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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제안] (27)- <04> 광복군 비밀요원, 박정희
제 2 장
누가 보수고, 누가 진보냐
4. 박정희는 보수주의자인가.
(1) 광복군 비밀요원, 박정희
박정희는 왜 만주군 장교를 지원했나.
박정희는 일본군 장교가 아니었다. 만주군 장교였다. 박정희가 왜 일본군을 선택하지 않고 만주군을 선택했을까? 기왕 만주에서 근무하려면 정식 일본 관동군이 훨씬 더 끗발이 세었을텐데. 공부를 못해서? No! 박정희는 소학교 때부터 줄곧 1등만 했고, 만주군관학교는 물론 일본 육사도 '최우수'로 졸업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최우수 졸업생이라면 말 한 마디면 (지원서 한 줄이면) 일본 관동군 장교 정도야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일본군이 아닌 만주군을 선택했다.
처음부터 아예 일본 관동군이 아닌 만주군을 지원했다. 물론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가 세운 만주국이 일본의 괴뢰국이라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렇다면 더더욱 (기왕 일본에 충성할 거라면) 승승장구.... 출세가 보장된 일본 관동군 장교를 택하지, 하필이면 상대적으로 끗발 떨어지는 괴뢰국인 만주군 장교가 되었을까? 친북/종북 좌파나 안티 박정희 세력들은 이 부분에 자신있게 답변해야 한다. 이 부분을 설명하지 못한다면 박정희를 친일파로 모는 자들은 논리적으로 자승자박하는 꼴이 될 수밖에 없다.
박정희는 일본에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박정희가 썼다는) 지원서 서신에도 일본에 충성을 다하겠다는 말은 없다. 다만 만주국의 에 충성을 다하겠다는 말 뿐이다. 박정희가 썼다는 "一死以テ御奉公"도 만주국을 지칭하는 것이지 일본에 충성을 바치겠다는 뜻이 아님은 민족문제연구소도 알고 있을 것이다. 박정희가 보냈다는 서신을 보자.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설사 박정희의 서신이 100% 진짜라고 하더라도 박정희가 목숨을 다해 충성을 맹세한 주체는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였다. 앞에 '일본인으로서'를 넣고서도 왜 박정희는 '천황폐하를 위해', '황국 일본을 위해'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을까? 일제 치하에서는 입만 열면 '덴노헤이카 반자이(천황폐하 만세)' 였는데. 학교에서도, 관공서에서도, 군대에서는 말할 것도 없이 '덴노헤이카 반자이(천황폐하 만세)'를 입에 달고 살던 시절이었는데. 박정희는 왜 '천황폐하를 위해', '황국 일본을 위해', '대일본제국(다이닛폰테이코쿠)을 위해' 대신에 그들이 잘 쓰지도 않는 '조국을 위해'를 넣었을까.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이 조국이 일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당시 일본이나 일본국민은 일본을 '황국', '대일본제국(다이닛폰테이코쿠)', '본토' 또는 '내지內地'라 불렀다. 그리고 그 국민은 황국신민이라 불렀다. 당시 일본군이 일본을 조국이라 부르는 것은 그리 흔치 않았다. 오히려 조국이라는 단어는 독립군들이 즐겨 쓰던 말이었다. 나라를 빼앗겨 나라의 이름조차 없으니 조국이라는 단어가 더 유용하게 통용되었던 것이다. 박정희의 조국은 일본이 아니라 당시 일본에 강제병합된 우리나라였던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이 '조국'이라는 단어는 누군가에 의해 최근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박정희가 일본 관동군 장교로 지원하지 않고 만주군을 선택한 것은 그가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한 일본에 충성을 바치지 않고, 형식적으로 만주국 황제 푸이에게 충성을 서약함으로써 당시 세계의 강국이었던 일본의 선진문물을 습득하고 (당시 군국주의였던 일본사회의 최고 엘리트는 당연히 '일본군부'였다.) 조국의 광복을 대비하기 위해서였을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만주일보의 기사가 가짜일 가능성
그리고 당시는 관제 언론에 의해 이런 조작된 미담(?) 만들기가 성행하던 시대였고, 여운형의 학병권유문 등도 나중에 일본의 조작이었음이 드러 났다. 결정적으로 혈서 원본은 한번도 공개된 적이 없다. 단지 박정희의 증명사진만 있을 뿐이다. 적어도 기자라면 증명사진보다 혈서를 직접 찍은 사진이 더 기사 가치가 높다는 것 쯤은 알 것이다. 한 마디로 믿을 수도 없는 (조작되었을지도 모르는) 복사본을 가지고 박정희를 매도하려는 의도가 없다고 보기도 힘들다.
조작된 혈서血書...
