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강의
■1.머리말
인생에는 그냥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주어진 길이란 없다. 늘 갈림길에 선다. 이때마다 고민스럽고 불안하고 두렵다. 인생길은 누구에게나 처음이니까. 이 고민과 불안과 두려움이 쌓이고 쌓인 것이 인문학이다.
문학. 역사. 철학으로 대표되는 인문학은 이 고뇌하는 인간이 바로 주체이자 소재 인간다운 삶을 추구했던 모든 선인들의 지혜와 경험이 모여 있다. 내가 누구인지, 어디로 향해 가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번민하는 이들에게 인문학은 나침반과 같다.
인문학 공부는 전통적인 공부 방법인 읽기, 쓰기, 말하기, 듣기를 스스로 실천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통해 동서양의 고전이나 이야기 속에 담긴 지혜를 익히면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또한 성인들에게도 자아 존중감이 생겨나 일탈의 유혹에 휘둘리지 않고,
좋지 않은 경험과 기억에서 오는 고통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물론 인문학은 그 성과를 수치로 증명할 수 있는 학문은 아니며, 생활에서 곧바로 써먹을 수 있는 즉효약은 더욱 아니다.
인문학은 스스로 인생의 의미를 찾아가도록 이끌어 주므로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그 가치가 빛난다. 인간을 단순히 휴먼(Human)이 아니라 휴먼-빙(Human-being)이라고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 있다.
요즘 물질은 넘쳐나고 인간의 수명은 해마다 늘어난다. 그러나 삶은 더욱 메마르고 소외되어 존재감과 자아 존중감을 상실하고 고통스럽게 사는 사람도 늘어난다. 인간은 단순히 생물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 의미를 가질 때에야 행복감을 느끼며 살고 싶은 이들에게 주는 선물 보따리인 셈이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아 성찰에서 시작하여 다른 나인 ‘너’와의 관계를 고민하면서 올바른 관계 맺기와 소통을 통해 내 꿈을 만들어 가며 동시에 우리의 꿈을 함께 이루어 가는 데 도움이 되는 내용들이다.
행복을 꿈꾸는 모든 이들의 꿈집이 점점 커져, 향기로운 생각들로 이 세상이 가득 차길 소망한다. “꿈집”을 만드는 인문학교에서 김호연. 유강하 적음
■2. 인문학은 행복학!
마이크로소프트의 설립자 빌 게이츠는 “인문학이 없었더라면 나도 없고 컴퓨터도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도대체 컴퓨터와 인문학이 무슨 관계가 있기에 이런 말을 했을까. 아마도 인문학적 상상력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거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면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인문학은 영어로 휴머니티(humanity)라고 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인간성. 인간적인 것을 탐구하는 학문을 말한다. 인간의 삶과 그 터전인 세계의 보편적인 가치와 진리를 탐구하니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된다.
문학. 역사. 철학을 중심으로 종교학. 미학. 고고학. 민속학 등이 인문학에 포함된다. 궁극적으로 인간의 정신을 성장시키고 인간의 존엄성을 고양하는 것을 본질로 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인문학은 인간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다.
오늘날 사회는 ‘상업주의’와 ‘효율’을 최우선적으로 강조한다. ‘결과’를 중시하고 돈으로 치환되는 ‘실용성’을 앞세운다. 모든 것을 계량화하고 기계적으로 평가하려 한다. 단기간에 어떤 목표를 달성하려는 데 급급하다.
이런 현상은 우리의 주체성과 자율성을 앗아가고 우리를 단순한 부속품으로 만든다. 또한 우리 사회의 정신과 문화를 황폐화하게 만든다. 이는 인문학의 정신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현상이다. 지금 인문학이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것도 바로 이 까닭이다.
인문학은 단기간에 눈에 보이는 결과를 내거나 당장 실용적인 결과를 보여줄 수 있는 학문이 아니다. 오랜 기간 숙성하여 무르익어야 제 맛을 낼 수 있다.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어떻게 단기간에 이루어질 수 있으며 ‘정답’이 나올 수 있겠는가.
예를 들어 고대 철학자들이 던진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지속된다는 사실은 인간 삶에 대한 고민과 방향 모색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본질과 문제를 안고 있다는 걸 잘 말해 주고 있다.
인문학은 느림의 미학이 적용되는 학문이다. 최근에 우리 사회가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진 것이 사실이지만, 더 풍요로워진 삶이 우리 정신의 평온함까지 담보해 주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육체적인 편안만을 지향하는 것이 아닐진대 우리의 정신과 마음,
삶의 현장 곳곳을 돌아보고 가장 인간다운 삶, 행복한 삶이 어떤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역사적 사실을 아는 것도 필요하고 이를 해석하는 역사적 안목과 철학적 방향도 필요하다.
