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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芝
시선.
어떤 시선이든 인간의 시선에는 감정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시선은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애정도, 욕망도, 미움도, 기쁨도 없는 절대
공(空)의 시선이었다.
다만 성스러웠다. 이 눈빛은 한마디로 성스러움의
결정체라 해도 좋았다.
눈빛을 마주보고 있는 동안 추소야는 자신의 마음이
정갈하게 씻겨 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오장육부
속속들이까지 맑은 물에 헹구어 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운명처럼 추소야가 물었다.
"당신의 이름은?"
시선에 이어 살랑이는 나뭇잎 새로 돌연, 주위의
어둠을 단숨에 휘몰아내는 찬란하고 빛나는 광채가
피어 올랐다.
그것은 바로 여인의 얼굴이었다.
꿈결처럼, 이제까지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순수하고 맑은 목소리로 여인이 말했다.
"운지(雲芝), 제 이름은 운지예요......"
-삼신산(三神山) 제일봉(第一峯).
그곳에서 억겁(億劫)의 세월을 노래하고 춤추어 온
여인(女人).
대(代)를 물려오며 그녀들은 한 영웅을 기다렸다.
악마의 심성(心性)과 천인(天人)의 선심(仙心), 그
둘 중 진정한 성격을 가려내 줄 영웅을-
정자(亭子)의 안은 정갈하고도 깨끗했다. 여인의
맑은 심정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 같았다.
"당신은 제가 본 첫번째 사람이예요. 잠깐만
기다리시면...... 운지는 당신을 위해 음식을 만들고
싶어요."
추소야는 대나무로 만든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의자의 팔걸이는 반들반들하게 닳아 있었다. 얼마나
많은 여인들이 이 의자에서 쓸쓸하고 고독한 날들을
보냈어야 했을까?
방벽의 한쪽엔 책장이 있었고 그 속엔 수백 권의
책이 쌓여 있었다. 아마도 신녀(神女)들은 속세 생활
대신에 저 책으로써 인성(人性)을 터득했으리라.
문득 주렴 새로 무엇인가를 토닥이고 있는 운지의
흰 옥수(玉手)가 보였다.
그 손을 보는 순간 추소야는 말할 수 없이 편안한
충족감이 온몸을 축축히 적시는 것을 느꼈다.
운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노래라고는 들어보G도 못했을 텐데 저렇듯
본능적으로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신(神)이
인간에게 내린 가장 큰 축복이다.
추소야는 오래 전에 잃어 버린 고향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창밖을 힐끗 바라보았다.
아직 달은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다만 서쪽 산
능선이 뿌옇게 밝아지는 것으로 보아 곧 떠오르게 될
것이다.
추소야는 달이 떠오르기 전에 운지가 만든 음식을
먹고 싶었다. 그리하여 모조리 잃어 버렸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낭만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되살리고
싶었다.
좋아하는 음식이 놓인 구수한 식탁과 맘맞는
사람끼리 푸근한 식사와 대화, 이 하늘 아래 인간의
사악한 감정이 끼어들 수 없는 자리는 바로 그곳
뿐이었다.
그곳에서만이 인간은 인간다울 수 있었다.
운지의 음식솜씨는 거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었다.
국은 맹물같았으며 밥은 설거나, 질거나 딱딱했다.
소채(蔬菜)는 썼고, 나물은 텁텁했다.
그러나 추소야는 정말 오랜만에 맛있는 식사를
했다.
그는 설거나 질거나 딱딱한 밥을 바닥까지 긁어
먹었으며, 쓴 소채와 텁텁한 나물을 그릇까지 핥았다.
마치 수십 끼니는 굶은 것처럼 보이는 그의 식성을
운지는 조용히 보라보기만 했다. 그녀의 손은 턱을
고이고, 성스러운 시선은 추소야의 얼굴로부터 한
시도 떠나지 않았다.
* * *
"물어 보고 싶어요."
"무엇을?"
여인의 두 눈에 기대의 빛이 떠오르는 모습을 본
사람은 금방 보석을 연상하게 될 것이다.
"사랑, 사랑이 뭐지요?"
추소야는 씩 웃었다. 웃으며 그는 쩍쩍 입맛을
다셨다.
"혹시 이곳엔 술이 없소?"
"술?"
"술이 있다면 나는 당신에게 그 해답을 말해 줄 수
있소. 술병은 사랑의 보금자리이오. 벽옥빛 죽엽청이
거품이는 술잔 속엔 당신의 아름다운 얼굴이 떠오를
것이오. 그 향기는 서로의 마음에 아로새겨지는
사랑의 숨결이오."
"숨결......"
"혀을 적시는 한 모금의 술은 영원한 용서의 의미를
가진 사랑의 맛을 느끼게 해 준다오."
"왜 사랑을 하지요?"
"또 하나의 나를 찾기 위해서이오. 인간의 영혼은
반복의 의미를 지니고 있소. 그 다른 반복과 반복이
만날 때만이 진정한 삶의 뜻을 알게되오."
* * *
최초의 월광(月光),
산 능선 위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 *
"운지(雲芝)...... 이 이름을 불러 보세요."
"운지."
"이상하군요. 운지는 이제야 자신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당신이 이름을 부르신 그
순간부터."
* * *
달은 어디에나 뜬다. 그러나 오늘밤 떠오른 저 달의
의미는 틀렸다.
추소야는 문득 주위가 환해진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어깨에 기대고 있는 운지가 방금까지의
운지가 아닌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전혀 생소했다.
분명히 아까의 운지가 머리를 기대고 있는 것이련만
이 여인은 아니라고 느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치는 순간, 추소야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거력(巨力)이 운지의 몸에서 솟구쳐
나오는 것을 느꼈다.
공력을 끌어 올리고 자시고 할 겨를도 없이
추소야의 몸은 쏘아 낸 살처럼 튕겨 나갔다.
정자의 벽을 뚫고도 무려 십 장이나 날려 갔다.
바로 그때 추소야는 분명히 보았다. 정자의 천정을
꿰뚫고 솟아 오르는 운지의 모습을.
그 순간의 아름다운 모습을 도대체 무슨 말로 다
형용을 하랴?
자욱한 월광(月光) 아래 운지의 몸은 산정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날아가고 있었다.
추소야는 그토록 빠른 신법을 처음 보았다.
시선이 닿는 순간 몸은 저멀리 나가 있는 빛조차
따를 수 없는 극쾌(極快)의 신법이었다.
그렇다. 그것은 이미 인간의 힘이 아니었다.
"운지!"
추소야는 바닥을 튀어오르듯 일어나 운지가
사라져간 방향으로 쏘아낸 살처럼 몸을 날렸다.
* * *
"헉헉......"
달빛은 대낮처럼 밝았다. 그러나 도대체 어딜 간
것일까? 한번 사라진 운지의 행방은 종내 찾을 수가
없었다.
이때 언뜻 어디선가 그윽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것은 변함없이 제대로 남아 있는데,
일은 멀리가고 돌아올 길 영 없으니,
뜰앞에 말을 매고서 시름 속에 잠기네.
창앞의 빈 땅에는 푸른 대 나 있구나.
문 밖에 푸른 산도 예대로 서 있는데,
그대만 어이한 일로 가고 오지 못할까.
가을은 어찌하여 슬프게만 구는 겐가.
잎지는 소리마다 쓸쓸하게 들려오고,
해마다 피는 꽃들아 누굴 위해 피는 겐가.
구슬이 구르듯 맑은가 하면, 이슬처럼 투명한
목소리였다.
노랫가락이 끝났을 땐 추소야의 몸도 이미 거기 서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서 있으되 그로부터 다시는 홀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
보라.
월광(月光)은 마치 눈가루처럼 천지에 덮였는데, 그
속에 홀로 앉아 탄식하는 여인이 있다.
탄식이 끝나자 소맷자락이 어두운 장공(長空)을
수놓기 시작했다.
그것은 도저히 인간의 것이라고 볼 수 없는 요염한
춤이었다.
-십 칠 세의 중추야(中秋夜)에 옥혈비전의 여인은
춤을 춘다.
그리고, 그 밤이 지나도록 영웅이 오지 않는다면
그녀는 탈진하여 죽고 만다.-
한 줄기 환상인가, 꿈의 요정(妖精)이란 말인가.
서러운 정(情) 서려 밟고 가락마다 짚어가는 춤사위
한자락 한자락에 덧없는 달빛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운지가 아니었다.
성스러움으로 물든 풀잎 같은 운지가 아니었다.
휘도는 가락 하나하나마다, 서려 밟는 마디
하나하나마다, 회색나비와도 같은 요염한
독기(毒氣)가 구름처럼 피어 오르는 또 다른
운지였다.
추소야의 안면근육이 푸들푸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의 미간이 밭고랑처럼 패이며 굵은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들었다.
춤 속엔 유혹이 있었다.
선(善)이 마음으로부터 비롯되듯 악(惡) 또한
마음으로부터 비롯된다.
추소야의 머리 속으로 사악한 상념들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그의 손가락이 장심(長心)을 깊숙이 파고 들었다.
운지의 섬세한 춤으로부터 피어 오르는 저 처절한
유혹의 내음을 어찌할 것인가?
-욕망에 지면 지는 그 순간부터 세상은 핏빛으로
뒤덮이게 되나니. 일찍이 존재하지 않았던
대마녀(大魔女)가 세상을 피바다 속으로 몰아넣게
되리라.-
웃기지 마! 흥! 세상?
소야야, 소야.
세상 따위가 너와 무슨 상관이라던?
네가 고통스러울 때 세상이란 것이 널 거들떠
보기라도 하던?
네 아버지가 죽을 때 세상이 간섭이라도 하던?
망설이지마 소야.
네가 더 중요한 거야.
네가 있어야 세상도 있는 거야.
자자, 어서 달려 나가려무나.
저 유혹의 덩어리가 탐스럽지도 않니?
"으윽!"
추소야는 머리를 미친듯이 쥐어 뜯었다.
그럴 때마다 머리털이 한 웅큼씩 빠지며 자욱한
핏물이 솟구쳐 올랐다.