민족문제연구소가 만주일보 기사를 공개했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지난 수년간 친북/종북 좌파나 민중사관론자들이 주장해 온 "진충보국 멸사봉공盡忠報國 滅私奉公" 혈서는 조작이었음이 폭로되었다. 그들의 주장을 그들 스스로 뒤집어 엎은 자폭自爆인 셈이다. 그 기사에는 "一死以テ御奉公"라는 일곱 글자가 있었는데, 번역하자면 '한 번의 죽음으로써 충성함...' 정도일 것. 그동안 주장해 온 "진충보국 멸사봉공盡忠報國 滅私奉公"이 조작임이 밝혀졌는데, 이 일곱 글자는 조작이 아닐까?
골수 좌파 지식인의 증언
포털사이트 <네이버>에서 <송남헌>이라는 사람을 두들겨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송남헌[宋南憲, 1914.4.11~2001.2.20] 한국의 독립운동가, 현대사 연구가. (중략) 광복 후 군사정부에 의해 좌익으로 몰려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 후에는 통일운동을 사회운동으로 확산하는 데 힘을 기울이며 현대사 연구가로 여생을 보냈다.> 이 정도면 극우보수주의자 입장에서 보면 완벽한 '좌빨' 아니면 거의 '빨갱이' 수준이다.
특히 5.16군사혁명 직후 박정희 정권 하에서 2년 간의 옥살이를 하였으니 그가 어떤 입장인지 알만하다. 그런 그가 <해방 3년사>라는 책을 썼다. 그 책의 26페이지를 그대로 복사해 옮긴다. 이 글에는 <만주군 박정희 중위가 광복군 비밀요원이 되는 과정>을 스스로 증언하고 있다.
송남헌은 친북좌파가 말하는 이른바 <수구꼴통>이 아니라 오히려 '박정희 죽이기'에 앞장 서는 강만길이 추앙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런 사람이 쓴 글이니까 좌파든, 우파든... 특히 좌파나 민중사관론자들은 이 내용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더구나 이 책을 쓴 때가 1994년 10월 15일이니, 박정희 대통령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다.)
박정희는 만주군 내의 광복군 비밀요원이었다.
(위에서 다섯번째, 아래에서 세번째 줄 주목. 이 씨는 다음 날 (2월 10일) 저녁 부대간부들과 회식하는 자리에서 박정희 중위, 신현준 대위와 만나는 데 성공했다. 이씨는 자기 신변을 밝힌 뒤 광복군 총사령관 이청천 장군의 직인이 찍힌 광복군 임명장을 박중위와 신대위에게 주었다. 이래서 그들은 광복군 비밀요원이 됐다.)
(아래에서 네번째 줄 주목 : 이 국내 진공에 관한 비밀 거사에 참여한 바가 있었던 조선출신 군인 가운데는 朴正熙(박정희) 전 대통령도 있었으며....)
기왕 시작했으니, 아래도 한 번 읽어보자.
백범 김구 선생의 '아. 그리운 조국 산하'에서 발췌한 단락 :
1944 년, 이 모양으로 광복군이 창설되었으나 인원도 많이 못하여 얼마동안을 유명무실하게 지내다가 문득 한 사건이 생겼으니 그것은 50 여명 청년이 가슴에 태극기를 붙이고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 정청으로 애국가를 부르며 들어오는 것이었다. 이들은 우리 대학생들이 학병으로 일본군대에 편입되어 중국 전선에 출전하였다가 탈주하여 안휘성 부양의 광복군 제 3 지대를 찾어온것을 지대장 김 학규 장군이 보낸 것이었다
백범의 증언과 이기청 씨의 증언을 비교해 보자.
"이기청(의병정신선양회 사무총장·방송인)도 증언하기를 5·16쿠데타가 일어나고 얼마 안돼서 한 젊은이가 마지막 임정요인이었던 백강 조경환 선생 면목동 집으로 찾아와 큰절을 하였다. 동행한 사람이 “대통령이십니다” 하기에 보니 박정희였다. 그는 "박 대통령은 '제가 만주에 있던 다카키 마사오입니다'하는데, 조선인 병사들을 독립군으로 빼돌렸던 다카키의 이름을 익히 들었기 때문에 놀랍고도 반가웠습니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는 독립군을 보충해야 할 매우 어려운 상황이어서 박 중좌의 도움은 컸다고 합니다"라고 말하는데 사실이었다." (출처 : http://bookstore21.net/korean/815/park-oss.htm)
애국자愛國者
(인용) 우리 민족이 해방된지 1년 하고도 두어달 지난 1946년 가을이었다. 아직 대한민국 건국 이전이지만 국토 경비를 위해 미 군정청이 창설한 태능 육군사관학교(아직 4년제 육사가 시작되기 전의 단기과정)에서는 제 2기생 교육 중이었다. 사관학교장은 이치업 육군 대위였는데, 그는 명색이 국군의 간성을 교육하는 육사교장이면서도 자신은 물론 주변의 누구도 애국가를 알지 못해 답답한 끝에 아이디어를 냈다. 생도들에 애국가 가사를 쓰라는 문제를 내고 시험을 치루었던 것이다. 생도 전원이 백지 답안을 제출하였는데 딱 한 명의 생도가 애국가 4절 가사를 정확하게 써냈다. 그가 바로 박정희 생도였다.
