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남쪽으로 설계한 출입문을 동쪽으로 바꿔 달라던 건축주
건축 설계를 하면서 풍수지리와 인연을 맺고 살아온 지 벌써 30여 년이 넘었다. 처음에는 낯설고 신기하게만 여겨졌던 풍수지리의 세계. 그러나 그 신비의 세계를 의심하면서 찾아 들어간 후부터 나는 많은 분들에게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그만큼 고립되기도 했었다.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세계를 현대 건축을 한다는 사람이 드나드는 것이 반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미친 사람 취급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알면 알수록 점점 더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던 풍수지리의 세계에서 나는 풍수지리와 현대 건축의 접목을 끊임없이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1965년,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군대에 간 나는 군복무 기간을 마친 후에야 학교에서 배운 이론을 실제에 적용할 수 있었다.
처음 내가 일한 곳은 장기인 선생님이 경영하던 삼성건축설계사무소였다. 장 선생님은 대학에서 건축시공학과 재료학 등을 강의하셨으며, 그가 운영하던 삼성건축설계사무소는 사찰과 궁전, 한옥 등 한국 전통 건축물의 문화재 전문 설계사무소였다.
설계사무소에 취직하여 처음 한 일이 일반 주택 설계였다. 처음 해 보는 일인 만큼 나름대로 신경을 써서 설계도면을 완성했다. 그런데 어느 날 건축주가 설계도면을 가지고 사무실을 찾아왔다. 그는 설계도면을 펼쳐 놓고 남쪽으로 설계한 출입문을 동쪽으로 바꿔 달라고 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출입문이란 것은 곧 그 집의 시작이자 중심이다. 따라서 출입문 방향을 바꾸게 되면 현관 배치도 바뀌게 되고, 그러다 보면 집 전체를 다시 설계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그러한 사정을 말했지만 건축주는 막무가내였다. 하는 수 없이 다시 설계를 해야 했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일은 그 뒤였다. 얼마 후 다시 찾아온 건축주는 다시 설계도면을 꺼내 놓고 안방과 화장실의 위치를 바꿔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었다. 역시 안방과 화장실 위치만을 바꿀 수는 없는 일이므로, 전체적인 설계를 다시 해야 했다. 나는 강경하게 말했다.
“이렇게 하시면 설계를 다시 해야 합니다. 설계로는 하자가 없는 것인데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군요!”
사실 설계를 맡은 사람으로서 그렇듯 설계도면을 몇 차례씩 바꾼다는 것은 가히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더욱이 그것이 설계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 단순히 방 위치만을 바꾸는 경우에는 더더욱 건축주의 의견을 용납하기 어렵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이렇게 번거롭게 해 드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만, 풍수지리를 하는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게 좋다고 해서 부득불 변경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부디 양해하시고 도와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건축주의 정중한 사과에도 불구하는,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는 듯했다. 과학 발달로 달나라를 가는 시대에 미신과 같은 풍수지리로 건축을 하려 하다니! 나로서는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설계도면은 건축주의 요구대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나는 그 집을 다시 설계하면서 비로소 생각했다.
‘대체 풍수지리란 무엇인가? 풍수지리가 현대 건축에도 필요한 것인가?’
그 당시엔 풍수지리의 이론이나 그 당위성에 대해 정확히 말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막연하게 미신으로 의심하면서 풍수에 따르면 ‘좋다’ 혹은 ‘나쁘다’는 생각만을 좇아 가고 있었다.
‘건축에 대한 전문가라면 건축에 관련된 모든 것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풍수지리가 건축에 관계된 이론이라면 풍수지리의 과학성과 미신성의 한계를 정확하게 구분하고, 합리적인 부분은 현대 건축에 적용하고 미신적인 부분은 배척해야 하는 게 당연하다.’
나는 비로소 풍수지리에 대해 그것이 미신이든 과학이든, 일단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 사무실에서 나의 주된 업무는 문화재관리국의 용역 업무로서, 경기도와 경상도에 분산되어 있는 오래된 문화재를 현장에서 실측하여 보수를 위한 설계서와 보수공사비 내역서를 작성하는 일이었다.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이 있는 경판고의 소방 시설이나, 경주 지역 문화재 주변에 철재 울타리나 담장을 설치하기 위한 현지 측량과 공사설계도 작성 등이 당시 내가 치른 일들 중 일부이다.