그는 이성이 강한 인간이었다. 그것이 추소야였다.
그러나 이 유혹은 너무도 거셌다. 이 격랑을 막을
이성의 방파제는 무력하기만 했다.
"아아악!"
그의 몸이 초지를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가파른 돌에 살점이 패이고 뼈가 부러져나가고 피가
솟구쳤다.
운지는 여전히 춤을 추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하늘의 창공만을 우러르고 있었다.
이때 추소야의 몸이 휘청 일으켜졌다.
그의 위이빨은 아랫 입술을 깊숙이 파고 들어가
있었다.
그는 문자 그대로 혈인(血人)의 모습을 한 채
휘청휘청 산아래로 힘겨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돌아보면 안돼.
보는 순간 너는 지고 만다.
좋은 생각만 해.
나쁜 생각이 끼어들면 그것으로 모든 것은
마지막이야.
그의 발은 걷고 있지 않았다. 이미 끌리고 있었다.
돌연,"추랑(秋郞)." 이 세상 어떤 부름보다도
달콤한 그윽한 부름이 귓전을 파고 들어왔다.
순간 추소야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하나, 그는
이내 발작적으로 고개를 내저으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추랑."
두 번째 부름이 속삭여 왔다.
이번의 추소야는 오랫동안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거의 본능적으로 한걸음 더 나서는 추소야의
귓전으로 세번째 목소리가 들려왔다.
"추...... 랑......"
세 번째 부름!
그것은 이미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인간의 부름이 아니었으며 인간의 껍질이 흉내낼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추소야의 몸이 빙글 돌려졌다.
무너진다. 부서진다. 무엇인가가 송두리째
허물어져내렸다.
그순간에 왜 옥미림의 우는 얼굴이 떠올랐을까.
그순간에 왜 평생을 웃으라며 돌아가신 부친의
피투성이 얼굴이 떠올랐을까.
나는...!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땅을 딛고 살아온 나의 존재란
도대체 무엇인가!
무너져내리는 마음의 파편을 밟고 추소야는 몸을
날렸다. 아니, 날렸을 뿐 아니라 그는 단숨에 운지의
몸을 움켜 잡았다.
운지는 아무런 반항도 없이 스르르 그의 품속으로
말려들어왔다.
추소야는 붉게 충혈된 눈을 가눌 새도 없이 운지의
가냘픈 몸을 찍어 눌렀다.
이미 그는 추소야가 아니었다. 다만, 육욕(肉欲)에
눈이 먼 짐승에 불과했다.
여인이 몸에 걸치고 있던 옷이 사납게
벗겨져나갔다.
섬연한 호선을 그으며 물결치듯 일렁이는
여체(女體)!
손을 대면 분가루라도 묻어날 듯 뽀얀 목덜미 아래
한 손을 들어 가렸으나 미처 다 가리지 못한 예쁜
조롱박이며 한줌에 쥐일 듯 미려(美麗)한 허리 사이
알맞게 살찐 아랫배엔 햇살보다도 더 맑은 윤기가
흘렀다.
희고 긴 속가락 사이로 보일 듯 말듯 가리운
치부(恥部)의 유혹은 또 어떠한가.
이 하늘 아래 그 어떤 이 있어 이 순간에 드러난
나체의 아름다움을 모르랴.
사내는 미친 듯 여체를 탐닉하기 시작했다.
여체는 무거운 체중이 실려오자 나직한 비음을
흘려냈다.
"아아......"
악마! 악마의 교성이었다.
사내가 한 치의 혀를 여체에 댈 때마다 세상의
정(正)은 무너져내렸다.
사내가 한 치의 손가락을 여체에 미끄러뜨릴 때마다
세상의 협(俠)은 부서져내렸다.
의(義)! 선(善)! 신(信)! 예(禮)!
무너진다. 허물어진다. 으스러진다.
이로써 세상의 모든 선한 것들은 악마의 노예가
될지니 더불어 악의 이름이 만천하에 떨쳐지도다!
이 격렬한 악마와 인간의 정사는 길고도 길었다.
하루가 가고 이틀, 사흘의 시간이 눈 깜짝할 새에
흘러갔다. 그리고, 이레째 되는 날 밤!
최초의 월광이 엉킨 나신들의 위로 떨어져내리는
순간, 여체의 심부(深部) 깊숙한 곳에선 작은 폭발이
있었다.
단지 그것뿐이련만 다음 순간,"오호호호......"
사내의 밑에 깔려 있던 핏빛처럼 붉은 여인의
입술에선 일찍이 아무도 들어본 적이 없던 사악한
요소(妖笑)가 폭풍처럼 터져나왔다.
그것 뿐이었다.
나는 누구냐?
-죽었다네, 죽었어!
-아니, 이 사람아. 죽긴 누가 죽었다는 겐가?
-천년무맹(千年武盟)의 맹주(盟主)인 추소야,
추대협이 죽었다는 게야! 운지(雲芝)라는
마녀(魔女)에게 척살당하여 깊이를 알 수 없는
무저곡(無底谷)으로 떨어져 죽었다는 게야! 시체도
찾지 못했대!
-오오...... 그럴 수가? 어쩌다 그런 일이?
-세상이 발칵 뒤집혔네! 소림사에서 무림사상
최대규모의 장례식을 준비한다네! 그는 바로 전설의
기인(奇人)인 무후대조종(武侯大祖宗)의
의발전인이었다는 거야!
* * *
인생(人生)은 짧다.
밤하늘의 섬광(閃光)처럼 봄날의 나비처럼 짧다.
그래서 그 인생이 만들어 내는 검(劍)의 얘기는 더
더욱 짧다.
영웅(英雄), 또는 호걸이라고도 한다.
검정무림(劍正武林)의 천년 세월 동안 대북의
광토(廣土)위로 반짝이다 명멸해 간 영웅호걸의 수,
그 얼마던가.
번뜩이는 독사의 혓바닥 같은 검으로, 또는 금실의
창(槍)으로, 또는 두 개의 육장(肉掌)으로 그들의
화려하고도 장엄한 얘기는 전설처럼, 신화처럼
대지(大地)위에 새겨져 오건만......
여기 한 사람! 그의 얘기는 그래서 더 슬프다.
어린 영웅 추소야(秋小爺), 그가 죽던 날
삼라만상은 통곡을 했다. 대지는 몸부림쳐 울었으며
하늘은 피눈물을 흘렸다.
-역무무명진(亦無無明盡)......
무고집멸도(無苦集滅道)......
무지역무득(無智亦無得)......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
사체(死體)도 없이......
소림사에서 열린 어린 영웅의 장례식은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성대했다.
구대문파(九大門派)의 장문명숙(掌門名宿)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은거해 있던 정파(正派)의
협성괴걸(俠聖怪傑)들, 심지어는
녹림사파(綠林邪派)의 거효(巨梟)들까지도 영웅의
분향처에서 눈물을 뿌렸다.
장례 행렬은 온산을 뒤덮고 낙양성내(洛陽城內)까지
줄을 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여인들의 통곡은 보는
이의 눈시울을 절로 뜨겁게 만드는 것이었으니......
설산(雪山)의 꽃 구음신녀(九音神女)
백봉유(白鳳柔), 종남(終南)의 여장문인(女掌門人)
칠살옥녀(七殺玉女) 애유정(艾有情),
곤륜지옥(崑崙之玉) 혈선녀(血仙女) 위여주(韋如珠),
명악지화(冥嶽之花) 냉약빙(冷若氷), 이들
무맹(武盟)의 여인들은 시체도 없는 추소야의
관(棺)을 끌어 안고 통곡을 하다가
천외신룡(天外神龍) 뇌진우(雷震宇)의 조사(弔辭)가
끝부분에 이르자 아예 혼절을 해버리기도 했다.
일찍이 전무림(全武林)이 한 마음으로 한 사람의
죽음을 이토록 애통해 한 적이 있던가?
누구나 할 것 없이 검을 일초반식(一招半式)이라도
익혀 보았던 사람이라면 모두 다 팔에 흰 띠를 두르고
육식(肉食)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정사양도(正邪兩道)의 사람들 뿐 아니라,
기이하게도 이들과 원수관계에 있는 마종(魔宗)의
문인(門人)들까지도 마찬가지였다.
한 사람.
일신에는 먹물 같은 흑포(黑袍)를 걸쳤다.
하나 단아하고 수려한 얼굴에 온통 냉막함 일색
뿐인 한 명의 청년,
<고추공소야대협신위(故秋公少爺大俠神位).>
단향(檀香)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추소야의 영전
앞에 선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하지만 그 냉혹한 눈꼬리에 보일 듯 말듯 맺힌
눈물의 의미를 뉘라서 알랴.
마종(魔宗)의 제일인자(第一人者).
극락사(極樂寺)와 대뢰음사(大雷音寺)를 위시한
천축마종(天竺魔宗) 백 일 개파.
지주궁(蜘蛛宮), 유장곡(幽腸谷), 무상동(無常洞)의
관외마종(關外魔宗) 아흔 두 개파, 동서남북
사해(四海)의 해외마종(海外魔宗) 일흔 두 개파, 백
년래의 거마(巨魔)들이 모인 백마맹(百魔盟)과 공포의
여덟 악의 꽃 화문팔가(花門八家) 등 총인원
십만(十萬)의 위에 홀로 선 채
마도제일고수(魔道第一高手)의 휘호를 가슴에 안은 이
청년, 냉풍(冷風)은 느리게 몹시 느리게 몸을 돌렸다.
눈꼬리에 맺힌 눈물로 시야가 뿌옇게 흐려오는 것을
그는 느꼈다.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 되는 날. 네게 제일
먼저 그 영광을 주려 했더니...... 네가 이토록
헛되이 간단 말인가? 헛허...... 소야!'
냉풍은 툴툴 웃으며 그의 뒤를 바짝 따르고 있는 한
사람의 거인(巨人)에게 중얼거렸다.
"앞으로 일 년 간 전마종(全魔宗)은 일체의 행동을
중지한다. 그것으로써 고인(故人)의 명복을 빈다."