이치업 교장이 박정희 생도를 불러 애국가를 어디서 알았느냐고 물었더니 박정희는 대구사범 졸업 후 교편을 잡는 동안 학생들에게 몰래 애국가를 가르쳤다고 대답했다. 가사는 현재와 같으나 곡은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이별의 노래)'을 차용해 불렀을 때였다. 안익태 곡의 애국가는 그 뒤 일이다. 이렇게 해서 육사에서 비로소 애국가가 불려지게 됐다. (이치업.스티븐 엠.딸프 공저 '번개장군' : 2001 원민)
이치업 당시 교장의 이 증언은 문경의 그의 제자들의 증언으로 확증된다. 이영태(李永泰)는 스승 박정희가 "조선어 시간에는 우리 나라의 태극기와 역사를 가르쳐 주셨다. 음악시간에는<황성옛터> <심청의 노래> 등을 가르쳐 주시고 기타도 쳐주셨다"고 증언한다. 그는 이낙선(5·16군사쿠데타 직후 박정희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 비서관)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은사에 대한 기억을 이렇게 적었다. ‘조선어 시간에는 우리 나라의 태극기를 가르쳐주셨고 복도에 입초를 세우시고 우리 나라 역사를 가르쳐주셨으며 일본인 교사들과는 지금 생각하면 조국 없는 서러움 때문인지 자주 싸우시는 것을 목격했다’ (조갑제의 ‘박정희’ 79쪽).
시대의 슬픔, 창씨개명
한 때, 민중사관론자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다카키 마사오'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창씨개명한 것을 가지고 혹독하게 물고 늘어졌다. 그러나 보수우파에서 김대중 전대통령 역시 '도요다 다이쥬(豊田大中)'라는 일본 이름으로 창씨개명했고, 중.고교 교육 모두를 일제교육청 소속 학교에서 받았으며, 졸업 후 왜인이 경영하는 목포 해운회사에 들어가 사주를 구워삶아 징용. 입대 모두 피할 수 있었고, 젊은 나이에 회사를 물려받아 해방을 맞은 1945년 그는 21살의 나이에 이미 해운업계에 널리 알려진 성공한 사업가로 활동했다는.....등의 경력으로 반격하자 창씨개명으로 인한 그들의 공격은 일거에 사라졌다. 공격만큼 빠른 놀라운 속도의 후퇴였다.
필자는 김대중 전대통령의 창씨개명이나 왜인회사 입사 및 성공과정을 문제 삼으려는 것이 아니다. 일제의 강요에 의한 창씨개명의 슬픈 식민지 역사를 부풀려 스스로 자학하는 것이 우리 시대든 우리 후대를 위해서든 무슨 (역사 해석상) 이익이 되느냐는 것이다. 이 부분은 민중사관론자든 국민사학론자든 냉철한 실증사관으로 짚어보고 국가존립과 부국강병의 소중한 의미를 되새기는 것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더욱 바람직한 태도일 것이라는 것이다.
미국은 왜 조지 워싱턴을 국부로 만들었나.
아무리 둘러 치고 매 쳐도 박정희는 친일파가 아니다. 박정희는 제자들에게 우리나라 태극기와 역사와 한글을 가리쳤고, 만주군 장교로써 비밀리에 광복군 총사령관 이청천 장군의 직인이 찍힌 임명장을 받고 광복군 비밀요원이 되었으며, 독립군의 국내진공에 관한 비밀거사에 참여했고 광복군 제 3지대의 일원으로 귀국했다. 이런 그가 어째서 친일파로 분류될 수 있다는 말인가.
다시 민중사관론자에게 묻는다. 위의 역사적 사실史實을 보고도 아직도 박정희가 친일파라 생각하는가. 아니면 그렇게도 절실하게 친일파로 만들고 싶은가. 미국인들은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을 건국의 아버지라 한다. 그런 워싱턴의 사생활을 한 번 볼까? '셀리'라는 정부를 둔 것은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조지 워싱턴 대통령은 무려 10 명의 사생아를 두었고, 미국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토머스 제퍼슨은 대통령 재임 중에도 '샐리 허밍스'라는 14세 흑인 노예와 불륜을 저질러 6명의 혼외 자식을 두었으니 알만하지. 말을 안해서 그렇지, 그 뿐이겠어?
