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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인제군 설악산(백담사-오세암-봉정암) 산행지도
◈백담사의 유래
백담사는 신라 진덕여왕 원년(647년)에 자장율사가 창간하였다고 전해진다. 창건 당시 절 이름은 한계사(寒溪寺)라 했으며,
위치도 현재의 위치가 아니라 한계령 중턱 장수대 근방이었다. 이 한계사는 불터고 없어지고 지금은 석탑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불탄 자리에 43년 후에 다시 절을 중건했으나 이나마도 불타 버렸다.
이후 백담사는 많은 화재와 사연을 지닌 채 1천3백년을 존속해왔다. 최근에는 1915년 1백60여칸의 백담사는 불타버리고,
4년후에 중건했으나 6.25 동란으로 다시 소실되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사찰이 계속 화재로 소실되어 폐허가 되므로 이름을 고쳐보려고 애를 쓰던 중 어느날 주지스님의
꿈에 신령스러운 백발노인이 나타나 청봉에서 지금의 절까지 담(潭)을 세어 1백개가 되는 장소에 사찰을 건립하면 삼재(水,火,風)를
면하리라고 현몽하기에 현재의 위치에 건립했으며, 담(潭)자는 불의 기운을 막을 수 있다고 하여 백담사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백담사와 만해 한용운
백담사는 만해선사가 불교유신론(1910년)과 님의 침묵(1925년)을 지은 곳이며, 만해의 승려생활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이로인해 백담사는 만해의 정신이 깃든 곳으로 많은 탐방객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만해 한용운은 승려, 사상가, 독립운동가, 시인으로서 일제 시대에 끝까지 민족 양심을 지킨 인물이다. 1879년 충남 홍성에서
출생했으며 의병운동-동학혁명군에 가입했다 설악산 등으로 몸을 피한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했으며, 1935년 이래 일제 탄압이 심해지자 조선일보 등에 연재소설을 썼으며 1944년 6월 심우장에서 입적했다
◈오세암의 유래
5살 된 아이가 폭설 속에서 부처의 도움으로 살아남았다는 전설이 있어서 '오세암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야기를 서술하자면 다음과 같다. 어린 조카와 함께 설악산의 암자에 기거하던 승려가 있었는데, 산 아래에 혼자 내려갈 일이
있어서 조카에게 '혼자 있는 것이 무섭거든 관세음보살님의 이름을 외우며 지내거라'고 말하고 암자를 떠났다. 그런데 승려가 산을
내려간 뒤 설악산에 엄청난 폭설이 내려서 도저히 암자로 돌아갈 수 없었다. 결국 봄이 되어서 눈이 다 녹은 뒤에야 암자로 올라갔는데,
놀랍게도 조카는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 어찌된 연유인지 까닭을 물으니 조카가 말하길 관세음보살이 때마다 찾아와 보살펴 주었다는 것.
승려는 관세음보살의 신력(神力)에 감동해 암자의 이름을 오세암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봉정암의 유래
지금부터 1350여년전, 당나라 청량산에서 21일 동안 문수보살상 앞에 기도를 마치고 문수보살로부터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금란가사를 받고 귀국한 자장율사는 처음 금강산으로 들어가 불사리(佛舍利)를 봉안할 곳을 찾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서인지 찬란한 오색빛과 함께 날아온 봉황새가 스님을 인도하는 것이었다. 한참을 따라가다가 바위 병풍처럼
둘러쳐진 곳에 이르렀고, 봉황은 한 바위 꼭대기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 모습이 봉황처럼, 부처님처럼 생긴 바위였다.
"바로 이곳이구나."
부처님의 사리를 모실 인연처(因緣處)임을 깨달은 스님은 탑을 세워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고 조그마한 암자를 건립하였다.
이 때가 선덕여왕 12년(643)의 일이라고 전한다.
봉정암은 해발 1244m에 위치하여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이 자리 잡은 지리산 법계사(해발 1400m)에 이어 두 번 째로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설악산 소청봉 서북쪽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말사인 백담사의 부속암자다.
봉정암의 성보(聖寶)로는 법당 옆 바위 위에는 강원도유형문화재 제31호로 지정된 봉정암석가사리탑(釋迦舍利塔)이 있다.
고려시대 양식을 따른 이 오층석탑은 부처의 뇌사리를 봉안하였다고 하여 ‘불뇌보탑(佛腦寶塔)’이라고도 부른다.