또 한사람,
그는 이를 데 없이 화려한 마차에서 내렸다.
주렴에 달린 수십 개의 보주(寶珠) 중 하나만
가지고도 웅대한 성(城)을 살 수 있을 듯한 마차의
아래에 엎드린 노예의 등을 밟고 내린 뚱보청년은
조상객(弔喪客)들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룬
숭산(崇山)을 망연한 눈길로 바라보다가 돌연, 그
자리에 무너지듯 무릎을 꿇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중원제일(中原第一)의 거부(巨富)!
대보방(大寶幇) 금룡대공(金龍大公) 합돈(合頓).
"소야......"
오랜 후에야 합돈은 아직도 흐르는 눈물을 감추려
하지도 않고 수하들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서쪽 노을이 있는 곳에. 세상의 모든 황금을 다
동원해서라도 가장 화려하고 가장 거대한
황금묘(黃金墓)를 지으라. 나의 친구는...... 유난히
노을을 좋아했으니......"
꽃,
꽃은 아름답다.
그러나 꽃을 쓰다듬는 꽃보다 더 아름답고 향기로운
저 옥수(玉手)의 그림자는 왜 이리도 슬플까?
성옥도(聖玉島)의 검후(劍后) 옥미림(玉薇林).
돌연 그녀가 들고 있던 꽃가지의 중간이 뚝
부러져나갔다.
"그가...... 죽었다......"
슬프도록 영롱한 두 눈에 고이는 것은 탄식 어린
눈물이요, 그 눈물과 함께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옥미림의 몸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 날로써 검후(劍后)는 후(后)의 자리를 떠난다.
내 손으로 요녀(妖女) 운지(雲芝)를 처단하기 전엔,
살아 맹세코 검후라 불리우지 않으리라."
얼굴,
지혜롭고 준수한 얼굴은 고독하게 하늘을 우러르고
있다.
머리에 은보학관(銀寶鶴冠)을 쓴 한 명의
청년문사(靑年文士)였다.
천심곡(天心谷)의 무아선생(無我先生)
손북두(孫北斗).
그리고 내장을 도려내듯 쓸쓸한 한 줄기 탄식이
그의 입에서 흘러 나온다.
"거성(巨星)도 광채를 잃고 이로써 세상은 대혼란
속에...... 어찌할고 소야...... 너는 천하창생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바람부는 절벽 꼭대기에 세 사람이 서 있다. 온
얼굴은 눈물로 흥건한데 짓깨물어 터진 입술 새로
피와 눈물이 뒤엉켜 흐르고 있었다.
검방(劍幇)의 검군(劍君) 소석(蘇石).
"하늘이여......"
도방(刀幇)의 도왕(刀王) 방인(方仁).
"이 목숨 그를 위해 바칠 날을 기다렸더니......"
창방(槍幇)의 창황(槍皇) 유운(柳雲).
"이토록 허무하게 그를 데려가나......"
한 순간, 차차창 하고 시퍼런 광채의 검(劍),
도(刀), 창(槍)이 얽혔다.
"원수를! 복수가 아니라면 죽음을!"
장례식은 이레동안 꼬박 진행됐다.
수십만의 조상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소림사 산문
옆에 한 시대를 마감하는 위대한 영웅의 봉분은
세워졌다. 또한, 그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시구가 새겨졌다.
<영웅서검가(英雄序劍歌).>
一
님이여!
劍을 치켜드세.
이 땅은 그대의 땅,
그대의 용맹만이 물거품처럼 포말을 일으키는 곳,
오오...... 武人이라 불리워진 나의 님이여,
그대는 언덕 위의 맹수처럼 재빠르고 하늘을
불태우고 밤을 불길처럼 용맹했소.
그대의 분노는 폭풍과도 같았고,
그대의 칼은 황야를 훑어 버리는 번개 같았나니...
얼마나 많은 자들이 그대 앞에서 쓰러졌고,
그대의 분노의 불길은 얼마나 그들을 불태워
버렸는가.
삶과 죽음의 능선에 서서,
그대는 홀로 인간 중의 가장 고귀한 사람이 되고
말았구료.
二
님이여, 님이여, 나의 님이여!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르시는가.
그대의 적이 없음을 한탄하시는가.
이제,
세상은 그대를 목메어 기억하게 되리라.
난세를 떨치고 일어나,
불세(不世)의 검명(劍名)을 남긴 그대이시여,
홀로 무인이라 불리운 가장 위대한 검인(劍人)임을
기억하리라.
三
불어라.
불어라 바람,
폭우는 세상을 울고 벼락은 대지를 울어라.
만천하의 고봉 위에 우뚝 선,
슬픈 나의 님의 운명을 울어라.
먼 훗날,
후인(後人)들은 말하리라.
침묵의 언덕에 모여 한탄하리라.
나의 님,
오직 그대만이 이 시대의 진정한 무인이며,
그대의 검은 강하디 강하였고...
그대의 시선은 물결 위의 안개 같았으며...
그대의 삶은 폭풍 속, 불 속의 구름 같았노라고...
* * *
전설(傳說),
그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 사막의
유랑민(流浪民)이나 대초원(大草原)의 유목민들
사이에 떠돌던 전설이었다.
전설의 첫 장(章)!
-서장밀성(西藏密城)!-
이 땅의 서쪽, 은빛 달이 떠오르는 곳에 한 개의
신비로운 성(城)이 있으니 그 성의 광채는 십 리를
비추고 성의 모양은 하늘을 꿰뚫었다.
그곳은 살극파(薩極巴)의 땅.
그 언제든 달이 아닌 태양이 뜨는 날, 이 땅에는
살극파의 시대(時代)가 도래(到來)하리라.
성(城), 신비로운 한 채의 성!
그곳이 어디에 있는지 그 규모는 어찌 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한 가지, 인간(人間)이로되 이미 인간이 아닌
한 사람,살극파(薩極巴),
백 년 전부터 떠돌던 이름이니 그 나이는 이미 백
세를 실히 넘었을 것이요, 일신에 지닌 무예의 깊이는
아예 측정할 수조차 없다.
그 좋은 예로, 오십 년 전, 탑리목분지(塔里木盆地)
일대를 무대로 하여 날뛰던 한 떼의 도적 무리들이
있었다.
납골당(納骨堂).
이들은 도적떼라곤 하나, 그 수는 일만에 다다랐고
그들이 대사막(大沙漠) 안에 지은 성채의 규모는
자그마치 사방 십 리 였다.
이들은 단순한 도적떼가 아니었다. 일국(一國)의
규모에 버금가는 병력이요, 조그만 나라 하나 정도는
능히 무너뜨리고도 남을만한 엄청난 세력이었던
것이다.
일대의 명장(名將), 추용방 대장군이 거느린
십만(十萬)의 중앙관군(中央官軍)은 이들과 꼬박 백
일을 싸웠다.
그러나 지리적 우세를 틈타 자신들의 성채마저
불태우고 도망 다니며, 산개전(散開戰)을 벌이는
납골당의 무리들과는 결국 승부를 못내고 회군하고
말았던 것이다.
관군이 회군한 그 날 밤, 축배를 올리고 있던
납골당의 무리앞에 나타난 한 명의 중년인이 있었다.
납골당의 수뇌가 물었다.
"너는 누구냐?"
중년인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살극파(薩極巴), 이 땅의 진정한 주인(主人)."
그것이 납골당 무리들이 이 세상에서 들을 수
있었던 마지막 한마디였다.
일만(一萬) 대(對) 일(一)의 이 말도 안되는
싸움은, 그러나 다음 날의 여명이 떠올랐을 때부터
납골당의 이름은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하루가 지나면 산이 평지가 되어 있는 사막의
지세처럼, 그들의 이름은 영원히 모래 속으로
파묻히고 말았던 것이다.
서장밀성, 그리고 살극파,
사막의 아이들은 태어나면서 제일 먼저 이 이름부터
들어야만 했다.
저녁의 감귤빛 노을이 아직 허공에서 사라지기 전의
광야에는 여인의 눈썹 같은 초생달이 서쪽 하늘에서
스산한 은빛을 온누리에 뿌리고 있었다.
사막(沙漠),
끝없이 펼쳐진 황사(黃砂)는 달빛을 받은 채 은은한
은빛을 반짝이고, 그 새로 보이는 것은 듬성듬성한
초지(草地)들이다.
듬성듬성이라곤 하지만 하나의 초지 크기는 방원 일
리(里)는 족히 되어 보이는 것이었다.
이 하늘 아래, 이렇듯 방대한 사막과 초지가 더불어
공존하는 곳이라면 오직 한곳 뿐이다.
세인들이 땅의 끝이라 지칭하며, 모래와 잡초와
호수의 땅인 서장(西藏)이었다.
서장의 밤은 좋다.
양에게 풀을 먹인 후, 귀가길에 나선
목동(牧童)들과 살랑이며 초지를 스치며 지나는
신선한 사막의 바람, 더욱이 사막의 지평선과 맞닿은
하늘은 그윽한 감청빛 장공(長空)이니, 이를 일컬어
세외화경(世外華景)이라 하였을까.
돌연, 어디선가 한소리 폭갈(暴喝)이 터진다.
"술! 술을 더 가져와!"
사막조차 떠내려 보낼 듯한 폭갈이었다.
동쪽 초지의 끝인 만리장성(萬里長城)의 한
자락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온통 허물어져내린 빈
성벽에서 폭갈은 터져나오고 있었다.
폭갈에 이어, 근처의 움막집에서 시녀(侍女) 차림의
두 소녀가 정신없이 뛰어 나왔다.
좌측의 소녀가 말했다.
"아나(娥那), 그는 또 무엇을 달라는 거지?"
"술이야, 술. 빨리!"
까무잡잡한 피부며, 얼굴 윤곽이 필경 중원의
여인들이 아니다.
아나라고 불리운 여인은 정신없이 초막의 옆에 놓인
술독을 들고 성벽을 향해 뛰었다.
시녀라곤 도저히 여겨지지 않으리만큼 절쾌(絶快)한
신법(身法)이었다.