미국인들은 고민했지. 그리고 합의했어. 덮어 두기로. 그런 분들까지 매도하면 미국의 독립은 뭐가 되냐고.... 그래서 사회적 합의를 이룬거야. 세계를 주무르는 미국도 그러는데, 이 작은 나라에서 무엇을 더 까발리고, 거짓증언하고, 음해하고, 모독하고 싶은가. 그래서 얻는 것은 무엇인가.
소크라테스와 알렉산더
역사를 다루는 자에게 조국이 없으면 역사를 공부 할 이유가 없다. 민중사관론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인물이 있다.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는 그리스식 민주주의를 중우정치(衆愚政治 : 어리석은 군중에 의한 정치)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조국 그리스를 위하여 민주주의는 당장 때려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대신 그는 철인(哲人:깨우친 철학자)에 의한 정치를 주창했다.
"철학자들이 그들의 나라에서 왕이 되지 않는 한, 또 반대로 왕 또는 지배자로 불리는 이들이 실제로 지혜를 사랑하지 않는 한, 즉 정치권력과 철학이 하나로 합쳐지지 않는 한.... 국가나 인류에 있어서 나쁜 것들이 종식될 날이 없을 것이다." ....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의 <국가론>에서 (소크라테스는 책을 한 권도 쓰지 않았음.)
소크라테스가 죽자, 제자 플라톤에 의해서 소크라테스의 철학이 집대성, 전수된다. 그리고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불세출의 영웅이 교육되었다. 그가 바로 알렉산더 대왕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으로) 알렉산더는 불세출의 영웅이고 위대한 왕이었지만, 그는 진정으로 소크라테스가 말한 철인哲人이 되고자 노력한 인물이었다. 소크라테스의 꿈이 알렉산더를 통하여 완성된 것이다.
민중사관론자들에게 묻는다. 이러면 어떨까? 역사를 되돌릴 수는 없으니. 오히려 소크라테스가 말한 <정치권력과 철학이 하나로 합쳐진 지도자>로써 박정희가 철학이 있었는지, 그렇다면 그 철학은 무엇이었는지, 실제로 지혜를 사랑했는지, 조국을 사랑했는지, 이기심이 아닌 이타심의 지도자였는지.... 그런 것을 냉정하게 따져보는 것이 더 이성적이지 않을까.
아래를 대강.... 그냥 흘낏 일별하고 다음 주제로 넘어 가자.
1961년06월10일 농어촌 고리채 정리법 공포
1961년06월11일 재건국민운동전개(국민의식개혁)
1961년06월14일 부정축재 처리법 공포
1961년07월03일 반공법 공포
1961년06월30일 능의선 개통
1961년07월14일 원자력개원
1961년07월22일 경제기획원신설
1961년08월03일 김포가도 포장 기공
1961년08월08일 황지지선 기공(1961.6.13~1962.12.10)
1961년08월19일 섬진강 수력발전소 건설
1961년09월21일 춘천수력발전소 기공
1961년09월23일 대한 중선창연(蒼鉛)자가제련공장 준공
1961년12월22일 첫 학사자격 국가고시
1962년01월01일 연호를 서력으로 변경(연호에 관한 법률 제정)
1962년01월13일 제1차경제개발5개년계획 발표
1962년01월20일 상법제정공포
1962년02월01일 국민은행 발족
1962년02월02일 기술진흥 5개년계획 발표
1962년02월03일 울산공업지구설정 및 기공
1962년02월10일 국토건설단 창단
1962년03월01일 공문서의 한글전용실시(70년1월1일 관계법 제정)
1962년03월19일 핵분열 연쇄반응 일으키는 원자로의 임계도달 시험-양주군 노해면
1962년04월02일 농촌진흥청 발족
1962년04월30일 해양경비대창설
1962년05월12일 반공센터창설
1962년06월01일 무역진흥공사발족
1962년06월18일 건설부 신설
1962년07월13일 국민 의무교육 실시
1962년07월19일 국립소년직업훈련소 낙성
1962년09월10일 남양송신소 준공
1962년10월20일 해운센터기공식
1962년10월23일 한국케이블공업주식회사 송배전신 및 케이블공장 기공
1962년11월04일 광주디젤발전소 준공
1962년11월06일 동해북부선(옥계-경포대간)개통
1962년11월18일 과학자 우대정책 발표
1962년11월20일 제4시멘트공장건설
1962년11월25일 부정거래단속법을 제정
1962년11월28일 난민정착사업장 제방준공
1962년12월01일 마포아파트준공
1962년12월15일 김포,강화간 대교건설(~1970.1.26)
1962년12월24일 생활보호법제정
1962년12월28일 호남 비료 나주 공장 준공
1963년01월01일 교육자치제 실시
1963년01월10일 외자도입 강력추진
1963년01월18일 원호센터 준공
1963년01월21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발족
