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록(경전연구회) 녹취13
세상은 자꾸 이제 말세가 되어가고 그래서 상당히 험악한 시대가 되어가는 것을 우리가 역력히 보고 느낍니다. 또 세상을 떠난 우리 절집 안이라고 하더라도 세상의 큰 흐름에는 도저히 우리가 거역할 수 없습니다. 좀 변두리에 있어서 그 영향을 적게 받아서 그렇지 세상의 큰 흐름의 영향을 우리가 전혀 받지 않고 사는 것은 아니고, 또 우리가 세상에 참여하면서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면 그게 우리 불자들의 할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불자들 중에서도 중심에 있는 우리 스님들이 한 달에 한 번씩이라도 우리가 이러한 시간을 갖는다는 이 사실, 공부가 얼마나 되고 얼마나 깨닫고 이것은 접어두고라도 이런 시간을 갖는 것이 부처님 밥값 좀 한다하는 그런 생각도 들고 또 어떤 의미에서는 자랑스럽기도 하고 상당히 의미 있는 시간이다 하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이러한 분위기가 자꾸 전파되어서 더 많은 지역에서 스님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그런 생각도 해 봅니다. 저기, 안동에서는 고우 스님모시고“금강경삼가해(金剛經三家解)”를 가지고 공부를 하고 있더라 구요. 지금쯤은 끝이 났는가? 그런 시절이 되어서 상당히 알뜰하게 한 3~40명 모여서 공부를 아주 잘하는데 지금 여기의“경전연구회”라고 하는 이 모임이 하나의 모범을 보인 것입니다. 부산에서도 그런 움직임이 약간 일고 있어요. 세월은 상당히 갔지만 지금이라도 이렇게 차츰차츰 경전연구회를 인식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또 상당히 바람직한 일을 한다는 이런 소문이 조금씩 파급이 되는 것 같습니다. 스님들이 묵묵히 자기 공부만 해도 그것이 또 전법에 상당한 보탬이 되지 않겠나하는 생각도 곁들여 해봅니다. 오늘 공부의 제목이 “잡으면 곧 쓴다.” 이런 제목을 붙여봤습니다. 이런 제목은 제가 자의로 그냥 붙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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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쓰게 되면 곧 쓴다
道流야 把得便用이요 更不著名字 號之爲玄旨니라
도류 파득변용 갱불착명자 호지위현지
山僧說法은 與天下人別하니 祇如有箇文殊普賢이
산승설법 여천하인별 지여유개문수보현
出來目前하야 各現一身問法하되 纔道咨和尙하면
출래목전 각현일신문법 재도자화상
我早辨了也니라 老僧檼坐에 更有道流하야 來相見時
아조변료야 노승은좌 갱유도류 내상견시
我盡辨了也니 何以如此오 祇爲我見處別하야
아진변료야 하이여차 지위아견처별
外不取凡聖하며 內不住根本하야 見徹更不疑謬니라
외불취범성 내불주근본 견철갱불의류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잡으면 그대로 쓸 뿐 다시 무슨 이름을 붙이지 말아야 한다. 그것을 일컬어 깊은 뜻[玄旨]이라고 한다. 나의 법문은 천하의 누구와도 같지 않다. 가령 문수보살 보현보살이 바로 눈앞에서 각각 한 몸을 나타내어 법을 물으려고 막‘스님께 묻습니다’라고 하면 나는 벌써 알아 버린다. 노승이 그저 편안히 앉아있는데 어떤 수행자가 찾아와 나를 만날 때도 나는 다 알아차린다. 어째서 그런가? 그것은 나의 견해가 다른 사람들과 달라서 밖으로는 범부와 성인을 취하지 않고 안으로는 근본자리에도 머무르지 않는다. 견해가 철저해서 다시는 의심하거나 잘못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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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流야 把得便用이요
도류 파득변용
“파득변용(把得便用)”이것은 잡으면 곧 쓴다. 이런 말입니다. “잡으면 곧 쓴다”는 말은 소리가 나면 듣는다. 그리고 사물이 눈에 들어오면 본다. 이 말입니다. 그걸 익숙한 표현으로 아,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잔다. 하는 이런 말은 선사들의 아주 고준한 법문 중에 하나 아닙니까? 익숙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요. 그것 밖에 달리 다른 일이 없습니다. 우리나라 스님들의 안목이 아주 투철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내 자신의 어떤 문제라든지 아니면 또 우리가 신도들을 상대하고 있으니까, 신도들의 개개인의 문제라든지 이런 것들을 대했을 때는 어쩔 수 없는 그런 팔만사천 방편을 거침없이 쓰지마는 또 올곧은 불법지견에 있어서는 이러한 “최고의 소견”으로 우리의 양식으로 삼고, 또 우리의 본분으로 삼고 여기에 안목과 눈을 떠야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또 출가해서 불법 공부하는 재미와 맛이 거기에 있지 않는가 하고 저는 그렇게 느끼고 살아요.
