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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수 시집 발문>
실존의 배꼽을 어루만지다
김양헌
꼭지는 슬프다. 질기고 질긴 슬픔이다. 태어나자마자 어미 울음부터 들은 꼭지. 계집 꼭지는 그만 똑 떨어지고 사내아이 점지하라는 부적, 꼭지. 온갖 차별과 멸시를 덧쓴 이름, 꼭지. 여자라 젖도 제대로 못 얻어먹은 꼭지. 꼭지라고 겉보리 서너 가마에 팔려간 꼭지. 주정뱅이 남편에게 걷어차여도 꼭지니까 참고 산 꼭지. 박복한 꼭지가 잡아먹었다고 남편 요절한 죄까지 뒤집어쓴 꼭지. 꼭지라서 가난을 달고 산다는 시부모 구박에 허리 다 휘도록 일만 한 꼭지. 꼭지가 돌도록 피땀 짜내 뒷바라지한 자식들 이민 가버려 다시는 못 만나는 꼭지. 부모님이 주신 이름 끝내 버리지 못하고 독한 비애를 견디며 살아왔건만, “독거노인” 딱지 하나로 남은 꼭지.
하기사 어디 꼭지뿐이랴. 해방 전후 민중사에서 딱구, 말자, 끝순이 아닌 여인이 몇이나 되겠는가. 따지고 보면 이 땅의 장삼이사는 대부분 일제 강점기에서 군사정권까지 수난의 현대사를 비켜가지 못했다. 한살이의 낱낱은 저마다 다를지라도 파란만장한 실존의 긴긴 시간을 거쳐온 점은 다르지 않다. 실존의 진흙구렁을 맨발로 건너며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려온 수많은 꼭지들. 「꼭지」의 주인공 “꼭지”는 바로 이러한 하층민의 죽살이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꼭지는 우리의 부모나 조부모가 맞닥뜨렸던 혹독한 삶의 실상을 되살려내는 존재다. 되살려낼 뿐 아니라 아직도 그러한 삶이 끝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만금이 절창이다」의 여인네들, 「서정춘」과 「지네」의 서정춘 시인, 「얼룩말 가죽」의 할머니, 「파냄새」의 노점상 아주머니, 「줄서기」의 노파, 「광장 한 쪽이 환한 무덤이다」의 노숙자는 바로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꼭지들이다. 「배꼽」, 「아마존」, 「저수지 풍경」, 「매미소리」, 「방, 방」, 「이것이 날개다」, 「막춤」, 「조묵단 전」의 등장인물 또한 꼭지의 변주.
그러나 「꼭지」는 “꼭지”의 일생을 구구절절 늘어놓지 않는다. “젖배 곯아 노랗”게 뜬 생의 처음과 “잔뜩 꼬부라져 달팽이 같”(「꼭지」)은 죽음 직전의 순간만 묘사할 따름이다. “시퍼렇게 뒤를 쫓는 식칼 같은 세월”(「기린」), 그 가운데 토막은 뭉턱 잘라버린다. 제대로 시가 되려면 “생사의 숱한 기로를”(「얼룩말 가죽」), “입이 잔뜩 나온 불행이 주리를 트는”(「방, 방」) 정황을, 최소한 “세상의 비린 슬픔 한 모타리라도”(「오백 나한 중 애락존자의 저녁」) 세세히 그림으로써 구체성을 확보해야 마땅할 터. 절실한 상황을 드러내어 하나의 진실에 이르는 구도는 시작법의 기본. 서정시는 한 토막 시공간만으로 전체를 거느리고 영원에 닿으려는 욕망의 양식이다. 결코 충족할 수 없는 이 욕망이 끊임없이 시를 생산하도록 부추기는 원동력이다. 하지만 문인수 시인은 오히려 “꼭지”가 살아온 삶의 세목들을 시에서 제거한다. 가슴을 찌르는 특별한 상황, 특정한 시공간을 찾아 확대하는 방식을 버리고 서정의 시간을 새롭게 해석한다.
시인은 길고 긴 시간이 누적된 정황을 포착한다. 쌓이고 쌓인 삶의 무게에 짓눌려 일그러진 시간의 상흔을, 몸부림치고 할퀴고 물어뜯어도 끝내 벗어나지 못한 실존의 끝자락을, 한 걸음 물러선 자리에서 담담하게 응시한다. 「꼭지」 전반부까지 화자는 “꼭지”의 현재 모습만 그린다. “잔뜩 꼬부라져 달팽이 같”은 할머니, “애터지게 느리게” 숨을 몰아쉬며 “골목길 꼬불꼬불” 올라가는 “독거노인”의 우여곡절 과거사는 알 길이 없다. 한때는 알콩달콩 행복했는지, 돈을 벌어 떵떵거리며 살았는지, 찢어지는 가난 때문에 여러 번 자살을 시도했는지, 어느 날 갑자기 나락으로 떨어져 지금에 이르렀는지, 그 미지의 시간은 “고픈 배 접어 감추며” 동사무소 가는 독거노인의 그림자에 어른거릴 뿐이다. 시간이 개입하기 전까지, 겉보기에 「꼭지」는 한 존재의 불행한 현실을 묘사한 평면의 그림 같다.
