두고 쉽사리 헤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악마에게 자리를 내어 주지" 않을 만큼 스스로를 현자(賢者)로 입증하려는 자는 "해가 지도록 분을 품어서는" 안 된다(엡 4:26, 27).
4. 우리는 현존하는 것을 될 수 있는대로 선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10절). "옛날이 오늘보다 나을 것을 당연히 여기지 말며, 그렇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추구하지도 말아라. 왜냐하면 그 명제 자체가 진리인지를 네가 확인하기도 전에, 그 일의 이유를 따지고 그렇게 추궁하는 너는 지혜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너는 과거에 대하여는 전혀 낯선 자이고 현재에 대해서조차 유능한 판정을 내릴 수 있는 자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네가 추구하는 일에 대해 만족할 만한 해답을 기대할 수가 없다. 그러기에 네가 묻는 것은 지혜롭지가 않다. 더구나, 이 가정은 세계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어리석은 비난을 하는 셈이다."
(1) 우리가 우리 자신이 몸담고 사는 시절이 악하다고 불평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이 보다 우리는 심성의 악함에 대해 불평할 만한 이유가 더 많다(만약 인간의 마음이 호전된다면 시절도 고쳐질 것이다). 또 시절이 그나마 더 악화되지 않으며 가장 역경의 시기에도 우리가 많은 자비를 향유할 수 있다는 데에서 감사할 만한 이유는 더욱 많다. 이런 은사들은 우리가 곤경을 참을 수 있도록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편안하게 여길 수 있도록 해 주기까지 한다.
(2) 이전시대의 좋은 점을 칭찬하고 이 시대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평가 절하함은 어리석은 짓이다. 이러한 어리석은 자들은 마치 과거에는 지금과 같이 불평스러운 것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부당하고 냉담하게 우리들을 이와 같은 타락의 세상에 보내셨고, 우리에게 과거와 같은 복된 시대를 주시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런 태도는 단지 불평과 불만족에서 기인된 것이며, 하나님과 직접 다투고 싶어하는 경향에서 야기되는 것이다. 우리는 본성의 보편적 쇠퇴나 도덕의 타락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하나님은 이제까지 항상 선하셨으며 인간은 언제나 악하였다. 만일 지금 시절이 어떤 면에서 이전 시대보다 더 나쁘다면 아마 다른 면에서는 더 좋은 점이 있을 것이다.
●지혜의 유익함(2) (전도서 7:11-22)
이 세상 사물에는 헛된 성질과 심령의 번민, 즉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은 것이 존재한다. 솔로몬은 여기에서 이 때문에 우리가 빠지기 쉬운 마음의 질병에 대해 지혜가 가장 좋은 특효약이라고 추천하고 있다. 이제 지혜에 대한 찬사의 교훈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Ⅰ. 지혜에 대한 찬사. 여기에는 지혜를 추천하는 말씀이 많이 나오는데 그것은 우리에게 지혜를 얻고 보유하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1. 지혜는 우리의 세상 소유물을 올바로 관리하고 선용하는 데에 필요하다. "지혜는 유업과 함께 하여야 아름답다." 즉 유업은 지혜가 없으면 거의 무익하다. 사람이 비록 큰 재산을 가졌고, 그 재산이 선대로부터 자기에게 저절로 주어진 것이라 하더라도, 만일 그가 재산을 갖게 된 목적에 맞도록 사용할 만한 지혜가 없다면 그는 차라리 그 재산이 없는 게 나을 것이다. 지혜는 가난한 자에게도 유익하다. 없는 중에라도 빈자를 만족하게 하며 수월하게 해 주는 것은 지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혜는 부자에게도 역시 필요하다. 그것은 부자를 자기 부(富)의 피해로부터 지켜 주고, 또 그의 재물로 선을 행한 수 있도록 해 주기 때문이다. "지혜는" 그 자체가 "선한 것" 이어서 사람을 유용하게 만들어 준다. 만일 그가 상당한 재산과 지혜를 겸비한다면 그가 가지는 유용성은 더 증대할 것이고, 그는 지혜가 없는 부자보다 자기 세대에 대한 봉사를 더 많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또한 "자기 자신을 친구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눅 16:9).
"지혜는 유업같이 아름다우며 오히려 유업보다 더 낫다"(난외에서는 이렇게 해석한다). 지혜는 우리 소유를 더 많게 하며, 우리 명예를 더 높이고 우리에게 더 큰 축복을 가져오게 할 것이며 우리와 더욱 오래 함께 할 것이기 때문에 더욱 중요한 것이다.
2. 우리가 이 세상을 지나는 전 과정을 통해서 지혜는 우리에게 큰 이익이 된다. "햇빛을 보는 자들에게는 지혜를 통하여" 실제적인 "이익이 있다." 지혜를 가지는 자들에게 유익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동시대인들에게도 이득이 있다. "해를 바라본다"는 것은 일은 즐거우나(전 11:7) 그 즐거움은 지혜의 즐거움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 세상의 빛은 우리가 이 세상 사업을 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요 11:9). 그러나 만약 그들이 사업을 경영하는 데에 있어서 지혜를 갖고 있지 못하다면 세상 빛이 주는 이익도 그들에게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오성(悟性)의 눈이 맑음은 육체의 시력보다 더 큰 가치가 있다.
3. 지혜는 우리의 안전에 기여하는 바가 더 크다. 그것은 환란의 폭풍과 고난의 찌는 듯한 열기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는 피난처이다. "지혜는 피폐한 땅의 큰 바위 그늘과 같은 그늘이 된다"(그 단어의 뜻은 이러하다). "지혜는 방어해 주는 것이며 돈도(즉 돈처럼) 방어해 주는 것이다." 부자가 자기 재산을 이룩하듯 지혜라도 자기 지혜를 "강한 성"처럼 만든다.
지혜의 그늘과(이 단어는 이렇게 해석된다), 돈의 그늘에는 안전이 있다. 그는 지혜와 돈을 같이 보고 있는데, 이것은 앞에서 자기가 한 말 곧 "지혜는 유업과 함께 하여야 아름답다"는 말씀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이다. 지혜는 벽과 같이, 그리고 돈은 밭을 보호하는 가시울타리처럼 사용된다.
