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 녹색글 은 1997년 일기장을 컴퓨터로 옮길 때 기억을 더듬어 쓴 나(어른)의 설명 글입니다.
1978년 11월 1일 수요일
점심 시간에 아이들과 재미나는 놀이를 했다.
그런데 이 놀이는 사실상 따지고 보면 좀 난폭한 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름 아닌 오징어 갈생[1]이다. 이 놀이만 하면 나중에는 꼭 싸움이 벌어진다.
그래서 오늘은 시작하기 전에 규칙을 정했다.
1. 실수로 옷이 찢어져도 상관 없음.
2. 만약 목 위를 때리거나 고의적으로 반칙을 했을 때는 놀이에서 제외 됨.
이렇게 규칙을 단단히 정해놓고 서로 새끼손가락으로 약속을 하였다. 그 결과 반칙하는 아이들이 드물었다.
10여 회 정도 한참 재미나게 했을 때, 태영이가 실수로 진홍이의 옷을 찢고 말았다.
진홍이는 아까 우리가 약속한 것을 무시하고 태영이를 마구 때렸다.
우리들이 모두 싸움을 말려서 한참만에 싸움이 중지되었다. 결국 하던 놀이는 끝도 못 보고 그만 두었다. 우리들은 앞으로는 절대 이 놀이를 하지 않기로 했고, 우리들의 놀이 명단에서 폐지시키기로 약속하는 사이에 5교시 벨이 울렸다.
결국 진홍이는 오늘 인심만 잃었다.
[1] 땅에 금을 그려 어떤 영역을 표시해 두고 거기에서 어떤 게임을 하는 것을 사투리로 '갈생'이라고 했다.
1978년 11월 2일 목요일
어제 숙제를 하지 않고 자는 바람에 걱정이 되어 오늘은 유난히 일찍 일어났다.
새벽에 숙제를 다하고 가방을 챙기려고 하다니까
"드르렁, 드르렁 ……."
이렇게 소리가 났다. 들여다보니 아버지의 코고는 소리다. 아버지께서는 요즘도 굉장히 바쁘셔서 피곤하신가 보다.
'일어나셔서 빨리 소죽을 끓여야 하는데, 지금 아버지께서는 피곤하셔서 못 일어나실 거야.'
시간은 벌써 소죽을 끓일 때가 되었다.
'좋아! 오늘은 내가 아침 소죽을 끓여야지.'
밖으로 나갔다. 아직도 어둠이 가시지 않았다.
소죽을 끓이기 시작했다. 끓이는 도중에 할머니께서 밖으로 나오셨다.
"내가 끓이려고 나왔는데…. 세억이 네가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할머니께서는 잘한다고 칭찬을 하셨다.
소죽을 다 끓이고 방에 들어오니 아직도 아버지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
'내가 소죽을 끓이지 않았다면, 우리 소가 오늘은 밥을 늦게 먹을 뻔했네.'
이렇게 생각하니 어깨가 으쓱…….
1978년 11월 3일 금요일
아침에 일어나니 동생 세호는 벌써 일어나서 무엇인가 만지고 있었다.
"세호야, 뭐 만져?"
세호는 깜짝 놀라면서 그제야 감추려고 하였다.
얼른 세호 손을 끌어 당겨 펼쳐보니, 아니나 다를까 돈 170원이 있었다.
"너 이거 어디서 났어?"
"서울형이 주던데."
형이 주었다니까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탐이 났다.
"세호야, 형아한테 50원만 줘. 너하고 나 사이에 50원 정도는 왔다갔다해도 되잖아."
"안돼."
"50원만…."
"안돼."
"40원만…."
"안돼."
나의 회유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결국 전쟁이 벌어졌다.
어머니께서 싸움을 말리시고 세호에게
"넌 조그만 한 게 170원씩이나 가지고 어디에 쓰려고? 빨리 형한테 50원만 줘라."
그래도 세호는 완강하게 거부했다. 결국은 실패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한 행동이 경솔했다.
또 우습기도 하다.
1978년 11월 4일 토요일
현재 여기는 외갓집이다.
예정은 되어 있지 않았으나, 오후에 어머니의 부탁을 받고 왔던 것이다.