사람을 대할 때마다 어린아이를 대하면 어린아이에 맞게 우리가 이야기하고 중등학생 만나면 중등학생에게 맞게 이야기 하는 것이 우리스님들의 능수능란한 방편활용인 것은 사실입니다. 또 당연히 그래야 하구요. 그렇지만 정말 내 공부를 위해서는 최상의 불법지견에도 밝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당연한 길이고 의무다 하는 이 생각을 항상 하고 또 거기에 상당한 재미를 느낄 줄 아는 이것이야말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정말 불교를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사람들의 아주 큰 특권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합니다. “파득편용(把得便用)” 참 간단하고 좋은 말이죠.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마시고, 피곤하면 자고 이게 일상사죠. 그냥 누구나 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불법은 어떤 특정인만이 수용하는 것이라면 불법이 소중할 수가 없습니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누구나 똑같이 공유할 수 있고, 활용할 수 있고 그 속에서도 흡수될 수 있는 것. 그래야 돼요. 결코 어떤 특정인만의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파득편용(把得便用)이라는 것이 바로 그겁니다. 누구나 배고프면 먹을 줄 알고, 피곤하면 쉴 줄 아는 것. 눈에 보이면 보고, 귀에 들리면 듣고, 화 낼일 있으면 화내고, 웃을 일 있으면 한바탕 크게 웃고, 슬픈 일 있으면 통곡하고, 즐거운 일 있으면 한껏 즐기고 그런 거예요. 그게 인간의 보통 삶인데 그럼 뭐 불법이 특별할 게 뭐 있겠는가? 그래요! 불법 특별할 게 하나도 없어요. 이것 아는 것이 정말 불교의 많은 가르침 중에서도 가장 고준한 가르침입니다.
높고 높은 가르침 중에 가장 평범한 것이죠. 어디에나 있는 것! 우리나라 스님들은 일찍이 이러한 안목이 뛰어났기 때문에 그저 임제 스님! 임제 스님! 제가 첫 시간에 말씀 드렸지만 모두가 임제 스님의 뒤에 줄을 서고, 비석을 해도 나는 임제 몇 대손이다. 부처님으로부터 몇 대 손이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고, 임제 스님의 몇 대손이다 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그런 입장입니다. 이러한 견해가 정말 뛰어난 견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 속에서도 있지마는 그래도 알맹이만 이렇게 임제 스님은 드러냈고 또 그 소견이 정말 성질에 맞고, 기분이 좋고, 평생 불법 공부한 보람이 바로 여기에 있고, 부처님 공부한 보람이 여기에 있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모두가 임제 스님과 인연이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임제 스님의 후손이라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쭉 내려가면서 한결같이 이 정신이 예요.
更不著名字 號之爲玄旨니라
갱불착명자 호지위현지
“갱불착명자(更不著名字)니”그랬습니다. 다시 명자(名字)에 집착할 것이 없음이니 그랬어요. 명자(名字)에 집착할 것이 없다. 불교는 역사도 길지만 많이 깨달은 분들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출현하셨기 때문에 그분들 나름대로의 별의별 말씀이 많거든요. 그게 전부 명자(名字)입니다. 우리가 소승경전. 아함부 경전만 하더라도 얼마나 많습니까? 또 대승경전, 밀교경전은 얼마나 많으며 선불교 어록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거기에 휘둘리고 그걸 쫓아가기만 하다보면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학자들이나 하는 일이죠. “호지위현지(號之爲玄旨)니라” 명자에 집착하지 않는 것. 보면 바로 보고 들으면 듣게 되고 하는 이 사실! 이것이 지극히 깊은 뜻이다. 너무 쉽고 너무 평범하고 모든 사람들이 다하는 일인데 이것이 현지(玄旨)다 이거야. 이것이 아주 깊고 깊은 도리다. 불법은 어떻게 보면 가장 쉽고, 너무 쉬워서 또 어렵다. 우리가 흔히 그렇게 하지요.
도(道)를 통하는 것이 세수하다가 코 만지기보다 쉽다. 코를 만지려면 세수라도 해야 되지마는 도(道) 통하는 것은 아무것도 안 해도 바로 우리가 도(道) 안에 있기 때문에 코 만지기보다도 쉽다는 말이 지나친 표현이 아니라 구요. 거짓말도 아니고. 그게 우리에게 와 닿지 않고 잘 믿어지지가 않는 거야. 너무 문자에, 그동안 좋은 법문에 중독이 되어가지고 뭔가 따로 있는 것 같고, 어디 저 멀리 아득한 곳이나 아주 높은 산에 가야만 뭔가 친견할 것 같고, 인도나 가야 부처님을 친견할 것 같고 가봐야 인도에 부처님이 있나? 없지! 있다면 가기 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지. 그러면서 또 우리가 불교의 시조인 세존이 탄생한 곳이고, 그 분이 80평생을 걸어 다녔고 교화하셨던 그 곳에 가서 눈물을 흘리며 감동을 하고 거기서 경을 읽는 그런 기분!