이 평면의 화폭은 “기억의 끝”에 매달린 “젖배 곯아 노랗다”는 생의 첫 장면과 만나면서 단번에 입체성을 띤다. “젖배 곯아”는 의미상 당연히 과거지만, “노랗다”는 과거면서 현재다. 현재는 과거와 급작스럽게 결합한다. 결합의 매질(媒質)은 “노랗다”는 형용사. 세 번이나 나오는 “노랗다”는 “민들레꽃”의 색깔에서 결핍과 고통, 죽음으로 의미망을 넓히며 “젖배 곯”았던 때와 “하늘 꼭대기 넘어가”는 시점을 동질의 시간으로 묶어놓는다. 처음과 끝을 하나로 싸매니 가운데 토막은 저절로 납작 찌그러진다. 구절양장 질긴 일생이 팍삭 짜그라들어 “고픈 배”에 눌어붙으니, 그 형상은 드러나지 않으나 쓰디쓴 비애가 물컹거리며 쏟아질 듯하다. 현재 상태가 과거의 성격을 규정하고, 과거의 부정성은 엄청난 크기로 되돌아와 현재의 목덜미를 조른다. “꼭지”는 “도대체 어느 시절 한 번 행복하지 못하고”(「저수지 풍경」) 하늘이 노랗게 보이는 지금까지 온갖 고초를 다 겪어왔다는 사실을,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야 새처럼 자유롭고 편안하리라는 마지막 연이 강하게 환기한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꼭지”는 꼭지다.
「만금이 절창이다」의 “참말로 죽는 거시 낫것어야”는 탄식도 시간의 패총에서 건져올린 절창이다. 개펄의 여인네들은 “하루하루 수장되는 길”을 건너고 또 건너 지금에 이르렀다. “삶이 몸소 긋는 자심한 선”은 하루아침에 생기는 게 아니다. 고된 노동이 끝내 가난을 넘어서지 못하는 실존의 수렁이 없었다면, 그 생존의 뻘밭을 “무척추동물 배밀이”하듯 밀고온 산더미 같은 시간이 없었다면, 만금의 절창은 먼 풍경처럼 가물가물 사라졌을 터. 「파냄새」의 아주머니 또한 “혹한”의 나날을 견뎌온 “긴 화차 같은 일생”을 파냄새에 전 “시꺼먼 방한복에다 묵직하게/똘똘 뭉쳐 놓았다.” 현재란 덧쌓인 과거의 얼굴, 과거라는 퇴적층의 지표면이다. 순수한 의미의, 현재는 없다. 누적된 시간의 표정이 있을 뿐이다. 「지네」는 현재의 삶이 어둡고 긴 시간의 똬리 위에 얹혔음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배냇앓이”는 존재에 앞서는 본질이다. 태어나기도 전에 벌써 실존의 힘에 떠밀리는 존재의 비애. 이 세계에선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는 싸르트르의 명제도 무의미하다. “평생/삼 短”일 수밖에 없는 운명은 존재 이전에 존재의 바깥에서 이미 결정되어 꼭지들의 삶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썩을 놈의 슬픔”은 그래서 수시로 오고 간다. “흉터”는 일평생 온몸을 공전하는 비애의 기억, 세포마다 붙박인 트라우마의 상징이다. 흉터의 거적을 들추면 수천 수억 과거들이 지네처럼 우글거린다.
그러나 놀랍게도, 꼭지들은 눈물바다에 빠지지 않는다. 화자는 대상을 연민으로 껴안지만, 한편으론 대상과 냉정하게 거리를 유지한다. “질긴 끈 같은 간밤 울음이 도로/죄 풀려나”(「서정춘」)와 눈물 펑펑 쏟는 장면에서도 감정에 휘말리는 법이 없다. “참 애터지게 느리게”, “여생을 핥는”(「꼭지」) 존재를 마른 뼈다귀 같은 비애가 감쌀 뿐이다. 객관 묘사는 느긋하게, 간명하게, 직유로 물러서며, 죽음을 지연하며, 무심한 듯 흐른다. 「얼룩말 가죽」의 화자는 긴박한 순간에도 일인칭으로 개입하는 범주를 제한하면서 상황을 제시하는 데 주력한다. “작은 몸에다 억눌러, 억눌러” 둔 “짐승 같은 슬픔”(「흔들리는 무덤」)은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해 딱딱하게 굳어간다. “참척의 슬픔”이 “촘촘한 철사”처럼 목을 옥죄어도, 참담한 사연이나 남은 자의 비애는 “입을 꽉 다문”(「뫼얼산우회의 하루」)다. 시간의 무게에 짓눌려 증발한 눈물의 강이 곳곳에 흔적을 남기지만, 시인은 짐짓 모른 척 감정이입의 유혹을 뿌리친다. 슬픔은 시인의 몫이 아니라, 꼭지의 몫이고 독자의 몫이다.
시인은 꼭지들의 시간과 비애를 압착하면서 집단의 성격도 함께 눌러버린다. 하층민, 피지배계급의 특수성은 희미하게 바닥으로 가라앉고 저마다 껴안고 살아온 실존의 조건, 인간의 문제가 전면에 떠오른다. 물론 가난과 고통은 사회의 배려와 제도로써 일정 부분 해결할 가능성이 있지만, 시인은 그런 따윈 무시한다. 실제로 계층 이동의 행운을 누리는 사람은 드물다. 그 어떤 정책도 달동네를 없애지 못했고, 상대 빈곤은 날이 갈수록 커지기만 한다. 문인수 시인은 이거야 당연한 일이라는 듯 시 뒤편으로 밀쳐놓는다. 「얼룩말 가죽」은 법이라는 제도의 폭력성을 배후에 깔고, 「광장 한 쪽이 환한 무덤이다」는 사회 구조의 모순을 배경으로 두지만, 특정 집단의 소외나 현실의 모순을 직접 다루려는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꼭지”라는 이름은 가부장제 사회의 성차별에서 생겨나 한 존재의 평생을 구속하지만, 「꼭지」의 주제는 페미니즘이 아니다. 「만금이 절창이다」에도 하층민이자 여성으로서 이중의 억압에 시달리는 여인네들이 등장하나, 여성 해방이나 빈곤보다 실존의 수렁을 건너는 법, 견딤의 미학을 앞세운다.