그녀는 단숨에 성벽에 뛰어올라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시선 속으로 한 사람의 모습이 쏘아져
들어왔다.
일신에 걸친 백의(白衣)는 깨끗해 보였으나, 그
앞자락은 온통 축축히 젖어 있는 봉두난발의 한 사람,
백의인은 성벽의 한쪽에 가로누워 있었다.
그의 가슴 위에는 술독이 하나 올려져 있었는데,
그것은 이미 동이 나있었다.
아나가 다가서자, 그는 튕기듯 일어나 술독을 뺏아
들더니 또다시 그 자리에 털썩 드러누웠다. 이어,
술단지를 가슴 위에 올려 놓고 천천히 기울이기
시작하니, 반은 가슴으로 흐르며 반은 그의 입 속으로
들어간다.
그 몸 그 동작에서 풍기는 고독한 기운을 도대체
어찌하랴?
달빛 속에서의 그것은 살인적인 허무(虛無)였다.
절망의 모습이었으며 나락을 모르는 절대고독의
냄새였다.
아나의 얼굴에 연민어린 표정이 떠올랐다.
이때, 그녀는 물처럼 고요한 시선이 자신의 얼굴로
와 박히는 것을 느꼈다.
백의인은 그녀를 누운채 바라보고 있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허무의 내음이 자욱이
밴 한소리 중얼거림이 그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나는...... 누구냐......? 내가 모르는,
나는...... 도대체 누구냐?"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핫하하하......" 가슴을
쥐어 뜯는 듯한 광소(狂笑)가 그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아나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지난 육개월동안 매일 보아온 모습이지만 이 모습을
대할 때마다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는 것은 가녀린
여심이다.
그녀는 마음의 흔들림을 들키기라도 할세라 어둠
속으로 섬연한 여체의 흔들림을 남기며 황급히
사라진다.
백의인은 사라져 가는 시녀 아나의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툴툴 메마른 웃음을 흘리며 아득한
지평선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 시선은 이내 천천히 눈부신 달빛 속으로 거슬러
꽂혔다.
나는,
나는 도대체 누구냐......
사막(沙漠),
사막 위엔 두 사람이 있다.
하나는 희고 하나는 검다.
그 중 일신에 눈처럼 흰 백의를 걸친 사람,
나이는 이제 사십이나 되었을까? 일견해 보기에도
그 용모가 범상치 않다.
머리에는 아홉 마리의 금룡(金龍)이 조각된
구룡관(九龍冠)에, 허리에는 구색(九色)의
점청옥대(點靑玉帶)를 차고 양 손에는 마노(瑪瑙)가
박힌 명주선(明紬扇)을 여유롭게 들었다.
뿐만 아니라 그 몸에서 풍기는 기질은 한마디로
태산중중(泰山重重)한 위엄이 있었고 그 서릿발 같은
위엄은 주위의 공기를 얼려 붙이는 듯하였다.
백의중년인(白衣中年人)의 좌측 반 보 뒤로 서서
군신(君臣)의 예를 지키고 있는 냉막한 장년의 또 한
사람은 우수에 한 자루 번뜩이는 금창(金槍)을
들었다.
먹물같은 흑의(黑衣)를 입은 탓인지 더 창백해
보이는 얼굴에 서린 기운은 오직 냉막 뿐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은 곧장 사막 위의 허물어진 성벽을
향하고 있었다.
"대극(大戟)."
중년인의 입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를 살려 내는데 얼마만한 비용이 소요되었는가?"
흑의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무표정한 어조로
대답했다.
"사만 곳으로부터 채집한 영초(靈草)가 이백 수레,
육만 곳으로부터 모은 영약(靈藥)이 삼백 수레,
동원된 신의(神醫) 오백 명, 채집인원 이만 명과
구호인원 오천, 도합 이만 오천 오백의 인원과 황금
일천만 냥이 그를 살려 내는데 소요되었습니다."
"지금의 상태는?"
"신체조건은 양호합니다. 다만 과거의 기억을
상실함으로 하여 지니고 있던 무공 또한 망각의 늪
속에 빠져 있습니다."
"......"
"기억이 찾아지지 않는 한, 그가 무공을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그는 지금 범인과
다름없습니다."
백의중년인은 느릿하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무엇인가를 오랫동안 생각하는 듯했다.
이윽고, 다시 말을 잇는다.
"그의 신분은 밝혀졌는가?"
"당시 대상(大商)으로 가장한 본성(本成)의 행렬이
삼신산(三神山) 제일봉(第一峯)을 지나갈 때, 그 일대
백 리(理) 내에 있던 사람의 수는 모두 이백오십칠
명입니다."
"흐흠!"
"그 중 무림인(武林人)은 열일곱, 또한 검이 심장을
관통하고도 목숨을 이어갈 수 있는 내력의 소유자는
열일곱 중에서도 둘 뿐이었습니다."
"둘? 그들이 누군가?"
"주공(主公)."
흑의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가 구한 사람은 바로 중원제일인(中原第一人)
추소야(秋少爺)입니다."
순간, 바람도 없는데 백의중년인의 장포(長袍)가
부르르 떨렸다.
"추소야?"
"그날은 전설의 옥혈비전이 일어났던 날입니다.
추소야는 담로비전과 천화비전을 더불어 지닌 자로서
옥혈비전을 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불행하게도 그는 옥혈비전을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이상하군. 내가 알기로 추소야는 능히 옥혈비전을
이길수 있었을텐데?"
"소신의 생각으로는 그에게 옥혈비전을 대하기 전에
일종의 심마(心魔)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무리 무예가 뛰어나고 천화,담로의 양 비전을
지니고 있어도 마음이 명경처럼 맑지 않고는
옥혈비전의 마무(魔舞)를 이겨낼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옥혈비전의 신녀는 마녀(魔女)가 되었겠군."
"이름을 운지(雲芝)라고 들었습니다."
백의중년인은 침중한 시선을 허공으로 던졌다.
그는 야심이 큰 사람이다. 야심이 큰 만큼 힘도
있다.
그가 대상(大商)으로 가장해서 중원으로 들어갔던
것은 중원을 공략하기 위한 그의 마지막 탐색이었다.
그때 그는 실로 놀라운 이름을 들었다.
--추소야(秋少爺).
중원 천지를 메아리치던 이름이었다. 그리고, 전
중원인이 이 한 사람을 애도하여 팔에 흰 띠를 두르고
있는 것도 보았다.
그것은 충격이었다.
'한 사람의 힘이 이토록?'
그는 자신의 야망을 고려해야만 했다. 뭉쳐 있는
중원을 깨기란 어려운 얘기였다.
결국, 백의중년인은 중원패업의 야망을 삼 년 뒤로
미루어야만 했으며, 그리고 그는 돌아오던 길에
피투성이가 된 청년 하나를 구했던 것이다.
백의중년인은 오랜 후에야 입을 열었다.
"놀라운 일이긴 하지만 계획은 변동이 없다."
"주공!"
"그가 추소야든 아니든 그는 나 살극파(薩極巴)의
네번째 후계자가 된다."
"그는 중원인입니다. 가장 위대한 중원의
혼(魂)입니다."
"그는 서장밀성(西藏密城)을 승계할 네번째 서열의
후계자이다. 나는 두 번 말하지 않는다, 대극(大戟)."
백의중년인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신화궁(神花宮)을 거치게 한 후,"
소리를 잘라 베듯 단호한 목소리,
"성으로 데려 오라."
넓디넓은 사막이련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람은
이미 간 곳이 없다.
흑의인은 망연히 하늘을 우러르며 한 줄기 탄식을
터뜨렸다.
"서장의 대업(大業)을 중원인에게......?"
문득, 흑의인은 한 줄기 불길한 예감이 가슴 깊숙한
곳으로부터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뿐, 흑의인은 이내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와 선뜻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복종은 그의 첫번째 습관이었던 것이다.
슈욱!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그리고 보았다.
청광(靑光)이 날 끝에서 이글거리는 한 자루의
수리검이 두 눈 속으로 섬뜩하리 만큼 빨리 쏘아져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피하고 자시고 할 겨를이고 뭐고 없다.
누가 보았다면 그 검이 그의 얼굴을 정통으로
관통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장내에선 엉뚱하게도 날카로운 쇳소리가
터져나왔다.
날아들던 수리검은 거의 육안으론 알아보기도
힘드리 만큼 미세한 차이로 사람의 얼굴이 아닌
돌벽을 꿰뚫었던 것이다.
한 사람이 백의청년의 앞으로 환영처럼 스르르
내려섰다.
사자의 얼굴처럼 창백한 한 명의 흑의인이었다.
그의 몸에선 여름폭양도 얼어붙일 듯한
한기(寒氣)가 풍겨나오고 있었으나, 백의청년의
표정은 돌처럼 고요했다.
그는 지금 몹시 의아한 심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흑의인은 누구이며 왜 자신을 향해 수리검을
던져냈을까? 그리고, 어째서 자신은 분명히 그 암기가
쏘아오고 있음을 알아차렸음에도 불구하고 미동조차
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습관처럼 조금의 두려움도 느끼지 않은 채, 마치
수리검이 자신의 목을 정확히 머리카락 한 올 만큼
비켜 지나가리라는 것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이때, 흑의인의 얼굴에 한 줄기 흰 선(線)이
그어졌다. 그것은 웃음이었다.
"귀공은 훌륭한 무예의 소유자이오,
목리공(木里公)."
백의청년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나는 무예가 뭔지 몰라. 당신이 나를 향해 말한
목리공이란 이름은 더 더욱 몰라."
"그러나, 귀공은 목리공이오. 그리고 이 이름은
서장밀성(西藏密城)의 위대한 네 번째 후계자를
일컬음이오."
"내가?"
"귀공은 잠시 집을 떠나 있었을 뿐이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귀공을 기다리고 있소. 귀공이
돌아오기를."
"나를?"
안개처럼 모호한 얘기였다.
그 동안 백의청년의 모든 생각은 언제나 안개 속을
헤매듯 혼미스러운 것뿐이었다.
