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11. 내과 - 에탐부톨 투약 설명
J원장은 군청소재지인 작은 시에서 내과를 운영하고 있다. 하루는 인근 농촌에서 비닐하우스 농사를 하는 45세의 O씨가 잦은 기침과 가래를 주소로 내원하였다. 문진과 신체검사, 그리고 X선 촬영 등을 거쳐 J원장은 O씨의 병을 활동성 폐결핵으로 진단하였다. J원장은 O씨에게 아이나, 리팜피신, 피라진아미드, 그리고 에탐부톨을 처방하였다. O씨는 6개월 가까이 이 약을 복용하며 치료를 받았지만 농사일이 바쁜 관계로 아내를 시켜 약을 타 가고는 하였다.
치료를 시작한 지 5개월이 지나고 O씨는 눈이 침침해지고 시야가 흐려지는 증상을 느꼈고 같은 시에 있는 P안과를 방문하였다. P안과에서는 시신경염의 진단을 내렸고 O씨는 이 사실을 J원장에게 알렸으며 J원장은 이 말을 듣자 에탐부톨의 부작용을 의심하고 바로 에탐부톨 투약을 중단하였다. 그러나 O씨의 시력은 회복되지 않았으며 두 달 뒤 O씨는 서울의 모 대학병원을 방문하여 “결핵약 복용에 의한 약물유발성 시신경병증”의 진단을 받았다. O씨의 시력은 원래 좌우 1.0이었으나 이 시점에서는 각각 좌우 0.01로 시각장애 3급의 판정을 받게 된 것이다.
O씨는 J원장이 결핵약을 투여할 당시 제대로 부작용을 설명해주지 않았으며, 막연하게 “이상이 있으면 투약을 중단하고 병원을 찾아와 상담하라”정도의 이야기만 해 주었다고 J원장을 고발하였다. 그러나 J원장은 약물의 부작용이 있을 수 있음을 설명해 주
었고 O씨의 시력에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 즉시 약물 투여를 중단하였다며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윤리적 고찰>
위 사례에서 “약물의 부작용이 있을 수 있음을 설명해 주었고”라는 표현에서는 J원장이 어디까지, 얼마나 자세하게 설명을 해 주었는지를 알기 어렵다. 그러나 환자인 O씨 본인이 “이상이 있으면 투약을 중단하고 병원을 찾아와 상담하라”는 정도의 이야기만 들었다고 하는 것을 보아서는 적어도 환자가 이해한 내용은 이 정도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에탐부톨과 같이 시신경염 등의 치명적인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는 약제를 투약할 때는 그 부작용의 가능성 여부에 대해 환자에게 알려주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물론 부작용이 있다고 해서 의사가 모든 부작용을 다 막을 수는 없을 것이며, 특히 에탐부톨의 시신경독성처럼 사람마다, 투약 용량과 병용 제제에 따라 그 가능성이 크게 달라지는 약제에 대해서는 이것을 미리 예방하지 못하였다고 하여 의사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는 없을 것이다. 결핵약은 매우 종류가 한정되어 있고, 부작용이 있다고 하여 다른 약제로 대치하기도 어렵기 때문에 J원장이 의사로서의 주의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는 보기 어렵다.
그러므로 위 사례에서 가장 핵심적인 윤리적 문제는 O원장이 시신경염을 막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사전에 충분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된다. 일반적으로 “충분한 정보에 근거한 동의(Informed Consent)”를 받을 때에는 어떤 설명이 충분한 것인지가 문제가 될 수 있다. 환자에게 고통이 수반되거나, 침습적이거나, 부작용 또는 불구가 될 가능성이 있는 치료나 시술, 혹은 검사를 시행할 때에는 이 “충분한 정보에 근거한 동의”가 필수적이다. 이러한 시술과 검사의 목적, 방법, 환자가 겪을 수 있는 위험이나 불편함, 부작용 등에 대해 환자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용어로 충분히 설명해야 하며, 일단 설명을 한 뒤에는 환자에게 개방형 질문(open question)을 하게 하거나, 몇 가지 핵심적인 사항은 되풀이하여 질문함으로써 환자의 이해 정도를 평가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의사는 설명을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환자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게 되고, 특히 진료 시간이 매우 짧은 우리 의료 환경에서는 정작 중요한 정보를 환자가 하나도 얻지 못하고 돌아가게 되기 쉽다. 이러한 환경적 요인은 개별 의사의 힘만으로 해결하기는 어려우며, 전체 의료의 질 향상을 위해 개선이 필요한 부분이다.