「이것이 날개다」는 꼭지의 한 극단을 상징하는 장애인의 삶을 그림으로써 문인수 시인의 주요 관심사가 무엇인지 표명한다. 아무리 좋은 제도도 장애인의 존재 방식 자체를 바꿀 수는 없다. 작품은 장애인의 권익 옹호나 복지 개선 따위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태어나서 마흔두 살까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삶을 견디고 견딘 한 인간을 보여줄 따름이다. 그러니 목소리를 높일 필요도 없고, 눈물로 행간을 적실 까닭도 없다. 1연은 문상객의 행동을 묘사함으로써 죽은 라정식 씨의 일상을 간명하게 재구성한다. 문상을 오고, 감사 기도를 드리고, 밥을 먹는 “아수라장, 난장판”에서 죽음의 비애는 저만치 뒤로 물러난다. 비애조차 뒤틀리고 문드러진 현실 앞에서 “왈칵, 울음보를 터트”리는 사람은 자원봉사자 비장애인뿐, 아무도 울지 않는다. 삶은 죽음 앞에서 분명하게 실체를 드러낸다. 몸뚱이 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삶, 죽음보다 못한 기막힌 삶. 바싹 마른 울음을 뒷면에 덧댄 장애인의 삶은 생존의 절벽에 내몰린 꼭지들 전체의 문제를 내포하지만, 시인은 개인의 실존에 더 큰 무게를 둔다. 온몸을 “비틀고 구기고 흔들어 이제 비로소” 참혹한 운명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한 인간의 죽살이는 특정 집단의 문제를 넘어서 존재의 근본을 되새기게 한다. 그런 까닭에 2연에서 화자는, 시인은, 전혀 슬픈 기색 없이, 만금의 절창처럼, 담담하게 죽음을 해석한다. “죽음은 그 어떤 삶도 놓치지 않고 깨끗하게 챙긴다”(「막춤」). 죽어서, “안심”이다. 비로소 훨훨, “창공이다.”
뇌성마비 중증 지체․언어장애인 마흔두 살 라정식 씨가 죽었다.
자원봉사자 비장애인 그녀가 병원 영안실로 달려갔다.
조문객이라곤 휠체어를 타고 온 망자의 남녀 친구들 여남은 명뿐이다.
이들의 평균수명은 그 무슨 배려라도 해주는 것인 양 턱없이 짧다.
마침, 같은 처지들끼리 감사의 기도를 끝내고
점심식사 중이다.
떠먹여 주는 사람 없으니 밥알이며 반찬, 국 국물이며 건더기가 온 데 흩어지고 쏟아져 아수라장, 난장판이다.
그녀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정은 씨가 그녀를 보고 한껏 반기며 물었다.
#@%, 0%^$&*%ㅒ#@!$#*?(선생님, 저 죽을 때도 와 주실 거죠?)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왈칵, 울음보를 터트렸다.
$#^&@\^%, *&#…… (정식이 오빤 좋겠다, 죽어서……)
입관돼 누운 정식 씨는 뭐랄까, 오랜 세월 그리 심하게 몸을 비틀고 구기고 흔들어 이제 비로소 빠져나왔다, 다 왔다, 싶은 모양이다. 이 고요한 얼굴,
일그러뜨리며 발버둥치며 가까스로 지금 막 편 안심, 창공이다.
������������������������「이것이 날개다」 전문
누군들 이리 가혹한 운명에 눈물 한 방울 보태고 싶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시인은 속울음 삼키며 보여주기로 일관하고, 딴전을 부리는 척 슬픔을 탁탁 털어 물기를 쭉 빼낸다. 때로는 묘사의 틈을 비집고 감정이 슬쩍 고개를 내밀거나 2연처럼 화자의 목소리가 스며들기도 하지만, 대상과 거리를 유지하려는 기본 태도는 변함이 없다. 이 객관의 자리가 없었다면, 어찌 애애절절한 상가에서 죽음의 모가지를 비트는 이 한 마디를, “$#^&@\^%, *&#…… (정식이 오빤 좋겠다, 죽어서……)”라는 역설을 새겨들을 수 있었겠는가. 이 한 줄이 즈믄 밤의 눈물을 다 감당하고도 남는다. 둘째 연은 눈물 없는 눈물의 역설에 덧붙이는 시인의 조사(弔詞). 「꼭지」의 끝 연도 마찬가지 역설의 여운. 「만금이 절창이다」의 “늙은 연명이 뱉은 절창”도 실존의 극한에서 말라붙은 눈물이 빚어낸 역설의 노래다.