문화재를 조사하고 설계하면서 나는 ‘우리 조상들은 왜 풍수지리에 의해 건축을 했을까’
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하게 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풍수지리를 공부해야 했다. 풍수지리를 알아야만 우리 건축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당시엔 건축과 풍수지리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없었다. 혼자 풍수지리에 관한 책을 뒤적이는 게 전부였지만, 건축과 풍수와의 관계를 시원하게 답해 주는 내용은 단 한 줄도 없었다.
이후 나는 미군 극동지구 공병단(U.S. Army Engi-neer Distric Far East)으로 들어가 건축기사로 일하게 됐다. 이곳에서는 과학적이며 철저한 미국식 설계와 시공법, 합리적인 현장운영 방법 등을 배울 수 있었다. 또 전라북도 이리시에 있는 수출공단을 세울 때는, 일본인들과 함께 공단 내부에 건설되는 공장의 현장 감리로 근무하면서 일본의 선진 건축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선진 외국인들과 일을 하면서 느낀 것은, 그들과 당당하게 경쟁하기 위해서는 기술과 함께 우리 고유의 문화가 있어야 하며, 우리만의 건축 문화를 정립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것이었다.
2. 전통 건축과 풍수지리의 관계
1973년, 고려대학교 대학원 건축공학과에 입학하면서 나는 연구 분야를 ‘전통 건축’과 ‘풍수지리’로 정하고, 이를 집중적으로 연구해 나갔다. 실무에서 느낀 그동안의 것들을 이론적으로 확립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풍수지리에 관한 문헌들을 조사했다. 어려운 한문과 일본어로 된 자료들을 조사하기 위해 이 분야에 조예가 깊은 서정주 선생(경기고 13회)을 독선생으로 모셨다. 그러나 풍수지리 이론에 대한 타당성과 미신성의 한계를 정확하게 구분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석사 학위 논문을 작성할 때까지도 풍수지리 이론을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할지, 부정적으로 평가해야 할지조차 확신이 서지 않을 정도였다.
과연 문헌에 나와 있는 대로 명당이라는 것이 실재하는가? 산소 자리에 의해 후손이 발전하거나 망한다는 것은 사실인가? 건물에도 명당과 흉가가 있으며, 집의 기운에 의해 그곳에 사는 사람이 발전하거나 불행하게 될 수 있는 일인가?…. 이런 것들은 직접 확인하기 전에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당시 유명하다는 지관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이론과 실생활과의 합일성에 대해 직접 확인하는 작업을 했다. 그리고 여러 선생으로부터 동양철학을 사사하면서 동양철학을 통해 풍수를 해석해 보기도 했다.
아산 김병호 선생으로부터는 《주역》을 배웠다. 한 평생 《주역》만 공부하신 아산 선생은 야산의 제자로서, 그동안 단편적으로 공부한 동양철학의 진수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주셨다. 특히 《주역》의 괘사(卦辭)와 효사(爻辭)에 대한 해석은 매우 심오하여 나뿐만 아니라 수강생들이 모두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경험하곤 했다. 아산 선생은 나에게 중산(中山)이라는 호를 내리셨는데, 그것은 곧 시간의 중심을 잡고 이에 맞춰 움직이라는 뜻이었다.하지만 이런 공부들이 매우 흥미롭고 가치 있는 것이기는 했지만 풍수 이론을 납득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하남(河南) 장용득(張龍得) 선생을 만날 기회가 생겼다. 하남 선생은 지세를 분석하는 나름의 방법을 갖고, 음택이나 양택을 분석하는 체계를 갖고 있었다. 하남 선생의 이론으로 임의의 음택을 정해 풍수를 분석하고 그의 후손에게 확인한 결과 신기하게도 그것이 적중했다. 이런 과정을 몇 차례 거치고 나서 나는 비로소 풍수지리 이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게 되었으며, 그 확신을 갖고 석사 학위 논문인 <풍수지리와 건축 계획과의 관계에 관한 연구>에서 풍수지리의 이론을 긍정적으로 서술할 수 있었다.
이후 석사 과정을 마치고 건축설계사무소에 근무하면서, 나는 틈만 나면 풍수지리에 대한 이론을 연구하기 위해 산으로 들로 돌아다녔다. 특히 주말이나 공휴일이면 하남 선생과 그의 다른 제자들과 함께 전국의 수많은 산소들을 찾아다녔다. 지세를 분석하고 산소에 의한 후손들의 영향을 집중적으로 조사해, 지세 분석 이론의 정확성을 확인하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
양택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훌륭한 인물들의 생가와 그들이 거주하던 집, 그리고 우리 주변에서 잘되는 집안을 찾아보고 이곳의 지세와 건축적인 요소에 대한 이론을 분석했다.