이것이 지난번 중도에 대한 말씀을 세세하게 못 드렸는데 바로 그러한 안목이 “중도 정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출발하기 전에 여기에 있어. 그렇지만 또 역사적인 부처님을 우리가 가서 보고 거기서 한 걸음, 한걸음 내 딛고 아! 여기가 우리 부처님이 금강경을 설했다는데 하고 거기서 금강경을 한번 읽어 보기도 하고 그런 감동을 느낄 줄 아는 그 마음, 이것이 정상적인 사람이고 그게 중도정견이야. 중도적인 안목이다 이거야. 어떻게 하면 상당히 모순 된 소리 같지만 그것이야말로 아주 순리에 맞고, 이치에 맞는 가르침이다 하는 것입니다. 여기의 현지(玄旨)라고 하는 것도 말씀을 드렸듯이, 깊고 깊은 뜻이 그냥 파득편용(把得便用), 보면 보고, 들으면 듣고,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잘 줄 아는 것. 누구나 다 하는 것입니다.
山僧說法은 與天下人別하니 祇如有箇文殊普賢이出來目前하야
산승설법 여천하인별 지여유개문수보현 출래목전
“산승설법(山僧說法)은 여천하인별(與天下人別)하니”했어요. 산승 설법은 천하 사람과 다르다 이거야. 천하 사람들은 여기서 문자와 경전 상에서 그동안 경전의 격식대로 나열해 놓은 그런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지여유개문수보현(祇如有箇文殊普賢)이 출래목전(出來目前)하야” 문수나 보현이 있어서‘목전(目前)’에 내 앞에 떡 나와서
各現一身問法하되 纔道咨和尙하면
각현일신문법 재도자화상
각각 하나의 모습의 몸을 나타내가지고서 법을 묻는다 이거야. 법을 묻는데 “재도자화상(纔道咨和尙)하면”막 말을 한다. 무엇을? “화상에게 묻겠습니다.”라고 막 입이 떨어지자 말자
我早辨了也니라 老僧檼坐에 更有道流하야 來相見時
아조변료야 노승은좌 갱유도류 내상견시
“아조변료야(我早辨了也)니라” 나는 벌써 그 사람을 알아 버렸다. 이런 말입니다. 무슨 질문을 하던지, 누가 와서 하던지 그저 말하고 듣는 이 사실! 이겁니다. 기상천외한 질문을 하더라도 말하는 그 사실보다 깊고 깊은 도리는 없어. 아무리 어렵고 난해하고 고준한 질문을 하더라도 그 질문의 내용이 깊고 깊은 것이 아니고, 물을 줄 알고 그 물음을 들을 줄 아는 그 사실보다 더 깊은 것은 없습니다. 그 보다 더 깊은 뜻은 없다고! 그러니까“호지위현지(號之爲玄旨)”라고 그랬지.
“아조변료야(我早辨了也)!” 임제 스님인들 무슨 특별한 것이 있겠습니까? 특별한 것 없어요. 당신은 천하 사람들하고 다르다. 내 설법은 천하 사람들 하고 다르다고 했지마는 그것은 보통 어려운 소리하고, 산에 올라가야만 비로소 볼 수 있다고 이렇게 특별하게 이야기하는 그런 경우를 여기서 말하는 거죠. “노승은좌(老僧檼坐)에 갱유도류(更有道流)하야”노승이 떡 이렇게 편하게 앉아 있는데 어떤 도류(道流)가 있어가지고서 “내상견시(來相見時)”와서 상견할 때, 이렇게 인사를 한다든지 문안을 여쭌다든지 할 때
我盡辨了也니 何以如此오 祇爲我見處別하야
아진변료야 하이여차 지위아견처별
“아진변료야(我盡辨了也)니” 저 앞에서 무슨 문수. 보현이 나타나서 나에게 물어도 역시 나는 알고, 어떤 수행자가 와서 나에게 무엇을 묻든지 인사를 하든지 역시 나는 안다. 거기에 뭐가 있겠습니까? 서로 보고 듣고 하는 이 사실, 그 사실 일깨워주려고 황벽 스님께 “여하시불법적적대의(如何是佛法的的大意)오”라고 임제 스님이 이렇게 물었을 때 방망이로 후려갈긴 거죠. 그 사실 하나! 생생하게 살아있는 그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불법은 어떻게 보면 참으로 간단명료하죠. 너무 간단한 것입니다. 그래서 “황벽 불법이 무다자(無多子)라”“황벽 불법이 너무나도 간단하구나” 그동안 불법은 아주 복잡하고 머리 좋은 사람이나 아는 그런 것으로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그게 아니야. 너무 간단해! 머리가 좋고 나쁜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어. 소리 나는 것을 들을 줄 알고, 배고프면 먹을 줄 알면 된다 이거야. “하이여차(何以如此)오” 어째서 그러냐?