원래 문인수 시인은 눈물이 많았다. 바싹 ‘마른’ 눈물이 아니라 추적추적 ‘젖은’ 눈물이었다. 첫 시집 『늪이 늪에 젖듯이』는 첫 작품부터 “천천히 젖는/비의 후렴”(「겨울비」)에 휩싸여 비애가 시집의 중심 정조임을 암시한다. “비, 빗소리, 눈물, 울음”은 ‘젖다’나 ‘운다’를 동반하며 둘째 시집 『세상 모든 길은 집으로 간다』까지 비애의 정서로 물들인다. 비애는 “낯선 객지에서 젖는 내 여윈 몸”(「실」)이 부르는 노래다. 비애의 원천은 고향 상실. 시인이 실제 사는 곳도, 화자가 자리잡은 공간도 객지다. 객지는 “앞이 막히는 삶”(「길」)의 비유. 삶에 문제가 없다면 고향과 타향이란 구분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객지는 절망, 결핍, 고난, 죽음의 이미지로 뒤덮여 희망, 충만, 행복, 생명의 이미지를 두른 고향과 대치한다. 고향과 객지의 대립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 자아와 세계의 불화를 밑절미로 삼는 서정시의 기본 구조를 형성한다. 첫 시집과 둘째 시집은 이러한 구도를 따라 현실의 결핍이 낳은 그리움, 그 그리움이 잉태한 비애로 축축하게 젖어드는 시인의 내면 정황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셋째 시집 『뿔』도 “젖은 것들”(「비」)로 가득하다. 여전히 감정이입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대상은 시인의 정서를 대변하는 도구에 가깝다. 예를 들면, “울화통같이 시뻘겋게 솟구쳐오른/꿩!”(「꿩」)에서 꿩이라는 사물의 본질과 울화통이라는 정서는 별반 연관이 없다. 문맥의 흐름이 대상을 특정 정서의 테두리 안으로 몰아넣을 뿐이다. 사물은 사물로 존재하지 않는다. 꿩은 꿩이 아니라 치솟는 비애다. 모든 제재는 본래 모습을 잃고 시인의 의도대로 일그러진다. 시인과 화자는 거의 한몸처럼 붙어 주관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며 대상을 완전히 장악한다. 시인의 비애는 곧바로 모든 존재의 슬픔으로 번진다. 뒤집어 말하면, 슬픔을 품을 수 있는 속성을 지닌 사물이라야 시의 제재로 들어올 수가 있다. ‘비, 새, 가오리연, 까마귀, 소, 그믐달, 돌, 꿩, 소금쟁이, 정선’ 등은 현실에선 연관이 적고 차원이 다른 사물이지만, “끝간 데 없는 울음”(「까마귀」)을 끌어내는 제재로서 동일한 위상에 자리잡는다. 비애 앞에서 모든 존재는 평등하다.
이 경우 서정의 주체에 대응하는 세계는 “실업의 겨울, 황량한 변두리”(「가오리연」)처럼 삶의 조건 전반을 포괄하는 폭넓은 부정성을 띤다. 이 “객지”의 어둠, 실존의 수렁이 너무 깊고 커서, 자아가 결코 건너갈 수 없기에 비애가 발생한다. 그러므로, 비애에는 처음부터 도덕성이 배어 있다. 눈물의 짠맛은 시의 방식으로 구현하는 윤리의 소금기에서 나온다. 부당한 세계에 맞서는 자아의 정당성이 없다면, 패배가 자명한데도 실존의 벽에다 하염없이 머리를 찧는 주체가 없다면, 비애와 그리움의 정서는 생길 수가 없다. 자아는 끊임없이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울며불며 매달려도 세계는 쉽게 보내주지 않는다. 세계는 고향을 기억과 환상의 감옥에다 가두기도 한다. 고향이 실재하지 않으니 그리움은 더욱 커진다. 이런 불가피한 슬픔과 당연한 그리움이 현실성과 상관없이 작품 내부의 논리를 떠받치고 있기에, “돌들의 이마”에 “적의의 뿔”(「뿔의 뿌리는 슬프다」)이 돋고, “빗줄기의 한쪽 끝을 물고 새 날아”(「비」)가고, “누가 만 리 밖에서 또 젖고 있”(「슬픔은 물로 된 불인 것 같다」)음을 감지하는, 일상에서는 일어나기 힘든 정황이 나와도 그다지 어색하지 않다. 자아는 결코 세계를 이길 수 없는 약자이기 때문에, 오히려 손쉽게 공감대를 형성하여 모든 사물을 제어하는 권력을 행사하는 셈이다.
물론 문인수 시인은 이 막강한 권력을 다시 눈물에다 바친다. 당시 시인에게 존재란 곧 비애며, 실존의 정황은 고향 상실인 까닭이다. 셋째 시집을 펴낸 1992년은 시인이 신문사 교열부 기자로 해포를 넘기면서 안정기로 접어들던 때였다. 그러니 셋째 시집까지 작품들은 길고 긴 백수 시절의 방황과 고뇌, 온갖 설움과 울분으로 뒤범벅이 될 수밖에. 군복무를 마치고 20년 세월 거의 스무 군데 직장을 옮겨다니며 현실과 이전투구하고 실업의 나날을 견디었으니, 가슴에 돋은 “적의의 뿔”이 되려 자기 심장을 찌르는 절망과 회한이 어떠하였겠는가. 실존의 벽을 할퀴며 남몰래 통곡을 하여도 억누를 수 없는 분노와 증오는 또 어찌 감당했을까. “긴 빗소리 밤새도록 다 풀려 나”(「빗소리는 길다」)도록 끝끝내 씻지 못한 설움이 남아 온몸의 세포를 적시었으니, 문인수 시인의 초기 시편은 비애의 심연에서 헤어나기 어려웠다.
그러나, 비애가 깊을수록 카타르시스 또한 강력한 법. 덧나고 덧난 상처가 쉽게 낫진 않겠지만, 일단 마음을 풀어내어 눈물 철철 흘리고 나면 속이나마 후련해지게 마련. 격렬한 마음을 글로 표현하여 발산하는 카타르시스는 심리치료의 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 동안 내뱉은 해타(咳唾)가 세 권이나 되니, 울분의 진물이 마르고 절망의 딱지도 떨어지고, 마침내 상처가 아물어 흉터가 잡힐 만하지 않은가. 이 흉물이야 평생 따라붙는 서글프고 고통스런 시의 씨앗으로 남겠지만, 눈물이 잦아들고 감정이 숙지면 시의 표정이라도 달라질 터. 게다가 오랜 직장생활이 글자를 매만지는 기꺼운 일이고 생존을 압박하는 갈등도 크지 않았으니, 칠팔 년을 기다려 묶은 넷째 시집 『홰치는 산』이 다른 모습을 띠는 건 당연지사. 시인과 거리가 가까운 고향을 다룬 만큼 첫 시집의 한 구절처럼 “찔끔찔끔 눈물 나”(「고향점묘․3」)는 일도 많을 텐데, 시인은 거의 눈물을 비치지 않는다. 애이불비(哀而不悲), 비통한 심사가 시의 뒤편으로 스며들면서 시인과 화자 사이에 조금씩 틈이 벌어진다.
