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 ⑤
* 최씨 무인 정권을 세운 최충헌
이의민을 타도하고 정권을 잡은(명종: 1196) 최충헌(1149~1219)은 무신 정권 초기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하여 봉사 10조와 같은 사회 개혁책을 제시하는 한편, 농민 항쟁의 진압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러나 사회 개혁책은 흐지부지되고, 그는 오히려 많은 토지와 노비를 차지하고 사병을 양성하여 권력 유지에 치중하였다.
최충헌은 최고 집정부의 구실을 하는 교정도감(1209)을 설치하여 권력을 행사하였다. 또 사병 기관인 도방을 설치하여 신변을 경호하였다. 도방은 삼별초와 함께 최씨 정권을 유지하는 군사적 기반이 되었다.
① 이자겸의 권력 독점에 반대한 인종의 측근 세력이 결집하자, 이자겸은 반대파를 제거하고 척준경과 함께 난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였다(1126). 그러나 이자겸이 척준경에 의하여 몰려나고 척준경도 탄핵을 받고 축출됨으로써 이자겸 세력은 몰락하였다.
② 묘청 세력이 서경 천도를 통한 정권 장악이 어렵게 되자 서경에서 난을 일으켰으나(1135), 개경파의 중심 인물 김부식(1075~151)이 이끈 관군의 공격으로 약 1년 만에 진압되고 말았다.
③ 고려 성종(981~997) 때에 최승로는 시무 28조를 올려 유교의 진흥과 과도한 재정 낭비를 가져오는 불교 행사의 억제를 요구하고, 태조로부터 경종에 이르는 5대 왕의 치적에 대한 잘잘못을 평가하여 교훈으로 삼도록 하였다(982). 성종은 최승로의 건의를 수용하여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다.
④ 거란의 1차 침입(993) 때에 서희는 거란의 장수 소손녕과 담판을 벌였다. 서희는 고려의 국호를 통해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강조하고, 고려가 송과의 관계를 끊는 대신, 거란으로 가는 길목인 압록강 동쪽 280리 지역을 돌려받기로 하고 화약을 맺었다.
고려는 이 지역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6성을 쌓아 고려의 영토로 편입하였다(994, 강동 6주).
첫댓글 3번과 4번의 설명이 바뀐거같네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3번과 4번 설명이 바뀌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충헌이 봉사 10조를 제시한 거였군요. 설명 감사합니다!
이 지문에서 최충헌을 무엇을 보고 유추하나오ㅜ?
이의민을 적신이라 반대하는 입장이요
저는 적신 이의민이랑 10가지 조목
그러게요...저도 동일한 생각을 했답니다..'틀리라고 만든문제인건가..' 싶었어요 ㅋㅋㅋㅋ 하지만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