1963년02월01일 장충체육관 건립
1963년02월04일 지방문화재육성
1963년03월15일 동진강지역 종합개발공사 기공, 김해, 진도(63~69)
1963년03월21일 감사원 개원
1963년03월30일 원자로 가동식
1963년04월02일 무제한송전실시
1963년04월10일 부녀회관 건립 기공
1963년05월14일 남대문중수공사 준공
1963년07월20일 제대군인 개간농장 입주
1963년08월08일 한국나이론 공장 건설(대구)
1963년08월08일 국사교육통일방안 확정
1963년09월01일 철도청 발족
1963년09월01일 노동청 발족
1963년09월06일 국토종합개발계획조사착수
1963년09월06일 동대문 개축준공
1963년09월10일 문화재 보수 5개년계획확정
1963년09월17일 가족계획사업추진
1963년09월25일 직업재활원 개원
1963년09월26일 PVC 제조공장 기공
1963년10월10일 가정법원 개원
1963년12월22일 서독광부·간호원파견(1963.12.22~1966.1.30)
1964년01월01일 미터제 실시
1964년05월07일 울산 정유공장 건설
1964년05월07일 국립 중앙 의료원 설립
1964년07월01일 경주석굴암복원준공
1964년08월20일 감천화력발전소건설(부산)
1964년11월29일 울산 제3비료 공장 기공식-매암동, 충주비료와 미국 스위프트 투자단의 공동투자
1964년12월05일 제1회 수출의 날 제정, 1억불 달성/70년 10억불/77년 100억불/82년 200억불/85년 300억불/88년 500억불 달성
1964년12월06일 서독방문(유럽국가 첫 방문), 8일 뤼프케 대통령, 9일 에르하르트 수상과 정상회담
1965년01월25일 제2한강교 개통
1965년02월24일 한국원양어선단 결단(원양어업추진)
1965년03월19일 방공 포병대대 창설
1965년03월23일 청소년 선도 국민 궐기 대회
1965년04월01일 치산녹화 10개년 계획 확정
1965년06월01일 김해간척공사 기공
1965년06월22일 한일협정 정식조인(동경), 8월14일 국회비준(야당불참), 12월18일 비준서 교환(서울) 발효, 국교정상화
1965년08월31일 해인사 경판고 보수
1965년09월15일 제2 영월 화력발전소 준공
1965년10월15일 율곡사 및 율곡기념관 낙성
1965년11월13일 경호천 종합개발 준공식-칠곡군 북삼면
1965년11월23일 민방위법 제정(민방위대창설:1975.9.22)
1965년12월02일 식량증산 5개년계획 확정
1965년12월03일 서울·춘천간 도로포장공사 준공
1965년12월07일 진삼선 개통(사천~삼천포)
1965년12월16일 국내(텔레스)개통
1966년01월19일 정선선 개통(예미, 증산, 고한 간)
1966년01월27일 경북선 개통(점촌~예천 간)
1966년01월27일 한국과학기술원 설립
1966년02월04일 한국과학기술 연구소(kist)발족
1966년03월03일 국세청 발족
1966년03월03일 수산청 발족
1966년04월09일 인천제철공장 기공
1966년04월29일 경인공업단지 건설
1966년05월03일 울릉도 추산 수력발전소 준공
1966년06월08일 충청남도 부여군 남면 지구 전천후 농업용 수원개발사업 준공
1966년06월09일 팔당수력발전소 기공
1966년06월22일 한군군장비현대화계획발표
1966년08월03일 산림청 신설
1966년11월09일 김삼선 기공
1966년11월09일 충남선 기공
1966년11월28일 서울 분묘 보수
1966년11월30일 밀양 영남루 보수
1966년11월30일 서울 종각 보수
1966년12월06일 부여 정림사지 정비
1966년12월17일 아시아 개발은행 건설
1966년12월18일 법주사 대웅전 보수
1967년01월24일 청평·의암 ·화천 수력발전소 건설
1967년02월10일 대도시 그린벨트설정(서울, 부산 등)
1967년03월04일 영남화력발전소 제2호기 기공
1967년03월30일 원자력청 발족
1967년03월30일 과학기술처 신설
1967년04월01일 구로동 수출 공업단지 준공
1967년04월13일 서해안 철도건설
1967년04월25일 종합민족문화센터 준공
1967년04월26일 안중근의사 동상 이안
1967년04월29일 천체과학관 준공
1967년05월01일 국립광업연구소 설립
1967년09월19일 구미전자공업단지건설
1967년09월23일 제1한강대교, 강변도로건설
1967년10월01일 국립묘지정화, 현충탑건립
1967년10월03일 포항종합제철공업단지기공(1973. 7. 3 완공)
1967년11월23일 한국수자원개발공사발족
1967년12월01일 농어촌개발공사발족
1967년12월20일 성산포 어업전진기지 준공
1968년00월 0일 포항항 건설(~1973)
1968년01월22일 대간첩작전본부발족
1968년02월07일 경전선개통
1968년02월11일 병기공장(M16소총)건설착수
1968년03월22일 석유화학계열공업 기공
1968년04월01일 예비군 창설
