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동은 옛적에 신선(神仙)이 산다는 무릉계(武陵溪)라불렀다. 무릉계곡 한편으로 백사장이 있고 그 주변에는 복숭아 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꽃이 활짝 피는 봄이면 자욱한 안개가 서서히 걷히면서 안개 사이로 드러나는 계곡 속의 만발한 도화꽃 밭은 바로 선경(仙境)이요 무릉도원 이었다.
이곳에 효자 반희언이 살고 있었는데 임진왜란 당시 맹장으로 활약하던 아버지(반처량)가 전사하자 3년간 시묘살이(아버지의 묘소옆에 초막을 짓고 묘소를 돌보는일)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어머님의 병이 들어 사경을 헤메고 있었다.
효자 반희언은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 어머니를 간병하였으나 효험이 없던 차 꿈속에 한 신선이 나타나 대룡산 어디쯤 가면 시체 다섯구가 있으니 가운데 시체의 목을 잘라다 어머니께 먹이면 병이 낫는다고 하여 신선이 가르쳐준 대룡산으로 달려갔다. 과연 시체 다섯구가 있었다. 어머니를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가운데 시체의 머리를 잘라 돌아온 길을 거두리(머리를 잘랐다)라 부르니 지금의 거두리다. 시체의 머리를 달여서 어머니께 드리니 어머니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 하도 기이하여 후일 대룡산을 찾으니 산삼 다섯포기중 가운데 가장 오래된 산삼의 머리 부분이 잘려 있었다.
이 효성이 임금님께 알려져 효자각을 내리니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춘천, 원주, 양구가는 삼거리, 지금의 효자동이 그 효자각을(현재 우체국 자리)세웠던 곳이다.
반희언의 어머니는 복사꽃을 좋아했다. 효자의 정성으로 완쾌된 어머니와 복숭아 나무를 심고 가꾸며 살아가던 중 하루는 홍수로 대룡산의 계곡물과 학곡천의 범람한 물이 복숭아 밭으로 밀려왔다. 효자 반희언은 옥황상제님을 부르며 온 몸으로 물길을 막아내자 하늘도 효자의 마음을 헤아려 물길을 돌렸다. 계곡의 하천이 방향을 돌려 물려갔다 하여 물러갈 퇴(退), 시내 계(溪) 자를 써서 1946년부터 퇴계동(退溪洞)이라 부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