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비워도 될 형편이 아니라는 걸 매번 깜빡하고는 늘 마음만 여기도 가고 싶고 저기도 가고 싶고 해서 글은 잘 올려 놓지요.
가자고 해 놓고 펑크만 내니까 미안한 마음에 '그래, 이번에는 가자'...아침에 비가 꽤 와서 또 마음이 흔들리더군요. 대학생 딸은 혼자 있는 게 재미없으니까 가지 말라고 하고...
가는 쪽으로 마음을 먹고 준비를 해서 오전에 있는 일어회화 초급반 지도하러 집을 나설 때는 빗줄기가 많이 가늘어져 그나마 다행이었지요.
청량리역에 가기는 생전 처음이라 안국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가다 보니 집에서 출발하기 전 지하철 안내도에서 확인한 대로 청량리역이 지상과 지하 두 군데라서 학생들에게 물어 보니 잘 모르더라구요. 옆에서 내 말을 들고 있던 딴 사람이 열차를 타려면 지상으로 가야 한다고...참, 바보죠? 아직까지 우리나라는 열차를 지상에서 타잖아요? 조그만 생각해 보면 될 걸...
롯데백화점의 롯데리아 앞에서 조금 기다리니 '작은산'과 5살 난 딸 오름이가 나타났습니다.
부랴부랴 마지막 남은 자리 3석을 겨우 예약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난 홀로 떨어져서 중년의 남자분과 같이 앉아 갔습니다. 그 분은 나보다 먼저 창측에 타고 있었는데 계속 두꺼운 책을 읽고 있더군요. 아무 것도 읽을거리를 챙겨 오지 않은 내가 좀...할 수 없죠. 아직도 여행갈 때 책을 챙겨서 가는 데까지는 버릇이 되어 있지 않으니까.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방학 때 친정 갈 때는 넣어가서 읽기도 했지만...이젠 눈이 침침해져서 아주 밝은 햇빛이 비치는 곳이 아니면 책 읽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답니다.
날씨 탓이었는지 열차 타면 흔히들 그러긴 하지만, 아님 그 전날 잠을 설쳤는지 좀 졸다가 표 검사하는 승무원이 잠을 깨운 셈이 되었죠. 그러자 옆엣 분이 자기는 책을 읽으면 된다면서 창가쪽을 양보해 주셨습니다. 덕분에 양평의 푸른 경치와...물가을 지나다 넙덕한 것들이 한 데 모여서 펄럭이고 있어서 언뜻 보기에는 철새들이 모여 있나 생각도 했지만...완전히 흰색이 아니라 은녹색이라고 할까 아뭏든 바람에 뒤집어졌다 바로 됐다 하면서 특이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는데 그 근처에 여기 저기 좀 있더라구요. 그게 토란이라는 건 나중에 확인했지만...이름 모르는 역의 우리 토종꽃 같이 여겨지는 꽃들, 특히 어릴 때 많이 봤던 맨드라미, 봉숭아를 보면서 영월에 도착했습니다. 열차 안에서 보기에는 그다지 비가 세게 내리고 있지 않은 것 같았는데 정작 내리니까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일회용 비닐 비옷을 꺼내 입고 동강보존본부 사무국장님이 나와 계시는 갤로퍼에 타고 사무실에 들러 거기 와 있는 분들과 함께 민박집으로 갔습니다. 처음 만나 서먹서먹한 분위기가 싫어서 말을 많이 걸다 보니까 바깥은 쳐다보지 못해서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네요.
전 동강투쟁위원회 부위원장으로 계셨던 분이 하시는 민박집이었는데 툇마루에 앉으니 바로 마당 가운데 있는 밤나무가 밤송이를 주렁주렁 달고 세게 부는 바람에 흔들흔들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작은산'은 너무 잘 왔다고, 오름이에게 이것 저것 설명하면서 신나했습니다. 바람에 떨어진 밤송이를 발로 깨서 건네주는 밤을 먹었는데 하얘서 깐 줄 알고 그냥 입으로 넣었는데 질긴 게 씹혀서...그게 아직 덜 익어 껍질색이 갈색으로 변하지 않아서 그런 거였어요. 그래도 먹을 만했어요.