아주 잠깐 동안, 어떤 영상인가가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가도 그 영상을 확실하게 더듬어 볼라치면
더욱더 혼미해지고 말곤 했다.
"이제 귀공의 약정된 휴양기한은 끝났소. 성주께선
귀공이 속히 성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시오."
말과 함께 흑의인은 한쪽을 가리켜 보였다. 그곳엔
한 대의 호화로운 마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귀공은 긴 휴양기간으로 인해 지니고 있던 많은
것들을 잃었소. 저 마차는 귀공을 한곳으로 안내할
것이오. 또한, 귀공의 잃어버린 세월들을 충분히
보충해 줄 것으로 믿소. 연후, 성으로 돌아오시도록,
부디......"
흑의인은 두 손을 정중히 모아보였다.
"많은 것을 찾으실 수 있기를."
마차가 달리며 일으키는 황사(黃砂)가 달빛 아래
뽀얗다.
백의청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남자라고 하기엔 믿어지지조차 않을
정도다.
허물어진 석벽과 깨어진 술독의 이곳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일신에 어리는 고귀한 귀풍(貴風)에 어울리는
신분이 그에게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목리공(木里公)이란 이름은 자신에게 너무
낯설기만 했다.
沙漠의 배
-귀공이 만나야 할 사람은 바로 신화궁의 주인이오.
또한, 그분은 본성(本城)의 제이인자(第二人者)이기도
하다오. 하나, 이제까지 성주님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 모습을 뵈온 적이 없는 신비로운 분이오. 성의
이인자이면서도 정작 성에는 한번도 오신 적이 없는
기이한 분이기도 하오. 귀공은 그분을 만나는 두
째번의 사람이오. 비명(秘名)은 마황천(魔皇天)이오.
이후의 일은 그분과 상의토록 하시오. 이는 성주님의
특별하신 배려외다.-
저녁 노을을 등에 지고, 유목민(遊牧民)들은 빙
둘러앉아 모닥불을 태우고 있었다.
하늘은 붉고 모닥불의 불꽃 또한 홍염이다.
남녘 하늘에는 신성(新聖)들의 별빛이 사르르
피어오르고 있고, 귓전을 스치는 바람조차 더 이상
뜨겁지 않은 사막의 저녁에서 유목민들은 한가한
이때를 벗삼아 하루의 일들을 정겹게 얘기를 나누고
있나보다.
목리공은 녹주(綠州)의 나무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있었다.
그가 타고 있는 마차를 끄는 네 필의 말들은
신마(神馬)였다.
그들은 목리공이 말하지 않아도 갈 때 가고 쉴
곳에서 몸추곤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저 말들은 갈 때가 되면 푸르르
갈기를 떨며 목리공을 부를 것이다.
목리공은 몹시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신화궁이라고는 하지만, 그는 그곳이 어디에
있는지, 또 얼마나 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목리공은 하늘을 우러러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말이 인도하는 길을 따라가듯 어디든 가 본다.
이때다. 사막 저편에 자욱한 황진(黃塵)이 있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십 수 기(騎)의 기마대가 무서운
기세로 이쪽을 향해 질주해 왔다.
무심코 그쪽을 향해 시선을 던지던 유목민 중의 한
사람이 놀람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헉, 저, 저것은 혈사대(血沙隊)?"
순간,모여 있던 중인들의 표정이 창백하게 질렸다.
사막에는 도적떼가 있다. 이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흉폭하다.
유목민족 안의 도적떼인지라, 이들은 자신들의
얼굴이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 한다. 그래서, 단
한번이라도 시선만 마주치면 가차없이 살검을
휘두르는 이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사막의 열 두 개 도적떼 중에서도 가장
흉폭하다는 혈사대가 느닷없이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유목민들은 앞을 다투어 얼굴을 모래 속에
처박았다.
저들에게 죽지 않은 방법이라면 단 하나, 아예
얼굴을 보G 않고 고스란히 물건을 바치는
수밖에없다.
"ㅋㅋ......" "흐흐......"
기마대는 눈 깜박할 새에 일행의 앞에서 말고삐를
당겼다.
하나같이 흉측한 몰골들.
그 중, 핏빛 뱀 문신(文身)을 가슴 가득 새긴
맨몸의 청년 하나가 가장 눈에 띈다.
그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컸다. 말을 타고 있으나,
두 발 끝이 땅에 닿아 말은 말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가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 자루 창을 쥐고 있으되,
창신(槍身)의 두께는 놀랍게도 어른 주먹만한
것이었다.
그는 머리를 처박고 있는 일행을 쭉 휘둘러 보더니
짙은 검미를 가볍게 찌푸렸다.
"잘못왔다! 이건 거지새끼들이 아닌가?"
그는 말을 잇다 말고 느닷없이 더욱 험악해지는
얼굴이 되었다.
그의 동공 속으로 한 인영이 비쳤다. 비스듬히
나무에 기댄채 태연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헌데 아름답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다.
'감히 나를 정면으로 쳐다보다니, 찢어죽일 놈.'
거한은 싸늘하게 웃으며 그를 향해 말을 몰았다.
"네놈은 누구냐?"
불쑥 창(槍)을 내밀며 내뱉은 험악한 말이었다.
그러나, 아름다운 사내는 창끝이 목줄기를 찌르고
있는데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태연자약했다. 아니,
그는 지금 창이 목을 찌르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는 사람 같았다.
그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혈사대가 나타날 때부터,
그들이 손을 든 흉험한 병기(兵器)들과,
그리고 살기(殺氣).
그것들은 한 순간 너무도 익숙한 느낌을 주었다.
마치,
헤어졌던 여자를 다시 만났을 때처럼,
그리고 운명(運命)처럼.
혈사대주(血沙隊主)는 두 눈에서 와르르
살광(殺光)을 쏟아냈다. 그는 눈앞의 미청년이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다.
"죽어라!"
혈사대주는 무서운 기세로 창을 찔러갔다. 그러나,
그의 창은 헛되이 허공을 베고 나와 나무를 찌르고
말았다.
창의 목표였던 미청년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그는 엉뚱하게도 삼 장 밖에 선 채 조용히 하늘을
우러러 보고 있었다.
혈사대주는 심장이 떨어져나갈 만큼 놀랐다.
그는 아직까지 이렇게 빠른 신법(身法)의 소유자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너, 너는 도대체 어떻게 피했는가?"
미청년의 시선이 힐끗 그를 향했다.
"몰라."
기이한 일이었지만 미청년 목리공은 자신이 어떻게
그 창을 피했는지 정말 모르고 있었다.
그저 본능적으로 위험하다고 느꼈을 뿐, 그 느낌의
뒤에 그는 이미 다른 곳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던
것이다.
혈사대주의 얼굴이 모래 10은 표정으로 변했다.
굴욕의 뒤는 분노다.
"크아악!"
그는 나무에 박힌 창이 잘 뽑히지질 않자, 더운
김을 코끝으로 내뿜으며 말등에서 한 자루
거도(巨刀)를 뽑아들었다.
장한 서너명이 달라 붙어도 간신히 들 수 있을까
말까 한 거대한 칼이었다.
헌데 도대체 손아귀에 얼마만한 힘을 준 것일까. 채
휘두르기도 전에 강철로 만든 칼의 손잡이는 먼지처럼
부서져나가고 만다.
신력(神力)! 가공할 신력(神力)이었다.
혈사대주는 다급해졌다.
분노에 찼으니 이성을 잃긴 잃어야 겠는데 그
기회가 마땅치 않다.
그는 아쉬운 대로 말의 두 다리를 채어 잡았다.
이어, 그것을 머리 위로 빙빙 돌리며 맹수처럼
목리공에게 달려들었다.
"죽어라!"
다음 순간, 괴이한 일이 벌어졌다.
혈사대주는 정말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모래 속으로
몸과 얼굴을 미친듯이 처박았다.
뿐인가? 오체복지(五體伏地)의 몸은 부들부들
떨기조차 하는 것이었다.
목리공은 지극히 의아해졌다.
저 작자는 이성을 잃다못해 미쳐 버린 것인가?
헌데, 미쳐 버린 사람은 혈사대주 뿐만이 아니었다.
유목민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 흉폭하던 혈사대의
무리들 또한 모조리 오체투지(五體投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소리 기이한 소리가 귓전을 파고 들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소리는 목리공의 뒤쪽에서 나고 있었다.
목리공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순간, 그의
고요하던 두 눈에 놀람의 빛이 번뜩 스쳐지났다.
아득한 사막의 능선으로 거대한 달이 뜨고 있었다.
그곳으로 미끄러지듯 달려나가고 있는 한 척의 배가
있었다.
배는 바다에 뜨는 것이다. 사막에 뜨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옥색(玉色) 투명한 배는 분명히 사막위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이때 부들부들 몸을 떨고 있던 거한 혈사대주의
입에서 신음 같은 중얼거림이 새어나왔다.
"하늘의 꽃, 오오...... 신화(神花)."
배는 이내 사라졌다.
그 나타났다 사라지는 모양이 너무 느닷없었던
탓으로 한 줄기 환영인 것으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배가 사라지기 무섭게 혈사대의 무리들은 꽁무니가
빠져라고 배의 반대쪽으로 달아났다.
그 중 혈사대주는 아예 자신의 말을 등에다 진 채
달려가고 있었다.
"신화(神花)...... 신화라고...?"
목리공은 신음처럼 중얼거리며 아득한
야음(夜陰)으로 시선을 던졌다.
말(馬)들은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목동(牧童)은 흠모에 찬, 그러나 은밀한 두려움이
섞인 표정으로 한곳을 가리켜 보였다.
"저곳이예요. 그러나 유사지대(流沙地帶)지요."
혈사대를 만난 지 이레 후, 목리공의 마차는 또
다른 사막 앞에 섰다.
마(魔)의 지대,
모래는 거대하게 뭉쳐 흐르고, 깃털이라도 걸리기만
하면 흔적도 없이 삼켜 버리고 마는 저주(詛呪)의
유사지대였다.
"저곳이란 말인가?"
