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반도를 걸을 일을 생각하면 머리부터 지근거렸다. 지금까지 걸어온 전남 서남해안은 들락거리긴 했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었는데 고흥반도는 한 바퀴를 돌아 제자리로 가야한다. 한 바퀴 돌기는 여수반도도 마찬가지나 고흥은 땅이 커 걷기여행을 계획할 때부터 머리가 아팠다.
또 하나, 지도를 점검해 보니 고흥방조제와 남해안을 제외한 서남해안 대부분이 해안에 접근할 수 없게 되어 있다. 토막길이 많다. 해안으로 접근하더라도 그 길로 되돌아 나와야 하니 들어갈 수가 없다.
당장의 문제는 고흥반도에 깊숙이 파고 든 득량만이다. 득량만이 내륙 깊숙이 파고들어 고흥반도를 마치 사람의 위처럼 보이게 하는데, 그 득량만을 휘감고 한 바퀴 돌 일이 난감했다.
어제 도착한 대서면 남정리 신흥마을에서 3.5㎞ 쯤 해안 길을 가면 수문등나루. 거기에서 바다 건너 맞은편 두원면 대전리까지는 직선으로 3㎞ 남짓이지만 내륙으로 득량만을 한 바퀴 돌아 대전에 가려면 20㎞는 된다.
무슨 수가 없을까. 무턱대고 대서면사무소에 전화를 거니 예전에는 수문등과 대전 사이에 나룻배가 다녔으나 지금은 없단다. 신흥에서의 숙소 문제도 상의 했더니, “아무리 내가 면장이라도 이장에게 재워줘라 마라 할 수는 없지요” 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이 김치군 면장이었다. 숙소는 그렇다 치고, 고흥만을 가로지를 방법이 없겠느냐니까 없다더니 몇 시간 뒤 전화가 왔다. 내 전화번호가 찍혔던 모양이다.
언제 쯤 올 것이냐, 어선을 가지고 있는 분에게 부탁해 배를 내기로 했으니 물때에 맞춰야 하니까 미리 연락해라, 숙소는 신흥리 박봉순 이장을 만나 상의하라는 것이었다. 진짜 땡큐다. 이런 고마울 일이.
어제(2006.11.16) 아침 율포를 출발하면서 김치군 면장과 박봉순 이장에게 전화를 하고, 신흥마을에 도착한 것이 오후 2시40분. 계산보다 3시간 이상 빨리 도착했다. 승강장에 앉아 박 이장에게 전화를 하니 6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벌써 왔느냐면서, 외지에 나가 있다고 난감해 했다.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기도 그렇고, 그냥 벌교로 나가자. 마침 김 면장에게서 전화가 온다. 내일 아침 7시까지 수문등나루로 나오란다. 됐구나.
군내버스로 벌교에 나가자고 어제 도착지점인 신흥마을 버스승강장에 다시 선 것이 아침 6시. 이제야 어둠이 걷힌다. 박 이장이 벌교에 숙소를 정해 알려주면 새벽에 자기 차로 데리러 오겠다고 했으나 그도 미안한 일이고, 마침 벌교역전 시장통에 택시가 서 있어 탔더니 동강면 택시였다.
동강삼거리 소문난갈비집 아주머니가 새벽시장을 보기 위해 대절해 온 택시에 합승, 1만원(홀로 타면 2만원이란다)을 주고 신흥까지 왔다. 배편도 해결 됐고, 오늘은 이래저래 재수 좋은 날이다.
이른 시각이긴 하지만 고마운 인사나 해야겠다고 박 이장에게 전화를 하니 승강장으로 나온다. 배를 타기로 한 7시까지는 시간이 있어 승강장에 걸터앉아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눈다.
올해 41세. 28호가 있는 마을에서 제일 젊단다. 서울 자동차 정비공장에 다닐 때 만난, 의정부 출신 부인과 함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고향에 와 자기 논 6천 평과 마을 노인네들 것 1만2천 평을 빌려 농사를 짓는다고 한다.
“농사 지을만합니까?”
동네에 노인들만 있어 품앗이 할 일꾼 구하기가 가장 힘들다면서, 시골에 오면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는데 도시에서 빈둥거리는 젊은이들이 한심하다고 입맛을 다신다.