“지위아견처별(祇爲我見處別)하야” 다만 나의 견처가 다르다. 우리가 임제록 공부를 여기까지 했는데 이제 견처(見處)가 다 생겼을 거예요. 견처가 확고부동해졌을 겁니다. 사실 저도 불교 사전을 통째로 외운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릅니다. 대명법수(大明法數)라고 있어요. 법수(法數)만 쫙 이렇게 해 놓은 그것을 어리석게도 외우려고... 그러한 문자 또 교리. 조직. 체계 이런 것들이 불교인줄 알았거든요. 그게 견처가 없어서 그런 거야. 그때는 그것이 제일인줄 알았는데 여기 임제 스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가 자꾸 되뇌어 보고, 되뇌어보고 과거, 임제 스님 이후의 많은 조사 스님들이 전부 임제 스님 밑에 줄을 서고, 임제 스님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그 견해를 칭찬하는 걸로 봐서는 틀림없이 임제 스님의 가르침에 뭔가 있다. 이렇게 생각하고 여기에 몸부림을 치고 정말 책이 뚫어져라 보고 사유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을 때 지금 쯤 견처가 생겼으리라 생각을 합니다. 당연히 견처가 있어야 돼요.
外不取凡聖하며 內不住根本하야 見徹更不疑謬니라
외불취범성 내불주근본 견철갱불의류
“외불취범성(外不取凡聖)하며”밖으로 범부다. 성인이다 하는 그런 말에 속지도 않고 취하지도 않는다. 부처다. 중생이다 하는 그 소리에 이제 그만 신물이 났다 이거야. 이제 그만 안 속는다. 그럼 사람이면 됐지. 사람이면 됐지 왜? 사람을 가지고 이 사람, 저 사람, 부처사람, 중생사람, 범부사람, 성인사람 뭘 이렇게 분별할게 뭐가 있느냐 이거야.“내불주근본(內不住根本)하야”안으로의 근본에도 머물지 아니해서 “견철갱불의류(見徹更不疑謬)니라”견해가 투철해서 불법에 대한 견해, 인생에 대한 견해가! 뭐 불법, 불법하면 또 한걸음 떨어져 있는 것 같이 느껴져. 그냥 인생에 대한! 불법이라는 것이 뭐 별것입니까? 사람 사는 일이지. 사람 사는 일 외에 다른 것 인줄 저도 그렇게 알았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야. 사람 사는 일이야!
사람 사는 일은 뭐냐? 보고 듣고, 즐거워하고, 화내고 슬퍼하고 기뻐하는 이 사실이 예요. 그것은 결코 허물이 아니 예요. 결코 허물이 아니야. 목석처럼 아무 감정도 없고 화낼 줄도 모르면 기뻐할 줄도 모릅니다. 또 슬퍼할 줄도 모르죠. 자비심 일으킬 줄도 모르고, 지혜도 쓸 줄 모릅니다. 그것은 똑 같은 거예요. 그건 하나의 작용이니까! 그러한 능력이 있는 것이 바로 부처님입니다. 아주 점잖은 뭐 저기 탁자에 올려놓은 불상이 부처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 아니 예요. 우리가 방편으로 부처님이라 하고 정말 기도도 하고 다합니다. 하면서도 사실, 정말 살아있는 부처님! 정말 생명력 넘치는 부처님은 우리들 자신 밖에 달리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알아요. 그런 소견이 투철해가지고“견철갱불의류(見徹更不疑謬)니라”다시는 더 이상 의심하거나 잘못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을 불법이라고 해도 좋고 인생이라고 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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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수처작주(隨處作主)하다
師示衆云, 道流야 佛法無用功處요 祇是平常無事니 屙屎送尿하며
사시중운, 도류 불법무용공처 지시평상무사 아시송요
著衣喫飯하며 困來卽臥라 愚人笑我나 智乃知焉이니라 古人云,
착의긱반 곤래즉와 우인소아 지내지언 고인운,
向外作工夫는 總是癡頑漢이라하니라
향외작공부 총시치완한
임제 스님이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불법은 애써 공을 들여서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평상대로 아무 일 없는 것이다. 똥 싸고 오줌 누며, 옷 입고 밥 먹으며, 피곤하면 눕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나를 비웃겠지만 지혜로운 이는 알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자신 밖을 향해서 공부하는 사람은 모두가 어리석고 고집스런 놈들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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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수처작주(隨處作主)”라고 했는데, “수처작주(隨處作主)입처개진(立處皆眞)”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옵니다. 저 뒤에서 또 한번 더 나오고 그러는데 이것이 나의 전법도량“염화실”의 4대 명언의 타이틀이죠.“수처작주(隨處作主)입처개진(立處皆眞)”임제 스님의 말씀 중에서 아주 손꼽는 멋진 가르침입니다. “수처작주(隨處作主)”어디에 있든지, 곳을 따라서 주인을 지으라. 액면대로 새기면 그런 뜻이지만 어디에 있든지 간에 주인으로써 살라. 그러면 우리가 있는 그 곳“입처개진(立處皆眞)”있는 그 곳이 진정한 행복이다. 진정한 삶이고, 진정한 인생이고, 진정한 불법이고, 진정한 도(道)고 그렇다 이거야.