이 세상의 주체로서 언제든 무한한 변화가 가능한 ‘희망체’로서 진정 인간답게 행복하게 사는 것이야 말로 인문학이 추구하는 가치이며, 또한 인문학교가 지향하는 목표이다. 이것이 인문학을 우리가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 비타민이라고 말하는 까닭이다.
■3. 꿈집을 만드는 인문학교
“꿈집을 만드는 인문학교”는 초등학교 어린이를 비릇하여, 중.고등학교를 비릇하여, 중고등학생. 일반인까지를 대상으로 한 ‘지속 가능한 행복’을 만드는 공간이자 ‘모든 것의 치유’를 추구하는 일종의 ‘삶 치유’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멀티플렉스 공간이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할 경우, 참여 학생들에게 인문학적인 가치를 심어 주는 동시에, 인간답게 사는 것의 의미, 행복하게 사는 것의 의미를 스스로 모색하는 것을 최우선의 목표로 삼고 있다.
학생들이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입시’라는 단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나아가다 보면 학교 공부 외의 다른 것들은 무시되기 쉽다. 경쟁적 사회 분위기에서 내 희망이 무엇인지, 또 그 희망이 과연 내 것인지도 고민할 여유도 없다.
대부분은 어른들이 생각하거나 제시하는 희망. 다시 말해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나 부의 축적과 연관된 것이 많다. 공유하는 이유가 더 좋은 학교에 진학해 더 좋은 교육을 받기 위해서고, 그 궁극저인 지향점이 사회적 성공에만 초점이 맞추어 있다면,
지식은 많아도 인간 존재와 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안목은 결여될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실존적 위기를 겪거나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재를 길러내게 된다. 만일 더 많은 공부, 더 좋은 교육, 더 나은 사회적 지위 등이 ‘더 좋은 삶’을 살기 위해서라면,
양적으로만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의 접근도 필요하다. 이런 견지에서 단순히 암기 학습이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의 접근도 필요하다. 이런 견지에서 단순히 암기 학습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함으로써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더 나아가 그것을 삶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인문학교 프로그램 취지이다.
이는 ‘더 좋은 삶’에 대한 올곧은 이해는 물론이고, 학생 스스로 자신의 삶을 슬기롭게 개척해 갈 수 있는 정신적 자양분을 제공해 줌으로써, 자신의 꿈과 희망을 스스로의 삶과 사회의 연관 속에서 실현하는 중요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4. 관계와 소통은 행복한 삶의 출발점
인문학의 초점은 ‘사람’이다. 사람을 정의하는 방식은 각자의 관심에 따라 다르겠지만, 가장 일반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다. 그렇기에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포착한 인간의 특징,
곧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정의는 현재도 여전하게 통용되고 있다. 즉 인간이란 존재는 모름지기 또 다른 나인 ‘너’라는 존재와 한데 어울려 그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이해하게 되며, 삶의 의미도 그 사이에서 찾게 된다.
따라서 누구라도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다른 존재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관건이 된다. 그런데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생활이 점차 편리해지면서 많은 사람들은 합리성과 실용성을 삶의 중요한 덕목으로 꼽기 시작했고,
이와 더불어 세상에서는 ‘우리’보다는 개개인의 존재가 부각되고, ‘개성이 곧 미덕’이라는 흐름이 강해졌다. 이제 남과 같은 것, 남과 비슷한 것은 꿈이 비슷한 것은 꿈이 작은 사람 또는 허섭스레기 같은 존재라는 인식이 커져만 갔다.
이런 분위기가 개개인의 발전에는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은 오히려 증가하였다. 개개인 서로 간에 소통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사람과 사람을 언제든 편하게 연결해 줄 수 있는 다양한 정보 통신 장비들이 등장하고 있지만,
오히려 사람들은 외로움을 더 크게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소원한 인간관계가 불러온 마음과 정신의 고통은 사람들을 더욱 힘든 수렁으로 내몰리기도 한다. 인간 수명은 의학의 눈부신 발전으로 이전에 비할 수 없이 연장되었지만,
오리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증가하는 현실은 이런 어두운 측면을 잘 보여 주는 것이 아닐까. 최근 현대인들이 앓고 있는 가장 커다란 병 가운데 하나는 ‘관계’의 깨짐과 그로 인한 ‘소통’의 부재에서 오는 스트레스라는 조사 결과가 나온 바 있다.
관계에 대한 고민은 예로부터 인문학의 가장 커다란 주제가운데 하나였다. 인문학의 근본 물음이 ‘인간’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이때 인간은 그저 개인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모든 것들과의 관계를 포함하여,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문학은 나의 존재 의미를 깨닫는 동시에 타인의 존재 의미를 깨닫는 동시에 타인의 존재 의미를 말하고 ‘역지사지’의 정신을 가르쳐 공존의 방법을 말한다.