다른 사찰의 여느탑과 달리 기단부가 없고 자연암석을 기단부로 삼아 그 위에 바로 오층의 몸체를 얹었다. 기단부를 따로
만들지 않은 것은 설악의 온 산이 불멸의 몸이 깃든 이 탑을 받들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자연암석에 연꽃이 조각되어 있는데, 1면에 4엽씩 16엽이 탑을 포개고 있어 부처가 정좌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맨 위에는 연꽃인 듯한 원뿔형 보주가 높이 솟아 있다.
백담사
백담사는 신라 제28대 진덕여왕 원년(647년) 자장율사가 한계사란 이름으로 개창한 사찰로 창건 이후 여러 차례의 화재를 당하자 그를 막아보자는 뜻에서 백담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한다.
사찰 이름을 바꾼 주지가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대청봉에서 절까지 웅덩이를 세어보라 하여
확인해 보았더니 꼭 100개였다고 한다.
백담사는 만해 한용운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동학란에 가담했다 실패한 만해는 1896년 백담사에 숨어 지내다
1905년 출가하여 이곳에서 불도를 닦았다고 전한다.
백담사는 80년대 말 불자가 급격히 늘어나고 불사가 거듭되면서 아늑한 산사의 분위기를 잃었으나,
새로 들어선 만해 기념관 같은 곳을 통해 그의 나라 사랑하는 정신을 엿볼 수도 있다.
백담계곡은 백담사를 기점으로 이름이 수렴동계곡으로 바뀐다.
백담계곡은 외가평에서 백담사까지 오는 사이 줄곧 도로에서 내려다볼 수밖에 없었으나,
수렴동계곡은 수면과 엇비슷한 높이의 계곡가를 따라 길이 이어지기 때문에
한층 가까이서 계곡을 감상할 수 있다.
오세암(五歲庵)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설악산 만경대에 있는 암자.
오세암은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에 속하는 백담사의 부속 암자입니다.
백담사에서 약 6㎞ 떨어진 곳에 있으며, 영시암을 지나 마등령으로 가는 길에 있습니다
1643년(인조 21) 설정이 중건하고 오세암으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이름을 바꾼 데 따른 전설이 전하고 있습니다
설정이 고아가 된 형님의 아들을 이 암자에서 키웠는데, 어느 날 월동 준비를 하기 위해 혼자 양양까지 다녀와야 했습니다.
그 동안 혼자 있을 4세된 어린 조카를 위하여 며칠 동안 먹을 밥을 지어놓고, 조카에게 밥을 먹고 난 뒤 법당에 있는 관세음보살상에게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이라고 부르면 잘 보살펴줄 거라고 일러주고 암자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설정은 밤새 내린 폭설로 이듬해 눈이 녹을 때까지 암자로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눈이 녹자마자 암자로 달려간 설정은 법당에서 목탁을 치면서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있는 조카를 보게 되었습니다.
어찌된 연유인지 까닭을 물으니 조카는 관세음보살이 때마다 찾아와 밥도 주고 재워 주고 같이 놀아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흰 옷을 입은 젊은 여인이 관음봉에서 내려와 조카의 머리를 만지며 성불의 기별을 주고는 새로 변하여 날아갔습니다.