이 틈을 비집고 대상이 객관의 머리를 내민다. 온통 빗소리에 감기고 눈물에 젖는 둘째 시집에도 「가뭄」처럼 객관 묘사뿐인 드문 예외가 있다. 여전히 주관의 힘이 강하긴 하나 셋째 시집에는 대상을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진술이 곳곳에 나온다. 시인의 정서를 의탁하되 대상의 본래 속성을 정확히 파악하여 묘사함으로써 화자와 대상 사이의 거리를 적절히 유지하려 애쓴 흔적이 뚜렷하다. 시인과 화자는 대상에서 한 걸음 떨어진다. 아직 자아의 권력을 부정할 수 없으나 일부 작품에서는 대상의 지배권을 대상에게 돌려준다. 그 중 「오징어」는 단연 압권이다. 절망과 좌절의 눈물이 분노와 전복의 힘으로 용솟음치고, 그 역동성에 밀려 어두운 현실이 “푸른 바다”로 탈바꿈한다. “억누르고 누른”, “핏기 싹 가신”, “냅다, 불 위에 눕는” 부정성은 당당한 어조와 통사구조의 견고한 반복에 실려 긍정성의 부정정신으로 바뀐다. 물론 시인의 정서와 사물의 속성이 일치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만, 초기 작품에서는 보기 드문, 대상의 반란, 사물의 독립선언이다.
억누르고 누른 것이 마른 오징어다.
핏기 싹 가신 것이 마른 오징어다.
냅다, 불 위에 눕는 것이 마른 오징어다.
몸을 비트는,
바닥을 짚고 이는 힘.
총궐기다
하다못해 욕설이다.
������������������������「오징어」 부분
따지고 보면 마른 오징어에는 엄청난 비애가 숨어 있다. 그럼에도 왜 눈물 냄새가 나지 않는가? 눈물은 왜 비탄으로 떨어지지 않고 “몸을 비트는,/바닥을 짚고 이는 힘”으로 불타오를까? 가장 두드러진 형식상 변화는 삼인칭의 등장. 일인칭이 물러나고 그 자리를 삼인칭이 차지함으로써 문인수의 시는 일대 변혁을 일으킨다. 『홰치는 산』은 이후 문인수 시의 기본 구도를 결정짓는 분수령이 되었다. 방올음산은 이때 벌써 꼭지들을 잉태한다. 우주가 고요히 오줌을 누는 소리도 방올음산 아래 잘 들린다. 묘사의 힘은 고향에서 발원하여 정선을 휘돌아 인간의 삶터 구석구석 퍼져나간다. 슬픔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어서 일인칭은 평면 위로 움직이지만, 삼인칭은 “시간의 질긴 근육”(「오징어」)이 겹으로 쌓인 입체의 시공을 창조한다. 입체가 생성하는 이 독특한 시공간이 방울음산과 정선, 꼭지와 우주, 그 아득한 거리를 하나로 엮는다.
시인이 일인칭의 괴로움을 버리고 삼인칭의 그늘에 숨어들어 찾아낸 첫째 화두는 눈물맛. 『홰치는 산』에서 『동강의 높은 새』와 『쉬!』를 거쳐 이번 시집 『꼭지』에 이르기까지 삼인칭이라 하여 실존의 조건이 일인칭일 때와 다른 점은 없다. “온갖 적의와 자해의 시간이”(「가시연꽃」), “생업의 오랜 무게가” 여전히 삶을 “험하게 비틀어 놓”(「팔월」)는다. 삼인칭이 건너야 할 실존의 구렁텅도 만만치 않으니, 세계와 자아의 골도 그만큼 넓을 듯하다. 그러나, 삼인칭은 단지 바라보기만 하는 제한 시점에 존재하기 때문에, 눈물로 모든 존재를 움켜쥘 수가 없고 절망으로 가꾸는 윤리의 소금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비록 매춘이 아니면 생존을 보장할 수 없다 하더라도, 부당한 세계를 부당한 방법으로 넘어서는 삼인칭을 비애의 윤리로 감싸기는 힘들다. “봄에 썩지 않는 절망은 없”(「복사꽃제」)다는 경험의 보편성이, “그 어떤 절망에게도 배꼽이 있”(「배꼽」)다는 거의 신념에 가까운 인식이, 비애의 자리를 대신하여 삼인칭을 보좌할 따름이다. 눈물을 퍽 쏟아내어 카타르시스에 이르는 방법은 삼인칭엔 걸맞지 않다. 눈물은 이제 짜지 않다.
오, 달빛 비린내가 난다.
이 달빛 언제나 청보리 냄새가 난다.
달 뜨자 방올음산 꼭대기 불쑥 솟아서
방올음산 아래 가문 들녘 훤히 눕다.
청보릿골 겹으로 깔고 달빛 덮고
달빛에 꿈틀꿈틀 청보릿대 비벼넣는,
그런 일이여 그런 일의 땀몸, 찝찔한 비애여.
오월 춘궁이 있었다.