“농촌이 어렵다던데” 하니까 “다 제 하기 나름이지요” 잘라 말한다. 영광 백수에서도 같은 얘기를 들었다.
신흥리는 일제강점기 득량만방조제를 막으면서 생긴 마을이다. 해변마을이지만 고기는 잡지 않고, 마을이 바로 산 아래 있는 탓에 일조량이 적어 다른 작물은 못하고 오직 논농사만 한다는데, 마을 앞으로 지나는 보성군과의 경계에 따라 논이 모두 보성군에 속해 애로가 있단다.
보성사람들이 짓는 들판 농로는 다 포장을 하고 고흥사람들이 짓는 남정지구는 흙바닥 그대로라며, 농기계를 끌고 다니는데 어려움이 많다는 하소연이다. 득량만 간척평야는 한국농촌공사 보성지사 예당지소에서 관리한다는데 아무래도 고흥군에서 나서야 할 일인 듯싶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시골이 순수해요. 요즘은 수매가 안 돼 보리를 심지 않으니 1년에 한두 달만 고생하면 편하게 살만해요”
신흥마을 표지석에 ‘증 박안순 박봉순’이라고 새겨져 있다. 박 이장이 사촌형과 함께 2003년에 세운 것이다. 마을에 대한 정성도 지극하고 농촌의 맛도 알고, 참 건실하고 든든한 청년이다.
신흥에서 수문등 나루로 가는 해안 길. 아침 바다는 잔잔하고 고즈넉하다. 장선마을을 지나니 해변에 작은 공원이 보이고 아담한 해수욕장도 있다. 저쪽에서 아주머니 둘이 팔을 직각으로 꺾어 흔들며 걸어온다. “아침 운동하십니까?” 인사를 해도, 운동하는데 헛바람 넣지 말라는 듯 꼿꼿이 고개를 세우고 지나간다.
수문등 나루, 물이 넘실대는 선착장에 선다. 한 중년이 서성이다가 다가온다. 대서면 송현근 계장이다. 웬일이냐니까 집이 바로 저 안마을 신기라 출근하는 길에 들렀다고 한다. 면장 얘기를 듣고 왔나? 미안하게.
어제 배편이 됐다는 말을 듣고 김 면장에게 고맙다고 하니까, 우리 고장에 온 여행객에게 편의를 봐주는 것은 행정관서에서 당연히 해야 할 일 아니냐고 했다. 고마운 말이다. 이런 것이 바로 ‘관광전남’의 씨앗이 될 것이다.
“여기 신기가 송재구 전 부지사 고향입니다. 송 부지사가 행정고시로 첫 테이프를 끊은 이후 우리 대서면에서만 26명의 사법·행정고시 합격자가 나왔어요” 하면서, 면은 작지만 전국적으로 이렇게 많은 고시 합격자를 낸 면이 없다는 송 계장의 자랑이다. 아, 여기가 고향이었구나. 고향이 고흥인 줄은 알았지만 의외의 곳에서 친구 얘기를 듣는다.
앳된 청년이 모는 배에 올라 대전해수욕장으로 떠난다. 보트에 모터를 단 0.85t 선외기다. 이 선외기와 또 다른 어선을 갖고 있다는 장선마을 허공식 선주도 선창에 서서 배웅 한다. 행복한 아침이다.
얼떨떨한 환대를 받고 가로지르는 바닷길. 배가 달리니 정신이 번쩍 나게 바닷바람이 차갑다. 걸으면서 차를 태워주겠다는 많은 유혹(?)이 있었지만 꿋꿋이 이겨냈는데 오늘은 할 수 없이 이렇게 해협을 건넌다.
선외기는 꼭 4분 만에 대전해수욕장에 닿았다. 대여섯 시간 걸어야 할 거리를 4분으로 단축했으니 고맙다는 말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선창에도 마을에도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소나무로 둘러싸인 텅 빈 대전해수욕장은 파도만 철썩인다. 대전교회 옆 길가에 황금색 코스모스가 만발했다. 열흘 전에 입동이 지났는데도 잎이며 꽃대가 싱싱한 것이 여기는 아직 창창한 가을이다.