4. 지혜는 사람에게 참 기쁨과 행복이 된다. 신적인 지식은 "지식 중 빼어난 것"으로서 돈보다 우월할 뿐만 아니라 지혜, 곧 인간적 지혜보다도 우위에 있으며, 인간적 지혜는 "이 세상의 지혜"로서 "그것을 소유하는 자에게는 생명을 가져다 준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곧 지혜이며" 그것은 곧 생명이다. 그것은 생명을 연장한다. 인간의 부귀는 그들의 생명을 위험하게 하지만 그들의 지혜는 그들을 보호해 준다. 즉, 재산은 인간의 자연적 생명을 늘려 줄 것이지만, 참 지혜는 영적 생명 즉 영원한 생명의 진수를 줄 것이다. 이처럼 "황금을 얻는 것보다 지혜를 얻는 것이 훨씬 더 낫다."
5. 지혜는 사람에게 강한 힘을 넣어 주며 그의 지주와 후원이 될 것이다(19절). "지혜는 지혜자를 강하게 하며" 그 심령을 강화시키고, 항상 그들로 하여금 확실한 근거 위에 서 있도록 함으로써 담대하고 결단력이 있게 한다. 지혜는 그것을 소유하는 자의 세력을 강화시켜 주며, 친구들과 명성을 획득하게 해 준다. 또 지혜는 지혜자에게 힘이 되어 그들의 수난을 감당할 수 있게 하며, 그들에게 가해지는 공격에 대항하여 위대한 지휘관들이나 "열 사람의 유력지사들보다 그 성읍을 더욱" 강화시킨다. 참으로 지혜롭고 선한 자들은 하나님의 보호 하에 거두어 들여진다. 그의 보호 하에 있으면 그 도시의 최강자 열 사람, 즉 최대의 권력과 세력을 가진 자들이 그들의 보호자가 되어서 그들의 안전을 지켜 주려고 하는 것보다 더 안전하다.
Ⅱ. 우리에게 커다란 이득이 될 지혜의 교훈 몇 가지.
1.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 속에서 하나님과 그의 손길을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13절).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살펴 보라." 곤란한 일에 대한 우리의 불평을 없애기 위하여는 그 일들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살펴보고 그가 하시는 일에 대해 우리 입을 열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처지와 모든 형편을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로 여기고, 그것을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 가운데에서 성취되는 영원하신 신적 계획의 산물로 간주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에 지혜롭고 정당하며 선하다는 것을 생각하라. 그가 하신 일에는 놀랄 만한 아름다움과 조화가 있어서 마지막에 가서는 모든 것이 그대로가 가장 최상의 것이었음을 나타내 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행하신 그의 모든 일에 대해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 일 가운데 숨어 있는 하나님의 의도에 응답할 수 있도록 연구해 보자. "하니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살펴보고," 그것이 우리가 변경시킬 수 없는 일임을 알아야 한다. "그가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는가?" 하나님의 정하신 삼라만상의 본질을 누가 능히 변화시킬 수 있으랴? 하나님이 환란을 말씀하신다면 누가 능히 평화를 이룩할 수 있겠는가? 그가 가시로 길을생울타리 치면 누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 황폐케 하는 심판이 내려진다면 누가 이를 저지하겠는가?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이 하신 일을 수정할 수 없는 존재이므로 되어진 일을 최대로 신용해야만 하는 것이다.
2. 우리는 우리를 존중하여 처분을 내리신 섭리의 여러 가지 일에 순응해야 하며, 그 날의 일과 의무는 그 날에 행해야 된다(14절).
(1) 섭리가 지정하시는 일과 사건은 얼마나 상반되는가를 살펴 보라. 이 세상에서는 똑 같은 때에 어떤 이는 번영을 구가하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역경 속에 부대끼고 있다. 동일한 인물이 한때에는 만사 형통한 중에 있는가 하면 한 때에는 큰 곤경에 처하게 된다. 더구나 한 가지 일에는 성공하면서 다른 일에는 참패를 맛보는 일이 동일한 인물에게 동시에 일어날 수 있다. 이 두 가지는 하나님의 수중에서 나온다. "그의 입에서는 악한 것과 선한 것이 나오며"(사 14:7), "그는 하나를 세워서 다른 하나와 맞서게 하신다." 그러므로 선악간의 통로는 매우 짧고 왕래가 순탄하며 길흉은 서로를 돋보이게 하는 순치(唇齒)의 관계에 있다. 낮과 밤, 여름과 겨울은 각각 "다른 하나와 맞도록 또 하나를 세워 두신 것"이나, 이 때문에 순경(順境)이 오면 "우리는 마치 기뻐해 보지 못했던 것처럼" 기뻐하고 역경에는 "마치 우리가 울어보지 못한 자처럼" 울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두 가지 상반되는 것을 눈으로 명백히 가려 볼 수 있고, 속히 교환할 수 있기에 가능하다. 이러한 것은 "인간이 자기 뒷 일은 능히 발견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며, 사람이 미래의 일이나 현재적 상황의 계속 여부에 대해 확실히 알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인간이 섭리에 의존하여 살고 그리하여 어떤 일이 발생하든지 간에 즉각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일 가운데에서 수정할 수 있다고 주장할 만한 일이라곤 발견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2) 이 두 가지 종류의 사건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우리가 어떻게 응해야 하는지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우리의 종교는 모든 상황에서도 변함이 없어야 하겠지만, 종류의 특별한 사례와 의식은 우리의 외적인 상황이 그러하듯 달라지지 않을 수 없는데, 이는 우리가 "여호와를 따라 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1] "형통한 날에는"(번영의 날은 단지 한 날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기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선한 중에 있어서 선을 행하고 있어야 하고 선을 얻지 않으면 안 되며, 거룩한 기쁨을 유지하고 "모든 것이 풍부한 중에 심령의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지 않으면 안 된다." "세상이 미소를 던지고 있을 때는 하나님을 기뻐하며 그를 찬양하여, 여호와의 기쁨으로 하여금 네 힘이 되게 하라."