"세억아, 지금쯤 외갓집에는 가을철이니까 감이 많을 거다. 너무 많아서 해마다 처리가 곤란해서 썩혀 버린다. 외갓집에 가서 자전거에 감을 한 포대 싣고 오너라."
외갓집에 도착하니 진짜 감나무마다 빨간 불이 켜져 있었다.
외할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한참 얘기를 하다가 모두 뒷밭에 있는 감나무로 갔다.
외할머니, 외사촌 동생 경희, 경희 친구 3명은 감나무 밑에서 넓은 천을 붙들고, 나와 영만[1] 외삼촌은 나무에 올라가서 감나무를 세게 흔들었다.
감이 떨어지면서 할머니 머리에도 맞고, 경희 머리에도 맞았다.
모두 재미있다는 듯 한바탕 웃었다. 감 따는 일은 정말 재미있었다.
이런 즐거움을 외할아버지께서도 함께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감을 다 딴 후 외할아버지께서 사용하시던 방으로 들어가 보았다.
내가 외가에 오면 항상 맛있는 과일들을 주셨던 그 외할아버지가 무척 생각이 난다.
[1] 어머니는 맏딸이며, 어머니 밑으로 남동생 네 분과 여동생 한 분이 계신다. 영만 외삼촌은 통틀어서 막내이며, 나이는 우리형보다 두 살만 많고 초등학교는 아홉 살에 입학을 해서 1978, 1979년 두 해 동안은 형과 똑 같은 고등학교에 다녔다. 남들이 알면 외삼촌 입장이 곤란할까봐 형은 학교에서 우연히 외삼촌을 만나도 남들이 있는 데서는 모르는 척 했다고 한다. 좌우간 막내 외삼촌은 나와 나이 차이가 심하지 않아서 어릴 때 무척 따랐던 기억이 나며, 아직까지도 막내 외삼촌에 대한 그런 마음은 변함이 없다.
1978년 11월 5일 일요일
외할머니께서는 오전에 교회에 가시면서 점심 먹고 할머니가 없더라도 집에 가라고 말씀하셨다.
점심때가 되니 나는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삼촌, 이제 집에 가야겠어."
"조금만 있다가 할머니 오시면 얼굴 뵙고 가야지."
"할머니께서 아침에 교회 가실 때 점심 먹고는 빨리 가라고 하셨는데."
"그래도 조금만 있으면 오셔. 반시간만 기다리면 오니까 조금 있다가 출발해."
그래서 할머니를 보고 가려고 더 놀았다.
그러나 반시간이 지났는데도 할머니께서는 소식이 없었다. 또 반시간 더 기다려도 오시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외갓집을 나섰다.
외할머니를 못 뵙고 떠나는 마음은 다만 나만 알뿐이다.
집에 올 때는 감을 포대에 가득 넣어 자전거 뒤에 싣고 왔다.
지금도 외갓집이 눈에 선하다.
'지금쯤 외할머니께서는 나를 그리워할까?'
할머니의 인자한 모습이 떠오른다.
1978년 11월 6일 월요일
사람은 왜 먹어야 하나?
또 왜 자야하고, 왜 입어야 하고, 왜 걸어 다녀야만 하나?
오늘따라 새삼스레 이런 것들이 궁금해진다.
모두 대답하기가 곤란한 질문이다.
먼저, 나는 사람이 왜 먹어야 하나를 생각해 본다.
자연 시간에 배운 바로는 먹으면 우리 몸에 필요한 영양소가 고루 퍼진다고 한다. 이것으로 보아 먹어야 하는 이유는 영양소를 공급해서 생명을 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왜 자야 하는가를 생각한다.
구체적인 이유는 지금 생각나지 않고, 다만 '자고 싶어 잔다' 등 이런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이 문제는 나중으로 미룬다.
왜 입어야 하나?
이것은 자기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이런 의문 말고도 궁금한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앞으로 중학교, 고등학교에 가서 공부하면 이런 것들에 대한 의문이 풀릴 것이다.
1978년 11월 7일 화요일
학교에서 돌아와서 10월 24일에 서울에서 온 고종 사촌형과 함께 산에 놀러갔다.
