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05.16
난 수요일에 여러분은 MBC 방송국에서 방영한 ‘목자님, 우리 목자님’이라는 프로를 보았을 것입니다. 이재록 목사라는 사람과 그가 세웠다는 만민중앙교회에 대하여 만든 특별 프로그램을 보았을 것입니다. 오늘 저는 그 프로그램을 보고 느낀 것을 가지고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왜 이것을 가지고 설교를 하려고 하느냐는 질문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 프로그램이 종교심이 어떤 것이며 또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가장 잘 보여 주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그 사건을 가지고 설교를 하려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 사건은 인간의 종교성이 얼마나 어리석고 기독교와는 거리가 먼 가를 잘 보여주는 실제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제가 이런 설교를 해 오지만 아직도 종교성과 신앙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나 하는 염려가 됩니다. 원하건대 여러분은 종교성과 신앙을 잘 구분하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종교성이라는 말에 대하여 이야기하겠습니다. 종교성이라고 하면 모든 사람들 속에 들어 있는 종교적인 성향을 말합니다. 종교성이란 말이 종교적인 성향이라는 말의 줄인 말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런 성향을 쉽게 종교심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런 성향은 문명화되고 현대화된 사람들만 가지고 있는 줄 알았는데 선교사들이 선교 지역에 가 보니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문명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들도 다 어떤 형태의 종교를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심지어 밀림 속에서 숨어서 살아가는 난쟁이 족속들도 자기네들이 섬기는 신이 있고 종교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종교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신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은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학자들이나 신학자들은 신을 부정하는 무신론자도 일종의 유신론자라고 생각합니다. 신을 부정하는 것 그 자체가 신 의식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기 때문입니다. 세계적인 종교학자인 멀치아 엘레아데는 ‘성과 속, 종교의 본질’이라는 책에서 이러한 종교성을 가진 인간은 본래 신과 가까이 살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본래 인간은 본성적으로 신과 하나되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을 우리의 생활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시골에서 자랐습니다만 시골의 옛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신 의식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방의 구석에도 ‘구석 할머니’가 있고, 부엌에도 ‘부엌 할머니’가 있고, 애기 놓을 때도 삼신 할머니를 의식합니다. 방의 구석이나 부엌의 한 구석은 신이 거하는 거룩한 공간 즉 성소인 셈입니다. 그리고 기둥에는 함부로 못을 못 칩니다. 왜냐하면 신님의 눈이나 코에 못질을 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대문이나 담도 날을 잡아야 고치지 아무 날에나 손을 댈 수 없습니다. 동네에는 당나무가 있습니다. 그것은 신성한 곳입니다. 그래서 함부로 손을 대지를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 당 나무에 손을 대었다가 큰 해를 입었다는 이야기를 흔하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경산에 도로 한 가운데를 가로막고 있는 나무가 아직도 있지요? 베려다가 벨 사람이 없어서 베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지 오래입니다만 아직도 그 나무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면 인간은 신성에 둘러 쌓여서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이 신을 무서워하기는 하지만 신을 가까이 하기를 원하고 나아가서는 신과 하나되기를 원하는 마음의 발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흔히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이런 말은 우리 나라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역시 있습니다. 서양에서 땅을 대지라고 합니다. 대지를 ‘어머니 땅’(mother-earth)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곰곰히 생각해 보면 여자를 땅과 동일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에 남자를 하늘에 비유하고 있음도 볼 수 있습니다. 인도의 어떤 경전에도 결혼을 하고 나면 남편이 ‘나는 하늘이요 그대는 대지다’라고 선언합니다. 여성은 자연과 우주의 여신 ‘샤크티’를 나타내는 자요 남자는 우주의 정신인 ‘쉬바’와 동일시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여 두 사람이 결합을 하는데 이 결합은 바로 하늘과 땅의 결합을 의미합니다. 자연과 정신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성적 결합은 최고 신 샤크티와 정신 아트만의 결합이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성적인 결합에서까지도 신과의 합일을 추구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종교와 성이 떼어놓을 수 없이 하나가 되어 있는 현상을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여러 민족들에서 볼 수 있고 또 다른 종교들에서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과 우주를 하나로 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을 소우주라고 하기도 합니다. 반면 하늘은 대 우주요 신의 세계입니다. 인간은 이 대 우주의 축소판이기 때문에 대 우주의 지배를 받으며 신들의 지배를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의 기초가 되어 있는 것이 점성술입니다. 