어물장사 차가 지나간다. 싱싱한 갈치 차가 왔습니다아~ 싱싱한 고등어 오징어가 왔어요… 스피커는 요란한데 내다보는 사람은 없다.
시절을 가늠할 수 없는 땅이다. 코스모스를 보면 가을이고 햇볕은 나른한 봄날이다. 그런가 하면 산비탈 상수리나무는 벌거벗은 채 흑갈색 낙엽을 날리니 도대체 시절의 속내를 알 수 없다.
햇볕이 봄볕처럼 포근하다. 마치 봄 길을 걷는 듯하다. 바다는 대전리를 떠난 이후 보이지 않는다. 꿩 꿩, 가끔 울리는 꿩의 기척에 마음이 느긋하다.
도로변 하우스에서 랩 음악이 요란하게 흘러나온다. 하우스 앞에서는 짚무지가 타고 있다. 냄새가 고소하다. 갑자기 꿩이 자지러진다. 무엇에 놀란 것일까. 나는 아닌데.
내당마을. 고흥셀렌늄마늘영농법인 안내판이 있다. 무슨 마늘일까? 궁금하고, 심심풀이 겸해서 안내판에 적힌 번호에 전화를 했더니 항암, 노화방지 등 여러 효능이 있는 셀렌늄을 분무해 키운 마늘이라는데, 값을 물으니 10㎏(두 접쯤 된다고)에 택배비 포함 3만원이란다. 값은 일반 마늘과 큰 차이 없다며, “사실렵니까?” 묻는다.
고흥 마늘이라더니, 고흥 땅에 들어서니 온통 마늘밭이다. 엉덩짝만한 터만 있어도 마늘이다. 해남 배추에 보성 쪽파, 고흥은 마늘천지다.
내당마을 입구에, 경운기와 승용차가 사정없이 정면으로 부딪쳐 박살이 난 그림 위에 ‘위험 경운기 농기계·동네 앞 절대감속’이라고 쓰인 경고판이 서 있다. 섬뜩하다. 나는 섬뜩하지만 운전자들 눈에는, 저게 눈가에나 스칠까.
구렁먹재를 넘어 대금, 대동, 영동을 지나 고흥방조제로 갈라지는 삼거리. 발파까지 하며 도로를 넓히고 있다. 다이너마이트 터지는 소리에 꿩들이 기겁해 날아간다. 꿩이 참 많은 길이다.
고흥방조제로 가는 길 가로수는 벚나무다. 새마을지도자 두원면 남·여 협의회에서 세운 ‘벚나무는 우리의 문화관광자원입니다. 미래를 위해 잘 가꿉시다’라고 적힌 표지판도 있다. 봄이면 벚꽃터널이 일품이라던 길이 바로 이 길인가 보다. 봄이면 꽃잎이 함박눈처럼 내려 융단으로 깔리겠지.
바로 관덕리. 스피커를 단 자동차가 헌 프라이팬이나 주전자를 가져오면 3천원에 새 프라이팬으로 바꿔준다고 외쳐대며 골목을 빠져나온다.
관덕리를 지나면서 길은 비탈을 기어 그렁재 위에 올라선다. 저 아래 활주로처럼 쭉 뻗어 있는 것이 고흥방조제렸다. 금방 득량만을 향해 박차고 날아오를 듯 날렵하다. 그래 날아봐라. 땀을 씻으려고 모자를 벗다가 아차 놓쳤다. 제가 먼저 나르려다 언덕 저 아래 마늘밭에 처박힌다. 빌어먹을.
고흥군 대서면 수문등나루. 고흥반도 깊숙이 파고든 득량만을 내륙 쪽으로 돌려면 20여km. 그러나 이 수문등나루에서 바로 건너편 두원면 대전해수욕장까지는 3.5km. 어쩔 수 없이 수문등나루에서 선외기를 얻어 타고 4분 만에 건넜다. 임정옥기자
첫댓글 수문등나루 바로 신기마을인지 아시지요,,,,
신흥 이장 박봉순은 친구맞는데 송현근계장는 우리 동내 사람이고 보통 사람들한테 아무나 이런 대접 안할건데 신기에는 저런 선착장 없는데 아무래도 신흥쪽 마을 선착장으로 생각되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