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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발해의 역사 [26회 7번]
정답: ①
* 발해의 역사
7세기 말에 이르러 당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자, 고구려 장군 출신인 대조영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유민과 말갈 집단들은 전쟁의 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던 만주 동부 지역으로 이동하여 길림성의 돈화시 동모산 기슭에 발해를 세웠다(698).
발해의 건국으로 이제 남쪽의 신라와 북쪽의 발해가 공존하는 남북국의 형세를 이루었다. 발해는 영역을 확대하여 옛 고구려의 영토를 대부분 차지하였다. 비록 그 영역에 말갈족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지만, 발해는 일본에 보낸 국서에 고려 또는 고려국왕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사실이라든지 문화의 유사성으로 보아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였다(727년 무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에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고, 부여의 유속을 이어받았다.”라든지, 759년 문왕이 일본에 보낸 외교 문서에 스스로 ‘고(구) 려국왕’이라고 칭한 점이 나와 있다).
대조영(고왕: 698~719)의 뒤를 이은 무왕(719~737) 때에는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여 동북방의 여러 세력을 복속하고 북만주 일대를 장악하였다. 발해의 세력 확대에 따라 신라는 북방 경계를 강화하였고, 흑수부 말갈도 당과 연결하고자 하였다. 이에, 발해는 먼저 장문휴의 수군으로 당의 산둥 지방을 공격하는 한편, 요서 지역에서 당군과 격돌하였다(732). 또, 돌궐, 일본 등과 연결하면서 당과 신라를 견제하여 동북 아시아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어 문왕(737~793) 때에는 당과 친선 관계를 맺으면서 당의 문물을 받아들여 체제를 정비하고, 신라와도 상설 교통로(신라도)를 개설하여 대립 관계를 해소하려 하였다. 발해가 수도를 중경에서 상경으로 옮긴 것은(755) 이러한 지배 체제의 정비를 반영한 것이다. 이 무렵, 발해는 이러한 발전을 토대로 중국과 대등한 지위에 있음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하여 인안(무왕), 대흥(문왕) 등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발해는 9세기 전반의 선왕(818~830) 때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키고 요동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남쪽으로는 신라와 국경을 접할 정도로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고, 지방 제도도 정비하였다(5경 15부 62주). 이후 전성기를 맞은 발해를 중국인들은 해동성국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와 같이 만주에서 세력을 떨치던 발해는 9세기 후반부터 국력이 약화되어 결국 거란족에 의해 멸망하였다(926).
① 조선은 전국을 8도로 나누었다.
(2) 발해에 대하여 [29회 8번]
정답: ④
* 발해에 대하여
- 보기의 자료는 발해의 수도인 동경과 상경 출토 치미(용마루 끝의 장식 기와)와 석등이다.
- 7세기 말에 이르러 당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자, 고구려 장군 출신인 대조영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유민과 말갈 집단들은 전쟁의 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던 만주 동부 지역으로 이동하여 길림성의 돈화시 동모산 기슭에 발해를 세웠다(698).
건국 초 당이 신라와 말갈을 이용하여 발해를 견제했기 때문에, 발해 무왕은 당의 산둥 지방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그 후, 안정을 회복한 문왕 때에는 3성 6부 중앙 정치 조직을 완성하였고, 대외 정책을 바꾸어 당과 친선 관계를 맺고 당의 발달한 문물제도를 받아들이는 데 힘을 기울였다.
발해가 가장 응성했던 시기는 9세기 전반 선왕 때였다. 이 무렵, 발해는 당에 유학생을 보내어 당의 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이는 한편, 말갈의 여러 부족을 복속시키고, 서쪽으로는 요동 지방에까지 진출하였다. 이리하여 발해의 영역은 북쪽으로는 헤이룽강, 동쪽으로는 연해주, 서쪽으로는 요동, 남쪽으로는 영흥 지방에까지 이르렀으며, 고구려의 옛땅을 대부분 되찾았다. 그리하여 5경 15부 62주의 지방 조직이 완비되었다.