이상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인간의 몸과 사는 집과 우주가 동일시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남녀의 몸이 합일되는 것은 하늘과 땅의 합일로 생각됩니다. 또 집은 신과 인간이 함께 사는 거처같이 생각되고 있습니다. 좀 더 이야기하면 인간의 등뼈는 집의 기둥이요 우주의 기둥인 큰 산맥과 통하고 있습니다. 호흡은 바람과, 배꼽이나 심장은 세계의 중심과 동일시되고 있습니다. 인간의 이런 현상들은 인간이 우주의 신과 합일하기를 소원하는 현상들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의식들 속에서는 신과 인간이 엄격하게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종교성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왜 인간이 이러한 종교성을 벗어버리지 못할까요? 어떤 사람은 인간이 무지해서 모르고 보니 모른다는 사실에서 오는 두려움을 더 큰 힘 즉 신의 힘을 빌려 막아보려고 하는 데서 종교성이 발달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과학이 발달되고 그 원인들이 밝혀지고 보면 종교성은 사라지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과학이 발달 될수록 더 아는 것이 많아지기는 하지만 반면 그만큼 더 알 수 없는 면들이 앞을 가립니다. 그런데 이렇게 앞을 가리고 있는 것들이 모두 고도로 과학적인 원리와 질서를 가진 문제들이기 때문에 이러한 원리와 질서들이 우연히 생겨난 현상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의 실례를 든다면 세포 핵 속에 있는 염색체의 주요 성분인 DNA의 구조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복잡한 것이 철저한 원리 속에 일정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서 조물주 또는 창조주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우주의 이러한 측면들은 인간으로 하여금 조물주의 인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과학이 발달해도 인간의 종교성은 더욱 깊어져 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비한 것이 더 깊어져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더욱 신을 추구하고 신의 세계에 참여하려고 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흔히 현대를 신과 종교를 벗어버린 시대라고 하지만 이것은 어떤 일면에서만 그럴 뿐입니다. 인간은 결코 종교를 던져버리지 못하며 더 큰 신비 앞에서 오히려 더 종교적으로 되어 갈 것입니다. 그리하여 신은 더욱 많아지게 될 것입니다. 다양한 종교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이 이렇게 신과 하나가 되려고 하는 근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간 자신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안녕과 행복과 평화를 위해서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살기 위해서 신을 찾아 신과 하나가 되려고 합니다. 이런 현상을 종교적인 용어로 표현한다면 한 마디로 신비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비주의란 인간이 신을 찾는 현상입니다. 동양의 신비주의나 서양의 신비주의나 이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모두가 인간의 한계성을 초월하여 초인간적인 경지에 들어가려고 합니다. 이런 면에서 모든 종교는 신비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도교에서 말하는 신선이 그러한 것이고 도를 닦아 도를 통하고 기를 수련한다는 것이 신비주의적인 생각입니다. 서양에서도 초인 사상이 있었습니다. 철학적으로 초인 사상은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하고 대신 인간이 세상을 초탈하려는 데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흰 수염과 머리를 날리며 얼굴에 빛이 나고 세상의 모든 고통에 대하여 달관한 인간이 되는 초인 사상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무신론적인 신비주의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기독교의 이름으로도 이와 비슷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 왔습니다. 인간이 거룩하게 되어서 나이가 들어 갈수록 얼굴에 빛이 나고 흰 수염을 날리며 더욱 거룩하게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로 나타났습니다. 복음주의 신학이 이런 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죽을 때가 되어 갈수록 더욱 거룩하여지고 세상의 더러운 모습에서 초월하여 있는 사람이 되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신의 배후에는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서 하나가 되고자 조용히 명상하고 기다렸던 옛날의 신비주의가 있습니다. 이런 류의 신비주의는 그래도 소위 말해서 신사적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교회 내에 있는 신비주의는 이렇게 신사적인 면도 없습니다. 똑 같이 하나님을 이야기하지만 그야말로 무당 굿판보다도 훨씬 못합니다. 무당도 굿을 할 때는 신의 뜻을 듣기 위해서 얼마나 진지하고 성스럽습니까? 그런데 한국 교회 내의 신비주의는 무당 굿판보다 더 엉망입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뜻을 들으려고 하는 것은 아예 없고 인간의 영생과 잘 먹고 잘 사는 것만을 추구하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이재록이라는 사람의 행태와 그 따르는 무리들의 행태에서 이러한 사실이 너무나 잘 드러났습니다. 이재록이라는 사람은 종교 사기꾼이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인 듯이 행동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직통하는 자였습니다. 자기가 경배를 받으면서도 그것을 성령이 주신 마음으로 그렇게 한 것이라고 하면서 자기 숭배를 부추겼습니다. 또 자기는 죄를 짓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여자와 함께 누워 자도 자기 마음은 전혀 깨끗하다고 했습니다. 자신을 죄와는 상관없는 육신을 초월한 초인 같이 내세웠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의 말을 거절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꼼짝 못하고 자신의 말을 듣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자기 제단에 임재하기를 요청했습니다. 