목동은 저 안에 신화궁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또한, 그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그분은 우리의 신(神)이지요. 얼굴도 모습도
모르지만 사막의 모든 사람들은 그분의 은혜를 입고
있어요.
그분은 죽어가는 사람을 능히 살려내지요. 하룻밤
만에 성(城)을 지었다가 헐기도 하고, 그분의 배는
사막을 둥둥 떠다닌답니다.
하지만 그분을 만나기는 어려울 거예요. 아직까지
신화궁이 있는 유사지대를 들어갔다가 살아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거든요.-
네 번째 말의 한쪽 발이 모래 속으로 빠져들어간
것은 전혀 뜻밖의 일이었다.
그 동안, 네 필의 말은 마치 길을 알고 있는 거처럼
유사의 사막을 지나왔기 때문이다.
뜻밖이니 손쓸 겨를도 없다.
목리공의 시선이 닿는 동안에 발 전체가 모래
속으로 빠져 들어간 것은 네 번째의 말이었다.
시선이 한번 깜박이는 동안에 허리까지 파묻히고
있다.
이때 돌연, 세 번째 말이 느닷없이 자신과 네 번째
말을 잇고 있던 줄을 물어뜯었다.
동시에 앞에 있던 첫째, 두번째 말이 머리를
후려차니, 그렇잖아도 빠져들고 있던 네 번째 말의
몸은 순식간에 모래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놀라운 일이었다.
만약 세 필의 말들이 그토록 신속하게 행동하지
않았다면, 네 번째 말은 말할 것도 없고 마차까지
송두리째 유사 속으로 빨려들고 말았을 것이다.
목리공은 숨을 삼켰다.
어느곳에서도 그는 일찍이 이렇듯 훈련이 잘된
짐승은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 짐승들은
바로 신화궁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닌가?
"신화......"
신화궁주, 그는 과연 누구인가?
여러 방면의 기예에 달통한 인간인가, 아니면 정말
신(神)인가?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신이든 인간이든 이제부터
목리공은 그 사람을 만나야만 했다.
끝을 알 수 없도록 광활한 초지가 펼쳐지고 있었다.
목리공은 초지가 너무 갑자기 나타나고 또한 그
동안의 사막이 너무 갑자기 사라진 탓으로 얼떨떨한
기분인 채 마차에서 내려섰다.
자신이 딛고 선 곳은 마지막 모래언덕이었다.
그의 투명한 시선 속으로 넓디넓은 초록의 행렬이
쏘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한곳,
환상(幻想)인가...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모래로 지어진 궁(宮)이었다.
억겁의 세월을 지나온 듯 돌처럼 딱딱해 보이는
모래 궁벽과 모래궁문,그리고 모래탑들,
궁의 규모는 멀리서 보기에도 웅장하기 이를 데
없었다.
목리공은 기광(奇光)이 일렁이는 시선으로 그
모습을 지켜 보다 선뜻 초지 위로 한걸음을 내디뎠다.
<신화궁(神花宮).>
헌데 그것도 현판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방 귀퉁이는 벌레에 파먹힌 듯 움푹 패여 들어간
데다, 글씨의 칠은 다 벗겨져 너덜거리는 통에,
목리공은 그것이 신화궁을 의미하는 것임을
한참만에야 알아볼 수 있었다.
더욱이 그는 궁문(宮門)을 밀다 말고 주춤 한걸음
뒤로 물러나야 했다.
모래로 만들어진 그 궁문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벌레들이 꿈틀대고 있기 때문이었다.
목리공은 자신의 내부에서 신화궁(神花宮)에 대한
호기가 불끈 치미는 것을 느꼈다.
그 기운은 몹시 낯익은 것이었다. 그것이 낯익은
것이란 걸 음미할 새도 없이 목리공은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궁내의 내부 구조는 일견하기에도 몹시 복잡했다.
가운데로 난 모래길을 사이로 양쪽에 즐비하게 늘어선
모래 누각과 전각(殿閣)들이 있었다.
전각, 누각들이 워낙 빽빽한 탓으로 목리공은 마치
양측으로 모래절벽이 쭉 이어져 있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그 속으로 다섯 걸음이나 옮겼을까?
돌연 괴이한 노린내가 코를 찔러 왔다. 동시에
사방에서 대여섯 마리의 황소만한 개들이
어슬렁어슬렁 나타났다.
두 눈으로 솟구치는 혈광(血光)과 송곳처럼 허공을
향해 솟구친 털이 있는 괴이한 모습이었다. 이는 바로
호랑이도 물어 죽인다는 서장견(西藏犬)이었다.
목리공은 조심스럽게 응전태세를 취했다.
그는 자신이 어떤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 전혀
몰랐다.
개들이 갑작스럽게 덤벼 든다면 어떻게 피해야
할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때 한 마리의 서장견이 풀썩 허공으로 뛰어
올랐다.
침이 흐르는 흉측한 이빨 새로 사나운 울부짖음이
터져나온다.
그런데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흉측스런 맹견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엉뚱하게도
닭 우는 소리였다.
그것을 필두로 나머지 개들 또한 이리저리 뛰어
다니며 미친 듯이 짖어대기 시작했다.
꼬꼬댁댁, 꼬꼬댁댁!
뿐인가. 한 마리의 고양이가 달려 나오더니 궁이
떠나갈 듯한 호랑이의 표효를 터뜨려 내고, 까마귀는
허공을 날면서 고양이 울음소리를 흘려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목리공은 머리가 혼란해지기 시작했다.
어떤 곳에선 늑대가 풀을 뜯고 있었다.
연못 속의 잉어는 고기를 10고 있었으며, 호랑이는
쥐에게 쫓겨 도망가고 있었다.
두더쥐는 날개가 달려 하늘을 날고 있었고,
독수리는 열심히 땅을 파고 있었다.
꼬꼬댁! 꼬꼬! 크르르... 어흥! 야옹... 야옹...
돈다! 돈다! 마구 돈다.
바위에서 풀이 자라고, 땅 위로는 송사리 떼가
뛰어다닌다. 물고기가 물에서 익사하고, 새들은
하늘을 날며 포효한다.
목리공은 귀를 틀어막았다.
그는 눈까지 감은 채로 미친 듯이 전면에 보이는
모래집 속으로 뛰어들었다.
맹렬히 문을 닫아거는 바람으로 일체의 소리는
사라져 버렸으나,순간 목리공은 역겨운 내음이
자욱하게 코속으로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몸이 물 속에 무릎까지 잠겨 있는 것을
깨달았다.
물은 천정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목리공은 무심히 얼굴로 떨어져 묻는 물자국을 닦아
내다가, 순간,"헉!"헛바람을 들이키며 주춤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이어, 그는 허리를 새우처럼 구부리며 격한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가 물이라고 여겼던 것은 바로 모조리
피였다.
뿐만 아니라, 자세히 보자니 사방의 벽엔 제멋대로
잘려져나간 사람의 사지(四肢)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그것들은 지금도 핏물을 마구 떨구어 내고
있었으며, 허공에선 피로 범벅이 된 수급이
대롱거리다가 떨어져내리기도 했다.
목리공은 회의에 찬 표정으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십팔층 무간지옥(無間地獄)이라 한들 이곳처럼
공포스럽지는 않을 것이며, 저주에 찬 악마의 땅인들
이곳처럼 사기(邪氣)에 차 있지는 않을 것이다.
바로 그때, 목리공은 자신의 어깨를 사정없이
낚아채는 우악스런 손길을 느꼈다.
황망히 고개를 돌린 그의 시선 속으로, 목아래의
몸뿐인 동체 하나가 그의 어깨를 움켜잡고 있는 것이
보였다.
목리공의 두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물러나랏!"
한소리 폭갈에 이어, 그의 쌍수(雙手)가 쭈욱
앞으로 뻗어나갔다.
순간, 사방으로 회오리치며 폭사해 나가는 한
줄기의 거력으로 인해 동체가 산산조각 난다.
핏물이 사방으로 난무하고 매달려 있던 사지와
모래벽이 송두리째 허물어져나갔다.
혼란의 와중에서 목리공은 자신의 몸이 가득한 심연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것 뿐이었다. 그는 이내 모든 의식을 잃고
있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 때 목리공은 천천히 두
눈을 떴다.
순간, 그의 시선 속으로 격렬한 놀람의 빛이 번뜻
스쳐지났다.
전혀 엉뚱한 모습이다.
귓전을 어지럽히던 요사한 짐승이며, 소름끼치는
피(血)와 인육(人肉)의 행렬,그리고, 벌레가
우글거리는 모래성 대신 목리공의 앞에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경치가 펼쳐져 있었다.
베면 피라도 밸 듯 짙푸른 하늘 아래, 파릇한
풀밭과 그 위로 흐드러지게 피어난
기화요초(琪花瑤草), 자연적으로 생식된 아름다운
모양의 암석 새로 소리내어 흐르는 시냇물이며,
풀밭의 한쪽에는 청평초(淸萍草)가 둥둥 뜬 연못이
있고, 물 위로는 날아갈 듯 아름다운 두 채의
죽루(竹樓)가 그득하게 서 있으니, 도대체 뉘라서
사막의 안에 이러한 선경(仙境)이 있음을 상상이나 해
보았으랴.
초지의 말뚝엔 다음과 같은 글귀의 석비(石碑)가
하나 서 있었다.
<신화지지(神花之地)>
그렇다면 이곳이야말로 진정한 신화궁(神花宮)이란
말인가?
마치 병풍처럼 선경(仙境)을 둘러싸고 있는 단애를
묵묵히 바라보던 목리공은 이윽고 연못 위의 죽루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두 개의 죽루는 하나의 운교(雲橋)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서 있었다.
목리공은 그 중 좌측의 죽루로 먼저 들어섰다.
안의 구조는 단순했다.
짐승가죽의 침상과 탁자에 의자 하나, 그리고,
오동나무 문갑과 대나무 죽함 몇 개가 시설물의
전부였다.
헌데, 그 배치가 어찌나 정교한지 한 올의 허술함도
찾아볼 수 없었으며, 색과 색의 절묘한 배합으로 인해
방안은 고향처럼 안온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목리공은 검미를 가볍게 찌푸렸다.