1968년04월13일 서울대학교 이전 건설
1968년06월13일 「레이다」기지 준공
1968년07월05일 방위산업육성3개년계획확정
1968년07월22일 중앙선,태백선전철화(~1974.6.20)
1968년07월23일 동해안공업도시개발착수(묵호,북평, 삼척)
1968년07월24일 해양주권선언발표(대륙붕 자원확보 및 개발)
1968년07월29일 축산개발 4개년계획 확정
1968년08월30일 영남화력발전소(울산가스터빈)건설
1968년09월09일 제1회 한국 무역 박람회
1968년02월01일 경부고속도로(대구-부산간)기공식
1968년11월01일 제주도 포도당공장준공
1968년11월08일 동양화학공업주식회사준공
1968년12월02일 소수서원 해체 복원
1968년12월05일 국민교육헌장 선포
1968년12월07일 지리산 등 9개지역국립공원지정
1968년12월11일 광화문복원
1968년12월16일 한국 투자개발공사 설립
1968년12월21일 경인·경수고속도로준공
1969년00월00일 교육제도개혁(중학교무시험, 고교평준화, 대학입시예비고사제)
1969년02월05일 농업진흥공사 발족
1969년02월15일 지하수개발공사발족
1969년02월15일 한국도로공사발족
1969년02월22일 농업기계화 8개년계획확정
1969년03월01일 국토통일원 개원
1969년03월01일 가정 의례 준칙 공포
1969년04월28일 현충사 중건 준공식
1969년04월28일 불국사 복원 정화작업(1969~1973)
1969년06월04일 부산 화력발전소 준공(21만Kw)
1969년06월17일 마산수출자유지역공업단지조성
1969년07월03일 울산 알미늄 공장준공
1969년07월29일 서울신도시건설착수(한강이남.여의도.한강개발)
1969년08월19일 범어사 대웅전 보수
1969년10월07일 남강「댐」준공
1969년11월01일 농어촌근대화촉진법발표
1969년11월29일 관악산 기상레이더 건설
1969년12월26일 제3한강대교 건설
1970년02월29일 금산사대적광릉 해체 복원
1970년03월07일 비적성공산권에 문호개방
1970년03월22일 정부장기종합교육계획시안마련-86년까지 단계적으로 실시(의무교육9년으로로연장,교육제신설,교원에게병역
1970년04월15일 남해고속도로기공(~1973.11.14)
1970년04월22일 새마을운동 제창
1970년05월16일 서울대교 건설
1970년05월29일 인천 화력발전소 준공
1970년06월02일 금산 위성통신지구국 개통
1970년07월01일 우편번호제 실시
1970년07월04일 배창 방직 기계 준공식 참석(충북 옥천군 옥천읍 양수리)
1970년07월05일 직기 공장 준공-유사시엔 총포 생산도
1970년07월07일 경부고속도로 전면 개통
1970년07월25일 남산 어린이회관 건립
1970년08월02일 낙동, 영산강 종합개발안 영구수해방지 위해 다목적댐 건설 수운 개설
1970년08월15일 8.15기념식에서 북한이 무력포기하면 남북간의 인위적 장벽 단계적 제거 선언
1970년09월16일 공군 전천후 해상소형공격기 S2A배치
1970년10월22일 수도권(경인,경수,경원)고속전철화(~1974.8.15)
1970년11월10일 행주산성 복원 준공
1970년11월19일 세종대왕기념관 준공
1970년12월08일 도산 서원 보수 정화 공사 준공
1970년12월17일 4대강유역 종합개발계획 확정(한강,낙동강,금강,영산강)
1970년12월25일 화엄사 대웅전 보수
1970년12월31일 남원 광한루 보수
1971년01월31일 제주도 일주 도로 준공
1971년03월19일 원자력발전소 기공
1971년03월23일 금강·평택 지구 다목적 농업 개발 사업 기공
1971년04월08일 거제대교 건설
1971년04월12일 서울 지하철 기공
1971년04월13일 칠백의총 보수 정화 준공
1971년06월12일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 제의, 북한측 거부
1971년08월12일 한국적십자연맹, 남북가족찾기회담을 북측에 제의
1971년08월30일 속리산 법주사의 사천왕문 복원
1971년09월08일 국토종합개발계획 확정
1971년09월10일 서울 북악 터널 개통
1971년09월25일 태릉 국제사격장 준공
1971년09월29일 여의도 5·16광장 준공
1971년11월14일 각종 무기 생산 개시
1972년01월04일 전국 10대 관광권 개발 확정
1972년01월05일 군산항 개발 착수
1972년00월00일 제주관광개발사업추진(~1977년)
1972년02월09일 녹색혁명추진(통일벼 개발)
1972년03월10일 경주 고도개발 10개년획확정
1972년03월23일 현대 울산 조선소 기공
1972년04월05일 산림보호, 육성, 산지개발(입산,수렵금지)
1970년05월29일 인천 화력발전소 준공
1972년04월21일 새마을 운동 노래 작사, 작곡
1972년06월07일 교육용 한자1,781자 선정 발표
1972년06월26일 전국702개섬 개발계획확정
1972년07월04일 한국 개발연구원 설립