[2] "곤고한 날에는 (이 역경의 날 또한 하루에 불과하다) 생각하라." 괴로움의 시절은 심사숙고 하기에 적당한 때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고난의 때에 "성찰하라"고 촉구하신다(학 1:5). 설령 환란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고난을 통해서 아무런 이익도 얻지 못할 것이다. 만약 왜 하나님께서 우리와 다투시는 그 이유를 살피지 않는다면, 우리는 고난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목적에 응답할 수가 없다. 생각하는 것은 고난 중에 있는 우리 자신을 위로하고 유지시키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3. 우리는 이 생에서 악인들이 더 할 수 없을만치 융성한다고 하여 화를 내거나, 경건한 자들에게 최대의 슬픈 재난이 일어난다고 하여 노여워해서는 안 된다(15절). 지혜는 섭리의 어두운 해석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데, 이는 하나님의 지혜와, 거룩함, 선하심, 충실하심을 이들 어두운 일과 조화시키기에 위해서이다. 우리는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솔로몬은 자기 당대에도 이런 종류의 사례가 있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나는 나의 헛된 날에 이 모든 일들을 보았다. 나는 지나간 모든 일을 주목해 보았는데 이 일은 어떤 것보다 나에게 놀라움과 당혹감을 주었다." 솔로몬은 그토록 지혜롭고 위대한 인물이었는데도 자기 생애의 날들을 "그의 헛된 날들"로 칭하고 있다.
그 이유는 땅 위에서 제일 좋은 날들도 영원한 날과 비교하면 헛된 날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러한 헛된 날들은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이탈해 나갔던 날들을 가리킬 수도 있다(하나님을 배반하였던 날들은 참으로 그의 헛됨의 날들이었다). 그리고 그는 의인들이 "자기들의 의로움 중에서 멸망하는 것"을 보았으며 사람들이 최대의 경건으로써도 하나님의 손으로 말미암은 최대의 고난에서 안전하지 못함을 목격하였다. 더구나 그와 같은 경건 때문에 그들은 때때로 악인과 이성을 잃어버린 자들의 독수에 노출되어 해를 입기까지 한다. 그는 이와 같은 일을, 자기를 유혹하여 종교를 불신하게 하거나, 적어도 종교에 냉담하게 되도록 한 것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나봇은 자기의 의로움 중에서 목숨을 잃었고, 아벨도 오래 전에 그렇게 죽었다. 그는 또 악인들이 악한 중에서도 그들의 수명을 오래 연장시키고 있음을 보았다. 그들은 "살고, 수를 누릴 뿐만 아니라 세력이 강하기"까지 하며(욥 21:7), 시기와 폭력에 의하여 정의의 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한다. "이제 이 일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생각해 보고, 네게 장애물이 되지 않도록 하라." 의인들의 재난은 장차 있을 축복에 그들을 대비시키기 위한 것이며, 악인들의 날이 연장되고 있는 것은 파멸을 향해 익어가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장차 심판이 올 것이며, 이 심판이 오면 불규칙하게 보이는 이런 점을 똑 바로 교정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 나게 하고 그의 모든 백성을 완전히 만족시켜 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4. 지혜는 신앙의 길을 가는 성도들에게는 훈계로, 죄의 길을 가는 죄인들에게는 견제로써 유용한 것이다.
(1) 성도들에게는 지혜가 그들로 하여금 의로움을 계속 진행하고 고수하게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지혜는 성도들에게 극단으로 흐르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충고를 잊지 않는다. "의인은 자기의 의로움 속에서 멸망할 수도 있다." 자신의 무분별과 경솔한 열성으로 인하여 고난을 자초하고서는, 하나님이 자기를 가혹하게 다룬다고 그의 섭리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 "지나치게 의롭지 말아라(16절). 의로운 행동을 하는 데에 있어서도 신중의 규칙을 따라(하나님께 대한 열심 때문이 아니라) 네 스스로를 규제하며, 이성을 잃고 무절제한 열성과 격정에 쏠리거나 네 성격에 어울리지 않는 어떤 행위든지 네 이익을 위협하는 행동에 말려 들지 말아라." 너무 잘하고자 하면 지나친 행동이 나올 수도 있다. 자기 부정(否定)과 육체의 금욕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로 인해 우리의 건강에 손상을 가져와서 하나님께 대한 봉사에 지장이 있다면, 우리는 "지나치게 의인"이 되는 셈이다. 범죄하는 자를 책망함은 선한 일이다. 그러나 진주를 돼지에서 던져서 돼지가 돌이켜 우리를 찢게 하는 것은 "지나치게 의인이 되는 것"이다. "지나치게 지혜자가 되지 말아라. 지나치게 네 주장을 고집하지 말며 네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지 말아라. 독재자로 자칭하지 말며, 네 주위의 모든 자를 너에게 복종시키지도 말고 판단하려고도 하지 말아라. 마치 네가 모르는게 없으며 행하지 못하는게 없다는 듯이 비평가를 자처하고 나서서, 남이 말하거나 행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흠을 잡는 따위의 짓은 하지 말며 남의 일에 분주히 끼어 들지도 말아라. 자기들의 소관사가 아닌 분쟁에 끼어들어 망하는 어리석은 자와 같이 네가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케 하느냐? 어찌하여 너는 권세있는 자를 노엽게 하며, 잘못된 것을 시정하려고 불필요한 논박과 네 영역 밖의 일을 하여 형극의 길로 달려 가느냐? 뱀 같이 지혜로운 사람을 조심하라."
(2) 죄인들에게 있어서도 지혜가 설령 그들을 설득하여 저희 죄를 버리게 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저들의 죄가 엄청나게 대형화 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자기의 악행 중에 장수하는 악인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15절). 그러나 마음껏 악행을 하고도 안전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 말고"(17절) 도에 넘치도록 자유 분방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나 지옥의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죄악을 멀리하지 않는 자들은 많이 있다. 그러나 그런자들 중에 조금만 사려가 없는 자라면 죄가 자기의 건강을 해치고 재산을 망치며 자기들을 공공 정의에 부딪치게 한다는 점에서 죄악을 멀리하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솔로몬은 여기에서 이런 점들을 고려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치안판사는 공연히 칼을 차고 다니는 줄 아느냐? 그는 눈이 밝고 손이 엄중하여 행악자에게는 공포가 된다. 그러므로 그의 힘이 미치는 곳에 들게 될까 두려워하고, 네 자신을 법망에 노출시킬 정도로 어리석지 말아라. 어찌하여 너는 네 기한 전에 죽으려느냐?" 아마 솔로몬은 이 두 가지 경고에서 자기 정치에 불만을 품고 반역을 도모하고 있던 자기 신하 몇 사람을 특별히 지목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부 그의 신하들은 그가 죽자마자 기어코 모반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자기들의 통치자가 범하고 있던 죄를 놓고 논쟁을 벌이다가 그것을 자기들의 모반 구실로 삼았을 는지 모른다. 그런 자들에게는 그는 "너무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라"고 말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의 가혹한 정치와 성전 역사의 엄중함에 진절머리를 내고 이것을 이유로 다른 사람을 왕으로 세우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양자를 다 놀라게 위협하고 있으니 치안을 교란하는 행위에 대해 법의 칼로 위협하여 못하게 하고, 무엇인가 달리 "바꿔 보겠다고 몰두하는 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정의의 칼로 간섭하지 못하게 위협한다.