흉가에 대한 조사는 신문에 흉사가 보도된 집들을 방문하여 조사했다. 금당 살인 사건(1970년대말 서울 인사동 골동품점 ‘금당’의 주인 내외와 운전수 유괴 살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살해당한 사람이 살던 집과 범인이 살던 집 등을 찾아가고, 토막 사건이 일어난 집, 빚쟁이를 죽여 정화조에 숨긴 집, 어린이가 유괘된 집, 일가가 교통사고로 죽은 집 등등, 사건이 신문에 보도되는 즉시 달려가 그 집의 풍수지리를 조사했다.
흉가 현장에서는 지세, 건물 형태와 방위, 내부 구조, 도로와의 관계, 대문의 위치와 방위, 주변 건물들의 조건 등을 조사했다.
이렇듯 흉가를 찾아다니면서 참으로 많은 일들을 겪었다. 한번은 서울 혜화동에 사는 한 학생이 친구들과 다투다 칼에 찔려 죽었다는 신문 기사를 읽었는데, 그리 흔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그 학생이 살던 집으로 가 보았다. 집은 아담한 일본식이었다. 골목 입구에서 봤을 때는 벽이 지붕까지 솟아 매우 높게 보였으며, 그 형태는 마치 칼과 같이 뾰족했다. 나는 이 집의 내부 구조와 죽은 학생이 이 집에서 언제부터 살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나는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 후 주인이 나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이 집의 풍수지리를 조사하러 왔습니다.”
딴에는 정중하게 말한다고 했는데,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 사람은 내 멱살을 잡고 위로 번쩍 치켜올리더니 내동댕이쳤다.
“남의 귀한 아들이 죽었는데 재수 없이 조사는 무슨 조사야!”
그러더니 쓰러져 있는 나에게 발길질을 했다. 나는 내동댕이쳐진 카메라와 가방을 주워 들고 정신없이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사실, 아들이 어처구니없이 죽은 상황에서 풍수니 뭐니 하면서 찾아온 사람을 반길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 역시 사람이 죽은 집을 조사할 때는 나도 모르게 머리카락이 삐죽삐죽 일어나는 듯해서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렇게라도 확인하지 않으면 풍수지리 이론은 그야말로 이론에 갇혀 있게 될 텐데.
하지만 현장에서 명당과 흉가의 원인을 밝혀낼 때의 그 신비와 감탄은 도저히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일이다.
3. 음택의 명당 자리에 땅을 파고 살다
음택과 양택 이론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를 하게 되자, 그렇다면 음택의 명당 자리에 음택과 동일한 구조를 하고 그 속에서 사람이 생활한다면 어떤 기운을 받게 될지 궁금했다. 그런데 이것은 직접 체험해 보지 않고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다.
1979년, 나는 서울 근교에 있는 사능 뒤편의 산 1,300평을 구입했다. 이곳은 주산과 청룡, 백호, 수구 등이 모두 갖추어진 보기 드문 명당이었다. 나는 이곳의 혈 자리에 묘자리와 같은 1.5미터 넓이로 땅을 파고 초가를 덮어 반지하의 움막집을 만들었다. 그리고 낮 동안에는 사무실이 있던 반포에서 근무를 하고, 밤에는 그곳 움막집에 가서 잠을 잤다.
산 사람이 무덤을 파고 그곳에 드러누워 밤마다 잠을 자다니…. 아마 모두들 어이없는 표정을 지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그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풍수의 세계,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직접 체험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보람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곳에서의 생활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어느 날 새벽, 움막을 나오려고 하는데 산이 떠나가도록 커다란 확성기 소리가 진동했다.
“너는 완전 포위됐다. 두 손을 머리 위로 들고 항복하라!”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인가. 깜짝 놀라 주변을 돌아보니, 동도 트기 전인 꼭두새벽에 청룡과 백호의 능선 위에는 총을 든 수많은 군인들이 움막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그들은 내 말을 믿지 않았다. 삼엄한 경비하에 파출소로 끌려가 신원이 밝혀진 후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깊은 산속에 움막을 지어 놓고 밤마다 들어와 잠을 자고 나가니까 군인들이 나를 간첩으로 오해했던 것이다.