중국에서는 이러한 발해를 '동쪽의 융성한 나라'라는 뜻을 가진 '해동성국'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와 같이 만주에서 세력을 떨치던 발해는 9세기 후반부터 국력이 약화되어 결국 거란족에 의해 멸망하였다(926).
① 발해는 중국과 대등한 지위에 있음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하여 대부분의 왕들이 인안(무왕), 대흥(문왕) 등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④ 왜란과 호란을 겪으며 조선 후기에 중앙군으로 훈련도감,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 금위영의 5군영 체제가 완비되었다.
(3) 3성 6부 중앙관제 체제의 발해 [23회 9번]
정답: ③
* 3성 6부 중앙관제 체제의 발해
발해의 중앙의 정치 조직은 3 성과 6 부를 근간으로 편성하였다. 정당성의 장관인 대내상이 국정을 총괄하였고, 그 아래에 있는 좌사정이 충·인·의 3부를, 우사정이 지·예·신 3 부를 각각 나누어 관할하는 이원적인 통치 체제를 구성하였다. 당의 제도를 수용 하였지만, 그 명칭과 운영은 발해의 독자성을 유지하였다
①, ⑤ 통일신라기의 지방 행정 조직은 9주 5소경 체제로 정비하여 중앙 집권을 더욱 강화하였다. 군사⋅행정상의 요지에는 5소경을 설치하여, 수도인 금성(경주)이 지역적으로 치우쳐 있는 것을 보완하고, 각 지방의 균형 있는 발전을 꾀하였다.
군사 조직도 체계적으로 정비하였다. 중앙군의 핵심은 9서당이었다. 서당에는 고구려와 백제 사람은 물론 말갈족까지 포함하여 민족 융합을 꾀하기도 하였다. 지방군으로는 10정을 두었는데, 9주에 1정씩 배치하고, 북쪽 국경 지대인 한주(한산주)에는 2정을 두었다.
② 발해는 10세기 초에 이르러 부족을 통일한 거란이 동쪽으로 세력을 확대해 오고, 발해 내부에서도 귀족들의 권력 투쟁이 격화되어 발해의 국력이 크게 쇠퇴하였고, 결국 거란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였다(926).
③ 발해는 무왕, 문왕 대의 발전을 토대로 중국과 대등한 지위에 있음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하여 인안(무왕), 대흥(문왕) 등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④ 신라의 초기 연맹체의 전통을 유지한 대표적인 제도는 화백 회의였다. 귀족은 이를 통하여 국왕을 폐위시킨 적도 있었고, 새 국왕을 추대하는 데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왕권을 견제하기도 하였다.
(4) 5경을 갖은 발해의 역사 [27회 9번]
정답: ②
* 5경을 갖은 발해의 역사
7세기 말에 이르러 당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자, 고구려 장군 출신인 대조영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유민과 말갈 집단들은 전쟁의 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던 만주 동부 지역으로 이동하여 길림성의 돈화시 동모산 기슭에 발해를 세웠다(698).
건국 초 당이 신라와 말갈을 이용하여 발해를 견제했기 때문에, 발해 무왕은 당의 산둥 지방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그 후, 안정을 회복한 문왕 때에는 대외 정책을 바꾸어 당과 친선 관계를 맺고 당의 발달한 문물제도를 받아들이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 무렵에는 발해와 신라 사이에도 교류가 이루어졌다. 신라가 발해에 사신을 파견하였으며, 신라 국경에서 발해의 동경 용원부까지역이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두 나라 사이에 어느 정도 교류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발해가 가장 응성했던 시기는 9세기 전반 선왕 때였다. 이 무렵, 발해는 5경(상.중.동.서.중-경) 15부 62주의 지방체제를 완비하고, 당에 유학생을 보내어 당의 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이는 한편, 말갈의 여러 부족을 복속시키고, 서쪽으로는 요동 지방에까지 진출하였다. 이리하여 발해의 영역은 북쪽으로는 헤이룽강, 동쪽으로는 연해주, 서쪽으로는 요동, 남쪽으로는 영흥 지방에까지 이르렀으며, 고구려의 옛 땅을 대부분 되찾았다.