서울형은 몸이 약해서 공기 좋은 외갓집에 휴식을 취하러 온 것이다. 형은 매일 밥 먹는 시간을 빼고는 산으로 들로 돌아다닌다.
오늘도 산에 맑은 공기를 마시러 갔다. 이번에는 내가 안내자가 되는 셈이다. 내가 아는 곳은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 중에서도 형이 감탄한 것이 있다. 우리 할아버지 산소가 있는 산에 갔는데, 서울형은
"옛날에 내가 외할아버지 산소에 왔을 때는 나무가 혹시 가다가 한 그루 있었는데, 지금은 저기에 소나무가 가득 차 있네."
형은 외할아버지(우리 할아버지)가 그립기도 하고 나무가 많으니 좋다고도 했다.
"형, 이 나무가 나중에 가면 우리 나라의 중요한 목재가 되겠지?"
나는 나무 가까이 가서 나무를 만져 보았다. 아무 일없이 이 나무가 자라 외국의 나무보다 더 크게 자랐으면 좋겠다.
앞으로 나무 가꾸기에 더욱 힘써야겠다.
나도 모처럼 산에 올라가니 기분이 굉장히 좋았다.
1978년 11월 8일 수요일
오늘따라 늦게 일어났다.
"세억아, 빨리 일어나서 학교 가야지."
벽력같은 아버지의 소리다.
겨우 눈을 뜨고 시계를 보니 7시 15분.
일어나자마자 밥상이 들어온다. 이불은 세란이가 대신 개었고, 나는 빨리 세수를 하고 밥 먹을 준비를 하였다.
밥맛이 없었다. 세란이는 벌써 학교에 가고 있었다.
나도 서둘러 책가방을 챙겨 학교로 뛰어갔다. 다른 아이들은 벌써 모두 학교에 와있었다.
아침자습 문제를 풀려니까 아침자습 공책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숙제장에 했다.
그 외에도 국어 공책, 삼각자 등 몇 가지를 집에 두고 왔다.
오늘 일로써 배운 점이 왔다. 책가방은 가능하면 저녁에 자기 전에 챙겨야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늦게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한편, 오늘 같은 경험을 해 보는 것도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닌 것 같다. 늦게 일어난 대가로 오늘 같은 어려움을 한 번 당해 보아야 앞으로 더 착하고, 충실한 어린이가 되지않나 생각한다.
1978년 11월 9일 목요일
그 동안 정들었던 서울형이 간다고 했다.
아침 버스를 타고 떠난다고 한다.
어머니는 아침에 특별히 집에서 기른 닭을 잡아 닭국을 만들었다. 형은 우리 집에서 먹는 마지막 식사라고 밥을 많이 먹었다.
반면 나는 밥이 넘어가질 않는다. 여태까지 산으로 들로 같이 놀러 다니던 일을 생각하니 더욱 헤어지기가 싫었다.
나는 형이 떠나는 것도 보지 못하고 학교로 가야 했다. 나오는 눈물을 숨기고 가방을 들고 집을 나왔다.
'형, 잘 가. 그리고 다음에 또 와.'
이렇게 마음속으로만 외칠 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집은 텅텅 빈 것만 같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벌써 오니?', '오늘은 늦었구나' 하는 말들을 듣게 되는데, 오늘은 아무도 없었다.
가방을 방에 집어던지고, 형이 사용하던 방으로 가니 책상 위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세억아, 여기에 사 둔 공책과 연습지로 공부 열심히 해서 나중에 대학은 서울로 오도록! 광수형』[1]
형은 새 공책 10권과 연습지 200장 정도를 사놓고 갔다.
또 눈물이 나왔다.
이제는 서울형과 즐겁게 놀던 때를 잊어버리고, 형의 뜻대로 공부를 열심히 해야지.
[1] 요즘도 그렇지만, 큰 고모의 셋째 아들인 광수형은 진짜 마음이 여자같이 곱고 착한 사람이었다. 이 일기처럼 내가 진짜 대학을 서울에서 다니게 되자 1년 동안 고모님 댁에서 광수형과 함께 방을 썼다.
1978년 11월 10일 금요일
학교에서 돌아오니 마당에 무우와 배추가 가득 쌓여 있었다.
특히 무우는 굉장히 크고, 싱싱하였다.