우리 인생은요, 지금 우리가 이렇게 논하는 이 순간에 있어서는 이 순간, 이 자리일 뿐이지 그 외에 아무것도 없어요. 과거에 우리가 어떻게 살았든지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또 우리가 내일을 사는 그것도 이 순간에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 요즈음 서양에서는 *에크하르트 톨레* 라는 도인이 쓴 책이 하나 있어요.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순전히 선불교를 깨달아서 쓴 책인데 아주 임제록의 정신하고 너무 잘 맞아 떨어지더라 구요. 표현을 우리식으로 하지 않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쓰는 그런 말을 써서 그렇지. 정말 그래요! 지금 이 순간입니다. 그게 입처개진(立處皆眞)이죠. 그게 이 책의 진미입니다. 지금 이 순간입니다. 이 순간 나의 인생은 여기에 있지 그리고 내 인생에서 찾을 수 있는 그것이 불법이 되었던지, 도(道)가 되었던지, 행복이 되었던지, 평화가 되었던지 그 모든 것이 전부 여기 이 순간에 있지 그 외는 없어요. 그러면 한 시간 후의 내 인생은? 그건 한 시간 뒤의 그 때 내 인생이야. 지금은 그게 아무 의미가 없다 구요. 그것이“수처작주(隨處作主)입처개진(立處皆眞)”의 이치가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師示衆云, 道流야 佛法無用功處요 祇是平常無事니 屙屎送尿하며
사시중운, 도류 불법무용공처 지시평상무사 아시송요
‘무용공처(無用功處)’공을 사용하는 것이 없다 이 말입니다. 이것은 육바라밀을 닦는다든지, 기도를 한다든지, 간경을 한다든지, 참선을 한다든지 하는 이렇게 공들이는 일이 아니다. 불법은 ‘평상무사(平常無事)’평상 그대로, 평상이 뭐냐? 그 뒤에 나옵니다. “아시송요(屙屎送尿)하며”똥 누고 오줌 누고
著衣喫飯하며 困來卽臥라 愚人笑我나 智乃知焉이니라
착의긱반 곤래즉와 우인소아 지내지언
“착의긱반(著衣喫飯)하며” 옷 입고 식사하고, “곤래즉와(困來卽臥)라” 피곤하면 누워서 잔다. 그게 불법이다 이거지. 그러니까 사람 사는 일이 불법이다. 인생이 그대로 불법이고, 불법이 그대로 인생이다. 이것이 진짜! 불법이 예요. 제가 [법화경]을 번역하면서 “이것이 불교다”하고 《임제록》은 “이것이 진짜 불교다”제가 “진짜”라는 말을 더 붙였어요. 이렇게 이해를 다한 입장에서 합리적으로 해석을 하면 아함경전이나, 화엄경이나, 법화경이나, 금강경이나, 조사어록이나 모두 다 한 꾸러미로 꿰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가슴에 와 닿도록 쉽게 딱 정곡을 찔러서 표현한 것은 이 임제록만한 것이 참으로 없습니다. 그동안 불교경전을 많이 알아가지고 그것이 불교인양으로 중독이 되어 있는 사람들은 이상하게 들리죠. 이런 말을 하면!
“우인소아(愚人笑我)나 지내지언(智乃知焉)이니라”그랬어요. 어리석은 사람은 나를 비웃어. “저 사람, 공부한 사람이 도대체 미친 사람 아니냐? 돌아버린 사람 아니야?”이렇게 생각한다 이거야. 불법은 무슨 참선이나 기도나 경전이나 이런 것 공들이는 것이 아니고 “평상무사(平常無事”야! 그리고 아시송요(困來卽臥), 착의긱반(著衣喫飯), 곤래즉와(困來卽臥)! 이것이 불법이다 이거야. 이것이 인생이고, 이것이 불법이다. 이렇게 말하니까 그동안 공부해온 불교하고 전혀 딴 판이다 이거지. 딴 판이라고 생각한 그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이야. 그런데 “지내지언(智乃知焉)” 지혜로운 사람은 알 것이다.
古人云, 向外作工夫는 總是癡頑漢이라하니라
고인운, 향외작공부 총시치완한
고인이 말하기를, 이것은 나찬화상(懶瓚和常)이 하신 말씀인데 “향외작공부(向外作工夫)는 총시치완한(總是癡頑漢)이라하니라” 밖을 향해서 공부를 짓는 것은 아주 어리석고 어리석은 놈이다 이거야. 완(頑)자는(완고하다. 무디다. 둔하다)완악하다고 해서 어리석은 사람 중에서도 도대체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는 그런 사람, 아무리 가르쳐도 안 되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야기 해 주어도 소용이 없는 그런 사람을 지칭해서 이 완(頑)자를 씁니다. 내 자신의 삶, 이렇게 보고 듣고 이렇게 펄펄하게 살아있는 화를 내고, 슬퍼하는 것이 내 자신의 삶입니다.