5. 지혜는 양극단 사이의 중용을 지시해 주며 우리로 하여금 언제나 우리 의무의 길로 진행하게 할 것이다. 우리는 이 중용의 길이 평탄하고 안전한 길임을 알게 될 것이다(18절). "너는 이것을 잡는 게 좋다. 즉 스스로 함정을 향해 달려가지 않도록 이 지혜, 이 조심성을 붙잡는 것이 유익하다. 그뿐이랴, 또한 이것으로부터 네 손을 움츠러 들이지 않는게 좋다.
네 근면한 마음을 결코 이완시키지 말며 온당한 예의를 계속지키고 자기 자신을 잘 다스리겠다고 하는 네 결심이 줄어 들지 않게 하여라. 너의 제멋대로 날뛰는 정욕은 지식이 없는 말이나 노새처럼 굴레를 씌워 억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굴레를 꼭 잡아서 정욕이 너로 하여금 이런 화나 저런 불행을 향해 질주하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 그것을 잡았거든 너는 계속 그것을 붙잡고 네 손을 그것에서 떼지 말아라. 만약 네가 놓은 날에는 그들이 얻는 자유는 봇물이 터지는 것 같아서 너는 쉽사리 그것을 다시 붙들지 못할 것이다. 양심적이고 조심성있게 되도록 하며 이를 위해 훈련하라. 신앙의 원리를 따라 꾸준히 스스로를 다스리라. 그리하면 너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이 모든 곤경과 곤란에서 벗어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경외를 팽개치는 자들은 이 모든 곤경과 어려움의 와중에 빠질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이러한 지혜이며 이 지혜는 가장 복잡다단한 미로에서 우리를 구출해 내는 실마리가 될 것이다. "정직은 최상의 정책이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단 한가지의 목적만을 가지고 봉사하기 때문에, 그들은 초지일관하여 행동한다. 마찬가지로 하니님께서도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그들의 발걸음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실 뿐 아니라, 모든 위험한 길에서 벗어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시 37:23, 24).
6. 지혜는 타인의 죄와 범죄에 관련하여 우리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줄 것이다. 타인의 죄는 흔히 어떤 것보다도 더 우리의 안식을 방해하며 죄와 비애를 결부시킨다.
(1) 지혜는 우리가 상대하는 자들의 완전무결한 존재라고 기대하지 말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우리들 자신도 흠이 없지 않으며 아무도 잘못이 없는 자는 없고, 가장 훌륭한 자 조차 결함이 없을 수는 없다. 이러한 지혜는 어떤 것보다도 더 "지혜자를 강하게 하며" 도발(挑發)로 부터 야기되는 위험에 대처할 수 있도록 지혜자를 무장시켜 준다(19절). 그리하여 그들은 그로 말미암아 어떤 동요나 무질서 속에 빠져 들어가지 않게 된다.
그들은 자기들이 관계를 갖고 교제하는 자들이 육을 입은 천사가 아니라 아담의 죄 많은 자녀라는 사실을 안다.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않는 의인은 땅 위에 한 사람도 없으며"(20절). 따라서 가장 훌륭한 자라고 해도 죄를 범하는 것이다. 솔로몬은 이 점을 자기 기도에서 밝혔고(왕상 8:46), 그의 잠언에서도 지적하였는데(잠 29:9)여기 그의 설교에서도 언급하고 있다.
[1] "선을 행함"은 의인들의 특징이다. 왜냐하면 나무는 그 열매를 보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2] 가장 훌륭한 사람들과 지극히 선을 많이 행하는 자들도 자기들이 죄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성별받은 자들 조차 무죄한 것은 아니다. 천국 이편에 사는 자는 어느 누구도 범죄하지 않고 사는 자는 없다. "만일 우리가 우리는 죄짓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우리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3] 우리는 선을 행하고 있는 중에서 조차 죄를 짓는다. 우리의 최상의 행위에도 모자라는 어떤 점이 있으며 심지어 불경스러운 점이 존재한다. 본질상 선한 동시에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일은 당연히 행해져야 할 만큼 그렇게 잘 수행되지는 않으며 이와 같은 의무에 태만하는 것은 의무의 빠뜨림에 못지 않는 죄이다.
[4] 의인들이 이와 같이 죄와 약질(弱質)의 지배를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오직 땅 위에서 뿐이다. "의인들의 영"이 몸에서 벗어나게 되는 날에는 거룩한 중에서 "온전케" 되며(히 12:23), 그들은 천국에서는 "선을 행하고 죄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2) 지혜는 우리가 모욕을 감지하고 분개하는 일에 눈이 밝거나 냄새를 잘 맡지 말라고 우리에게 가르친다. 오히려 우리에게 가해지는 많은 피해를 보고도 눈을 감아 주며 마치 우리가 보지 못한 것처럼 행동하라고 가르친다(21절). "사람들이 하는 말을 모두 주의하지 말라. 그 말에 네 마음을 두지 말라. 사람들이 네게 대해 못마땅한 비난이나 혐의를 두는 듯한 말을 하더라도 그것에 신경쓰지 말고,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 같이 되라(시 38:13, 14).
사람들이 네게 대해 어떻게 말하는지 알려고 애쓰거나 캐물으려 하지 말라. 그들이 만약 네게 대해 좋게 말한다고 하면 그것은 네 자만심을 만족시킬 것이고, 나쁘게 말한다고 할 것 같으면 네 격정을 불러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네 자신을 하나님과 네 자신의 양심 앞에 입증하도록 하고, 사람들이 네게 대해 어떻게 말하든지 상관하지 말아라.