"엄마, 마당에 있는 무우는 웬 거야?"
"지금 아버지께서 들에서 실어 나르고 있잖아."
"그럼 우리 거란 말이야?"
"그렇다니깐."
어머니께서는 칼로 맛있게 보이는 무우를 하나 깎아서 먹어 보라고 하셨다. 싱싱하고 매우 맛있었다.
이 일기장을 보니, 8월 11일 날 무우와 배추를 뿌렸는데, 그때만 해도 '이런 작은 씨가 언제 큰 무우가 될까?' 했는데 지금 이렇게 큰 무우를 만져보니 대견스럽다. 부모님께서 씨를 뿌린 후 정성스럽게 잘 가꾼 결과다.
"세억아, 너도 빨리 물 건너 들에 가 봐라."
난 자전거를 타고 빨리 들로 향했다. 내가 강을 건너기도 전에 아버지께서는 벌써 무우와 배추를 다 뽑아서 소 수레에 싣고 강을 건너고 계셨다.
"세억이 너 마침 잘 왔다. 마지막이라고 가득 실었더니 소가 힘이 드는가 보구나. 저 오르막에 올라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뒤에서 좀 밀어라."
드디어 오르막이다. 소는 순해서 아버지께서 고삐를 놓았는데도 그냥 앞으로만 계속 스스로 길을 잡아가고, 나와 아버지는 뒤에서 힘껏 밀었다."
겨우 겨우 다 올라온 아버지께서는 빙그레 웃으셨다.
1978년 11월 11일 토요일
우리 집에도 드디어 TV가 생겼다.
오후 때의 일이다.
학교에서 돌아와 점심을 먹고 있는데, 밖에서 차 소리가 났다.
"부르릉- 부릉 빵빵-."
좀 있으니까 차가 우리 집으로 들어왔다. 금성 안계 TV 센터에서 온 용달차다. 뒤에는 TV가 한 대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우리 집에는 TV를 신청한 적이 없는데요. 혹시 길을 잘못 오신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여기가 샘 근처의 집중에서 대문이 있는 집 아닙니까? 잠깐만요, 장지용씨 댁이 맞지요?"
알고 보니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아무 말도 없으시던 아버지께서 안계장에 갔다가 그냥 한 대 사버린 것 같았다. 그래도 어머니께서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셨다.
아무래도 나는 좋기만 하였다.
한 아저씨는 지붕에 올라가서 안테나를 세우고, 한 아저씨는 방에서 TV 선줄을 연결하셨다. 그때서야 아버지께서는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들어오셨다.
"이 사람들 벌써 안테나 다 세웠네."
"예, 아저씨는 어찌 그리 느리십니까?"
"당신들도 자전거를 타고 20리 길을 와보시오."
하며 아버지와 두 아저씨는 인사를 주고받는다.
잠시 후 아저씨들은 돌아가시고, TV는 매우 맑고 선명하게 나왔다.
"나중에 칼라텔레비[1]가 나오면 사려고 했는데, 장에 간 김에 돈도 있고 해서 한 대 샀어요."
아버지께서는 할머니께 이렇게 말씀하셨다.
TV 때문에 앞으로 공부에 지장이 올지도 모르지만, 도리어 공부에 도움이 되도록 TV를 잘 이용해야겠다.
[1] 이렇게 적기는 했어도, 당시에 나는 칼라TV가 어떤 종류의 TV인지 몰랐다.
1978년 11월 12일 일요일
모처럼 맞은 휴일이다.
아침부터 바람이 세게 불더니만, 오후부터는 가랑비가 온다.
비가 와서 밖에는 못 나가고, 할 수 없이 방에서 공부를 할 수밖에 없다.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께서는 큰방에서 TV를 보고 계신다.
나는 TV도 재미가 없어서 작은방으로 가서 숙제를 했다. 꾸준히 앉아서 하니까 그 많은 숙제도 잠깐이다.
가을 늦게 오는 비는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온 동네 사람들이 가을 추수를 끝냈을 때, 비는 동네 사람들을 쉬게 하려고 내려온다. 비가 오지 않는다면 동네 사람들은 남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무엇을 해도 할 것이다. 비가 오니까 할 수 없이 동네 사람들은 쉬게 되는 것이다.