1972년07월04일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1972년09월30일 영동화력발전소 건설
1972년10월31일 석유화학공장 합동 준공, 울산 석유화학8개공장 건설
1972년11월04일 육산리 고분군 정화
1972년11월13일 시외전화 자동화
1972년11월24일 부산항 대단위종합개발 추진(~1978.9.29)
1972년11월25일 소양강 다목적댐 담수
1972년12월11일 지리산,설악산,낙동강 하류철새보호지역 지정
1973년00월00일 이리 수출 자유 지역
1973년01월12일 공업진흥청 신설
1973년02월16일 제주도 종합개발 착수
1973년03월03일 한국방송공사 설립
1973년05월04일 8개 공업장려지구지정 공업개발(춘천,청주,원주,대전, 전주, 이리, 목포, 군산)
1973년05월05일 어린이대공원 개원
1973년05월11일 해운항만청 신설
1973년05월24일 중화학공업건설발표
1973년06월20일 중앙선(청량리-제천)전철 개통
1973년06월22일 남해대교 건설
1973년06월23일 평화통일외교정책 7개항 발표(6.23선언)
1973년06월26일 대덕연구단지 건설(10개연구소)
1973년07월03일 포항 종합 제철 준공
1973년07월05일 한일대륙붕 협상 완전 타결
1973년07월10일 전국91개 공업고등학교 신설, 확충계획발표
1973년07월20일 여천 석유화학 공업단지 건설
1973년08월15일 남북 UN 동시가입촉구
1973년10월11일 옥포 조선소 기공
1973년10월17일 국립극장 개관
1973년07월18일 정수직업훈련원 개관
1973년10월19일 문예중흥5개년계획추진
1973년06월06일 창원 기계 공업단지 조성
1973년11월07일 국민연금복지법 제정
1973년11월10일 죽도조선소 건설
1973년12월15일 이스라엘의 점령지 철수 등 4개항의 친 아랍성명 발표
1974년01월18일 남북한 불가침 협정체결 제의
1974년01월24일 최대임해공업벨트개발(제2제철-조력발전소 건설)
1974년03월28일 영동.동해고속도로기공
1974년05월22일 아산·남양방조제 준공
1974년06월10일 낙성대 정화 사업 준공
1974년01월18일 남북한 불가침 협정 체결 제의
1974년12월10일 금산사 미륵전 해체 복원
1974년12월27일 이경관문 해체 복원
1975년01월10일 구미대교 건설
1975년01월21일 농어촌지역의 상수도 시설5개년계획추진
1975년02월01일 대단위농업개발사업추진(금강,평택,광주, 삽교천,계화도)
1975년03월27일 대청 다목적댐 건설
1975년04월11일 중앙민속박물관 개관
1975년05월20일 학도호국단 창설
1975년09월01일 국회의사당 준공
1975년10월10일 서울 어린이회관 이전 개관
1975년10월28일 전국 성곽 보수 사업 추진
1975년10월30일 정립회관 건립(장애인보호육성)
1975년11월07일 함대함 미사일 개발
1976년01월20일 옥산서원보수
1976년01월20일 강화 지역 유적 개발
1976년01월20일 신안 해저 문화재 발굴
1976년03월17일 모산 저마 공장 준공-충남 아산군 배방면 공순리
1976년04월10일 밀양 포충사 정화사업
1976년04월10일 유관순 유적지 정화사업
1976년04월17일 국어 정화, 순화 운동 전개
1976년05월10일 강릉 오죽헌 정화사업
1976년05월18일 한국 인력 검정공단 법안 확정(기술인력관리,자격,검정의 일원화)
1976년06월24일 유적지전적지 개발을 위한 특별법제정
1976년06월24일 구마고속도로 착공
1976년07월16일 잠수교 개통식 참석
1976년10월02일 반월공업도시 건설
1976년10월12일 쌀의 완전 자급자족 달성
1976년10월14일 영산강 유역 농업개발 제1단계사업준공
1976년10월30일 한산성 충무공 유적 정화사업 준공식 참석
1977년01월12일 대북식량원조 제의, 남북한 불가침 협정 체결되면 주한미군 철수를 반대하지 않는다고 밝힘
1977년01월28일 국방부 순시에서 핵무기와 전투기를 제외한 모든 무기를 국산화하고 있음을 천명
1977년00월00일 남서울대공원 건설
1977년02월15일 산업체부설학교 및 특별학급설치
1977년02월17일 증권감독원 개원
1977년00월00일 전국 도서관 확충
1977년04월30일 초고압송변전시설 완공
1977년05월25일 미군철수 정책 저지(선보완, 후저지)
1977년06월15일 월성 원자력발전소 건설(1977.6.15 ~1982.3.10)
1978년07월01일 부가가치세, 의료보험 실시
1977년07월10일 자동차공업 육성책 발표
1977년07월30일 경주통일전조성
1976년11월03일 안동 다목적댐 건설
1977년09월22일 소비자보호기본법제정
1977년10월07일 육림의 날 선포
1977년10월09일 여주 영육 성역화 사업
1977년10월09일 부석사 정화 작업(1977~1979)
1977년10월25일 군산화력발전소
1977년10월25일 부평화력발전소