몸 팔아 새끼들 먹인 그 여자가 있었다.
이 달빛 어디서나 방올음산 세우고
산 아래 척박한 땅,
그 풀빛 비릿한 눈물맛 풍긴다.
������������������������「매춘」 전문
“비릿한 눈물맛”, 눈물은 짜지 않고 비리다. 일상 어법에서 ‘비리다’는 부정성이 강하다. 냄새와 맛이 비위에 거슬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긍정으로 쓸 때도 있다. 귀한 고기 반찬 덕분에 밥을 잘 먹는다는 뜻으로, ‘비린 게 있어야지.’처럼 말한다. 이때 비린내는 생명을 상징한다. 「매춘」의 1연에서도 비린내는 달빛과 청보리 같은 밝은 이미지와 인접하면서 생명의 냄새를 품는다. 2연 1-2행은 비릿한 섹스가 우주의 생명성을 배후에 깔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렇다고 매춘의 “찝찔한 비애”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보리가 익으려면 아직 몇 고개 더 넘어야 하는 춘궁, 눈앞에 출렁이는 보리밭을 두고도 겉보리 두어 되에 몸을 팔아야 하는 이런 지랄 같은 일이라니. “하염없이/명치 끝 치밀며 원․한이”(「매춘 1」) 일어 가슴을 저밀 수밖에.
“비릿한 눈물맛”은 이렇게 부정성과 긍정성을 동시에 안고 있다. 짠맛의 평면성과는 그야말로 맛이 다르다. 청보리밭은 불륜의 밀실이자 생명의 움터. “몸 팔아 새끼들 먹인 그 여자”는 무죄며 유죄다. 간통의 부정성이 없다면 자식을 살리는 긍정성 또한 있을 수 없다. 이 양면성이 슬픔의 미학을 생명의 미학으로 끌어올린다. 『동강의 높은 새』는 “넝쿨의 끝말은 다만 어리고 비린 물음표”(「5월」)라 하여 새 생명을 앞세우고, 『쉬!』에 이르면 “송글송글 맺히는 피땀의 비린 생시”(「끝」)처럼 고된 노동의 신성을 수반하며 “깨끗하고 참한 비린내”(「우렁각시」)의 신생에 닿지만, 이 비린내는 “삶과 죽음의 냄새가 완전히 한 패거리로 흐르는 통로”(「새」)에서 풍기는 “혹독한 생의 냄새”(「싯타르를 켜는 노인」)다. 목숨붙이라면 다들 피하고 싶어하는 죽음의 나락, 그곳이 또한 생명의 탯줄이 자라는 이율배반의 자궁이기도 하다. 『꼭지』의 비린내도 마찬가지 죽음과 신생이 맞부딪는 곳에서 흘러나온다.
폐가는 이제 낡은 외투처럼 사내를 품는지.
밤새도록 쌈 싸먹은 뒤꼍 토란잎의 빗소리, 삽짝 정낭 지붕 위 조롱박이 시퍼렇게
시퍼런 똥자루처럼 힘껏 빠져 나오는 아침, 젖은 길이 비리다.
������������������������「배꼽」 부분
‘폐가 - 낡은 외투 - 밤 - 비 - 정낭 - 똥자루 - 젖은 길’은 현실의 은유. 상황이 심상치 않다. 사내는 죽음에 가깝다. 하지만 그것을 진술하는 방식과 수사는 생명의 따스함과 역동성으로 신명을 낸다. ‘품는지 - 쌈 싸먹은 - 뒤꼍 토란잎 - (빗소리) - 삽짝 - 조롱박 - 시퍼렇게 -시퍼런 - 힘껏 - 아침’은 소리부터 밝고 당당하다. 생명이 약동하는 이미지에 휩싸여 “빗소리”는 울음소리에서 신생의 소리로 승화한다. 그렇다고 사내의 처지가 단번에 달라진 건 아니다. 폐가는 “우거진 풀”이 덮고, 길은 여전히 젖어 있다. “비리다”의 의미망은 바로 이 지점, 부정과 긍정, 죽음과 신생의 경계선상에 포진한다. “그 어떤 희망에게도 말 걸지 않은 세월이 부지기수”지만, “그 어떤 절망에게도 배꼽이 있”기에 “길이 비리”고 삶이 비리다. “시퍼런 똥자루처럼 힘껏 빠져나오는 아침”이라는 기묘한 표현은 부정과 긍정이 원래 둘이 아니라 등을 맞댄 하나임을 암시한다. 절망이 없으면 희망을 인지할 수 없다. 실존의 폐가가 있으니 조롱박이 신생의 꼭지를 매단다. 꼭지들의 배꼽은 실존의 수렁에다 태반을 둔 셈이다.
자본주의의 변방에서 겨우 존재하는 꼭지들은 이 실존의 배꼽을 공통분모로 『꼭지』에 모인다. 죽음을 짊어진 변두리 삶은 「매춘」처럼 처참한 몰골이다. “꼭지”나 개펄의 여인네들, 노점상과 노숙자, 장애인 라정식 씨의 한살이를 곰곰 헤아려보면 말문이 막힌다. 「줄서기」는 음식물 쓰레기더미를 들쑤시는 노파 뒤에서 “물끄러미 제 차례를 기다리는” 한 사내와 소 한 마리 개 한 마리가 해탈에 가까운 풍경을 연출하지만, 이 고요의 심해에는 “썩어 문드러지도록 저마다 오래 다문 비명”이 잠복해 있다. 「막춤」은 “시꺼먼 고무치마 두르고 도심 인파 속을 오체투지 기어다니던 사내”와 공동어시장 바닥을 헤집는 문어의 운명을 겹쳐놓는다. 이들의 “막춤”은 결국 ‘나’라는 인간이 추는 실존의 발버둥이며, 인류 보편의 존재 방식과 그 근본이 다르지 않다. 「뫼얼산우회의 하루」에서 평범한 우리의 이웃들을 어설픈 춤꾼으로 무대에 올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나도 당신도 문어와 “율동이나 스텝이 똑 같”(「막춤」)다.