이제 내일은 추워질 것이다.
벌써 입동이 지나 갔는데, 작년에도 내가 유심히 살펴 본 것인데 가을비가 내리고 나니까 다음 날부터는 날씨가 굉장히 추워졌다.
정말 비는 사람들에게 이로움도 주고 괴로움도 주는 심술꾸러기인 것 같다.
1978년 11월 13일 월요일
우리 반에서는 월요일은 국기 게양식을 하고, 토요일에 국기 하강식을 한다.
오늘도 월요일인 만큼 당번인 동구와 유규가 국기 게양식을 시작했다.
유규는 국기를 올리고, 동구는 먼저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고 나서 애국가를 제창하도록 했다.
애국가를 부르는 도중에 진달이와 태영이가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애국가를 부르는 중이라 충고 한마디 못 주고 계속 애국가를 불러야 했다. 애국가가 끝나자 누군가 간단한 충고를 주었다.
"진달이, 태영이 너희들은 왜 국기 게양식을 하는 도중에 싸움만 해. 선생님이 안 계시니까 그러지?"
나도 긴 충고를 주고 싶었으나 참았다. 선생님께 들키면 나는 칭찬을 듣지만 그래도 친한 친구인 진달이와 태영이는 애국심이 부족하다고 꾸중을 듣기 때문이다.
아니나다를까 잠시 후 선생님께서 교실로 들어오셨다. 선생님께서는 칠판 왼쪽에 꽂힌 태극기를 보시며
"태극기 게양식 하면서 진지하게 했지?"
"예."
모두들 한 사람도 안 빼고 큰 소리로 "예" 하고 대답하였다.
알고 보면, 우리들은 친구의 행동이 미워도 위기에 처했을 때는 친구를 위하는 마음이 있는 것 같다.
1978년 11월 14일 화요일
지난 토요일까지는 '장기' 시간표를 사용했지만, 월요일부터는 '단기' 시간표를 사용해서 수업 시간이 줄어들었다.[1]
선생님께서는
"오늘은 날씨도 추운데, 시간표대로 4시간만 하자."
"야! 신난다."
아이들은 모두 좋다고 춤을 춘다.
4교시가 끝나니 진짜로 선생님께서는
"어제 낸 숙제 검사를 하겠다."
하시며 나에게 도장을 주셨다. 나는 아이들의 숙제장에 검사 도장을 다 찍고, 아이들이 나의 구령을 기다릴 때
"차례! 경례!"
하고 인사를 하였다.
우리들은 너무나 기분이 좋아서 배도 고프지 않았다. 모두들 추운데 축구나 한 판 하자고 하였다. 나도 쾌히 승낙했다. 조금만 했는데도 땀이 굉장하였다.
토요일처럼 오전에 수업을 다 끝내고 집에 일찍 가는 날이 일주일에 한 번씩만 있어도 아이들의 사기는 더 높아지겠다고 생각했다.
부디 다음주에도 선생님의 마음이 변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1] 해가 긴 여름철에 사용하는 '장기' 시간표와 해가 짧은 겨울철에 사용하는 '단기' 시간표가 있어서 철마다 수업량이 달랐다. 단기 시간표가 적용될 때는 수업량이 적었으나, 실제로는 시간표 상의 수업이 끝나도 선생님께서는 아이들을 집으로 보내지 않고 두 세시간씩 공부를 더 가르치거나 자습을 시켰다. 집에 일찍 보내봐야 농사일을 거들거나 산으로 들로 놀러 다닌다고 공부를 전혀 안한다는 것을 잘 아시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그것이 그렇게도 싫었으나, 지금 생각해 보면 시골
선생님들의 그런 열정들이 있었기에 열악한 환경에서도 훌륭한 교육이 된 것 같다.
1978년 11월 15일 수요일
요즘 들어 송아지가 마른 것 같다. 털에 윤기가 없었다. 기후 때문인지 영향 부족인지 영 이유를 모르겠다.
"세억아, 저녁 소죽 퍼주어라."
"예."
오늘은 반드시 내가 소죽을 퍼주겠다고 생각했다.
솥 뚜껑을 열어보니 소죽에 볏짚밖에 보이지가 않았다. 곡식 알맹이나 쌀겨를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그러니 송아지가 살이 없지.
