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녀도10
백운은 나에게 한 장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 사진의 주인공은 젊은 서양 여자였는데
백운과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이름이 " 캔덜" 박사라 했다. 캔덜 박사는 미국 캘리포
니아 버클리대 인류학과를 졸업했으며 현재 한국 무속신앙 연구와 강의를 위해 한국
학중앙연구원에 몸담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평화봉사단원으로 1970년 한국에 왔다가
우연히 굿판과 맞닥뜨렸다고 한다. 인류학과라는 것이 샤머니즘을 배제할 수 없는 학
문이라 한국의 무속에서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다고 했다.
골럼비아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캔덜이 인류학에 관심을 두고 아예 보따리를
싸들고 한국을 찾아와 감악산 부근 작은 마을에 머물면서 한국의 무속 신앙에 대하여
깊게 공부하고 있을 때 백운은 그녀를 만났다고 했다. 그녀가 백운에게 말하기를, 한국
의 무당굿에 대하여 서양에선 (샤머니즘 퍼포먼스)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며
한·미 수교 백 주년이 되던 1982년에 한국의 김금화 라는 무당이 미국 링컨센터에서
굿을 공연으로 했을 때 표가 몇 달 전에 매진되었다고 했다. 김금화 무당은 뉴욕과
LA 등 여러 도시와 예일대학과 다른 주립대학을 돌며 굿을 보여주었는데 그때마다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고 했다. 그래서 한국 무속에 깊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는데
김금화 무당은 그 후에도 유럽과 아시아 여러 나라를 순회공연 하였으며 특히 독일
에서는 윤이상 선생을 위한 진혼굿을 하는가 하면 세인트 존 디바인 성당에서도 굿을
하였다고 한다.
캔덜 박사가 백운에게 이르기를 자신도 힘들 때는 "산신령께 빌어요!" 라고 했단다.
“좋은 신랑을 만나 결혼을 하게 해달라고 빌었고, 또 박사가 되게 해달라고 빌었고 아이
를 달라고 감악산 신령님께 빌고 빌었는데 감악산 산신령이 모든 소원을 다 들어주었다
고 했다. 그래서 감악산을 신령스런 산으로 인지하게 되었고 때문에 한국 무속에 대하여
더욱 이해의 폭이 넓어졌으며, 그녀는 새로운 것을 시작하거나 바람이 있을 때마다 감
악산 산신령을 찾아와 빌었는데 금욕과 금육, 그리고 금식을 통하여 자신을 정화시킨 상
태에서 진정으로 치성을 드릴 때만 소망이 이뤄지는 것 같았다며 서양의 기도와 한국의
치성은 비슷한 것 같지만 본질이 다른 거 같다고 했다 한다.
백운은 그때 그녀로부터 한국의 무속을 학술적 체계로 재조명해야겠다는 영감을 얻었다
고 했다. 그 이후로 백운은 무속을 연구하는 한국의 교수들을 백방으로 알아내어 그들을
교수진으로 구성하여, 무속 대학을 설립할 방안을 마련하기에 이르렀다고 했다. 그런데
무속 대학을 설립하는 과정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게 개신교였다고 했다. 함에도 백운은
감악산 부근에 학교 설립 부지를 사들이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그 재원을 마련
하는 방편으로 오락기 사업에 손을 대고서는 그들의 뒤통수를 치고 있는 것이었다.
“치성이라 함은 신명에게 간절하게 빌고 비는 한숨과 눈물로 들이는 정성인 것입니다.
저는 오락실 사업을 하기 전에 이곳 감악산에서 백일기도를 드렸습니다. 매일 첫 새벽에
일어나 계곡의 차가운 물로 몸을 정갈하게 씻고, 정화수 한 그릇 떠놓고, 촛불 한 쌍, 향
한 촉, 켜 놓고 빌고 또 빌었습니다. 다행히 지금까지는 아무런 문제없이 순탄하게 예까
지 왔습니다.”