귀를 세우고 듣는 이들은 자신에 대해 좋게 말하는 것을 듣는 법이라곤 거의 없다고들 한다. 네가 만일 모든 말을 주의깊게 듣는다면 아마 너는 네 종이 네가 자기 말을 듣지 않는 줄로 생각하고 너를 저주하는 것을 들을 것이다. 만일 네가 고자질하는 자에게 귀를 기울이면 너는 거짓말을 듣게 될 것이다(잠 29:12). 이것은 사실일 것이다. 너는 커텐 뒤에 서서 직접 들어볼 게고 그러다 보면 너는 너를 욕하고 무시하는 말을 들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저주의 말을 엿들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것은 네게 대한 가장 악평일 뿐만 아니라 네게 그 저주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그의 바램이기도 할 것이다. 더욱이 그 저주는 가장 보잘 것 없는 신분을 가진 비천한 종이 한 것이 될 수도 있으며, 더구나 너를 위해 변호해야 마땅하고 너의 다른 이익과 마찬가지로 네 이름을 보호해야 마땅할 네 자신의 종의 짓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마 그 종은 네가 친절하게 대해왔던 자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는 너에게 이처럼 악하게 갚는 것이며 이것은 너를 화나게 할 것이다. 따라서 너는 차라리 그 말을 듣지 않는 게 좋은 것이다. 아마 그 종은 네가 잘못 대해 오거나 부당하게 대우한 자일 수도 있다. 그는 너에게는 감히 말하지 못하더라도 남들에게는 그와 같이 얘기하며 하나님께도 그렇게 여쭐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네 자신의 양심은 그런 비난을 듣고 이로 인해 한층 더 불안하게 될 것이다. 가장 위대한 자들의 아름다운 명성도 극히 미미한 자들의 조종하에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우리에게 대한 악평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있으며, 우리를 욕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던 자의 입에서 조차 그런 말이 나온 경우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우리를 깎아내리는 모든 말에 마음을 쏟는다면 비록 우리가 자신의 휴식이나 위신을 원한다 하더라도 결국 그것들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 된다. 하나의 복수를 하느니보다 그런 모욕 스물을 묵과해 버리는 게 더 편하다.
(3) 지혜는 우리 자신의 과오를 생각나게 해 준다(22절). "가끔 너를 나쁘게 말하거나 너의 불행을 비는 자들에게 화를 내지 말아라. 그런 일이라면 너 자신을 조용히 돌이켜 생각해 봐라. 그러면 네 양심이 네게 말해 줄 것이다. 너도 남을 저주하고 비방하며 그들의 불행을 비는 말을 하지 않았느냐고 말이다. 너는 네가 지불한 너 자신의 동전을 도로 받은 것이다."
우리가 어떤 모욕이나 피해를 입었을 때 우리도 그와 같은 짓을 남에게 하지나 않았는지 우리 양심에 비추어 살펴보는 것이 마땅하다. 반성해 보고 만일 우리도 그와 같은 짓을 한 것이 생각나면, 우리는 이것을 그런 일에 대한 회개의 계기로 삼고, 하나님을 의롭다고 인정하여 우리 자신의 분개를 제한하는 데에 이것을 이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우리가 타인들을 험담하고 비난한 데 대해 우리 자신에게 진심으로 화를 낸다면(우리는 당연히 그래야 하겠지만), 우리는 우리를 헐뜯고 비난하는 남들에게 덜 노여워할 것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온유함을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딛 3:2, 3; 마 7:1, 2; 약 7:23-29). 왜냐하면 우리 자신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죄의 폐단 (전도서 7:23-29)
솔로몬이 지금까지 증명한 것은 세상이 얼마나 허무한가 하는 것과 세상은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기에는 너무나 불충분하다는 것이었다. 이제 여기에서 그는 죄악의 악랄함과 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 죄의 속성을 제시한다. 그는 이것도 전처럼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증명하는데, 그의 경험는 값비싸게 산 경험이었던 것이다. 그는 이 전도서 전체 중 어느 부분보다도 여기에서 참회자의 습성을 더 많이 나타내고 있다. 그는 이미 자기가 일가견을 피력했던 사실에 대해 재검토를 하고, 자기가 한 말은 자기가 알고 아주 확신하던 일이었으며 자기가 고수하겠다고 결심하였던 일임을 말해 주고 있다. "내가 이 모든 것을 지혜로 시험하였다"(23절)
Ⅰ. 그는 자기 지혜가 부족함을 자인하고 그것을 슬퍼한다. 그는 이 세상의 허구성을 발견하고, 이 세상이 영혼에게는 한 몫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체험하기에 충분한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더 심원한 데까지 추구하게 되자 그는 당황하게 된 것이다. 즉 그의 눈은 너무나 희미하여 더 이상 멀리는 내다 볼 수 없었고 그의 줄은 너무 짧아 더 이상 낚아 올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비록 이런 점을 그가 간파해 냈지만, 그가 자기 지혜로 증명할 수 없는 딴 일도 많이 있었다.
1. 그의 탐색은 부지런하였다. 하나님은 그에게 어느 누구보다 많은 지식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그는 여태껏 어떤 사람이 가질 수 있었던 것보다 더 큰 기회를 갖고 자신을 향상시켰던 것이다.
(1) 그는 만약 가능하기만 하다면 자기의 목표를 이룩하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나는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지혜자가 되리라 하였다." 그는 지혜로운 것을 극히 귀중한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진심으로 열망하였다. 그는 자기가 그런 경지에 다다를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완전히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도모했다. 그는 그 목표에 미치지 못하는 곳에 주저앉아 있지는 않겠다고 작정하였다(잠 18:1). 지혜롭게 되겠다는 말을 하지 않고 그것에 냉담함으로써 지혜롭게 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솔로몬은 지혜로와지겠다는 것을 목표로 설정해 두고 있었다. 그가 감각적인 즐거움을 시험하였을 때도 그는 여전히 "자기 마음으로 하여금 지혜에 정통 하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하였으며(전 2:3) 지혜를 추구하는 일을 전환하지 않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가 자기의 쾌락에 그토록 탐닉하는 동안 그는 아마 지혜와의 교류를 유지하는 일이 상상하던 것처럼 그렇게 용이한 일이 아님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의지는 선하였다. 그는 "내가 지혜롭게 되리라"고 말하였고, 더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2) 그는 또한 어떤 수고도 아끼지 않겠다고 결심하였다(25절). "나는 전심을 다 하였다. 나와 내 마음은 어느 쪽이든 다 향해 보았다. 내가 목표하던 것을 달성하기 위해 돌 하나도 그냥 두지 않고 뒤집었으며 어느 수단이든 시험해 보지 않은게 없었다. 나는 지혜를 알고자 하여 살피고 궁구하기에 전심하였으며, 모든 유용한 학문과 철학과 신학에 통달하려고 부심하였다."