이렇게 절망의 막장을 헤치고 허무의 심연을 건너 삶을 견뎌온 꼭지들을 시인은 애틋한 눈길로 감싸안는다. 아마도 시인은 자신이 겪었던 “삼켜버리고 싶은 과거”(「흉가」)와 별로 다를 바 없는 절절한 삶에 저절로 마음이 끌렸을 터. 짜디짠 눈물에 푹 절었다가 비린내 풀풀 풍기는 삶을 만나니 온몸의 촉수가 한꺼번에 뻗쳤으리라. 그렇지 않다면 애써 자본의 가장자리를 전전하며 수많은 꼭지들을 찾아 마음을 보탰겠는가. 때로는 처참하게 때로는 담담하고 냉정하게 시의 표정을 바꾸면서, 안타깝고 한스럽고 포근한 손으로 실존의 배꼽을 어루만지는 시인의 마음이 『꼭지』에는 가득 차 있다. 막장의 삶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이 마음이 문인수 시의 근간이자 무목적의 목적이다. 살려는 본능이 이 세상 어떤 힘보다 강함을 환기하려는 뜻은 그 다음이다. 오로지 견딤 하나만으로 운명과 싸워온 존재의 위대함도 그 다음 문제. 아무런 저의도 없이, 인식 이전에 이미 온몸에 무르녹은, 인간 본연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이 『홰치는 산』 이후 『꼭지』에 이르기까지 문인수 시의 밑자리를 두툼하게 돋운다.
측은지심의 우물은 “오래된 사원/꾸뜹미나르의 낡은, 동그란 우물”처럼 “아이를 옥죄는” 실존의 “싸늘한 굴레”(「굴렁쇠 우물」) 한가운데 파놓았다. 이 실존의 우물은 독거노인의 골목길로, 만금의 개펄로, 「벽화」의 “벽”으로, 서정춘의 흉터로, 「동백 씹는 남자」의 “춘궁”, 「조묵단 전(傳)」의 “똥 무더기”, 「얼룩말 가죽」의 “횡단보도”, 「파 냄새」와 「도다리」와 「막춤」의 “바닥”으로 겉모습을 바꾸며, “마지막 한 방울까지 똑 떨어지려는 생”(「향나무 옹달샘」)을 더욱 어둡게 물들인다. “속을 다 파낸”(「식당의자」) 꼭지들이 죽음 앞에 쪼그려 앉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컴컴한 우물. 그러나, 맹자의 우물이 캄캄하게 깊어갈수록 측은지심은 한결 맑게 반짝인다. 부정성과 긍정성의 충돌은 보색대비처럼 또렷이 실존의 배꼽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우물로 기어가는 젖먹이를 보고[見孺子將入於井] 차마 그냥 두지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孟子』)]은 법이나 의도에 구애받지 않고 인간의 내면에서 우러나온, “풍금처럼 흐르는 母法”(「얼룩말 가죽」)과 같다. 일찍이 부자(夫子)께서 인(仁)이라 명명한, 이 불인(不忍)하는 모법(母法)이 문인수 시의 큰 주제라면, 이를 구현하는 방법론은 견(見)에 들어 있다. 시인은 시인(視人)이요 견자(見者)라 하였으니, ‘본다’는 것은 단순히 대상을 바라보고 묘사한다는 의미를 넘어서 마음으로 깊이 꿰뚫어본다는 관(觀)의 범주까지 싸안는다. 보는 일은 삼인칭의 논리. 하지만 통찰의 눈은 대상 묘사에 안주할 수 없다. 죽음과 생명이 맞붙은 우물의 상징성과 어린아이라는 절대 순수의 상관 관계는 근원에 닿는 마음의 눈이 없으면 읽기 어렵다. 결국 시인은 객관의 옆자리에다 전지 시점의 의자를 마련한다. 「꼭지」와 「이것이 날개다」의 마지막 연처럼, 이 전지 시점은 전지전능하나 무소불위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삼인칭의 객관성을 겸손하게 받아들여 절제할 줄 아는, 인간계로 적강(謫降)한 신의 시점에 가깝다.
문인수 시의 시점은 편편마다 다를 뿐 아니라 매우 복잡한 구조로 짜여 있다. 「꼭지」를 예로 들어보자. 1행에는 객관 묘사뿐이지만 2-3행에는 주관이 개입한다. 이 주관은 사실에 바탕을 둔 일인칭 화자의 진술에 가깝다. 4-6행은 다시 객관 묘사. 그 다음, “바닥에, 기억의 끝이//노랗다”는 인물의 내면을 말하는 전지 시점이 분명한데, 이 대목이 시상의 흐름을 좌우하는 중요한 구실을 맡는다. 다른 작품에서도 전지 시점은 교묘하게 끼여든다. “빨래판처럼 덜컹거리는 법감정이, 시꺼먼 길바닥이 문득 흰 젖 먹은 듯 고요하다”(「얼룩말 가죽」)거나, “저 바닥은 사실/혹한이 돌보는 셈이다. 얼거나 썩지 않겠다”(「파 냄새」)처럼 비유와 묘사에다 전지 시점의 해석을 슬쩍 곁들여 작품의 핵심이 무엇인지 내비친다. 때로 이 정체불명의 화자는 서사의 서술자를 겸하다가 교술의 해설자로 변신도 한다. 진술 시점과 발화자의 혼란은 시작법에서 당연히 경계할 점이지만, 문인수 시인은 전혀 어색하지 않게, 그런 이론 따윈 시시하다는 듯, 대상의 본질을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내버려둠으로써 오히려 작품의 통일성을 유지하고 서정의 강도를 조절한다. 작품을 두고 분석하자면 복잡한 양상을 보이나 방법론의 근거는 의외로 단순한 편이다.