중국에서는 이러한 발해를 '동쪽의 융성한 나라'라는 뜻을 가진 '해동성국'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와 같이 만주에서 세력을 떨치던 발해는 9세기 후반부터 국력이 약화되어 결국 거란족에 의해 멸망하였다(926).
①, ③ 신라는 성골.진골과 6.5.4두품을 내용으로 하는 골품제라는 신분제가 있었고, 통일 이후의 군사조직은 9서당(중앙군) 10정(지방군)이었다.
발해의 중앙 군사 조직은 10위(衛)이었다
④, ⑤ 주몽이 졸본에서 건국한 이야기를 갖고 있는 고구려는 장수왕 때(413~491)에 최전성기를 맞이하여 중국 남.북조 모두와 외교 관계를 맺었다.
(5)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의 문화 유산 [21회 8번]
정답: ⑤
*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의 문화 유산
발해는 도읍지를 중심으로 많은 무덤이 남아 있다. 이 중에서 정혜 공주묘는 굴식 돌방무덤으로 모줄임 천장 구조가 고구려 고분과 닮았다. 이 곳에서 나온 돌사자상은 매우 힘차고 생동감이 있다. 정효 공주 묘에서는 묘지와 벽화가 발굴되었다. 무덤에서 나온 이런 유물은 발해의 높은 문화 수준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또 궁궐 터나 절터를 통하여 당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상경은 당시 당의 수도인 장안을 본떠 건설하였다. 외성을 쌓고, 남북으로 넓은 주작 대로를 내고, 그 안에 궁궐과 사원을 세웠다. 이와 같은 당 문화적 건축물로 길림 장백진 교외에 소재한 ‘영광탑’이 있는데, 13미터 높이의 5층 벽돌 탑이다.
궁궐 중에는 온돌 장치를 한 것도 발견되었다. 사찰은 높은 단 위에 금당을 짓고 그 좌우에 건물을 배치하였는데, 이 건물들을 회랑으로 연결하였다.
조각은 궁궐 터에서 발견되는 유물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발해의 벽돌과 연꽃무늬 기와 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소박하고 힘찬 모습을 띠고 있다. 상경에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석등은 발해 석조 미술의 대표로 꼽힌다.
발해에서도 불교가 장려됨에 따라 많은 불상이 제작되었다. 상경과 동경의 절터에서는 고구려 양식을 계승한 것으로 여겨지는 불상도 발굴되었다. 이 불상은 흙을 구워 만든 것으로, 두 분의 부처가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이불병좌상).
(6) 발해의 문화유산 [25회 6번]
정답: ②
* 발해의 문화유산
- 고구려 출신 대조영이 세운 나라, 해동성국이라는 것을 통해 발해임을 알 수 있다.
- 발해는 도읍지를 중심으로 많은 무덤이 남아 있다. 이 중에서 정혜 공주묘는 굴식 돌방무덤으로 모줄임 천장 구조가 고구려 고분과 닮았다. 이 곳에서 나온 돌사자상은 매우 힘차고 생동감이 있다. 정효 공주 묘에서는 묘지와 벽화가 발굴되었다. 무덤에서 나온 이런 유물은 발해의 높은 문화 수준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발해의 지상 건물은 궁궐 터나 절터를 통하여 당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상경은 당시 당의 수도인 장안을 본떠 건설하였다. 외성을 쌓고, 남북으로 넓은 주작 대로를 내고, 그 안에 궁궐과 사원을 세웠다. 이와 같은 당 문화적 건축물로 길림 장백진 교외에 소재한 ‘영광탑’이 있는데, 13미터 높이의 5층 벽돌 탑이다.