민박집에 도착하자 얼마 안되어 걸려 온 전화 한 통화로 마음이 아주 좋지 않았습니다. 전세 사는 사람이 강풍에 베란다 유리가 깨졌고, 또 그 깨진 유리가 11층에서 떨어져 남의 차에 흠집을 냈다고 조치를 하라는 전화였는데... 오래 전세 살면서 그런 일이 생길 때마다 큰 목소리로 일을 성사시킨 경험에서 나오는듯한 말투로 따다다다 쏴대는... 진짜 싫다, 처음서부터 얼굴 보는 것도 싫은 그 여편네가 전화하고 난 뒤로는 영 마음이 온통...모처럼 마음내서 동강까지 왔는데...내 마음의 평온함과 여기 동강가 시골 마을의 정취를 느낄려고 애쓰면서 그 여편네 목소리건은 내 마음에서 내려 놓기로 결심했습니다.
사무국장은 어린 아이를 보면 꼭 무슨 말을 걸면서 뺨을 어루만져 주기고 하는 것이 사람이 아주 좋아 보였습니다. 환경운동연합에서 일하면서 느낀 게 총각들이 아이들을 참 좋아하더라구요. 우리 사무실에서도 그런데 여기 사무국장도, 또 내셔널 트러스트 간사들도 그렇구요. 보통 남자들이 아이 귀여워하지 않잖아요? 난 그렇게 알았는데...그래서 그걸 일반사람하고 시민단체 일하는 사람하고의 차이라고 여기고 있는 거죠.
우리 밖에 오지 않은 건 아닌가 했는데 한 스무 명의 사람들이 모여 8시 30분을 넘어서야 아주 늦은 저녁을 먹었습니다. 돼지고기 철판구이용 화덕이 잘 준비되어 있어 시골 작은 방에 앉아 편하게 청년들이 막 구워 들여 보내 주는 삽겹살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남이 해 주니까 더 맛있더라구요. 이젠 먹기도 싫고 하기도 싫은 그런 나이니까요. 청년들은 지붕이 있는 평상 위에서 밥을 먹었는데 그 다음 날 보니 거기가 시골풍 야외 식당이었어요. 아침을 거기서 먹었거든요.
저녁을 먹고 큰 방에 모여 동강보존본부의 앞날에 대해 여러가지 의견들을 주고 받으며 12시 넘게 있었는데 그날 따라 잘 아프지도 않던 뒷머리가 아프고 잠이 쏟아지는 걸 아닌 척 할려니까 꽤 고통스러웠어요.
회의가 끝나고 으례껀 술자리가 있게 마련이죠. '작은산'은 거기 끼워 아침 6시까지 깨워 있었대요. 역시 젊음이 좋긴 좋나 봅니다. 그 다음 날 느낀 거지만 '작은산'은 많이 늦은 아침을 먹을 때 보니까 옆엣 사람도 잘 챙겨 주고 생긴 것 하고는 달리 사람도 잘 사귀더라구요. 엄마가 그래서 그런지 오름이도 낯을 가리지 않고 처음 만난 사람하고도 금방 말 걸고 친구하더라구요.
끽소리 없이 아침 7시까지 자고 눈이 떠져 화장실을 가니 문이 잠겨 있었어요. 영문을 몰라 돌아 나오는데 손 흥기님이 세면실에서 나오면서 울이 안 나온다고 하셨어요.
하릴없이 툇마루에 앉으니 눈앞에 누우런 동강이 큰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습니다. 사무국장님이 뻥대라고 가르쳐 준 절벽이 바로 방에서 나오면 눈앞에 펼쳐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했고 여기 사는 사람들은 복 받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손 흥기님만 왔다갔다 할 뿐 강물소리 빼고는 바람소리도 잠잠했고 한적한 강촌의 시골의 일요일 아침이었습니다. 방으로 다시 들어가 누워도 봤지만 소변이 급해서 이리저리 찾다가 집 옆을 도니 와, 탁트인 넓은 고추밭이 장관이었습니다.