강단 뒷면에 하나님이 임하는 듯한 그림을 그려놓고 거기에 빛을 비추어 반사되게 하면서 하나님이 임한다고 사람들을 속였습니다. 그리고 천사들을 보여준다고 하면서 유리창 면에 빛을 비추었고 또 어떤 여자와 자기에게도 빛을 비추어서 반사되게 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특별히 받는 것을 보여주는 것처럼 했습니다. 그는 그의 사진을 붙여 놓아도 복이 임한다고 여겨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재림을 강조하면서 은근히 헌금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는 옛날에 박태선이가 써먹었던 수법을 다 써먹고 있었습니다. 이쯤이면 그는 자기가 메시아인 체 하고 있는 이단자요 또 고도의 종교 사기꾼이라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는 자요 광명한 천사처럼 행세하는 사단의 하수인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사람들은 ‘목자님’으로 섬기며 경배합니다. 그의 말을 마치 하나님의 말처럼 추종합니다. 만나기를 원하고 기도 받기를 원하여서 수백 미터씩 줄을 써서 기다립니다. 춤을 추고 찬양하고 엎드려 절하고 등에 업고 나릅니다. 대중 최면에 걸려 있습니다. 신문에는 그런 사람이 6만 5천이나 된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프로그램을 처음부터 반 이상 보기까지는 이재록이만을 욕했습니다. 그런데 다 보고 나서는 그 교인들을 더 욕했습니다. ‘속고 재산을 빼앗기고 망해도 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고요? 이재록이는 아예 종교 사기꾼으로 나선 사람이지만, 거기 모여드는 사람들 역시 한 사람도 진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요 유일하게 경배를 받으실 분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도 하나도 없었고, 예수님이 마지막 최후의 계시라는 것을 아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구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이 생의 유익이요 보이는 신이요 이재록이라는 우상이었습니다. 병 나았다고 하는 것에 매혹되어 그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 있다는 생각을 하지 그 병 나았다는 것이 마귀의 장난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신적인 능력을 구하며 그 능력에 참여하여 천당을 차지하고 복을 받겠다는 생각으로 머리가 굳어진 사람들뿐이었습니다. 그러니 사기를 쳐도 그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모두가 자기 사랑, 자기 욕망으로만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기가 잘 되겠다는 생각으로 머리가 바위가 되어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재록이는 이런 사람들을 이용하는 종교 사기꾼이었습니다. 이재록이도 그 교인들도 예수 ‘예’자도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종교성을 이용해 먹는 사기꾼이요, 종교성이 신앙인 줄 알고 그것에 매어 달리고 있는 무리들뿐이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십자가 지신 예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이런 모든 것을 쓸 데 없다고 하는 것인데 그들은 십자가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성이란 타락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인간의 본성입니다. 여기서 자기가 신을 믿는다고 하는 생각이 나옵니다. 고로 종교성은 타락한 인간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계시를 만나 깨어지지 않으면 종교성은 아무 쓸모 없는 것이요 인간을 패가망신하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종교성에서 나온 것은 결국 우상밖에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종교성이 자기가 신을 믿는다고 하는 것인 반면 신앙은 자기가 신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진리를 만나고 그 앞에서 자기가 믿는다고 하는 것이 깨어지고 죽어버렸다고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자기가 믿는다고 하는 것도 십자가에서 함께 죽어버려야 할 타락한 인간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여러분은 종교와 신앙을 잘 구별하시기 바랍니다. 신앙은 십자가에서 자기가 죽어버린 것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속한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신앙은 위에서 온 분 예수의 소리만 듣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마17:5)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소리만 듣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날마다 자기가 죽었다는 것을 되새기라는 말씀입니다.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말 외에는 아무 것도 들을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말씀을 집약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자는 더 들을 것도 없고 더 달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그저 예수와 함께 죽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더 구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영생도 구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영생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그냥 죽어가도 괜찮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장사가 잘 되고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악착같이 구할 것이 아닙니다. 높은 지위도 악착같이 구할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가 죽은 세상에 속한 것입니다. 고로 신자가 이 세상에서 기를 쓰고 구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신자란 세상에서 살기를 포기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은혜와 평안이 있습니다. 은혜란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푸는 호의를 은혜라고 합니다. 