나를 생포하려고 꽤 많은 군인들이 며칠 동안 밤을 새우며 포위 작전까지 펼쳤다는 말을 듣고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지만, 사전에 신고를 하지 않은 잘못은 인정해야 했다. 그런데 신원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집과 사무실로 연락이 되었는데, 이후 친지나 주변 사람들 모두가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게 되었다. 특히 아내와 친지들은 밤마다 산속에서 잠을 자고 다니는 나를 보며, 혹시 정신이상이라도 된 것이 아닌가 하고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었다. 얼마 후 나는 하는 수 없이 조사를 그만두기로 하고 움막 생활을 청산했다.
이 명당 자리는 이후 박정희 정권 당시의 최고 실력자에게 팔았는데, 그의 선친 산소를 이곳에 쓴 후 그 집안은 다른 정치가들과 다르게 아무 탈 없이 잘 지내고 있다.
4. 외국에서도 풍수 원칙은 똑같이 적용된다
1970년대 중반부터 불기 시작한 해외건설 붐은 많은 기술자를 요구했다. 그 중에서도 외국 건설공사의 실무 경험이 있는 나는 여러 건설 회사로부터 요청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나는 풍수지리에 푹 빠져 있었기 때문에 좋은 조건의 제의도 일언지하에 뿌리쳤다.
그러던 중, 풍수지리 이론이 외국에서는 어떻게 적용되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중국·일본·홍콩·대만·태국·인도·사우디아라비아 등의 동남 아시아와 중동 지역, 영국·프랑스·이탈리아 등 유럽도 비록 부분적이긴 하지만 조사를 했다.
런던의 지세를 근교에서 살펴볼 때의 일이다. 하나의 큰 산맥이 능선을 이루며 런던 시내 중심지로 연결되어 있어, 그 용이 연결된 지역을 계속 따라 내려갔더니 세인트 메리(ST. Merry)라는 큰 성당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성당 주변에는 공동묘지가 있었고, 공동묘지 한쪽에는 비석이 산더미같이 많았다. 성당 가까이에 도로가 생기는 바람에 묘지는 이장하고 비석만 별도로 쌓아 올린 것이었다. 성당 주변을 살펴보니 지세가 명당임에 틀림없었다.
천주교 성당 하실(下室)은 최고의 묘지로서 업적이 많은 신자의 묘지로 사용되며, 그 외의 일반 신자들은 교회 주변에 매장하는 것이 천주교식 장례법이다. 성당 위치가 명당이면 성당의 지하실이나 그 주변에 묘를 쓰는 신자들도 명당에 묻히게 되는 것이다.
세인트 메리 성당의 지세가 명당이므로, 성당 주변에 있는 묘지 역시 명당의 기운을 갖고 있다. 따라서 풍수지리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성당에 열심히 다니면 죽고 나서 명당에 묻히게 되는 셈이다.
그런데 신부들이나 서양 사람들이 풍수지리를 모를 텐데 어떻게 명당을 알아낼 수 있는 것일까. 나름대로 생각하기로는 성당을 신축할 때 좋은 터를 잡기 위해 많은 신부들이 오랜 기간 정성들여 기도를 하는데, 이러한 기도 덕택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홍콩이나 대만에서는 지관이 다른 어느 직업보다 고귀하고 소득이 높은 직업으로 존경받는다. 이들 나라에서는 장례식이 최고급으로 이루어지는데, 고인의 유산을 모두 장례비에 사용한다 해도 아무도 반대하지 못할 정도이다. 그것이 곧 고인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장례식의 모든 절차는 지관이 담당한다. 따라서 지관에 대한 예우가 매우 높지 않을 수 없다.
또 한 가지 예를 들어 본다. 여행을 하던 중 스위스에서 있었던 일이다. 호텔 주변에 있는 아담한 주택이 눈에 띄어 지세와 함께 패철로 그 집의 방위를 분석해 보았더니, 동향 집에 동향 대문이었다. 그때 마침 그 집 주인인 듯한 여자가 나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나는 풍수지리를 조사하기 위해 방위를 보았다고 말하고, 집안 내력을 물어 보았다. 지세와 방위 분석 결과로는 그 집에 아들이 없다고 나왔는데, 역시 그 집엔 아들이 없었다. 이러한 작은 사실을 통해 풍수지리 이론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두 적용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5. 풍수지리를 주제로 한 최초의 박사 학위
1983년, 나는 다시 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 과정에 입학했다. 미신으로 생각하기 쉬운 풍수지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학문의 대상으로 정립하기 위해서였다. 풍수지리를 학문화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고유한 사상을 점차 잃어버릴 것이 너무나 뻔한 일이었다.