이에 감동한 설정은 어린 동자가 관세음보살의 신력으로 살아난 것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암자를 중건하고 오세암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설악산 봉정암
강원 인제군 북면 설악산(雪嶽山:1,708m) 소청봉 북서쪽에 있는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신흥사의 말사인 백담사의 부속암자이다. 대표적 불교성지인 오대적멸보궁(五大寂滅寶宮) 가운데 하나로 불교도들의 순례지로서 유명하다. 대청봉 산마루 가까이에 있는데, 해발고도 1,244m 지점에 있어 백담사와 오세암을 거쳐 봉정암에 이르기 위한 산행은 매우 힘겹다. 봉황이 알을 품은 듯한 형국의 산세에 정좌하고 있는 봉정암은 거대한 바위를 중심으로 가섭봉·아난봉·기린봉·할미봉·독성봉·나한봉·산신봉이 감싸고 있다.현존하는 전당은 법당과 요사뿐이다. 법당 옆 바위 위에는 강원도유형문화재 제31호로 지정된 봉정암석가사리탑이 있다. 고려시대 양식을 따른 이 오층석탑은 부처의 뇌사리를 봉안하였다고 하여 ‘불뇌보탑’이라고도 부른다.다른 사찰의 여느 탑과 달리 기단부가 없고 자연암석을 기단부로 삼아 그 위에 바로 오층의 몸체를 얹었다. 이 자연암석에 연꽃이 조각되어 있는데, 1면에 4엽씩 16엽이 탑을 포개고 있어 부처가 정좌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맨 위에는 연꽃인 듯한 원뿔형 보주가 높이 솟아 있다.643년(신라 선덕여왕 12) 자장(慈藏)이 중국 당(唐)나라에서 가져온 부처의 진신사리와 금란가사를 봉안하여 창건하였다. 원효·보조 등 여러 고승들이 이곳에서 수도하였으며 677년(문무왕 17) 원효가, 1188년(고려 명종 18) 지눌이 중건한 것을 비롯하여 6·25전쟁 이전까지 7차례에 걸쳐 중건하였다. 6·25전쟁 때 화재로 자칫하면 명맥이 끊어질 뻔하였다
한국의 사찰 가운데 가장 높은 해발 1,200m대 고지에 위치한 봉정암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사리탑과 5대 적멸보궁 가운데 하나가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적멸보궁은 불상을 봉안하지 않는 대신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받드는 법당을 말한다. 사찰 왼쪽 계단길 끝에 위치한 사리탑 일원은 공룡능선과 용아장성, 그 옆으로 벌어진 내설악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봉정암은 한때 암자 옆에 산장이 들어서 있어 등산인들에게도 친숙한 곳이었으나,80년대 중반 이후 산장 자리에 법당이 세워지는 등 절터에 비해 지나치게 규모가 큰 당우들이 들어서면서 아늑하고 신비롭던 암자의 분위기가 사라졌다.
봉정암사리탑앞에는 10~20명 정도가 기도를 할 수 있도록 마루를 설치해 놨고 20여명이 서서 기도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그리고 사리탑 앞에는 작은 언덕이 있는데 열 명 정도가 앉아 있을 공간이다. 여기서 주변을 모두 볼 수 있는데
북동쪽 : 백두대간인 공룡능선이 (황철봉 ~ 마등령 ~ 공룡능선 ~ 희운각)
북서쪽 : 용아장성이
남서쪽 : 서북능선이 (끝청 ~ 한계령갈림길 ~ 귀때기청봉 ~ 대승령 ~ 장수대)
남동쪽 : 소청봉과 중청봉 대청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있다.
오세암설명
강원도 인제군(麟蹄郡) 북면(北面) 용대리(龍垈里) 설악산 백담사(百潭寺)에 딸린 암자.
643년(신라 선덕여왕 12) 자장(慈藏)이 창건하여 관음암(觀音庵)이라 하였고, 조선시대 1548년(명종 3)
허응(虛應)이 중건하였다. 1643년(인조 21) 설정(雪淨)이 중건하여 오세암으로 개칭하였으며
1888년(고종 25)에는 백하(白下)가 중건하였다.
이 암자에는 설정이 월동준비로 암자를 떠난 뒤 4살 된 조카가 관세음보살의 보살핌으로 한해
겨울을 혼자 보냈다는 <관음영험설화>가 전해지며, 이때부터 이름을 오세암이라 고쳤다고 한다.
수선도량(修禪道場)과 기도도량으로 유명하며, 많은 고승들이 주석(駐錫)했던 곳이기도 하다.
특히 김시습(金時習)·한용운(韓龍雲)이 머물면서 《십현담(十玄談)》의 주석서를 쓴 곳으로 유명하다.
(가져온 글입니다)
#. 내설악 절경 수렴동계곡
수렴동계곡은 백담계곡 상류인 백담산장 위쪽에서부터 구곡담계곡과 가야동계곡이 갈라지는
수렴동대피소까지의 약 6km 구간의 계곡을 가리킨다. 전체적으로 아주 완만하고 유순한 계곡이며,
길이 포장된 백담계곡에 비해 자연스러운 맛이 있으며 경치도 더 빼어나다. 현란한 아름다움보다는
그윽한 운치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특히 가을단풍과 어우러지는 계곡의 정경은 이 길을 설악산의 대표적인 단풍길로 만들어 준다.