감정이 흔들리면 부처가 아니며, 도인이 아니라고 이렇게 생각하는 수준의 도인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 예요. 여기서는 그야말로 인간불교! 지금 그대로 부처라고 하는 그런 차원입니다. 그러니까 다르죠. 대개 그러잖습니까? 도인은 “팔풍(八風)에 부동(不動)해야 된다.” 팔풍(八風)에 흔들리지 않아야 도인이다 하는 수준의 도인이 있어 또! 수양이 잘된 사람들은 안으로는 흔들려도 겉으로는 흔들리지 않은 척 할 수가 있어요. 누가 자기 돈을 좀 떼먹고 손해를 보여도 속은 고추를 씹으면서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는 그런 도인도 있기는 있어요. 안팎이 설사 무심해도 그것은 이 차원의 도인하고는 다릅니다. 안팎이 다른 표현을 가지고 있는 감정은 사실은 가짜죠. 여기서 “향외작공부(向外作工夫)는”밖을 향해서 공부하는 것은 변하는 것이니까! 변하는 것을 부처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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儞且隨處作主하면 立處皆眞하야 境來回換不得하야
이차수처작주 입처개진 경래회환부득
縱有從來習氣五無間業하야도 自爲解脫大海니라
종유종래습기오무간업 자위해탈대해
今時學者는 總不識法하고 猶如觸鼻羊이 蓬著物安在口裏하야
금시학자 총불식법 유여촉비양 봉착물안재구리
奴郎不辨하며 賓主不分이라 如是之流는 邪心入道하야
노량불변 빈주불분 여시지류 사심입도
鬧處卽入이니 不得名爲眞出家人이요 正是眞俗家人이니라
요처즉입 부득명위진출가인 정시진속가인
“그대들이 어디를 가나 주인이 된다면 서 있는 곳마다 그대로가 모두 참된 것이 된다. 어떤 경계가 다가온다 하여도 끄달리지 않을 것이다. 설령 묵은 습기와 무간 지옥에 들어갈 다섯 가지 죄업이 있다하더라도 저절로 해탈의 큰 바다로 변할 것이다. 요즈음 공부하는 이들은 모두들 법을 모른다. 마치 양이 코를 들이대어 닿는 대로 입안으로 집어넣는 것처럼 종과 주인을 가리지 못하며, 손님인지 주인인지를 구분하지 못한다. 이와 같은 무리들은 삿된 마음으로 도[佛敎]에 들어 왔다. 그러므로 이해득실과 시시비비의 번잡스런 일에 곧바로 빠져버리니 진정한 출가인이라고 이름 할 수가 없다. 그야말로 바로 속된 사람[俗人]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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儞且隨處作主하면 立處皆眞하야 境來回換不得하야
이차수처작주 입처개진 경래회환부득
이것이 그야말로 전체작용입니다. 지금, 현재, 이 순간에 우리가 무엇을 하든,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무엇을 하던지 이 순간 우리가 하고 있는 이것이 모두입니다. 이것을 대기대용이다. 또는 전체작용이다. 보고 듣고 하는 이것이 내 전체가 작용하는 거예요. 내 전체가 살아 움직이는 그것입니다. 거기에 다 있는 거예요. 그것 이외의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그래서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해서“경래회환부득(境來回換不得)하야” 경계가 설사 내 앞에 닥쳐온다 하더라도, 별의별 경계가 많이 있을 수 있죠. 그것이 나를 어떻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회환부득(回換不得)’이렇게 합니다.
경계가 나를 빼앗거나 나를 바꾸거나 하지 못한다. 물론 우리가 경계에 끄달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기서 하는 말은, 경계에 끄달려도 끄다릴줄 아는 그 사람, 그 주인공! 그걸 두고 하는 소리입니다. 대개 경계에 끄달리면 수양이 안됐다, 도인이 아니다. 하는 그런 차원의 이야기가 많죠? 우리가 그런 것을 많이 들어 왔습니다. 경계에 부동하는 것이 바람직한 그런 수행자로 이야기를 하지마는 여기는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경계에 끄달려도 끄달리는 그 사실! 그 주인공! 이걸 이야기 하는 거죠. 어디로 굴러가도 가지고 놀다가 제자리에만 갖다 놓아라. 우리가 그러잖아요. 가지고 놀다가 제자리에 있는 것. 끄달리더라도 제 자리에 있습니다. 끄달려가면서 거기에 내가 있는 거예요. 이것을 우리가 잘 사유해보면 알아요. 잘 사유해보면 내가 경계에 끄달리는데, 경계에 끄달리는 내가 없냐하면 정신을 잃어서 한참 동안, 좋은 경계든 안 좋은 경계든 내가 너무 도취되었지마는 도취되었다고 내가 없는 게 아닙니다. 여기에 대해 우리가 자부심을 가져야 돼요. 이 사실에 대한 자부심을 갖는 것이‘회환부득(回換不得)’입니다.