충분한 정보에 근거한 동의를 얻기 위해 설명을 할 때에는 환자의 학력, 연령, 성별 등 그의 이해력에 미칠 수 있는 요인들을 고려하여야 한다. 학력이 낮고 고령의 환자인 경우에는 환자가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용어로 설명해 주어야 하며, 중요한 사항은 필기를 해서 주거나 메모를 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는 중3(15세)정도의 연령과 학력으로 이해할 수 있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권장된다. 때로는 젊은 보호자가 동반하였다면 그 보호자에게 같이 설명을 해 주는 것이 바람직하기도 하지만 “보호자에게만” 설명을 해 주는 것도 좋은 방법은 아니다. 이는 환자의 자율성(autonomy)를 침해하는 행위이기 때문인데, 보호자의 역할은 환자의 의사결정과 치료행위를 돕는 것이지 본인이 환자를 대신해서 모든 결정을 내리는것은 아니다.
시신경병증처럼 중요한 약물 부작용의 경우에는 환자를 추적관찰 할 때마다 그러한 사실이 있을 수 있음을 상기시키고 되풀이해 물어보는 것도 필요하다. 특히 위 사례에서 O씨는 농업에 종사하는 농촌 주민으로 고학력자는 아닐 것으로 추정된다. 이럴 때는 특히 환자가 의사 본인이 설명해준 사실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J원장이 이러한 지침을 잘 지켜 O씨에게 약물부작용에 대해 충분히 설명을 해 주었다면 시력저하가 일어났어도 O가 J원장을 고발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부분의 환자-의사간 갈등은 의사소통부족이 그 원인이다. 환자에게 설명을 충분히 해 주고, 그 설명을 환자가 확실하게 이해했는지를 평가하는 것도 의사의 윤리적 의무 중 하나이자 불필요한 갈등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일이다.
<법률적 고찰>
의사의 진찰·치료 등의 의료행위는 사람의 생명·신체·건강을 관리하는 업무의 성질에 비추어 환자의 구체적인 증상이나 상황에 따라 위험을 방지하기 위하여 요구되는 최선의 조치를 취하여야 할 주의의무가 있고, 환자에대한 수술은 물론, 치료를 위한 약품의 투여도 신체에 대한 침습을 포함하는 것인 이상 마찬가지 주의의무가 요구된다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의료상의 주의의무는 의료행위를 할 당시 의료기관 등 임상의학 분야에서 실천되고 있는 의료행위의 수준을 기준으로 삼되, 그 의료수준은 통상의 의사에게 의료행위 당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고 또 시인되고 있는 이른바 의학상식을 뜻하므로 진료환경 및 조건, 의료행위의 특수성 등을 고려하여 규범적인 수준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에탐부톨은 시각이상 등 그 복용과정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중대한 부작용을 초래할 우려가 있는 약품으로 그러한 부작용의 발생 가능성 및 그 경우 증상의 악화를 막거나 원상으로 회복시키는 데에 필요한 조치사항에 관하여 환자에게 고지하는 것은 약품의 투여에 따른 치료 상의 위험을 예방하고 치료의 성공을 보장하기 위하여 환자에게 안전을 위한 주의로서의 행동지침의 준수를 고지하는 진료상의 설명의무로서 진료행위의 본질적 구성부분에 해당한다.(대법원 2005. 4. 29.선고 2004다64067 판결)
‘에탐부톨’이 통상 시력약화 등 중대한 부작용을 초래할 우려가 있는 이상 약물인 점에 비추어볼 때, J원장은 O씨에게 위와 같은 부작용의 발생가능성 및 구체적 증상과 대처방안을 환자에게 설명하여 줄 의료상의 주의의무가 있고, 그 설명은 추상적인 주의사항의 고지나 약품설명서에 부작용에 관한 일반적 주의사항이 기재되어 있다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고 환자가 부작용의 증세를 자각하는 즉시 복용을 중단하고 보건소에 나와 상담하는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J원장은 O씨의 시신경염 진단을 듣고 에탐부톨의 부작용을 의심하여 즉시 투약을 중단 시켰으나, 처방당시 시력약화 등 부작용에 대한 설명을 소홀히 하여 O씨가 눈에 이상이 생긴 후에도 계속해서 투약을 하였고 그 결과 O씨가 시력을 상실하게 되었으므로 J원장은 설명의무 해태로 인한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