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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4호 (인조 별서유기비 은평구) 인조 별서유기비 시도유형문화재14호(은평구)
이 비석(碑石)은 조선(朝鮮) 제16대 인조(仁祖)(1623∼1649, 재위)가 즉위하기 전에 머물던 곳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광해군 15년(1623)에 일어난 인조반정(仁祖反正) 거사일(擧事日)(3월 12일)에 장단부사(長湍府使) 이서(李曙), 이천(伊川)의 이중로(李重老)의 군(軍)이 이곳에서 합류하고 홍제원(弘濟院)에서 김유(金유)의 군과 합세, 창의문(彰義門)을 통해 입성(入城), 능양군(綾陽君)의 친솔(親率)하에 거사를 성공했으며, 능양군(綾陽君)이 즉위하니 그가 인조(仁祖)이다. 일설에 이곳에서 합세할 때에 이서(李曙)의 군(軍)이 늦게 도착하였다 하여 연서(延曙)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보물 제1462호 인조별서유기비로 승격지정됨에 따라 2006년2월17일 해지.
부산시 유형문화재 제14호 (만덕사지 당간지주 북구) 만덕사지 당간지주 시도유형문화재14호(북구)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설치해 두는 것으로, 절에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 이곳에 당이라는 깃발을 걸어둔다. 이 깃발을 매달아두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이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드물게 당간이 있으나 대부분은 두 기둥만 남아 있다. 이 당간지주는 만덕동에서 제1 만덕터널로 들어가는 진입로 아래의 만덕사터에 서 있다. 두 기둥 중에서 한쪽 기둥만 남아 있으며, 기둥 옆으로는 당간의 받침돌로 보이는 작은 돌이 놓여 있다. 바깥면은 가운데에 도드라진 선을 한 줄 새겨놓았고, 안쪽면 꼭대기에는 네모난 홈을 파서 당간을 고정시키도록 하였다. 맨 위는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2단의 굴곡을 주면서 둥글게 깎아두었다. 각 부분의 돌을 다듬는 솜씨가 인근의 범어사 당간지주와 비교하여 매우 세련되어 있다. 비록 한쪽 기둥만 남아 있으나, 땅위에 드러난 높이가 길어 그 사이에 당간이 놓였다면 더욱 더 웅장했을 것으로 보인다. 만덕사가 창건된 시기와 때를 같이하여 고려 전기에 만든 것으로 보이며, 만덕사 옛터의 경계를 정하는데 있어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대구시 유형문화재14호(동화사 염불암 마애여래좌상 및 보살좌상 동구) 동화사 염불암 마애여래좌상 동화사 염불암 보살좌상 동화사 염불암 마애여래좌상 및 보살좌상 시도유형문화재14호(동구)
대구 팔공산 기슭의 동화사에 있는 불상으로 윗쪽이 뾰족한 삼각의 자연 암반 서쪽면과 남쪽면에 선으로 여래상과 보살상을 조각하였다. 서쪽면에 새겨진 높이 4m의 여래상은 연꽃이 새겨진 화려한 대좌(臺座) 위에 앉아있다. 얼굴은 네모나며, 눈은 가늘게 뜨고 있고, 입가에는 약간의 미소를 띠고 있다. 대좌의 높이에 비해 양 무릎이 넓게 표현되어 균형은 잡히지 않고 있으나 비교적 안정감을 보이고 있다. 신체는 복부아래에만 옷이 표현되어 있으며 비록 선으로 새겼지만 대좌의 정교한 수법이 주목된다. 높이 4.5m인 남쪽면의 보살상은 옷이 길게 흘러내려 양 무릎이 노출되지 않고 있다. 부채꼴 모양의 보관을 쓰고 있으며, 코와 입 사이가 짧아서 기형적인 인상을 주고 있다. 오른손은 복부에 평행으로 들어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꽃줄기를 잡고 있다.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14호(목조보살좌불상 연수구) 목조보살좌불상 시도유형문화재14호(연수구)
정확한 연대 측정은 어려우나 조선시대 불상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는 목조보살상이다. 머리에는 관(冠)을 쓰고 있고, 관 사이로 나온 머리카락은 어깨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얼굴은 표정이 사라져 매우 삭막해 보이며, 신체는 머리에 비해 작게 표현되어 비례가 맞지 않는다. 양 어깨를 감싼 옷은 두꺼워 보이고 옷주름은 간단하게 처리하였다. 이런 표현들은 조선시대에 들어 불상조각이 신앙심을 불러일으키는 예배 대상이기보다는 맹목적인 존경의 대상으로 변질되었음을 보여준다. 왼손을 잃어버렸고 오른손은 손가락이 깨져서 정확한 모양을 알아보기가 어렵다
대전시 유형문화재14호 (윤돈 등의 동복화회입의 대덕구) 증 참판부군 필적 윤돈 등의 동복화회입의 시도유형문화재14호 (대덕구)