백운은 감개무량 한 듯 감악산 정상인 장군봉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운이 다시 말하기를
감악산 정상에는 순수 진흥왕비라 하기도 하고, 또는 빗돌대왕비 '설인귀사적비' 글자
가 없다 하여 무자비라 불리는 비석이 하나 서 있는데 이 비석을 군작전 상 철거를 하였
더니 자주 사고가 난다 하여 다시 세우니 무사했다는 것이다.
이 비석에는 또 다른 전설이 있는데 사람들이 비 뒤에서 용변을 보아 불결해지자 흰옷
입은 노인이 나타나서 감악산 근처 7개 촌락에 소를 가진 사람들에게 현몽하기를. 소를
하룻밤만 빌려 달라고 했는데 아침에 잠에서 깨어 외양간에 소를 보니 소의 온몸이 땀
에 홍건히 젖어 있었다 하며 설마치 고갯마루 (현 양주군 남면 황방리)에 있던 비석이
감쪽같이 하룻밤 사이에 감악산 정상으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소를 빌려주기를
거절했던 집의 소들은 시름시름 앓다가 모두 죽어 버렸다 한다.(양주군지 참조)
백운에게 있어 감악산은 그에 삶의 목적에 지표가 되어주는 동시에. 백운의 존재를 빛
나게 해줄 성산인 듯, 싶었다.
“감악산이라는 이름의 산은 양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황해도 서흥군의 감악산, 황해
도 인산군의 감악산, 강원도 원주의 감악산 경남 거창군의 감악산, 거창군 남산면의 감
악산도 모두 신 산의 의미로 보면 됩니다.”
그러고 보니, 감악산은 양주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나 보다. 태봉이라 이름 붙은 산은
임금의 태를 묻은 산만을 태봉이라 불렀다 했는데, 우리나라에 태봉이라 이름 지어진
산이 여기저기 많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감악산 역시 같은 이름의 산이 이렇게
많을 줄은 미처 모르고 있었던 일이었다.
“제가 감악산에 대해서 좀 더 깊은 조사를 하여 보았는데 감악산에는 참으로 많은 이야
기 거리가 숨겨져 있어요, 고려 제7대 왕인 목종이 왕위에 오르자 나이가 어린것을
이유로 친 어머니인 헌애왕후가 섭정을 하죠. 정권을 움켜쥔 헌애왕후는 자신의 애인
인 김치양을 불러들여 떳떳이 부부행세를 하며 간통을 하고 아들까지 생산하게 됩니다.
왕권을 완전히 빼앗겨 버린 목종은 절망하고는 나라의 정사를 소홀히 하며 남색에
빠져들게 되지요. 이때 병마사인 강조는 김치양의 정치 농단을 빌미로 해 목종을 살해
하고는 자신이 세운 새 임금 현종에게 목종이 자살한 것으로 허위보고를 한 후 감악산
에서 목종의 시신을 화장해 버립니다.”
백운이 감악산 장군봉 아래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감악산을 주제로 계속 설명하여 준다.
“저기 보이는 산기슭 뒤쪽에는 (현 적성면 마지리)은 비룡폭포라 불리는 폭포가 있는데
비룔 부대라는 군부대가 주둔하는 바람에 생긴 새로운 이름이며, 원래 이름은 운계 폭포
인데 경치가 빼어난 골짜기로 유명하기도 하지만 고려 제7대왕 목종이 신하에 손에 의해
비참하게 목 졸려 죽은 곳이기도 합니다.'
백운은 목종이 목이 졸려 죽었다는 감악산 기슭을 눈시울이 붉어지며 바라보고 있다.
그런 그의 모습이 참으로 숙연해서 나도 같이 덩달이가 되어 가야만 했다.