'이 방은 마치 나를 위해 만든 것 같지 않은가?
내가 놓아도 이렇게 놓았을 것이며 이 색들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이다.'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은 방벽을 빙 둘러가며
붙여놓은 그림이다.
웃고, 찡그리고, 탄식하고 그것은 하나같이 사람의
상반신만 그려 놓은 초상화였으며 또한 그 초상화의
주인공은 바로 목리공 자신이었던 것이다.
그 외에도 죽루는 두 개의 조그만 방과 소청 하나,
주방 등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그 중 한 방에는
온방 가득 수북한 약초며 단약 등이 쌓여 있었다.
이런 것들을 유심히 둘러보고 난 목리공은 운교를
지나 두번 째 죽루로 걸음을 옮겼다. 걸으며 그는
가볍게 감정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신화궁주(神花宮主)라는 이 신비한 인물은 과연
저곳에 있을 것인가? 있다면 그는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까?
삐이걱 거리며 문이 열렸다.
순간 느닷없이 흰 그림자가 번쩍 눈앞을 스치는가
싶더니 혼탁한 목소리 하나가 귓전을 파고 들었다.
"왔다, 왔다."
목리공의 놀란 눈빛 속으로, 허공을 빙글빙글
맴돌고 있는 한 마리의 새가 쏘아져 들어왔다.
그것은 전신이 눈처럼 하얀 털로 뒤덮인
앵무새였다.
또한 방안엔 눈앞도 제대로 분간할 수 없는
수증기가 뭉클뭉클 피어오르고 있었다.
거기다가 가볍게 물을 퉁기는 소리가 이어진다.
누가 목욕이라도 하고 있는 것이리라.
목리공은 황급히 문을 닫고 돌아서려 했다.
바로 그때, 느닷없이 수증기 속으로부터 손 하나가
불쑥 내밀어졌다.
얼음처럼 매끄러운 살결에 모공(毛孔)조차 보이지
않는 가늘고 긴 손가락의 이 손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다왔다.
그것을 두고 옥수(玉手)가 어쩌느니 말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그럴 수밖에그것은 애당초 인간의
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손은 손목까지밖에 없었다. 그 뒤엔 길다란
막대기가 박혀 있었으며, 그 막대기를 또 다른 손이
잡고 있었다.
그 손은 평범한 여인의 손이었다. 봉숭아 물까지도
들인 것으로 보아 소탈한 성격인 것이리라.
"이상한가요? 외간남자에게 처녀의 손을 보여줄 순
없잖아요. 이 손은 내가 심심해서 만들었던 것인데
다행히 쓸모가 있군요. 그건 그렇고 옆에 있는 수건
좀 집어 주겠어요? 나는 목욕을 너무 오래 해서
현기증이 나는군요."
첫마디에서 끝마디까지 숨도 쉬지 않는다.
아무리 청력이 훌륭한 사람이라도 이 말을 반 이상
알아 듣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얼떨결에 수건을 집어 주자 아름다운
인조수(人造手)는 그것을 낼름 집어갔다.
그 손은 산 사람처럼 움직이는데 조금의 어색함도
없었다.
차 반 잔 정도 마실 시간이 지난 후, 수증기 속에선
한 인영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일신에 걸친 옷은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청의(靑衣),
머리는 폭포수처럼 흘러내려 허리께에서 찰랑이고,
나이는 이제 십 칠팔 세나 되었을까.
그녀는 그렇게 아름답다고 볼 수 없었다. 그리
늘씬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평범한 모습에는
기이한 매력이 보석처럼 매달려 있었다.
보는 이의 오장육부까지 맑게 다듬어내는
청초함이랄까,깨끗함이랄까.
설원(雪原)의 빙정(氷精)같은 순수함이 그녀의 용모
속엔 깃들어 있는 것이다.
청의소녀(靑衣少女)는 순식간에 문 앞까지
이르렀다.
그 동안, 그녀는 문가에 서 있는 목리공쪽은 한번도
바라보G 않았다.
문을 밀고 한걸음을 내딛는가 싶더니, 돌연, 그녀의
머리카락이 부드러운 호선(弧線)을 그었다.
그리고 물처럼 고요한 음성이 그 뒤를 이었다.
"바보, 빨리 따라오지 않고 뭐해요?"
목리공은 얼떨결에 되물었다.
"당신이 신화궁주이오?"
청의소녀의 입가에 배시시 웃음이 번졌다.
"그러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떻지요? 중요한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잖아요. 내가 여기에 있었고, 그리고
그대는 마침내 날 만났어요."
여자가 얼마나 말이 많은가는 하늘만이 알 것이다.
그러나, 그 하늘도 오늘 이 자리에서만큼 말이 많은
여자는 감히 상상해 보G도 못했을 것이다.
그녀의 입은 마치 그녀의 몸과 독립된 기관같았고
그녀의 말은 그녀의 의지와 아무 상관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목리공은 느닷없이 빗자루를 들고 죽루의 안과
죽루의 밖을 치워야만 했다.
그는 초원의 한쪽에서 채소를 뽑아와야 했으며,
또한 그것을 정갈하게 씻어 청의소녀 앞에 바쳐야만
했다.
그는 깨끗한 자신의 손이 더럽다는 사실을
강요당해야만 했으며, 구운 무우와 채 익지도 않은
고기, 설익은 콩을 맛있다고 먹을 수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런 일련의 것들은 절대로 그를
기분나쁘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시간이 지날 수록 자신의 마음이
기묘하게 밝아지는 것을 느꼈다.
목리공은 실소를 터뜨렸다.
저 소녀는 지옥에서도 명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청의소녀를 도저히 신화궁주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녀는 다만 맑고 투명한 십 팔 세의 소녀에
불과했다. 청의소녀는 정말 해맑고 순수했다.
한번 눈길이 닿을때는 몰랐더니,
두 번 눈길이 닿자 그녀는 놀랍도록 아름다왔다.
세 번 눈길이 닿자 그녀의 보석 같은 아름다움은
주위마저 순수하게 물들이는 듯하고,
네 번 눈길이 닿자 시선조차 떼일 수가 없다.
목리공은 탄식을 터뜨렸다.
이 평범한 소녀는, 그러나 그는 지금까지 이토록
많은 아름다움을 소유하고 있는 여자는 한번도 본적이
없었다.
"유나(瑜那)."
선경(仙境)은 밤도 아름다왔다.
각주(角柱:난간)에 앉아 마시는 한 잔의 술도
좋지만, 귓전을 스치는 바람이며 하늘과 호수에
더불어 뜬 달빛은 더욱더 좋았다.
나직한 부름이 있자 소녀는 시선을 목리공 쪽으로
돌렸다. 그녀의 눈빛은 호수처럼 그윽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나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오?"
"......"
"나에겐 잃어버린 세월들이 있다고 했소. 그것을
찾기 위한 첫번째 방법이 이곳이라고 했소.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가르쳐 주시오. 나는 나를 알고
싶소."
격앙되는 어조였다.
아주 잠깐 동안 신화궁주 유나의 눈빛 속으로
연민지정이 번뜻 스쳐지났다. 허나 그것도 잠시,
유나는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서두르면 안돼요. 그대의 잃어버린 세월을 누가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예요. 스스로 찾을
수밖에 없어요."
"......"
"내가 그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주 미세한
것들이예요. 그대는 이미 그 자체로써 완벽해요. 다만
그대가 스스로 그것을 모르고 있을 뿐, 나는 그것을
일깨워 줄 순 있어도 가르쳐 줄 순 없어요."
그녀는 팔랑이는 머리카락을 들어 올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밤이 깊었어요. 이만 자도록 해요."
목리공이 알기로는 침대는 하나 뿐이었다.
그는 잠시 당황했다. 어디서 잔단 말인가?
건너편의 죽루는 욕실(浴室)과 약재 창고로 쓰일 뿐
몸을 누일 공간이라곤 전혀 없었다.
유나는 먼저 방안으로 들어섰다. 이어, 그녀는
조금의 스스럼도 없이 옷을 벗기 시작했다.
풍만하면서도 군살이라곤 없는 매끈한 몸매였다.
우유빛 가슴과 탄력있는 허벅지는 너무 갑자기
드러나 버렸으므로,그리고 그 모습에는 조금의 성적
충동도 숨어 있지 않았으므로, 이 순간 목리공은
자신이 옷을 입고 있다는데 대해 묘한 죄책감을
느끼고 말았다.
그는 신비로운 경치 앞에 압도되어 선 사람처럼
숨조차 크게 내쉬지 못했다.
아쉽게도 복숭아빛 동체(銅體)는 이내 이부자리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녀는 목까지 이불을 끌어 올리고는 아직도 문가에
멀건히 서 있는 목리공을 향해 가볍게 웃어 보였다.
"바보, 뭘하고 있지요? 그곳에 선 채 밤을 새울
생각인가요?"
"나는......"
목리공은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결국 침상의 앞으로
다가서고 말았다.
의자나 바닥에서 잘 수도 있었으나 그러기에는
유나의 거침없는 행동에 대한 특유의 오기가 더
컸는지도 모른다.
언제부터인가?
목리공은 자신의 안에 두 개의 자기(自己)가
존재한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 하나는 말하고 행동하는 지금의 자신,
또 다른 하나는 오늘처럼 느닷없이 오기라든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마음의 심부(深部) 깊숙한
곳으로부터 솟아나오곤 하던 의외의 감정들이었다.
'나, 이 다른 나는 도대체......'
생각은 마치 파도처럼 일시에 전신을 휘몰아쳤다.
그러나, 생각은 멀고 여체는 가깝다.
목리공의 벗은 살갗이 유나의 몸을 스쳐도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최초의 입김이 우유빛 목덜미를 스치자 유나는
오히려 섬섬옥수를 목리공의 어깨에 둘러왔다.
살갗과 살갗이 맞닿는 감촉은 섬뜩하도록
충동적이었다.