만약 21세기에 이러한 정신이 회복된다면, 개개인의 행복은 물론이고, 사회도 점차 더욱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문학은 개인은 물론 사회, 나아가 생태계의 행복마저도 담을 수 있는 모두를 돕는 행복학이 될 것이다.
■5. 내 삶의 ‘영웅’ 되기
동화나 영화의 영원한 주제 가운데 하나는 바로 ‘영웅’ 이야기다. 세상에는 수많은 영웅이 있다. 지구를 구하는 영웅, 악당을 물리치는 영웅. 불의에 굴복하지 않고 승리를 쟁취하는 영웅, 수퍼맨, 스파이더맨, 배트맨 등.
영웅의 이야기는 언제 어디서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늘 반복되는 이야기임에도 사람들을 전율시키는 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고난이 사람들이 겪어야 할 고난과 어려움을 상기시키고, 그들이 얻은 승리가 사람들에게 ‘희망’을 선사해 주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신화에도 영웅 신화라 할 만한 이야기가 있다. 환영받지 못하는 일곱 번째 공주로 태어나 결국 버려진 한 소녀 ‘바리공주’의 이야기다. 옛날 불라국이라는 곳에 오구대왕이 살고 있었다. 오구대왕은 인물과 재주가 뛰어난 젊은이로, 나이가 차자 아내를 맞이하기 위해 온 세상을 찾아다닌다.
오구대왕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어여쁜 길대를 만나게 되었다. 길대에게 마음을 빼앗긴 오구대왕이 혼인을 서두르지만, 택일을 맡은 갈이 박사가 1년 뒤가 더욱 길하다며 혼인을 미루라고 한다.
그러나 하루라도 빨리 길대와 함께 있고 싶었던 오구대왕은 이들의 말을 무시하고 혼례를 치렀다. 혼인하고 얼마 뒤, 길대부인은 이상한 굼을 꾸었다. 품 안에 달이 보이고 오른 손에는 청도화 한 가지를 꺽어 든 꿈이었다.
이 꿈을 꾼 지 열 달 만에 길대 부인은 이상한 꿈을 꾸었다. 품 안에 달이 보이고 오른 손에는 청도화 한 가지를 꺾어 든 꿈이었다. 이 꿈을 꾼 지 열 달 만에 길대 부인은 귀여운 딸을 낳았다.
내심 아들을 바랐기에 서운한 마음도 있었지만, 아직 그들의 나이도 젊고 아이는 또 낳을 수 있다고 위안을 삼았다. 이런 오구대왕의 마음을 위로하듯, 갈대부인이 둘째 아이를 낳았으나 또 딸이었다.
더욱 기막힌 것은 셋째, 넷째 계속해서 딸만 태어나는 것이다. 여섯째 아이까지 내리 딸이었다. 아들을 기다리는 오구대왕의 마음은 타들어 가는 듯 했고, 대를 이을 아들이 태어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걱정도 날로 깊어 갔다.
어느 날 밤, 길대 부인은 또 꿈을 꾸었다. 꿈에서 본 것은 이전의 태몽과는 달랐다. 궁궐 대들보에 청룡과 황룡이 엉겨 있고 오른 손에는 보라매, 왼손에는 백마를 받았으며 양 어깨에 해와 달이 돋아 보였다.
태몽 이야기를 들은 오구대왕은 이제야 아들을 보게 되었다며 크게 기뻐하였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왕자를 맞을 기쁨에 들뜬 오구대왕은 옥문을 열어 나라의 죄인들을 다 풀어주기까지 하였다.
드디어 열 달이 지나 갈대부인이 일곱 번째 아이를 낳았으나 이번에도 아들이 아니라 딸이었다. 화가 난 오구대왕은 일곱 번째 공주의 얼굴은 보지도 않은 채, 함에 넣어 바다에 버리라고 명령을 내렸다.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불교에서는 ‘인과응보’를 말하지만 바리공주가 버려진 것은 스스로의 잘못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버려져야 하다니.
화가 난 오구대왕과 달리 일곱째 공주에 대한 길대 부인의 마음은 다른 공주를 대하는 마음과 같았다. 그러나 오구대왕의 화를 누그러뜨릴 수 없었다. 길대부인은 울면서 ‘바리’라는 이름을 지어 주고 이름과 생년월일을 적은 옷가지들을 함에 넣어 바다에 띄어 보내게 했다.
바리를 떠나보낸 길대부인은 눈물로 나날 보냈다. 한편 오구대왕의 명령으로 바다에 던져진 함은 바다에 가라앉지도 않고 몇 날 며칠을 흘러 마침내 한 마을에 닿았다. 함을 발견한 사람은 평생 아이도 없이 가난하게 살아온 노부부인 비리공덕할아비와 비리공덕할미였다.