"거란과 고려는 주종의 관계가 아니었는데도 거란은 강조의 정변을 트집 잡아 거란의
성종이 군사 40만을 직접 끌고 압록강을 넘어오죠, 거란과 고려의 전쟁은 3차례에 걸
쳐 일어나는데, 서희에 의한 외교전이 있었던 1차와 강조의 패전을 기록한 2차, 그리
고 강감찬 장군이 복수를 하는 흥화진에서의 귀주대첩 을 거둔 3차 전쟁이죠, 거란군이
장단악 사당까지 이르렀을 때, 감악산 정상의 형세가 마치 군기와 군마들이 많이 늘어
서 있는 듯이 보여서 거란병이 겁을 먹고 감히 더 이상 침입하지 못하였답니다."
백운의 말투에서는 감악산이 스스로 거란 병을 물리친 듯 했으며, 마치 자신이 감악산
의 분신이라도 된 듯한, 표정이었다. 백운은 감악산에 깊이 매료된 듯이 보였다. 백운은
이야기를 계속하여 이어갔다.
"저는 이곳에 단과 대학을 세우려고 합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무속만을 가르치는 단과
대학이 전무한 실정입니다. 민속학을 연구하거나 인류학을 전공한 교수들이 무속에 관심
을 갖고 개인적인 연구를 한 것은 있어도 체계를 잡아 무속만을 가르치는 대학은 아직
없습니다. 무속은 미신이 아닙니다. 무속은 전에 말했듯이 복을 빌고 받는 행위입니다.”
백운과 나는 백운이 구입했다는 임야를 걷기 시작했다. 농민들이 농사를 폐하는 바람에
황무지로 변한 그런 묵정밭인데 쓸모없는 땅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 여기 감악산이 치성을 드리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이며 역사적으로도 그 의미가 뛰어
난 곳입니다. 이곳 신암 저수지의 물은 전혀 오염되지 않은 자연 형태의 물입니다. 저수
지 위로 공장은 물론 양계장이나 목장조차 없습니다. 감악산 물이 전혀 오염되지 않은
상태로 모여 있는 곳이지요,”
백운의 말처럼 신암 저수지의 물은 참 깨끗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다. 감악산의 모습이
허리까지 물속에 잠겨 있었는데 신비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다 알다시피 물은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그냥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게 아니라, 오염된
자신을 스스로 정화 시키면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것이지요,”
나는 백운으로부터 한 발자국 뒤에 따라가며 그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백운은 내가 자기
앞으로 나서는 걸 싫어하는 듯 느꼈기 때문에 그리 한 것이다. 나는 백운의 말에 달리 토
를 달거나 내 의견을 강하게 주장한 적도 없었지만 물이 스스로 자신을 정화시키면서 흐
르고 있다는 백운의 말에 깊은 공감을 아니 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가장 깨끗한 물을 골라 마시죠. 하지만 깨끗한 물이 사람 몸에 들어간 순간
제일 더러운 물로 변하고 맙니다. 하지만 똥, 오줌, 땀으로 나온 배설물은 자연의 정화
과정을 거쳐 새로운 물로 태어나지요, 정화되는 거지요. 이것이 윤회의 기본이며 법칙
입니다. 사람이 마셨던 물은 채소가 먹기도 하고, 토끼도 먹습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
해 물은 과거의 정보를 스스로 담습니다.”
물이 스스로 과거의 정보를 담는다는 백운의 논리는 쉽게 수긍가지 않았다. 일본의 유
명한 사진작가이며 물 박사인 에모토 마사루가 쓴 "물은 답을 알고 있다." 라는 책 1,2
권을 다 읽었어도 물이 과거의 정보를 스스로 담는다는 구절을 읽은 기억이 없기 때문
이었다. 나는 백운의 뒤를 따라 걷다가 걸음을 멈추어 서고 말았다. 수면에 잠자리가
목욕을 하듯 스치며 지나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백운이 뒤 돌아와 내 곁에 서
는 듯, 하더니 앉기 좋은 곳을 골라 궁둥이를 붙인다.그리고는 내가 듣던 말든, 호수
를 바라보며 가느다란 풀 대롱을 꺾어 마디마디 자르며. 저 혼자 이야기하듯 내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이야기를 계속한다.