조선시대 윤돈이라는 사람이 처가인 문화 유씨가문에서 토지와 노비 등 많은 재산을 분배받은 증서이다. 윤돈이 그 아들 윤창세에게 쓰게 하였고, 모두 3통을 작성하였으나 2통은 없어졌고, 1통만이 남아 있다. 윤돈은 파평 윤씨로 노성종파를 이룬 중시조로 전해져 온다. 증서의 내용으로 보아 조선시대에는 출가한 딸에게도 재산을 균등하게 나누어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문서는 당시의 조선시대 가족사 및 사회 모습을 알 수 있게 하는 주요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광주시 문화재14호(증심사 석조보살입상 동구) 증심사 석조보살입상 시도유형문화재14호(동구)
9세기 중엽에 철감선사가 창건한 증심사에 범자7층석탑과 나란히 서 있는 이 석상은 본래 담양군 남면 정곡리 서봉사터에 있던 것을 고(故) 현준호씨가 사재를 들여 이곳으로 옮겨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전체 높이 2.05m의 이 석불입상은 머리에 높은 원통형의 보관을 쓰고 있으며, 얼굴은 타원형으로 갸름하여 우아한 기품을 나타내고 있다. 목에 목걸이를 새겨 장식했으며, 옷은 왼쪽 어깨를 감싸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다. 손은 왼손을 굽혀서 왼쪽 가슴에 올려놓았고, 오른손은 편 채로 내려뜨려 오른쪽 대퇴부 바깥쪽으로 붙이고 있다. 원형의 대좌(臺座)는 상·중·하대석 및 지대석을 모두 갖추고 있으며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오대산 월정사 석조보살좌상(보물 제139호)과 같이 높은 원통형 보관을 쓰고 있다는 점이 특징인 이 석불입상은 세부표현이 간략해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울산시 문화재14호(부북일기 남구) 부북일기 시도유형문화재14호(남구)
부북일기(赴北日記)는 조선시대 선조~인조대에 무과에 급제한 울산출신의 무관 부자(夫子)가 함경도 회령지역에서 약 1년씩 부방(赴防)생활을 할 때 남긴 일기이다. 울산에서 회령까지 오가는 노정이 정확하게 기술된 무관일기로서 희소가치가 있으며, 당시 무인, 양반, 기생 등의 생활상을 밝혀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강원도 유형문화재14호(신흥사 극락보전 속초시) 신흥사 극락보전 시도유형문화재14호(속초시)
설악산 동쪽 기슭에 있는 신흥사의 본전(本殿)으로 조선 인조 25년(1647)에 처음 지어졌으며, 영조 26년(1750)과 순조 21년(1821)의 큰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잘 다듬어진 화강석으로 쌓은 높은 장대석 기단 위에 자연석 주초석을 두고 그랭이질한 후, 다시 그 위에 약간의 배흘림이 있는 둥근 기둥을 세웠다. 3출목의 공포에 앙서를 조성하고, 주두, 소로와 첨차 등에서 굽받침이 없이 아랫부분이 직면으로 비스듬히 잘린 조선시대 후기 건축의 일반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 전면 중앙의 꽃살 문양 문과 협칸의 빗살 문양 문이 돋보이며, 영조 37년(1761)에 다시 조성된 3계 5단의 전면 석계단은 진경 시대의 조각수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소맷돌을 용 모양으로 마감하고, 바깥 면에는 귀면 형태의 나어두와 삼태극 및 비운문 문양을 양각하고, 위아래로 안상대를 둘렀다. 사찰에 잘 쓰이지 않는 다양한 문양으로 만들어졌으나 그 조각이 뛰어나다. 조선 중기 이후에 조성된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모셔져 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14호(전적수사본 화성시) 전적수사본 시도유형문화재14호(화성시)
조선 정조 19년(1795)에 왕이 내린 불교식 가사(歌辭)로, 손으로 옮겨 적은 본이다. 원래의 명칭은 『어제화산용주사봉불기복게』인데, 화산의 용주사에 부처를 모시고 복을 기원하는 글이라는 뜻이다. 정조 13년(1789)에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양주 배봉산(지금의 서울 청량리 일대)에서 화성의 화산으로 옮겨 현륭원(顯隆園)이라 이름짓고 용주사를 건립하여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도록 하였다. 이 책은 바로 이때 용주사에 내린 것이다. 책은 전체 4부분으로 나뉘어 첫머리에 정조의 서문이 실려 있고, 초서 ·정종 ·결게 세부분에 불교 가사가 서술되어 있다. 각 조는 오언사구(五言四句)의 각 구절에 작은 글씨로 해석한 글이 붙어 있다. 용주사에 소장되어 있는 전적수사본(손으로 베껴쓴 책)외에도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어제화산용주산봉불기복게』가 소장되어 있다. 이 규장각 소장본은 태백산사고, 적성산사고, 오대산사고 등에 보관된 것으로, 용주사 소장본과는 약간 다르다. 규장각 소장본은 책이 아니라 31폭의 장첩으로(長帖:긴종이를 접어 책처럼 한 장씩 낱장으로 볼 수 있게 한 것), 글씨체도 다르게 보이며 한 행의 글자 수도 다르게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용주사 사본이 정조의 글씨인지 정밀조사가 요구된다.