셀 수 없을 만큼의 소(沼)와 담(潭)이 연속적으로 늘어져있는 절경을 가지고 있다.
수렴동계곡이라 불리우는 곳의 원래 위치는 수렴동대피소에서부터 귀때기청봉까지였다. 지금의
구곡담계곡 일부와 백운동계곡을 포함한 지역이다. 수렴폭포가 백운동계곡 초입에 있어서
그 일대를 예전에는 수렴동계곡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백담산장에서 수렴동대피소에 이르는 이 계곡의 오솔길은 경사가 거의 없고 완만하다.
백담산장에서부터 수렴동대피소까지는 2시간이 걸리며, 줄곧 계곡 왼쪽으로 길이 나있다.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 위치한 경관 조망대.
#. 만경대(내설악)
2013년 3월 11일에 명승 제104호로 지정되었다. 내설악은 설악산의 주봉인 대청봉을 중심으로
한 서쪽 일대를 가리킨다. 내설악 만경대는 인제군 북면 용대리의 영실천 골짜기를 따라 오세암
근처에서 해발고도 922.2m의 봉우리 형태를 취하는 경관 조망대이다. 영실천은 설악산에서
발원하여 가야동계곡을 따라 서쪽으로 흐르면서 백담사 앞을 흐르는 하천이다.
내설악은 설악산의 안쪽에 있다는 의미를 가진다. 방향상으로는 주봉인 대청봉을 중심으로
북서쪽의 마등령과 미시령, 서쪽의 한계령으로 이어지는 설악산 산줄기를 비롯하여 서북능선과
화채능선 등 3개의 주능선 서쪽을 지칭한다.
만경대는 만 가지의 경치를 바라볼 수 있는 조망대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 경관 조망대에
올라가면 내설악에 있는 자연경관을 관망하기 쉽다는 데에서 내설악 만경대라는 명칭이 유래하였다.
만경대는 암석으로 이루어진 조망대이다. 설악산 일대에서 주로 볼 수 있는 화강암의 차별침식
작용으로 인해 약한 부분은 씻겨 나가고 단단한 부분만 남아서 형성되었다. 주변 지역보다
고도가 높아 상대적으로 조망하기에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다.
만경대의 남쪽에 있는 가야동계곡 역시 노출된 기반암의 위를 타고 흐르는 물줄기에 의해
폭포와 소가 여러 곳에 형성되어 있다. 가야동계곡의 폭포와 소는 천불동계곡이나
십이선녀탕계곡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크고 웅장하지는 않다.
설악산은 강원도 속초시, 양양군, 고성군, 인제군 4개의 시, 군에 걸쳐 있다.
한라산, 지리산에 이어 남한에서 3번째로 높은 설악산은
주봉인 대청봉(1,708m)을 비롯하여 700여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설악산은 외설악과 내설악으로 구분한다.
오색지구를 추가하여 남설악을 덧붙이기도 한다.
한계령과 미시령을 경계선으로 동해쪽은 외설악, 서쪽은 내설악이라 한다.
외설악은 설악산에서 가장 높은 대청봉, 관모산, 천불동 계곡, 울산바위, 권금성,
금강굴, 비룡폭포, 토왕성폭포 등 기암절벽과 큰 폭포들이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잦다.
내설악은 백담계곡, 수렴동계곡, 백운동계곡, 가야동계곡, 와룡, 유달, 쌍폭, 대승 등
폭포, 백담사, 봉정암 등의 사찰들이 있으며 계곡이 아름답고 산세가 빼어나다.
가을이면 대청봉 단풍이 9월 하순부터 물들기 시작한다.
대청 중청 소청봉을 필두로 화채봉 한계령 대승령 공룡능선이 그 다음으로 타오르다
용아장성 천불동계곡으로 내려온뒤 장수대와 옥녀탕까지 빠른 속도로 붉게 물들인다.
이중 공룡능선은 설악단풍산행의 으뜸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 곳.
외설악의 암릉미가 동해와 화채릉의 짙푸른 사면과 어우러진데다
서쪽의 용아장성과 기암도 장관이다.
설악산의 오색단풍 중 붉은 색은 단풍나무를 비롯 벚나무, 붉나무,
개박달, 박달나무 등이 만들어 내는 장관이다.
또 노란색은 물푸레나무, 피나무, 엄나무, 층층나무가, 주황색은 옻나무,
신갈나무,굴참나무, 떡갈나무 등이 엮어낸다.