자아의 욕망에 매여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이 자아의 욕망에서 놓여 날 수 있게 된 것이 은혜입니다. 그리고 이런 자가 누릴 수 있는 것이 평강이라고 하겠습니다. 자기의 세상에서 벗어 난 자가 누리는 만족한 상태가 평강입니다. 무사하여 마음에 걱정이 없는 상태가 평강입니다. 이러한 은혜와 평강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주어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고 하셨습니다. 이 평안은 자신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주어지는 평안입니다(요20:19-20). 그러므로 이 평안은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가 아니라 한 가족이 되고 함께 살게 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로마서 5:1절에는 이것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누리는 평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더 이상 싸우는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있고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있는 상태가 평화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죄를 지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죄가 사해졌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누리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것도 은혜요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사죄와 성령을 주신 것도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모시게 된 것도 은혜입니다. 이 은혜로 우리는 평강을 누리고 있습니다. 은혜와 평강은 동전의 앞뒤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과 예수님으로부터 왔다는 말도 이해가 됩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셨고 아들이 오셔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 은혜요 평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은혜와 평강은 인간이 베푸는 것과 같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에게서 이런 것들이 나올 수 없습니다. 불교의 자비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불교의 자비는 부정함으로 공허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거기에는 하나님도 십자가 지신 하나님의 아들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은혜와 평강은 부정하고 빈 데다가 하나님과 예수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은혜와 평강에는 새로운 충만이 있습니다. 땅의 것이 없어지고 하늘에서 우리에게 온 것들이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이 충만은 하나님의 자비로움과 아들의 희생을 증거해 주는 것들입니다. 이러한 은혜와 평강을 알고 있는 자는 그저 평안할 따름입니다.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할 필요가 없으며, 신의 능력에 참여하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럴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저 이 분들을 바라보고 평안할 따름입니다. 하나님을 가진 자는 하나님 자신 외에 다른 것을 더 가질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을 더 이상 볼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위기가 올 때 마다 이런 사실을 되새기며 이것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실제로 세상을 이길 힘을 얻습니다. 이런 사람이 믿는 자입니다. 여러분이 TV에서 보았듯이 이재록이와 그 신도들에게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습디까?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천사를 보고 신비한 것을 보고자 안달이 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총체적인 불신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보이는 인간 이재록이를 예수님처럼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하여 이재록이 사진을 붙여 놓고 있었습니다. 이재록이 뿐만 아니라 죽은 박태선이 사진을 붙여놓고 지금도 그 앞에서 절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어저께 신학교 강의에 가서 들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요 인간의 종교성을 좇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평강을 모르는 사람들이요 때문에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신앙과 종교는 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저들과 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신앙을 가졌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들처럼 하나님을 보고자 안달하고 신기한 것을 보고자 안달하지는 않습니까? 저런 것들이 전혀 쓸모 없는 모습이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그리고 하나님과 예수님 안에서 가만히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셨는데 무슨 발광을 하고 있는가’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신앙은 이런 식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은혜와 평강을 성도들이 가지고 있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은혜와 평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까? 우리가 믿고 있는 신앙의 색깔에 대하여 아직도 확신이 서지 않습니까? 아직도 이것이냐 저것이냐 또는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게 보입니까? 여러분은 신앙과 종교를 분명히 구분하십시오. 그리고 은혜와 평강을 누리는 자가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