“1988년 프랑스 국립 의학연구소의 자크 벵베니스트 박사는 물이 정보를 기억한다는 이
론을 확립하지요, 박사는 혈액응고라는 실험을 통해, 물이 모든 정보를 기억할 뿐만 아
니라 다시 그 물질의 특성을 재현시킬 수도 있음을 증명하였죠. 보이는 물질을 비롯하
여 파동성을 띠고 있는 것은 무엇이나 물은 다 기억할 수가 있다는 것이죠.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고유한 파동을 갖고 있으므로, 물은 이 우주의 모든 정보를 다 기억하고 있
다고 합니다.”
풀 대롱을 다 잘라낸 백운이 또 다른 풀 대롱을 꺾어 든다. 백운은 눈길을 호수 수면
에 고정시키고는 무표정한 모습으로 앉아 있으면서 하는 말이 물은 기억을 재현할 때
도 역시 파동의 동기현상에 의해 그것과 똑같은 주파수의 파동을 만나면 물속에 기억
되어 있던 정보가 그대로 발휘되어 나온다고 했다. 따라 물은 모든 정보를 파동의 형태
로 기억할 수 있으며, 또한 그 기억된 정보를 파동의 동기현상에 의해 그대로 재현시켜
낸다는 것이다. 이러한 벵베니스트의 이론을 눈으로 확인시켜준 것이 바로 에모토 마사
루 박사의‘물 결정 사진’인데.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눈에 보이는‘물질’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마음속 생각이나 기도의 염원까지도 물이 인식하고 기억한다는 사실
이라했다.
나는 백운의 말이 거짓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모르는 것은 상
대편도 몰라야 한다는 인식에 사로잡혀 하지 않아도 될 충돌을 일으키는 모습을 자주
접했기 때문이었다. 백운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어야겠다고 생각하고는 ‘내가 모르는
것을 이 사람은 알고 있는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백운 곁에 내 궁둥이를 가져다 붙였다.
백운은 시선을 호수에 둔 채로 말을 이어갔다.
“우리의 할머니들이 예전에 칠성님께 정화수를 떠놓고 치성을 드렸을 때 물을 사용했
지요. 물이야 말로 윤회를 가장 잘 설명하면서 정화시킨다는 것을 옛 어른들이 이미 아
셨기 때문이죠!”
풀 마디를 다 꺾은 백운이 작은 돌을 주워들더니 호수에 집어 던진다 ‘풍덩’소리와 함
께 동그라미들이 파장을 그리며 물위를 미끄러지듯 헤엄쳐 나간다. 파문에 파문을 그
리며 퍼져 나가는 물의 파장이 참으로 아름답게 느껴졌다. 물의 파문을 보며 어릴적,
물수제비를 던졌던 동심의 세계를 맛보았던 나와는 달리 그것을 바라보는 백운의 표
정은 무심 그 자체였다.
“지구는 사람의 영혼을 정화시키는 과정을 지닌 별이죠. 이곳에서 깨끗이 정화를 시켜
다음 단계의 별로 가니까요, 하지만 정화 시키는 과정에서 마가 들어 영혼이 더 더렵혀
지는 사람들도 많이 나타나고 있지요, 그들은 자신의 영혼이 깨끗해질 때까지 다음 단
계의 별로 가지 못 합니다.”
말을 끝낸 백운이 나를 바라보았는데 그 눈빛이 저번에 소운이 내게 보냈던 사람 빨아
들이는 듯한, 눈빛이었다. 나는 백운의 눈빛에 감전된 게 아니라 체면에 걸린 것 같
은 느낌이 와 닿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백운은 무심한 상태에서 말을 이어가
고 있다.