노부부가 함을 열어 본 순간, 갓난 아이 하나가 누워 있는 것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이가 죽지 않았다는 알게 되자, 이들은 하늘이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아이를 데려다 애지중지 키웠다. 바리는 노부부의 관심과 사랑 속에 무럭무럭 자랐다.
그러나 자라면서 바리는 자신이 친구들과 무언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고 할아비와 할미에게 이유를 물었다. 바리가 커가면서 사실을 숨길 수 없다고 생각한 노부부는 자초지종을 얘기해 주고, 함에 들어 있던 옷가지를 보여 주었다.
지금까지 친구들과 조금 다를 뿐이라고 생각했던 바리는 자신이 버려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슬프게 울었다. 한편 바리를 매몰차게 버린 아버지 오구대왕은 바리를 버린 이후부터 이름 모를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았다.
좋다는 약은 다 쓰고, 세상의 명의들이 차례로 불려와 치료했으나 오구대왕의 병에는 차도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도승이 지나가면서 “오구대왕의 병은 일곱째 공주를 버린 죄로 하늘이 벌을 내리신 것입니다.
왜 일곱째 공주님을 찾지 않으십니까? 오구대왕의 병은 서천서역을 지나 저승 깊은 곳 동대산 동수자의 약수가 아니면 살릴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길대부인은 막내 공주 바리가 살아 있다는 말과, 오구대왕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말과,
오구대왕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뻐했으나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다. 바리공주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데다, 바리공주를 찾는다 하더라도 한때 자기 자신이 버린 아이에게 차마 서천역까지 가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마음이 다급해진 길대부인은 금이야 옥이야 키운 여섯 딸에게 동대산 동수자의 약수를 구해달라고 말했으나 여섯 공주는 “궁궐 밖도 나가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서천서역 저승길을 가겠습니까?”라며 매몰차게 거부하였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던 시종 하나가 바리를 찾아오겠다며 길을 나섰다. 이런 시종의 마음을 하늘이 알아주었기 때문인지 시종은 마침내 비리공덕할아비와 비리공덕할미, 그리고 함께 살고 있던 바리공주를 찾아낼 수 있었다.
다시 궁궐로 돌아와 꿈에도 그리던 부모와 재회를 했지만, 나라는 이미 오구대왕의 오랜 병 때문에 시름이 깊어져 있었다.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아버지 오구대왕을 보자, 바리공주는 힘들더라도 저승에 있는 약수를 구해 오기로 결심하였다.
바리가 가야 할 길은 너무나도 멀었다. 바리는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하면서 저승의 약수를 구하기 위해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혼자 밭을 갈고 있는 백발노인을 보게 되었다.
바리는 반가운 마음에 서천역 저승으로 가는 길을 묻는데, 할아버지는 일하는 게 보이지 않으냐며 버럭 화를 내고는, 밭을 갈아 주면 알려주겠다고 하더니 나무 아래로 가서 잠을 자기 시작했다.
쟁기를 손에 쥔 바리가 밭을 갈려고 하자 하늘에서 많은 짐승들이 밭을 갈아 주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잠에서 깨어난 할아버지가 말했다. “착한 아이로구나. 서천역으로 가려면 높은 산을 넘어 넓은 들을 지나 왼쪽 길을 가거라.”
바리는 노인이 가르쳐 주는 길로 걸음을 재촉하였다. 한참을 가다 보니 갈림길이 보였다. 어느 쪽 길로 가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는데, 빨래하는 할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바리가 서천서역으로 가는 길을 묻자 할머니는 “빨래하기도 바쁜데,
왜 자꾸 말을 거는 게냐?”라며 화를 냈다. 바리는 할머니의 빨래를 받아들었다. 그러자 할머니는 볕이 잘 드는 곳으로 옮겨 잠을 자기 시작하였다. 바리가 빨래를 다 하고 할머니를 깨우려고 하는데, 할머니 몸에서 이가 기어 다니는 게 보였다.
바리는 할머니의 이도 다 잡아 주었다. 잠에서 깨어난 할머니가 말했다. “착한 아이로구나. 서천서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마. 저쪽 길을 따라 곧장 가다가 열두 고개를 건너가면 나루터가 나오는데, 거기서 배를 타고 가거라.”
원래 천태산의 마고할미였던 할머니는 빨래를 해주고 이를 잡아줘서 고맙다며 삼색 꽃이 핀 꽃가지와 금빛 방울을 건네주면서 어려운 일이 생기면 쓰라고 했다. 바리는 꽃가지와 방울을 들고 험한 열두 고개를 울면서 지났다.
고개를 지나자 누런 물이 넘실대는 황천수가 나왔다. 나루터를 찾아가 태워달라고 했으나, 나루지기는 인간이 올 데가 아니라며 거절하였다. 그러다 바리가 손에 든 꽃가지를 보자 얼른 배에 태워 저승으로 건네주었다.