만약 그가 이처럼 연구에 완전히 몰두하지 않았다면 "나는 지혜자가 되리라"고 한 그의 말은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었다. 왜냐하면 목적지에 도달하려고 하는 자라면 바른 길을 취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매우 기민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혜를 얻는 일을 게으름에 대한 핑계로 삼기는 커녕(많은 사람들과는 달리), 안간힘을 다 써서 근면으로 유도하는 자극으로 삼았다. 그는 유익한 개념을 터득하는 데에 수월함을 느끼면 느낄수록 더 많은 유익한 이해를 얻기 위해 더욱 더 열심히 몰두하였던 것이다. 최대의 화물 창고를 가진 자가 가장 크게 교역(交易)하듯 최상의 자질을 품은 자들은 최대의 수고를 기울여야 한다. 그는 표면에 있는 것을 알고자 하여 전심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시야나 길로부터 감춰진 것을 탐색하기 위해서도 열중하였다. 그는 자기가 탐색하던 것이 이내 발견되지 않는다고 하여 찾는 것을 곧 포기해 버린 것이 아니라 "그것을 끝까지 탐구하였고" 그 밑바닥까지 찾아가 보았다. 그는 사물만 알려고 목적한 게 아니라 사물의 이치까지도 알려고 기도(企圖)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물을 설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2. 그럼에도 그의 성공은 적합하거나 만족할 만한 것이 못되었다. "내가 스스로 이르기를 나는 지혜자가 되리라 하였으나 그것이 나를 멀리하였도다. 나는 그것에 도달할 수가 없었다. 결국 내가 알아낸 것은 아무 것도 알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 이것 뿐이다. 내가 많이 알게 되면 될 수록 나는 알아야 할 것이 더욱 많아짐을 깨닫게 되며, 내 자신의 무지를 더욱더 자각하게 된다. 무릇 된 것이 깊고 깊으니 누가 능히 통달하겠는가?"
솔로몬은 하나님 자신과 그의 계획 그리고 그가 하신 일을 의미하여 이런 표현을 한다. 자기가 이런 것들을 탐구하였을 때 그는 곧 갈팡질팡하다 좌초되고만 자신을 발견하였다. 그는 "어두운 이치 때문에 말할 수 없었다." "그것이 하늘보다 높으니 그가 무엇을 할 수 있으리요?"(욥 11:8)
하나님은 복되시니 우리가 행하여야 할 것 중에서 분명하고 평이 하지 않은 게 없다. "말씀은 우리에게 가까이 있다"(잠 8:9). 그러나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비밀한 일들 가운데에는 우리가 알기 원하는 "멀고도 심히 깊은" 일들이 무척 많다. 아마 솔로몬이 여기에서 비탄해 마지 않는 것은 죄된 무지와 실수일 것이다. 즉 자기 궁중의 쾌락과 유희 생활이 자기 눈을 멀게 하고 자기 눈 앞에 안개가 지게 하여, 자기가 의도하던 대로의 참 지혜를 획득할 수 없었다는 점일 것이다.
Ⅱ. 그는 지혜에 미치지 못하자 지나치게 저질렀던 자기 우행의 사례들을 인정하고 비탄에 잠긴다.
1. 죄의 폐허에 대한 그의 탐구. 그는 "전심하여 악한 것이 어리석은 것이요 어리석은 것이 미친 것인줄 알고자 하였다"(25절).
(1) 죄에 대한 지식은 어려운 지식이며, 달성하기 힘든 지식이다. 솔로몬은 그것을 얻고자 무척 고심하였다. 죄는 스스로 죄라고 나타나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죄 자체를 덮어 감추기 위한 가장을 많이 한다. 그래서 이런 가면들을 벗기고 그 본성과 진면목을 보기란 매우 힘드는 것이다.
(2) 병을 치료하려면 병의 종류와 원인 및 그 악성(惡性)을 아는 일이 펼요하듯이, 우리가 우리 죄를 회개하기 위해서는 죄의 폐해를 아는 일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죄를 자기에게 드러내 준 하나님의 율법을 귀중하게 여겼다(롬 7:7). 솔로몬은 그가 어리석었던 날에는 자기의 기지를 동원하여 쾌락을 날조해 내고 그 즐거움을 더 고조시키기에 여념이 없었으며 교묘한 재주로 육의 양식을 만들어 냈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 눈을 열어 주시자 그는 부지런히 죄의 극심한 해를 발견해 내게 되었고 통열한 회개도 하게 되었다. 재치있는 죄인들은 슬기로운 참회자가 되어야 하고, "강한 군인"의 여러 가지 딴 전리품과 함께 지식과 학문도 주예수에 의하여 분배되어야 한다.
(3) 참회자는 죄에 대해서 가능한 대로 신랄하게 파헤쳐 말해야 마땅하니 이는 죄에 대해 아무리 약하게 말한다고 하더라도 사실상 충분히 그 악함을 표현한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여기에서 자기를 더 굴욕되게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것을 더 보고 싶어 한다.
[1] 죄의 죄스러움에 대해. 그가 이 탐구에서 최대의 강조를 둔 것은 이것이니 곧 "어리석음의 악을 아는 것"이라. 아마 그는 이로써 그 자신의 불의 즉 불결의 죄를 의미하였을 것이다. 음란의 죄는 흔히 "이스라엘에서 어리석은 짓"이라고 칭하였었다(창 34:7; 신 22:21; 삿 20:6; 삼하 13:12). 그 자신이 이 음란에 빠져 방종할 때는 그는 그것을 경미한 문제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 죄의 "악함" 곧 요셉이 말하는 그 "큰 악"을 보고 싶어 한다(창 39:9).
또한 "악의 어리석음"은 일반적인 모든 죄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많은 자들이 자기들의 죄를 "어리석음" 때문에 저지른 것이라는 말로 경감시키려 든다. 그러나 솔로몬은 이 어리석음 가운데에서 "악함"을 보고, 하나님께 대한 범법과 양심에 대한 잘못을 본 것이다. "이것은 악함이다"(렘 4:18; 슥 5:8).