1977년11월04일 아산화력발전소건설
1977년12월07일 전주권 광역도시개발 및 공업단지 조성
1977년12월22일 1백억불 수출달성 기념
1978년01월01일 동력자원부 신설
1978년01월09일 충주 다목적댐 건설
1978년01월18일 군수산업의 육성(헬기, 대포, 탄약, 장갑차, 함정, 레이다, 미사일을 생산하고 있으며, 항공기 산업과 특수전차 개발에 착수)
1978년02월20일 행정전산화 10개년 계획 확정
1978년03월30일 호남선 복선 개통
1978년04월01일 국민체조보급
1978년04월14일 세종문화회관 개관
1978년05월03일 월정사복원
1978년05월10일 김덕령장군 유적지 정화사업(광주)
1978년05월10일 임경업장군 유적지 정화사업(충주)
1978년05월22일 부마고속도로건설(1978.5.22 ~ 1980.10.5)
1978년06월05일 태양에너지 연구소 발족
1978년06월12일 경북 울진 원자력 발전소 기공
1978년06월23일 남북간의 교역, 기술, 자본 협력 위한 민간 경협기구 구성을 북한에 제의
1978년06월30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개원
1978년08월15일 해남 표충사 보수
1978년09월26일 국산 장거리 지대지 유도탄, 중거리 유도탄, 다연발 로케트, 대전차 로케트 시험발사에 성공, 세계 7번쨰 개발 보유국됨.
1978년10월05일 자연보호헌장 선포
1978년10월20일 서해안 일부지역 국립 해안 공원 지정
1978년10월30일 직지사 정화사업
1978년11월08일 관광산업진흥책 발표
1978년11월30일 곽재우장군유적지 조성 정화사업
1978년12월06일 광주박물관 개관
1978년12월30일 장거리 자동 공중전화 시대 개막
1979년03월27일 토지개발공사 설립
1979년04월06일 경주 보문 관광단지 개장
1979년04월18일 잠실체육관 건립
1979년05월30일 상주 정기룡장군 유적지 정화 사업
1979년06월12일 경북 울진 원자력 발전소 기공
1979년06월13일 수도권 광역수도사업 추진(팔당)
1979년07월05일 천호대로 준공
1979년10월02일 환경청 신설
1979년10월12일 국제 올림픽대회 서울 유치 언명
1979년10월26일 삽교천 방조제 준공
(어서 오십시오. ^^ 여기까지 읽어내려 오시느라 참으로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네. 맞습니다. 위는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을 연대순으로 정리해 놓은 연대표입니다. 위 연대표는 박정희 대통령 전자도서관 http://parkchunghee.or.kr 에 있습니다. 물론 빠진 부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다 사람이 하는 일이니 완벽할 순 없겠지요. 그러나 중요한 업적은 대충 다 있는 것 같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 중,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1961년 6월 10일에 공포된 농어촌 고리채高利債 정리법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첫 작품이니 박정희 정권의 성격을 파악할 때, 이 첫 작품의 해석은 중요한 의미를 지닐 것이다.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이 나온 것이 1961년 6월 6일이니 그날부터 따지자면 4일만에, 5월 16일부터 계산하면 고작 25일 만에 나온 법이다. 시행령은 그로부터 약 한 달 후 나왔다.(1961.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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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너무 길게 썼군요. 오늘은 이만 줄이겠습니다. 본 시리즈는 연재됩니다.
<다음 편에 계속>
2011.05.26
대한민국 박사모
회장 정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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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만주국 비밀요원 이라고 할지라도 박 전대통령은 당시 일본 육사를 졸업하였기에
훈련중 & 재학중 한국인 이라는 이유로 충성맹세를 강요 받았거나
실제 그렇게 했을 개연성은 잇다고 여겨집니다.
오히려 그들을 믿게해야 비밀결사의 공작원 활동도 가능한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