알고 보니 마고할미가 준 삼색 꽃가지는 신(神)임을 증명하는 표식이었던 것이다. 산 사람은 갈 수 없었던 저승까지 가는 길이 결코 수월하지는 않았다. 바리공주가 울면서 건너간 여러 고개는 사람들이 밟아 올라가는 인생의 과정과도 비슷하다.
한 고비를 넘기면 끝날 것 같지만 새로운 단계가 펼쳐지고, 이 단계는 무한이 반복된다. 배에서 내려 한참을 걷다 보니 온통 붉은 색 물이 펼쳐져 있었다. 물은 손이 델 정도로 뜨거웠다.
바리는 물을 건너지 못해서 서성이다가 빨래하던 할머니가 준 방울을 던졌다. 그러자 물 위로 무지개가 나타나, 바리는 무지개를 타고 물을 건너 마침내 동대산 동수자의 집까지 도착하게 되었다.
동대산 동수자는 원래 천상의 사람이었다. 하늘에 죄를 지어 잠시 저승에 내려왔는데 죄를 씻으려면 인간 여자를 만나 아들 셋을 낳아야만 했다. 동수자는 바리를 보자 저승의 약수가 있는 곳을 알려주겠다며, 대신 혼인하여 아들 셋을 낳았다.
아들 셋을 낳은 바리는 동수자에게 약속을 지켰으니 약수가 있는 곳을 가르쳐달라고 하였다. 동수자가 알려준 곳으로 가 보니, 과연 약수가 보였다. 약수를 받은 바리는 아들 셋을 업고 걷고 해서 이승으로 돌아가는데 한참을 가다 보니 사람들이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일 오구왕님 상여가 나간다는데 가봐야겠지?” 바리는 그 얘기를 듣자 깜짝 놀랐다. 우여곡절 끝에 얻어 온 약수가 아무런 소용이 없단 말인가? 바리는 성문 밖으로 나가는 상여를 부여잡고 울었다.
서럽게 우는 바리를 발견한 길대부인은 바리를 기다리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바리를 위로하였다. 바리는 마고할미가 준 꽃으로 죽은 아버지의 몸 곳곳을 쓰다듬고 약수를 오구대왕의 입에 흘러 넣었다.
그러자 오구대왕이 갑자기 숨을 내쉬면서 한숨 잘 자고 난 얼굴로 이렇게 말하였다. “여기가 도대체 어디인데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모여있는가?” 길대부인과 바리는 눈물을 흘리며 오구대왕을 끌어안았다.
바리는 저승길에서 낳은 세 아들도 보여 주었다. 오구대왕은 막내 공주 바리가 겪었을 고통을 생각하며 그 아이들을 품에 안았다. 아무도 가겠다고 자청하지 않았던 서역서천의 저승길로 기꺼이 떠난 바리에게 오구대왕은 나라도 물려주고 재물도 많이 주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바리는 모두 마다하였다. 저승까지 가는 길에 억울하고 슬퍼하는 영혼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바리는 저승으로 들어서는 영혼들을 인도하는 일을 맡겠다고 자청하였다. 그리고 버려진 바리를 잘 키워준 비리공덕할아비와 비리공덕할미는 영혼의 길 안내를 맡는 신이 되어 길삯을 받으며 살게 되었다.
오구대왕의 막내공주로 태어난 것도, 그 때문에 버려진 것도 모두 바리의 의지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그러나 바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한탄만 하지 않았다. 누구나 한번쯤은 “왜 하필이면 나에게!”라는 고통의 상황을 겪게 된다.
막내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버려지고, 머나먼 저승길로 떠나야 했던 얄궂은 상황은 바리데기가 원하는 삶은 분명 아니었다. 게다가 바리가 저승길로 가는 길에는 끊임없이 어려움이 나타나 그녀를 더욱 힘들게 했다.
누군가 도와줄 수는 있어도 대신 가 줄 수는 없는 길. 바리는 ‘착한 마음’을 벗삼아 험난한 여정을 완성한다. 세상의 모든 안락함과 부귀를 누리기보다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었던 바리는 훗날 영혼을 인도하는 신이 된다.
수많은 영혼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신이 될 수 있었던 바리데기. 이는 무엇을 말해 주고 있을까. 전 세계의 신화에는 영웅들이 등장한다. 지금도 사람들이 목말라 하는 영웅의 이야기, 그 갈망은 고대인도 다르지 않았기에 수많은 영웅 신화가 남아 있는 것이리라.
신화 속의 영웅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운명이 이끄는 여행을 시작하여 ‘귀환’하는 것으로 끝맺고 있다. 그것이 운명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여정에는 무수히 많은 고난들이 숨어 있다. 때로는 부당해 보이지만 영웅들은 그 시련의 벽을 넘은 사람만이 영웅이 되는 지도 모른다.