나는 여물통에서 쌀겨를 두 바가지나 퍼서 솥에 넣고 다시 소죽을 섞었다. 그 후에 큰소에게는 소죽을 두 바개스 퍼서 갖다주고, 송아지의 소죽에는 다시 쌀겨를 한 바가지 더 넣어 한 바개스 퍼다 주었다.
나중에 보니 송아지가 소죽을 깨끗하게 다 먹어 버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송아지는 매일 소죽을 남겼다. 큰소도 마찬가지였다. 송아지와
엄마소가 나란히 앉아서 되새김질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마음이 흐뭇하였다.
이제 확실히 알았다. 우리 송아지가 살이 찌지 않는 것은 영양부족이다. 볏짚에 쌀겨나 곡식들을 섞어 먹여야 송아지가 맛있게 먹는데…….
송아지는 비록 짐승이지만 내 은혜를 알았다는 듯 혀를 내밀어 내 손바닥을 핥았다.
1978년 11월 16일 목요일
4교시를 마치고 집에 점심을 먹으러 왔다. 집으로 뛰어 들어오면서
"엄마, 밥 줘요."
"……."
대답이 없었다. 집안이 조용하였다.
엄마도 없고, 할머니도 없었다. 이리 찾아도 없고, 저리 찾아도 없다.
하는 수 없이 부엌의 솥에 가서 내가 밥을 찾아 먹어야만 했다.[1]
데우지 않아서 밥이 차다. 그러나 귀찮아서 그냥 데우지도 않고 찬밥으로 배추 쌈을 쌌다.
차운밥이라도 맛이 있었다.
밥을 다 먹어치우고 나니, 어머니께서 머리에 나뭇보따리를 이고 들어오셨다.
"엄마가 없어서 많이 찾았어."
하며 엄마가 원망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산에 나무하러 가서 오늘은 늦었는가 보구나. 자, 빨리 밥 먹자. 빨리 먹고 학교 가야지."
"나는 벌써 먹었어요. 학교에 갔다 올께요."
나는 더 이상 아무 불평없이 그냥 학교로 갔다. 엄마는 힘들게 나무를 해왔는데 밥을 안 차려 준다고 내가 불평을 하면 엄마가 더 힘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오늘 나의 행동은 퍽 잘한 일인 것 같다.
[1] 당시에는 보온 밥통이 없었고, 어른들이 들에 간 사이에 배가 고프면 찾아먹으라고 어머니는 항상 부엌의 가마솥 안에 여분의 밥을 담아 놓으셨다.
1978년 11월 17일 금요일
저녁에 충청도에 사시는 고모님이 오셨다. 고모부와 미정이, 종민이도 왔다.
고모부는 보은에서 여기까지 계속 오토바이를 타고 오셨고, 고모와 애들은 버스를 타고 오다가 단밀에서부터는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왔다고 한다.
"고모야, 애들 많이 컸네."
"뭘 많이 커. 아직 조그만 하지."
이렇게 고모와 인사를 했다.
저녁에는 세열이 아버지, 세명이 아버지께서도 우리 집에 오셔서 고모부와 함께 술을 드셨다. 우리들은 고모와 함께 사 온 과자를 맛있게 먹으면서 재미나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고모, 가을철 일은 끝냈어?"
"그래, 이제는 벼 공판만 내면 된다."
그리고, 고모님께서 여기 오신 용무는 11월 19일 일요일날 풍양에 있는 큰집 고모 할머니네 환갑 잔치에 놀러가기 위해서이다.
미정이와 종민이는 올해초에 우리를 본 적이 있었지만, 또 얼굴이 익숙하지 않은 듯 우리들의 눈치만 살피면서 얘기를 하지 않는다.
내일만 가면 금방 우리와 친해질 것이다.
1978년 11월 18일 토요일
산에 나무하러 갔다. 나 혼자 간 것이 아니고, 우리 학교 전교생이 월동 준비를 하기 위해서 나무하러 갔다. 아침에 등교할 때 톱을 준비했다.[1]
원래는 1교시부터 전교생이 다 갈 예정이었으나, 안개가 너무 심하여 1교시를 마치고 3, 4, 5, 6학년만 갔다.