[2] 죄의 어리석음에 대해. 어리석음에는 악이 있듯 악함에는 어리석음이 있으며 심지어 악에는 어리석음과 광기(狂氣)조차 있다. 고의로 죄를 범하는 자들은 어리석은 자이며 광인인 것이다. 그들은 올바른 이성과 그들의 진정한 이익과는 상반되게 행동한다.
2. 이 탐구의 결과.
(1) 그는 자신이 직접 범했던 큰 죄의 악한 것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것을 발견하였는데 그가 저지른 큰 죄란 "많은 이방 여인을 사랑한 것"이었다(왕상 11:1). 이것은 그가 여기 매우 비탄어린 표현을 구사하면서 가장 애통해 하는 것이다.
[1] 그는 그 죄에 대한 기억이 매우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을 얼마나 무겁게 자신의 양심을 내리누르고 있었던가! 자기가 범하였던 악함과 어리석음과 광기를 생각할 때마다 그가 얼마나 큰 고뇌를 당하였던가! "내가 본즉 그것이 죽음보다 독한 것이로다." 그것을 회상해 볼 때마다 마치 죽음에게 붙들린 것 같은 커다란 공포가 그를 사로잡았다. 이것은 건전한 뉘우침으로써 자기들의 죄를 자기 앞에 쭉 나열해 놓고 울부짖으며 그 죄를 공격하는 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모든 진정한 참회자들에게는 그 죄들이 쓸개처럼 쓰며 죽음같이 독한 것이다.
음란은 그 본질에 있어 죽음 그 자체보다 더 해로운 죄이다. 죽음은 명예로울 수 있으며 편안할 수도 있지만, 이 죄는 수치와 고통이 될 따름이다(잠 5:9, 11).
[2] 그는 죄에 대한 유혹이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간파하였다. 더욱이 모험삼아 유혹 속으로 들어간 자가 죄를 피하기란 난문난사(難文難事)이며, 죄악에 빠졌던 자가 회개로 자신을 되찾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간통하는 여인의 마음은 "올무"와 "그물"과 같다. 그 여인은 새잡이가 미련한 새를 잡는데 사용하는 어떤 교묘한 기술보다도 더 묘한 재주와 교묘함으로써, 영혼을 파멸시키는 유희놀이를 한다. 그런 죄인들이 사용하는 방법이란 것은 올무나 그물처럼 속이고 파멸시키는 것이다. 조심하지 않는 영혼들은 쾌락의 미끼를 던져 주면 그것을 탐욕스럽게 붙잡고 그것에서 만족을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다가는 영락없이 그 꾐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깨우치기 전에 이미 사로잡혀 있으며, 그것도 만회할 수 없을 만치 잡혀 있게 된다. 그 여인의 손은 수갑과 같으니 사랑의 포옹을 한다는 구실로 그가 갖는 쾌락의 죄를 더욱 단단히 잡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죄의 줄에 매어 있다(잠 5:22). 욕망은 만족됨으로써 그 힘을 얻고 그 매력이 더욱 고조된다.
[3] 만약 하나님께서 그를 이 죄에서 금하여 주신다면 그는 그것이 어떤 자에게는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큰 본보기라고 간주하였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는 그 여인을 피할 것이며," 이 죄에게 유혹당하는 일과 그 유혹으로 말미암아 정복당하는 일로부터 보호될 것이다.
이 죄를 멀리하게 되는 자들은 자기들을 지켜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며, 자기들의 힘이나 결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큰 자비가 지켜주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항할 수 있도록 충분한 은혜를 얻어 자신을 무장시키고자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킴으로써(레 18:30) 매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도록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4] 그는 이 죄를 인간이 이 삶 속에서 빠져 들어 갈 수 있는 다른 죄들에 대한 하나의 쓰라린 형벌로 간주하였다. "죄인은 그 여자에게 잡힐 것이다."
첫째, 딴 여러 죄악에 빠져 있는 자들은 그로 인해 마음의 눈은 멀고 양심은 타락되어 있어서 더욱 쉽사리 이 죄에 끌려 들어가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께서 그들이 이 죄에 빠지도록 내버려 두신다 해도 그것은 공의로운 일이다(롬 1:26, 28; 엡 4:18, 19 를 참조하라).
말하자면 솔로몬도 자기가 뛰어 들었던 이 죄로부터 멀어지게 된 자기를 이처럼 복되다고 하는 동시에 두려움도 가지는 것이다.
(2) 그는 일반적인 인간성의 부패에 관해 그 어느 때보다 더욱 많은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자기 아버지가 비슷한 경우에 그보다 먼저 "보라, 내가 죄악 중에 출생되었도다"(시 51:5)라고 한 것처럼, 인간성의 흐름을 좇아 그 본원에 까지 추적한다.
[1] 그는 자기가 실제로 저지른 죄의 숫자까지 알려고 노력하였다(27절). "보라, 내가 이것을 깨달았노라. 즉 이것은 내가 발견해 내고자 바라던 것이었다. 나는 내 잘못들을 이해할 수 있고 최소한 죄목만이라도 완전한 목록을 작성해 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그 죄악들을 낱낱이 헤아려서 계산해 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참회자로서 자기의 모든 죄를 찾아내고자 소원하였는데, 이는 자기가 그 죄들을 더욱 세밀하게 인식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우리가 죄의 고백을 세밀하게 하면 할수록 우리가 용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위로도 더욱 많아진다. 그는 또 전도자로서도 그것을 갈망하였으니, 이는 그가 타인들에게도 더욱 자세하게 경고를 할 수 있기 위해서이다.
하나의 죄에 대해 깊이 뉘우치게 되면 우리는 전체적인 죄악 덩어리에 더욱 깊이 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 자신 안에서 잘못된 것을 많이 보게 되면 될 수록 우리는 자기 잘못을 더욱 부지런히 추궁하게 되는데, 이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들을 발견하기 위해서이다(욥 33:32).
[2] 그는 궁지에 처해 가지고 어쩔줄을 몰라하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며, 그 죄가 무수함을 깨닫게 되었다(28절). "아직도 내 영혼이 이것을 찾고 있다. 나는 여전히 헤아려 보고 있으며 아직도 이 이치를 알고 싶어 한다. 그러나 나는 찾을 수 없으며, 전부 다 셈할 수도, 완전한 의미를 알 수도 없다. 나는 아직도 내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절망적인 악을 자꾸 새롭게 발견하고 놀라는 것이다"(렘 17:9, 10). "누가 그것을 능히 알 수 있으리요?" "누가 자기 잘못을 능히 이해할 수 있겠는가?" "자기가 얼마나 자주 범죄하는지 말할 수 있는 자가 누구인가?(시 19:12).