목리공은 향기로운 꽃밭 속에 파묻힌 듯한 충동을
느꼈다. 여인의 몸은 솜처럼 부드러웠다.
사내가 자신의 몸을 타고 오르자 유나는 시선을
천정으로 던졌다.
그 시선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무심(無心)의
눈빛이었다.
천장은 대나무였다. 그곳에는 언뜻 보아도 잘
알아보기 힘들 만큼 작은 사량계(沙量計:모래시계)가
하나 매달려 있었다.
모래는 조금씩 밑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유나가 누운 바로 밑에는 시계의 작동을 조절하는
판(板)이 있었다.
그 판은 두 사람의 무게가 합쳐진 만큼의 힘이
전달될 때에야 시계를 작동시키게 되어 있었다.
즉, 사량계는 목리공이 유나의 몸 위로 오를 때부터
작동된 것이다.
사량계의 양은 반 각(刻)이었다.
반 각의 시간이 그대로 흐르고 나면 사량계는
폭발하듯 부서지고, 그 안의 돌모래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유나의 몸 위에 누운 사내의 등에 박히게 될
것이다.
그 모래는 한 알만 박혀도 즉사하는 독모래였다.
목리공의 숨결은 거칠어질대로 거칠어져 있었다.
그는 거의 본능적으로 여체의 가슴을 훑고 있었다.
그 혓바닥은 조금씩 밑을 향해 내려가고 있었다.
유나의 시선은 잠시도 다른 곳으로 옮겨지지
않았다.
배꼽 부분에 사내의 숨결이 느껴질 때, 사량계의
모래는 거의 다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탄식을 터뜨렸다.
여체의 배꼽 아래 부분이야말로 사내들이 가장 큰
유혹을 느끼는 곳이다. 이 유혹을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드디어, 사내의 숨결이 그녀의 심부(深部)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순간 처녀가 지닌 수치심의 발로였으리라.
유나의 손이 사내의 머리카락을 자기도 모르게 움켜
잡았다.
이때 유나는 사내의 동작이 일시에 뚝 그친 것을
느꼈다.
사내의 몸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사량계의 윗부분의 모래는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최후의 모래알들이 밑으로
떨어져내리려 할 때, 돌연 유나의 몸을 누르고 있던
압력이 사라졌다.
동시에 시계의 작동도 뚝 멈추어졌다.
유나의 무표정하던 얼굴에 한 줄기 웃음이
떠올랐다.
화사한 두 볼을 흐르는 것은 눈물이다. 그녀는
눈물을 훔칠 생각도 하지 않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사내는 엎드린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의 입가엔 실낱같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욕정을 참기 위해 혀라도 물어뜯은 것일까?
유나는 조심스럽게 사내의 수혈(睡穴)을 점했다.
바람처럼 그녀의 향긋한 입술이 사내의 이마를
스쳤다.
당신을 알고 있지요.
가장 위대한 가문(家門)의 후예이며,
천하제일인의 미명(美名)을 소유하였던 영웅.
그대는 진정 그대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군요...
이제 그대는 서장혼(西藏魂)을 이어갈 진정한
후계자의 자격을 갖추었어요.
그대를 만난 것은 나의 기쁨,
온 서장(西藏)의 홍복(洪福).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
강해지세요.
아무도 넘볼 수 없는 진정한 강자(强者)가 되세요.
* * *
三月四日,
그것은 참으로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잠재의식 속으로 숨어 버린 그의 힘,
그 힘을 다시 체외(體外)로 격발시킬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물리적인 것들 즉, 그의 몸에 물리적인 강한 충격을
지속적으로 가함으로써 어느 정도는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무의식속으로 숨어버린 힘만은 그의 기억이
되찾아지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그것을 해야만 한다.
그는 가장 위대한 중원인(中原人)이었으나, 이제는
아무도 넘볼 수 없는 서장(西藏)의 혼(魂)으로 만드는
것이 나의 일이다.
나는 그 동안 그가 지금에 이르기까지 먹어왔던
모든 영약신초(靈藥神草)들을 재검토했다.
놀라운 것은 그의 체내에는 약 오천 종(種)의 서로
다른 약성(藥性)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그 중 이천 종은 성주(城主)가 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투입한 것, 나머지 삼천 종은 그가 중원에 있을
때 섭취한 것이리라.
과거 천하제일인의 몸은
자하공령신체(紫霞空靈神體)였다.
거기다가 풀로 비롯되는 천화비전(天化秘傳)의
묘용이 숨었고, 빙정(氷精)의 기운이 이 모든
기운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한마디로 그의 몸은 완벽한 신체조건을 갖추고
있다.
다만, 잠재해 있는 모든 기운들이 제대로 융합을
못하여 본래의 힘을 다 못 발휘하고 있을 뿐이다.
이제 때가 왔다.
유나가 오랫동안 꿈꾸어 오던 것,
신체적으로 가장 완벽하며 가장 극강(極强)한 힘을
지닌 인간을 실험할때가.
-천극화인룡(天極華人龍).
나는 이것을 오랫동안 망설여 왔다.
그것은 이 하늘 아래의 어떤 사람도
천극화인룡(天極華人龍)을 이룰만한 조건을 못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하공령신체의 몸에 오천 종의
신초력(神草力)을 합친 사람인 그는 된다. 될 수
있다.
하늘이 왜 나에게 많은 재주를 내리셨는가를 궁금히
여겼더니 그 하늘은 결국 자신이 창조해 낸 또 하나의
걸작을 보내어왔다.
신화(神花)의 이름을 걸고, 유나는 해내고야 만다.
이로써 천상(天上)의 역사를 바꾸리라.
유나가 눈 뜬, 이 한 사람의 시대가 열리도록
만드리라.-
용암은 돌을 녹이고 쇠를 녹인다.
용암의 열수(熱水)가 녹이지 못하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한 사람,
"우욱!"
그는 머리 끝까지 용암 속으로 파묻히고도 녹지
않았다.
뿐인가? 그는 쇠사슬에 묶인 채 한담(寒潭)속으로
내동댕이 쳐져야 했으며, 한 방울만 가지고도
장강(長江)을 독(毒)으로 물들일 수 있는
독담(毒潭)에 발끝까지 처박혀야만 했다.
그는 또 이천 근(斤) 무게의 바위 아래 묻혀 있어야
했으며, 슬쩍 얹기만 해도 돌이 녹아버리는 펄펄 끓는
철방(鐵房)속에 앉아 있어야만 했다.
그것은 고통도 아니었다. 지옥(地獄)의
유형장(流刑場)이라 한들 이보다 더한 고통을 가지고
있으랴.
목리공(木里公), 그의 하루는 철저하게
약류(藥類)로부터 시작되었다.
새벽 인시(寅時) 기상, 소혈단(消血丹) 복용.
성분(成分),자심초(紫心草), 우약황(禹若黃),
고정(古精), 용훼신초(龍卉神草).
묘용(妙用), 신체의 저항력을 증대시킴.
묘시(卯時), 신선욕(神仙浴) 목욕,
욕수성분(浴水成分), 만년설삼(萬年雪參),
천련황정(天蓮黃精), 우의청액(宇意淸液).
묘용(妙用), 신체관절과 근육의 저항력 증대.
진시(辰時), 만훼반상(萬卉飯床) 식사,
반상성분(盤床成分),
아침,교룡육(蛟龍肉), 해어피(海魚皮),
만년하수오(萬年何首烏).
점심,백사육(白蛇肉), 만철호육(萬鐵虎肉),
자룡훼(紫龍卉).
저녁,어육(魚肉), 공청정유(空淸精乳),
소육로(燒肉爐).
묘용, 정기(精氣)의 융합력과 장부(臟腑) 보호.
이러한 일과가 끝나고 나면 목리공은 두 마리의
거대한 성성이에 의해 지옥 같은 오관동(五關洞)으로
옮겨지게 된다.
오관동(五關洞),
선경(仙境)의 북쪽에 위치한 길이 일 리(里)의
동굴.
제일동(第一洞) 용암관(熔岩關),
만 근(斤) 무게의 한철(寒鐵)을 반 각에 녹이는
용암연(熔岩淵).
제이동(第二洞) 음한관(陰寒關),
사방 십 장 방원이 얼음 천지인 극냉(極冷)의
한수(寒水).
제삼동(第三洞) 만독관(萬毒關),
주변 백 장 이내를 풀조차 나지 않는 극독(極毒)의
절명연(絶命淵).
제사동(第四洞) 천석관(千石關),
지상(地上)으로부터 두 자 가량 떠 있는 무게 이천
근(斤)의 바위,
기계장치에 의해 내려지고 올려진다.
제오동(第五洞) 광열관(狂熱關),
장작 백 바리로 때고 있는 철방(鐵房),
십 장 밖에서 머리털이 타버리는 극열(極熱)의
장소.
오관동(五關洞)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목리공은
일체의 자유가 박탈된다.
움직이는 것은 두 마리의 성성이 뿐이다.
금모인원(金毛人猿)이라고 부르는 이
영물(靈物)들은 목리공의 몸을 쇠사슬로 꽁꽁 묶은
후, 오관동의 용(熔), 한(寒), 독(毒), 석(石),
열(熱)의 다섯 장소를 옮겨다니며 목리공을 지퍼
넣었다 꺼내곤 하는 것이었다.
고통.
진정으로 고통 앞엔 영웅이 없는 것이다.
목리공은 울부짖었다. 그는 시시각각으로 닥쳐오는
고통의 괴로움보다는, 그러한 고통으로도 죽어 버리지
못하는 그의 육체를 더 저주했다.
그럴 때마다, 그의 앞에는 신화궁주 유나가
환상처럼 나타나곤 했다.
그녀는 붉은 입술을 나풀거리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찾고 싶지 않은가요, 당신을?
당신이 누구이며, 당신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
땅에 숨쉬고 있는가를......
그 찡그린 모습은 보기좋군요. 나 같으면 웃겠어요.
때로 웃음이란 천 년의 공력보다 더 많은 힘을
발휘하니까.
울어야 할 시간에, 그러나 우는 것보다는 웃는 것이
더 보기 좋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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