궁궐 중에는 온돌 장치(고구려적 요소)를 한 것도 발견되었다. 사찰은 높은 단 위에 금당을 짓고 그 좌우에 건물을 배치하였는데, 이 건물들을 회랑으로 연결하였다.
발해에서도 불교가 장려됨에 따라 많은 불상이 제작되었다. 상경과 동경의 절터에서는 고구려 양식을 계승한 것으로 여겨지는 불상도 발굴되었다. 이 불상은 흙을 구워 만든 것으로, 두 분의 부처가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이불 병좌상).
발해의 조각은 궁궐 터에서 발견되는 유물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발해의 벽돌과 기와 무늬(연꽃 무늬)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소박하고 힘찬 모습을 띠고 있다. 상경에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석등은 발해 석조 미술의 대표로 꼽힌다.
① 백제 칠지도: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대에 백제에서 만들어 일본에 보낸 칠지도는 강철로 만들고 금으로 글씨를 상감해 새겨 넣은 우수한 제품이다.
② 발해 동경성 출토 이불 병좌상
③ 경주 황남대총 금관(국보 191호): 관테 위에 ‘출(出)’자 모양 3개의 나뭇가지와 2개의 사슴뿔 모양 장식의 전형적인 신라 금관
④ 수레모양 토기: 경남 의령에서 출토된 가야의 토기로서, 죽은 자의 영혼을 실어 보내는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⑤ 천마총 천마도: 국보 207호. 경주 황남동 천마총에서 나온 천마도(벽화가 아닌 말의 배가리개에 그림)가 신라의 힘찬 화풍을 잘 보여 주고 있다.
(7) 발해의 문화유산 [30회 9번]
정답: ③
* 발해의 문화유산
발해는 도읍지를 중심으로 많은 무덤이 남아 있다. 이 중에서 정혜 공주묘는 굴식 돌방무덤으로 모줄임 천장 구조가 고구려 고분과 닮았다. 이 곳에서 나온 돌사자상은 매우 힘차고 생동감이 있다. 정효 공주 묘에서는 묘지와 벽화가 발굴되었다. 무덤에서 나온 이런 유물은 발해의 높은 문화 수준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발해의 지상 건물은 궁궐 터나 절터를 통하여 당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상경은 당시 당의 수도인 장안을 본떠 건설하였다. 외성을 쌓고, 남북으로 넓은 주작 대로를 내고, 그 안에 궁궐과 사원을 세웠다. 이와 같은 당 문화적 건축물로 길림 장백진 교외에 소재한 ‘영광탑’이 있는데, 13미터 높이의 5층 벽돌 탑이다.
궁궐 중에는 온돌 장치(고구려적 요소)를 한 것도 발견되었다. 사찰은 높은 단 위에 금당을 짓고 그 좌우에 건물을 배치하였는데, 이 건물들을 회랑으로 연결하였다.
발해에서도 불교가 장려됨에 따라 많은 불상이 제작되었다. 상경과 동경의 절터에서는 고구려 양식을 계승한 것으로 여겨지는 불상도 발굴되었다. 이 불상은 흙을 구워 만든 것으로, 두 분의 부처가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이불 병좌상).
발해의 조각은 궁궐 터에서 발견되는 유물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발해의 벽돌과 기와 무늬(연꽃 무늬)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소박하고 힘찬 모습을 띠고 있다. 상경에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석등은 발해 석조 미술의 대표로 꼽힌다.
① 발해 영광탑 (길림 장백진 교외)
② 이불병좌상 (길림 훈춘현 반라성지)
③ 신라 기마인물 토기 (경주 금령총 출토)
④ 정효공주묘 앞 돌사자상 (길림 돈화현)
⑤ 발해 석등 (흑룡강성 목단강시 영안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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