부위원장님 부인이 마당에 계시길래 세면실 물이 안 나오고 화장실 문이 잠겼다고 했더니 수도가 끊겨서 잠궜으니 재래식 변소를 사용하라고 하시면서 아침밥도 못한다고, 길이 끊겨 나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10년 만이라나요.
걱정이 되고 딱히 할 거리도 없어 시골풍 야외 식당인 평상에 앉아 있으니 손 흥기님이 고기 잡으러 가자고 해서 따라 갔습니다만 마음은 온통 서울가야 하는데...내일은 조회가 있고, 모레는 영어회화 공부 첫모임이고 합창단 개학하고 밤에는 일어회화 가르쳐야 하고...
전날 밤에는 물이 불어 거기까지 찼다는 강가에서 고기잡이 하는 남자가 있어 처음으로 황쏘가리가 천연기념물로 잡다 걸리면 3백 만원 물어야 한다는 것과 동강에서 레프팅하면 머지 않아 황쏘가리가 멸종할 거라는 설명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레프팅을 안 할 수도 없으니까 어젯밤 손 흥기님 말씀대로 레프팅 인원수를 줄이고 횟수도 제한적으로 할 수 밖에 없죠. 샌달이라 고기잡는 우리 일행들에 끼어 강가 진흙땅에 내려가지는 못하고 아스팔트 차길을 따라 조금 걷다가 걱정이 돼서 그냥 돌아 왔습니다.
고기잡이 갔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고 그 사이 부위원장님 부인은 노란 물통에 받아 둔 물로 아침밥을 하고.
손 흥기님이 다음카페 주소를 물으시면서 합창단을 내린천환경예술제에 초청하고 싶다고, 교통비와 숙박비 정도의 경비는 부담할 수 있다면서 꼭 내년에 오라고 하셨습니다. 서툴지만 문학에 마음이 많은 나로서는 시 쓰시는 손 흥기님을 알게 된 것이 아주 기뻤지만 합창단이 부실하고 잘 운영이 되지 않아 설 무대는 많은데 그걸 놓치고 있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습니다. 내 맘같지 않으니까...
물이 불면 고기들이 강가로 몰린다면서 강가에서 그물 던져서 그래도 꽤 많이 잡아온 고기 구경을 하라고 부위원장님이 불러서 가서 고기 공부를 했습니다.말로만 드던 어름치, 쉬리 등 비슷비슷하게 조그만 멸치 같은 것들이라 한꺼번에 걔네들을 제 머리속에 집어 넣기에는 제가 너무 도회적이어서 몸에 그려져 있던 무늬가 예뻤던 어름치만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무국장이 프로그램 진행을 시킬 생각은 않고 사람좋게스리 어죽을 끓인다고 손질을 하고 있는 사무국장을 보고 '작은산'이 다른 프로그램을 하자고 하여 슬라이드를 볼려고 했지만 전기가 끊긴 걸 깜빡 잊고...어죽을 먹고 출발할려면 또 시간이 한참이나 걸릴 것 같아 그냥 영월시내 동강보존 본부 사무실로 가서 슬라이드를 보기고 하고 떠났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천문대쪽으로 해서 비포장 산길을 내려가야 했는데 승용차는 포기하고 되돌아가고 사무국장이 모는 갤로퍼에 옮겨 타고 무사히 영월 사무실에 도착했습니다.
머그 커피잔도 넉넉치 않아 10명도 채 되지 않는 손님에게 한꺼번에 커피를 낼 수가 없는 살림을 살고 있었지만 사무국장이 찍은 슬라이드는 아주 일품이었습니다. 날씨로 해서, 개인적인 사정으로 해서 많이 손상된 동강 나들이였지만 이 슬라이드로 마무리를 잘 짓게 되어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이 슬라이드에서 괜찮은 직장을 버리고 동강을 위해 6,7년을 살아온 노총각 엄 삼용 사무국장의 동강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이메일 주소가 samyong@nownuri.net이긴 했지만 진짜 이름도 삼용이더라구요.
동강가의 부위원장님 댁 툇마루가 있고 창호지 여닫이 고리문이 있는 방에서 다시 산골 강가의 하루를 느끼러 다시 갈게요. 아름다운 동강,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