만약 하나님이 자기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에 대해 자기와 쟁변하거나, 혹은 그가 자기에게 그러한 것을 재판하게 된다면, 그는 "천 가지 중 한 가지도 답변할 수 없을 것"이다(욥 9:3).
그는 그 자신의 마음이나 삶의 부패를 세상의 부패와 비교함으로써 이 점을 설명한다. 그는 이 세상에서는 천 사람 중 단 한 사람의 선인도 찾기 어렵다고 보았다. 그가 가진 일천 명의 모든 처첩 중에서 "단 한 사람의 선량한 여인"도 그는 발견치 못하였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나의 생각이나 말, 행동 그리고 지나간 내 생활의 모든 경로를 회상하고 검토해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아마 남자다운 자들 중에서라면 일천 명의 남자 중에서 단 한 명의 선한 자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전부였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 마음 속에 여러 가지의 부패가 있었다." 그는 심지어 자기가 선을 행할 때도 죄를 짓고 있었다는 점을 발견하였다(20절).
더구나 그가 방종할 때 쾌락의 대상이던 여성들은 모두 무가치한 자였다. 그의 생애 중 그 시기에는 일천 명 중 단 한 사람의 선한자도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삶이 죄상의 상태에 있을 때도 선은 거의 나타나지 않으며 때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이 말씀이 여성 전체에 대한 비난을 의도하는 것이 아닌 것은 의심할 나위도 없다. 선량한 남자들보다 선량한 여인들이 더 많았던 때도 있었고 또 현재도 그런 경우가 많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행 17:4, 12). 솔로몬은 단지 자신의 슬픈 체험을 암시할 뿐이다. 아마 이 말씀에는 보다 깊은 뜻이 있을 것이다. 그는 잠언에서 "악한 자"의 올무와 "이방 여인"의 덫에 대해 경고를 한다(잠 2:12, 16; 4:14; 5:3). 그는 악한 여인의 길이 "악한 자"의 길보다 더 속임수가 많은 동시에 더 위험하다는 사실을 관찰하였다. 여인의 기만성을 발견하고 그들의 함정을 피하는 일은 한층 더 어려웠기 때문에 그는 죄를 간음녀에다 비유한다(잠 9:13). 즉 자신의 속이는 마음을 발견해 내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번창하기 쉬운 이방 여인의 사기성을 발견하기도 불가능하다는 점을 깨달은 것이다.
[3] 그러므로 그는 현실적 범죄의 모든 물줄기를 따라서 원초적인 타락의 샘에까지 이르렀다. 즉 세상에 있는 모든 어리석음과 미친 것의 근원은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이탈하는 것에 있으며, 인간의 원초적 정직성에 대한 타락에 있다(29절). "보라, 내가 깨달은 것은 이것 뿐이라.
내가 세부적인 것은 깨닫지 못하였더라도 그 전체적인 의미는 아주 명백하였다. 인간이 부패하고 반역하며, 원래 지음을 받았을 때와 다르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첫째, 인간이 하나님의 지혜와 인자하심을 통해 어떻게 창조되었는가 살펴 보라. "하나님은 인간을 정직하게 지으셨다." 갈데아 주석은 하나님이 "첫 사람 아담을" 정직하게 지으셨다고 해석한다. 하나님은 아담을 지으셨으며 그를 "정직하게" 지으셨고, 마땅히 정직해야 할 그런 존재로 만드셨다. 그는 이성적 피조물로 창조되었으므로 이성을 가진 동물이면 그러해야 하듯 어느모로 보아도 불규칙성이 없는 "정직한" 존재였다. 아무도 그에게서 결함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정직"하였다. 즉 그는 하나님께만 한정돼 있었고 자기가 후에 곁길로 외도하게 된 "많은 꾀"와는 대립해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수중에서 나올 때의 그는(우리가 말할 수 있듯이) "선하고 의로우신" 조물주의 축소판이었다.
둘째, 인간이 자신의 어리석음과 악함으로 인해 얼마나 손상되었으며 사실상 얼마나 변질되었는지 살펴 보자. "그들은 많은 꾀를 찾아 내었다." "그들은" 우리의 첫 조상들이거나 아니면 온 인류 즉 전체로서의 모든 인간과 개체로서의 모든 인간을 가리킨다. "그들은 큰 꾀를 찾아 내었으니"(어떤 이는 그렇게 해석한다), 그것은 신들과 같이 되고자 하는 꾀이거나(창 3:5), 아니면 큰 자들의 꾀(이렇게 해석하는 자도 있다), 즉 타락한 천사들 중 "큰 자들(Magnates)의 꾀"이다. 또는 "많은 꾀"를 가리킬 수도 있다. 인간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찾아다 준 것 안에서 안식하는 대신 스스로 더 나아져 보려는 목적을 가지고 찾아 나서는데, 이는 자기 재물을 구하기 위해 아버지 집을 떠난 탕자와 다를 바 없다. 그는 한 분을 위해 있지 않고 많은 것을 위해 존재하려 하였다. 하나님의 규례를 위해 존재하느니 보다 자기가 안출해 낸 꾀를 좇고자 하였다. 그가 창조해 낸 법칙은 그를 붙들어 두지 않을 것이어서 그는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고 자기 자신의 기분과 경향을 따라 갈 것이다.
"사람이 지혜로와지겠다고 하는 것은 헛되며" 자기를 지으신 분보다 더 지혜로와지겠다고 하는 것도 헛되다. 그는 추구해 나가는 중에 현기증을 느끼며 불만을 느낀다. 그러므로 그는 "많은 꾀"를 가지게 된다. 하나님을 버리는 자들은 끝없이 방황한다. 인간이 실제로 저지르는 범죄는 증가되고 있다. 솔로몬도 죄가 실제로 얼마나 많이 있는지 찾아 낼 수는 없었다(28절). "매우 많이 있다"는 것은 알았다. 많은 종류의 죄악이 있고 그 죄악들은 흔히 반복하여 행해진다. "죄악이 우리의 머리털보다도 더 많나이다"(시 4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