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 가로수 (수수꽃다리) 허명례
붓자루 세워 놓은 것 같은
노랑머리숱 많은 그녀
부채 꼴 잎을 달고 종일 서있다
물들지 않은 잎이 하나도 없이
샛노란 정겨움은
책갈피 속 소녀처럼 숨었더니
묻어나는 향취가 묶은 와인 같다
풍장에 접힌 엽서 한 장
날 듯 말 듯 툇마루에 올려두고
바람이 다녀간 게야
새댁 때 입은 노란 앞치마처럼
네가 참 곱 구나
*프로필*
( 수수꽃다리) 허명례 시인 / 수필가
총회 신학대학원 졸
한국문인 시, 수필 등단
하나로 선 문학, 문학대상
경인 문학회 회원
글벗 문학회 회장
고운글 문학회 부회장
저서: 생활 잠언집
시집: 생각을 담아내는 향기 / 같이 산책하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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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밭에 간다
(수수꽃다리) 허명례
비 오는 날
생각이 뒤돌아보며 쏜살같이 달린다
이맘때였지
여름길목에 내리는 비는 잎을 푸르게 씻기고
여덟 살이었던가
이른 봉선화가 꽃필 준비 할 즈음
빗방울 맞는 작은 봉울이 애처로워
종이 고깔 씌워주며
애 끓이던
흔들리는 몸짓이 꽃밭에 있다
볼까지 물들었던 그 해의
머 언 흐름이
묶인 매듭 더미에
쭉정이 된 늙은 시간이 흘겨보고
꽂은 진지 오래다
먹 빛 하늘이 눈을 감고
빗소리의 질척임이 밤의 무희와 엉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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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곰이다
(수수꽃다리) 허명례
주황색 햇볕이 겨울을 밀어내고
연녹색 푸른 눈을 떠
여왕의 시대를 알린다
봄의 숨이 모이고
생명이 어우러져 다시
봄을 피운다
동물들 겨울잠을 자고 깨고
사람이 추위를 이기고 나면
저절로 봄이 오는 줄 알았다
맛있는 과일이 열리는 것은
나무가 죽지만 않으면
되는 줄 알고
계절이 오고 가며
세월을 끌어가지만
늙는 줄도 모르고 살았다
지나갔던 봄은 다시 또 오지만
후일을 말할 수 없는 것은
늘그막 한 고희에도 모르는 게 많아
지금은 한낮 봄날이 따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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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은가 보지
(수수꽃다리) 허명례
앙증맞은 제비꽃
잊지 않고 대문 옆에 해마다 핀다
흙도 없는 담 틈에서
진보라 꽃을 피워내는 작은 몸
당당함이 사랑스럽다
어떻게 너에게 보상할까
올해는 뭔가를 해야 할 것 같다
생각해 보니 네 모습
똘망한게 고집도 있었지
항상 그곳에만 있었다
누구와 닮은 것 같네
사람들은 들떠서 감탄했지
아유 예뻐 어떻게 여기서 피었어
그래, 내일은
널 만나서 꼭 물어봐야겠어
어떻게 여기서 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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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월
(수수꽃다리) 허명례
콧잔등 올라앉은 안경너머로
못에 걸린 붉은 팔월이
뜨거운 숨 `질을 한다
여름날 굼 불 지피듯
하늘땅이 지글지글 끓고
바람도 살랐는가
황금 재가 쏟아진다
사막 도마뱀처럼
온몸 던져 그늘을 찾는데
기절할 더위의 마력
갑자기 검불 베듯 자빠뜨려
솜털까지 태워버릴 겁박으로
데굴리며 익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