縱有從來習氣五無間業하야도 自爲解脫大海니라
종유종래습기오무간업 자위해탈대해
여기에 나오네요. 비록 종래에 습기가 있어서, 종래(從來)의 습기(習氣)인 오무간업(五無間業)이 있다하더라도. 그래요! 자~ 별의별 습기(習氣), 우리가 아무리 습기가 진하다 하더라도 오무간업(五無間業)까지는 없죠. 그런데 임제 스님의 표현은 언제나 과격하죠.‘무간업(無間業)’들어갈 다섯 가지 죄를 설사 지은 그런 습기, 그런 악업, 그런 업장이 있다하더라도 “자위해탈대해(自爲解脫大海)니라” 그 자체가 해탈대해가 된다. 그 자체에 다섯 가지 업으로써 무간지옥에 들어가는 그 사실. 뭐 무간지옥에 들어가서 지옥고통을 받는다고 합시다. 지옥고통 받는 그 자체! 이 임제 스님은 그것을 이야기합니다. 계속 그것을 들춰내는 것입니다. 그걸 우리에게 깨우쳐주는 거예요. 지옥에 들어가서 지옥 고통을 받는 그 놈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옥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여기서 그랬잖아요. “종래습기 때문에 무간업에 들어갈 그런 업이 있어서 설사 무간지옥에 있다하더라도 그대로가 해탈대해다.”그대로가 해탈대해다! 이것을 우리가 이해가 되어야 하고 여기에 우리가 확신이 서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선조 조사스님들이 임제 스님에 대해서 미치고 좋아하고,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뭐 임제 스님 하면 껌벅 넘어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뭘 수행해가지고 팔풍(八風)에 흔들리지 않고 그래야 되는데 그것? 언제 하겠어요? 설사 그렇다고 합시다. 또 어떤 상황이 되면 또 흔들립니다. 또 흔들려요.
마치 우리가 그동안의 수행이라는 것은 흙탕물을 가라앉혀가지고 겨우겨우 삼아승지겁이라는 세월을 거쳐서 겨우 겨우 물을 좀 가라 앉혀서 맑혀놓은 그런 상황하고 같은 거야. 하루 내내 가라 앉혔는데 어린 아이가 와서 흔들어 버리면 도로 구정물이 되잖아요. 이렇게 된 수행을 우리가 수행이라고 할 수가 없다 이거야. 그런 부처를 부처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맑든지 흐리든지 물 그 자체를 우리가 부처로 보자. 지금 우리가 온갖 육진 경계에 끄달리고 흔들리는 그 사실을 그대로 부처로 보자! 그 이외는 해결의 길이 없습니다. 그 이외는 해결의 길이 없어요. 그러니까 임제 스님이 아주 뛰어난 선지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 밖에 달리 우리의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위해탈대해(自爲解脫大海)다. 종래습기(從來習氣)인 오무간업(五無間業)이 있다하더라도 이것은 해탈대해(解脫大海)다.
今時學者는 總不識法하고 猶如觸鼻羊이 蓬著物安在口裏하야
금시학자 총불식법 유여촉비양 봉착물안재구리
“금시학자(今時學者)는” 요즈음 공부하는 사람들은, “총불식법(總不識法)하고” 이러한 이치를 알지 못하고 “유여촉비양(猶如觸鼻羊)이”‘촉비양(觸鼻羊)’이라고 하는 것은 양을 두고 하는 소리인데, 양은 식성이 좋아가지고 뭐든지 코에 닿기만 하면 갖다 먹는 거예요. “봉착물안재구리(蓬著物安在口裏)하야”사물을 만나기만하면, 염소나 양 이런 것은 아주 입을 찌르는 가시도 잘 먹더라 구요. 입에 닿기만 하면 그냥 무조건 입에 끌어다 넣는 거야. “봉착물안재구리(蓬著物安在口裏)” 사물을 봉착하기만 하면 입에다 갖다 넣는다.
奴郎不辨하며 賓主不分이라 如是之流는 邪心入道하야
노량불변 빈주불분 여시지류 사심입도
“노량불변(奴郎不辨)하며”주인과 종을 가리지 아니하며, 이것이 좋은 가르침인지 좋지 않은 가르침인지 요즈음 공부하는 사람들이 그렇다 이거야. “빈주불분(賓主不分)이라”손님과 주인을 나누지 아니함이라. 그래서 대명법수를 처음부터 끝까지 외우려고 덤비고 불교사전을‘ㄱ’부터 'ㅎ’까지 다 그냥 외우려고 무모한 짓을 하는 거야. 이것이 딱 그 소리라! 나쁜 용어든 좋은 용어든 사전에 있는 것은 다 외우려고 덤비는 거야. 마치 촉비양(觸鼻羊)이 코앞에 닿기만 하면 뭐든지 먹어치우는 것처럼, 이 뜻입니다. “봉착물안재구리(蓬著物安在口裏)라”앞에 뭐든지 있기만 하면 그것이 가시가 되었든지, 독초가 되었든지, 몸에 이로운 풀이 되었든지 간에 무조건 집어 먹는 거지.