유형문화재14호(손소선생 분재기 경주시) 손소선생 분재기 시도유형문화재14호(경주시)
조선 중종 5년(1510)에 손소(孫昭) 선생이 아들 손중돈(孫仲暾)을 비롯한 자녀 5남 2녀에게 재산을 분배해 주는 내용을 상세하게 기록한 재산 상속문서이다. 내용은 전답, 노비, 기타 재산의 내용으로 되어 있으며, 아들, 딸 구별없이 재산을 균등히 나누고 있다. 우리나라 재산상속은 부모가 죽고난 후 상속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자녀가 똑같이 재산을 상속하는 제도에서 점차적으로 장남을 우대하고 여타 자녀에게 불균등한 상속으로 바뀌어 오는데 이 문서는 자녀가 고루 균등히 재산을 분배하는 전형적인 상속문서이다. 분재기 끝에는 이언적을 비롯한 입회인이 직접 손으로 쓴 수결(지금의 서명)이 명시되어 있다. 이 상속문서는 전형적인 재산 균형분배의 문서기록으로 가족 및 친족제도사, 혼인사, 사회경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이 분재기와 함께 손씨가문에는 16세기 분재기 2점을 비롯한 많은 고문서가 소장되어 있다.
표충사 석등 시도유형문화재14호(밀양시)
표충사 경내에 삼층석탑(보물 제467호)과 함께 서 있는 석등으로, 원래부터 이곳에 있었던 것은 아닌 듯하다. 길쭉한 기둥 위에 받침돌,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 지붕돌을 차례대로 올린 일반적인 형태로, 각 부재가 8각을 이루고 있다. 윗받침돌은 연꽃을 새겨 장식하였고, 화사석은 4면에 창을 두었다. 지붕돌은 모서리 부분의 파손이 심하며 꼭대기에는 간략한 구조의 머리장식을 올리고 있다. 이 석등의 높이는 2.4m이다.
청주 용화사 칠존미륵불 시도유형문화재14호(청주시)
이 불상들은 원래 무심천(無心川) 냇가에 방치되어 있었으나 고종(高宗) 광무(光武) 5년(1901) 엄비(嚴妃)의 꿈에 의해 용화사(龍華寺)에 옮겨졌고, 1972년 현재의 미륵보전(彌勒寶殿)을 짓고 봉안(奉安)하였다. 5구(五軀)의 불상(佛像)과 2구(二軀)의 보살상(菩薩像)으로 된 이 칠존석불들은 모두 통견(通肩)의 법의(法衣)를 걸친 입상(立像)과 좌상(坐像)으로, 불신(佛身)이 우아하고 정제된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高麗時代)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최저 1.4m에서 최고 5.5m에 달하는 이 칠존불들은 현재는 모두 시멘트로 대좌를 만들어 안치(安置)하고 있는데 장륙불(丈六佛) 또는 그 이상의 거대한 불상이란 점과 함께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고 있어서 귀중한 고려불상(高麗佛像)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보물 제985호 지정 청주 용화사 석불상군으로 명칭변경되어 승격지정됨에 따라 1989년4월10일 해지.