대교약졸(大巧若拙)이라 할 만한 이런 방법론으로 시인은 꼭지의 범주를 다른 생물과 무생물까지 넓힌다. 인간에게서 인(仁)을 찾기는 쉽지만, 사물에서 인을 얻기는 어렵다. 사물을 그 사물에 맞게 자유자재로 끌어안는, 관자재(觀自在)의 존재를 설정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 전지 시점은 이런 데서 힘을 발휘한다. “상처의 눈은 그러니까 지독한 사시 아니겠느냐”는 통찰은 “도다리”의 특성과 꼭지의 의미를 정확하게 연결하지 않고는 나오기 어렵다. 전지 시점의 화자는 “사시”에다 실존의 배꼽을 포개놓는다. “사시”는 “엄청난 수압”에 눌려 회복할 수 없는 실존의 상처인 동시에 “바닥을 치면서”(「도다리」) 솟아오를 마지막 생명줄이다. “젖어도 젖을 일 없는 전문가”(「식당의자」) 또한 면밀한 인식을 거치고서야 가능한 해석. 가치 중립으로 존재하는 사물, 특히 의자처럼 인간의 목적이 존재에 앞서는 인공물인 경우, 화자의 시선이 의미망의 영역을 거의 결정하기 십상이다. 「책임을 다하다」, 「비둘기」, 「쇠똥구리 청년」, 「향나무 옹달샘」, 「낡은 피아노의 봄밤」은 “죽음은 그 어떤 삶도 놓치지 않고 깨끗하게 챙긴다”(「막춤」)는 전지 시점의 에스프리를 다시 한 번 확인함으로써 사물을 인간과 대등한 본디 자리로 끌어올린다.
문인수 시의 형식은 의도한 정교함보다 온몸에 밴 자연스러움에서 나온다. 대상을 보는 기관은 두 눈이 아니다. 시인은 꼭지를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온몸이 때에 맞게 시의 형식을 창출한다. 『홰치는 산』에서 힘써 마련한 객관의 자리는 작품을 지탱하는 뼈대로서, 내용의 핵을 구성하는 전지 시점과 행복하게 동행하며 화자의 한계를 제거한다. 『동강의 높은 새』에서 절차탁마한 정치한 언어는 『쉬!』를 거치며 이야기하듯 하소연하듯 흐르는 말길에 자리를 물려준다. 문인수 시의 제재가 풍광에서 삶으로 바뀌었음을 형식이 먼저 말하는 셈이다. 그렇다고 방만하게 늘어지지도 않는다. 신축성이 커서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렵지만, 부정과 긍정이 밀고 당기며 화해하는 서정의 기본 골격이 여전히 작품을 떠받치고 있다. 어쩌면 복잡하면서도 단순하고, 거칠면서도 자연스러운 이런 형식이 인(仁)을 담는 가장 적절한 그릇, 대교약졸의 그릇인지 모른다.
인에는 속도가 없다. 인은 만물에 녹아 있으니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아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반면 자본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까닭에 그 중심에 들어가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현대인은 하염없이 에돌아가는 인의 정신을 쓸모없는 관념쯤으로 여긴다. 문인수 시인은 우리 시대가 내다버린 인을 시의 중심에 세움으로써 욕망의 가속도에 휩쓸린 존재들에게 거듭 삶의 의미를 묻는다. 가는 듯 마는 듯 더디게 움직이는 꼭지, 비릿한 실존의 배꼽을 움켜쥔 꼭지, 삶이 한 줌밖에 남지 않은 꼭지들이 쓴 『꼭지』는 거대한 자본의 톱니바퀴에 제동을 거는 시집이다. 그렇다고 멈출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지만, 도로아미타불처럼 보이는 이 일이 곧 시인의 책무며 시의 윤리임을 시인은 온몸으로 감지한다. 시인은 속도를 줄인다. 자본의 가장자리를 느릿느릿 더듬으며, 온몸을 “요가처럼 비틀어 날개를 펼쳐낸”(「식당의자」) 꼭지들의 삶을, 이 땅의 필부필부가 떠받쳐온 역사의 아랫도리를, 자본의 성채에다 천천히 부려놓는다.
자본의 한가운데로 들어선 「얼룩말 가죽」의 할머니는 꼭지들의 속도를 가늠하게 해준다. 할머니는 거지 성자 행차처럼, 말랑말랑한 “얼룩말 가죽” 같은 “호피 같”은 “법원 앞 횡단보도”를, 애터지게 느리게, 건너가신다. 법의 심장 꼭꼭 밟으며, 자본의 음모 하나하나 헤치며, 흑, 백, 흑, 백, 횡단보도 “신호등 빨간 불빛 따위 아랑곳없이” 걸어가신다. 성스러운 의식인 듯, 실존의 배꼽 위에, “삶의 마디마디에”, “콕. 콕. 콕. 빠짐없이 매우매우 중요하다”(「비둘기」)고, 방점을 찍으신다. 자본의 가속도에 길든 무수한 눈들에 “母法”의 젖을 뿌리며, 느리게, 애터지게, 시인도 온몸이 “사시”가 되어 함께 걸어간다. 쉬~! 우주가 다시 한 번 조용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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