2008년 유니세프는 <아이티에서의 성장>이라는 사진을 ‘유니세프가 선정한 올해의 사진’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콘테스트 개최 이후 최연소 당선자인 알리츠 스미츠가 배경으로 잡은 곳은 아이티의 수도 포토오프린스다.
카리브해 연안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인 아이티의 어린이들은 절반 이상이 영양실조로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 벽이나 문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빈민가를 배경으로 파란 하늘이 펼쳐져 있고,
빗물과 쓰레기가 뒤엉겨 있는 곳에는 돼지들이 먹이를 찾느라 분주하다. 흰 원피스를 입은 소녀가 원피스에 더러운 물이 튈까 봐 치마를 쥐고 조심스레 건너고 있다. 소녀의 모습은 그 나이 또래의 귀여움을 전해 주지 못하지만,
가느다란 두 다리를 조심조심 그러나 성큼성큼 내디디며 물을 건너는 모습에서는 이 물을 모습에서는 이 물을 다 건너가겠다는 의지만큼은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웃음기 없는 표정이지만 야무져 보이는 소녀의 표정에서 의지가 읽힌다.
유니세프 독일위원회는 비참한 환경 속에 자라나는 소녀의 용기와 에너지를 잘 표현했다며 선정 이유를 밝혔다. 선정 이유에는 용기와 에너지를 끝까지 잃지 말고 성숙한 어른으로 성장해 주기를 바라는 희망도 함축되어 있을 것이다.
조심조심 걸어야 하는 물이지만, 성큼성큼 용기를 내어 걸어야 하는 소녀처럼 우리 모두의 삶은 그래야 하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건너야 할 물은 생각보다 깊을 수도 있고, 얕을 수도 있으며 바닥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내딛는 걸음이 닿는 곳이 행복의 땅인지, 불행의 땅인지도 친절하게 설명해 주지 않는다. 모든 것이 모호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내 앞에 놓인 물은 나 외에 그 누구도 건널 수 없다는 사실이다.
■6. 즐거운 공부
공부하라는 잔소리 뒤에 어김없이 따라 붙는 수식어가 바로 “공부해서 남 주냐”는 말이다. 듣기 좋지 않으면서도 반박할 수 없는 것은, 공부는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는 분명한 사실을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여 공부를 독려하도록 하는 것인데, 이런 잔소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사항이었다. 중국에서는 황제로부터 내노라하는 선비들이 앞 다투어 “학문을 권하는 글”인 권학문(勸學文)과 노래를 지어 공부를 독려하였다.
어떻게 하면 자녀나 제자가 열심히 공부할 수 있을까. 때로 부모님들은 좋은 장난감과 두둑한 용돈을 내놓아 성적향상을 기대하기도 한다. 좋은 성적이 입시와 직결되고, 그것이 이후 취업 등의 문제와 결부되면서 ‘좋은 성적’은 만족스러운 삶의 전제 조건이 되었다는 발상에서 비릇된 풍경이다.
이런 생각은 고대를 살던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중국 송(宋) 나라 때의 제3대 황제였던 진종황제 역시 ‘권학문’을 지었는데 그 내용이 흥미롭다. 책 속에 수레와 말이 무수히 많다.
장가가고 싶은데 좋은 중매쟁이가 없다고 한탄하지 말라. 책 속에 옥같이 예쁜 얼굴이 있다. 書中車馬多如簇 娶妻莫恨無良嫫 書中有女顔如玉 _眞宗皇帝.<권학문>
책 속에는 수레와 말이 많고 얼굴이 아름다운 여인도 있다는 내용은 요즘 말로 하면 좋은 집과 좋은 차를 가질 수 있고, 어여쁜 여인과 결혼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당근을 제시하며 공부를 독려하는 것은 황제뿐만 아니라 선비들도 마찬가지였다.
‘공부’의 세계에 입문하는 순간부터 수많은 시험에 시달려야 하는 사람들에게 적정한 보상을 제시함으로써 공부를 독려한 것이다. 그 ‘보상’에는 좋은 집, 좋은 차와 같이 남들에게 과시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가능성도 포함하고 있었다.
진종황제의 여섯째 아들로 송나라의 4대 천자가 되었던 인종황제는 양적인 보상보다 질적인 보상을 말하고 있다. 내가 배움이 없는 사람을 보니 그와 비길 수 있는 것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만약 새와 짐승에 비유한다면
새 중에 봉황이 있고
짐승 중에 기린이 있는 것과 같다.
인종황제는 공부를 안 한 사람을 평범한 새에 비유할 수 있다면, 공부를 한 사람은 봉황 같은 사람이며, 공부를 안 한 사람이 평범한 풀이라면 공부를 한 사람은 800년을 산다는 춘과 같은 나무라고 말했다.