여기에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최고의 절경을 만들어 낸다.
또한 설악산은 겨울에 아름다운 산이다.
오색이나 한계령에서 대청을 올라 천불동계곡으로 하산한다.
겨울의 설악산은 겨울산행과 겨울바다의 운치,
상쾌한 온천욕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는 1석3조의 명소로 꼽힌다,
인근에 낙산사, 하조대, 주전골 등 명승지가 많다.
설악산은 척산온천, 설악워터피아, 오색온천이 있어 산행 후 온천을 즐길 수 있다.
척산온천은 외설악의 초입인 설악동에서 불과 2㎞ 거리.
한화리조트의 워터피아는 파도풀장, 슬라이더풀장, 야외 수영장 등을 갖추고 있으며.
오색온천은 점봉산 오색약수에서 한계령쪽으로 4㎞쯤 떨어진 온정골에 있다.
이번 산행은 당일 일기 상황에 따라 공룡능선 또는 수렴동계곡으로 하산하는 코스를 선정합니다.
설악산 봉정암에 대하여
지금부터 1350여년전, 당나라 청량산에서 21일 동안 문수보살상 앞에 기도를 마치고 문수보살로부터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금란가사를 받고 귀국한 자장율사는 처음 금강산으로 들어가 불사리(佛舍利)를 봉안할 곳을 찾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서인지 찬란한 오색빛과 함께 날아온 봉황새가 스님을 인도하는 것이었다. 한참을 따라가다가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진 곳에 이르렀고, 봉황은 한 바위 꼭대기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 모습이 봉황처럼, 부처님처럼 생긴 바위였다. "바로 이곳이구나." 부처님의 사리를 모실 인연처(因緣處)임을 깨달은 스님은 탑을 세워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고 조그마한 암자를 건립하였다. 이 때가 선덕여왕 12년(643)의 일이라고 전한다. 봉정암은 해발 1244m에 위치하여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이 자리 잡은 지리산 법계사(해발 1400m)에 이어 두 번 째로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설악산 소청봉 서북쪽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말사인 백담사의 부속암자입니다. 대표적인 불교성지인 5대적멸보궁 중의 하나로서 불자가 평생에 꼭 가야 할 순례지로서도 유명합니다. 백담사에서 5시간 정도 수렴동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깔딱고개'에 도달하는데 이 고개를 넘으면 바로 소청봉 서북쪽 중턱에 있는 봉정암 적멸보궁에 이릅니다. 자장스님께서 봉정암을 세운 뒤 신라 문무왕 17년(677)에 원효(元曉)스님이 중건하였으며, 그 뒤 고려시대의 명종 18년(1188)에 지눌(知訥)스님이 중건하였으며, 조선시대 중종13년(1518)에 환적(幻寂)스님이 중수하였습니다. 또 명종 3년(1548)에는 등운(騰雲)스님이 중수하였고, 인조 10년(1632)에는 설정(雪淨)스님이 중건하였습니다. 특히 설정스님의 중건 때는 부처님의 탱화를 봉안하고 배탑대(拜塔臺)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누각까지 건립하여 절다운 규모를 갖추었다고 합니다. 정조 4년 (1780) 계심(戒心)스님에 여섯번째 중건 되었고, 그 뒤 고종 8년(1870년) 인공(印空)스님과 수산(睡山)스님에 의해 중건되어 면면이 이어졌습니다. 봉정암의 성보(聖寶)로는 법당 옆 바위 위에는 강원도유형문화재 제31호로 지정된 봉정암석가사리탑(釋迦舍利塔)이 있다. 고려시대 양식을 따른 이 오층석탑은 부처의 뇌사리를 봉안하였다고 하여 ‘불뇌보탑(佛腦寶塔)’이라고도 부른다. 다른 사찰의 여느탑과 달리 기단부가 없고 자연암석을 기단부로 삼아 그 위에 바로 오층의 몸체를 얹었다. 기단부를 따로 만들지 않은 것은 설악의 온 산이 불멸의 몸이 깃든 이 탑을 받들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자연암석에 연꽃이 조각되어 있는데, 1면에 4엽씩 16엽이 탑을 포개고 있어 부처가 정좌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맨 위에는 연꽃인 듯한 원뿔형 보주가 높이 솟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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