연구 방향은 풍수지리를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공학적인 건축 이론을 체계화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연구를 위해서는 음택과 양택의 풍수지리 현장 답사를 많이 다니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산세를 분석하는 작업은 풍수지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면서도 상당히 어려운 작업이다.
만약 지세를 분석하는 능력 없이 풍수지리를 연구한다면 이것은 핵심을 잃은 학문이 된다.
그렇다고 풍수지리를 과거의 사상이나, 또는 음택과 양택의 입지 선정의 이론으로만 연구한다면 이것은 그야말로 지관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지세를 분석하는 능력은 물론, 풍수지리 이론에서부터 현대 건축을 만드는 새로운 건축 이론과 방법을 정립하는 것이 곧 나의 주된 연구 목적이 되었다.
운영하던 설계사무소 문을 닫고 연구에만 전념했지만, 학문의 문턱은 높기만 했다. 그동안 학위 논문의 대부분이 미국이나 일본 등 외국에서 연구된 자료의 일부분을 연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로, 일부에서는 미신으로까지 생각하고 있는 풍수지리를 건축학과 접목시켜 연구한다는 것 자체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동안 연구한 것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교내외 학술 발표회는 물론 교수와 선후배들에게 풍수지리 철학과 합리성, 그리고 풍수지리 연구의 필요성을 끊임없이 주장했다.
그러던 중 성균관대학교 건축공학과 이상해 교수가 미국 코넬대학에서 풍수지리를 연구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 교수를 찾아가 미국에서의 풍수지리 연구에 대한 자료와 함께 그분의 학위 논문을 여러 권 구입하여 학교 교수들에게 보였다.
이를 통해 학교측에서는 풍수지리에 관한 학위 논문을 심사하는 근거 자료를 갖게 됐고, 비로소 <풍수지리 발생 배경에 관한 분석 연구`─`건축에의 합리적인 적용을 위하여>라는 박사 학위 연구논문 심사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석사 과정 때부터 논문을 지도하던 이정덕 교수를 비롯하여 교내의 다른 두 분의 건축공학과 교수와 타대학의 교수 세 분이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었다. 물론 성균관대 이상해 교수도 논문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국내에서 풍수지리에 대한 박사 학위 논문을 심사하는 것이 처음 있는 일이었으므로 심사위원들의 지적 사항은 무척이나 엄격하고 철저했다. 자칫하다가는 미신을 조장하는 결과가 될지 모르기 때문인 듯했다.
3회에 걸친 공개 토론을 비롯하여 3개월간의 긴 연구논문 심사 결과, 드디어 심사위원 전원으로부터 합격 판정을 받았다. 1987년이었다. 1973년 대학원에 입학해 풍수지리를 연구하기 시작한 지 15년 만에 비로소 풍수지리를 연구 제목으로 하여 국내에서는 최초로 공학박사 학위를 받은 것이다. 나는 박사 학위를 받았다는 기쁨보다는 미신으로 여기기 쉬운 풍수지리를 연구와 학문의 대상으로 올려 놓았다는 점이 참으로 뿌듯했다.
이후 풍수지리 연구는 설계사무실에서 계속되었다. 풍수지리를 현대 건축의 계획 이론으로 정립하기 위해 연구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구는 풍수지리와 건축을 모두 이해하는 사람만이 수행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는 부탁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힘들고 외로운 세월이었다.
지금도 풍수지리와 건축은 나의 끊임없는 연구 대상이다. 지금까지 그 이론으로 집을 짓고, 그 집에서 살고 있는 이들이 행복한 웃음을 짓는 것을 나는 기쁨으로 여기며 살아왔다. 이것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6. 풍수지리는 왜 계속 연구되어야 하는가
한국은 오래 전에 풍수지리를 개발했고, 지금도 풍수지리가 가장 발달된 나라 중 하나이다.