물론 ‘평범하게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것이라고 반박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삶의 겉모습에 그치지 않고 내면까지 포함하는 것이라면, 봉황이나 기린처럼 되는 삶도 욕심낼 만하지 않을까.
어른들이 공부하지 않는 아이들에게 흔히 “공부해서 남 주냐?” 하고 핀잔을 준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주변에서 공부해서 남 주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빌 게이츠 부부가 그렇고, 마틴 루터 킹 목사도 공부해서 남 준 전형적인 사람들이다. 공부는 해서 남 준 전형적인 사람들이다. 공부는 해서 나만 가지는 것일까? 진정 한 공부는 나에게도 도움이 되고 남도 풍요롭게 하는 공부다.
어린 아이가 말을 떼고 교육을 받기 시작하면서 가장 많이 듣고, 하는 말 중에 하나가 ‘공부’다. “공부해라”는 얘기는 부모님과 선생님과 분리될 수 없는 잔소리이며, 약이기도 하다. 공부는 사람들의 꿈을 이루어 주는 중요한 것이기에 포기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다.
‘의무’에 가까운 공부를 사람들의 태도는 옛 사람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조선 시대 화가였던 김홍도가 그린 그림은 시대의 격차가 전혀 느끼지 않는 작품이다. 스승과 여러 명의 아이들이 함께 공부하고 있는데, 한 아이는 눈물을 훔치고 있다.
숙제를 해오지 않았거나, 집중하지 않았거나 또는 어떤 다른 이유로 야단과 미안함이 묻어난다. 제자가 잘 되기를 바라는 스승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같았던 모양이다. 학생 시절에 가장 많이 듣는 말 가운데 하나는 바로 ‘공부’다.
학생은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공부 얘기는 언제나 재미없고 지루하다. 공부와 관계되는 이야기들이 흔히 잔소리로 간주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사실 요즘 하는 공부는 아주 쉽거나 아주 어렵다.
어떤 사실을 암기 대상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외워 답을 맞히게 된다면 그것은 아주 쉬운 문제일 수 있지만 해당 지식을 갖추지 못했다면 아주 어려운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공부는 많은 지식을 머릿속에 넣는 것과 동의어가 되고 말았다.
그저 배우기만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멍청이가 되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게 된다. 學而不思卽罔 思而不學卽殆. _논어 위정(爲政)
그저 비판 없이 주는 지식을 달달 외우기만 하면 멍청이가 되고,
생각하는 것만 좋아하지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게 된다는 공자의 말은 이천오백 년이 더 지난 지금에도 곰곰이 곱씹어 볼만한 가치가 있다. 배우는 건 알겠는데, 도대체 뭘 생각하란 말인가?
요즘처럼 지식의 양이 성적과 직결되는 시대에 ‘생각’은 사치가 될 수 있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조차 사치나 낭비가 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결국 꿈이나 목표를 가지는 것도, 그것을 위해 공부하는 것도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스스로에 대한 끊임없는 돌아봄. ‘반성’은 인문학의 오랜 주제다. 반성(反省)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자신의 언행에 대하여 잘못이나 부족함이 없는지 돌이켜보는”행위다. 스스로를 다시 되돌아본다는 의미는 서양에서도 동일하게 사용되었던 것 같다.
반성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인 ‘스스로 되돌아보기(self-reflection)’는 반성의 의미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 일기쓰기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학교와 가정에서 훈련받는 교육 가운데 핵심적인 부분이다.
날마다 기록한다는 의미의 일기(日氣)는 개인적 기록이자 역사이며, 반성의 훈련이 이루어지는 실질적인 장이기도 하다. 일기쓰기에 대한 훈련에서 빠지지 않는 것은 ‘무엇을’ 적는가에 대한 문제다.
그런데 이 ‘무엇’의 내용에 하루에 일어났던 일을 일목요연하게 적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이나 선생님들은 알게 모르게 삶으로부터의 교훈을 가르쳤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중요한 것은 정확한 사실 관계가 아니라, 그것이 주는 의미일 것이다.
군자는 허물을 자기에게서 구하고 소인은 남에게서 구한다. -논어 <위령공>
선함을 보면 마음을 가다듬고 반드시 스스로를 살펴보고, 선하지 않은 것을 보면 걱정스런 마음으로 반드시 스스로를 반성해야 한다. -순자 <修身>
반성하는 자가 서 있는 땅은 가장 훌륭한 성자가 서 있는 땅보다 거룩하다.-<탈무드>
어쩌면 큰 스승, 위인을 키운 것은 스스로를 냉철하게 바라본 ‘눈’인지도 모른다.