나는 5학년 세봉이, 준호와 함께 다니면서 나무를 베었다. 물론 죽은 나무만 베었다. 금방 목표량인 썩은 나무 하나씩을 했다. 다시 학교로 돌아오기 위해 산을 내려오는데 갑자기 막내 세호 생각이 났다.
'나무로 눈썰매를 만들어 주면 올 겨울에 잘 보내겠다.'
앞은 구부러지고 나머지는 곧아서 눈썰매를 만들기에 적당한 나무 두 개를 베었다. 그 나무는 살아있는 나무다.
학교에 도착하자 그 두 개의 나무는 숨겨 놓고, 월동 준비 나무만 모으는 곳에 두었다. 그 후 집에 올 때는 아까 숨겨놓은 두 개의 나무를 가지고 왔다.
집에 와서 그것을 가지고 세호에게 썰매를 만들어 주니, 세호는 좋아라 날뛰었다.
내가 살아있는 나무를 자른 것이 미안했으나, 세호가 좋아하는 것을 보니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1] 늦가을부터는 겨울 동안 교실 난로에 사용할 장작을 구하러 전교생이 수업을 하지 않고 산으로 나무를 하러갔다. 이런 행사는 봄까지 이어지는데, 대개 겨울을 다 보내기 위해서는 4∼5번 정도 산으로 출동해야 했다. 당시에 시골 학교에 교실 난방용으로는 연탄이 지급되지 않았다.
1978년 11월 19일 일요일
오후 12시 15분에 TV에서 '일요초대석'을 보았다.
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어떤 한 여자가 북한에서 넘어오는 도중에 아기를 낳았는데, 아기는 나오자마자 죽었다. 비가 너무 와서 아기를 물에 묻어야했다. 잠시 후 지쳐서 쓰러졌다. 그러나 어느 장교에게 발견되어 곧 치료를 받았다.
그 여자는 고아원의 한 직업인으로 일해 고아들과 일생을 보내야겠다고 결심했다. 고아원에는 몇몇 나쁜 아이들이 있어 다른 아이들은 꼼짝도 못했다. 그 아이들은 그 여자가 밉다며 방에 뱀을 던지는가 하면, 또 수류탄을 던져 그 여자가 부상까지 입게 하였다.
그러나 그 여자는 '언젠가는 내 뜻을 알겠지' 하며 참아 온 결과 드디어 애들과 친하게 되었다.』
정말 나는 이 영화가 재미났다. 내가 글로는 다 표현을 못해서 그렇지 직접 본 사람은 모두 감명을 받았을 것이다.
다음에 또 이 영화가 한 번 더 나왔으면 좋겠다.
1978년 11월 20일 월요일
오늘로서 이 일기장도 막을 내린다.
작년 5학년 때 5월 8일 날 어린이날 기념 체육대회를 할 때 교육장님으로부터 받은 상이 지금까지 나의 하루하루와 함께 살아 온 것이다.
때로는 일기장이 너무 두꺼워 짜증을 냈던 적도 있었다. 그래도 지금 쭉 넘겨보니 그런 대로 꾸준하게는 써 온 것 같다. 이렇게 꾸준하게 써 온 원동력은 선생님 때문이었을 것이다. 4학년 때 류성우 선생님부터는 일기를 매일 검사했기 때문이다. 특히 지금은 우리 학교에 안 계시지만 5학년 때 신상환 선생님은 정말 질리도록 일기를 강요하셨다. 물론 6학년이 되어서도 지금 신기중 선생님도 일기검사는 꼬박 꼬박 하셨다. 그 때는 일기를 매일 쓰라고 한 것이 싫었는데, 지금 일기장을 보니까 가슴이 뿌듯하다.
이 페이지가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어쩐지 슬프다. 이런 공책과도 인연이 있단 말인가? 사실 정이 들만큼 들었다. 외갓집에 갈 때도 싸들고 가고, 내가 가는 곳에는 항상 따라다녔다.
정말 이 일기장이야말로 매우 가치가 있는 것이다.
내가 살아있을 때까지 보전하겠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 이 일기를 보면 대개 재미날 것이다. 우리 아버지처럼 내가 나를 보고 "그 놈 참 말썽꾸러기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