“때문에 다음 단계의 별로 가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매사에 감사해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며 늘 타인을 배려해야 합니다. 물은 다음 단계의 영혼이 마시는 고귀한 것이기 때문
이지요. 따라 인간은 물을 깨끗이 사용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서양 사상이
들어오면서 물을 하나의 물질로만 여겨 함부로 대하죠, 깨끗한 물 먹겠다고, 정수기에
물을 정수시켜 보아야 그건 정화된 물은 아닙니다. 정화는 화학 반응을 통해 정수 시키
는 것이 아니라, 감사의 마음으로 정화 시켜야 하기 때문이죠, 새벽에 물 한 그릇을 떠
놓고 정갈한 마음으로 드리는 치성 이것이 바로 다음 단계의 별로 가는 비밀의 열쇠입
니다.”
어릴 때 외할머니가 장독대에 물그릇을 떠놓고 손바닥 하나는 아래에 놓고 또 한손으
로 손바닥을 돌려가며 꼬부라진 허리를 굽혀 싹싹 비는 모습을 보아온 적이 있는데
그것이 다음 단계의 별로 가는 비밀의 열쇠라는 백운의 말이 귀에 걸리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신의 제단앞에 지폐 몇 장 던져 놓는 행위로 죄 씻김 받기를 원하죠, 하지만,
자기 자신이 정화되지 않았는데 제 아무리 헌금 해봐야 신은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신
이 반응하는 것은 깨끗한 영혼에게 반응하는 것이지 돈 몇 푼에 반응 하지 않습니다."
그럴 거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당신이 신이더라도 그리 할 겁니다.치사하게 신이 돈 몇 푼에 면죄부를 주려고요 돈이
필요한 건 신이 아니라 신과 인간의 중간에서 교량 역할을 하고 있는 성직자나 무당들
이겠죠? 그들은 그 돈이 신께 바쳐진 것임을 강조 하면서 자신들의 생활비나 활동비로
쓰고 있는 겁니다. 신은 깨끗한 물 한 그릇 떠 올리는 행위를 더 좋아하시는데 사람을
은 돈을 헌금함에 넣습니다. 오형이 신이라면 돈에 손이 가겠습니까? 깨끗한 물에 손이
갈 것 같습니까?”
백운의 입가에 미소가 돌았는데 그 미소의 의미는 신은 재물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논리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그럼 미소였다. 하긴 내가 신이라면 돈에 손이 가지
않고 깨끗하게 바친 정화수에 손이 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 물질
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서인데 내 마음이나 신의 마음이 같을 것이라는 내 생각이
그리 틀리지 많은 않을 성도 싶었다. 백운은 기독교 십일조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했는데
원래는 십일조라는 것이 교회에 바치는 헌금이 아니라, 중세 유럽 영주들에게 농민들이 바
쳤던 세금이 변한 형태라는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1790년 대혁명 과정에서 십일조가 폐지되었으며 십일조가 아니라 15분의 1
이었으며 영국은 1650년경에, 독일에서는 1800년경에 전부 폐지되었는데 미국에서는 영국
에서 건너간 청교도들이 1900년도 초에 미국에서 시작되었던 오순절 운동에서 십일조가 다
시 부활했는데. 우리나라는 미국의 선교사들이 들어오는 바람에 다른 나라에는 없는 십일조
가 한국에서만 기승을 부린다고 했다. 백운은 마가복음 10장 21절에서 22절을 내게 낭송해
주었는데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
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백운이 다시 말하기를 똑같은 내용이 마태복음 19장 21~22절에도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성경을 인용하여 다른 나라엔 없는 십일조를 걷어 들이는 한국의 목사들은 예수님의 말씀
처럼 자신들의 전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할 것이라 했다. 그래야 예수님
의 말씀을 올바로 행하는 진정한 목자라고 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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