그 전에 내가 지리산 구청암에 살 때 거기에 도반이 하나 있었는데 머리가 날이 약간 넘은 사람이라. 그래가지고 중국책도 혼자 잘 보는 척하고 뭐 약도 잘 아는 척하고 무슨 신선도도 잘 아는 척도 하고 그래 싸! 자기 딴에는 잘 알겠지. 그래 어느 날 자기가 약초에 대해서 공부를 좀하고, 한약에 대해서 공부를 좀 하고는 지리산에 가서 이것, 저것 좋은 약초 뜯어 먹는다고 올라가서는 뭔가 하여튼 독초를 뜯어먹고는 거기서 바로 기절을 해가지고 넘어져 있었어요. 하룻밤을 거기서 그냥 넘어져 있다가 겨우겨우 하루 지나서 왔는가 봐요. 이름도 내가 생생해. 이름을 구체적으로 들먹거릴 수가 없는데 마치‘촉비양(觸鼻羊)’처럼, 뭐든지 그냥 좋은 약초라고 막 먹는 거야. 우리도 불교사전 다 외우면 좋은 줄 알고, 대명법수도 다 외우면 좋은 줄 알고 하는 것 하고 똑 같은 거야. 처음 공부할 때는 그냥 뭐든지 다 신기하니까 다 외우려고 하는 거죠. 임제 스님이 이런 꼴을 얼마나 많이 보았겠습니까? 옛날에 신심 있는 학인들, 이런 사람들이 많거든요. 참으로 비유를 아주 너무 적절하게 잘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류(流) 들은 “사심입도(邪心入道)하야” 삿된 마음이 도에 들어간다. 독초를 먹어가지고 기절한다 이거야.
鬧處卽入이니 不得名爲眞出家人이요 正是眞俗家人이니라
요처즉입 부득명위진출가인 정시진속가인
“요처즉입(鬧處卽入)이니”시끄러운 곳에도 곧 들어가나니 “부득명위진출가인(不得名爲眞出家人)이요”그것을 출가인(出家人)이라고 할 수 있나요? 출가인이라면 견해가 밝아야지. “정시진속가인(正是眞俗家人)이니라”속물이다 이겁니다. 속물! 그러니까 출가인(出家人)이다. 속가인(俗家人)이다 하는 것도, 임제 스님은 출가라고 하는 의미가 어디에 있느냐?‘속(俗)’하면 어디든지 치우치기를 좋아하는 사람. 치우치기 좋아하는 사람, 이것이 속된 견해고 출가인하면 그야말로 정견을 가진 사람, 중도정견을 가진 사람, 바른 소견을 가진 사람, 이 뜻입니다. 여기서는 출가를 해서 머리를 깎았느냐? 길렀느냐? 이런 것을 두고 하는 소리가 아니죠. 이러한 것에 좀더 깊은 맛을 느끼고 감동을 하시려면 스님들이 임제록을 한 서른 번 사경을 하고, 한 300 번 쯤 독송을 하고 이렇게 하면 맛을 훨씬 잘 느낄 거예요. 그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뭐 그런다고 꼭 가슴에 와 닿는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은 그거예요. 자꾸 씹고 씹으면 정말 진국이 우러납니다. 그 다음에 무불무중생(無佛無衆生 부출가자(夫出家者)는 “ 참다운 출가인이다” 앞에서 출가인 이야기를 했으니까 이제 출가인에 대해서 또 말을 한마디 안 할 수가 없다.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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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참다운 출가인
不出家者는 須辨得平常眞正見解하야
부출가자 수변득평상진정견해
辨佛辨魔하며辨眞辨僞 辨凡辨聖
변불변마 변진변위 변범변성
“대저 출가한 사람은 모름지기 평상 그대로의 참되고 바른 안목을 잘 가려내야 한다. 그리하여 부처와 마군을 구분하고 참됨과 거짓을 구분하며 범부와 성인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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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出家者는 須辨得平常眞正見解하야
부출가자 수변득평상진정견해
대저 출가한 사람들은“수변득평상진정견해(須辨得平常眞正見解)하야”평상의 진정견해를‘ 변득(辨得)’가려낸다. 참되고 바른 소견을 가려내서
辨佛辨魔하며辨眞辨僞 辨凡辨聖
변불변마 변진변위 변범변성
“변불변마(辨佛辨魔)하며”부처도 가려내고 마군도 가려내고 “변진변위(辨眞辨僞)”진(眞)도 가려내고 위(僞)도 가려내고, “변범변성(辨凡辨聖)”범부와 성인도 가려내야 함이니(계속~)
첫댓글 _()()()_
생명이 있는 모든것은 누구나 똑같이 공유 할수 있고 활용 할수 있고 그 속에서도 흡수될수 있는것......이 사실....감사 합니다._()()()_
隨處作主 立處皆眞,,, 平常無事, 지금 있는 그대로가,,,!
把得便用...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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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_()()()_
경계에 끄달려도 끄달리는 이 사실에 대한 자부심...縱有從來習氣五無間業하야도 自爲解脫大海니라... 一輪月님! 고맙습니다.... _()()()_
把得便用, 祇爲我見處別,見徹更不疑謬,隨處作主立處皆眞,回換不得 공부 잘하고 갑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리며---_()()()_
불교는 애써서 공을 들여가며 공부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평상대로 일없이 인연 따라 살면 된다. 똥 싸고 오줌 누며, 옷 입고 밥 먹으며, 피곤하면 눕는 것이다...一輪月님! 수고하셨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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把得便用..(불교는)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누구나 똑같이 공유할 수 있고, 활용할 수 있고 그 속에서도 흡수될 수 있는 것...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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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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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하시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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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法無用功處 祇是平常無事 屙屎送尿 著衣喫飯 困來卽臥 ...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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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