사물을 바라보는 눈은 점차 커지고 정밀해지지만,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눈은 점점 작아지고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이 공부하는 이유가 좋은 집. 좋은 차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더 나은 삶을 위한 것이라면 가장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고, 스스로의 내면이다. 인문학은 지식이나 정보의 습득을 넘어 삶의 문제를 고민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내면의 성찰,
그것을 가능하게 돕는다. 그렇기에 삶으로부터 터득한 경험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또 다른 노력이 필요하다. 내면의 성찰을 돕는 즐거운 공부가 필요한 까닭이다. 즐거운 공부란 누군가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 아닐까.
배우고 익히니 좋은 것이고, 그래서 좋은 학교에 들어가고, 좋은 직장을 갖게 된다면, 이것이 즐거운 공부의 참다운 모습이 아닐까. 누군가의 행복을 최우선시하는 그런 공부가 필요하다.
■7. 책을 닫으며
인문학은 삶의 가치를 다룬다. 인문학이 당장에 밥을 해결해 주지는 못하지만,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이나 태도에 대해서는 일깨워 줄 수 있다. 무릇 인간의 삶이 어디 먹고 자고 돈을 버는 일에만 관련이 있겠는가.
단순한 의식주의 문제를 넘어서 자기 존재의 고유한 존재를 깨닫고 그 속에서 자기 존재의 본질적인 의미를 깨는 것이야 말로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갖는 근원적 욕망(?)의 핵심이 아니겠는가.
만일 누군가가 삶의 고단함 속에서 고통을 느끼고 있다면, 그에게 인문학적 사유가 필요한 여기에 있다. 인문학은 현실로부터 동떨어진 고담준론이 아니라 더 나은 내일을 준비하는 삶의 현실적인 에너지원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어떤 한 사회가 위기에 빠졌을 때도 인문학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사회적인 갈등은 위기의 주된 원인이 되는데, 이는 무엇보다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인문학이다. 인문학적 사유가 천착한 주제는 다름 아닌 인간 삶과 그 관계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과연 어느 누가, 어떤 사회가 이런 주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인문학적 사유와 소양은 단순히 개인의 차원을 넘어 사회를 아우르는 필수적인 기초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문학은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만인 것이 아니라 인간 사회가 생존하는데 필요한 하나의 절대적인 필요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앎과 삶이 철저히 분리된 우리 사회의 환경 속에서는 어쩌면 인문학은 마냥 쓸모없는 잡동사니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앎이 많다는 것이 곧 삶의 풍요로움이 아닐진대, 왜 우리는 지식으로서의 앎의 문제에만 천착해 가고 있을까.
지식이나 정보의 습득과 더불어 성찰의 힘을 만들어 주는 인문학, 그것이야말로 앎과 삶을 하나로 통합시켜 진정한 행복에 우리를 좀 더 가까이 데려다 줄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고, 짧지만 복잡다단한 인생의 길에서 좌절과 고통을 경험하며,
때로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반성하기도 한다. 인문학은 이런 인간 경험의 근본적 조건들을 고민하게 하고, 이 고민들로부터 스스로의 존재감과 책임을 스스로 성찰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인간이 그저 생물학적 존재이기만 하다면, 과연 우리가 누구이며, 왜 우리가 여기에 있고, 또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과학의 힘을 빌리면 그 뿐이다. 하지만 인간은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생명과 사회적 존재로서의 생명을 모두 지닌 복합적 존재이다.
그렇기에 인간의 정신습관, 태도, 삶의 의미나 가치, 아름다움을 다루는 인문학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생명을 온전하게 보살피는 데 커다란 쓸모가 있다. 사람답게 살려는 욕구를 채워 주는 것은 단순히 돈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인문학적 자산인 것이다.
문학, 역사, 철학으로 대표되는 인문학은 스스로 삶을 돌아보고 각자 자신의 삶과 미래에 통찰력을 키우고, 그에 기초해 인식의 전환과 새로운 실천적 행위를 수행하는 데 도움을 주는 학문이다.
그렇기에 인문학은 삶에 어려움을 느끼거나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또는 정신적인 고통이나 마음의 병에 노출될 가능성이 있는 개인이나 집단의 치유를 도울 수 있는 학문이다.
이는 인문학이 소통과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소통이나 관계는 예로부터 인문학의 가장 중요한 관심 주제 가운데 하나였다. 인문학은 ‘개인의 개발’뿐만 아니라, 타인의 존재 의미와 ‘역지사지’의 정신을 강조한다.
그렇기에 인문학은 내가 나일 수 있는 이유는 너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일깨 워 준다. 뿐만 아니다. 사람사이를 넘어 사람과 세상 사이, 사람과 생태계 사이의 올곧은 소통과 관계 맺기까지도 가능하게 해줄 수 있다.인문학이 모든 것들의 행복을 돕는 학문이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