풍수지리 이론에는 조상들의 소중한 지혜가 담겨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풍수지리를 미신쯤으로 생각하여 제대로 연구하는 풍토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침술은 우리 조상들이 개발한 의술 중 하나이다. 그러나 한동안 서양 의학만을 숭배하는 사람들에 의해 미신시되어 개발되지 않았고, 그 결과 중국과 같은 나라에 비해 학문적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풍수지리 역시 우리가 연구하고 개발하지 않는다면 역시 외국보다 뒤지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한국의 전통 사상인 풍수지리를 적극적으로 연구해야 하는 이유는 첫째, 역사와 전통사상 확립을 위해서이다. 한국의 역사는 풍수지리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이어졌다. 만일 풍수지리가 연구할 가치도 없는 미신이라면 우리의 역사 역시 미신이라고 부정해야 한다.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올바로 해석하고 정립하기 위해서는 풍수지리를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둘째,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야 할 신도시나 각종 단지들은 모두 일정한 산과 강물 사이의 땅에 자리잡게 된다. 산과 강, 땅은 각각의 기운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자연의 기운을 살펴서 국토를 개발한다면 자연의 기운을 무시하고 개발하는 것보다는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셋째, 최근까지 이루어 온 서양의 현대 건축은 비록 기계적·규모적인 면에서는 발전했지만, 인간적인 공간 창조라는 면에서는 실패를 거듭해 왔다. 현대 건축의 실패 원인은 공간을 생명이 없는 물질로 해석하는 서구식 철학에서 그 근원을 찾아야 한다. 따라서 공간을 생명력 있는 기운으로 해석하는 풍수지리의 공간 이론은 그동안의 잘못된 현대 건축 이론을 성공적으로 바꿀 수 있는 귀중한 이론이 된다.
넷째, 1980년대 중반에 서울대학교 지리학과 최창조 교수가 출간한 《풍수지리와 한국사상》은 그동안 사회 뒷면에 처져 있던 풍수지리를 한국의 대표적인 사상의 하나로 격상시켰다. 최 교수로 인해, 세계 각국의 지리학계에서는 풍수지리가 지리학을 규명하는 핵심적인 이론이 된다는 사실을 서서히 인정하고 있다. 전통적인 마을의 입지 조건은 풍수지리로 해석해야만 정확하게 분석되며, 다른 이론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따라서 인문지리학을 학문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풍수지리를 연구할 수밖에 없다.
다섯째, 우리 나라에서는 죽은 사람을 매장하는 풍습을 갖고 있다. 땅이 턱없이 부족해 정부에서는 적극적으로 화장을 권하지만, 실제 화장을 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산소 자리가 부족하다 보니 좋은 터를 묘지로 삼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농지로 사용될 수 없는 급한 경사지를 공동묘지로 개발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농지로 사용할 수 없었던 땅은 산소 자리로도 쓸 수 없는 땅이기 쉽다. 많은 사람들이 흉지에 조상의 묘를 쓴다면 개인은 물론 사회적으로도 불안하게 된다. 흉지에 조상을 모시는 것보다는 차라리 화장하는 것이 효도하는 일이다. 화장을 하게 되면 그 영향이 전혀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풍수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흉한 땅에 조상의 묘를 쓰지는 않을 것이며, 화장을 하는 사람들도 많아질 것이다. 그러다 보면 조상 묘를 잘못 써서 오는 개인적 불안이 없어질 것이고, 사회적 불안도 감소될 것이다.
여섯째, 풍수지리는 환경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최근 오염된 하천의 물고기가 기형으로 자라고, 화학공장 주변에 사는 사람이 괘질을 앓는 등 환경 문제가 더욱더 심각해지고 있다.
사람이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는 공기와 물을 깨끗하게 보전해야 하는데, 공기와 물은 곧 풍수이다. 풍수지리 이론에서는 벌써 오래 전부터 물이 인간의 생활에 가장 중요한 부분임을 강조하고 있다. 환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풍수지리 이론에 담겨진 공기와 물에 대한 선인들의 지혜를 찾아보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1970년대 중반, 임응승 신부는 단순히 흙 덩어리로 생각하던 땅 속에 수맥이 흐르고 있어, 그것에 의해 멀쩡해 보이는 집이 흉가가 된다고 주장하면서 그 관계를 자세하게 증명했다.
이후 주택이나 아파트의 잠자는 공간 밑으로 수맥이 흐르거나, 산소 자리에 물이 들거나 지나게 되면 그곳에 사는 사람 또는 후손에게 우환이 생긴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 확인됐다. 조상 묘가 잘못되면 후손에게 우환이 생긴다는 것이 점차적으로 증명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수맥이 지나는 곳에 동판을 깔면 수맥이 차단되고, 산소를 이장하거나 화장하면 앓고 있던 질병이 낫는다. 이것은 곧 산소나 집터에서 발생하는 기운이 사람의 질병을 발생시키므로, 풍수를 제대로 알면 질병을 이길 수 있게 된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또한 훌륭한 교육이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서, 사업이 잘되게 하기 위해서, 풍수지리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 지세가 명당인 곳에 명당 건축을 세운다면 훌륭한 학생들이 배출될 것이며, 사업이 잘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