동문리 오층석탑 및 당간지주 시도유형문화재14호(서산시)
이 유물들은 고려말에 큰 사찰이 있어서 대사동(大寺洞)이란 동명까지 붙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일명 대사동탑(大寺洞塔)이라는 오층석탑과 당간지주다. 현재 석탑의 총높이는 5m이며 이중기단에 탑신과 옥개석을 갖추고 있는데, 탑신은 3층까지만 남아있고 4층과 5층, 상륜부(相輪部) 등은 결실되었다. 각층 탑신에는 우주(隅柱)가 모각(模刻)되어 있으며, 옥개석은 4단받침에 전각(轉角)의 반전(反轉)이 있는 개석이다. 또한 이 탑과 같은 장소에 있는 당간지주는 탑과 같은 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두 지주가 마주 서 있으나 기단석의 매몰과 유실로 상태를 확인할 수 없다. 또한 두 지주의 높이가 각기 달라 한쪽은 3.96m이고 다른 한쪽은 3.81m이다. 정상부가 파손돼 없어져 총높이가 동일하지 않게 된 것으로 보인다. 시도유형문화재(충남) 제195호 서산 동문동 오층석탑과 제196호 서산 동문동 당간지주로 분리지정으로 2008년4월10일 해지.
선운사 석씨원류 시도유형문화재14호(고창군)
이 석씨원류의 목판은 선운사 관음전에 보관되어 있다. 석씨원류는 조선 성종 17년(1486)왕명에 의해 판각되었는데 임진왜란때 불타 없어졌으나 그후 사명대사가 일본에 갔다가 그곳에서 얻어 가지고 인조 26년(1648) 최서동과 해운법사가 이를 대본으로 하여 복간하였다. 이때 새긴 판각이 바로 오늘날까지 선운사에 보관되어 오고 있는 석씨원류 판각이다. 이 목판은 원래 103매 409판이었으나 모두 망실되고 현재는 62매 124판만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관관리되어 오고 있다. 각판의 앞뒷면에 모두 판각되어 있는데 하단에는 석씨원류 본문이 새겨져 있으며 상단에는 그 내용의 그림이 조각되어 있다. 판각의 크기는 가로 39cm, 세로 29.5cm이다. 이 석씨원류의 판각은 조선시대 삽화의 걸작중 걸작이며 우리나라 미술사 특히, 판화의 조각사에 있어 중요한 연구자료이다. 석씨원류란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기록한 판각이다.
광주 십신사지 석불 시도유형문화재14호(광주시)
이 석불은 대황사지(大皇寺址)에서 구(舊) 광주농고(光州農高)터로 옮겼다가 다시 이곳으로 옮겨 온 것이다. 8각 석주형(石柱形)의 이 석불은 얼굴과 손·옷주름·대좌(臺座) 등을 간신히 표현하였다. 머리는 민머리이나 보관(寶冠)을 썼던 것으로 보이며, 얼굴은 소략(疏略)한 모습으로 토속적(土俗的)인 수호신(守護神)의 표정을 짓고 있다. 신체는 통견(通肩)의 불의(佛衣)에 오른손은 보주(寶珠) 같은 것을 쥐고 있고, 왼손은 내려 가사(袈裟)를 잡고 있는데, 얼굴에 비해 경직(硬直)되고 퇴화(退化)된 모습이다. 대좌는 연화문(蓮華紋)과 화불(化佛)이 새겨져 있는데 역시 딱딱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이처럼 신체의 표현이 간략하고 괴체화(塊體化)된 거대한 석상(石像)으로 고려시대(高麗時代) 지방양식(地方樣式)을 잘 나타내는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 석비는 십신사지에서 전해오는 것으로 구 광주농고터에서 현 위치로 옮긴 것이다. 전라남도와 광주광역시 분리되면서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로2호로 지정됨에따라 1986년11월1일 해지.
제주 3읍도총지도 시도유형문화재14호(제주)
조선 후기인 1770년대에 제작된 제주도의 옛 지도이다. 제주도의 지도는 초기에는 둥근 감자형이었다가 점차 고구마형으로 바뀌는데, 이 지도는 위에 설명한 두가지 형태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한라산과 그 주변의 오름들을 입체화시켜 한라산의 웅장함을 강조하고 있으며, 한라산 봉우리의 명칭들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더욱이 제주가 섬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섬의 위치까지 적어 놓고 있다. 제주목, 대정현의 경계를 붉은선으로 표시하였고, 3읍의 연결도로망도 나타내었으며, 목장·과수원·포구 등의 명칭도 모두 적어 놓았다. 지도 주변에는 24방위가 표시되어 있으며, 전라도의 해남·강진·장흥과 그 주변의 일본·중국의 산동·양주· 항주 등지와 안남까지 자세히 표기하여 해도(海圖)의 기능까지 겸하고 있다. |
세종특별자치시 유형문화재14호
류형 장군 호패 세종특별자치시 유형문화재14호
소 재 지; | 충남 공주시 관광단지길 34(웅진동, 국립공주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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